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x9788954672214.jpg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문학동네, 2020년 6월

가끔 그런 게 궁금하다. 나는 왜 이런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철학적인 고민은 아니다. 나는 무슨 인간 존재의 근원을 사색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정체성의 뿌리를 한 번쯤 가볍게 상상해보고 있을 뿐이다. 나의 어떤 면은 부모나 조부모에게서 물려받았을 테고, 어떤 면은 형제자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살면서 지인이나 동경하는 누군가를 닮아간 면이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정말로 닮고 싶지 않았으나 닮게 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면은 온전히 내 안에서 피어난 것일지도. 나를 이루는 여러 가지 정체성 중 어떤 것은 아름답고 어떤 것은 추하다. 그 말은 곧 내게 미추의 관념이 있고, 그에 따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추함을 품고 산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인간이 지닌 정체성의 계보를 거슬러 추적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나는 과연 어느 시점의 누구에게서 내 안의 조그만 조각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대체 나는 누구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기에 하필 지금 이런 글을 쓰는가.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막연한 질문을 바위처럼 단단한 실체로 붙잡아둔다. '심시선'이란 인물은 현실에 존재한 적이 없음에도 독자는 그의 존재와 그가 이곳에 남긴 유산을 내내 되뇌게 된다.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시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 그런 시선이 단지 허구의 인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지금 내가 이곳에 실존한다는 근거 또한 얼마간 흐릿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시선은 높지막한 나무를 사시사철 힘 있게 받쳐 세우는 뿌리이며, 시선의 가족은 그 뿌리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이고 잎이고 꽃이다.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꽃이며 잎이며 가지일 독자에게, 이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을 지탱하는 뿌리를 가만히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제사에 관한 대화로부터 시작한다. 시선은 생전에 한 TV토론에 출연해서 한국의 제사 문화에 단호히 반대한 적이 있지만, 큰딸 명혜는 시선의 십 주기에 맞추어 엄마의 제사를 지내겠다고 말한다. 제사 지내지 말라던 시선의 당부를 벌써 잊은 걸까.

"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11쪽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83쪽

시선을 기리는 제사는 가족들이 각자 자기만의 스타일로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담아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가족에게 제사란 산자를 위한 의식이다. 시선은 그를 사랑했던 가족의 기억 속에서만 오롯이 추모될 수 있으므로, 제사의 본질은 떠난 이가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마음에 있다. 누군가는 이것이 전통적인 제사의 본질에 어긋난다며 비난하거나 반대로 이색적이고 참신한 방법이라며 호들갑을 떨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고인을 기리기 위해 삶의 아름다운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즉,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가 아니다. 이 맥락에서 가족들은 제사 지내지 말라던 시선의 당부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시선의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우리 자신의 삶이고, 경험이고, 아름다움이니까. 시선의 생각은 이렇듯 남겨진 가족들에 의해 구체화된다.

하와이는 시선이 젊었을 때 머물렀던 곳이다. 시선은 한국전쟁 때 가족을 잃고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한 화가를 만나 독일로 갔다. 화가는 유명하고 힘 있는 인물이었고, 자신의 욕망을 폭력적으로 분출하는 사람이었다. 시선은 뒤셀도르프에서 한참을 그의 폭력에 종속되어 있다가 첫 번째 남편 요제프 리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했다. 시선이 떠난 뒤 화가는 곧 자살했고, 유럽의 예술계는 그 책임을 시선에게 돌리며 증오했다. 당시 파리에 있던 지인에게 의탁해 잠시 몸을 숨긴 시선은 쫓기듯 한국행을 택했다. 이후 시선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딸 셋과 아들 하나, 손녀 넷과 손자 하나를 두었다.

그런 시선을 기리기 위해 가족들은 하와이 땅을 오랫동안 걷고, 훌라와 서핑을 배우고, 새와 무지개를 찾아다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팬케이크와 도넛을 나누어 먹는다.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이들이 나누는 말들 안에는 시선의 생각과 흔적이 켜켜이 스며 있다. 하지만 꽃은 뿌리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자식과 손주들의 정체성은 시선의 것과 같지 않다. 시선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빛깔로 반짝이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시선은 갖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사랑하며 살았는데, 어쩌면 그 자손들이 품고 있는 사랑의 뿌리도 시선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시선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내려온 듯 보이는 사랑의 계보는, 그의 다음 세대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의 시선에 맞닿으며 특유의 온기를 얻는다. 작가의 표현대로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 아니던가. 우리는 모두 이전에 존재했던 사랑의 산물이면서,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할 만큼의 사랑을 품고 있는 존재이다.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태초의 무한한 경우의 수에서 내 정체성으로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기적적인 끈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시선은 자기 삶을 통해 그것을 몸소 증명해낸 인물이다. 그는 다음 세대 모두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의 계보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나를 이루는 여러 가지 정체성 중 어떤 것은 아름답고 어떤 것은 추하다. 때로 비루한 현실에 묶인 내 모습의 일부가 못내 추하더라도 무언가를 계속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세계 곳곳에 기적과도 같이 뿌리내린 따뜻한 시선들 덕분이 아닐까.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7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7.15
소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 이상하고 놀라운 이야기들 2022.07.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6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6.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5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5.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4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4.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3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3.15
비소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닿지 못한 사실들 앞에서 2022.03.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2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2.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1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1.15
소설 『분리된 기억의 세계』 - 십 분마다 설계되는 당신의 미래에서 2022.01.14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2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2.16
소설 『금성 탐험대』 - 오래된 미래, 오지 않은 미래 2021.12.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1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1.15
소설 『시선으로부터』 - 사랑의 계보 2021.11.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0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0.15
소설 『시녀 이야기』 - 여성 디스토피아의 오래된 표본 2021.10.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9월 이달의 거울 픽 2021.09.15
소설 『ㅁㅇㅇㅅ』 - 그래도 SF는 어렵다고 말하는 그대에게 2021.09.15
소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 인간의 의미 2021.08.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8월 이달의 거울 픽 2021.08.14
Prev 1 2 3 4 5 6 7 8 9 10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