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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하위, 이수현 옮김, 검은숲, 2013년 9월


본작은 아마존의 전자책 자비출판 서비스인 킨들 다이렉트 퍼블리싱(이하 KDP)이 낳은 대표적인 히트작으로 이미 유명해진 선례인 『마션』과 비슷한 성공신화를 달린 바 있다. 『마션』처럼 20세기 폭스사와 영화화 계약을 맺었고, 2018년에는 TV시리즈 제작 소식도 들렸는데 다만 아직 둘 다 2020년 6월 현재까지 구체적인 개봉 및 방영 예정은 없는 상태다. 완전히 취소되었는지 여부는 알아내지 못했다(아시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그 외에도 여러모로 『마션』과 흡사한 점이 있어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둘 다 비슷한 시기인 2011년 KDP으로 출간하여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은 다음 종이책으로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세기 폭스와 영화화 계약을 맺고 리들리 스콧이 제작에 참여한다(다만 스콧은 『마션』을 직접 감독했으나 『울』의 경우는 미정). 2011년은 전자책이 바야흐로 급성장하던 시기이고 KDP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자책 플랫폼이었기에 이런 성공사례가 속속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둘 다 SF 장르라는 점까지 흡사한데, 차이가 있다면 『마션』은 처음부터 장편이고 본작은 원래 단편이었다가 이후 장편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제목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너무 짧고 직관적으로 의미를 알기 힘든 직역 제목이기 때문이다. 작가 공식 사이트 및 위키백과에서 〈사일로(Silo) 시리즈〉라 부르고 있는 이 소설의 제목이 ‘울(wool 양모, 모직물)’인 이유는 시리즈의 시작점이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번역 출간된 단행본의 〈1부 홀스턴〉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원래 「울」이라는 제목으로 KDP으로 자비출간한 단편 전자책이고, 인기를 얻고 독자들의 속편 요청이 이어지자 후속 이야기에 해당하는 2~5부를 써서 장편으로 완성했으니 이 작품도 픽스업 기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프리퀄에 해당하는 『시프트』와 속편 『더스트』라는 장편을 각각 추가하여 전체 장편 3권으로 이루어진 〈사일로 시리즈〉를 완성했다. 이후로 현재까지 휴 하위는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SF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목이 왜 모직물인가. 이유는 읽어보면 알겠지만 문명이 멸망한 세상에서 인류가 살아남은 밀폐된 지하 거주구역 사일로에서 외부를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카메라 렌즈를 닦기 위한 직물 천에서 유래했다.

1부를 개별 작품으로 봤을 때 준수하게 잘 쓰인 SF 단편소설이다. 클리셰를 적절히 활용하면서도 클리셰에 익숙한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을 뒤집는 이중 반전을 선보였다. 대신 그런만큼 1부를 단편으로 읽고 만족한 독자에게 어쩌면 2~5부는 거대한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단편에 얼핏 드러난 요소만으로 부풀릴 수 있는 다양한 상상의 여지를 제한하고 작가가 만든 정답을 강요하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픽스업 장편 대부분이 가지는 특징이자 한계라서 굳이 잘못 되었다거나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확실하게 끝맺은 줄 알았던 소설이나 영화 등이 시간이 흐른 뒤 갑작스레 예정에 없던 속편이 나오면서 전편의 결말을 무의미한 일이나 헛수고로 만드는 전개를 펼치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니까, 이런 경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독자라면 차라리 1부만 단편소설로 읽는 쪽을 권한다.

반대로 『울』이라는 장편 전체를 만족스레 읽은 독자라면 사일로가 만들어진 사연을 담은 『시프트』, 사일로 시리즈를 마무리한 속편 『더스트』도 읽고 싶어질 텐데 번역 출간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본작이 2013년 출간이라 5년 이상 지난 현실을 볼 때 아무래도 안 나올 것 같다.

또한 휴 하위는 직접 편집(존 조셉 애덤스와 공동편집)을 맡아 〈사일로 시리즈〉 세계관에 해당하는 단편을 포함시킨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문학) 앤솔로지 『종말이 가깝다(The End is Nigh)』, 『지금이 종말이다(The End is Now)』, 『종말이 다가온다(The End Has Come)』 세 권을 냈으니 이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가 생길 법하다. 관심 있는 출판사가 나서길 기대한다.


결과적으로 내용을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되고 앞으로 읽을 독자의 재미를 떨어뜨리기에 내용보다 소설 외부를 더 많이 언급하고 말았다. 1부의 내용이 이후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결말 누설 없이는 전체 내용을 말하기 힘든 소설이다. 출판사의 소개문을 잘 읽어보면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소설 줄거리는 밝히지 않고 시리즈 전체의 배경과 설정(멸망한 문명, 사일로, 청소라는 형벌 등)만 설명하고 있다. 홍보 및 입소문이 퍼지기에는 불리는 구조라고나 할까. 본작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도 혹시 여기에 있지 않을까?

SF, 특히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좋아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추천작이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 1부만 읽고 끊는 과감한 선택지도 있음을 알려둔다. 1부에 만족했을 경우 뒷부분까지 다 읽고 괜히 읽었다고 후회하느냐, 아니면 뒷부분을 읽지 않고 궁금한 채로 지내느냐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연히 끝까지 다 읽고 전부 만족한 독자도 있을 텐데, 필자 입장에서는 가장 부러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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