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x9791158887162.jpg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장성주, 황금가지, 2020년 7월

길고 독특한 제목이 인상적인 켄 리우의 소설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는 12편의 중단편 작품이 실려있다. 이야기들은 지금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과 삶, 그리고 그 너머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고는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첫 작품 「호(弧)」는 책에 실린 열두 편 가운데 영상화에 가장 적합해 보인다. 주인공 '레나 오젠'은 열여섯 살 때 맏아들 '찰리'를 낳았다. 그리고 100년 후에 막내딸 '세라'를 낳았다. 처음 아들을 낳았을 때, 기대했던 뭉클한 감각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기 아빠 '채드'는 책임을 부정하고 대학으로 떠났고, 레나도 부모님 집 현관에 아기를 눕혀놓고는 얼마 전에 만난 다른 남자 '제임스'의 차를 타고 가버렸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고 말하던 제임스는 4년 뒤에 레나를 떠난다. 이 이야기의 도입부는 준비되지 않은 개인들의 만남과 이별을 빠르게 번갈아 보여준다. 만남이 꼭 희망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고 이별이 반드시 절망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한 시기를 채우거나 비우는 이벤트에 더 가깝다.

다시 혼자가 된 레나는 '보디워크스'라는 회사에 들어가 시신의 세포 조직을 변형시켜 산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플라스티네이션' 작업을 배운다. 서른다섯 살에 아트디렉터로 승진한 레나는, 죽은 갓난아기의 시신 작업을 의뢰받고 일을 그만둔다. 그때 회사 설립자의 아들 '존'이 찾아와 위로를 건네며 그동안 시신만을 대상으로 했던 신체 보존 작업을 산 채로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레나에게 알려준다. 레나는 존의 실험 장치를 통해 서른 살의 신체를 영원히 유지하는 삶을 갖게 되고,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이 시점 이후 영원한 젊음은 부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술적 옵션이 되지만, 존은 유전적 결함으로 시술 후 되려 노화가 촉진되어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존이 죽기 전에 냉동 보관한 정자로 임신을 한 71세의 젊은 레나에게 어느덧 50대 중반이 된 맏아들 찰리가 찾아온다. 영생을 소유한 뒤에도 만남과 관계, 그리고 이별이 그리는 기다란 호(弧)는 언제나 레나의 인생과 함께 한다. 어쩌면 인간 존재의 본질은 삶과 죽음의 경계보다도 활처럼 완만하게 그려지는 곡선에 있는 게 아닐까.

이야기의 결말에서 레나는 막내딸 '세라'를 낳은 뒤 신체 재생을 중단한다. 맏딸 '캐시'의 말대로 '영원히 살 기회를 얻은 최초의 여성'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회를 포기한 최초의 여성'이 된 것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치명적인 권태가 낳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 한 인간의 필연적인 결정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레나의 인생이 그려내는 기다란 곡선은 우리 눈에 아름다워 보인다. 그건 모든 사라질 것들에 대한 경의이자 시대에 앞서 보내는 애도이다.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싱귤래리티 3부작, 「카르타고의 장미」, 「뒤에 남은 사람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하나의 시간선 위에 놓인 이야기다. 「카르타고의 장미」에서 에이미는 동생 리즈의 얼핏 무모해 보였던 여정을 회상한다. 리즈는 대학 졸업 후 '로고리즘스'라는 인공지능 컨설팅 회사에 입사해 세계 곳곳을 누볐다. '여행은 정신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이라던 리즈는 급기야 인간 몸의 불완전함을 역설하기에 이른다. 그러고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데스티니 프로젝트'를 통해 자기 두뇌를 복사하여 몸에서 벗어날 계획을 설명한다. 오로지 정신으로서만 존재하는 인간에 관한 상상은 「뒤에 남은 사람들」에서 보다 현실화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육체를 버리고 자기 정신을 기계에 업로드하여 영원히 사는 삶을 택했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을 '망자'라고 부르며 대를 이어 자기네 방식을 고수한다. '루시'는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 디지털 세상으로 건너가고 싶지만 완강한 아빠 때문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결국 루시는 엄마와 고모의 도움을 받아 남자 친구 '잭'과 함께 비밀리에 떠날 계획을 세운다. 이 작품은 이렇듯 싱귤래리티 원년 이후 사람들이 디지털 세계로 이주하는 초기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싱귤래리티 3부작의 마지막이면서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이주가 완료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전작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곳은 '망자'들의 디지털 세계다. 이곳의 사람들은 생각만으로 타인과 소통하면서 싱귤래리티 이전의 지구인을 '고대인'이라 부른다. 주인공 '르네'의 엄마는 고대인이다. 엄마는 데이터 센터에 접속하여 르네를 찾아와 자신이 곧 외계 행성으로 영원히 떠날 거라고 말한다. 슬퍼하는 르네에게 엄마는 마지막으로 '진짜' 여행을 가자고 권한다. 이 감각적인 지구 여행에서 모녀는 오래된 도시의 잔해와 그 위를 떠도는 순록 떼, 높이 자란 나무 숲을 보며 생각을 공유한다. 르네는 디지털 세계에서 이 현실을 완벽히 재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엄마는 그저 담담하다. "스스로는 그게 진짜가 아닌 걸 알잖아.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 이 세 편의 소설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신세계를 향한 동경과 갈망, 반대로 이 땅에 몸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존재들에 대한 낭만과 예찬은 저마다 대체할 수 없는 감각적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독자에게 특정한 판단을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이 3부작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 이 책의 값어치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심신오행(心神五行)」의 제목에서 '신'은 혼령이나 정신을 뜻하는 '귀신 신神'자를 쓴다. 원제 'The Five Elements of the Heart Mind'에서 느끼기 어려운 뉘앙스가 한자를 통해 더 잘 드러나는 제목이다. 이야기는 우주에서 52일째 표류 중인 '타이라'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타이라는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고도 문명 세계 출신 연구관이다. 죽어가던 타이라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구명정에 남은 동력을 끌어모아 초공간 도약을 실행하고 다행히 생명체가 있는 미개척 행성에 떨어진다. 이 행성의 주민들과 생활하는 동안 타이라의 이성과 과학에 대한 믿음은 조금씩 희미해진다. 인공지능의 분석 결과 이곳의 주민이 사용하는 언어는 표준 영어에서 갈라져 나온지 1000년도 넘은 방언이고, 이들의 선조는 중국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설정이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선 타이라는 데이터에 근거한 과학적 검증 대신 단순한 직감으로 결정을 내리는데, 그 무모하고 비합리적인 선택마저도 옹호하고 싶은 이유는 독자인 우리도 그와 같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작가의 노출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바로 「모든 맛을 한 그릇에―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이다. 오늘날의 세계사는 사실상 유럽사나 다름없는데, 만약 그 자리를 중국사가 차지했더라면 관우는 분명 걸출한 화가들에 의해 성화로 묘사되어 전 세계의 미술관을 장식했을 인물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 '골드러시' 시대에 미국 아이다호에서 힘겹게 살았던 실제 중국인의 역사를 관우의 일대기에 빗대어 묘사한다. 중국에서 온 '로건(라오관)'은 관우를 연상케 하는 면모를 여럿 가지고 있고, 이야기는 그를 중심으로 세 개의 플롯을 펼쳐 보인다. 어린 '릴리'가 미국인으로서 바라보는 중국계 이민자들의 삶이 첫 번째 플롯이고, 로건이 릴리에게 들려주는 군신 관우의 삶이 두 번째 플롯이며, 로건 자신의 삶이 세 번째 플롯이다. 결말에서는 세 개의 플롯이 로건의 삶, 즉 실제 역사를 중심으로 수렴한다. 이 작품은 이 책에서 가장 긴 작품이기도 하다.

「달을 향하여」에서도 중국계 이민자가 겪는 고충이 기발한 방법으로 묘사된다. 중국인 '장원차오'의 망명 신청 무료 변론을 맡은 변호사 '샐리'는 ―당연하게도―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장원차오가 중국에서 겪었다고 주장하는 잔혹한 탄압이 모두 사실일 거라고 믿었던 샐리는 그중 일부가 과장, 왜곡되었음을 뒤늦게 알고 분노와 실망감을 느낀다. 하지만 미국은 애초에 어딘가로부터 쫓겨온 이민자들의 나라가 아니던가. 쫓겨날 때의 에피소드 몇 개쯤 윤색한다고 해서 이제와 기겁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결국 이들의 이야기도 작가들의 소설과 다를 바 없다. 동화 속 달나라에서 만난 제천대성의 말대로, '이곳은 사기꾼과 재담꾼, 협잡꾼, 몽상가, 거짓말쟁이들의 땅'이다. 바로 그들이 있기에 미국은, 그리고 이야기꾼들의 세계는 언제까지라도 찬란할 수 있는 것이다.

「매듭 묶기」는 중국의 고산 지대에 위치한 마을에 사는 '난족'의 촌장 '소에보'의 이야기이다. 정기적으로 마을에 물건을 사러 오는 미얀마 상인 '파'는 어느 날 미국인 '토무'를 데려온다. 토무는 난치병 치료를 위한 신약 개발 연구차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 한편 소에보는 부족에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매듭 문자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매듭을 지어 의미를 형성하는 그의 감각은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교하다. 토무는 그에게서, 매듭 모양의 아미노산을 특정한 형태로 접는 알고리즘을 개발하여 약학 연구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킬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러고는 마을의 농업 생산성을 늘려줄 신품종 볍씨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소에보에게 연구 협조를 요청한다. 소에보가 해야 할 일이란, 그저 연구팀의 요청에 따라 이러저러한 모양의 매듭을 만드는 것뿐이다. 소에보는 미국에 가서 신약 개발 연구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마을은 신품종 벼를 재배하여 풍년을 맞게 된다. 하지만 둘의 교환은 공정하지 않다. 매듭 기술을 활용한 신약 개발은 토무의 연구 성과로 인정받아 특허 신청까지 내게 되었지만, 난족이 받은 신품종 볍씨는 수확 후에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매년 새로 사야 한다. 이야기는 문명화의 정도가 서로 다른 두 주체가 앞서가는 쪽의 논리로 비대칭 계약을 맺는 관행의 부조리함을 말하면서, 세계적으로 눈부신 성과의 이면에 존재했을 착취의 역사를 도식화하여 조명한다.

「사랑의 알고리즘」은 인간의 이상적인 감정 반응을 완벽한 알고리즘으로 구현한 상황을 가정한다. 상대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그 사랑을 100% 확신할 수 있다. 그 사랑의 동력은 알고리즘에 근거하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100%의 확률로 예측 가능한 사랑도 사랑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인공 '엘레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만조(滿潮)」와 「곁」, 그리고 「내 어머니의 기억」은 짧고 강렬한 단편들이다. 「만조(滿潮)」에서는 하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달이 거대한 밀물을 만들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외계로 떠났지만 '엘로디'의 아빠는 밀물에 휩쓸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구에 탑을 쌓고 살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한계에 이르자 아빠는 엘로디를 외계로 떠나보낸다. 누군가를 반드시 떠나보내야 하면서도 자신만은 끝내 떠날 수 없는 한 인간을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낸 「만조(滿潮)」는 이 책에 실린 소설 중 가장 낭만적인 이야기다. 「곁」은 특이하게도 2인칭, 즉 '당신'을 주인공으로 한다. 어머니의 병실에는 로봇이 있어 미국에 사는 당신이 언제든 원격으로 접속하여 면회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당신은 대륙 간 물리적 장벽을 넘어 어머니의 손톱까지도 잘라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좁힐 수 없는 공백을 느낀다. 당신이 접속한 기술적 공간에서, 당신은 정말로 어머니의 '곁'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어머니의 기억」에는 빛의 속도로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비행사 엄마가 등장한다. 불치병에 걸린 엄마에게 남은 절대적 시간의 양은 고작 2년이라 딸 '에이미'의 성장 과정을 간헐적으로나마 지켜보기 위해서는 우주여행으로 시간의 밀도를 달리하는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는 에이미가 열 살, 열일곱 살, 서른여덟 살, 여든 살에 각각 만난 엄마의 변치 않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갈망해왔지만 가능한 방법이 없어 망설였던 이미지를, 이 작품은 이렇듯 담담히 실현시킨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7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7.15
소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 이상하고 놀라운 이야기들 2022.07.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6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6.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5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5.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4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4.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3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3.15
비소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닿지 못한 사실들 앞에서 2022.03.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2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2.15
이달의 거울 픽 2022년 1월 이달의 거울 픽 2022.01.15
소설 『분리된 기억의 세계』 - 십 분마다 설계되는 당신의 미래에서 2022.01.14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2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2.16
소설 『금성 탐험대』 - 오래된 미래, 오지 않은 미래 2021.12.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1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1.15
소설 『시선으로부터』 - 사랑의 계보 2021.11.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10월 이달의 거울 픽 2021.10.15
소설 『시녀 이야기』 - 여성 디스토피아의 오래된 표본 2021.10.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9월 이달의 거울 픽 2021.09.15
소설 『ㅁㅇㅇㅅ』 - 그래도 SF는 어렵다고 말하는 그대에게 2021.09.15
소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 인간의 의미 2021.08.15
이달의 거울 픽 2021년 8월 이달의 거울 픽 2021.08.14
Prev 1 2 3 4 5 6 7 8 9 10 ... 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