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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온기

2011.05.02 11:4905.02

온기
by. 고래

하얗다. 요 며칠간 계속 눈이 내렸다. 그래도 눈이 오는 기간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 이젠 푸른 하늘도 보인다. 파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한기가 옷 속 깊이 파고든다. 춥다. 어쩔 수 없다. 새로이 바뀐 세상은 추우니까.
총구가 부들부들 떨린다. 이미 살갗까지 한기가 들어왔다. 지렁이처럼 한기가 꿈틀댄다. 그래도 잡은 엽총을 놀 수는 없다. 저 늑대들이 순록 사냥을 마치는 순간에 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망쳐야할 상황이 온다. 눈이 다시 오기 시작한다. 눈이 흩날리는 것을 보고 “다행이다.”라고 혼잣말 했다. 맞바람이라 냄새가 늑대나 순록에게 향하지 않을 것이다.
회색빛 털, 깊은 눈 속을 헤치는 강인한 뒷다리, 으르렁거릴 때마다 나타나는 날카롭고 섬뜩한 이빨. 그리고 무리지어 지형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명석한 두뇌. 이 눈밭에서 그들은 최고의 사냥꾼이다. 한 마리가 순록 무리를 몰기 시작한다. 아주 평이한 수법이다. 저렇게 정신없게 만들어 따로 떨어진 한두 마리를 사냥하겠다는 것이다. 노련한 그들의 움직임에 거대한 순록 무리는 금방 소수로 파쇄 된다. 이때다 하고 어미와 새끼만 둘이 따로 떨어진 순록을 숨어있던 늑대들이 공격하기 시작한다. 사냥은 성공. 어미 순록과 새끼 순록 모두 잡혔다. 이내 차가운 눈이 뜨겁고 빨갛게 물든다.
그들이 사냥을 끝냈으니 이젠 쏴도 된다. 총구를 순록 무리로 겨냥한다. 그중 가장 가까이 있는 순록의 몸통으로 총구를 겨눈다. 손끝이 간지럽다. 추위는 이미 몸을 차갑게 만들었지만 손과 등에서는 땀이 났다. 이내 다시 총구가 흔들린다. 빨리 쏴야한다. 추위가 나를 먹어치우기 전에 쏴야한다.

탕!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뜬다. 순록 무리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모녀인지 모자인지, 두 마리 순록 시체 위에 늑대들이 주위를 살피며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조준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쳇.”
내가 총으로 쐈던 순록은 길고 붉은 선혈만 남기고 도망쳤다. 곧 늑대의 밥이 되겠지. 남 좋은 일만 했다.  옷엔 눈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눈사람 다 됐군.’하면서 털어냈다. 오랜만에 신선한 고기를 먹어보나 했는데… 어쩔 수 없다. 또 저녁은 통조림이다.
집으로 발걸음을 바꿨다. 걸어서 한 시간정도 걸린다. 원랜 그와 살던 곳이었는데……. 아니다, 그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세상은 혹독하게 변했다. 차가워졌다. 영화 <투모로우>처럼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새하얀 눈은 이틀 만에 도시를 장악했고 모든 것을 덮었다. 죽을 만큼 차가운 한기가 거리에 서성였고 사람들은 서서히 그 한기에 먹혔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 자신 속의 한기에 먹혔을지도 모른다.

도시가 보인다. 하얗게 얼어붙은 도시. 이미 2층높이의 눈이 쌓여 많은 집들이 무너져 내렸고 그 출입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옆으로 누워버린 건물도 허다했다. 인류의 상징이던 도시는 이렇게 차갑게 붕괴되었다. 이곳은 더 이상 도시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도시가 아니다.
나의 집은 거대한 호텔이다. 5성이었던 호텔. 건물은 아주 탄탄하게 지어져서 붕괴의 위험도 없었고 지하엔 대형마트가 있으니 생존에 도움도 되었다. 또, 잠자리가 아주 맘에 들었다. 이래서 호텔가는 구나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뭐, 이제는 나의 집이니.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이라고 해봤자 2층의 창문이다. 원랜 스위트룸으로 전면 창문이 있던 베란다였는데 어쩌다보니 출입문이 되었다.

휘이잉, 순간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해서 들려왔던 바람소리인데 들어가던 순간 들려오는 것이… 그의 안부인사 같아서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다녀왔어.”
머쓱해진 내가 조용히 읊조렸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착, 라이터로 불도 붙였다. 이내 회색 연기는 가슴 깊숙이 들어온다. 어지러운 내면을 감추듯 연기는 그렇게 내 안에 가득 찼다. 2층에 있는 내방으로 들어왔다. 조그만 객실. 이 호텔에서 가장 싼 방이었겠지. 그래도 가장 안전했다. 이제 와서 부귀가 뭣이더냐. 그냥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부귀였다. 구석에 총과 총알이 든 허리가방을 내려놓았다. 후우. 담배연기가 방안을 점점 메우기 시작한다. 곧 있으면 봄이 찾아온다. 3년 동안 흙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올해는 더 상황이 좋겠지. 그렇게 또 차가운 희망을 가진다.
싱글 침대 하나, 이젠 더 이상 켜지지 않는 조명등 하나, 화장대 하나, TV 하나, 라디오 하나. 이게 내 방의 모든 것이다. 아, 화장실로 들어가는 문 하나. 화장대 앞에 섰다. 거울에 내 모습이 비춘다.
자주 헝클어져서 묶어버린 검은 머리카락, 요새 잔주름이 조금 보이는 눈가, 옅은 눈썹, 낮지 않은 콧대, 부드러운 입술. 옛날엔 나도 예뻤다 자부할 수 있었는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 고생들은 내 미(美)를 앗아갔다. 화장대 위에 라디오를 킨다. 잡음이 귓가를 때린다. 주파수를 바꿔본다. 또, 또 이 방송이 나온다.

‘저는 이제 죽을 겁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인간들, 너희 개새끼들 춥다고 징징대면서 온기를 달라고 지랄하지 마. 그거 다 너희 업보야. 눈앞의 상대방들을 냉정하게 밟고 올라선 너희 업보라고 개새끼들아! 왜 하나같이 전부 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희 말이야. 다 똑같아.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들. 그래, 이 얼음들이 너희보다 나아. 이 눈(雪) 들이 너희보다 났다고! 지지직, 개새끼들. 지직, …쌍한 것들. 저는 이제 죽을 겁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라디오를 껐다. 그래, 이 자가 말하는 것도 틀리지 않다. 모든 것은 인간의 업보였다.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그이의 죽음까지도. 피곤하다. 내일부턴 옥상에 나무를 심을까한다. 자작나무라면 곧 돌아오는 봄에 충분히 클 수 있을 것이다. 신발을 벗고 침대위에 누웠다. 내 온기가 침대로 퍼진다.
곧 따뜻한 세상이 오겠지. 내 외로움도 끝이 날 봄이 찾아오겠지.

밤새 뒤척이다가 결국 자는 것을 포기했다. 침대위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손목시계는 5시를 가리킨다. 아, 무언가 먹어야겠다.
침대에서 내려와 옷걸이에 걸어뒀던 코트를 입었다. 새벽이라 춥다. 부들거리는 몸을 웅크리며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엔 대형마트가 있었다. 이제는 내 식량창고가 되어주었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자 한기가 뿜어져 나온다. 거대한 냉동 창고가 되었다. 건빵 한 봉지를 꺼내들고는 계단을 다시 지나 방으로 돌아왔다. 봉투를 깠다. 먹는 내내 텁텁하다. 침대 아래서 생수병을 꺼내든다. 몇 모금 마시고는 다시 건빵을 씹어 먹는다. 그렇게 건빵 한 봉지를 다 먹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든다. 아, 마지막 개비다. 입에 꺼내 물고 곽은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진다. 예스, 골인. 착, 불을 붙인다. 후우. 가슴 끝까지 흰 연기가 들이찬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핀다.
“다섯 시네.”
아직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한다. 일출시간이 지나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야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떠있다는 것은 꽤나 큰 이익이 되니까. 후우. 흰 연기가 코와 입으로 나와 차갑게 얼어붙는다.
옷걸이로 다가가 코트 안에서 MP3를 꺼냈다. 매일 듣는 음악이고 그가 생각나지만… 시간 때울게 없으니까.

그는 군인이었다. 그의 계급이 뭐였는지 아직도 외우지 못했다. 뭐에 3호봉이라 그랬었는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의 후임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그 누구보다 강인하며 아랫사람을 다룰 줄 안다하였다. 가끔씩 빵빵 터트려주는 유머는 부대에서 큰 인기라고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잡으라했다.
그의 품에 안길 때마다 유채꽃 향기가 났다. 옛날에 지인에게 선물 받은 유채꽃 향수의 냄새가 그에게서 났다. 그에게 물었던 적도 있다. 유채꽃 향수 써? 아니. 왜 유채꽃 향수가 나? 봄을 제일 좋아하니까.
그는 봄을 좋아했었다. 심지어 이렇게 차가워져버린 봄까지. 왠지 어디선가 봄의 향기가 난다면서 좋아했다. 그를 도저히 이해 못할 줄 알았는데, 난 이렇게 봄을 기다리고 있다.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온기를. 그의 온기를.

삐, 삐, 삐.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린다. 8:58. 일출시간이 지났다. 배게 밑에서 자작나무의 씨앗을 꺼냈다. 꽤나 많이 들어있다. 다 심더라도 하나 싹이나 틔울 수 있을까? 옷걸이에 걸어져있던 가죽장갑을 꺼내 꼈다. 코드도 이내 입었다. 옥상은 10층이다. 총 9층, 계단은 10층높이. 눈삽과 씨앗을 꺼내들고 방문을 나섰다.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눈은 오지 않는다. 7층 정도 올랐다 다시 내려간다.
“내 담배!”
생각해보니 담배가 없다. 씨앗보다 담배가 중요하다. 나는 후다닥 지하까지 내려갔다. 지하 마트의 문을 열었다. 새벽처럼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내린다. 뛰어 들어간다. 카운터를 조금 뒤적거리더니 담배를 찾았다.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뛰어 나왔다. 담배가 여러모로 사람을 고생시킨다. 3층 정도 올라와서는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거대한 빛의 기둥이 보인다. 거대한 빛줄기.
저기 봐봐. 응? 봐, 거대한 빛의 벽이 보이지? 응. 저게 틴들이야. 빛이 먼지나 수증기와 충돌하여 빛줄기가 보이는 거야. 음, 예쁘다. 그렇지? 자연이 주는 거대한 선물이야.
“우연이야.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을 뿐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 아름다움을 부정하면서 또 그와의 기억을 부정했다.
난간을 잡으며 겨우 옥상으로 올라왔다. 어께엔 삽 하나, 주머니엔 씨앗을 들고. 옛날에 이곳에 나무를 심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원래 이곳은 공중정원으로 쓰던 곳이었다. 꽤나 많은 나무가 있었다고 했다. 차가워진 나무 조각들은 나와 그의 손에 땔감이 되었다. 나무들은 타닥타닥하면서 꽤나 잘 탔다.
문제는 현관문부터 시작되었다. 손잡이를 돌려서 밖으로 여는 문인데… 손잡이는 돌아가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삽을 내려놓고 낑낑대면서 밀어냈다. 조금 열리더니 눈들이 그 틈 사이로 쏟아져 내려왔다.
“젠장.”
곱게 될 것 같지 않다. 삽을 문틈 사이로 넣어 조금씩 빼냈다. 한기와 같이 꽁꽁 언 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틈은 조금도 벌어지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는 9층으로 내려왔다. 객실을 돌아다니면서 두꺼운 책 몇 권과 나무 의자하나를 가져왔다. 착, 책에 불을 붙였다. 금세 불은 종이를 집어 삼키며 타올랐다. 책 몇 권을 바닥에 놓고 그 위로 의자를 쪼개 불속으로 집어넣었다. 불은 주변의 산소를 한껏 들이마시며 커졌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의자다리를 하나 꺼내서, 옥상 밖으로 꺼냈다. 소리도 내지 않고 눈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타오르던 불꽃이 꺼질 때쯤 문을 밀어 열었다. 밖은.
하얬다.
터무니없이 하얀색이었다. 내 허리만큼 오는 눈을 넘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였다. 날카롭게 불어오는 바람에 손에 쥔 의자다리가 식어버렸다. 식어버린 의자다리로 문을 고정시키고 삽을 가져왔다. 삽이라고 해봤자 흙을 팔 이유가 없어서, 넓적한 눈치우기용 삽이었다. 이젠 막노동이다. 한참을 치우다 짜증나서 불로 녹이다가 또 귀찮아져서 삽질하고 반복하다, 옥상의 눈을 반쯤 치웠나. 그쯤 되어서 쉴 겸, 밥 먹을 겸 내려왔다. 지하에서 복숭아 통조림을 꺼내왔다. 스푼으로 대충 떠먹고는 옥상으로 다시 올라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참을 멍하니 연기만 마시고 내뱉고.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는 다시 삽을 잡았다.

나도 안다. 나무가 싹도 제대로 못 틔운다는 것. 단지, 난… 봄이 제대로 오는 지 확인하고플 뿐이다. 그 따스한 바람이 올 것인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눈이 난간을 넘어 허공으로 날아올라 반짝이며 흩어진다.

눈 치우는 데만 무려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다. 다행이도 그 동안 눈은 오지 않았다. 구름 사이로 햇빛도 간간히 보이는 것이 한동안 눈은 오지 않을 성 싶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눈을 다 치우고서야 알게 되었다.
호텔 건물의 부지가 넓은 편이라 옥상도 클 줄 알았는데 물탱크에 LPG가스 보관소까지 잡다한 많은 것들이, 옥상에 올라와있어서인지 대략적인 공중정원의 넓이는 자동차 두 대가 주차할 정도였다. 눈을 다 치우자, 50cm쯤 되는 벽돌 울타리 안에 흙이 보였다.
그러나 완전히 얼어있었다. 얼어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내렸던 눈에 단단하게 압축된 듯 보였다. 눈삽가지고 겉 표면은 긁어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땅이 너무 단단해서 식물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환경이었다. 완전히 갈아엎어야 한다.
벽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 일단 언 땅은 끓인 물을 부어 녹이고 마트에서 비료를 가져와 뿌리기로 했다. 허리까지 오는 난간 너머로 눈에 잠긴 건물들이 보였다. 유리창들은 모두 깨졌고 허리가 꺾인 건물부터 기울어진 건물도 있었다. 저기 얼어붙은 건물들 속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담배를 난간 너머로 던졌다. 날이 점점 저물고 있었고 난 자러 돌아가야 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시간은 모두가 잠은 밤이었다. 뉴스에선 내일 강추위가 올 것이라고 했고 그 강추위가 모두를 얼려버릴 정도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새벽에 뼛속까지 시린 추위에 깨어났다. 난로를 켰지만 난로는 고장 났는지 켜지지 않았고 나는 따스함이 급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의자를 태웠다. 담배만 태우던 라이터가 다행히 의자를 잘 태웠다. 바닥이 그슬리고 천장이 까매졌지만 상관치 않았다. 오직 추위를 이겨야겠다는 절실함이 생겨선지 책상에 앉은뱅이탁자도 쪼개 불 속으로 넣었다. 그렇게 방안이 조금씩 따스해질 무렵 얼어가는 어께를 부여잡고 그가 나를 찾아왔다. 라디오에서 자연재해 비상경보를 듣고 내가 걱정돼서 찾아왔다고 그 추위를 뚫고 찾아왔다고 하고, 바로 쓰러졌다.
삼일동안 그를 보살폈다. 추위는 많이 가셨고 쟁여뒀던 라면과 생수 그리고 중요한 땔감이 바닥을 드러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그를 나흘째 보살피던 날 처음 밖으로 나갔다. 내 집은 7층 아파트였는데 계단 창문으로 밖을 보자 2층 높이만큼 눈이 쌓여있었다. 자동차, 주택, 사람, 개, 가로등, 땅, 도로 그리고 출입구마저 두꺼운 눈에 묻혔다. 그런 세상은 하얬다. 구름조차 하얬고 아직도 내리는 눈도 얼어붙어버린 건물들도 모두 하얬다. 지구가 그동안의 그림을 덮고 새 그림을 그리려고 흰 페인트칠을 한 것 같았다.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끝이 안 나는 백(白)의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두려워졌다. 희망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이 광경에 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어붙은 눈물을 흘렸다.

어김없이 손목시계의 알람에 눈을 뜬다. 오늘은 주위탐색이 있는 날이었다. 매주 한번 그냥 산보하듯 호텔 주위를 돌아다녔다. 한 번도 무언가를 얻은 적은 없지만 상황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고 그에게 배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복숭아 통조림이랑 콩 통조림을 대강 까먹고 밖으로 나섰다. 엽총도 잊지 않았다.
요 근래 눈이 내리지 않는다. 눈이 안 오면 좋긴 한데 한편으로 걱정된다. 구름의 순환 고리가 끊긴 것만 같았다. 바다가 모두 얼어붙었다거나 더 이상 구름을 만들 곳이 없어진 건 아닌가 싶어진다. 눈도 안 내린다니 질리고 증오하는 눈이었지만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걱정을 접었다. 걱정은 한 번 이상하면 병이다. 그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다.

시청 앞을 지나다가 발아래를 보고 천천히 어께에서 엽총을 풀었다. 늑대발자국이 보였다. 일단 천천히 고개만 돌리며 숨을 곳을 찾았다. 가까운 시청 건물로 숨기로 했다. 3층 창문이 큼지막한 게 들어갈 만했다. 금방이라도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릴 것만 같아 무서워져 냅다 창문으로 뛰기 시작했다. 창문에 도착할 무렵 난 몸이 굳어버렸다. 수많은 늑대발자국이 창문 입구 주변에 즐비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숨이 거칠어졌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 입구를 막고 늑대들이 돌아갈 때까지 숨어야한다. 엽총을 잡은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주위를 살폈다. 아직 늑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호텔까진 대략 삼 분 거리. 나는 엽총을 꽉 잡고 뛰기 시작했다.

눈들이 발을 아래로 잡아당겼지만 더 거칠게 빼면서 호텔까지 달렸다. 다행히 호텔에 가까워질수록 늑대 발자국이 안보였다. 눈이 안 온 것이 화근이었다. 내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았고 늑대들은 날 찾아 온 것이 뻔했다. 추위를 대비해서 만든 나무문을 가져와 유리문에 덧씌웠다.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뛰어 나갔다. 차가운 난간에 기대며 주위를 살폈지만 흔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붉은 벽돌에 앉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얼마안가 숨이 차분해졌다. 엽총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엽총이 툭하고 얼어버린 흙 위로 떨어졌다. 손에 엽총 손잡이 부분의 둥그런 무늬가 빨갛게 자국 남았다. 손바닥을 들어 자국을 살폈다. 그리고 눈이 부신 하늘을 바라봤다. 틴들, 빛기둥 하나가 흰 구름 사이로 쏟아져 하늘에서 춤추고 있었다. 나는 호들갑떤 내 자신이 부끄러워져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혹여나 늑대가 들어올까 싶어져 건물 입구의 빈틈을 보수했다. 그리고 안심되자 다시 옥상 작업을 시작했다. 눈을 녹여 뜨거운 물로 만들어다가 흙에 부었다. 흙들이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 하던 흙장난이 생각나 흙을 한참을 주물럭댔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나무 두 그루 정도면 충분히 클 수 있는 곳이었다. 날이 더 따스해지면 잔디도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노을이 저물 때쯤 방에서 씨앗봉지를 가져왔다. 봉지 안엔 꽤나 많은 양의 씨앗이 들어있었다. 하나라도 싹을 틔우길 바라며 난 모를 심듯 규칙적으로 씨앗을 하나하나 심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었다. 계속해서 뜨거운 물로 적셨던 흙이 아기를 가진 자궁처럼 따스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조그맣게 힘내라고 말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불은 타닥타닥하며 의자를 씹으며 타올랐다. 역시 가장 잘 타는 것은 의자나 책상이었다.
“잘 탄다. 잘 탄다. 잘 탄다.”
나는 목소리를 바꿔가며 잘 탄다라고 말을 반복했다. 그때의 그의 말투를 따라 해보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잘 탄다.”
“몸은 조금 괜찮아?”
내가 물었다.
“응. 어께도 많이 나아졌어. 내가 나흘이나 잤다니 말이 안 돼. 난 그냥 한숨자고 일어난 느낌인데.”
그는 여전히 담요를 둘둘 말고 말했다.
“뭐 먹을래? 너 깨어나기 전에 옆집에서 통조림 좀 가져왔어. 옆집 사람들은 대피했는지 없더라.”
“근데 통조림을 놓고 가?”
그가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많이 있었나 보지. 자, 배고플 탠데 일단 먹고 말하자.”
“…… 밖은 어때?”
한참을 먹던 그가 물었다.
“조용해.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너 올 때 밖은 어땠어?”
“엄청난 눈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이 비명 질렀고 자동차 도난방지소리가 귀 아프게 울렸어. 막 사람들은 거리에서 뛰어가는 건지 날아가는 건지 모르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게 전쟁난 줄 알았어. 근데 난 솔직히 너 생각밖에 안 나더라.”
그가 미소 지었다.
“그렇게 웃지 마. 통조림 더 줄까?”
“아냐. 됐어. 넌 먹었어?”
“응. 먹었어.”
그는 다시 먹기 시작했다. 의자를 집어삼킨 불이 바람도 없이 흔들거렸다.
“우리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있을까? 통조림은 이것뿐이잖아? 내가 아는 커다란 호텔이 있어. 거기라면 사람들도 있을 것 같고 더 안전할거야.”
“군인주제에 방공호 가자고는 안하네?”
“거긴 추위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곳은 아니니까. 그 호텔은 가구들이 엔틱으로만 꾸며서 대부분 나무로 만든 것들이라 땔감으로 쓰기 좋을 거야. 저기 불 봐, 땔감은 역시 나무의자라니까. 잘 탄다.”
“거기 오성 급이야?”
내가 슬며시 물었다.
“그럼! 별 다섯 개지. 가서 자본 적은 없지만 대령님 모시러 몇 번 갔었지. 꽤나 좋았어. 너랑 결혼하면 꼭 대려가 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묘하네.”
“괜찮아. 팁 안내도 되니, 얼마나 좋아?”
그가 웃었다. 우린 내일 가자고 약속했다. 내일은 생각보다 빨리 왔고 우린 갖가지 외투들과 내복들로 무장을 하고 새하얀 세상에 첫 발자국을 찍었다. 호텔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단단하게 압축되지 않은 눈들이 발들을 잡아 당겼고 추위는 여전히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다. 큰 건물만으로는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길을 여러 번 헤맸고 헤맬 때마다 두려움이 느껴졌다. 반나절을 걷고서야 결국 그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엄청 웅장했을 프런트 룸은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2층의 베란다로 호텔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들어오지 마!”
베란다로 들어갈 찰나 그가 소리쳤다. 너무 추웠고 여러 번 길을 잃은 그에게 조금 화가 나있었던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들쳐 맨 새파란 얼굴에 몸이 굳어버렸다. 시체였다. 나는 바로 베란다 밖으로 나와 구토했다. 환기가 되지 않았던 방은 구토가 나올 만큼 역했고 아무리 얼어 죽은 시체라도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그는 시체를 들쳐 맨 채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눈바람에도 멀리 걸어가  손으로 눈을 팠고 그 속에 시체를 묻고서야 돌아왔다.
나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죽은 것을 본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음이 두꺼운 옷을 뚫고 피부에 닿았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변할 것만 같았다. 추위보다 더 차가운 감정들이 피부에 스쳤다. 계속해서 창백한 그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그런 나를 데리고 베란다와 방을 거쳐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 몇 개를 쪼개 불을 붙이면서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겁내지마. 넌 죽지 않아. 내가 있잖아.”
“너, 너가 죽으면?”
나는 떨리는 입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나를 안았다. 품이 너무 따스해서 눈물이 났다.

삐, 삐, 삐, 삐. 나는 뻐근한 목을 매만졌다. 앉은 채로 잠들었었다. 시계 알람을 끄고 이마를 만졌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손으로 땀을 훔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입구로 가서 나무덧문을 치우고 밖을 살폈다. 늑대 발자국들이 수없이 나 있었다. 나무덧문에는 발톱으로 긁은 흔적까지 있었다. 확실히 찾아왔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예상했었다. 한동안 눈이 안 내려서 내 발자국 흔적들이 주변에 즐비했기에 충분히 찾아올 만 했다. 나는 문을 더 두껍게 보강하기로 했다. 긁으면 알아차릴 수 있게 주방에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가져와 덧문에 매달고 넓은 철판들을 나무덧문 앞에 세워뒀다. 나중에 치우고 나가려면 고생 좀 하겠지만 유리병들을 깨서 입구 주변에 뿌렸다. 이렇게 해 놓으니 좀 안심되었다.
옥상 흙 위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룻밤이니 싹도 안 트겠지라고 위안 삼았다. 난간 너머 세상은 여전히 하얗다. 조금은 회색인 담배연기를 흰 세상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한 번은 떠나려고 한 적이 있었다. 남쪽으로 가면 얼지 않은 곳이 있고 부드럽고 따스한 볕이 비추는 곳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아서 외롭지도 않고 먹을거리도 많아서 통조림 말고 딴 것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믿고 떠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근데 출발하려고 하는 그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희망도 없는 이 얼어붙은 건물에서 나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문을 여는 순간 밀려오는 한기에 쌓였던 희망은 하얗게 얼어붙어버렸다. 끝도 없이 하얀 세상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결국 희망을 접고 나는 봄이 오기를 ‘소망’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떠났으면 도착할 수 있었을까?”
난간 너머 넓은 백의 설원이 문득 순하게 보였다. 나는 여전히 차가운 난간에 담배를 지저 껐다. 아직 점화(點火)가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가 난간너머 허공을 날아 눈 속으로 파묻혔다. 문득 차가운 느낌에 하늘을 바라봤더니 오랜만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양초는 하염없이 흔들렸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건물 어느 틈으로 들어온 바람들이 방까지 들어왔다. 바깥 입구에 달아놓은 프라이팬과 냄비들이 바람에 달그락거렸다. 바람이 불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역설적이게도 조용한 밤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들을 기억했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신호에 걸려 서있는 자동차들의 엔진소리, 하늘높이서 들리는 비행기소리, 틈만 나면 짖어댔던 아랫집 개소리와 이틀에 한 번마다 격일제로 싸우는 옆집 부부소리와 자주 울지만 그래도 웃음소리가 더 큰 윗집 아기의 꺄르르대는 소리.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눈에는 소리를 좋아하는 벌레가 살아서 눈이 내리는 날이면 소리들이 그 벌레들에게 먹힌다고 했다. 난 일곱 살 때까지 그걸 믿었다가 언젠가부터 아예 잊어버렸다. 눈이 내리면 그 벌레보단 추위와 도로가 얼어 교통침체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래도 그땐 눈이 두렵진 않았다. 지금은 눈이 두렵고 조금의 숭고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하얗게 내리는 것만으로 자만하던 인간의 무릎을 꿇게 했으니 숭고할 만했다.
잠시 바람소리가 멈췄다. 달그락 거리던 냄비도 멈췄다. 아니, 소리만 안 나지 아직 안 멈췄을지도 모른다. 바람도 아직 그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눈 속에 살던 그 벌레가 이젠 내 귀로 들어온 것만 같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이 세상엔 이제 눈 밖에 없으니까 나도 눈으로 봤을 것이다. 나는 양초를 끈다. 화롯불에선 최소한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 이 밤이 가고 곧 봄이 올 테니 삼년을 타올랐던 저 불꽃도 이젠 쉴 수 있을 것이다.

“피웠다! 봐봐, 불 피웠어!”
나는 신나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는 의자 몇 개를 더 가져와서 부서 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불이 살짝 주춤하더니 이내 의자 다리 조각을 씹어 먹으며 더욱 커졌다.
“불을 쓰지 않을 때는 재로 덮어둬. 그러면 불씨는 꺼지지 않으니까.”
나는 고갯짓으로 답했다. 그는 몇몇 방에서 침대에서 매트리스를 꺼내 방으로 가져왔다. 불꽃이 머물 화롯터를 제외하고 바닥을 전부 매트리스로 도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 테이프로 창문 틈을 막고 여기저기 빈틈을 다 쫘악, 탁하고 청 테이프를 붙였다. 가장 처음에 불을 지필 땐 스프링클러가 작동해서 방안에 물을 뿌려서 불이 꺼져버렸다. 얼었을 줄 알았는데 끝 쪽에 아직 얼지 않은 물이 남아있었는지 한 10초간 물을 뿌리다가 결국 스프링클러만 계속 돌아갔다. 물에 다 젖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웃다가 다시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의자를 쪼개어 불에 던지고 우린 옷을 벗었다. 젖은 옷이 무거웠다. 그는 더 무겁게 내 나체위로 올라탔다. 우린 몸을 섞었다. 하나였다, 둘이였다를 반복했다.

눈은 두 달 동안 계속 내렸다. 그래도 눈의 높이는 높아지지 않고 계속 압축되었다. 눈 아래 있던 물건들이 무게를 못 이기고 내려앉음에 따라 여기저기 구멍이 나기도했다. 그것도 한 달이 지나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눈의 무게와 차가움의 무게에 질려 다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나고서 그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심한 동상을 입었던 어께로부터 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얼어갔다. 아무리 옷을 껴입고 불을 때워도 그는 따스해지지 않았다.

앓아눕고 나서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옮는 거 아니야? 그런 거 같아.”라든지,
“너라도 꼭 살아야 돼.”라고.
나는 고갯짓하며 그를 더 꽉 껴안았다. 한기가 내 몸에 스며들어도 상관 않고 더 세게 껴안았다.

세 달 만에 눈이 그쳤다. 그는 일주일 전부터 다시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어께는 차가웠지만 세어 나오는 한기는 줄어들었고 그의 몸은 점점 열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좀 괜찮아지자 나는 그와 몸을 섞었다. 부드럽고 강하게 그는 나를 애무했다. 어께의 한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아, 하고 내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더 세게 날 끌어안았다.
다음날 물을 끓여다가 그의 몸을 씻겨줬다. 내복에 외투도 다 챙겨주고 눈이 그친 밖으로 나섰다. 나무덧문을 치우자 저 멀리 뚫린 구름사이로 여러 개의 빛기둥이 내려왔다. 빛기둥은 서로 닿지 않으면서도 무대조명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저기 봐봐.”
“응?”
“봐, 거대한 빛의 벽이 보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틴들이야.”
“빛이 먼지나 수증기와 충돌하여 빛줄기가 보이는 거야.”
“음, 예쁘다.”
“그렇지? 자연이 주는 거대한 선물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틴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달그락 보다 더 큰소리로 덜커덕덜커덕에 가까운……

난 급하게 잠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머리맡의 엽총을 잡아들었다. 그때 마침 길고 두려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늑대 울음소리. 늑대들이 다시 찾아왔다.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봤다. 새벽 5시.
“젠장, 개자식들.”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에 늑대들이 조급해졌다. 아마 순록무리를 다시 쫓다가 흔적이 없어져서 돌아왔을 것이다. 이대로 총을 들고 문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늑대 무리를 저격하려면 옥상으로 가야했다. 나는 외투를 입고 계단으로 나섰다.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를 들은 늑대들이 아우우하며 다시 울었다. 울음소리가 복도를 타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계단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밤의 한기가 쏟아졌다. 나는 두 계단씩 올랐다. 층이 높아질수록 숨이 가빴지만 멈추지 않고 올랐다. 옥상 문을 여니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내 입에서 나온 입김들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빠르게 난간에 몸을 기대 아래를 살폈다. 늑대는 점처럼 보였지만 숫자는 파악할 수 있었다. 대략 스무 마리. 엽총에 든 총알은 네 발 뿐이었다.
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연기보다 한기가 더 많이 목구멍으로 들어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수많은 늑대였지만 우두머리를 잡으면 된다고 생각 들었다. 연기를 내뱉고 총구 끝 조준점에 집중했다.
눈발이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북풍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가장 새하얀 늑대를 조준했다. 가장 큰 덩치에 선두에 서서 계속 나무덧문을 긁는 늑대였기에 우두머리라고 확신했다. 조준점을 북풍을 고려해 따라 살짝 올렸다. 그리고 셋, 둘, 하나.
탕하고 커다란 화약 소리가 났다. 너무 가까이 댄 오른쪽귀가 비명 지르듯 삐하고 이명을 질러댔다. 질끈 감은 두 눈을 떴다. 맞지 않았는지 늑대들이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아우우하고 크게 울부짖었다. 입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담배가 연기를 이리저리 흩뿌리며 허공으로 떨어진다. 나는 난간에서 내려오다가 하나를 깨달았다, 흙을 짓밟고 있다는 것을. 흙은 완전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내 신발에 몇몇 씨앗은 땅 위로 나왔고 평평했던 흙들이 지진이라도 난 듯 산맥을 일구었다.
나는 급하게 손으로 씨앗들을 다시 심는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를 끊임없이 외며 흙들을 허겁지겁 다듬는다. 그리고 일어서다가 미끄러운 진흙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울컥하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 모두 다 죽었을까?”
그가 ‘선’처럼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닐 거야. 분명 따스한 곳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있겠지. 꽤나 많을 거야.”
“거긴 춥지 않을까?”
“무슨 말이야?”
“여기보다 더 추울 거야, 거기는. 더 치열하고 더 냉정할거야. 마치 굶주린 늑대소굴처럼.”
“헛소리 하지 마.”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왼 손으로 오른쪽 어께를 매만졌다.
“여길 절대 떠나지마. 누군가가 구하러오기 전까지. 누군가가 구하러 왔다는 것은 그만큼의 여유가 생긴 것일 태니까. 그 여유가 생기지 않은 곳으로 재발로 들어가지마.”
“너가 안 떠나면 나도 떠나지 않아.”
그는 내 말을 듣고 잠이 들었다. ‘선’처럼 편한 자세로 영원한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그의 장례식을 1층에서 했다. 절대 떠나지 말자는 그의 약속처럼 난 그를 예비발전기를 통해 돌아가는 냉동고에 넣었다. 더 차갑고 추운 곳에서 그는 떨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은 채로 얼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지갑을 꺼냈다. 수많은 카드와 지폐들 속에서 그의 사진을 꺼냈다. 꽃을 들고 조금은 미련하게 웃고 있는 그가 보였다. 나는 왈칵,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흙을 털고 일어섰다.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흙이 얼굴에 묻었지만 눈물보다 났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일출은 저 멀리 구름이 없는 곳에서 장엄하게 붉은 빛을 뿜으며 올라왔다. 그때 삐, 삐, 삐하고 시계알람이 울렸다. 거칠게 시계를 풀어 난간너머로 던져버렸다. 삐, 삐, 삐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난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늑대들은 나무덧문을 긁고 있었다. 나는 방문을 닫아 잠근 뒤 의자에 앉았다. 늑대들은 더 사납게 덧문을 긁었다. 나무덧문이 쪼개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늑대들이 내는 낮은 으르렁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 뒤로는 거센 바람이 몰아닥쳤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라디오를 키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착, 불을 붙이자 라디오 전파가 잡혔다.

‘저는 이제 죽을 겁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인간들, 너희 개새끼들 춥다고 징징대면서 온기를 달라고 지랄하지 마. 그거 다 너희 업보야. 눈앞의 상대방들을 냉정하게 밟고 올라선 너희 업보라고 개새끼들아! 왜 하나같이 전부 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희 말이야. 다 똑같아.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들. 그래, 이 얼음들이 너희보다 나아. 이 눈 들이 너희보다 났다고! 지지직, 개새끼들. 지직, …쌍한 것들.’

어김없이 그 방송이 들렸다. 라디오의 볼륨을 키웠다. 더 큰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거칠게 욕을 내뱉고 하소연했다. 쿵. 나무 덧문이 부서지며 넘어졌다. 그리고 바로 복도에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전 이제 죽을 겁니다.”라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침대 아래 있던 생수를 콸콸 비워 불을 껐다. 마지막 남은 온기까지 모두 꺼버렸다.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그리고 엽총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샜다.
셋, 둘, 하나.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여전히 구름은 하늘 가득했다. 그래도 달라진 건 있다. 雪대신 雨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 높은 호텔 위에 싹이 텄다. 따스한 곳에 있던 사람들이 올라왔고 그 많던 눈은 금방 치워졌다. 다시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기는 꺄르르하고 웃었고 부부는 격일제로 싸웠다. 그리고 강인한 늑대는 잊혀 졌고 설원을 달리던 순록도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새로이 바뀐 세상은 아직도 춥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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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제목 날짜
가작 그가 기울어졌다 2011.12.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1.11.25
가작 채취선 2011.11.2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1.10.28
가작 거미에게 나비를 2011.10.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7 2011.10.01
가작 아마존 바이러스 2011.10.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1.08.26
가작 외계인2 2011.08.26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1.07.30
우수작 꿈꾸는 문들의 도시 2011.07.30
가작 Flash 2011.07.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1.06.25
가작 자동차 (본문 삭제)4 2011.06.2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1.05.28
우수작 최고의 밤(내용 삭제) 2011.05.28
가작 히키코모리 방콕기 2011.05.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1.05.02
우수작 늙은 소녀 2011.05.02
가작 온기 2011.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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