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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외계인

2011.08.26 23:3308.26

  외계인

“외계인이요?”
왜 하필 별명이 외계인일까.
“그냥 지내다 보면 알아. 나도 그랬어.” 선배는 그렇게 말하곤 키득거리며 2학년 교실쪽으로 사라졌다. 지은은 멀뚱멀뚱 그 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딸기코, 하마, 수면제 따위 별명이야 어느 학교에나 있는 별명이므로 괜찮지만 외계인이라. 물론 영어 선생님일 경우에는 English Teacher의 E.T를 따서 외계인이라 부르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이라고 한다. 너무 가르치는 것이 어려워서 외계인인 걸까? 지은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궁금증은 주체 할 수 없게 증폭되어갔다.
지은은 어릴 적부터, (지금도 어리지만) 괴담이라던가 UFO라던가 음모론이라던가 따위의 이야기에 무척이나 빠져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학교괴담을 수집하러 다니는 것만 봐도 그 애정을 할 수 있겠다. 보통 사람이라면 외계인이란 별명에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겠지만 지은은 달랐다. 로스웰형 외계인처럼 생긴걸까? 같은 궁금증이 끊임없이 지은의 머릿속에서 굴러다녔다.
지은의 생각에 괴담이란 해당 괴담이 유행하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였다. 항상 괴담에는 불행한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는 대부분 주변의, 사회의 불합리한 대우와 질책, 속박 등으로 상처받고 불행해진 이들이다. 이들은 보통 나쁜 짓을 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자신만의 슬픈 이야기가 있다. 음모론 또한 단순히 생각하면 사회 패배자들의 망상에 불과하지만 그 사회 패배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벽을 느꼈기에, 엄청난 악당들이 아니고서는 저지를 수 없는 나쁜 짓들을 은연중에 당해왔다고 생각하기에 그 도피처로서 누군가를 욕할 음모론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마침내 국어 시간이 끝나고 2교시 수학 시간이 시작되었다. 수업 시작종이 침과 동시에 지은의 궁금증을 증폭시켜왔던 그 ‘외계인’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강단 앞에 섰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 키는 160정도의 단신에 나이에 맞게 배가 툭 튀어나온 체형이었다. 아래 위 모두 활동하기 편한 차림이었다. 원형탈모가 한참 진행된 머리에 얼굴도 별 특징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단신에 배가 나온 체형이 뭐, 외계인으로 보려면 볼 수 도 있지만 텅 빈 머릿속에 외계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외계인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동그랗고 큰 뿔테 안경과 톡 튀어나온 배에 팔다리는 가느다란 것이 로스웰형 외계인을 닮기는 했다.
그렇다고 수업이 특별히 어렵거나 외계인스러운 점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외계인 선생님의 수업은 매우 엄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명쾌하고 은근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엄한 것도 수업시간 뿐이었고 수업 외에는 너무도 자상한 선생님이셨다. 시옷 발음이 잘 안 되는 혀 짧은 발음에 살짝 드러나는 경상도 사투리가 있긴 했지만 그런 면이 오히려 친근하고 다다가기 편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2달 정도의 시간이 지날 무렵, 지은의 머릿속에서는 외계인 선생님이란 별명이 흐릿해있었다. 친구들도 입학 초기엔 지은과 같이 외계인 선생님이란 별명에 대해 들었던 모양이지만 아무도 그런 별명으로 선생님을 지칭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즈음,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수학 선생님이 외계어를 하더라, 라는 내용의 별 시덥잖은 이야기였지만 이 소문은 아이들에게서 잊혀져 있던 외계인이란 별명을 상기시키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문의 발원지는 수학 선생님이 담임으로 있던 4반이 유력했다.
지은도 오랜만에 다시 떠오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4반의 친구를 찾아갔다.
“아, 난 못 봤어. 그런데 애들이 봤대. 으슥한 곳에서 손바닥에 대고 이상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말들을 막 하고있었다..카더라고.”
수경이 팔짱을 낀 채 지은의 질문에 답했다. 말하는 수경 자신도 별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흔한 카더라-통신이야?”
“뭐, 내가 직접 본게 아니니까 뭐라 못하겠어. 그냥 소문이 그래. 근데 넌 뭐 그런거에 관심가지냐? 기집애 취향 독특하네.”
수경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
“하여간 넌 이상한 놈이니까.”
제멋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방 교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선배가 외계인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가버릴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수학 선생님은 대부분의 아이들에게서는 인기 있는 선생님 편에 속했다. 공부 잘 하는 친구들에게는 명쾌한 수학 강의로 인기가 좋았고, 어중간한 친구들에겐 좋은 상담자로 인기가 좋았다. 다만 다소 삐뚤어진 친구들에겐 무섭고 고집불통인 꼰대, 의 인식이 있는 듯하다. 지은은 이번 소문의 발원지가 그런 친구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선생님을 싫어하는 친구들이 선생님을 놀림감으로 만들기 위해 악의적으로 퍼뜨린 소문.
지은은 그 날 이후로도 소문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지만 거친 친구들에게 “뭐야, 꺼져.” 와 “너도 동족이냐?” 같은 말을 몇 번 듣고는 지치기 시작했다. 지은의 행동은 소문을 널리 퍼뜨릴 뿐이었다. 수학 선생님은 소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외계인 눈 같은 안경, 배, 팔 다리도 이전과 별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처음 봤을 때보다 팔다리는 더 앙상해지고 배는 좀 더 나오고 머리는 더 빠져서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눈이 외계인의 그것처럼 흰자의 비율이 줄어든 것 같았다. 심지어 피부도 살짝 회색빛을 띄는 것 같았다. 소문 이후, 수학 선생님은 슬슬 외계인 선생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지은은 시립 도서관에서 친구와 놀다가 7시쯤 집으로 가려고 가방을 챙겼다. 친구는 부모님 차를 타고 먼저 집으로 갔고 지은만 혼자 남아 책을 정리했다. 각종 음모론, 괴담류 서적들을 여기저기 제자리에 꽂아두고 낑낑거리며 무거운 가방을 들쳐 매었다. 구겨진 치마를 대충 펴주고 열람실에 붙어있는 작은 거울 앞에 섰다. 조그마하지만 귀여운 맛이 있어. 충분히 예쁘다구. 혼자 생각하며 씨익 웃어봤다. 그 때,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지은의 뒤로 무언가 스윽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지은은 본능적으로 쪼그려 앉아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숨이 가빠졌다. 숨 소리를 죽이려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 잠시 있자 심장과 숨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지은은 용기 내어 책상을 조심스레 짚고 눈만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도서관 입구에 누군가 서 있었다. 전화를 하는 듯 보였다. 작은 키에 앙상한 팔다리, 거의 다 빠진 머리카락. 외계인 피부를 연상시키는 연회색 정장의 뒷모습은 분명 수학 선생님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은도 수학 선생님이 자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가곤 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생각났다.
지은은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슬그머니 책상 밑에서 나왔다. 기껏 펴주었던 치마가 다시 구겨졌다. 숨는 것을 선생님이 봤다면 언짢게 생각하셨을 텐데. 조그마한 걱정을 안고 선생님이 있는 도서관 입구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선생님은 누군가와 전화 중 이었다. 영상통화인 듯 전화기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의 톤을 봐서 무척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인 듯 싶었다. 군데 군데 웃음소리가 섞여있었다. 아직 거리가 있어서인지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누굴까? 사모님일까? 자녀분일까? 지은은 궁금해하며 전화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알뤠쉬레마렝아아아아쉘리메우리라알”
  멀어서 알아듣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사람의 언어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 언어는, 음절도, 문장도 없는 지금까지 지은이 들었던 그 어떤 언어도 아니었다. 간혹 꺽꺽대는 소리도 들렸다. 말 뿐만이 아니었다. 전화기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갖은 이상한 제스쳐를 전화기를 통해 보내고 있었다. 눈꺼풀을 뒤집는가 하면 이빨을 두드리기도 하고 콧구멍에 털을 뽑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배배 꼬며 웃고 있었다.
아무리 지은이 괴담 애호가라지만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지은은 괴담 애호가이긴 하지만 괴담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괴담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궁금한 것이지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광경은 분명 그동안 지은이 들어왔던, “외계어를 하는 외계인같이 생긴 선생님”이라는 소문이 숨겨진 무엇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었다는 것이 된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라는 느낌이 순간 지은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가까스로 진정되었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조용히,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그대로 도서관 뒷문을 향해 달렸다. 무서웠다. 외계인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 라고 호언장담했던 지은이지만 막상 기괴한 상황에 처하자 두려움이 먼저 엄습했다. 내가 그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순식간에 전혀 모르는 이상한 존재가 되었다. 무조건 달렸다. 자신이 본 것이 꿈이길 바라며.
다음날, 지은은 초췌해진 모습으로 교실로 와 자리에 앉았다. 밤 새 도서관에서 본 광경이 잊혀 지질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정말 외계인인가? 정말 외계인이라면 무슨 목적으로 지구에서 수학 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걸까? 염탐인가? 지구인과 친해지고 싶은 건가? 먹잇감을 고르고 있는 건가? 여고생이 외계인에게 가장 야들야들하고 맛있는 먹이일지도 몰라. 난 맛없겠지? 난 쪼끄마하고 못생겼으니까 나보다 예쁜 애들을 더 좋아할거야.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게 먹기도 좋잖아?
점심시간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에 치여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의 공상은 지구 멸망의 날부터 지은의 친구가 잡혀가면 날 대신 잡아가! 라고 해야 하나 모른 척 놔둬야 하나 라는 쓸데없는 고민까지 오락가락하며 지은을 괴롭혔다. 모른 척 놔두는게 나은거 아닐까...라고 생각하던 무렵 잡혀가는 주인공이었던 친구 아지가 다가와 밥 먹으러 가자고 지은의 어깨를 툭툭 건들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미안해! 안 그럴게!”라고 말해버렸다. 아지는 어이없어하며 지은의 뒷통수를 가볍게 때리고는 팔을 붙잡아 식당으로 향했다.
지은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입에 우겨넣고 식당을 나왔다. 계속 정신 못 차리는 지은을 보고 아지가 지은의 작은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별 반응이 없다. 그 손가락을 그대로 멍하니 벌어져있는 지은의 입에 넣었다.
“퉤, 퉤 뭐, 뭐하는 거야!?”
“아니 뭐.”
아지는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를 살짝 흔들어주며 답했다. 지은이 퉤퉤거리며 헛구역질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기다란 손가락을 지은의 옷에 슥슥 닦았다.
“정신 차리라고.”
도끼눈을 하고 아지를 쏘아보는 지은에게 무표정으로 말했다. 새하얀 피부에 날카롭게 서 있는 콧날과 길죽히 자리 잡은 눈은 아지를 굉장히 차가운 인상으로 만들었다. 보통 천방지축인 지은도 아지의 눈빛 앞에서는 풀이 죽거나, 침착해지곤 하였다. 아지가 계속 특유의 눈빛으로 지은을 내려다보자 지은도 머릿속을 정리하고 침착해졌다. 앞뒤를 정리해서 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지는 무표정이지만 다소 흥미롭다는 표시로 오른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래서, 날 그냥 넘겨야겠다 까지 결론이 났었다 이거지?”
아지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지은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게 나보단 네가 더 예쁘기도 하고 잡혀가도 잘 살아 올 것 같기도 하고” 아지의 눈은 지은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안.” 지은은 고개를 숙인채 아지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지은도 그 눈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다. 외계인 선생님이 있었다. 교문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외계인이라.”
아지의 왼쪽 입꼬리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뭔가 고약한 꿍꿍이를 고안할 때 나타나는 아지 특유의 표정이다. 내 친구지만 정말 못된 애야, 지은은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첫째. 난 외계인처럼 흐리멍텅한 존재는 안 믿어.”
아지가 차갑게 웃으며 지은에게 눈길을 돌렸다. 순간 지은의 머릿속에 ‘흐리멍텅한 존재’가 뭐지? 란 의문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둘째. 이지은, 넌 정말 ‘이상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외계인으로 단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해?”
서늘하고 깊은 아지의 눈이 지은의 두뇌에 서늘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좀 더 확실히 연구해봐야 하지 않을까?”
확실히 그랬다. ‘이상한 언어’를 쓸 뿐인데 외계인으로 단정 짓는 것은 비약이 심하다. 지구 어딘가 이름 모를 나라의 이름 모를 언어를 쓰는 이들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무언가 비밀이 있을 것이다.
“정말 외계인이라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재밌겠지.”
아지가 호기심과 빈정이 섞인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지은과 아지는 학교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웬만한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파는 카페이지만 넉넉히 대화를 나누기엔 적격인 장소다. 둘은 가장 싸고 오래 먹을 수 있는 아메리카노를 각각 들고 자리에 앉았다. 아지가 뾰족한 코끝을 아메리카노 잔에 대고 향기를 음미하고 한 모금 들이켰다.
“좋아. 우선 외계인의 정의가 뭐지?”
아지가 가방에서 8절지 스케치북을 꺼내 [1. 외계인의 정의] 라고 큼지막하게 적었다.
“사전에 의하면.. [공상 과학 소설 따위에서 지구 이외의 천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지적인 생명체] 래.”
지은이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목보다는 작은 글씨로 스케치북에 적었다.
“그렇다면 특정 개체 A를 외계인으로 단정 지으려면 ‘지적 생명체’이면서 ‘지구 이외의 천체에 존재’ 라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군. ‘지구 이외의 천체에 존재’라는 부분은 현 인류의 과학수준으로 볼 때 ‘지구 태생이 아니다.’ 또는..”
아지가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
“또는 ‘인류 외의 지적 생명체’?”
지은이 살짝 껴들었다.
“무슨 소리야. 그건 ‘지구에서 발생한 지적 생명체는 인류밖에 없다.‘ 라는 명제가 참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아지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당연한건데 뭘 증명해?”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 원리 몰라? 그 명제를 사실로 입증하려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조사해야 해. 아직도 매해 새로운 종의 생물체가 발견되고 있어. 만약 지구에 인류보다 훨씬 발전된 지적 생명체가 있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면, 인류는 영영 그들을 찾을 수 없겠지. 증명 불가능이야.”
아지가 이런 단순한 것까지 설명해야하냐는 투로 쏘아붙였다. 너 참 잘나셨어요. 지은이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럼 ‘지구 태생이 아니다.’ 의 경우에도 만약 외계인 부부가 지구에 와서 애를 낳으면 걘 외계인이 아니라는 소리야?”
지은이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지가 순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말없이 아메리카노 잔을 노려보았다.
“그것도 그렇군.”
슬슬 지은이 초조해지려던 차에 아지가 입을 열었다. 아지는 미간의 주름을 풀고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런 식으로는 못 해. 우리가 지금 인류는 무엇인가? 같은 철학적 주제를 논하려는게 아니잖아.”
지은이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말했다. 잔속의 아메리카노를 내려 보다 슬쩍 아지의 얼굴을 보았다. 딱히 화난 얼굴은 아니다.
“네 말이 맞아. 이런 식으로는 우주의 기원까지 튀어나오겠지. 다시 해보자.”
아지가 스케치북을 한 장 넘기고 큼지막하게 [특정 개체의 종을 판별하는 통상적인 기준에 근거한 ‘외계인 선생님’의 종족 판별] 이라고 적었다. 길기도 하다.
“우선, 우린 인간이고 통상적으로 우린 가장 먼저 ‘외형’으로 종을 판별하지.”
제목 밑에 [1. 외형] 이라고 적는다.
“외형은 평범한 사람과 사람아과 사람족 사람속 사람으로 보이는데 말이야.”
“무슨 소리니..?”
지은의 중얼거림이 들리기는 하는 건지 아지는 혼자 무언가 열심히 적었다.
“신장 160cm(추정), 체중 65kg(추정), 연령 50세(추정), 검은색 큰 뿔테안경...”
이후로 3시간정도 지은은 아메리카노를 들었다 놨다 홀짝거리기를 반복하고 아지는 혼자 웅얼거리며 스케치북 10여장을 써내려갔다. 지은이 자신의 빈 잔과 아지의 가득 찬 채 식어버린 잔을 번갈아 보며 ‘아지는 참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긴 하지만 좀 이상한 친구야. 그래봐야 여고생이지.’ 라는 문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릴 때 즈음 아지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골칫거리 문제를 풀었을 때의 경쾌한 탄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안되겠어. 우린 이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해. 가장 확실한 건 DNA 판별이겠지만 여건상 적합한 장비를 구하기가 힘들고. 탁상공론으론 해결이 안 돼.”
지은은 ‘그걸 이제 알았냐.’는 눈으로 아지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 중에서는 선생님을 외계인으로 단정 지을 근거가 없어. 어딜 봐도 평범한 인간이야. 소문과, 네 목격담을 제외하고는 선생님이 ‘일반적인 지구인’과는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네.”
아지는 인중에 긴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조곤조곤 말했다.
“정보를 수집해야 돼. 내일 시간 있지?”
멋대로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지은은 또 이런 식으로 끌려가는건가 라고 중얼거리며 아지가 남기고 간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켰다. 커피콩이 목욕하고 버린 물 같다.

아지는 먼저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에 정확히 도착했음에도 차가운 얼굴의 아지를 보니 괜히 늦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지은이었다. 아지는 길쭉한 다리를 감싸는 검은 7부 스키니 팬츠에 하얀 민무늬 나시 티를 입고 있었다. 간편하게 입었는데도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아지가 입었으면 미니스커트였을 스커트가 무릎을 덮고 있는 지은으로선 아지의 낭창낭창한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우선, 선생님의 집을 둘러보고 주변 이웃을 탐문하자. 노는 토요일이니까 웬만하면 다들 집에 있겠지.”
아지는 아이패드를 꺼내들고 선생님의 집을 지도에 입력했다. 가까운 주택가다. 꼬불꼬불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조잡한 콘크리트길을 따라 걸었다. 올라갈수록 못난 집, 예쁜 집, 큰 집, 작은 집이 숨 막히게 다닥다닥 붙어 길을 점점 죄어들었다. 두 사람이 겨우 통과할 법한 길을 몇 번 지나치자 마침내 선생님 집 앞에 도착했다.
지은은 선생님의 왜소한 이층집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묘한 분위기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이층집의 지붕까지 가리는 높은 담장을 빽빽이 감고 넘는 넝쿨이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집을 숨겼다. 비교적 넝쿨이 덜 감겨있는 대문 쪽으로 가자 녹이 군데군데 묻은 묵직한 대문 틈으로 날카로운 맹수의 기운을 풍기는 도베르만 한 마리가 살기어린 눈빛으로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지레 겁먹은 아지와 지은은 다시 담장으로 물러났다. 길쭉한 아지가 까치발을 하고 넝쿨을 살짝 치웠다. 훤한 대낮임에도 집의 모든 창문이 어두운 빛깔의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집의 내부까지 살펴보기는 불가능했다. 아지의 눈 사이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보통 만화나 게임 보면 우체통이랑 쓰레기통부터 뒤지지 않아?”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던 지은이 눈을 빤짝 빛내며 종종걸음으로 우편함 앞으로 갔다. 누가 볼까 요리조리 눈치를 살피다 슬쩍 우편함을 열었다. 아무 것도 없다. 혹시나 바닥에 무언가 있을까 싶어 손을 넣어 휘저어 봤지만 손가락에 걸리는 것이라고는 반 정도 태우다 만 담배꽁초 여섯 개 뿐 이었다. 아지가 지은이 건넨 담배꽁초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디스 플러스.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2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골고루 태우는 국산 담배. 여성보다는 남성이 선호. 주로 저소득층에서 중하급 정도 계층에서 많이 소비됨. 꽁초의 길이가 비슷함. 각각 동일한 인물이 태운 것으로 보임. 꽁초들이 균일하게 앞부분이 누렇게 그을린 것으로 보아 이 꽁초의 흡연자는 타는 방향을 아래로 놓는 경향이 있음. 담배를 전부 태우기보다는 한 두 모금 태우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듯함. 담뱃불은 퉁겨져 있음. 눌러 끄는 성향이 아님. 세 개는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있음. 4일전에 비가 왔었던 것과 연관 지어 볼 때 흡연자는 거의 매일 이 앞에서 하루 한 개비씩 담배를 태우는 것으로 추정됨.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에 우편함의 꽁초를 비우는 것 같음. 본인이 비우는지 여부는 알 수 없음.”
아지가 혼자 중얼거리며 열심히 아이패드에 메모했다. 지은은 뭔가 많이 말하긴 했지만 참 쓸데없는 정보라고 생각했다.
“뭘 가리고 싶은 걸까?”
지은은 다시 선생님의 집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사납게 헝클어진 무기징역수의 머릿결을 가진 집이다. 스스로 난파된 죄수선과 외딴섬, 무인도를 연상시켰다.
선생님의 집에서 눈길을 돌려 다른 집으로 향했다. 한 치의 공간도 허용치 않고 들러붙은 집들. 너도 나도 팔짱을 끼고 강강수월래라도 하듯 적에게 맞서는 의연한 의병의 자태다. 작고 볼품없는 집들이건만 거대한 하나로 모여 나름 웅장하기까지 하다. 못난 난장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구축한 요새. 평균적으로 다소 빈곤한 경제력 탓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각종 사회적 폭력을 협력과 동지애로 극복한다. 간혹 지나다니는 주민들과 담벼락을 넘나드는 목소리들을 보고 있자면 정말 허물없이 끈끈한 정을 지키는 듯 보였다.  
선생님의 집만 빼고. 난장이들의 마을은 선생님의 집을 악독한 마녀가 살기라도 하듯 기피하는 모양새다.
“뭔가 있긴 있어. 그치?”
지은이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말했다. 답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지는 저 멀리서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대화중이었다. 대화라기 보단 베테랑 기자가 특유의 날카로운 혓바닥으로 상대의 급소를 푹푹 찌르는 모습이었지만. 아지가 눈가와 입가에 여유를 머금고 입을 열 때마다 아주머니는 움찔움찔 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알았어, 아가씨. 기억나는 대로 좀만 얘기해줄게.”
지은이 대화를 듣기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마침 아주머니가 한숨을 뱉으며 아지에게 항복하고 있었다.
“저 가족이 이사 온건 3년 정도 됐을 거야. 원래 저 집 살던 여편네가 나랑 좀 친했어가지고 인사나 해볼까 하고 집엘 찾아갔지. 벨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드라고. 분명 전날 이사오는걸 봤는데 말야. 다들 어디 나갔나,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 왔어. 다음날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왔는데 웬 낯선 남자가 그 집 마당에 서있더라고. 새로 이사 온 사람인가보다, 하고 인사를 하려고 쓰레기를 잠깐 내려놓고 가까이 갔는데, 글쎄.”
아주머니는 불편해 하던 기색은 온데 간데 없고 손짓 발짓까지 써가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이러면서 삼십까지 세고 있는 거야. 저게 뭔 짓인가.. 하고 있는데 이번엔 또 시계, 포크, 식탁, 텔레비전, 이런 식으로 허공을 가리키면서 혼자 헛소리를 계속 하더라고. 뭔가 딱 스쳤지. 정상이 아니구나. 아아아. 어어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데, 점점 무서워지더라. 쓰레기 버리러 나온 건 까맣게 잊고 냅다 집으로 들어갔지 뭐니.”
아주머니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친다는 듯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게 끝이에요? 그 이후론 한 번도 교류가 없었나요?”
아지가 물었다.
“그렇게 되었지 뭐. 그렇게 며칠 있으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 전부 그 댁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됐지. 주민 모임에서도 얘기가 나왔어. 아무래도 위험해보이니까 가급적이면 신경 거스르지 말고 만에 하나 접근해온다면 즉시 이웃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라고 말이야.”
아주머니는 그게 이야기의 끝이라며 어깨를 으쓱 하고는 할 말이 더 남았냐는 듯 아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무슨 이상한 짓들을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빨에 끼인 찌꺼기가 안 빠져서 짜증내는 얼굴로 아지가 또 물었다.
“어.. 사람 말이 아니었는데. 잘 기억도 안 나고. 그래, 혼자 동물소리를 흉내낸다는 얘기도 있었다. 야옹야옹 멍멍 거리면서. 그리고, 혼자 물어보는 것 처럼 말을 하고는 다음번엔 대답 하는 것처럼 똑같이 말하기도 하고.. 글쎄 잘 모르겠다, 얘. 너무 오래된 일이라.”
지은은 아지의 얼굴에서 불만족스러운 기운을 느꼈지만 밝게 웃으며 아주머니께 고맙다고 인사드렸다. 아주머니는 그제서야 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듯 어머어머를 연발하며 골목길 아래로 사라졌다.
“아주머니한테 뭐라고 한거야?”
지은이 아지에게 물었다.
“강원일보 기자라고 했어.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 이란 주제로 취재중이라고.”
아지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지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지는 항상 완벽해 보이는데 어딘가 어설프다. 왜 저 이웃을 소외시키세요? 라고 물어보면 호의적으로 대답해 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요번엔 운이 좋았다. 아주머니가 괜한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당장의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욕 안 먹은게 어디야. 다음번 질문은 꼭 내가 해야지, 다짐했다. 아지는 지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아이패드에 메모를 적고 있었다.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15세, 16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 중학생이었다. 앞서 다짐했던 대로 지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우린 그냥 지나가던 사람들이란다. 이 동네에서 지내긴 어때? 그렇구나. 근데 말이야, 저기 저 집은 아무도 안살아? 무서운 개는 있는데 아무도 안사는 집 같아서. 밥은 누가 줄라나?
“아, 외계인 집이요?”
와우, 빙고. 지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 얼굴을 본 아지가 지은의 엉덩이를 찔렀다. 지은이 찔끔 놀라곤 다시 궁금한 얼굴로 돌아왔다. 전여 예상치 못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외계인? 웬 외계인?”
“이 근처 사는 사람은 다 알아요. 저 집 외계인 산다고요.”
남학생은 다소 짜증내며 대답했다.
“왜? UFO라도 나타났었어? 광선이라던가..”
지은은 꾸준히 호기심으로 가득 찬 소녀의 눈빛을 유지했다.
“다들 그렇게 불러요.”
남학생의 짜증이 심해졌다.
“왜?”
“아 진짜, 그냥 그렇다고요! 다들 그런다고요, 이상한 짓 한다고. 누나들이 뭔데 자꾸 물어봐요, 귀찮게!”
남학생이 난폭하게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 순간, 뒤에서 지켜보던 아지가 한 발자국 나섰다.
“무슨 이상한 짓?”
아지의 심문 모드가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아지의 서늘한 눈매가 남학생을 압도했다.
“넌 남들의 얘기만 듣고 무고한 사람들을 외계인으로 모는 치졸한 인간이구나? 보통 겁쟁이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지. 나약한 소수를 욕하고 괴롭히는 공통점을 가짐으로서 나 자신을 큰 집단에 소속시켜 안위를 찾는 방법 말이야. 난, 나쁘지 않다고 자위하면서. 그렇지?”
남학생은 말문이 막혀 애꿎은 침만 목 뒤로 넘겼다. 사실 남학생이 무슨 죄란 말인가. 그저 귀찮았을 뿐인데. 아지는 누구나 죄인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아니면 네가 직접 봤던 ‘이상한 짓’이 있니? 넌 그런 멍청한 사람이 아니잖니.”
지은이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남학생이 아지와 지은을 번갈아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재작년 즈음에 봤던 건데요. 그 집 아저씨가 자기 집 마당에서 뭔가 하고 있는거에요. 뭘 하나 봤더니 아무도 없는데 혼자 인사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갑자기 뭔가 잘못한 것처럼 막 미안합니다는 아닌데 그런 비슷한 말을 하면서 꾸벅꾸벅 거리고. 이번엔 갑자기 옷을 다 벗어요.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올렸다 몇 번 하고 결국 팬티까지 다 벗어요. 바닥에 사람 모양으로 쭉 늘어놓고 이건 뭐고, 이건 뭐고, 하더니 다시 순서대로 입어요. 신발끈도 풀었다, 끼웠다 매듭을 지었다 풀었다 하다가 갑자기 똥 싸는 자세로 끙끙 거리다가 바지 올리고 두루마리 휴지를 풀었다 감았다 코를 풀었다 말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계속 했어요. 전 하도 어이가 없어서 넋을 놓고 보고 있었죠. 눈치 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한 두시간 있다가 집으로 들어 가더라구요. 그 이후론 왜 외계인이라고 불리는지 알았죠.”
아지가 열심히 아이패드에 메모했다. 그런 모습을 남학생이 조심스레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기자나.. 그런거 아니죠?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었어요. 괜히 뒤에서 욕하는 것 같아서 말하기도 싫구요.”
“아니야 기자같은거. 우린.. 음. 아까 말한 것처럼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야. 얜 그냥 습관이 메모하는 거라서 그래.”
지은이 부드럽게 말했다. 딴데 가서 말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거듭 당부하는 남학생에게 걱정 말라며 돌려보냈다.
아지는 얼굴이 점점 굳어져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선생님.”
아지가 메모 정리를 마치고 말했다. 이후 동네 주민 두 명을 더 만났다. 내용은 점점 가관이었다. 다음은 이 동네에 십여년간 가스 배달을 오고 있는 분의 증언이다.
[보통 가스 배달을 오면 여기 까지 놔주시면 안 되나요 무거운데 제가 팔이 아픈데 뭐 말이 많단 말이야. 근데 저 집은 교체할 날이 되면 알아서 문 밖에 빈 통이 놓여있고 난 그냥 새 통을 놓고 가면 그만이야. 저 집안 사람은 한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어. 대화를 나눠본적이 없단 소리야. 내가 혼자 본 적은 있지. 아마 이 집에 저 사람들이 새로 이사 오고 세 번짼가, 네 번짼가 배달을 왔을 때 일거야. 그땐 지금처럼 심하게 막 가려놓고 이러진 않았었거든. 가스 통을 놓고 가려는데 1층 창문으로 뭔가 보이는거야. 보면 안되지, 물론. 그래도 사람을 딱 궁금하게 만드는 정도로 보이더라고. 두 세 번 왔는데 한 번도 못 만나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아무튼 봤어. 부부인 것 같은데 처음엔 운동하는 건가 싶었어. 목도 이렇게 돌려주고 쪼그려 뛰기도 하고. 이상하다 싶었던건 그거부터지. 막 기어가지를 않나, 누워있다가 낑낑거리면서 일어나질 않나. 그냥 손으로 짚고 일어나면 되는데 굳이 팔을 안쓰고 일어나려는거야. 그러더니 계단이 보이는데 계단을 기어올라가고, 서서 한바퀴 빙빙 돌고, 갑자기 방방 뛰고 한 발을 들고 이렇게 균형잡는거 있잖니? 그러다가 발레 하는 것처럼 발 끝으로 총총총 걷기도 하고 앞으로 굴렀다 뒤로 굴렀다 계속 그래. 어휴,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하고 그 뒤론 얌전히 가스통만 바꿔가지고 갔지. 그게 다야.]
다음은 마을에서 어르신으로 불리는 81세의 김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자꾸 잘 안 들린다고 하셔서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며 여쭤보았다.
[응, 그래. 그 집 사람들 이상하지. 내가 오래 살았다면 살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처음 봤어. 뭐? 그래, 외계인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외계인일거야. 오래 살다보니 별 희한한 경우를 다 보게 되더라고. 세상이 말세다 보니 사람들도 말세가 되는거야. 뭐? 무슨 이상한 짓을 하냐고? 그 사람들 때문에 여기 주민들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까 글쎄 온 길바닥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야. 분필로 그린 것 같은데, 세모 네모 동그라미 이런 네모 저런 네모 글자 같은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온 바닥이랑 담장에 그려져 있었네. 그걸 지우느라고 온 동네 사람들이 하루가 꼬박 걸렸어. 그렇게 며칠 아무 일 없다, 싶더니 또 이런 저런 모양들이 잔뜩 그려져 있는거야. 어떤 총각이 화가 나가지고 그 집엘 찾아갔는데 한쪽 팔에 개 이빨 자국만 얻어가지고 왔지. 어휴, 뭐 그런 사람들이 있나 모르겠네. 그 이후에도 계속 낙서가 생기곤 했어. 뭐 별 수 있나 개가 무서워서 그냥 지웠지.]
날은 어느덧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태양은 산 너머로 꼬르륵 잠수하고 달과 별들이 퐁퐁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지는 굉장히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지의 눈이 초승달보다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잘못 다가갔다간 베일 지경이다.
“아지야, 뭐 알겠어?”
지은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외계인이라고 가정하고 지금까지의 증언들을 분석해봤어. 꽤나 설득력이 생기는군.”
그렇게 말하곤 다시 입을 닫았다. 지은은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유난히 맑은 하늘이었다. 그때, 뒤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 여자애가 세발 자전거를 굴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탕을 입에 물고 오물오물 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지은이 먼저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예의도 바르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또박또박 인사를 했다. 지은은 문득 물어보고 싶어졌다.
“너 혹시, 저 집 사는 외계인에 대해 아는 거 있니?”
아지는 애가 뭘 알겠냐는 눈으로 슥 쳐다보고 다시 아이패드에 열중했다.
“네, 알아요. 외계인 살아요.”
꼬마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눈이 또랑또랑 예쁘다.
“나쁜 외계인이야?”
“아뇨. 엄마 아빠는 나쁘다고 하는데 제 생각은 달라요.”
제 생각은, 이라고 말하는 꼬마의 입매가 무척이나 야무지다. TV에서 보는 아역배우 같다.
“그럼 좋은 외계인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니?”
“음.. 엄마가 그랬는데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래요. 마음이 따뜻해서 그리워 하는거래요.”
엄마가 해준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지 입을 쭈뼛쭈뼛 거렸다.
“저 집 사는 외계인들은 뭘 그리워 하는데?”
“집이요.”
꼬마의 입에서 나온 집, 이란 단어가 무척이나 따뜻하게 다가왔다.
“집?”
“네. 외계인이니까 별에서 왔잖아요. 별이 잘 보이는 밤마다 옥상에서 별 보고 있어요.”
“별..?”
“네. 오늘도 별 보이니까 볼 텐데. 저기 보세요.”
지은의 눈이 꼬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갔다. 선생님 댁의 옥상이다. 정말이다. 아깐 분명 없었던 망원경이 있었다. 옥상의 담장이 높아 사람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망원경의 끝 부분이 담장에 걸쳐져 있었다.
“근데.. 별을 보는 것 만으로 그리워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눈을 망원경에서 떼지 못한 채로 지은이 물었다.
“그려요.”
“뭘?”
“별 그림이요. 가끔 여기 바닥이랑 담장에 막 별자리랑 별들을 그려놔요. 하늘에 있는 거랑 똑같이 생겼어요.”
꼬마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지은이 다음 주 월요일, 교실에 왔을 때 교실 분위기는 이상하게 어수선했다. 지은은 어리둥절하며 가방을 내려놓고 태연히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지에게 갔다. 아지는 지은을 모른 체 했다. 뭘까. 소심해진 지은은 발걸음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그 날 오전 수업은 시간이 굉장히 빨리 흘렀다. 4교시 종이 치자마자 지은은 아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
“분석 완료.”
“뭐?”
아지가 손짓으로 옆 의자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제의 증언들 말이야. 정말 수상해졌어.”
지은이 자리에 앉자 아지가 진지한 눈으로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선생님이 외계인이라고 가정해봤어. 외계인인데,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야 하는 상황이야. 뭘 해야 할까?”
“음.. 말을 해야 겠지? 사람의 말?”
“그렇지. 아주머니 증언 기억나? 막 숫자를 세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사물들 이름을 내고.”
“뭐. 그게 사람 말을 배우는 중이었다는 거야?”
“바로 그거야. 모든 언어는 처음 학습하는 방법이 모방이야. 그 이상한 소리는 우리말의 모음, 자음을 계속 흉내내던 과정이고, 숫자는 우리의 수 체계, 사물을 이름은 음.. 단어에 익숙해지는 과정이겠지. 막 가리키면서 사물을 말했다고 했잖아. 내가 볼 땐 어떤 한 샘플 집, 아니면 그 선생님 집 안의 사물 배치를 기억해내면서 이름을 외웠던거야.”
“뭐..?”
아지의 눈은 고난도 문제 풀이에 성공한 희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서늘함과 함께.
“그 다음 그 남자애 증언. 인사하고, 미안하다는 듯 꾸벅꾸벅 거리고, 옷을 벗고 입고 똥 싸는 포즈를 취하고 두루마리 휴지를 풀었다 감았다 끈을 풀었다 맸다 등등. 우리 인간들이야 어릴 때부터 인간 사회에 속해 있었고 그렇게 자라왔잖아. 그래서 딱히 인간 사회의 뭐랄까. 보편적 정서? 규범? 규칙? 등을 자연스레 습득한단 말이지. 하지만 외계인은 달라. 우리식의 인사도 모를거고, 우리식의 사과하는 법도 모를거고, 옷을 입는 법도 이상할거고 순서도 이상할거고 그들 세계엔 끈이란게 없을 수도 있고. 우리 세계에서 똥 싸는 법과 그들이 똥 싸는 법은 다를 거란 말이야.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익숙하지만 이런 당연히 익숙한 것일수록 이상하게 하면 주의를 살 수 밖에 없어. 이 과정은 우리 세계를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우리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 익히는 과정인거야. 이게 애라면 상관없어. 갓난 애기라면. 하지만 다 큰 어른이, 어엿한 사회인이 이런 것들을 다시 연습하고 익힌다는 것은 뭔가 부자연스럽지. 안 그래?”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지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 모르겠어? 그럼 다음. 가스통 아저씨. 대화한 적이 없는 것은 신기한 얘기가 아니고. 운동하는 것 같다고 했지. 그러고서 기어가고 일어나고 계단 오르고 뛰고 돌고. 아까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할게 말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전에 해야 할게 있어. 사람처럼 움직이는 거야. 사람 몸에 익숙해지는 거지. 근육을 단련시키고. 이 외계인이 처음으로 인간 몸을 접한 거라면 그렇지 않겠니? 이건 적응훈련인 셈이야. 인간 신체 적응 훈련.”
“그럼 할아버지 증언은? 낙서 하는거. 그게 인간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으론 안 보이는데?”
지은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게 좀 나도 걸리긴 했는데, 여러 자료들 찾다 보니까 언어습득의 일환인 것 같아. 문자, 기호를 습득하는 과정인거지. 만약 그 외계인들의 세계에 점선면으로 이루어진 기호가 없다면? 지구인들의 문자 체계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겠지? 그걸 연습한거야.”
“그걸 왜 길바닥이랑 담벼락에 하냐고. 자기 노트에 하면 되지.”
“그 답에 대해선 세 가지 정도 생각해 봤는데, 첫째는 미술하는 애들 얘기에서 단서를 찾았어. 걔들은 처음 막 배울 땐 아주 큰 종이에 선 긋는 연습부터 한다더라. 그렇게 그려야 나중에 작은 선을 잘 그린대. 둘째는 그 외계인들의 사고구조가 그렇게 큰 거야.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었던 거야. 인간수준으로 작게 그리기 위해서. 셋째. 외계인이니까 아직 인간의 사회적 규율에서 낙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지.”
둘째랑 셋째는 왠지 ‘그냥 외계인이니까’로 통일되는 소리인 것 같지만 따지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에 봤던 꼬마는? 그 망원경도 봤잖아.”
“그거야말로 화룡점정이지. 꼬마애도 말했잖아. 집이 그리운거라고. 단순히 별에 관심이 많은 수학선생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바닥에 똑같이 그린다는건 아무 인간이 쉽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지 않아? 물론 꼬마애의 증언이라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의외로 어른이 못 보는 것을 애들이 보는 법이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지는 자신의 논리를, 적어도 자신에게 만큼은 완벽하게 인지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수학선생님은 외계인일 가능성에 높다, 라는 거지.”
아지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이렇게 밝게 웃는 아지는 참 오랜만이다.
“그리고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우린 지금부터 교무실에 갈 거야.”
“그런거야?”
내 대답은 아지에게 중요치 않은 듯 보였다. 이미 내 손을 잡고 1층 교무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지는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있었다. 눈매는 여전히 차갑지만 볼은 가볍게 화장이라도 한 듯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지의 이미지는 냉소적이고, 이지적이고, 감성보단 이성. 귀엽다 보단 멋있다. 지금은 달랐다. 여전히 차갑게 보였던 눈에 희미한 불꽃이 보였다. 이상하다. 마치 그 날 도서관에서 수학선생님이 외계인선생님으로 바뀌던 때의 기분이 얼핏 들었다.
교무실 앞에서 아지는 창문 틈으로 힐끔힐끔 보더니 손으로 OK사인을 한다. 입가에 온통 흥분이 가득하다. OK 제스쳐는 귀엽다. 아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교무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점심시간이니까. 아지가 이리저리 둘러보다 수학선생님 자리를 찾았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이거 봐.”
아지가 찾은 8절 스케치북엔 온갖 기하학적 도형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동네 길바닥과 담장에 그려져 있었다던 그림들이 이런 그림일까. 내 상식적 이해를 넘어서는 그림이다. 표현할 단어를 못 찾겠다. 그냥 이상했다. 이리저리 겹치는 세모 네모 동그라미들. 그냥 갓난애가 그렸다고 보는게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작게 그리는 법을 터득한거야. 뭔진 모르지만. 어쩌면 별지도 같은 것 아닐까? 꼬마애도 길바닥에 그린 그림이 별이랑 똑같다고 했잖아. 외계인들이 지구로 침공해올 때 필요한 전략지도야. 점점 심각한데.”
이상하게 내가 해야 할 대사인 것 같은데 아지가 하고 있다. 아지는 계속해서 서랍을 뒤졌다. 이상한데 여기 있을텐데 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다 책상 밑에 손을 깊숙이 넣어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지의 손이 다시 나왔을때,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핸드폰?”
“어. 내 정보에 의하면 선생님은 핸드폰이 두 개야. 하나는 가지고 다니는 평범한 핸드폰, 하나는 놓고 다니면서 그 소문 속의 이상한 말을 하는 핸드폰. 만약 외계인끼리 교신용? 핸드폰이라면 우리도 외계인이랑 통화해 볼 수 있겠지. 상대방 외계인은 무방비 상태일거고 말이야.”
아지가 전원을 켜고 버튼을 이리저리 눌렀다.
“지은이 니가 봤을 땐 영상통화인 것 같다고 했지.”
“어. 화면을 보고 있었어.”
“있네. 영상통화 자주 하는 번호. 번호만 적고 나가자.”
아지가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손바닥에 번호를 적고 핸드폰을 원위치에 놓았다. 그러고 나가려다 뭔가 아쉬운 듯 자신의 아이폰을 꺼내 스케치북의 그림들을 찍었다.
교무실을 나와 학교 뒤편의 정원으로 갔다. 사람들의 눈에 잘 안 띄어서 가끔 불량학생들이 모여들곤 하는 곳. 다행이도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아지는 손바닥의 번호를 자신의 핸드폰에 입력하고 소리를 스피커로 바꿨다.
“아지야.”
“왜?”
“아니.. 지금 이게 잘하는 걸까?”
“뭐가.”
“너도 오늘 좀 이상하고..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인데 전화번호 훔쳐오고 전화하고 그러면 안 되잖아.”
“너 참 안일하구나.”
아지가 예의 시퍼런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외계인이면? 내가 찍어온 이 그림들, 정말 지구 침략용 전략지도라면?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사실 여부를 밝히는 거야. 사실이 아니라면 선생님의 누명을 벗겨서 좋은 거고, 사실이라면 지구를 지키는 거지. 양 쪽 다 옳은 일이잖아?”
말을 마치자마자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아지는 통화를 터치했다. 신호음이 가기 시작했다. 뚜르르 뚜르르. 숨넘어가는 잠깐의 침묵 뒤에 신호음이 다시 찾아올 때마다 안도와 실망감이 동시에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차라리 아무도 안 받았으면 좋겠다.
달칵.
받았다. 아무 말도 없다.
아무 말도 없다. 아지는 말을 하려다 입이 굳어버린 모양새다. 아무 말도 없다. 계속 아무 말도 없다. 공허함마저 느껴진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공허를 채우는 바람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1분여를 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아지가 목으로 침을 넘기는 순간, 꿀떡
“우아와에러얼아아아아아!”
-뚝
괴성이 나오고는, 끊겼다.


그 이후, 아지는 하루 종일 무언가에 홀린 듯 노트에 적고 찢고 버리고 복도를 방황하기를 반복했다. 평소의 아지라면 상상도 못할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백옥 같던 피부에 짙은 다크서클이 그려져 있다. 냉철함의 상징이던 눈도 붉게 충혈 되어 차가움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손톱을 뜯는 아지. 결코 이전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다음날, 교실에 들어섰을 때 평소와는 다른 불안한 산만함이 가득 차 있음을 느꼈다. 칠판 긁는 소리로 수천명이 좁은 교실에서 수다를 떠는 것 같았다. 우선 가방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여기저기 모여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신문이다. 그래, 매월 둘째 주 수요일은 학교 신문부의 신문이 발행되는 날이다. 아지는 자리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그룹에 끼어 까치발을 하고 어깨 너머로 신문을 훔쳐보았다. 학교 신문부의 신문이 아니었다. A4 몇장을 조잡하게 스테이플러로 이어붙인 문서다. 내용을 보니 신문부의 신문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드러났다.

[그는 외계인이다! - 외계인이 학교 선생으로. 이대로 괜찮은가?]

수학선생님의 얼굴이 직접 나오진 않았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수학선생님을 다루고 있음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살짝살짝 보이는 기사에는 나와 아지가 취재했던 마을 주민들의 증언, 아지가 찍은 사진,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들이 실려 있었다. 기사 작성은 2학년 모 선배가 했다. 정보제공자는 신원을 보호하기위해 밝히지 않겠단다. 뻔했다. 아지일 수밖에 없다. 학교 신문부의 신문은 학교의 검열을 받는다. 학교의 예산을 받으니까. 이 A4용지 묶음은 일종의 게릴라 신문으로 보인다. 학교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학교 인쇄실을 무단으로 점거해 인쇄한 신문.
수업 시작 직전이 돼서야 아지는 퀭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왔다. 아지가 만든 파문은 교실 안에서 이리저리 튀며 폭발직전의 상태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1교시는 수학이었다. 수업은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선생님은 평소의 선생님이었다. 원형탈모에 두꺼운 뿔테 안경, 뽈록 튀어나온 배, 앙상한 팔다리. 50대에 접어든 중년 아저씨의 모습.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친구들의 눈에는 외계인처럼 보이고 있을 것임을 안다. 신문에 적힌 온갖 괴이한 행동들이 선생님을 로스웰형 외계인과 겹쳐 보일 것이고 칠판에 적히는 기호들은 이상한 도형들로 치환될 게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까지 아무 일 없이 조용했다. 선생님도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수업을 일찍 마치고 재밌는 얘기라도 해줄까? 하고 물으셨다. 그 질문에 피 냄새를 맡은 상어마냥 학급의 눈빛이 돌변했다.
“선생님은 외계인이 있다고 믿으세요?”
아지가 출발 신호탄을 쐈다. 여기저기서 웃음 참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지는 이걸 노렸다. 선생님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거겠지. 자기 입으로 자백하는 장면을. 하지만 선생님은 물끄러미 서서 잠시 생각하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있다고 믿는다.”
자기가 외계인인데 당연하겠지, 라는 둥의 속삭임이 질척하게 바닥을 떠다녔다.
“왜요? 수학적인 근거라도 있나요?”
평소에도 대담하기로, 속된 말로 싸가지 없기로 이름난 녀석이 비꼬는 투로 물었다. 웃음소리가 더 커졌지만 선생님은 동요하지 않았다. 다시 차분히 말했다.
“모 영화에서 나왔던 것처럼, 이 넓은 우주에 생각하는 존재가 우리뿐이라면 저 넓은 공간이 아깝잖니.”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럼 만약 선생님이 외계인을 만나신다면 무슨 얘기를 처음 하실거에요?”
다른 녀석이 물었다. 웃음소리가 다소 가라앉았다.
“음. 좋은 질문이구나.”
선생님은 돌아서서 칠판에 무언가를 적었다.

1+e^iπ=0

“나라면, 이 공식을 보여 줄거다.”
“그게 뭐에요?”
순수한 궁금증에서 튀어나온 질문이다.
“0과 1은 산수를, i는 대수학을, π는 기하학을, e는 해석학을 대변하지. 이 등식 하나면 인류 수학사를 말할 수 있는 거란다. 이과 가는 녀석들이면 이 기호들을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거다.”
선생님의 눈에는 별이 있었다. 초롱초롱, 반짝반짝. 별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 꿈꾸는 눈이었다. 그 눈빛이 내게 확신시켜 주었다. 선생님은 지구인이다. 지구의 다른 종족일 가능성은 모르겠지만 지구종족임은 분명하다. 한 번도 지구를 떠나 보지 못한 종족만이 가지는 별에 대한 꿈, 그것이 담긴 눈이었다.
수업은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알 수 없는 공식과 선생님의 진지함에 압도된 학생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다행이도 아무 것도 폭발하지 않았다. 다만 아지만이 뒷자리에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학 수업의 여운은 3교시가 끝나서야 다소 희미해져서 외계인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학생들이 계속 외계인외계인 거리는 것은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심심하니까. 우리랑 다른 누군가를 욕하면서 심심함을 해소한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난 아지를 데리고 교실에서 나왔다. 누가 봐도 아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너 왜 그래? 너 답지 않아.”
“나 다운 것이 뭔데?”
아지가 퀭한 눈으로 대꾸했다.
“내가 아는 넌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을 비방하고 외계인괴담 따위에 휩쓸려서 정신을 놓는 애가 아니란 말이야.”
“근거는 수도 없이 찾았어. 너도 봤잖아. 그것들은 괴담이 아니라 실존하는 위협이야. 그 신문에 제공한 정보는 빙산의 일각이야. 지금 준비하는 것만 완성되면 저 외계인을 쫓아내 버릴 수 있어. 1교시때는 시작이었을 뿐이야.”
눈을 한군데 두지를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굴린다.
“그래서? 완성되면? 아까처럼 애들을 선동할거야? 그게 인간다운 일이야? 이성적인 일이야?”
“인간이 아닌 것을 배척한다. 이것만큼 인간적인게 어딨어.”
“흐리멍텅한 존재는 안 믿는 대매.”
“이젠 흐리멍텅하지 않은걸? 실체가 잡혔잖아.”
“넌 모든 가정을 ‘만약 외계인이라면’이라고 잡고 그에 맞춰서 끼워 넣었을 뿐이잖아. 그게 네가 말하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뭐 그런 거야?”
아지의 충혈된 눈이 무섭게 불타올랐다. 울고 싶다.
“나, 지금 아지 네가 외계인 같아.”
아지가 이상하게 된 이후 아지에 대한 내 생각을 가장 간결하게 압축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곤 뒤돌아서 뛰었다. 눈물이 나는 것도 같지만 흘릴 시간이 없다. 교무실로 가야 한다. 선생님 자리에 가면, 분명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줄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해답지처럼.

멍하다. 저 조그만 녀석이 나한테 외계인이라고 했다. 어쩌다 내가 외계인이 된거지. 외계인 판별조건 첫 번째. 외형. 그래, 외형이다. 복도 끝쪽에 거울이 있다. 내가 외계인이라는 가설이 접수됐으니 어디 외형부터 살펴보자. 걸었다. 온 몸이 피곤하긴 하지만 버틸만 하다. 눈이 좀 따갑다. 다 왔다. 어디 볼까.

아지가 했던 것처럼 창문으로 힐끔 교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사이가 좋은가보다. 다 같이 식사하러 갔나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분명 선생님 자리는 저기였다. 저번과 달라진게 없다. 수학책 몇 권이랑, 스케치북. 빼먹은 것이 있다. 분명히. 의자에 선생님의 양복 웃옷이 걸쳐져 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 외계인이라고 착각할 만하다. 이래서야 어쩔 수 없네. 내 얼굴이 아니다. 얼굴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잘못되어 보인다. 지은이 말에도 일리가 있다. 내가 전부 끼워 맞춘 걸지도 모른다. 얼굴 상태가 저런 것으로 봐선 내 정신 상태도 신뢰할 수가 없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교문 쪽에 외계인 선생님이 있다. 두리번거린다. 교문 밖으로 나가는군. 혼자. 좋다. 좋은 기회다. 직접 물어보자.
외계인 선생님은 점점 이상한 곳으로 향했다. 내가 따라가는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요상한 골목길로만 골라서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따라간지 10분정도 지났을까, 외계인 선생님은 골목길에 주차된 흰색 승용차 앞에 멈추어 섰다. 쪼그려 앉아 몸을 숨겼다.

“도서관 자료..검색 결과?”
선생님 양복 주머니에서 영수증 하나를 찾았다. 시립 도서관에서 책을 검색하면 인쇄되는 종이 쪼가리다. 책의 간략한 위치가 적혀 나온다. 영수증은 5장이 있었다. 하나 하나 살펴보았다. 수학 귀신, 인도의 수학, 창의수학퍼즐, 수학의 역사... 이질적인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다.

흰색 승용차에서는 선생님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내렸다. 선생님만큼이나 작고 통통한 중년 아줌마의 모습을 한 여자였다. 여자는 선생님에게 서류봉투를 건네주며 잘 좀 챙겨 다녀라, 라는 식의 핀잔을 주는 듯 했다. 선생님은 미안한 듯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별 문제 없는 한국어였다. 집에 중요한 서류봉투를 두고 온 남편에게 서류를 가져다주며 잔소리 한번 하는, 극히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뒷좌석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자폐아 정신지체아를 위한 발달장애아 조기교육 프로그램..”

뒷좌석에서는 10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이 내렸다. 정상적인 소년은 아니었다. 어딘가 장애를 앓고 있었다. 손을 배배 꼬며 눈꺼풀을 뒤집기도 하고 이빨을 톡톡 때리기도 하였다. 말이 안 되는 괴성을 내며 외계인 선생님에게 안겼다. 외계인 선생님은 웃으며 아이를 포옹했다. 그 후에는 5분정도 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눈꺼풀을 뒤집기도 하고, 이빨을 톡톡 때리기도 하며 지은이 도서관에서 보고 들었다던 언어로 대화했다. 그 뿐이었다.
선생님은 차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지의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차가 떠나자, 선생님은 아지 쪽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내 아들놈이야. 놀랬니?”

지은이 먼저인지 아지가 먼저인지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하게도 전화는 걸렸다. 서로 먼저 말을 꺼내려 했고 이는 침묵만 가져왔다. 잠시 뒤, 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

다음날 점심시간. 아지와 지은은 선생님이 사주는 짜장면을 먹었다.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그저 아들과 대화해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려면 아들을 모든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행해지는 언어 프로그램, 근육운동기능발달 프로그램, 사회정서발달 프로그램, 자립 기능 등등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워올 때마다 아들의 입장이 되어 하나 하나 따라해보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이웃들과는 멀어져 갔고 이사를 가야 했다. 이사 온 곳에서는 애초부터 이웃과 교류를 끊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니 조금은 아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조금 욕심이 생겼다. 아들에게 취미를 주고 싶었다. 선생님이 어릴 때부터 즐겨왔던 취미를 아들에게 전했다. 아들에게 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특별한 재능을 발견했다.
“네? 진짜요? 그 그림들이..”
“그렇다니까.”
선생님이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지었다.
“우와 정말 별들을 고대로 기억해서 그린다구요.”
“처음엔 몰랐어. 그린 도형들이 우리가 아는 별자리랑 다르니까. 아들녀석이 제 멋대로 만든 별자리로 그린건줄 누가 알았겠니. 그냥 어느날 별을 보다 보니까 알았어.” 선생님이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왠지 말이 좀 통하더라.”
씨익 웃는 선생님의 미소가 그렇게 사람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과 대화하기 위해 외계인이 된 선생님의 이야기는 아직은 지은과 아지의 가슴속에만 고이 간직되어 있다. 선생님이 밝히는 것을 꺼려하셨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외계인 취급하는 우리 세상에서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하셨다. 지은과 아지는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면서 제발 오해를 풀게 해달라고 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뜬구름 잡는 소문은 뜬구름처럼 날아가버릴 테니까 괜찮다고. 대신 지은과 아지에게 다른 벌을 내렸다. 사실, 벌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둘 다 너무나도 즐거워했으므로.
그 후, 지은과 아지는 가끔씩 선생님 댁에 놀러가 짜장면을 얻어먹으며 선생님의 자제분과 놀아주곤 하였다. 그 만의 별자리도 배워보고, 손을 배배 꼬며, 눈꺼풀을 뒤집기도 하고 이빨을 톡톡 때리기도 하면서.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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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미선 11.08.30 19:41 댓글 수정 삭제
    우와.. 마지막에 감동까지^^ 너무 재밌습니다. 흥미진진한 전개에 부드러운 내용의 흐름이 마음을 사로잡네요! 글을 읽으면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No Profile
    광몽 11.09.03 15:06 댓글 수정 삭제
    으으 저도 많이 부족한걸요. 좋은 평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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