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세상은 잿빛 안개로 잔뜩 뒤덮여있다. 나는 켈록거리며 토사물과 장기가 나부끼는 거리를 달린다. 대로변은 마치 골목길처럼 퀘퀘한 먼지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뒤에서는 소리 없는 단말마들이 하나둘씩 숨을 꺼뜨리며 쫓아오고 있다. 고기 두들기는 소리. 존은 그 두꺼운 팔뚝으로 짐승들에게서 정육점 부채살 냄새가 나게 해주고 있을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숨이 차다. 언젠가 지하철 앞에서 비명지르는 듯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다. 나는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않으며, 내 입으로 말한 것은 결코 번복하지 않는다, 였나? 참으로 신실하고 믿음직한 신이다. 적어도 나에게 한 짓은 정말 효과적이었다. 성차별적인 말을 하고 싶진 않다. 그래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여자의 몸은 정말 달리기 불편하다. 속옷이 없다면 남자 흔들리는 것보다 더 귀찮다. 109년 전, 세상이 미쳐돌아가기 전이었다면 백 퍼센트 성희롱적인 발언인가? 그러나 이 세기말의 테이레시아스로서 나는 최소한의 불평 정돈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귀담아들을 정도로 제정신인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겠지만.

 

  한참을 달리다보니 부서진 시장건물 간판 밑으로 고물 이륜차 한 대의 아름다운 자태가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씨티백. 구시대 오토바이 중에서도 빌어먹을 정도로 싸구려놈.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교통수단은 진즉에 끊긴 지 오래다. 내 고향은 여기가 아니지만, 태평양 횡단 철도를 타고 이 곳으로 온 건 천운이었다. 행복하지 못했던 곳. 이 나라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먹어치웠기에, 오히려 하늘에서 감시하는 저 눈깔이 사람들을 주무르는 영향력도 약한 곳이었다. 문명화된 곳 중 괴물이나 광신도가 그나마 적은 곳은 전 세계에서 여기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 신은 아름다운 감정을 싫어한다. 그 신은 사람을 벌주기 위해서 나타났다. 그 신은 우리의 욕망과 욕정과 방탕과 나태를 씻어내기 위해, “더욱 발전하기 위해 더 많은 걸 희생할 수 있다는 우리의 쓸데없는 희망을 앗아가기 위해 나타났다고 했다. 109년 전, 설교하듯 그 소리가 만천지에 울려퍼진 후, 하늘에선 거대한 눈알이 뒤룩거리며 사람들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하늘이 아니었다. 자비롭고 전능한 그것은 오존층마저 싹 날려버리고, 달 근처 우주에서부터 우리를 지켜보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리 도시 한두 개를 소멸시키고 사라졌다면. 차라리 역병과 질병으로 우릴 괴롭혔다면 좋았겠지만, 그 신은 우리 마음 속의 추악하고 더럽고 못난 부분을 일깨웠다. 감사하게도 신이 일깨워주신 그 선물은 즉각 우리 몸에 영향을 미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태도 알아보기 힘든 젤리 같은 살덩이, 지옥도에서나 봤을 악마, 괴물, 천사를 닮은 식인귀, 그도 아니라면 야수와도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 행복한 사람일수록 더욱 알아보기도 힘든 모습으로 바뀌었다.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존이나 나 같은 정말 예외적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더럽게 시동 안 걸리는 오토바이는 몇 번이고 걷어차주고 나서야 겨우 달리기 시작한다. 칼날 같은 손톱이 나를 덮치기 직전, 존의 발길질이 그 손목을 날려버린다. 1인용 오토바이 시트에 피투성이의 두 명이 탄다. 개 냄새가 나는 존의 거대한 몸집이 나를 비호하듯 끌어안는다. 비좁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조금 안심이 된다. 부릉, 하는 시동소리에 아쉬운 듯 입맛 다시는 괴물들의 신음소리. 가로등 꺼진 거리가 멀어진다. 우리의 뒤쪽엔 사람의 온기와 내장 비린내에 굶주린 그들, 인간이었던 괴물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한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을 수 있었다. 언제라도 똑같은 지옥에 떨어질 각오가 되어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챙겨온 핵연료 케이스가 사랑스럽게 반짝이고 있다. 혹시나 하고 와봤지만, 전자상가 시장통이란 곳에선 정말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하고 시장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발 빠른 괴물들이 우릴 쫓아오지 않은 이유가 분명해졌다. 또 한 명, 사람답게 살려 애쓰던 마지막 인류의 최후였다. 3대를 이어온 가게였다고 했다. 그는 백 년 넘게 괴물들의 습격과 치밀어오르는 광기에 괴로워했고, 그 와중에서도 핵연료를 넘겨줄 사람을 기다렸다. 언젠가 저 전지전능한 신을 한 방 먹여줄 바벨탑의 재료로서. 그것으로 그는 인류에 대한 마지막 상도를 지켰다.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어디 있는지 모를 자비로운 이에게 그의 선처를 빌었다. 아주 잠깐 동안만.

 

  한참을 달려 높은 언덕 위쪽을 올라간다. 걸어올라가면 금방 숨이 찰 경사를 넘어서면, 쇠철창과 바리케이트가 꼼꼼히 쳐져있는 건물이 눈앞에 보인다. 수용소나 형무소 같은 느낌을 주지만 예전엔 학교로 쓰인 건물이었다고 한다. , 지금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자켓 윗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정문을 연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귀를 긁으며 지나가고, 그 소리에 호응하듯 고함소리 비슷한 소음이 교내에서 들려온다. 모든 소리가 지나가고 끔찍한 정적만이 내려앉을 때, 누군지 모를 중얼거림이 맴돌았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는 이제 해방될 수 있어.”

 

  그것은 나였을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가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울리지도 않는 여성용 청바지를 입은 건 취향 때문이 아니고, 존이 늑대인간처럼 북실북실한 털에 이 미터를 넘는 거구인 것도 말단비대증 같은 게 아니다. 미생물 10억 마리에 항생제를 쏟아부으면 그 중 100마리 정도는 거기에 적응해버린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막 나갔다고 한들, 인간에게 그런 실험을 할 미친 새끼는 전지전능하신 저 하늘의 눈깔신 정도밖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유전적으로 더 안정한 여성의 신체로 바뀌었고, 존의 몸은 거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모피와 근육이 자라났다. 실험에 성공했다며 저 눈알이 기뻐 박수를 쳤을까? 아니, 오히려 다 죽지 않았다고 불평을 했으면 했겠지.

 

  삐그덕대는 교내 복도를 걷는다. 존은 오늘따라 더욱 말수가 적다. 나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 일부러 말을 걸어줄 정도로 붙임성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2학년 2반에 들러 고깃덩일 던져준다. 흐느적거리는 인간, 비슷한 게 고기를 주워먹으려 기어온다. 그 눈구멍엔 짙은 안개 같은 게 차 있다. 팔은 제 역할을 못 한 채 축 늘어져있을 뿐이다. 사람을 닮은 애벌레. 그 생각이 들자 나는 그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 혐오감의 탈을 뒤집어쓴 가슴 저리는 슬픔이었다. 알렉스. 싸움을 싫어하고 항상 유머감각으로 넘쳤던 청년. 그의 쾌활한 목소리에 기운 차렸던 적이 대체 몇 번이었고, 그 시원스런 격려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건 또 몇십 년 전이었던가. 존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툭, 두드린다. 그 나름대로의 재촉을 겸한 위로이리라. 씁쓸함을 머금고 발걸음을 옮겼다.

 

  생물학적으로야 돌연변이에 성공한 케이스라 말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경험은 최악에 가까웠다고 단언할 수 있다. 유전자가 바뀐다고 짠 하고 몸이 바뀌는 건 아니다. 한 달 넘게 몸을 면도날로 긁어내는 듯한 고통을 겪고서야 지금의 몸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격통에서 깨어난 후엔 과거의 기억이 거의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지독한 괴로움으로 기억상실이 일어난 것일까, 변이가 뇌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과거 신체의 기억을 잊고자 하는 본능이었을까? 아직도 잘 알 수가 없다. 그저 다른 이들의 경우를 보며 이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안도할 수밖에.

 

  2학년 9반에선 열에 들뜬 신음소리가 귀를 따갑게 울린다. 베니가 또 이반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급하게 교실 문을 열어보니, 아니나다를까. 굵은 떡갈나무 둥치 같은 베니의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반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발정난 원숭이 얼굴을 하고 헥헥대는 베니. 문 열리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이반을 핥아대는 꼴은 차마 봐주기 힘들었다. 내 표정이 굳어가는 걸 본 존은 목을 긁는 듯한 그르렁 소리를 냈다. 베니는 조그마한 동공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곧 덤벼들 거란 신호였다. 아니, 그 생각을 한 순간 뛰어들었다. 굽은 등과 사족보행 때문에 자칫 왜소해보일 수 있지만, 힘이라면 존에게 뒤지지 않을 터였다. 힘뿐이라면 말이다.

 

  , 하고 숨을 들이키며 존은 베니의 손을 쳐냈다. 그 빈틈에 가슴팍으로 파고든다. 기세를 살려 팔꿈치를 명치에 꽂아넣는다. 비틀거리는 몸. 몇 차례 턱을 후려갈기는 소리. 베니는 동물원에서 주는 먹이를 먹으며 쇠락한 유인원이었고, 존은 백 년 넘게 사냥감을 물어뜯은 유능한 투견이었다. 말하자면 둘의 차이는 마음이었고, 그 견실함이 존의 몸과 마음을 여전히 쇠심줄처럼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베니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존을 끌어당겼다. 베니의 지능은 정말 유인원 수준일 뿐이기에, 그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존은 혀를 차며 피 묻은 손을 털어냈다. 베니는 히익 소리를 내며 구석에 틀어박혔다. 그 모습이 측은했다. 그가 내 몸을 몇 차례 노렸다는 걸 알고 있기에 존은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죽인다고 뭐가 달라질 것인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성의 흔적을 우리 스스로 버린다고 해서 뭘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존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마저 야수로 변하게 할 수 없었다. 몸의 변이는 한 순간으로 끝났지만, 마음이 부서지는 건 언제라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 미친 세상에서는.

 

  이반은 피부가 희고 내성적인 사내였다. 베니와는 단짝친구였고, 숫기 없던 이반을 베니가 끌어들여 여자를 소개시켜주거나 농을 치는 일이 빈번했다. 다소 짓궂을 때도 있었지만, 끝에는 항상 다 함께 신나게 웃다가 끝났다. 그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반을 신경 써준 베니의 배려였다. 이변이 일어나기 전까진 그랬다. 당시 베니는 몸이 변하면서도 비교적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반의 팔다리가 점차 괴사되는 것도 그 혼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외과 수술로는 제법 솜씨가 있던 베니였다. 이반의 팔다리를 절단할 수 있었던 건 그 뿐이었다. 불안정하고 체력이 떨어진 몸에 마취제를 놓는 건 도박에 가까웠다. 마취 받지 않고 사지를 잘리는 광경을 아직도 난 상상할 수 없다. 단말마 비슷한 비명과 눈물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굴한 사정, 욕설. 친구의 그 모든 모습을 감당해야 했던 것 역시 베니밖에 없었던 것이다. 몸을 추스린 내가 처음으로 그들을 마주친 것은 바로 이 교내였다. 피투성이 가운을 벗는 베니와 거품을 물고 혼절한 이반. 베니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그의 마음은 아마 그때부터 조금씩 마모되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은 식량의 일부를 이반 옆에 던져두고선, 나는 교실 문을 닫고 나왔다. 가끔 성욕 탓에 날뛸 때를 제외하곤, 이 지경까지 와서도 이반을 챙겨주는 건 역시 베니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망가진 친구들을 마주볼 수 있을 정도로 굳세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지탱해준 건 역시 존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강건하지 못한 나를 지켜주었고, 내 마음이 찌그러지지 않게 애써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버텨내기엔 우리는 너무 오래 살았다.

 

  변이가 우리에게 빼앗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성과 동시에 죽음 그 자체도 있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다치고 얻어맞아 죽을지언정 절대 늙거나 병들어 죽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악마가 왜 우리에게 그런, 축복과 같은 이름의 저주를 주었는지는 명확하다. 돌연변이로 인한 생식기능의 급속한 감퇴. 인류는 이미 거의 그 종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마음의 죽음. 희망의 절멸. 영원을 살아도 절대 우리가 예전처럼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 하늘에서 우릴 노려보는 신의 눈동자는 그걸 우리에게 각인시키고자 했다. 우리가 몇백 몇천 대에 걸쳐 다른 생물들에게 주었던 압도적인 불합리성을 그대로 되돌려주기라도 하는 듯, 그 신은 인류의 모든 기술과 마음을 겨우 몇 가지 수작질로 망가뜨려놓은 것이다. 그것도 아주 효과적으로.

 

  모든 부품을 갖추기까지 백 년 넘게, 정확히는 109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빌어먹을 눈깔의 시선을 피해, 달려드는 수없는 변이체들을 피해 야금야금 품어온 희망. 아직 그 누구도 저 눈알을 물리적으로 공격한 적이 없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히 의구심을 품을 일이었다. 잔혹한 절대자는 단 한 번의 천벌 이후엔 침묵을 유지했지만, 언제라도 다시 수작을 부릴 듯한 저 감시 속에선 아무도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복수라든가 위협 배제 같은 구실을 집어치우더라도, 어디 괴담에도 나오지 못할 저 망할 것을 매일매일 보면서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주선을 만들어서 저 눈알을 없애자. 베니, , 이반과 존, 그리고 알렉스. 그나마 제정신이 남아있던 모두가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교정 뒷문의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방사능 섞인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것도 요새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이 정도가 딱 좋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간은 썩어넘쳤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단 하나였다. 방수대책은 완벽하다. 오토파일럿 기반이지만 유인조종이 우선순위로 설정됐다. 연구소를 거의 쓸어담을 듯 훑어 충격, 방사능, 먼지에 대한 대책도 몇 겹에 걸쳐 꼼꼼히 준비했다. 연료탱크가 줄줄 샌다고 할지언정 목적지까진 도착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기기가 완전히 맛이 가도 유효범위 안에서라면 자폭할 수도 있다. 몇만 번도 넘게 문제사항을 점검했고, 극단적인 사고예시까지 읽어보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예외사항을 대비했다. 공돌이한테 충분한 시간과 자금만 준다면 이 정도는 껌이라니까. 바로 이런 걸 높으신 분들께서 모르셨기에 인류에게 천벌이 내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문제였던 폭발물질-근본적으로 저 망할 놈을 완전히 날려버릴 강력한 화력이 없다면 이런 준비도 다 쓸모가 없었겠지만, 그것도 오늘 와서 겨우 해결됐다.

 

  인류의 해악을 증오하는 자비 넘치는 저 신에게, 인류가 스스로 사용한 적 없었던 수소폭탄으로 대적한다니. 이제 우린 진짜 개새끼들이라고. 그렇지 않냐? 농담 투로 던졌지만 존은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도, 이 이는 너무 시큰둥한 게 탈이라니까. 나는 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정말 언제였던가. 나는 기다려왔던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을 뜯는 듯 흥분해있었다. 이미 사전준비는 다 끝냈었지만, 크고 아름다운 폭탄을 조심스레 정비하고 또 우주선에 싣는 데는 또 며칠이 걸렸다. 그 사이 소나기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폭우로 변했다. 망할 눈알놈. 지 위험한 걸 알고 지랄발광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이제 정말 끝이다.”

 

  모든 정비가 끝나자 나는 잠시 존의 등판에 기대 샌드위치를 먹었다. 존은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다르게 꽤 요리솜씨가 좋았는데, 모습이 변하기 전에도 그의 음식을 꺼리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질 못했었다. 존은 오늘따라 입맛이 없는 듯, 한 입도 뭔가를 입에 넣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척 하고선 우주복을 입었다. 바야흐로 결전의 날이었다. 오늘이야말로 전능하신 눈깔의 뱃속에서 백 년 넘게 고통받았던 이들의 복수전이었다. 준비사항을 머릿속으로 체크해보고, 우주선에 올라타려던 찰나.

 

  꽈악. 두터운 바이스에라도 잡힌 듯 내 몸은 발길을 떼지 못한다. 두터운 팔뚝이 내 몸을 감싸 움직일 수가 없다. ,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뭐하는 거야, .”

  “……가지 마.”

 

  그의 몸은 불덩이에라도 데인 듯 뜨겁다. 그는 말수가 많지 않지만, 언제나 고집쟁이였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절대로 굽히질 않았다. 내 계획엔 찬동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 일을 자기가 맡겠다고 했었다. 존은 정말로 착한 친구였다. 절대로 자기 대신 친구를 희생시키지 못할 정도로.

 

  “야 인마. 네 몸은 너무 커서 우주선 무게만 늘린다고. 손도 그렇게 커놔서 미세조작이나 제대로 하겠어? 그리고 널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임기응변에 더 능숙해. 기계 쪽에선 뭔 일이 생겼을 때 대처가 빠른 건 나야.”

  “……”

  “이건 남들하고 치고박는 게 아니라고. 몸이 튼튼하다고 더 좋은 게 아니야. 네 전공은 생물학이니까, 만약 뭔 일이 생겨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건 너야. 내가 계획한 이 우주선이 백 년을 잡고 만들었던 제 1, 너는 무기한으로 돌연변이를 치료할 계획을 제 2안으로 내놨었잖아?”

  “……”

  “할 말 없지? 그럼 이 손 놔.”

  “……싫어.”

  우주복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말도 안 돼. 이거 교통사고 나도 버틸 수 있게 만든 건데. 고철 찌그러지듯 망가진 헬멧을 벗기고서, 그는 나에게 입을 맞췄다. , 망할. 무슨 영화 찍냐. 나는 불평을 전하듯 눈을 흘겼지만, 그에겐 아무 상관이 없는 듯 했다. 그는 어디까지고 진지했다. 처음부터 힘을 써서라도 절대 나를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기나긴 세월에 우리가 몇 번 몸을 섞으며 온기를 나눌 때에도, 그는 절대로 다정한 말이나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 나름대로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 그런 그가 격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나 또한 일이 이렇게 되리라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존의 몸이 휘청거렸다. 우주복 팔뚝 부분에 장치했던 주사기가 효과를 본 순간이었다. “혹시나 우주선 내로 에일리언이라도 침투하지 않을까, 하고 준비한 급속마취제였는데 말야. 너 같은 덩치에게 즉효성이라면 웬만한 놈들에겐 치사량이겠네.” 손 하나 까딱할 기력도 없음에도 그는 눈을 감지 못했다. 나를 원망하며 노려보는 눈빛. 버림받은 사냥개의 시선. 그것은 지독히도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의 코에 입맞췄다. 여벌의 우주복으로 갈아입었다. 정비실은 근 3일 간 감압훈련과 비슷한 압력으로 마쳐두었었다. 우주선의 시동을 걸었다. 주엔진 점검 OK. 보조엔진도 출력은 충분하다. 우주선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지상을 잘 둘러보았다. 축축하고 어두운 괴물들의 세상. 나는 이런 세상을 도저히 싫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이 바보야, 라는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조종석에 앉았다. 리모콘을 조작하자 돔 형태의 체육관 천장이 천천히 열렸다. 출발 카운트다운은 숫자는 천천히 0으로 떨어져내리는데, 쏟아져내리는 비는 마치 울며 징징대는 변덕쟁이 꼬마애를 보는 것만 같다. 저 하늘의 눈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본다. , 나 살짝 쫄았나 봐. 이럴 땐 밝은 노래가 최고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멜로디. , 이거 가사 뭐였더라. 초등학교 때 들었던 건데.

 

  “♪ 저 검은 구름 하늘 덮고 풍랑 일어나

  온 세상 캄캄하여도 내 맘에 빛 있네

  사랑의 빛 오늘 내 맘에, 사랑의 빛 항상 있도다 ♪”

 

  교회 부활절에라도 온 것 같잖아.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래, 이건 내 개인적인 욕심을 위한 것이다. 밝고 활기찼던 알렉스를 위한 출진이고, 술과 여잘 밝히던 베니를 위한 행진이다. 똑똑하던 이반을 위한 활주이자, 사랑하는 이를 위한 연서(戀書). 속된 세상을 살아가고 싶었던 나와, 혹시나 태어나고 있을 인류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사랑의 마음이다.

 

  우주선이 발진한다. 나는 축제에라도 가는 듯 흥겨운 마음으로, 세상을 저주하는 신을 향해 노래불렀다. 날짜도 모를 오늘은 혹시 크리스마스일지도, 새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제 시작이다. 아직 한참은 끝이 멀은 것이다. 먹구름 너머 백 년을 보지 못했던 밝은 태양이 보인다.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땅을 기는 사람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인류는 결코 더럽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은 이렇게도 사랑스런 곳인데, 나는 이제 이 마음을 온 누리에 증명하러 가는 중학생 같은 흥분을 담고, 유치하고 치기 어린 영웅담을 실천하러 가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아무리 짓눌려도 입이 있다면 소리 높여 사랑을 구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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