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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종말 문학 걸작선 1·2

2013.03.29 23: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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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 걸작선 1·2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조지훈 옮김, 황금가지, 2011년 10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이 쓰는 소설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등장인물이 동물이든 요정이든 로봇이든 외계인이든 예외는 아니다. 굳이 딱딱하게 비평적인 시선을 들이대어 알레고리나 풍자로 해석하려고 애쓰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상상력에 한계는 없다고 하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의 상상력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는 인간인 이상 버리려 해도 불가능할 것 같다.

 세계의 멸망과 인류의 종말을 다룬 ‘포스트 아포칼립스’, 속칭 종말물 역시 마찬가지다. 이름만 들으면 사람이 다 죽고 하나도 안 나올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실제로 인류가 사라지고 외계인이나 로봇이 텅 빈 세계를 무대로 등장하는 작품도 있긴 하지만, 실제 대다수의 종말물은 말이 종말이지 생존자가 있게 마련이다. 설령 인류가 사라지고 로봇이 등장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그건 결국 또 하나의,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다. 종말물은 이야기에서 인간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인간을 말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 두 권으로 나온 묵직한 단편 선집의 수록작 역시 대다수는 소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세상이 멸망해도 사람의 삶은 이어진다. 물론 개중에서는 정말로 인류가 멸종하여 새로운 후손 혹은 외계인 같은 다른 존재가 지구를 물려받는 이야기도 있고, 기존 문명이나 질서는 무너졌어도 멸망이라고 하기 어색할 정도로 인간의 개체수 자체는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후자는 사실 완전히 종말이라 이름 짓기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명의 멸망까지 포괄하고 있는 장르다. 대규모 핵폭발이나 운석 충돌과 같이 종래의 인류 문명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파멸적 상황 이후를 다뤘다면 이 역시 종말물에 넣을 수 있다.

 따라서 이전에 출간되었던 『최후의 날, 그 후(레이 브래드버리 외, 에코의 서재, 2007)』가 좋은 비교대상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선집의 수록작은 인류 자체의 멸망보다는 문명의 종말에 초점을 둔 작품이 많다. 또한 흑인이 세상을 지배하고 백인이 과거 흑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 대체 역사에 가까운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어 단순한 멸망만이 아니라 극단적 격변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울러 성찰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올지도 모를, 보통은 와서는 안 될 미래를 통해 인류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종말물을 교훈을 얻기 위해 읽는 이는 드물 것이다. 많은 작품이 환경 파괴와 핵전쟁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작가와 독자는 멸망한 세상에서 자신만은 살아남는 이야기에 매료된다. 엄밀하게 분석하진 않았으나 이 선집 수록작들은 절망적인 이야기와 희망적인 이야기의 비중이 비슷한 것 같다. 경고와 교훈을 노골적으로 드러난 글이 아주 적다는 건 말 할 필요도 없다. 극한적 상황, 절망적인 현실, 충격적인 변화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종말물을 읽고 즐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되리라 믿는다.


폭력의 종말 / 스티븐 킹
 종말의 원인과 과정을 상세히 풀어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드문 케이스. 물론 과거를 술회하는 방식이라 서술자는 이미 종말을 맞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인 세상의 멸망이 아니라 구성원인 인간만의 멸망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여러 모로 개성적이지만 단편집의 서두를 장식하기에 적절한 단편이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 / 파올로 바시갈루피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구세계의 생존자인 개의 이야기. 생존자인 신인류가 기술 편의적인 진화를 거쳐서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다만 미래 인류도 사람은 사람일 텐데 편하다고 해서 진흙을 즐겨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사람에게는 기능 못지않게 심미적인 요소도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물론 약으로 쓰기 위해 배설물을 이용하는 등의 예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어둡고 어두운 터널들 / 조지 R. R. 마틴
 마틴의 초기 작풍인 다크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실상 외계인과의 퍼스트 콘택트라는 소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인류의 몰이해 혹은 편견으로 인해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맞이하는 파국이라는 결말도 해당 서브장르에서 예상되는 전개 그대로다. 이름값을 감안하면 여러 모로 실망스러운데 아마도 작가의 초기작이 아닐까 짐작된다.

절망은 없다 / 잭 맥데빗
 다른 존재(재미의 반감을 막기 위해 밝히지 않겠다)와의 만남을 다룬 독특한 종말물. 다만 그 존재에게서 영미권의 독자가 느낄 충격과 감동을 우리 한국 독자가 똑같이 느낄 수 있을지는 전혀 자신할 수 없다. 일전 {링컨 열차([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 창비, 2009 수록)}와도 마찬가지로 문화적 차이로 인해 외국의 명작이 한국에서도 똑같이 평가받을 수 없다는 증거가 될 것 같다.

시스템 관리자들이 지구를 다스릴 때 / 코리 독토로
 상당히 인상적이고 독특한 이공계 우대(?) 종말소설. 세상이 멸망한다니까 사이버 공간에서 정부를 만들어 재건하겠다며 키보드를 토닥거리는 너드(nerd 서양 오타쿠)들이 귀엽다.

O-형의 최후 / 제임스 반 펠트
 전체적으로 평이하고 심심하다 싶었는데 인상적인 결말 덕분에 오래 기억에 남는 글이 되었다. 등장인물도 개성적이고 대화도 재치 있다. 카프리스가 조금만 더 귀여웠다면 라이트 노벨로 분류되어도 좋을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후의 심판 / 제리 올션
 종말 소설 카테고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특한 아이디어를 바탕에 둔 작품. 전 인류가 휴거로 사라지고 우주에 갔다 온 우주인들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등장인물들도 직접 언급하지만, 기독교를 믿는지 선한지 악한지에 상관없이 전부 사라진 이 현상이 인류에게 상인지 벌인지 알 수가 없다. 흠이 있다면 아무도 없다고 해서 혼자서 핵폭탄까지 멋대로 쏘는 부분은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점(무인 보안장치나 시건장치도 있을 것이고 조작방법도 어려울 텐데 어떻게 금방 다 해결했을까?).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의 종말 / 데일 베일리
 멸망의 원인은 알 수 없고, 주인공은 이유도 모르게 멀쩡히 생존했다. 멸망한 세계는 서정적으로 그려지고 주인공은 평범하고 시시하게 살아간다. 여러모로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세상의 마지막 밤}이 떠오르는데, 차이가 있다면 이쪽은 이미 멸망이 일어난 후라 그런지 더 허무하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는 점.

황혼의 노래 / 데이비드 그리가
 종말소설이라는 장르를 말할 때 누구나 가장 쉽게 떠올릴 만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진 단편. 멸망한 세계, 주인공은 폐허를 뒤져 음식이나 쓸 만한 걸 찾아 물물교환으로 생계를 잇는다. 문명이 파괴되면서 문화, 예술도 함께 사라졌고 야만인처럼 된 생존자는 문화와 예술을 비웃는다. 한 마디로 친숙한 만큼이나 평범한 내용. 차라리 서두에 배치해 입문용으로 두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개성적이고 독특한 글을 계속 읽다가 여기에 이르면 밋밋하고 시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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