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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거장

2014.04.30 23: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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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
클리퍼드 시맥, 안태민 옮김, 불새, 2013년 9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클리퍼드 시맥의 작품이 나온다는 소식에 소수의 SF팬은 환호했고 다수의 SF도 읽는 독자들은 그게 누구냐는 반응이었다. 불새의 1차 라인업 세 작품 중에서 하인라인이야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프리츠 라이버는 『아내가 마법을 쓴다(웅진 지식하우스, 2007)』가 나왔고 단편도 몇 작품 번역된 덕분에 인지도가 있는 작가다(사실은 D&D의 세계관 기반이 된 걸로도 유명한 파프르드와 그레이 마우저 시리즈가 대표작이라 판타지 쪽에서 더 알아주는 작가지만). 반면 클리퍼드 시맥은 SF&판타지 작가 협회에서 뽑은 그랜드 마스터(*1)임에도 번역 소개가 잘 안 된 탓에 인지도가 매우 낮다(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불새의 첫 출간작의 작가 세 사람이 다 그랜드 마스터다).
 외국의 거장이 우리나라에 늦게 소개되는 일은 SF만의 경우가 아니긴 하다. 실제 문학 쪽을 봐도 거의 소개가 안 되다가 노벨문학상 수상이 된 다음에야 활발히 번역 출간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그나마 소설 쪽은 수상 전에 한두 작이라도 나오긴 하지만 시 쪽은 수상 후에 처음 출간되는 작가도 있다).
 시맥의 경우는 2014년 현재까지 단 두 작품, 장편 『정거장』과 『SF 명예의 전당 1 : 전설의 밤(아이작 아시모프 외, 오멜라스, 2010)』에 수록된 단편 「허들링 플레이스」뿐이다. 그나마도 『정거장』은 1963년작이니 50년만에 겨우 번역 출간된 것이다. 그의 소개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대표작들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럼 작품으로 들어가서, 휴고상이나 그랜드 마스터라는 수식어에 너무 흥분하거나 기대를 품을 필요는 없다. 1960년대 고전이라는 점만 마음에 두면 된다. 그만큼 고전이 가진 장단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위엄과 아우라, 촌스러움과 식상함을 다 가지고 있다. 어느 부분에 주목할 것인지, 어디에 더 가치를 둘 것인지는 독자의 몫이다. 일단 가능한 공정하게 보려고 해도 아쉬운 부분은 장편 치고는 분량이 짧다는 점, 말초적이지 않은 대신 지나치게 정적인 점, 사변적인 만큼이나 교조적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우선 분량에 대해서는 아시아권보다 더 소설의 분량을 잘게 나누는 영미권(*2)에서도 장편으로 인정받았으니 수긍할 수밖에. 그런 점에서는 『화씨 451(레이 브래드버리, 황금가지, 2009)』이 연상되기도 한다. 다만 분량으로 따지자면 『빅 타임(프리츠 라이버, 불새, 2013)』이 더 짧은데 아마도 장편 최소분량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정적인 분위기는 무대가 한적한 시골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정거장에서 일어나는 떠들썩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주인공 에녹의 외로운 삶과 깊은 상념이다. 폐쇄된 공간 속에서도 얼마든지 동적이고 활기찬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외계인의 정거장’이라는 설정을 작가는 쓸쓸하게 채색하여 『철도원(아사다 지로, 문학동네, 1999)』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에녹의 회상을 통해 표현한 몇 안 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늙은 외계인의 죽음과 장례라는 점을 보면 그런 의도가 두드러진다.
 여기서 60년대 미국 작품이니 무대가 미국이고 주인공이 미국인이라는 점을 굳이 탓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외계인의 정거장 선정에 약간의 문을 품을 수는 있겠다. 조건이 우주를 이해하고 외계인을 믿으면서 외로이 홀로 떨어져 사는 사람이라면 동양에서 찾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작품에서 보면 이웃과의 마찰이 생기는 걸 봐서 그렇게 동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미국 작가이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냉전시대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는 관계로 주인공이 미국인일 수밖에 없는 필연을 강요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 결과 설정부터 내용까지 모두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리고 만다. 특히 인물의 성격과 사건의 해결에서 편의주의가 두드러진다.
 주위 인물들이 너무 착한 게 대표적인 요인인데 집배원이야 그렇다 치고 CIA요원 루이스가 고분고분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외계인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얻은 CIA가 이렇게 점잖고 얌전하기만 할까? 차라리 루이스가 외계인과 직접 교류한다든지 해서 그들 편이 된 다음에 상부의 명령에 반발하여 주인공을 돕는 편이 훨씬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싶다. 루시 아빠와 쥐새끼는 그냥 스테레오타입 악역일 뿐이니 더 언급하지 않겠다.
 또한 분량이 짧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전반 에녹의 회상은 늘어지고 후반부 진행은 급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된다는 느낌이다. 복선도 나름 있지만 지나치게 편리하게 들어맞아서 편의주의라는 비판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반면 이별로 끝나는 결말은 마치 대책 없는 해피엔딩을 거부하겠다는 듯한 작가의 선언처럼 여겨진다. 혹은 개인과 세계의 문제를 계속 추구했던 작품이니만큼 에녹과 세계의 행복을 맞바꾼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해석의 문제이니 맞고 틀림의 영역은 아니므로 이 정도에서 끝맺겠다.
 쓰고 보니 비판이 더 많은 것 같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고전을 늦게 접했을 때 어디에 주목하느냐는 독자의 취향과 선택에 달렸다. 시맥에게 영향을 받은 SF작가는 손으로도 못 꼽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그런 후대의 작가와 작품을 먼저 접했으니 반대로 원조가 촌스럽게 보이는 현상을 겪기가 쉬운 것이다(대표적으로 에드가 R. 버로우즈, 로드 던세이니, H.P. 러브크래프트 등을 늦게 읽은 독자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오늘날의 SF를 만든 그랜드 마스터의 한 사람, 시맥의 원전을 접했다는 것만으로도 후회 없는 독서가 될 것이다.



1. 그랜드마스터 전체 명단은 아래에서 볼 수 있음.
http://www.sfwa.org/grandmaster/
2. 우리나라, 일본 등 아시아권에서는 장편, 중편, 단편으로 나누는데(간혹 엽편이나 장편掌編도 있으나 널리 쓰이진 않고 보통 단편에 포함된다) 영미권에서는 novel, novella, novelette, short story 4단계로 나눈다. 휴고/네뷸러 상도 4종류에 수상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중편을 따로 수상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장편 아니면 단편이다(검색 결과 유일하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부문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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