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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정지인, 곰출판, 2021년 12월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는 줄어들지 않는다. 혼돈은 필연이다. 찰나를 사는 인간은 결코 이 법칙을 거슬러 존재할 수 없다. 알다시피 인간은 우주의 티끌이며,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다.'(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56쪽에 인용된 문장을 재인용)

보잘것없는 인간종의 한 개체로서 도무지 가늠할 길 없는 우주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의미란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완전히 무의미한 게 아닐까. 별로 대단치 않은 물음이다. 그리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대단치 않은 물음에 독특하게 과학적이면서 동시에 황홀할 정도로 낭만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이야기는 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따라 치밀하게 펼쳐진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 무한한 스펙트럼 위(혹은 바깥) 어딘가에 루이 아가시가 있었고,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이 있었다. 데이비드는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자 20세기 미국의 저명한 어류학자였다. 그의 스승이었던 루이 아가시는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데이비드는 '자연의 사다리'에 관한 스승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그것은 생물종들 사이에 뚜렷한 위계가 존재하며, 단일종이라도 게으름이나 의존성과 같은 일련의 부정적 요인들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보다 열등한 종으로 퇴화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영국의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1883년에 주창한 우생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는 우월한 유전자의 효율적 보존에서 더 나아가 열등한 유전자의 박멸, 즉 불임화를 역설했다. '데이비드는 사람들에게, 백치들은 모두 자기 핏줄의 마지막 세대가 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184쪽) '아버지가 잡초이고 어머니도 잡초인데 딸에게 사프란 뿌리가 되기를 기대하는가?'(190쪽) 이러한 관점은 미국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획득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생학의 제도화 측면에서 한때 미국은 나치 독일보다도 앞선 나라였다.

인간은 존엄한가. 우주적 혼돈의 규모를 고려하면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 위에 인간이 세운 질서는 너무나도 미미하며, 그들의 자의식 또한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들이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여기는지 아닌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과학자인 저자의 아버지가 말했듯 인간의 삶에 의미는 없고, 신도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명제가 일종의 허구적인 믿음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뼛속까지 과학자였던 데이비드의 우생학적 학살에도 면죄부가 주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다름 아닌 과학의 이름으로. 실제로 미국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을 따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자연물과 기념물이 아직도 많이 있다.

룰루 밀러는 이 아이러니를 깊이 파고든다. 인간은 무질서한 자연에 기준을 세우고 이름을 붙여 질서를 만들어내고 의미를 부여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평생에 걸쳐 해온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가 세우려 한 질서란 언제나 뚜렷한 생물학적 위계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물고기의 표본을 수집해 거기에 이름표를 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수십 년 동안 공들여 수집해온 표본들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 무참히 흩뿌려지고 만다. 인간은 혼돈 앞에서 한낱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라는 극적인 암시의 순간에도 데이비드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그 와중에 식별 가능한 물고기의 시체에 바늘과 실로 이름표를 꿰매는 식으로 복구를 시도한 것이다. 그렇게 존재의 의미는 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서 되살아나는 듯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쌓은 물고기라는 범주가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는 한낱 오류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엉뚱한 소리 같기도 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진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는 혼돈과 질서, 신성과 인간성의 대립으로만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물고기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단단히 고정시키려 했던 자연의 사다리 역시 일종의 허구적 믿음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물고기, 즉 어류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책으로 확인하시기를.) 그토록 오랫동안 진실로 여겨졌던 분기학의 한 토대가 허물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저자는 인간의 의미 또한 과학적 인식론의 경계 너머에 존재할 가능성을 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명명(또는 자연의 사다리에 관한 그의 주장)은 어류라는 범주가 완전히 폐기된 이후에도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들은 얼마만큼 진실이며 언제까지 유효할까. 결국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경험적 현실 속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를 기어이 찾아내고 만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인간의 승리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아직 닿지 못한 영역이 있다는 명백한 진실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오는 생의 감각에 가까울 뿐이다. 인간의 과학은 최종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고, 그 테두리 안에서 규정된 생의 의미 또한 불완전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그러니 닿지 못한 사실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할까. 살아있음을 덮어놓고 예찬하지 않으면서도 관계의 아름다움을 완만한 곡선으로 그려내고, 끝내는 자기 삶의 의미와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저자의 태도는 그래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룰루 밀러는 이것을 '물고기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와 조르다노 브루노, 갈릴레오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별을 포기하고 우주를 얻었다.'(247-248쪽) 이제 물고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무엇을 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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