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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거미에게 나비를

2011.10.28 23:2310.28

거미에게 나비를


코바, 왜 네게 내 죽음이 필요하지?
율리아는 도주하는 비밀 통로 안에서 중얼거렸다. 총성과 폭음 때문에 시끄러웠지만 율리아의 말 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코바가 누구냐고 물을 수 없었다. 대신 율리아의 뒤쪽을 향해 연달아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눈을 번뜩이며 부서지는 어둠 조각. 통로 건너편에서 한 놈이 무너져 내렸다. 상대는 더 많은 총알수로 답장을 보냈다. 이정도면 내 월급 값은 되겠지.
율리아가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총탄이 오가는 어둠 속에서도 율리아의 눈빛은 차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율리아를 이끌었다. 등 뒤를 따라오며 부서지는 돌조각들이 섬뜩했다. 자정부터 잘게 내리던 안개비 때문에 지하도 안은 축축했다. 끈적거리는 발밑의 감촉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율리아는 험한 길을 걸어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안개비가 유독 짙은 밤이었다.
지하도를 나가자마자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가는 나무들이 우거진 공원 한가운데였다. 율리아의 올려주고 문을 걸어 잠갔다. 지하도 안은 수십가닥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부분 출구가 없거나 가짜 출구이다. 진짜 길은 율리아와 나밖에 모른다. 당분간은 추적걱정이 없겠지만 망명을 생각해야 할 수도 있다.
대통령의 연락을 기다릴까요? 율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총리관저가 습격을 당할 정도니 이미 의사당이 점거 당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지독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한여름의 꿈같은 혁명이었다. 9월이 되자마자 아지랑이는 스러져 버렸다. 고개를 돌려 습격자들의 목표를 바라봤다. 율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젖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불이 붙은 담배를 꽉 쥐었다. 율리아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율리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움직이자. 예, 총리각하. 빗소리 때문에 서로의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의미는 알기 쉬웠다. 나는 율리아의 손을 다시 꽉 쥐었다.
지금 이 상황이 지독하게 불공정하게 느껴졌다. 대통령은 혁명 직후 엄청난 지지율 속에 정권을 꽉 붙잡고 있었다.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 설령 본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최소한 율리아 만큼은 화약냄새 한 모금도 맡지 못하게 하도록 감싸줘야 옳았다. 그게 킹 메이커에 대한 예의였고, 연인에 대한 예의였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공원 저편에서 오렌지 색 네온사인 번들거렸다. 혁명의 색은 혁명 이후 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율리아는 오렌지 색이 사라지면 은퇴하겠다고 연설했다. 아직 나라에는 오렌지 색이 가득했다.
어디서 보낸 놈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솔직히 어디서 보내든 다 쏴죽여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 독립국가연합 아니면 야당에서 보낸 테러다. 올해 초까지 독립국가연합을 등에 업고 독재하던 야당은 혁명의 열기 속에 쓰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미열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공원을 뚫고 위태롭게 서 있는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적은 수의 조명만이 켜진 바 안은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손님이 오셨군. 바텐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텐더는 테이블 아래에 있던 쇼핑백을 꺼내 율리아에게 넘겼다. 율리아는 능숙하게 받아들고 나를 앞서 걸었다. 취한 주당들이 나와 율리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바텐더는 테이블 위에 떨어진 물 자국을 지웠다. 나는 율리아를 따라갔다.
율리아가 들어간 곳은 방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빈 술병과 밀봉된 상자들이 다른 국가의 말들로 씌어져 있었다. 율리아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쇼핑백 안에 있던 후줄근한 옷들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긴 주름 치마로 갈아입자 율리아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얼굴만큼은 가리기 힘든 특징이었다. 율리아는 가발 위치를 조정해 화상 자국과 텅 빈 한쪽 귀를 가렸다.
어색해?
아름답다는 말을 던지고 싶었다. 장갑만 끼면 되겠군요. 날씨가 쌀쌀하니까 눈에 띄지는 않겠지. 율리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차피 눈은 의안이니까 알아볼 사람도 없을테고. 율리아는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오른쪽 손으로 담배를 꺼내들었다. 나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율리아의 손 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율리아는 불 붙은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방 안에 담배 연기가 차오르면서 그녀는 얕게 신음했다. 나는 방 안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율리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가발이 흔들렸다. 나는 그녀의 많은 가발들을 떠올렸다. 율리아는 가발이 너무 많다. 담배를 빼 물었다.

보좌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율리아가 나를 불렀다. 그렇다. 나는 율리아의 보좌관이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3년 동안 율리아를 보필하면서 율리아는 내 이름을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면접 서류에 적혀있긴 했지만 불러 본 적도 없다.
보좌관, 밥은 먹었나.
아직 안먹었습니다.
일이 끝나면 같이 먹으러가지. 이번 일에 대한 보수는 직접 지불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율리아의 경호 업무는 내 영역이 아니다. 난 어디까지나 보좌관에 불과하니까. 나는 보좌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누가 한 나라의 총리를 습격했을까. 율리아는 혁명의 기수다. 율리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현직 대통령은 다음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대선, 다음 대선까지 영원히 준비만 했겠지. 지금의 대통령을 만든건 율리아의 손길덕분이었다. 그녀는 적이 많다.
코바.
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코바가 누구죠? 내가 묻자 율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걸 들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는 손을 깍지 끼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가 누군지에 대해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가에 대해 물어보게 되면 길어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듣고나면 네 목숨이 위태로워질수도 있지. 들어볼래?
그게 당신을 습격한 사람과 상관이 있나요?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려주세요. 율리아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율리아는 작게 속삭이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코바는 1953년 3월 5일에 죽었어. 그리고 그가 마지막 밤을 보냈던 방의 서랍장에서 세통의 편지가 발견됐지. 코바는 모든 사적 편지들을 다 없애버렸지만 딱 이 세통만을 죽는 순간까지 남겨두었어. 내가 한 말은 그 편지에 적혀있던 말들이야. 하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니까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내 자수성가 스토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많지. 하기야 누가 맨 손으로 한세대만에 나라 전체를 휘어잡은 석유 재벌이 되겠어. 그것도 금발 미녀가 말이야. 금발 미녀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무궁무진하거든. 하지만 나는 사업을 했지. 자잘한 돈 말고 큰 돈이 벌고 싶었으니까. 그때 내 눈에는 돈밖에 보이지 않았어. 독립국가연합에서 막 독립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돈벌기는 쉽지 않았을거야.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본주의 개념에 취약했지…… 그래. 온갖 미사여구로 꾸며진 내 자수성가 스토리를 완성시킨건 보좌관 자네니까 넘어가자. 물론 금발 미녀라는 내 무기를 쓰는 걸 망설이지는 않았어. 소문이 안날 정도로 적절하게 다뤘을 뿐이야.
그러다가, 그래. 그러던 어느 날이라는 말밖에 표현 할 방법이 없군. 어느 날 수도대학의 사육장에서 붉은 사슴을 보고 따라 들어갔어. 그 안에는 자그마한 남자가 사육장 가까이 서서 새들이 털을 다듬으며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팔꿈치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동작을 흉내내고 있었어. 검은 곱슬머리에 아담한 체형, 헐거운 작업복 아래로 나온 여윈 다리, 거기다 동작 흉내까지, 남자 스스로가 한마리 새가 되어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있더라고. 내가 들어서자마자 공중 그네에 매달려 눈알이 부리부리한 앵무새가 새된 소리로 외쳤지.
이름이 뭡니까? 이름이 뭡니까?
그러자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남자가 노래하듯 따라 했어. 이름이 뭡니까? 이름이 뭡니까? 앵무새는 고개를 숙여 한쪽 눈으로 남자를 뚫어져라 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이번에는 시선을 내게 고정시켰지. 앵무새의 시선을 따라간 남자가 날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네더군. 남자는 미콜라이라고 자기를 소개했어. 그래. 그 남자가 지금 대통령이야. 나중에 미콜라이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너무 매료된 나머지 자기도 몰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음번엔 도구를 챙겨 작정하고 나섰고, 날렵한 유선형 조류 사육장으로 끌려오게 되었다고 했지.
미콜라이는 수의학과 학생이었어. 그런데 관심은 인간에게 쏠려 있었지.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에 빠진 인간이었지. 역사와 문화에 그렇게 박식했는데도 사람이 착했어. 참 특이했지. 그런데 왜일까, 내가 못 배워서 그런걸까, 사람이 그렇게 착하다는게 그렇게 매력적일수가 없더라. 아, 말해두지만 나는 미콜라이에게 반한게 아냐. 사람이 사람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데도 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게 믿기지가 않았어. 그때 생각했지. 아, 이 사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아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사람에 대해서 잘 알면 알수록 인간이 선하다고 믿는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이상을 사랑했지.
난 학교에 기부입학 했어. 건물 두 채를 지어주겠다고 약속하니까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서른 한살짜리 여자를 수도대학에서 넙죽 받아주더라. 사업과 학업을 병행하는 건 힘들었지만 미콜라이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다닌다는 건 행복했어. 항상 그렇지만 그건 행복한건 그렇게 길지 않아. 미콜라이는 친구들이 많았어. 물론 그의 순진한 면모를 보고 접근한 불한당들도 있었지. 그들을 쳐내는건 내 몫이었고. 사람들은 다들 나를 미콜라이의 여자 친구처럼 여겼지. 그래, 그런 유혹을 느껴보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 감정은 미뤄둬야 했어. 난 미콜라이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어. 그는 고작해야 수의사, 아니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장사를 하거나 열심히 공부해 교수를 하던가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지.
그런데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가 없거든?
미콜라이의 이상은 곧 나의 이상이야. 내 꿈이야. 그리고 그 정도의 선함이 있는 사람이 고작 그정도로 멈춘다는게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 나는 우선 그를 수도대학의 학생회장으로 만들었어. 경쟁 후보는 아무도 없었어. 다들 불의의… 사고를 당했거든. 당시 대학교의 학생회장직은 좋든 싫든 정치적 구설수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지. 정부의 비밀경찰들은 순박하고 착한 미콜라이 정도는 쉽게 다룰 거라고 생각 했을거야. 게다가 여자친구 취급을 받고 있는 나는 독재정부의 자금축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콜라이의 이상을 펼치기에는 현재 정권이 어울리지 않았지. 미콜라이는 마냥 착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그 착한 인간이 어쩌겠어?
내가 해줄게.
수도대학 주도의 4월 시위는 좀 이른 시도였지. 아직 반정부 세력이 체계화되어있지 않았으니까. 많이들 다쳤어. 내 얼굴의 화상 자국과 한쪽 귀, 눈은 그때 잃어 버린거야. 얼굴도 얼굴이지만 머리카락 절반이 홀라당 타버려서 참 보기 그랬어.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지. 아,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구나. 그제야 시선을 돌려서 정부에서 시선을 떼고 독립국가연합쪽을 바라보았지. 국회의사당에는 독립국가연합과 같은 상징인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어. 언젠간 저건 불질러버리기로 마음먹었지.
미콜라이는 내 얼굴이 흉해졌다고 날 버리거나 하진 않았어. 하지만 내가 미콜라이를 볼 수 없었지. 정치범 수용소에 한동안 수감되있어야 했거든. 그때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면 가발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겠어. 3개월 뒤에야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고 미콜라이를 만날 수 있었지. 그때 내 모습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몰라. 하지만 확실한건 반정부주의 노선은 확실히 떠났다는거야. 네가 아는 것처럼 처음부터 온건주의자였던건 아냐. 오히려 약간 독재정권과 유사한 파시즘적 성격까지 묻어나기 시작했지. 괴물을 들여본자는 괴물이 될지니.
미콜라이는 혁명의 경력을 앞세워 총선에 참가하기 위해 야당에 입당했어. 야당이라고 해봐야 의석이 열두개 밖에 안됐지만. 게다가 그나마도 대부분 꼭두각시나 다름 없었지. 하지만 나라가 명색이나마 민주주의인 것처럼 보이려면 반대의견은 있어야 했으니까. 국민들의 불만을 피식피식 방귀 껴 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안 그러면 똥이 나오니까. 미콜라이는 반드시 의석을 차지해야했어. 더 시간이 지나면 미콜라이는 잊혀져버려. 하지만 야당의 한 의원이 문제였지. 재밌게도, 그 사람은 내가 한참 사업을 시작할때 알던 사람이었거든. 내가 미콜라이의 보좌관으로 붙어 다니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난 어떻게 해야 했을까? 미콜라이에게 선택권은 그렇게 넓지 않았어. 하지만 난 그렇지 않지.
며칠 뒤 수도 바깥의 폐차장에서 차 한 대가 왔어. 트렁크 안에는 그 의원과 친하게 지내던 술집 여자가 퍼렇게 변해서 들어 있었지. 나는 그 여자의 오른쪽 손목을 잘라서 마호가니 상자 안에 넣고 선물 포장을 해 의원에게 보내도록 지시했어. 그 손과 미콜라이의 연계점은 전혀 없었어. 난 그냥 의원이 도망가길 원했지. 망명도 실종도 사고도 흔한 시대였으니까. 여자는 그대로 압착기에 넣고 버리려고 했는데, 여자의 왼손이 눈에 들어왔어. 왜 그랬을까. 여자는 약지에 반지 하나를 끼고 있었지. 결혼 반지였을거야. 그보다 열배는 비싼 반지도 백 개는 살 수 있지만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라는게 그렇게 매력적이었어. 내 오른쪽 새끼 손가락에 꼭 맞더라고.
미콜라이는 어렵지 않게 야당에 입당했어. 범야권에서 미콜라이의 입지는 금방 넓어졌지. 미콜라이는 매력적인 사람이었거든. 뭣보다 이용해먹기 쉬운 사람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보였을거야. 내가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나는 미콜라이의 앞에서 방심하기 쉬운 사람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조사했어. 미콜라이는 심지어 여당과도 금방 친해지더군. 당시 대통령과의 만찬을 갖기도 했지. 그 풍부한 인맥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지. 어지간한 의원들의 약점들을 하나하나 찾는 작업은 어렵지 않았어. 만약 어려운 일이 있다면 돈을 조금 더 풀어야 했지. 상대를 값비싼 술로 취하게 하는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야.
미콜라이는 내 덕분에 정치적 기반이 든든해졌지. 나는 미콜라이 덕분에 사업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고. 내가 미콜라이를 믿는 것 만큼이나 미콜라이도 나를 믿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우리는 서로에게 단순한 남녀관계가 아니었어. 서로의 축이었지. 만약 내게 미콜라이가 없다면 나는 지독한 경제 마피아가 됐겠지. 미콜라이에게 내가 없었다면 그는 단순한 수의사나 장사꾼이 됐을거야.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가 될 수 있었어.
그러니까, 그가 내게 이해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미콜라이가 야당의 총수가 되었을 때였어. 동시에 미콜라이의 생일이기도 했지. 우리는 즐거워하며 축하연이 끝난 뒤 단둘이 파티를 벌였지. 미콜라이는 케이크에 촛불을 불어 껐어. 내가 유치하게 써놓은 ‘프레지던트 미콜라이’라는 글씨를 보고 낄낄거리면서 말이야. 어둠이 찾아오고도 우리 둘은 키득거리며 불을 켜지 않았어. 창 밖의 가로등 불빛이 가느다랗게 우리 시선을 이어줬어. 미콜라이는 웃음을 띈 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다가 입을 열었어. 내년 총선 구호를 생각해뒀어. 뭔데?
‘예,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습니다.’야. 어때?
미콜라이는 여야를 뛰어넘는 통합 대표를 꿈꾸고 있었어. 현 정권 하에서는 꿈꿀수도 없는 일이지. 독재자에 기생하는 자들과 독재자에 반대하는 자들만이 있는데 거기서 꿈같은 얘기를 하는거야. 나는 기가 막혔지만 그런 말을 하는 미콜라이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자 할 말을 잃었지. 그리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이 사람은 이정도의 권력을 쥐고서도 부패하지 않는구나. 여전히 사람을 믿는구나. 하지만 미콜라이는 꿈 속을 살고 있었어. 그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것은 내 몫이었어. 하지만 어떨까, 그렇게 되면 미콜라이는 미콜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율리아, 나는 당신이 이 구호를 진지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솔직히 미콜라이가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을까.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그를 바라봤어. 미콜라이의 눈은 진지했어.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볼 수 있었어. 나는 그 나비를 이해해야 했어. 그 나비를 따라서 모두를 이해해야 했어.
들어보게, 보좌관. 흔한 비유지만 거미가 나비를 이해하는 순간 거미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네. 마찬가지로 나비가 자신을 먹는 거미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날개에 힘이 빠질 수 밖에 없겠지. 다 같이 꽃의 꿀을 빤다면 행복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해는 덫이야. 이해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약점을 잡히게 되버려. 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냐. 난 그냥 나비의 날개에 매력을 느낀거야. 나비를 이해한게 아냐. 그리고 평생 미콜라이를 이해 할 수도 없을거란 걸 깨달았지.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밝게 웃으면서 외쳤어.
굉장한데, 미콜라이! 내년 총선은 대박이겠어!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지? 미콜라이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나를 끌어안았어. 케이크가 넘어져 바닥에 떨어져버렸지만. 그날 우리는 함께 밤을 보냈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특별한 밤이기도 했지.
미콜라이의 구상안은 예상대로 당장에 반대에 부딪쳤어. 지금 있는 지지자들도 떨어질 판이라는거야. 미콜라이가 야당 총수가 된 후 우리 당은 지지율이 꽤 높아진 상태였거든. 잘하면 대선은 힘들지 몰라도 제 1야당이 될 수는 있다는거야. 미콜라이의 설득은 통하지 않았지. 말했듯이 당 안에는 독재자에 기생하는 자들과 독재자에 반대하는 자들이 바글바글 했으니까. 미콜라이가 말한 통합 후보는 여당에서 나온 기만자라면 모를까, 야당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였어. 미콜라이는 몇 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회의장을 떠나야 했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해줄게.
나는 회의장에 남아서 뒷정리를 하고 따라가기로 했지. 그리고 미콜라이가 나가자마자 당장 야당 의원들을 자리에 앉도록 지시했어. 아, 그땐 나도 야당에서 제법 지위가 있었지. 독재자에게 보내는 만큼은 아니지만 야당 자금줄의 태반은 내가 쥐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설득을 시작했어. 설득을 끝냈을 때 의원들 얼굴을 봤다면 좋았을텐데. 설득하는 동안 쏜 총알의 개수는, 나도 몰라. 자동 소총이었거든. 게다가 총을 쏠 줄 몰라서 꽤 허둥지둥 쏴댔으니까. 실내라서 소리가 더 크게 울린 탓도 있을거야. 내가 설득을 마친 뒤 동의를 세 번이나 요구할 때까지 입을 제대로 떼는 의원이 없었지. 나라가 어수선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때는 오히려 배신자도 드물었다고.
미콜라이가 정책을 펼치는 과정은 어렵지 않게 진행됐어. 다음부터 의원들이 미콜라이와 술을 마실 때 내가 끼어있으면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말은 잘 듣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미콜라이의 여야를 모두 떠난 국익주의 정책을 국민들이 모두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 당연히 독재자도 탐탁찮아 했어. 그때로서는 독립국가연합과의 연줄을 유지해두는게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그때 독립국가연합에서 온 브로커도 만났지. 브로커는 미콜라이에게 이것저것 약속했지만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그런 걸 받아들일 인간이 아니지. 독립국가연합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어. 미콜라이는 끊임없이 여당 지지자들에게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다고 연설했고, 나는 여당 의원들에게 독재자의 새끼들은 저리 찌그러져 있으라고 으르렁 거렸지. 우리끼리 다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한참 미콜라이의 선거 홍보를 준비하던 때였어. 대중은 빨리 잊지만 끊임없이 미콜라이의 이름을 기억시켜둬야 했거든. 그런데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거야. 대중이 아니라 내가. 생리가 세 달 째 없었어. 워낙에 많이 돌아다니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아서 가끔 생리가 멎을때가 있긴 했지만 이건 정말 이상하다고 느껴진거야. 내 오른손 약지의 반지가 두근거렸지.
첫 임신이었지. 젊었을 때라면 모를까, 아이의 아버지는 분명했어. 당장 든 생각은 이걸 처리해 줄 의사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이었어. 이 사실을 미콜라이가 알면 반드시 낳게 할테니까. 그럼 빈민과 재벌의 통합을 꿈꾼다는 후보자가 경제 재벌과 붙어먹었다는 뉴스가 뜨겠지. 이런 추문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어.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구역질이 나더라. 대체 왜, 하필 지금? 피임은 분명하게 했었는데. 한참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어.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조용히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했지. 연신 구역질이 올라왔지. 그렇게 한바탕을 토하고 나니까 뭔가 다른 생각이 들더라.
이 아이는 미콜라이의 아이다.
모두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미콜라이의, 미콜라이가 사랑할 수 있는, 미콜라이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이다. 그 생각이 드니까 아이를 지울 수가 없었어. 낙태를 생각하려고 해도 반복적으로 그 문구만 떠오르는거야. 이 아이는 미콜라이의 아이다. 그리고 생각했지. 미콜라이가 부도덕해질 필요는 없어. 부도덕한건 나 하나로 충분 한거야.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엄마가 되는건 내 명성에 줄 하나 더 긋는 정도로 큰일도 아니었어.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서 뭐든 가리지 않는 수전노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적어도 언론에 뜨지는 않게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런 와중에도 미콜라이의 선거 기획은 꾸준하게 진행됐어. 하지만 지지율은 아직 31% 정도로 모자랐지. 이정도라면 재작년이라면 꿈도 못 꿀 정도지만 확실하게 이길만한 자신이 필요했어. 이 정부는 분명히 부정을 저지를거야. 그걸로도 감당 못할 정도로 큰 격차가 필요했지. 압도적인 표차. 쇼가 필요한 시점이었지.
나는 한 가지를 기획했어. 우선 검찰이 나를 조사하게 만들었지. 불법 뇌물 수수와 온갖 탈법적 행위들에 대한 것들 말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검찰을 피하는 척 했지. 아픈 척과 해외 도피와 먹히지도 않을 뇌물을 보내는 행위 같은 것 말이야. 그러다가 한 달 쯤 지나고서 자포자기한 척 귀국했지. 모든 것을 자백하겠다고.
내 계획은 그거였어. 내가 공항에서 돌아오는 순간 엄청난 기자들의 인파를 맞이하겠지. 그러면 난 현 독재정권을 맹비난하는거야. 아, 그래. 맞아. 그건 쇼였어. 내가 그런 말을 떠들고 나면 정부가 증거를 숨겼건 말건 우리쪽 지지율은 오르게 되있거든. 나는 여당에서 보낸 야당의 스파이가 되기도 하는거지. 그리고 그 쇼의 클라이맥스는 총성이었어. 내가 매수한 사람이 나한테 총을 쏘기로 되어 있었어. 팔, 다리처럼 위험하지 않은 곳. 그쪽은 내가 3개월 안에 빼주기로 약속했고, 나는 입원하면서 검찰조사를 피하는거지. 그리고 동정여론이 ‘독재자에게 이용당한 가엾은 여인’에게 쏠리면 검찰은 내게 손도 못 떼고 수사를 종료해야 하는거야.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 살인 미수극의 분노는 여당에게로 향하거든. 물론 미콜라이는 알지 못했지. 그저 혼란스러워하며 날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귀국했을 때 모든게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지. 수많은 기자 인파와 내가 심어놓은 심부름꾼, 굳은 표정으로 기다리는 검찰, 그리고 초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미콜라이. 나 역시 미콜라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지만 선글라스 때문에 시선처리를 들키지는 않았어. 그것 때문이었을거야. 내가 미리 그 녀석을 발견 못 한 건.
누군가 내 가까이에서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어. 반사적으로 가방을 들어 올려 얼굴을 막았지. 빵. 하지만 가방은 바닥에 툭 떨어져 버리더군. 그때 난 내 손가락 세 개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다는 걸 알았지. 바닥을 기는 손가락 아래쪽 마디에 파란색 반지가 바닥에 딱딱 거리며 부딪쳤어.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보는데 한 번 더 총성이 울렸어. 사람들 말로는 연달아 세 번을 당겼다던데. 두 번째와 세 번째 총탄은 내 배를 맞췄어. 그래, 내 배 말이야. 누군가가 그 남자를 카메라로 쳐서 쓰러뜨렸고 경찰들이 그를 제압했다더군. 난 당연히 누군지 알 수 없었지. 그냥 내 배에서 흘러나오는 체액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어. 오른손으로 막으려고 해도 이미 텅 빈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지. 경악한 표정의 미콜라이가 다가오는게 보였어. 천천히 무너져 내렸지만 고통은 없었어. 발끝부터 차가워지고……
아이의 이름은 뭐가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라.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어. 미콜라이에게 아이의 이름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어. 그가 다른 누구보다 가장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아이의 이름을. 아이는 내 눈동자의 색과 미콜라이의 머리색을 닮았지. 그랬을지도 몰라.

깨어났을 때는 병원이었어. 창밖의 풍경이 낯설었어. 병실 안은 온통 꽃바구니 투성이였지. 정신이 들자마자 즉시 몸 상태를 확인했어. 죽지 않은 것 같으니 병신이 되지 않았는지 알아봐야지. 발가락도 제대로 움직이고, 목소리를 내는데도 문제가 없었어. 오른쪽 손가락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전했지만 상관없지. 하지만 배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어. 근육이 상한걸까. 어떤 상태로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어.
의사는 내가 정신이 든 걸 확인하자마자 살아있는게 기적이라고 말했어. 그렇게 흔한 말인데도 꼭 그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나는 웃으며 병원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했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흔들더라고. 이미 병원은 막대한 액수를 투자받았다고 했어. 국민들의 성금이 병원에 거액으로 기부되었고, 독재정권에서는 암살범과의 연계를 거부하며 최고의 의료진을 파견해 나를 치료하도록 지시했다더군.  이미 이 병원에서 중요한 치료를 다 한 뒤에 파견 된 거지만. 하지만 그런 시도는 소용이 없었다나봐. 나라 곳곳에서 연일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난다더군. 그리고 그 반대쪽에 있는 독재정권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에 의해서 매일 충돌이 일어난다고 했어. 그 선두에 야당총수 미콜라이가 있었어.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TV를 켰어. 나 원 참,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더군. 마흔살이나 됐는데 내 스무살 중반, 서른살 대학시절의 사진이 시위 피켓마다 걸려 있더군. 심지어 독재여당 지지자들의 피켓에도 내 사진이 걸려있었어. 암살미수극은 야당총수 미콜라이가 꾸민 짓이라는거야. 그 사건으로 이득을 본건 미콜라이였으니까 당연한 추측이었지. 서로 나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려고 하면서 졸지에 나는 달마다 고아원에 거액을 기부하고 빈민구제운동을 위해 직접 힘쓰는 야당의 보좌관이자 도덕적인 재벌가가 되었지. 여당에 비열한 협박을 당해 돈을 내놓으면서 말이야. 여당으로썬 내게 흠집내기 위해서 자기 치부를 드러내야 할 판이었으니까 오히려 내 편을 적극적으로 들어주던데. 그 난리통 사이에 내 이름으로 된 재단까지 생겼어. 웃기는 노릇이지.
누가 봐도 독재정권은 경각에 처해 있었어.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오기 힘들다는 판단이 섰지. 혁명은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일어나야 했어. 나는 의사에게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어. 의사는 절대 안된다고 했다가 제발 기자회견 정도로 만족해달라고 애원했지. 절대 안될 말이지. 내가 살아났는데 병원에만 있으면 저 분위기는 사그라져 버린다고. 지금 저 불길에 기름을 부을 동기가 필요했어.
나는 미콜라이에게 몰래 연락을 했지. 미콜라이는 내 전화를 받고 당황하면서도 내 차분하게 내 계획을 들었어. 참,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이상해. 죽었다 살았는데도 다짜고짜 전화해서 홍보 지휘라니. 나는 미콜라이에게 준비할 것들을 지도하고는 퇴원 준비를 하겠다고 했어. 미콜라이는 말리긴 했지만 혁명이 끝나면 원하는데로 몇 년이고 입원해 있겠다는 내 약속에 결국 응했지. 그런데 미콜라이가 마지막으로 그 말을 꺼내더군. 율리아, 아이에 대해서는 유감이야.
…….
미콜라이는 똑똑한 사람이야.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고 있었을까? 나는 대답도 없이 끊었어. 그리고 울지 못했던 그 날을 이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울어야 했지. 아이가 나 대신 죽었다는 생각은 피하기 힘들었어. 그때 그 일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으니까.
애도의 시간은 길어선 안됐어. 쉴 시간도, 애도할 시간도, 미콜라이를 더 많이 사랑할 시간도 혁명이 끝난 후에는 충분할테니까. 나는 미콜라이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자마자 바로업혀서 차로 이동했지. 간호사와 의사들이 따라와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말릴 길이 없었지. 내가 바로 향한 곳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었지. 그곳에서는 독재자를 우호하는 사람들과 독재자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어. 그 둘 만큼은 미콜라이로서도 하나로 묶을 수 없었지. 특히나 미콜라이라면, 자기네 사람이 당한 터이니 여당과의 타협이 불가능했어.
그러니까, 내가 해줄게.
광장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 두 패로 갈라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어대며 싸우고 있었지. 사이에 있던 경찰들은 그 싸움을 말리기에 여념이 없었어. 미콜라이, 너는 이런 사람들도 사랑한다는 거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물어보면서 차에서 내려 휠체어로 옮겨 타서 광장으로 향했어. 과연 이 사람들은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싸우는걸까. 미콜라이는 그렇게 믿고 있을까. 내가 광장에 들어서자 시선이 서서히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어.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어. 내 사진들이 사방에 걸려 있었어. 그녀야? 그녀야! 똑같이 생겼어! 상처는? 귀가 없는데. 멍청아, 총을 맞았다잖아.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는 그 상처인가봐. 아직 다 낫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계속 휠체어를 끌고 앞으로 향했지. 몇몇 사람들이 내게 접근하려고 주춤했지만 다가오지 못했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막대한 고요가 사람들을 꽉 붙들고 있었지. 그 고요가 나를 위해 준비된 도로 같았어. 그리고 미콜라이를 위한. 나는 광장을 지나가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국기 앞에 섰어. 그리고 준비해 온 물건을 쥐었지. 경찰 하나가 나를 제지하려고 다가가려 했지만 다른 경찰들이 말렸어. 모두들 내게 시선을 떼지 못했어. 내가 생각했지. 지금이 바로 혁명의 절정이구나.
나는 일어나 도끼를 들고 깃대를 옆으로 찍었어. 한번 두 번, 계속해서 깃대를 찍었어. 광장 안에는 나무를 찍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 네 번쯤 찍었을 때 깃대의 절반 이상이 잘려나가면서 깃대가 기울어졌어. 그 서슬에 배를 봉합해놓은게 터져나가고, 순식간에 환자복에 붉게 물들었지. 그제야 나는 도끼를 내팽개치고 큰 소리로 외쳤어.
우리나라는 단 한 번도 독립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게 바로 오렌지 연설의 서문이야. 미콜라이의 방식이 틀리다는건 아냐. 하지만 인간은 적을 필요로 하는 종족이야. 자기네들끼리 싸우지 못하게 하려면 적을 외부로 돌려야지. 그런면에서 독립국가연합은 적절했어. 언제나 그들과 우리는 불공평한 관계였거든. 여당지지자들도 독립국가연합은 싫어했어. 야당은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이 연설을 시작으로 대세는 미콜라이에게로 확 기울었지. 나를 대통령으로 내세우려는 시도도 없잖아 있었지만 받아들일 생각따윈 추호도 없었어. 어디까지나 미콜라이의 이상이 내 이상이었으니까. 당장이라도 나라를 뒤집어엎자는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미콜라이는 차분하게 대선까지 기다렸어. 그리고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
뭐, 거기까지는 예상대로였어. 결국 그 투표 비리 때문에 전 세계가 우리나라를 주목하게 됐고 독립국가연합이 손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평한 재투표가 이뤄졌으니까. 재투표때는 미콜라이의 지지율이 22%는 더 올라갔지. 그게 바로 이번 여름의 오렌지 혁명이야. 여기에 대해서는 너도 다 알잖아? 그때 내가 입고 갔던 환자복이 오렌지 무늬였던 바람에 오렌지 혁명으로 명명됐어. 미콜라이는 적극적으로 그걸 홍보에 활용하던걸. 나는 연설을 마치자마자 대선에 재선이 끝날 때까지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지만.
그리고 난 미콜라이가 대통령 청사에 들어가자마자 총리 관저에 들어가게 되었지. 총리라고. 촌구석에서 기름 팔던 소녀가 나라의 재벌인 도시에 총리직을 맡게 됐다는 건 좋은 성공 스토리지.
응? 이야기는 이게 끝이야. 이후로는 자네도 다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총리로 임명되자마자 보좌관으로 들인게 자네야. 아, 코바. 코바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 아까 처음에 코바가 남긴 세 통의 편지까지 얘기했었지. 편지 중 하나는 그의 적수인 유고 연방의 요시프 티토가 보낸 편지, 한 통은 코바의 스승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자기 아내에게 저지른 무례를 사과하라고 병상에서 보낸 편지, 마지막 하나가 단 한줄, ‘코바, 왜 당신에게 내 죽음이 필요하지?’라고 짤막하게 묻는 니콜라이 부하린의 편지였어.
이제 코바가 누굴 말하는지 알지도 모르겠군. 그래. 코바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스탈린은 어렸을 때 본 소설 속 인물 코바에게 깊은 감명을 느끼고 자기 별명을 코바라고 지었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부하린도 숙청당하기 직전까지 사석에서는 스탈린을 코바라고 불렀다네. 그 편지에 쓰인 질문 한 줄의 질문은 대숙청의 절정의 단말마였어.
미콜라이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내가 총리로 임명되어선 안될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 총리란 직위는 어딜가도 시선을 피할 수가 없거든. 특히나 내가 오렌지 혁명을 주도 한 뒤로는 더욱 그랬지. 그래서 미콜라이는 생각한거야. 나를 먹어야겠다고. 이제 알겠나. 우리는 미콜라이의 군대를 피해서 도망온거야. 그러니 미콜라이의 지원을 기대하지는 말게.
그래. 난 아까까지만 해도 미콜라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알 수 있어. 미콜라이는 이 테러를 야당의 잔당들과 독립국가연합의 행위로 몰아붙일 생각일거야.
사실, 보좌관. 여기까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네. 거미는 나비를 먹을 수 밖에 없어. 그건 당연한 이야기지. 이해라는 건 불가능해. 이해는 덫이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고 있어. 난 미콜라이를 이해하네. 그의 사상은 곧 나의 사상이었던 것이니까. 그리고 미콜라이도 드디어 나를 이해해 버렸군.
난 아직 죽을 생각이 없다네. 보좌관, 나와 미콜라이 사이에 타협점을 찾기는 힘들거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없는 것도 아니지. 미콜라이는 나를 쫓아내는 정도로 만족할거라고 생각하네. 나는 독립국가연합의 테러로 인해 보좌관을 잃고 충격을 받아 낙향하고 말이야. 그럼 다시 사그라들던 지지율의 불길이 타오르겠지. 결국 나나 미콜라이에겐 자네의 죽음이 필요하네. 피 흘리는 영웅의 상징으로써 말이야. 나를 이해하게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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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고민이네요. 원래 이해하기 위하여, 이해를 위한 과정 이런 식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이야기를 각색했습니다.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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