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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황윤영 옮김, f(에프), 2018년 11월


본작은 1950년에서 60년대에 걸쳐 쓴 보니것의 초기 단편을 수록한 단편집이다. 알려져 있듯이 커트 보니것은 1963년작 장편소설 『고양이 요람』이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학위도 수여받고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으며 1969년작 장편소설 『제5도살장』을 기점으로 장르를 떠나 미국 문학계의 거장으로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본작 수록작들은 유명해지기 이전, 특히 3류 SF작가였던 커트 보니것의 초기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비록 SF계에서는 잘 나가지 못했으나 훨씬 크고 거대한 미국 문학계에서 잘 나가며 마크 트웨인의 뒤를 잇는다고 할 정도로 높게 평가되었으니 새옹지마라 해야 할지 권토중래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커트 보니것은 왜 과학소설 작가로 성공하지 못했을까.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 SF로 보이는 작품을 골라 그가 쓴 과학소설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렇다.

* 미래를 무대로 하되 연도나 그 시대의 문명 및 기술 수준은 중요한 관심사로 두지 않는다. 배경을 설명할 때는 그냥 B급 SF수준의 클리셰를 이용한다.
* 주인공에게 트릭스터(신화, 민담에 나오는 장난꾸러기.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고 선과 악의 양면성을 가진 인물) 속성이 부여된다.
* 어떤 사건의 배후에 가려진,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조명하는 방식의 전개를 애용한다.

이런 면을 볼 때 많은 영미권 SF 독자가 선호하는 과학 지식과 기술 설명이 부족하고 B급 클리셰를 다용하는 성향 때문에 인기를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강인한 주인공의 영웅적인 활약이 아니라 초라한 주인공의 어두운 사건을 다루는 작풍 역시 독자의 외면을 받은 이유일 수도 있다. 이런 점은 필립 K. 딕과도 흡사하지만 딕은 당대에도 베스트 셀러 작가까지는 아니지만 팬덤에서 나름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커트 보니것의 사례는 의문이 남는다.
1950~60년대 미국SF는 이른바 황금시대라 불리며 베스터, 아시모프, 클라크, 하인라인이 인기를 얻은 시대다. 60년대 중반에야 인문학적 성찰을 추구한 뉴웨이브가 도래한다. 보니것이 이때까지 활동했다면 좀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이 무렵 그는 SF 쪽을 떠났기에 결국 과학소설 쪽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사례로 남았던 것이다.

위키백과 영문판에 따르면 그는 1952년부터 작가 생활을 이어갔으나 인세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에 수입이 충분하지 못해 가게를 열었다가 폐업하는 등 여러 부업을 하기도 했다. 60년대 중반에는 절필까지 생각했다가 극적으로 아이오와 대학교 작가 워크샵에서 강사직을 맡게 되어 생계를 유지했고 67년작 『제5도살장』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보니것이 SF 쪽과 멀어진 시기를 이때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으로 딕은 계속 남아서 팬덤 안에서는 유명하지만 가난한 작가로 평생을 살았고 사후에야 문단과 영화계 등 팬덤 밖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반면 보니것은 SF를 떠나 큰 물(?)에서 유명 작가로 화려하게 여생을 살았으니 두 작가의 인생은 시작은 비슷했으나 이토록 크게 달라졌던 것이다.


수록작 중에 이른바 문단소설 같은 성격의 단편도 있으나 제외하고 환상소설, 과학소설 독자가 좋아할 글만 뽑아서 소개해본다.

해리슨 버저론
전설이 된 박상준 편역 단편집 『토탈호러』와 포스트모더니즘을 테마로 한 단편집 『사랑은 오류』에 수록되었던 단편. 즉 장르소설과 장르가 아닌 일반소설 쪽 단편집에 동시에 소개되었다는 의미로, 그 정도로 작가를 대표하는 단편이라 해도 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전 인류를 물리적으로 하향 평준화시켜 극단적인 평등을 이룬 사회에서 돌출한 천재의 짧은 반항과 최후를 그렸다. 짧지만 워낙 테마와 기승전결이 뚜렷한 소설이라 영화화되는 등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제신문 칼럼에서 시장주의자나 평준화 반대자들이 종종 인용하곤 한다.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이보이 SF 걸작선 1』에도 수록된 단편(제목은 「원숭이 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구과밀을 해소하기 위해 강제 산아제한 외에도 자살 센터를 만들어 자살을 장려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시인 빌리의 짧은 일탈을 그렸다. 해리슨 버저론과 마찬가지로 빌리 역시 트릭스터 속성을 가진 인물이다.

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처음 발표했다는 단편. 매우 뛰어난 염력을 쓰게 된 반하우스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쫓아가는 형식이지만, 결말을 보면 작가가 오소독스한 과학소설을 쓰려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입을 준비가 되지 않은
몸을 옷처럼 쉽게 바꿔 입을 수 있는 ‘양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한 세상. 양서인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자 주인공은 지혜롭게 위기를 극복한다. 보수적인 당시 분위기를 감안하면 양서인은 성소수자에 대한 은유일 가능성이 있다.

유인 미사일
미소 간의 우주 개발 경쟁시기에 일어났을지도 모를 사건을 상상하여 그 사건의 희생자 부모가 주고받은 편지 형식으로 풀어낸 독특한 발상의 단편. SF로 분류되진 않겠지만 우주를 무대로 했다는 점에서 추천할 단편.

에피칵
이름부터 에니악을 패러디한 거대한 컴퓨터가 등장하는데, 어떤 질문이든 답을 해주며 그 답을 종이 테이프로 출력한다는 점에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모방 혹은 패러디가 아닐까 짐작된다. 여기에서는 소심한 남자가 짝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에피칵에게 시를 대필시키는데, 짐작할 수 있듯이 에피칵 자신이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에피칵 역시 그 남자처럼 소심하고 다정다감했다. 아시모프도 클라크도 이런 결말은 도저히 쓰지 못하리라.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
불로불사할 수 있는 약이 보편화된 미래를 무대로, 절대 죽지 않고 재산과 기득권을 독차지한 노인들이 전횡을 휘두르는 세상을 그린다. 작중 주인공 가문은 가장이 유산을 협박수단으로 삼고 후손들을 겁주고 부려먹으며 독재자처럼 군림하고 있다. 어둡고 씁쓸한 이야기를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시종 웃을 수 있게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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