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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컴퓨터 커넥션

2013.08.31 22: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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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커넥션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2013년 5월

 

잠본이 (zambony@hanmail.net http://zambony.egloos.com)

 

 

 에드워드 커즌은 우연한 사고로 크라카토아 화산의 분화에 말려들어서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을 한 뒤 자신이 불로불사의 몸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후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그는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빠진 이들과 친교를 맺고 새로운 멤버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엄청나게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죽음의 순간을 겪었다가 살아난 자는 그 충격으로 인해 세포 내의 노화 시스템이 무력화된다는 것을 밝혀낸 커즌은 가능한 한 잔인무도한 방법으로 후보자를 살해하여 자기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보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그랑 기뇰(*주1)' - 줄여서 '기그'라는 불명예스런 별명만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커즌은 새로 사귄 친구인 체로키족 과학자 게스 박사를 다음 목표로 점찍고 살해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미처 손대기도 전에 게스 박사는 실험 도중 발생한 뜻밖의 이변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쓰러지는데…

 앨프리드 베스터는 『파괴된 사나이』(1953), 『타이거! 타이거!』(1956) 등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SF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으나 1960년대 이후로는 여행 잡지 「홀리데이」의 편집 일과 TV쇼 각본 집필에 매진하는 바람에 몇 편의 단편과 서평을 제외하면 SF계에 대한 공헌은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71년에 「홀리데이」가 폐간되면서 실업자 신세가 된 베스터는 먹고 살 길을 고민하다가 결국 SF계로 복귀, 1975년에 간만의 장편으로 본서를 내놓았다.

 불로불사, 시간여행, 우주여행, 자웅동체의 신인류, 전 세계의 기계를 통제하는 컴퓨터 네트워크, 에너지를 흡수하는 외계 생명체, DNA 클론, 뇌에 이식하는 감시용 칩, 기업집단에 지배받는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진 미래국가, 스페인어와 흑인 영어가 뒤섞인 경박스런 공용어 등등 각종 익숙한 요소를 총동원하여 연속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파도 속에 독자를 빠뜨리고 마음껏 골려먹는 현란한 만화경 같은 작품이다. 작가의 초기 히트작들처럼 강렬한 개성의 주인공이 명확한 목적을 갖고 스릴 넘치는 모험을 벌이는 패턴을 기대했던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나사가 한 서너 개 정도 빠진 듯한 인물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벌이는 블랙 코미디로 점철되어 있다.

 새로운 불사인 후보로 떠올랐던 게스 박사가 기묘한 사건에 직면하여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은 뒤 불사인이 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운명의 장난으로 그의 두뇌가 글로벌 급 인공지능인 엑스트로컴퓨터와 동기화되는 바람에 커즌을 비롯한 불사인 모임의 회원들은 전례 없는 커다란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의 지배를 납득하지 못한 엑스트로컴퓨터는 게스 박사를 채널 삼아 전 세계의 기계들을 통제하는 네트워크를 꾸민 뒤 반란을 꾀하기 시작하고, 불사인들 중에서도 엑스트로컴퓨터와 손잡은 배반자가 나타나게 되면서, 상황은 최악의 결과를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커즌의 1인칭 시점에서 '어떻게 게스와 엑스트로컴퓨터의 연결을 끊고 배반자를 색출하여 사건을 수습할 것인가'라는 목표 하에 굴러가는데, 스토리의 허술함을 가리기 위해 참신한 아이디어와 소재를 과도하게 투입하고(이점은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인정했다.) 앞쪽에서는 언급조차 없었던 설정이나 인물이 중간 중간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는 등등 후기 베스터의 나쁜 버릇이 여과 없이 들어가 있어서 읽다 보면 어지럽기도 하고 초기 대표작과 비교해서 실망스러운 점도 적지 않다.

 초기 히트작 2개에 비하면 인물들이 개성과 병맛은 넘치는데 강렬하게 극을 이끌어 나가거나 독자를 확 휘어잡을 만한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다. 기그 선생은 자기 입으론 본의 아니게 연쇄살인마 됐다고 투덜대지만 실제로 극중에서는 살인미수 근처에도 못 가본 채 상황에 마구 휘둘리기만 하고, 그렇다고 게스 박사가 악당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게 그냥 자기 연구를 완성시키고 싶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컴퓨터와 완전히 한패가 된 것도 아니라서 혼자 자기는 어쩌면 좋을지 고민이나 실컷 하고 하여튼 되게 답답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진짜 악당도 별로 그렇게 납득이 가는 인물이 아니라서 아쉽다.

 하지만 현란한 타이포그래피(*주2)나 공감각(*주3)적 묘사 같은 베스터의 독특한 스타일은 여전히 살아있고, 진지한 SF가 아니라 괴짜들의 헛소동을 다룬 근미래 시트콤으로 생각하고 읽는다면 제법 유쾌하게 즐길 수 있다. 특히 카툰네트워크의 정신 사나운 병맛 카툰들이나 개그콘서트의 〈시청률의 제왕〉 코너(*주4)를 연상하며 읽는다면 꽤 잘 어울린다. 산만하고 어수선하지만 가끔씩 날카로운 예지가 번득이는 미래 묘사는 어째서 평론가들이 베스터를 사이버펑크의 원류 중 하나로 해석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남에게 권하기는 참 뭣하지만 전기 베스터와 후기 베스터를 가르는 분수령으로서는 나름대로 연구 가치가 있는 괴작(怪作)이라 할 만하다.

 


[주석]
*주1 - Grand Guignol :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 있었던 극장 이름으로 그로테스크한 공포 작품을 주로 취급했음.

*주2 - typography : 문자를 주요소로 하여 시각적으로 구성한 디자인.

*주3 - 共感覺 / synesthesia : 어떤 자극으로 한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을 일으키는 일. 또는 그렇게 일으켜진 감각. 예를 들면 소리를 들으면 빛깔이 느껴지는 것.

*주4 - 주인공 박 대표가 "자 우리 한번 시청률 팍팍 올려보자!" 하면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재미있는 요소 막 집어넣어 소비자의 흥미를 끄는 수법이 비슷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 "야! 뭐하는 거야? 불사신이 그렇게 건전하면 어떡해? 자 이쯤에서 간질병 발작! 살인 미수! 기물 파손!" "자 여기서 분위기 확 뒤집자! 우주 비행사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게 나타난다! 박사 뭐하냐? 뒷목 잡고 기절해야지!" "여자애가 너무 똑똑해서 다른 인물들이 돋보이질 않잖아. 쟤 퇴장시켜! 머리 위에서 뭐가 떨어지는 걸로 해!" "여기서 충격요법 들어간다! 주인공 아내가 탄 항공기 폭파시켜! 와장창! 그렇지!" "위성에서 원시인을 모셔왔다! 자 이쯤에서 수수께끼의 외계 생명체 등장!" "그리고 여기서 흑막이 튀어나온다! 알고 보니 그의 동기는!" 기타 등등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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