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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송병선 옮김, 현대문학, 2019년 11월


많은 독자들이 그렇겠지만 필자 또한 카사레스라는 이름을 처음 안 계기는 보르헤스다. 보르헤스의 단편집 해설이나 논픽션 등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이름인데, 그에 따르면 카사레스는 보르헤스보다 많이 어리지만 보르헤스가 좋아하고 존경했던 동료 작가이며, 두 사람이 하나의 필명으로 함께 소설을 쓰고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영미권의 추리소설, 환상소설, 과학소설로부터 받은 영향을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녹여내어 높은 평가를 받은 작가. 이 정도가 읽기 전에 알고 있는 카사레스에 관한 사전정보였다.

카사레스의 장편소설 『모렐의 발명』은 필자 개인적으로 매우 큰 인상을 받은 작품이다. 솔직히 장르소설에 익숙한 독자 입장에서 재미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나, 대신 핵심 아이디어와 주제의식이 최고 수준의 SF라고 평가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필자가 쓴 소설에서 이 소재를 빌렸으며 작중에 ‘모렐’이라는 명칭까지 등장시킬 정도로 좋아한다. 단편집 『러시아 인형』도 읽었는데 솔직히 시간이 오래 지나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사람이 연어로 변하는 단편이 실렸다는 흐릿한 기억만 남았다.

마찬가지로 본 단편집도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장르소설의 작법을 쓰지 않기 때문에, 또한 등장인물 대다수가 20세기 아르헨티나를 사는 소시민이기 때문에 읽다가 중간중간 지루함을 느끼긴 했다. 그럼에도 여러 단편의 소재와 주제가 환상소설과 과학소설에서 사랑하는 것들로 담겨 있기에 놓치고 지나가기에 아까운 가치 있는 단편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 필자가 추천하는 단편을 골라서 소개한다.



하늘의 음모
비행할 때마다 평행세계로 이동한 공군 대위의 모험담. 다만 굳이 타인의 원고를 발견하여 공개한다는 액자구성, 그 원고의 시작이 아서왕 무덤을 찾는 켈트 전설로 시작한 것은 근대 고딕 소설의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괴담』 리뷰에서도 비슷한 형식의 작품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상하고 놀라운 이야기
악마와 결투를 한 사람 이야기. 처음에는 평범한 이야기인가 싶더니 마지막에 기이한 사건이 몰아치고 갑작스레 끝난다. 장르소설 작가라면 좀 더 긴장감 있게 구성을 짤 수 있었겠지만, 대신 이 단편은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해학적인 우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힘을 준 것 같다.

그늘 쪽
섬에서 만난 노인의 자칭 ‘소설 같은’ 이야기. 화재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사람과 고양이가 살아서 돌아온다. 더 무엇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오징어는 자기 먹물을 고른다
시골 마을에 외계인이 나타나지만, 독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짧고 허무한 소극(笑劇).

열망
영혼을 상자에 담는 기계에 관한 이야기. 형식도 내용도 과학소설이지만 가제트의 설정을 중심으로 두지는 않았다. 사진, 안테나, 음반 같은 예시를 들면서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20세기의 지식에 바탕을 둔 상상력으로 만들어졌음을 짐작게 한다. 사진을 찍히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속설에 익숙할 사람이라면 이해가 빠를지도.

위대한 세라핌
바닷가에서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이야기. 갑자기 나타난 바다의 신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그러나 이를 목격한 주인공 외의 사람들은 심드렁한 반응으로 일상을 보낼 뿐이다. 다만 냉소나 풍자라기보다 소시민의 안전불감증 같은 느낌이 든다. 한편 주석에 따르면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이 매스 스트랜딩(고래 떼가 해변으로 좌초된 현상)을 상상하면서 쓰게 되었다고 한다. 2019년 게임 〈데스 스트랜딩〉의 발상이 된 것으로 유명한 현상이라 아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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