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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은 위험해
임성순, 은행나무, 2012년 1월

 

원래 이 소설의 리뷰를 올릴 예정은 없었다. 2014년에 써놓은 채로 남겨둔 원고였다. 포기한 이유는 몇 가지 있는데 외국소설에만 집중하고 싶어서도 있고, 서브컬처에 무지한 비평가가 쉽게 들먹이는 아즈마 히로키를 언급하는 등 지금 보면 내용이 전체적으로 낡고 안일해 보인다든지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리뷰를 올리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최근(2018년 3월) 화제가 된 『던전 디펜스』 표절 사건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길 희망하며, 무엇이 표절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로 본작을 언급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왜 직접 『던전 디펜스』를 다루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아직 안 읽어봤다는 이유도 있고 표절작으로 판명이 나면 굳이 구매하여 돈을 보태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추이를 지켜보는 입장이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리뷰는 과거에 썼던 글을 거의 그대로 옮겨 붙인 내용이다.

 

이인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로 논란을 불러일으킬 때 한 평론가는 ‘이 글을 인정한다면 소설의 시대는 끝날 거다. 앞으로는 아무도 창작을 하지 않고 다들 짜깁기만 할 테니까’라는 말을 하며 개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꽤 시간이 지난 오늘날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지 않았고 혼성모방을 주장한 작품의 등장도 거의 이어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이인화 자신도 그런 시도를 더 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때의 논란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이후로 박정희 미화, 여러 문학상 수상, 대학교수, 게임 스토리텔링 전문가, 국정농단 최순실의 딸 정유라 특혜로 이어지는 작가의 활약상(?)을 보면 그가 당시에 원한 것은 문단 권력과 명성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노이즈 마케팅의 블루오션이라고나 할까. 심지어 필명으로 쓴 소설을 본명으로 칭찬하는 평론을 쓰는 자화자찬 자작극까지 벌였던 일화를 떠올리면 악명이라도 좋으니 문단에서 화제가 되어 이름을 얻고자 했고,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고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극단적인 방법으로 목표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몰락할 줄은 몰랐겠지만(대법원 판결은 2018년 6월 예정).
이후로도 물론 귀여니, 박민규, 신경숙, 조경란 등 표절논란은 수없이 일어났으나 당사자가 ‘이건 표절이 아니라 의도적인 혼성모방이다’라고 대놓고 당당하게 반박하는 경우는 필자가 아는 한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우연, 실수, 명예훼손 고소 등의 반응을 보였다. 소설가, 나아가 예술가들은 자존심이 강한 이들이라 그런지(물론 지키고 싶은 권위도 있겠지만) 표절 지적에는 강하게 반발해왔다. 아주 가끔 표절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신경숙 표절 사태가 커지자 뒤늦게 예전 표절을 인정한 박민규 정도만 기억이 날 뿐.
외국이라고 크게 나은 것도 아닌지 독일에서 『아홀로트 로드킬』이 비슷한 소동을 일으켰는데 작가는 미리 밝히지 않은 무신경함을 사과했으나 표절이 아니라 표현기법이라고 맞섰고(이인화와 흡사한 대응) 찬반양론 속에 해당 책은 회수나 절판 없이 후기에다 출처만을 기재한 채 현재까지 멀쩡히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다루려는 본작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20세기식 혼성모방이라면 본작 『문근영은 위험해』는 21세기식 혼성모방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소설을 컴퓨터로 쓰는 시대, 모든 컴퓨터가 인터넷에 이어진 시대이기에 나올 수 있는 글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이미 원고지에 육필로 쓰거나 타자기로 하나뿐인 원고를 치는 시대는 끝났다. 컴퓨터를 통해 집필, 수정 및 저장과 전송이 무척이나 빠르고 쉽게 이루어지게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글을 컴퓨터로 써서 무엇이 바뀌었나. 대부분의 작가들은 도구만 달라졌을 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전통적인 악기(피아노, 바이올린 등)와 DTM(컴퓨터 등 전자장비로 만드는 음악)에서 작곡과 연주 방식, 결과물이 크게 달라지는 것처럼 손으로 쓰는 것과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의 차이로 인해 결과물에도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박민규는 에세이를 통해 자신이 소설을 쓰는 데 사용하는 컴퓨터의 성능과 연결된 인터넷의 능력을 예로 들며 소설 쓰기에 훨씬 좋아진 시대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 인터넷 검색으로 얻어진 소재나 정보만으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지금 들었다면 이미 늦었다. 여기에 그 결과물이자 좋은 예시가 있다.

 

때는 아마도 2000년대.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문근영은 대학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도중 삼인조 괴한에게 납치당한다. 그들은 학창시절 저마다의 이유로 왕따나 괴롭힘을 당했고 그로 인해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음모론자에 멸망론자, 문근영 광팬, 오타쿠에 히키코모리라는 특이한 조합의 세 남자는 어느 날 동시에 문근영이 나타나는 꿈을 꾸었고, 이 뒤에는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문근영을 납치하게 된다.
한편 『컨설턴트』라는 소설로 문학상을 받은 작가(실제 작가 자신과 동일한 설정이다)는 어느날 ‘회사’라는 정체모를 조직(작가의 작품 『컨설턴트』에 나왔던 존재다)에게 소설의 내용이 자신들의 정체를 폭로할 위험이 있으니 다른 소설로 이를 무마하라는 협박을 받는다. 글이 안 써지고 회사의 압박에 고통받으며 점점 현실과 픽션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작가는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데…….

 

서가를 지나가다 특이한 제목에 이끌려 무심코 꺼내든 본작은 평소처럼 대충 훑어보다 도로 꽂지 못했다. 무엇보다 노란 상자 안에 적힌 수많은 주석 때문이었다. 내가 고자라니, AT필드, 로젠 메이든 등 한국소설에선 영원히 볼 일이 없을 것 같은(라이트 노벨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낱말이 수도 없이 쏟아지는 걸 보고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에 결국 읽었고, 이렇게 리뷰까지 쓰게 되었다.
본작에는 200개가 넘는 압도적인 분량의 주석이 나오는데(자칭 한국소설 사상 각주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렵고 복잡한 전문용어는 아니다. 거의 전부가 디씨인사이드, 오늘의 유머, 리그베다 위키 등 커뮤니티 혹은 유머 사이트에서 얻어진 유행어나 소재들이다. 소위 오타쿠, 인터넷 폐인, 햏자(이제는 사어가 되었지만)들이 좋아하고 자주 쓰는 용어나 문장 말이다.
다만 순전히 검색과 수집만으로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주석에 단순히 사전적 뜻풀이만 기재된 게 아니라 종종 저자의 의견과 보충설명이 들어간 걸 보면 작가의 만만찮은 ‘덕력’을 짐작할 수 있다. 최소한 모르고 관심도 없는 분야를 유행한다는 이유만으로 안일하게 갖다쓴 건 아니라는 얘기다. 작가 자신이 오타쿠가 아니면 절대 쓸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분량일 뿐더러 적재적소에 기발하게 써먹은 부분도 적지 않다(비록 뜬금없이 어거지로 끼워 넣은 듯한 거부감이 드는 곳도 많지만).
심지어 잘못 적은 부분도 있다. 가령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는 〈카드캡터 사쿠라〉가 아니라 〈학원 앨리스〉의 주인공 사쿠라 미캉이 엎드린 짤방이 기원이다. 또한 동정인 남자를 지칭하는 ‘마법사’는 주석에서 ‘원래 25세인데 30세로 상향 조정되었다’고 썼지만 이는 잘못이며 정확히는 일본 2ch에서 처음 생겨날 때 ‘30세까지 동정을 유지하면 마법사’였는데 우리나라에선 이를 패러디해 인용한 성인 게임의 스크린샷이 유행하면서 여기에 적힌 ‘25세가 넘으면 마법사가 된다’는 대사 때문에 25세설(?)이 확산된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잘못 적은 부분을 보면 작가가 상당수 주석을 직접 썼음을 알 수 있으며 오덕임을 입증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이 내용을 인터넷 검색 없이 곧바로 적은 필자 역시 오덕임이 입증된 것 같지만 넘어가자).
한편으로 이런 21세기식 혼성모방은 서두에 언급한 이인화식 혼성모방과는 많이 다르다. 우선 출처를 상세하게 밝힌 거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 점을 제외한다고 해도 모방을 통한 결합의 목적과 속성 자체가 다르다. 이인화식 짜깁기는 표절과 구별이 사실상 불가능한 화합적 결합을 통해 타인의 저작물을 자신의 저작물로 위장시키는 목적임에 반해, 본작의 짜깁기는 낱말과 설정을 물리적으로 결합시켜 타인의 저작물(그나마도 대부분 저작권을 따지기 힘든 유행어, 작품 제목, 짧은 영화 대사 등이다)로 자신의 저작물을 장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데이터베이스식 창작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흡사한 부분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데이터베이스 창작은 일반적인 픽션이 미메시스, 즉 현실을 모사하는 것에 비해 허구에서 허구를 재조립하는 방식을 뜻한다. 파편적인 설정과 소재의 조각을 잘 짜맞춰 새롭게 느껴지는 설정과 소재를 만들어야만 데이터베이스식 창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뒤의 ‘창작’에 붙는다. 수많은 일본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이 엇비슷한 소재와 설정을 되풀이하면서도 표절 시비가 잘 안 생기는 이유는 클리셰와 변주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었으며 데이터베이스를 긍정하는 수용자의 암묵적 동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작은 날것 그대로의 설정과 소재 조각을 그대로 뿌려둔 상태와도 같다. 키치스러움와 B급 정서의 부각을 위한 의도라고 짐작되는데, 덕분에 상당수의 독자가 접근조차 꺼리게 되는 부작용을 낳을 위험이 있다. 데이터베이스식 창작의 대표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미소녀 게임과 라이트 노벨이 바로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이해하는 장르이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장르소설의 특성을 극한까지 추구한 듯한 이런 배타적이고 진입장벽 높은 부분이 본작의 진가를 알아보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한국문학을 읽는 평범한 독자는 이 소설의 개그와 패러디를 이해하기 힘들다(주석은 보기도 귀찮고 봐도 이해가 안 갈 테니). 반면 이런 설정과 패러디를 이해할 만한 사람들은 한국소설을 잘 안 읽는다. 이런 딜레마로 인해 본작은 소위 타겟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비극을 겪었다(필자가 아는 한 본작은 베스트셀러가 되지도, 오타쿠들 사이에 화제가 되지도 못했으니). 오히려 오타쿠 특유의 동족혐오(?) 속성 때문에 악평을 들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즐겨 쓰는 말이나 좋아하는 작품을 왜 문단소설에서 멋대로 갖다 쓰느냐’라는 식으로.
작가가 만약 좀 더 상업적 판매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면 오타쿠 소재를 줄이고 대신 영화와 드라마 관련 패러디를 많이 넣었을 것이다. 그 편이 한국의 보편적 대중에게 더 친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소재이니까. 표지 바로 뒷날개 작가 소개란에 시험문제 정답처럼 친절히 기재해준 본작의 주제인 ‘소비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인간 군상과 그 내부의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드라마 속의 재벌을 다루는 쪽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필자의 경우 본작을 흥미롭게 읽긴 했어도 자본주의의 공허함은 거의 느끼지 못했으니 작가의 의도가 얼마나 독자에게 전달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내용면에서 볼 때 본작의 구성과 주제는 영화 〈지구를 지켜라〉, 만화 〈20세기 소년〉,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뒤섞었다고 요약하면 간단히 설명이 될 것 같다. 『N.H.K에 어서 오세요!』나 『무안만용 가르바니온』과 비슷한 느낌도 드는데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흡사한 테마를 다루는 작품 사이의 유사한 분위기 정도로 보는 편이 낫겠다.
결국 본작은 소설 제일 앞에 인용한 문구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 세 장도 채 못 넘기고 쏟아지는 주석의 연발, 음모론과 오타쿠 서브컬처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인용은 문근영이 실제인물이라기보다 기호이자 상징으로 쓰인 것처럼(흥미롭게도 비슷한 제목을 가진 단편 「문근영 대통령」의 문근영 역시 비슷한 의도로 쓰였다) 원본도 진실도 없는 시뮬라크르 자체라 할 수 있다.
다만 본작이 그리는 허구의 세계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하이퍼리얼리티와는 동떨어졌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과 픽션을 구별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소설 밖 독자들은 뚜렷하게 픽션을 인식하게 된다. 작중 인물들이 무의미하게 문근영의 광고 대사나 오타쿠들의 유행어를 읊조리는 등 스스로가 픽션이며 허구임을 독자에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감추거나 포장하기는커녕 B급 정서의 부각이라는 의도를 위해 가장 가상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을 취한 셈이다. 비유하자면 〈개그콘서트〉 같은 접근방식이다.
옆길로 새지만 첨언하자면 과거 TV 코미디 프로그램(가령 〈유머1번지〉)은 싸구려에 급조한 티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무대, 의상과 변장, 소품 등을 열심히 갖춰서 방송했다. 하지만 〈개그콘서트〉를 필두로 한 2000년대 이후 프로그램은 텅 빈 무대에서 의상과 소품도 최소로 갖추고 펼쳐진다. 드라마나 영화에 비교하면 둘 다 허술하여 금방 ‘가짜’임이 드러나는 배경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진짜인 척 하는 가짜이고 후자는 가짜임을 대놓고 알려주는 가짜인 것이다.
따라서 조악하게 비유하자면 일반적인 픽션은 드라마나 영화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데이터베이스 창작에 해당하는 쪽이 〈유머1번지〉라면 본작의 경우는 〈개그콘서트〉인 셈이다.
결국 소설 속 세계는 전체가 시뮬라크르인 셈이고 최후에 남는 소설적 진실은 그 세계 전체도 다른 세계(역시 소설 속 세계)가 만든 가상의 세계일지 모른다는 다중 허구의 구조는, 등장인물들이 음모론을 파헤치며 겹쳐진 세계의 내부를 파악하는 플롯 속에서도 두드러진다. 마지막에 문근영의 정체가 드러나고 작가가 쓴 소설 안의 작가가 쓴 소설 안의 인물과 거울을 통해 만나고 둘이 동일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에는 그들의 존재조차 다중 허구임을 알게 된다. 둘 중의 누가 원본이고 복제인지 구별할 수 없을 뿐더러, 거울 안의 작가는 작품 밖의 작가와 실제로는 동일하지 않다. 전술했듯 정교한 모방을 거부한 반-하이퍼리얼리티 세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허구를 말하기 위해 허구로 만든 허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자본주의의 공허함’이라는 모범답안식 주제마저도 허구가 된다. 독자에게 남겨진 선택은 조립된 작은 이야기들을 오타쿠식으로 소비할 것인지, 숨겨진 의미와 철학을 포스트모던한 방법으로 독해할 것인지, 덕후 작가가 문근영과 서브컬처라는 기호를 통해 음모론과 정보가 범람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풍자했음을 외재적으로 분석할 것인지에 달렸다.

 

좋든 나쁘든 문단이라는 창구를 통해 원래대로라면 나올 수 없을 글(음란·불온 등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안 내준다는 의미)을 선보였다는 의미에서 『목화밭 엽기전』, 『키메라의 아침』과 함께 2000년대 한국소설 3대 기서(奇書)라고 칭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본작이 그만큼 오래 살아남아 독자와 평단에게 주목받을 수 있을지 여부인데, 앞의 둘을 보면 딱히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다. 오타쿠의 세계가 원본인 작품이 존재한 후에 시작되듯이 소설이라는 시뮬라크르 세계는 출간이 된(즉 작가의 손을 떠난) 이후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프레시안] 문근영·아이유에 미친 '삼촌'들, 혁명을 꿈꾸다?
[시사저널] 혼성모방, 표절인가 문학의 새 가능성인가
[연합뉴스]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 표절 인정…비난받아 마땅"
[대산문화] 조까라, 마이싱이다! - 박민규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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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쁘로프박사 18.03.15 09:26 댓글

    《컨설턴트》《문근영은 위험해》《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로 이어지는 임성순의 회사 3부작은 재밌게 읽었죠. 그 중 문근영은 진짜 골 때리는 작품이었고. (거울에는 꽤 있을듯한)오덕에 문단 소설도 집어 읽는 잡식취향이라면 재밌게 읽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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