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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꿈꾸는 문들의 도시

2011.07.30 00:3307.30

I.

꿈을 꾸었다. 네가 죽는 꿈이었다. 인도양 상공을 이만 오천 피트에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 네가 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하늘과 검고 고요한 바닷물의 경계에서 모종의 신호처럼 반짝이는 규칙적인 불빛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마치 사방이 스크린과 침묵으로 가득한 우주적인 영화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발밑에는 구름이 깔리고 고개 위로는 달이 빛났다. 이상 난기류나 포악한 기상현상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한밤의 비행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아름다울 고요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불안함을 내포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거대한 풍경에 내팽개쳐진 내 마음은 그 중간쯤에 서 있었다. 내 마음은 스스로 만들어 낸 꿈속에서도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했다. 나는 그 무력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풍경은 내 무력함과 관계없이 서서히 비행기를 향해 클로즈업을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 그 위에 떠 있는 구름들, 그리고 정지된 듯 수백 노트의 추력을 내뿜는 제트엔진, 그런 것들이 흘리는 규칙적인 소음이 마침내 귀에 들릴 무렵, 나는 너의 집에 있던 낡은 냉장고를 떠올렸다. 너는 유독 잠귀가 밝았다. 신경이 예민해진 날이면 새벽녘 웅웅대는 냉장고 소음에도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깨어나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흐느끼기도 했다. 내가 너의 숨죽인 흐느낌을 얼마나 많이 껴안아 줄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모든 것이 발하는 빛과 모든 것이 내는 소리가 유독 거대한 의미로 다가오는 그 새벽에, 초라한 추방자처럼 잠에서 깨어나 하염없이 잠든 이들을 내려 봐야만 했던 거대한 고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냉장고 소리를 내는 비행기 안에서, 너는 수면안대를 낀 채 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필연처럼 잠들지 못한 너의 미세한 뒤척거림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마 나뿐이었을 것이다. 수면등만 켜진 어두운 비행기 안에서, 너를 제외한 모든 승객들은 거짓말처럼 곤히 잠들어 있다. 너는 귀마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나지막한 소음을 견디지 못해 몸을 조금씩 움찔거리다가 기어코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기체 허리춤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내가 꿈에 대해서 설명하자 너는 놀라기보다는 기분나빠하는 눈치다. 출장계획을 취소하거나 바꾸면 안 되겠냐는 나의 말에 너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대답을 다시 집어넣으며 억지미소를 지어 보인다. “걱정 말아.” 너의 대답은 모두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저 예상된 진행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꿈이 너무 생생했다. 너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고 한밤중의 인도양을 날고 있었으며 비행기는 모종의 이유로 폭발했다. 그리고 너는 열흘 뒤에 촬영차 아프리카로 출장을 떠날 예정이었으며 아마도 비행기는 한밤중의 인도양을 날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모든 상황이 이토록 맞아 떨어지는 꿈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깊어갈수록 너 역시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 한 번 더 던진 내 간곡한 부탁에 너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기더니 내 손을 잡으며 대답한다. “아무래도 그럴 순 없어.” 나는 알고 있다. 너는 나를 처음 만나던 날부터 아프리카로 떠나기 위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 혼자서 오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는 것은 너의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보다는 단순히 오래된 꿈에 가까운 일이었다. 너는 한 손에는 캠코더를 들고 한 손에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끝도 없이 펼쳐진 노란 색 초원을 달리고 싶다고 말했다. 수천 개의 별이 쏟아지는 사막 한 가운데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또 땅을 바라보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서 있고 싶다고도 이야기했다. 상상만 해도 황량한 그 땅의 어느 부분이 너의 맘에 들었던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너는 다만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세상과 세상을 잇는 문으로 가득한 세상을 생각해봐. 끝도 없는 세상 곳곳에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는 거지. 거기가 세상들의 중심이야. 나는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서 세상들의 중심으로 가는 거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니?
나는 아프리카는 다만 이곳과 다른 위도와 다른 경도에 위치한 다른 대륙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거기에는 문도 없고 다른 세상도 없겠지만 다만 네가 여태껏 보지 못한 것들은 좀 많이 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너는 나를 답답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자신의 말이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그래서 캠코더를 가져간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곳에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 그것을 캠코더를 통해서 찍어오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풀 HD로. 나는 너의 자신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원이동이나 평행 우주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야, 지금?” 너는 고개를 숙여 내 눈을 피하더니 창문 밖의 빌딩을 한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는 사람은 지금 우리랑 같은 세상에 있는 걸까?” 저녁이 다가오는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 안으로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채 복사기에 다가가고 있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저 사람 알아?” 내가 물었다. 너는 피식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너와 헤어진 나는 그저 네가 가벼운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사람은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 밤, 나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더 생생했고 더 길었다. 폭발한 비행기는 두 동강이 나서 바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너는 폭발음에 놀라 잠에서 깬 사람들보다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마 비명을 질렀더라도 아무도 네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 하늘 사이로 천 갈래의 바람이 네 얼굴을 찢어버릴 듯 두들겼다.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려와 너와 네 주변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미친 듯 헤집어 허공으로 내동댕이쳤다. 너는 안대조차 벗지 못했다. 눈을 꼭 감으며 좌석 손잡이를 간절하게 붙잡은 너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너의 입모양에 정신을 집중했다. 냉장고, 이 썩을 냉장고. 그래 네가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난 나는 너를 다시 찾아갔다. 집에서 여행 책자를 읽고 있던 너는 내 갑작스런 방문과 더 지독해진 꿈 이야기에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끝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다툼 끝에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킨 채 나를 피하는 너에게 나는 무릎을 꿇었다. 제발 가지 마. 이번엔 진짜 아닌 것 같아. 너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쾌한 침묵이 너의 방을 가득 채웠다. 대낮이었지만 냉장고 소음이 유독 귓가에 가까이 들려서 나는 한층 더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소음을 공간과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나는 되지도 않는 말들을 기관총처럼 떠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는 아마도 내가 내뱉은 말 중 상당수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모든 말이 그토록이나 차분한 한마디를 준비할 수 있었겠지. 내 모든 말들은 하나같이 과녁을 빗나가고, 너는 단 한마디로 내 심장을 꿰뚫었다.

“미안해.”
“알면 가지 마. 이번엔 진짜 아니라니까!”
“하지만 가야 돼. 너도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너의 말이 너무도 확신에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더 이상 너를 말릴 수 없었다. 너는 무릎 꿇은 나를 일으켜 꼭 안아주고는, 돌아오게 되거든 세상의 문이 열리는 장관을 꼭 보여주겠노라고 날 달랬다. 나는 덜덜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너는 처음 내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어쩌면 나를 처음 만날 때부터, 결국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그저 가야 한다고만 이야기했지,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 따위는 한 적이 없었으니까. 너는 날 교묘하게 속여가며 결국 그 비행기에 탑승했다.
인도양 상공을 비행하던 비행기는 폭발했다. 아랍 계열의 테러조직이 벌인 일이라는 뉴스가 뒤따랐다. 나는 실종자 명단에서 네 이름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했다.






Ⅱ.

꿈. 꿈이었다. 네가 살아있으니 그건 꿈이었다.

- 많이 놀랐니?

너는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머뭇거릴 뿐 너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너는 열 발자국쯤 바깥에, 노란 풀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 한가운데에 바람처럼 흩날리는 옷가지를 입고 서 있었다. 그것을 옷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다만 몸을 절묘하게 가리고 있는 반투명한 천 조각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은 파란 빛으로, 구름 한 점 엉기지 않은 채 쨍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꿈일 뿐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서 대답했다.

- 꿈이잖아.

너는 빙긋 웃어보였다.

- 날 말릴 때는 꿈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진 못했잖아.
-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잖아. 난 네가 죽었다는 걸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그냥 네가 어딘가에서 그렇게 자유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 넌 그냥 내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허상일 뿐이고.
- 나만 그런 거 같아?
- 뭐?

너는 발걸음을 옮겨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물어보는 거야. 나만 그런 거 같냐고. 넌 어차피 네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로 받아들이잖아. 그럼 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어.
- 소설 쓰고 있네… 그럼 나더러 이게 꿈인지 저게 꿈인지 선택해 보라는 거야 지금?
- 그건 아냐. 그런 얘기를 할 사람은 따로 있지. 난 그냥… 문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야.
- 문?
-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죽지 않았어. 내가 문의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 있었지? 모든 세상들의 중심에 위치한 곳. 세상과 세상 사이를 헤엄치다가 지친 이들이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 난 그곳에 도착했어. 그리고 네가 있는 세상을 열어서 이렇게 널 초대한 거고.

너는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반투명한 천조각 틈새로 너의 몸이 조금씩 비춰보였다.

- 그렇게 맘대로 문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냥 내가 깨어있을 때 찾아오면 간단하잖아. 왜 이렇게 미심쩍은 방법을 쓰는 건데?
- 세상과 세상 사이에는 간단히 극복할 수 없는 차이들이 있어. 어쨌거나 네가 깨어있을 때에도 나는 너를 찾아갈 거야. 네가 그걸 쉽게 느낄 수는 없겠지만. 네가 보다 의식적으로 자유로운 꿈속에서 나를 분명히 느낄 수 있을 뿐이야. 이해하겠니?
- 아니.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내가 너한테 얘기했지. 걱정 말고 기다리면 세상의 문이 열리는 광경을 보여주겠다고… 어쨌거나 네 선택만이 남은 거야. 나는 여기 있으니까, 네가 오면 돼.
- 어디로 가면 된다는 건데?
- 여기. 네가 잠든 곳.

거기까지였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 따위에 매료되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너의 빈소에 있었다. 너의 빈소는 외로웠다.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만큼이나 오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너에게 친척이라곤 동생 한 명 뿐이고, 친구들도 대부분 오래 전에 소식이 끊겼으니까. 상복을 입은 채 지쳐 쓰러져 있는 동생 앞에 선 너의 직장 동료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절을 하고 너의 동생을 일으켜 판에 박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는 울고 또 울다 너절해진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너의 동생의 귀에 들릴 만한 말을 아무 것도 골라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오갈만한 사람들이 모두 오가고 난 뒤, 곤히 잠든 너의 동생을 어떤 소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몇 걸음 밖에서 측은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새벽은 처참하게 찾아왔다. 나는 무력한 파수꾼처럼 새벽을 채우는 강고한 소리들을 허탈하게 듣고 있었고 너의 동생은 자주 뒤척였다. 나는 꿈에 나온 너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정말 네가 다른 세상에 도달했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너의 동생을 찾아갔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우리를 이렇게 버려 둔 채로 다른 세상을 향해 가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선가 거대한 냉장고 소음이 들려왔다. 주변에 냉장고 같은 것은 없었지만, 새벽의 기계소음은 본래 주인 없이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법이다. 너의 동생이 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냈다.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너의 동생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만히 감싸주었다. 네 동생은 고개를 돌려 부스스한 눈으로 날 올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 동생이 이상한 말을 꺼냈다.

“누나를 봤어요.”

나는 침을 삼켰다.

“바다 속에 있대요… 비행기 안에 밀폐된 공간이 있는데, 폭발에 휩쓸려서 들어가게 됐대요. 절 기다리고 있어요. 오래 기다릴 순 없는데, 숨이 너무 막힌다고… 그리고 너무 겁난다고… 구해달라고…”

나는 네 동생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네 동생은 숨을 헐떡여가며 인도양 한가운데에 떨어진 비행기 잔해 속에 갇혀버린 너의 목격담을 늘어놓았다. 꿈이 어찌나 생생했던지 네 동생은 울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대양을 향해 떠나버릴 것 같이 꿈틀거리는 어깨와 발목을 붙잡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설명이 필요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곧 모든 환상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네 동생을 끌어안은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웅웅대는 소음이 유독 거대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날 밤 또 꿈을 꾸었다. 잠수복을 입은 채 인도양으로 들어온 나는 물 속에 가라앉은 비행기 잔해를 보고 있었다. 푸른 물 깊숙이 창살처럼 스며들어온 햇살이 날카롭게 잔해에 가닿았다. 종잇장처럼 찢어진 잔해 어느 구석에도 밀폐될 공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는데, 너는 모래톱에 처박힌 잔해 앞에서 수면안대를 낀 채로 자유로이 유영하며 잔해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마치 신기하다는 듯이.
그런데 어느 순간, 네가 뒤돌아섰다.

- 나 안 죽었어.

나는 멍한 표정으로 널 바라봤다.

- 문이 열렸어. 비행기가 떨어지는 순간에 문이 열려서… 살아났다고. 내 얘기 잘 들어. 아마 오늘부터 네가 잠들 때마다 누군가 찾아갈 거야. 전부 다 나처럼 보이겠지. 누군가는 내가 살았다고 할 테고, 누군가는 죽었다고 말할 텐데,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잘 선택해야 돼. 날 위해서가 아냐. 이건 일종의 시험이야. 네가 어느 세상을 살리고 어느 세상을 죽이는지를 선택하게끔 되어 있는 거라고. 내 말 들리니? 이해하는거야? 너한테 얘기할 방법이 이거밖에 없어. 안 들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귓가에 요란한 기계 소음이 들려오고 눈앞에는 네 동생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검은 실루엣이 유독 스산하게 보였다. 네 동생은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하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형도 누나 만났죠?”

나는 숨을 죽였다.





Ⅲ.

너는 그 날부터 매일 밤, 나를 찾아왔다. 매일같이 다른 모습이었다. 일상과 환상의 모든 순간이 꿈속의 공간으로 모습을 바꿔서 너를 간직한 채로 나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너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울부짖기도 하고, 비행기를 폭파한 범인을 알고 있으니 잡아달라고 말하기도 하며, 이젠 죽었으니 깨끗이 잊으라고 말하기도 하고, 문들이 가득한 세상의 중심으로 갔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수십 명의 네가 모두들 현실의 궤도를 붙잡거나 허무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역설하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처음 네가 죽는 꿈을 꿨을 때 느낀 생경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정말 이 모든 것들이 내 무의식이 만들어 낸 내 꿈이 맞는다면, 그 어딘가에 이 혼란함을 풀어낼 단서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꿈들은 내 의식 밖에서 날아와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나는 새벽녘마다 알 수 없는 기계소음에 깨어나 식은땀을 흘리며 허덕였다.
나와 비슷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네 동생이었다. 네 동생도 밤마다 너를 본다고 했다. 다만 네 동생에게 찾아가는 네 모습은 하나의 분명한 목적과 형태를 띠고 있었다. 너는 네 동생을 어디론가로 불러냈다. 그것은 동네 골목길이 되기도 하고, 공항 출국장이 되기도 하며, 처음처럼 바다 속 어딘가가 되기도 했지만, 가장 잦은 것은 아프리카였다. 네가 죽은 뒤 내가 처음으로 봤던 네 모습, 아마도 그것인 모양이었다. 너는 네 동생에게 어서 나를 따라 아프리카로 오라고 말했다. 네 동생은 현실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이따금씩 나를 찾아와 애처로운 목소리로 하소연하곤 했다. 뭔가 이상해요. 정말 누나가 가려고 했던 곳에 가면 뭔가 있는 게 아닐까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라던가,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이라던가… 나는 그럴 때마다 단호한 목소리로 누나는 죽었어, 라고 이야기해 줘야 했으니, 피붙이에게 수십 번씩 사망소식을 전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 너는 정말로 잔인했던 셈이다.
나는 자주 어디론가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고 길거리에 주저앉곤 했다. 그럴 때면 귓가엔 알 수 없는 기계소음 - 한밤중의 냉장고 소음 같은 것 - 이 들리고 땅과 하늘에 예리하게 금이 가서 깨져버릴 듯 흔들렸다. 꿈은 점점 더 강렬해져서 이젠 대낮에도 너희 환영을 보곤 했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네 동생은 점점 더 자주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니, 이젠 나를 찾아와서 대놓고 너의 흔적을 찾아갈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죽었다고 이야기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 네 동생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누나가 방에 찾아왔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네 동생이 걱정돼서 걸음을 서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네가 걱정되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죽거나, 죽지 않았거나, 혹은 문들이 가득한 세상의 중심으로 가 있을 테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사실일 수도 있을 텐데, 내가 받아들이고 선택해야 할 현실의 층위는 그 어느 곳에도 놓여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중요한 속임수가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었다.
네 동생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문짝 중 일부분이 조각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부서지거나 칠이 벗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냥 문의 한 부분이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 ‘깨져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떨어져나간 조각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부비고 손을 떨다 보니 귓가에는 기계소음과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네가 있었다.
너의 손에는 예리한 커터칼 하나가 들려 있었다. 네 동생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경건하게 너의 눈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동생을 ‘조각내는’ 중이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커터칼이 사뿐하게 몸을 오가자 네 동생의 부분 부분은 마치 퍼즐조각처럼 툭툭 떨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나는 내가 미쳐버렸다는 직감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귓가에 기계소음이 요란해지며 와그작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강가에 낀 살얼음이 맹렬히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이게 다 뭐야?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칼질을 멈추지 않던 너는 문득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보여줄게. 세상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야.”

수천 개의 유리창이 동시에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꿈인 것 같았다. 눈을 뜨거나 정신을 차린 적도 없는데 갑자기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방에는 처음 보는 사람 두 명이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서 있었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들은 이윽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말을 걸었다.

- 정신이 들어요?”
- 여기가… 어디죠?”

나는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더니 날 끌어안았다. 몸에 전해지는 감촉이 너무나 생생해서 차마 꿈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웅웅대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고 있는 알 수 없는 기계 하나,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시력검사용 판넬 하나,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유리와 그 너머에 다시 알 수 없는 물건들로 가득한 방들. 눈에 익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 대성공이에요! 이봐, 시간 기록 철저하게 해 두고. 자기가 누군지는 알겠어요?”
- 제가 누군지는 아는데 여기가 어딘지는…”
- ‘선택’ 한 건가요? 능동적으로? 혹은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서?”
- 선택한 적은 없고 그냥 갑자기 세상이 조각나서 정신을 잃고 보니…”
- 조각났다구요? 누가 조각냈죠?”

네가. 네가 그랬지. 커터칼을 든 채 세상을 난도질하던 너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눈에 선해서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 설명을 듣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별안간 내 팔짱을 양쪽에서 끼고 의자에 앉히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잘 들어요. 여기는 관문의 도시에요. 세상의 중심이죠. 그리고 당신은 어제까지 우리와 함께 일하던 연구원이구요. 우리는 의도적으로 관문의 도시를 떠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선택하고 주인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과연 관문 간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능동적으로 창조하고 선택할 수 있는가? 에 관한 연구죠. 당신이 지금 인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당신이 아니에요. 그 여자, 그리고 그 동생, 혹은 ‘아프리카’ 라던가 쉴 새 없이 웅웅거리는 기계소음 같은 것들… 다 기억하죠? 전부 만일을 대비해 당신을 강제로 깨어나게 하기 위한 비상장치들이었어요. 세상이 조각났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니까 뭔가 제대로 진행되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제 말 이해하겠어요?”
- 아…니오.”
- 역시 강제각성이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완전히 코마상태에 빠지기 전에 돌아오기는 했으니까. 관문간 여행은 역시나 아직도 어려운 모양이네요… 저 정말 모르겠어요?”
- 이거 다 꿈이잖아요?

그들의 표정이 굳었다.

- 이게 현실이에요.
- 아뇨… 그럼 애초에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말 일도 없이 아예 모든 게 존재하질 않았단 건가요?
- 그건 전부 관문 너머의 일이죠. 당신은 이곳에 살고 있었어요. 물론 관문간 여행과 그에 뒤따르는 모든 부작용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작성하긴 했지만, 우리가 도와줄게요. 예전 기억을 되찾을 수 있어요.
- 그럴 리가 없는데.
- 그게 맞아요.
- 그럼 어디로 간 거죠? 죽거나 산 게 아니면 문들의 세상에 갔다고 했어요. 그럼 여기 어디엔가 있을 거예요.
- 가짜에요. 당신이 스스로에게 한 거짓말이던가. 아직 문 너머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이 최초로 그걸 시도했다가 지금 이렇게 됐잖아요.
- 도대체 관문이 뭐죠?
- 세상과 세상을 잇는 길이에요.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지금은…
- 돌아갈 수 있나요?
- 어디로? 강제각성이 이루어져서 당신이 관문을 넘어가서 만들어낸 세상은 이미 붕괴됐어요.
- 그럼 다른 세상들은?

나는 눈을 감았다. 기계가 웅웅대는 소리가 커지며 세상이 지르는 비명이 귓가에 들려왔다. 당황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관문생성기 닫아! 지금 차원추방자가 발생하게 생겼…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Ⅳ.

꿈들이 너무 많다. 사소하고 초라한 꿈부터 진지하고 거창한 꿈에 이르기까지 나는 쉴 새 없이 꿈을 꾼다. 천 가지가 넘는 꿈속을 넘어 다녀도 어디에나 네가 살아있다. 이 모든 꿈들이 각자 다른 세상의 투영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모든 무의식의 무절제한 발현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죽었거나, 살아있거나, 문들의 세상에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내가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관문의 도시니 관문간 여행이니 하는 말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내 허약한 무의식이 만들어낸 일종의 도피기제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내가 꿈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건들 가운데 어느 하나 정도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나에게 확신시켜 주는 사람이 없다. 모든 세상은 내가 거부하는 순간 거품처럼 무너지고, 퍼즐처럼 조각나고, 기계소리를 내며 붕괴하고 만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 네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거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세상 모든 일들이 거짓이더라도, 너의 존재만은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너의 존재는 나의 망설임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
문득 저 창문 너머에 보이는 사람에 대한 너의 의문이 떠오른다. 그는 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혹은 그는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는 무언가 내가 하지 못한 결정과 선택을 내리고 있는 걸까. 네가 어디엔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면 나는 네가 언젠가 나와 같은 꿈을 꿀 수 있게 될 수 있길 바란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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