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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플레이어 원
어니스트 클라인, 전정순 옮김, 에이콘, 2015년 4월

 

 

2044년, 완벽한 가상현실을 제공하는 온라인 게임이 있다. 주인공이 판타지 세계를 닮은 가상세계에서 모험을 한다.
여기까지는 반도(?)의 흔한 게임판타지가 따로 없다. 그런데 잠깐만, 여기에 무언가를 끼얹었다. 무언가 하니 1980년대 미국 서브컬처다. 영화, 드라마,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대중가요 등. 특히 고전 게임에 대한 작가의 사랑과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터넷 서점 등에서 서지정보를 보면 알 수 있듯 이야기 구조는 단순명료하고 예측이 가능한 플롯이지만 이 소설의 중심은 바로 소재 자체다. 아쉽게도 그런 이유로 대한민국에서 이를 오롯이 이해하고 즐거워할 독자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이유로 1990년대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오마주로 범벅이 된 미야베 미유키의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의 반응도 미약한 것으로 안다.

 

대신 우리가 주목할 점은 우리나라 게임소설, 게임판타지소설(속칭 겜판소)과의 차이점이다. 또한 『소드 아트 온라인(이하 소아온)』을 위시하여 근년 유행하는 일본 게임소설과의 유사점 및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필자가 게임판타지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기에 ‘안 그런 작품도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대체적인 경향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란다.
우선 한국 및 일본 게임판타지는 게임에 접속한 인물이 마치 이세계로 이동한 것처럼 완전히 그 세상 속에 빠져서 지내게 된다. 반면 본작은 주인공이 늘 현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음을 상기한다.
게임 내 시스템이나 인터페이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이 MMORPG, 일본이 『드래곤퀘스트』의 영향이 짙은 것과 달리 본작의 가상현실 게임은 전자기기를 조작하는 공학적 감성이 엿보인다. 그런 면에서 『뉴로맨서』, 『스노 크래시』의 후계자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주인공은 시종일관 자신이 가상현실 속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잃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 쪽의 주인공이 쉽게 현실을 잊어버리고 게임 속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게임판타지는 등장인물이 게임 속 세계로 이동하면 이후 현실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다. 비교적 초기 작품과 라이트노벨로 분류되는 작품군에는 현실로 돌아와 게임 속 인물과 현실에서도 관계를 이어나가는 경우가 있지만, 일본 작품도 이른바 나로우계(일본 인터넷 소설연재 사이트 〈소설가가 되자〉에서 연재되는 소설 및 그와 흡사한 성향의 웹소설을 일컫는 명칭) 및 다수의 한국 겜판소는 현실로 안 돌아오고 차원이동을 한 것처럼 계속 그 세계에서만 산다.
이런 작품들은 게임(가상세계)의 원리나 기술 등에 대해서는 밝히질 않는데, 대부분은 작가의 역량 부족 때문이다. 『소아온』 정도면 그 중에서도 게임 접속 방법이나 구현하는 기술에 대해 비교적 길고 자세하게 다루는 편이다.
본작은 그보다도 훨씬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높은 수준의 가상현실 게임을 구현했기에 역설적으로 『소아온』보다는 기술적으로 떨어지는 가상세계의 모습을 보인다. 가령 주인공은 게임 속 그래픽이 현실보다 떨어지는 이른바 ‘게임 그래픽’임을 늘 인식하고 있다. 또한 NPC는 정해진 대사 및 행동만 하는 등 기술수준의 한계점도 고스란히 표현된다. 대부분 한일 겜판소가 현실과 구분이 안 가거나 그보다 더 굉장한 시청각 요소 및 인간만큼 뛰어난 인공지능 NPC를 아무 제약도 없이 간단히 등장시키는 것과 대조적이다.
본작의 경우는 빈번히 현실과 게임세계를 옮겨 다니는데, 이는 생존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게임을 더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내용을 밝히면 재미가 반감되겠지만 주인공은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게임 속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일종의 퀘스트를 수행한다고 보면 된다.

 

결론적으로 한국, 일본의 상당수 게임판타지소설은 그저 판타지소설에 작가 편의주의적인 게임식 인터페이스가 접목되었고 독자 역시 그런 익숙한 ‘형식’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딱히 게임에 방점을 찍기 어렵고, 시대가 미래이고 가상현실 게임이 나온다고 해서 SF로 분류하기 힘든 까닭이다.
반면 본작은 시종일관 사이버펑크를 연상시키는 구식 인터페이스의 게임과 현실세계를 왕복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퀘스트를 연이어 수행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과학소설이며, 서브컬처에 탐닉하던 주인공이 꿈꾸던 세상에서 성취를 이뤄내는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추신. 위의 본문을 쓴 후에 영화판 〈레디 플레이어 원〉의 트레일러가 공개되었기에 봤는데, 지금 심정으로는 매우 우려된다. 원작의 개성이자 인기 요소가 전혀 안 보이기 때문. 물론 본편에는 있을 수도 있지만 트레일러만 보면 스필버그풍 액션 영화가 될 가능성 농후하다.
역자 후기에도 언급할 정도로 수많은 미국 서브컬처가 인용되고 있어 저작권 해결이 안 되면 영화화도 어렵겠다는 걱정이 들 정도였는데 영화 제작자들은 이런 요소들을 다 없애버리기로 결정한 듯하다. 하긴 스필버그가 영화 주라기 공원을 히트시켰어도 원작에서 말한 인간의 오만, 기술의 위험, 생물 진화 등의 테마는 거의 사라지고 없던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다만 영화가 개봉된 다음에 이런 우려가 잘못되었음이 밝혀진다면 댓글로라도 첨언하도록 하겠다.

댓글 1
  • No Profile
    목이긴기린그림 17.08.01 13:10 댓글

    아, 이런 소설도 있었죠. 읽어 봐야지 하고 몇 년 동안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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