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추억교정소

희야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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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표정은 미묘하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차분히 일을 진행해야 할지, 아니면 당장 여길 뛰쳐나가야 할지 고민 중이다.

“그러니까 십만 원이면 제 추억을 교정할 수 있다는 거죠?”

여자는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한다. 소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네, 그렇습니다.”라고 친절히 대답한다.

한 달 전, 여자는 어린이집에 아들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이 사무실을 발견했다. 평범한 상가건물의 5층 유리창에 또박또박 한 글자씩 상호가 붙어 있었다.

‘추억교정소’

이 단어는 작은 씨앗이 되어 여자의 마음속에 심어졌다. 이 씨앗은 무의식에 눌어붙어있던 ‘그 일’을 양분으로 무럭무럭 자라났고, 마침내 활짝 피어서 여자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대체 추억교정소라는 건 뭘까? 정말로 추억을 고쳐주는 걸까? 그렇다면 ‘그 일’도 고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옛날 사진을 편집해주는 곳이거나 골동품 파는 가게인데 그런 상호를 갖다 붙인 걸까?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로 추억을 교정할 수 있다면, 여자에게는 구원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여자는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추억교정소’를 방문했다. 연식 있는 내부에 비해 가구며 집기가 단순하고 세련된 디자인이라 얼핏 힙한 동네의 카페 같았다. 사무실 안쪽 책상에 앉아있던 남자가 “어서 오세요!”라며 일어섰다. 여자가 묵례하고 소파가 있는 사무실 가운데로 간다. 남자가 앉아있던 책상 위의 아크릴 명패가 눈에 들어온다. ‘소장 박준일’

박준일 소장은 생각보다 젊었다. 30대 중반 정도? 마치 금융회사 직원처럼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쓰리버튼 양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는 맥이 풀렸다. 자신이 은밀히 기대하던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상호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요. 레트로 컨셉의 커피숍인가? 아니면 옛날 물건들 업사이클링해서 파는 덴가? 둘 다 관심 있거든요. 근데 제가 잘못 온 거 같네요.”

여자가 둘러대고 돌아서려는데 소장이 말한다. “아닙니다. 저희는 과거의 기억을 재확인하고 교정하는 곳입니다.” 여자가 몸을 돌려 묻는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린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한가요?” 소장이 미소 지으며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다. “앉아서 얘기하시죠.”

소장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의 특정 순간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추억의 그 장소, 그 시간에. 몇 가지 제약은 있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에서 온 나를 인지하는 순간, 나는 그 장소에서 저절로 소거되어 현재로 돌아온다. 또 한 번 갔던 과거로 다시 갈 수는 없다.

“최면술인가요? 최면술로 기억을 조작해서 추억을 교정하는 그런 거예요?”

“아닙니다. 현재의 고객분이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건 타임머신 아닌가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진짜 타임머신이 있다고 해도 물리 법칙상 미래로 갈 순 있을 진 몰라도 과거로 가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쪽에 대해선 오히려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네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원리는 모릅니다. 다만 그게 가능하다고는 확실히, 저와 제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개발하신 거거든요.”

“.... 소장님도 다녀오셨나요?”

“네.”

“정말로 추억을 교정할 수 있어요?”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무실 이름도 이렇게 지었구요.”

여자는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여자는 연극연출가다. 연기를 보는 눈이 날카롭고, 놀라운 연기연출력으로 업계에서 유명하다. 남편은 지인들에게 여자의 안목 때문에 거짓말을 못 한다고 자주 너스레를 떤다. 여자 자신도 자부심이 있다. 사람들의 거짓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그런 여자가 보기에 소장은 둘 중 하나다. 최고의 배우이거나 정말로 추억을 교정해봤거나.

“비용은 얼마고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요?”

“카드, 각종 페이, 계좌이체 가능하고 십일만 원입니다. 세금계산서 발행도 가능하구요, 현금으로 주시면 십만원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가 드리는 좀 큰 약을 불편하더라도 꿀꺽 삼키시고 편안한 장소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삼킨 후 10분 내외면 과거로 갈 수 있고, 30분에서 1시간가량 추억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주의하실 점은 약을 삼키기 전후로 가고 싶은 시간대와 장소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강하게 떠올리셔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랜덤한 과거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조심하셔야 합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 그 시점의 모든 물리법칙을 다 적용받고 현재로 돌아와도 그게 그대로 이어지거든요.”

“과거에서 다치거나 죽으면…. 현재에 돌아와서도 그렇게 된단 뜻인가요?”

“음…. 죽는 건…. 아직 죽은 사람이 없어 모르겠지만 다치는 건 그렇습니다.”

말을 마친 소장이 자기 왼쪽 팔을 걷어 보여주었다. 길쭉한 흉터다.

“제가 과거로 갔을 때 다쳤던 겁니다.”

여자는 흉터를 보고 흐음~ 심호흡을 한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여자는 자기 집 서재에 앉아있다. 책상 위에 놓인 약병과 샛노란 실리콘 팔찌가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여기가 가장 안전하고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여겼나 싶다. 현금을 주고 약을 받아왔다. 지금 하려는 이 황당한 짓과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평범한 약통 안에 든 것은 일반적인 캡슐 형태의 자그마한 약이 아니라 엄지손가락 손톱만 한 크기의 빨간색 고무공이다. ‘저걸 삼킨다고?’ 싶어서 만져봤더니 열감이 있다. 분명하다. 약하지만 온기가 느껴진다.

3시간 후엔 어린이집에 아들을 데리러 가야 한다. 저녁 7시쯤 남편이 퇴근해 집에 온다. 그 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일주일 후엔 주연배우 오디션이 있다. 오디션 전까지 대본을 정리해서 제작사에 넘겨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추억교정소’를 알게 된 이후로 일깨워져 버린 ‘그 일’을 정리하고 싶다.

여자는 실리콘 팔찌를 오른쪽 손목에 끼우고 삼켜야 할 작은 공을 집어 든다. 실리콘 팔찌에는 추억교정소 상호와 전화번호가 음각되어있다. 그 전화번호는 소장의 아버지 때부터 쭉 쓰던 것이라 추억 속에서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여자는 약이라고 불리는 고무공을 입에 넣고 삼킨다. 그리고 그때를 떠올린다. 여자가 돌아가서 교정하고 싶은 추억이 있는 그 시절, 여자가 지금 자기 아들과 같은 나이이던 만 6살의 어느 여름날이다.

 

여자가 태어나 살던 곳은 당시엔 도시 외곽이었다. 그래서 시골 흙집과 슬레이트 지붕 집, 연립과 아파트, 논과 밭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뒷동산도 있고 개울도 있으면서 제법 큰 슈퍼마켓과 ‘무슨 무슨 가든’이라는 커다란 식당들도 많았다. 여자 또래의 아이들도 아주 많았다. 골목 가득 아이들이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놀았다. 가끔은 뒷산에 같이 올라가거나 개울에서 물놀이를 할 때도 있었다.

여자가 기억하는 그 날의 가장 큰 감정은 짜증이다. ‘꼬맹이’로 불리는 동갑내기 남자애가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작은 편이었다. 여자보다도 한 뼘은 작았다. 꼬맹이는 뻥이 심했다. 언제나 과장된 얘기를 하면서 자기만 그걸 알고 있다는 식으로 으스댔다. 여자는 그게 싫었다. 그런데 꼬맹이는 유독 여자에게 그런 뻥을 많이 쳤다. 자기 집 광에 오래된 로봇이 있는데 조금만 수리하면 타고 다닐 수 있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띠껍게 대꾸하면 “아니, 니가 보여달라면 보여줄 수도 있고….”라며 기분 나쁘게 입술을 씰룩댔다.

그날도 그런 식이었다. 꼬맹이는 여자에게 “저수지에 진짜 큰 물고기가 있어. 너보다도 커! 까딱하면 잡아먹혀. 너 진짜 조심해~”라며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다. 평소라면 꼬맹이와 길게 얘기하기 싫어서 무시했을 텐데 그날은 왠지 화가 났다. 날이 더워서였을까? 아침에 반찬 투정하다 엄마한테 혼난 게 안 풀려서 그랬을까?

“넌 왜 그렇게 맨날 뻥을 치니? 세상에 나보다 큰 물고기가 어딨어? 미국에는 있을지 몰라도 여긴 없거든! 그리고 내가 너보다 더 큰데, 내가 조심하면 너도 조심해야지. 네가 뭔데 나보고 조심하라 말라야! 내가 잡아먹히면 너는 더 먼저 잡아먹혀. 근데 그런 물고기는 없으니까 됐어. 너 거짓말치는 거 진짜진짜 짜증나!”

보통은 여자가 화가나 쏘아붙이면 꼬맹이는 입을 삐쭉거리며 휙 가버렸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꼬맹이는 펄쩍펄쩍 뛰면서 저수지에 진짜 큰 괴물 물고기가, 여자만 한 물고기 수십 마리가 산다며 화를 냈다. 심지어 물고기 중에는 황금색도 있고 빨강색과 흰색도 있으며 대장은 빨강이랑 흰색이 섞인 정말로 거대한 놈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긴 수영선수한테 수영을 배워서 능숙하게 도망칠 수 있지만, 너 같은 애들은 대번에 잡힐 거라고 했다.

“그럼 내기해. 저수지에 너보다 큰 물고기 있는지 보러 가자고!” 화가 난 여자가 소리쳤다. 꼬맹이는 물고기가 너보단 커도 자기보단 작을 거라면서 앞장섰다. 여자는 뒤를 따르며 짜증이 왈칵 솟았다. 꼬맹이 정수리를 훤히 내려다볼 정도로 키가 더 큰데 어째서 또 자기보단 작다는 건지, 원...

그렇게 저수지까지 땡볕이 내리쬐는 흙길을 20분은 걸었다. 아이들 걸음으론 좀 먼 곳이기도 하고, 꼬맹이는 뭐가 신났는지 가는 내내 내기에서 지면 자기한테 뭘 해줄 거냐고 깐족거리느라 걸음이 느렸다. 여자는 만약 물고기가 없거나 크기가 작으면 꼬맹이한테 합죽이를 시키겠다고 했다. 꼬맹이가 뻥을 칠 때 여자가 ‘합죽이!’라고 외치면 꼬맹이는 그 즉시 입을 닫는 것이다. 꼬맹이는 선선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곤 자기가 이기면 클로버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꽃목걸이? 네가 하게?” 여자가 되물었다. “아니, 우리 엄마 주게.” 여자는 꼬맹이 엄마가 꽃목걸이 한 모습을 떠올렸다. 어른이 그런 걸 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뱃속이 간질거렸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꼬맹이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지 말이 많아졌다. “목걸이도 만들고 반지도 해줘. 꽃팔찌도 만들어주고, 머리에 쓰는 꽃왕관도 만들어줘. 우리 엄마 다 하게” 여자는 그걸 만들어 꼬맹이 엄마를 주는 게 싫지 않지만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많은데. 왕관은 좀 생각해봐야겠다.”라며 튕긴다.

저수지에 도착했다. 물가에는 풀이 높이 웃자라 있었다. 여자와 꼬맹이가 까치발을 해도 풀 너머를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꼬맹이가 풀숲을 헤치며 물가로 안내한다. 풀을 밟아서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해는 뜨겁고 저수지는 거무죽죽한 녹색빛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여자는 또 왈칵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 더운 날에 뭐 하는 짓이람? 당연히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암것도 없네. 내가 이겼지?” 그때였다. 잔잔하던 저수지 한 가운데에서 물결이 일었다. 그 물결의 덩어리는 곧장 여자와 꼬맹이 쪽으로 다가왔다. 여자는 너무 놀라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꼬맹이가 여자의 팔을 잡았다. 그 덕에 코앞까지 다가온 물결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커다란 물고기였다! 대여섯 마리 정도였는데 정말로 컸다. 그중 두어 마리는 바로 앞에 있는 꼬맹이만 했다. 게다가 정말로 금색과 흰색도 있었다.

“어때? 내 말 맞지?” 꼬맹이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며 말했다. 여자는 그 표정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근데... 나보다 안 큰데?” 그러자 꼬맹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자가 거길 보자 말문이 막혔다. 빨강색 물고기의 호의를 받으며 빨강과 흰색이 섞인 커다란 물고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섞인 색의 물고기는 확실히 컸다. 꼬맹이보다 컸고, 여자보다 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겼네. 언제 꽃목걸이 만들어 줄 건데?” 꼬맹이가 신이 나서 이죽거렸다. 여자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내기에서 진 게 화가 나고, 거대한 물고기 때문에 겁도 났다. 하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감정은 그렇게 쏘아붙였던 꼬맹이의 뻥이 사실은 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틀렸다는 게 화가 났다. 어쩌면 여자는 꼬맹이를 무시하고 짓밟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만만하고 자그마한 꼬맹이니까. 나쁜 마음이라 애써 숨겨왔던 감정이다.

“히히, 사실은 얘네 순해. 사람 안 잡아먹어. 풀 먹고 산대. 물속에 사는 풀.” 꼬맹이가 말했다. “뭐! 나한테 거짓말했어?!” 여자는 화가 나서 꼬맹이에게 잡혔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꼬맹이가 어어어- 하며 균형을 잃었다. 여자는 깜짝 놀라 꼬맹이를 양손으로 꽉 붙들었다. “와! 너, 나 좋아하냐? 물에 빠질까 봐 잡아 주고.” 꼬맹이는 넘어질 뻔한 척 쇼를 한 거였다. 여자는 정말로 화가 났다. 이전까지 혼란스러웠던 감정, 꼬맹이에게 죄스러웠던 마음은 싹 사라지고 짜증과 미움이 여름날 소나기처럼 몰려왔다. 여자는 꼬맹이를 휙 밀어버렸다. 꼬맹이는 놀란 얼굴로 양팔을 크게 휘두르다 균형을 잃고 저수지에 빠졌다. 크게 풍덩 소리가 났다. 여자는 혹시나 해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혹여나 물고기가 꼬맹이를 공격하거나 꼬맹이가 수영을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고기는 놀라 도망쳤고 꼬맹이가 빠진 곳은 허리 정도로 깊지 않았다.

“에이씨, 옷 다 버렸네. 야! 너도 들어올래? 내가 수영 가르쳐 줄게.” 꼬맹이는 능글맞게 웃더니 헤엄쳐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확실히 수영에 익숙해 보였다.

“아니, 너 혼자 잘 놀아.” 여자는 이 모든 상황이 짜증 나고 싫었다. “난 갈 테니까 따라오지 말고. 꼴 보기 싫으니까.” 여자는 몸을 휙- 돌리는데 꼬맹이가 뒤통수에 대고 외친다. “꽃목걸이 내일까지 만들어놔. 받으러 간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저수지에서 집까지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꼬맹이가 따라오나 싶어 여러 번 돌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집까지 가는 길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조금 무서웠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날 밤 진짜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댁에 갔다. 거기서 보름 넘게 지냈다. 엄마, 아빠는 일주일 후에 먼저 돌아갔다. 그래서 여자는 거의 열흘간 외할머니하고 둘이서만 지냈다. 며칠은 재밌었지만, 엄마, 아빠가 보고 싶고 집과 친구들이 그리워 많이 울었다. 마침내 엄마가 데리러 왔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동네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리고 며칠 후 꼬맹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친구에게 물었더니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여자는 쿵-하고 가슴 속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더 얘기하진 않았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울기만 했다. 왜 우는지는 잘 몰랐지만, 울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여자가 눈을 떴다. 야외다. 고인 물 특유의 냄새가 짙게 나고, 뜨거운 태양광이 눈에 정통으로 들어온다. 손을 들어 태양을 가린다. 팔목에 매달린 실리콘 팔찌가 보인다. 팔찌에 음각된 글자가 ‘추억교….’까지 보인다. 바닥에 손을 짚으니 축축한 흙과 풀이 만져진다.

‘여긴 어디지?’

벌떡 일어나고 싶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관절 하나하나를 점검하며 천천히 자리에 앉는다. 다친 덴 없는데 약한 두통이 느껴지고, 입안에서 역한 느낌이 난다. 조금 전에 고무공을 삼켰던 탓이리라. 심호흡하며 상황 파악을 하려고 애쓴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난 갈 테니까 따라오지 말고. 꼴 보기 싫으니까.”

“꽃목걸이 내일까지 만들어놔. 받으러 간다.”

 

자박자박 풀을 밟으며 멀어지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뒤따른다. 여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정말 이곳으로, 이 순간으로 돌아왔구나!’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가만히 있는다. 소장의 말이 떠올라서다. 과거의 자신에게 들키는 순간 소거되어 현재로 돌아간다, 그리고 한번 다녀온 그 추억으론 다시 갈 수 없다…….

풀을 밟는 가볍고 화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다. 소녀인 여자는 저수지에서 멀어졌다. 일차적인 위험은 사라졌다. 이제 추억을 교정할 차렌가? 어떡하면 되지? 참방거리던 물소리가 가까워진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본다. 십여 미터 떨어진 저수지 가운데에 꼬맹이가 나타난다. 배영으로 하늘을 보며 편안하게 헤엄치고 있다. 당황하거나 힘이 빠진 기색은 없다. 꼬맹이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잣말을 한다. “짜증 나는 계집애!” 가시 돋친 단어와 달리 푸념 내지는 아쉬움이 담겨있다. 여자는 그 마음을 안다. 얼마 전 아들에게서도 봤다. 저렇게 생생한 감정을 내뿜는 꼬맹이가 죽어선 안 된다. 물에 빠져선 절대로 안 된다. 여자는 꼬맹이를 물에서 끄집어낸 다음 곧장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가는 길에 여러 번 다짐을 받으리라. 다시는 이 저수지에 오지 말라고. 그 어떤 저수지나 계곡에도 가지 말라고. 필요하다면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지어내 협박할 생각이다. 어린아이라면 오금이 저려 오줌을 싸고, 물만 봐도 겁이 나서 도망칠 정도로 섬뜩하게. 여자는 꼬맹이와 같은 나이의 아들을 둔 엄마고, 뛰어난 연극연출가다. 어린아이를 놀래킬 레퍼토리는 산더미처럼 갖고 있다. 그저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여자는 첨벙첨벙 저수지로 들어간다. 꼬맹이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여자 쪽을 본다.

“꼬맹아! 아줌마랑 얘기 좀 하자. 이리 나와봐.”

그런데 꼬맹이의 동공이 커진다. 놀란 얼굴이다. 여자는 꼬맹이가 왜 저러나 싶어 덜컥 겁이 난다. 수영을 잘하더라도 깊은 수심에 놀라 패닉에 빠지면 사고가 생긴다. 꼬맹이를 안심 시켜야 한다. 그런데 꼬맹이 표정이 이상하다.

“아줌마, 뒤에... 아저씨!?”

여자가 돌아보려는데 뒤통수에 뭔가가 세게 부딪힌다. 엄청난 통증과 함께 골이 흔들린다. 여자는 풍덩- 앞으로 꼬꾸라진다. 물속에 내리꽂힌 햇살 사이로 번져가는 붉은 기운이 보인다. 피다. 여자의 뒤통수에서 피가 나고 있다. 여자는 허우적대며 일어서려고 한다. 얼어서 꼼짝 못 하는 꼬맹이가 보인다. 여자가 소리친다. “도망쳐!” 그 고함에 정신이 퍼뜩 돌아온 꼬맹이가 저수지 중심부를 향해 헤엄친다. ‘아! 안 되는데…. 저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여자의 정신이 희미해진다. 여자는 마지막 기운을 끌어모아 물속에서 몸을 돌린다. 태양을 등진 실루엣이 보인다. 손에 돌을 든 남자다. 남자가 손을 뻗는다. 여자는 저항하려 하지만 물 속이고,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의식이 사라지며 완벽한 암전이 된다. 여자는 ‘막이 바뀌는 무대 같다’라고 생각한다. 이게 ‘추억’ 속에서 여자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다.

 

여자는 병원에서 깨어났다. 어린이집에서 남편에게 연락했다. 여자가 늦게까지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아서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남편이 서재에 쓰러져있던 여자를 발견해 병원에 데려갔다. 당시 여자는 온몸이 젖어있고, 후두부가 깨져있었다고 했다.

여자는 다음 날 아침 의식을 회복했다. 남편은 깨어난 여자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여자는 남편이 아이처럼 엉엉 우는 걸 처음 봤다.

다행스럽게도 뒤통수에 남은 꿰맨 자국 외에 다른 후유증은 없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다고 했다.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다.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 죽었던 친구를 구하려고 했는데 괴한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하면, 퇴원을 안 시켜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바득바득 우겨서 2주 만에 퇴원했다. 남편은 누군가 침입한 거라며 경찰에 신고하고 이사하자고 했다. 여자는 남편을 진정시켰다. 극본 작업의 스트레스로 욕조에 들어갔다 서재에서 미끄러진 거라고 했다. 물론 남편은 순순히 믿지 않는 눈치다.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간 것 하며, 몸에서 퀴퀴한 물비린내가 났다는 것이다. 여자는 피 냄새 때문에 헷갈린 거라고 했지만, 그것으로 자신이 어린 시절의 그 저수지에 다녀온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끼고 있던 노란 실리콘 팔찌가 없어졌다는 것을. 남편도 몰랐고 입원해있던 병원에도 없었다. 병원에서는 실리콘 팔찌 대신 자그만 라텍스 공이 변에서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남편은 여자가 퇴원한 후에도 휴가를 내고 며칠간 집에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남편이 출근하는 날, 여자는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추억교정소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번잡했다. 이사를 하는 건지 인부들이 가구를 옮기고 있고, 박 소장도 팔을 걷어붙이고 잡동사니를 정리 중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이사 가세요?”

“아! 안녕하세요? 오늘부로 폐업합니다. 추억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여자는 소장에게 다가가 작게 얘기한다. “어디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소장이 시계를 보더니, 대답한다. “잠깐은 괜찮습니다. 옥상으로 가실까요?”

옥상에서 여자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소장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긴 누구라도 놀랄 이야기다. 소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하나 얘기하지 않은 게 있다고.

“과거는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 경험과 다른 고객분들 얘기에 비추어 보면요. 모르던 걸 확인하거나 잘못 알던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건 가능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개입해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트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고객님의 어린 시절 친구분은 괴한과 상관없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도 다른 고객님들도 그런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어요.”

“그럼 어째서 추억교정이 가능하다고 한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그 부분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중요한 사건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 중요한 사건일수록 그래요. 그래서 많은 고객이 어떤 일을 확인하거나 바로잡으러 갔다가 새로운 사실을 깨닫곤 충격을 받으세요. 그러면서 이전 추억이 새로 교정되는 거죠. 그게 반드시 좋기만 한 건 아니지만, 진실은 원래 달콤한 게 아니잖습니까? 저도 그랬구요.”

“그 아이는 과거로 간 나 때문에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게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니까, 그냥 받아들이라고요?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요?”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건 제 탓이 아닙니다. 우산을 쓸지 말지는 고객님이 선택한 거예요. 저는 우산을 원하는 당신한테 우산을 판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산에 번개가 내리쳤다고 해서 그것까지 책임져야 하나요? 자신의 고통은 자기 몫입니다. 그게 어디서 온 것이든 남 탓을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요.”

여자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런 여자의 표정이 읽었는지 소장이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을 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모두 간절히 과거로 가고 싶어 했죠. 하지만 다녀와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지금을 살아가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죠. 그렇다면 현재에 충실한 게 최선 아닐까요? 저는 오히려 과거를 다른 관점에서 겪어본 그 경험이야말로 진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여자는 소장의 말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감정은 차분해졌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 과거가 수시로 바뀌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현재를 살고 미래를 꿈꾸겠는가? 나는 과거를 통해 만들어진 존재인데…….

“사무실은 왜 닫으시는 거예요?”

“약이 떨어졌습니다. 다시 만들 수 없거든요.”

“그랬군요.”

 

여자는 밀려있던 일들을 처리했다. 대본을 수정하고, 주연배우 오디션도 봤다. 아들을 돌보고 남편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여자의 노력 덕분에 남편은 많이 안정된 눈치다.

여자는 부러 평일에 시간을 내어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 그녀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지만 지금은 연고가 없다. 친정은 벌써 이십 년도 전에 이사했고, 살던 동네는 그 주변까지 몽땅 신도시 아파트촌이 되어버렸다. 여자는 스마트폰 지도앱과 동네 노인들의 도움을 받아 꼬맹이의 집이었던 곳을 찾아냈다. 그곳은 아파트단지 사이의 작은 어린이공원이 되어있었다.

여자는 혹시나 해서 공원 내 화단을 살펴보지만, 클로버꽃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게 있을 계절이 아니다. 마침 근처 상가에 꽃집이 있다. 그곳에서 제일 작고 연한 국화를 한 다발 사 온다. 아들은 영 재미가 없는 눈치다. 하긴 지금 사는 곳과 다를 바 없는 아파트촌이 아이에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래도 여자는 아들을 살살 달래 국화로 목걸이며 화관, 반지를 만든다. 처음엔 아들도 흥미를 느끼는 듯했지만, 금세 시들해져서는 그네를 타고 싶다고 한다. 여자는 그러라고 한다. 아들은 혼자서 열심히 그네를 탄다. 서서 타는 걸 줄기차게 연습한다. 위태로워 보이지만 말리진 않는다. 아들은 남편을 닮아 선을 잘 지킨다. 무모한 짓을 하진 않을 거다.

여자는 국화 화관을 화단 깊숙한 데 있는 토끼풀밭 위에 올려둔다. 그곳이 꼬맹이의 방이었길, 혹은 꼬맹이 엄마의 방이었길 바라면서. 문득 뒤통수에서 간지럼을 느낀다. 저수지에 갔을 때 괴한에게 맞아서 생긴 흉터가 간지러운 거다. 과거는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상처는 뒤통수의 흉터로 바뀌었다. 그 변화의 의미를 지금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지도 모른다. 여자는 무력감과 권능감을 동시에 느낀다. 꼬맹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지금 그네를 타고 있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 아이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지금 지킬 수 있는 것을 지킬 것이다.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그렇게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가 떠난 자리에 남은 국화 화관이 토끼풀과 그럴듯하게 어울린다.

 

2

나는 아버지와 스무 살 때 헤어졌다. 아직도 마지막 날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대화 비슷한 것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외조부모가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돌아가셨다.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을 피하려다 교각 아래로 추락했다. 열 살이던 나는 졸지에 혼자가 됐다. 안타깝게도 고아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쓰러져가는 농가에 딸린 별채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읍내에서 전파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생판 남이나 다름없던 아버지를 만나 같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오고 얼마 후, 내가 전학 가게 될 초등학교 근처에 커다란 아파트를 얻고, 청소하고 밥하는 아줌마를 구했다. 나는 거기서 혼자 살았다.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은 식탁 위에 올려놓고 간 만 원짜리 몇 장을 발견할 때였다. 그 외에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그는 엄마 잃은 어린아이에게 돈과 먹을 것, 잘 곳은 제공했지만 정작 필요한 다른 것은 주지 않았다.

 

우리가 헤어진 날 나는 술을 마셨다. 스무 살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생이 재미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사랑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없었고, 지독하게 외로웠다. 재수 끝에 지방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는데 다닐지 말지 결정 못 한 상태였다.

나는 거실에서 소주를 마시며 멍하게 앉아있었다. 늦은 밤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주로 빌어먹을 농가에서 지냈는데 옷을 갈아입을 때 잠시 들렀다. 쥐새끼처럼.

“왜 날 낳아서 불행하게 해요?”

“... 술 마셨니?”

“내가 없으면 좋겠죠? 말만 해요. 그냥 꺼져줄 테니까.”

“준일아, 술 깨고 내일 얘기하자.”

퍽- 거실 벽에 부딪힌 소주병이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집어던진 것이다.

“무슨 얘기? 당신이 나랑 얘기한 적 있어? 식탁에 만 원짜리 몇 개 던져놓은 거 말고, 나한테 해준 게 있냐고. 내가 얼마나 엿같이 살았는지,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러운지 당신이 아냐고. 차리라 보육원에 보내지 그랬어! 이럴 거면 왜 날 데려왔냐고!?”

“나는……. 난 최선을 다했어. 널 편하게 해주려고.”

아버지의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이성을 잃었다. 손에 잡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고 때려 부쉈다. 아버지는 나의 행패를 끝까지 보고 있었다. 마치 견뎌내야 하는 시련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출동했다. 이웃이 신고한 모양이었다. 나는 거실 바닥에 거하게 토악질을 해버렸다. 그 바람에 경찰은 코를 틀어쥐고선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경찰과 구경 온 이웃 주민들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그게 내가 거실 바닥에 엎어져 본 마지막 광경이다.

다음 날, 나는 옷가지만 챙겨 집을 나왔다. 합격한 지방대학이 있는 곳으로 갔으나 학교에 다니진 않았다. 대신 사무처에 가서 등록금을 환불받았다. 그 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버지와는 연락을 끊었다. 그 역시 나를 찾으려고 노력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그렇게 남이 된 채로 십 년을 살았다.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하다 매니저가 되었다. 매일같이 고기를 굽고, 숯을 피우고, 술을 팔고, 가게를 청소했다. 쉴 때는 닥치는 대로 소설을 읽었다. 바쁜 일상 때문에 몸은 늘 피곤했지만 내면은 평화로웠다. 소설의 세계에선 나의 불행은 시련 축에도 들지 못했다. 이젠 과거에서 벗어났다고 스스로 믿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서른 살이 되던 해 여름이다. 녹음이 절정으로 치닫고, 매미가 시끄럽게 울기 시작할 때였다. 날 좋게 본 고깃집 사장은 ‘임마, 너도 이제 진지하게 미래를 그려봐’라고 했다. 그 말이 계기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일과 독서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 말을 듣고는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일상에 틈이 생긴 것이다. 마치 그 틈을 파고들 듯, 정오에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것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전화한 적이 없는데, 그날은 그런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맞았다.

우리는 헤어졌던 장소에서 다시 만났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내가 떠난 직후 재개발이 되어 나홀로 아파트였던 그곳은 대단지 고층 아파트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이 새것이었다. 아버지만 빼고.

“신발 신고 들어오렴.”

십 년 만의 재회에서 처음 건넨 말치고는 좀 이상했지만, 시키는 대로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나 했는데 아버지는 맨발이었다.

거실에 마주 보고 앉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통화로 췌장암이라고, 몇 개월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있자니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준일아,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

“뭔데요?”

“내 모든 것.”

아버지가 테이블에 반지 상자처럼 생긴 작은 나무곽을 놨다. 열어보니 지름 2cm 정도의 빨간색 실리콘 공이 있었다.

“이게 뭔데요?”

“혹시 네가 옛날 아빠 집, 그 시골집 별채에 온 날 기억하니? 비가 많이 왔었잖아. 천둥, 번개도 심했는데.”

“대충요. 별일…, 없었잖아요.”

“그때 네가 나한테 한 말 기억나?”

“무슨 말요?”

순간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다. 당황스러웠다. 천둥 번개가 치던 날 밤 아버지는 나를 작은 방에 팽개쳐놓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첫날부터 나를 방임했었다. 그런데 그걸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게 서운한 걸까? 저 사람이…?

아버지는 황급히 눈물을 닦더니 말을 이었다.

“그 약을 먹으면 그때로 갈 수 있어.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어.”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더위 핑계를 댈 순 없었다. 거실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으니까.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내 눈앞의 아버지라는 남자는 머잖아 죽는다. 그런 사람이 지금 나한테 고무공을 먹으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로 돌아간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 고무공이 자기 전부라면서.

“과거의 너랑 마주치면 안 돼. 그럼 곧바로 돌아오게 되니까.”

나는 고무공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저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 자기 자식을 방치하고, 자신도 방치하다가 죽을 때가 되니 헤어졌던 아들을 십 년 만에 불러 앉혀놓고 황당한 개소리를 지껄이는 저 인간은 대체…….

 

‘대체…….’에서 의식이 급격히 희미해진 다음, 나를 찾아온 첫 번째 감각은 차가운 물이었다. 얼굴에 닿던 한 방울, 두 방울의 물은 곧 세 방울 네 방울이 되더니 억수 같은 비로 변해 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힘껏 눈을 떴다. 어둠이었다. 눈을 못 뜬 건가? 라고 생각하는 찰나, 번쩍하며 주변이 잠깐 환해졌다. 밤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보였고, 빗방울이 안구를 직접 때리는 중이란 걸 깨달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우르르 쾅쾅!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이 울려 퍼졌다. 천둥이 모든 공간을 가득 채워서 피할 수 없었다. 좀 전까지 한낮의 쾌적한 아파트 거실에 있었는데, 갑자기 한밤중의 야외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꿈이라면 깰 것이고, 생시라면 굳은 몸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감각이 완전히 돌아왔고, 몸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을 살폈다. 파란 고추들이 보였다. 나는 고추밭 한가운데 누워 폭우를 맞고 있었던 거다. 감각이 살아나면서 추위가 느껴졌다. 살갗에 닿는 찬 공기가 여름이 아님을 확신시켜 주었다. 벌떡 일어섰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눈앞에 노란 불빛이 보였다. 번쩍! 섬광이 내리치며 집 전체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내가 본 것 때문에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집. 폐가가 된 농가와 낡은 별채. 귓가에 아버지가 한 말이 맴돈다.

‘... 옛날 아빠 집, 그 농가 별채에 온 날 기억하니?’

누군가 농가에서 나온다. 젊은 아버지다. 처음 만난 날 입었던 낡은 갈색 코듀로이 바지에 카라가 넓은 흰색셔츠 차림이다. 그는 아무도 관심 없을 흉가에 꼼꼼하게 자물쇠를 채우더니 종종걸음으로 별채로 향한다. 그가 별채로 들어간 후 나도 그쪽으로 달려간다. 내 기억대로면 노란 창문이 어린 내가 있는 방이다. 창문 아래 쭈그리고 앉으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겪어본 적 있는 공포감이 밀려온다. 기묘한 익숙함을 떨치려 애쓰면서 벽에 귀를 댄다. 하지만 방 안의 소리가 들리진 않는다. 벽이 그 정도로 얇지도 않고, 빗소리도 시끄럽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바로 옆의 창이 눈에 들어온다. 안을 들여다보니 온갖 세간으로 빽빽한 안방이다. 창문을 밀자 조용히 열린다. 나는 천둥소리에 맞춰 창을 통해 방으로 들어간다. 창문 아래 이불이 쌓여있어 조용히 안방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신발에 묻은 진흙 때문에 이불과 바닥이 더럽혀진다. 문득 아버지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들어오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증거가 더 필요하다.

나는 안방 문을 살짝 연다. 젊은 아버지가 옆방 문 앞에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간다. ‘과거의 너랑 마주치면 안 돼.’ 조금 전 아파트 거실에서 들었던 말이 귀에서 재생된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 해서 아버지가 들어간, 어린 내가 있는 방문 옆으로 간다. 드디어 안에서 하는 얘기가 들린다.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내 목소리인지 확신할 수 없다. 변성기 전이기도 하고, 당시의 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다. 어쨌든 나는 대화의 내용에 집중한다. 당최 기억이 없다. 내가 여기 온 첫날, 아버지와 이야길 나눴었다니….

“뭐가 그렇게 무서워? 천둥? 번개?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흑흑. 아니요. 아닌데요.”

“그럼 뭔데? .... 엄마, 보고 싶어서 그래? 아빠가 옆에 있어 줄까?”

아버지의 다정한 말투가 낯설어서 당황스럽다. 하지만 이어지는 어린 나의 대답은 날 더 당황하게 한다.

“아저씨요. 아저씨가 너무, 너무! 무서워요! 엉엉.”

“아빠가…. 무섭다고?”

“나 다 알아요. 할머니가 말해줬어요. 아빠는 살인자고 미친 사람이라고요. 어린애를 죽였잖아요. 귀신 나오는 집에 혼자 살고. 다 알아요! 나 여기 데려온 것도 죽이려고 그런 거잖아요. 내가 이제 고아니까 마음대로 죽여도 아무도 모르니까. 엉엉.”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가까이 오지마요! 오지 말라고요!! 엉엉. 제발 살려주세요. 난 살고 싶어요. 학교도 다니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모른 척해주면 안 돼요? 그냥 고아로 살게 해줘요.”

어린 나는 목놓아서 운다. 공포에 질려 싹싹 비는 게 목소리에서 느껴진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저런 일이 있었다고?

“아빠가 널 모른 척하면, 고아처럼 살게 해주면 날 용서해줄래?”

“네! 꼭이요. 약속해요.”

갑자기 성인 남자의 흐느낌이 터져 나온다. 아버지다. 그는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흐느끼다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잇는다.

“준일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데요?”

“방금 네가 했던 얘기……. 잊어줄래? 내가 누구를 죽였다는……. 그 말, 귀신이랑 여기 산다는 거, 까맣게 잊는 거야. 그것만 약속하면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다 까먹으라고요? 그럼 나 안 죽여요? 내 옆에 안 올 거예요?”

“그래, 아빠가 약속할게. 네 옆에 다시는 안 갈게.”

“네, 그럴게요. 다 잊어버릴게요. 그니까 나한테 오지 마세요.”

아이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그 단호한 느낌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제기랄…. 이게 뭔가? 내 기억과 완전히 다르다. ‘천둥 번개가 치던 날 밤 아버지는 나를 작은 방에 팽개쳐놓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가 내 어렴풋한 기억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를 아저씨라 부르면서 무서워했고, 곁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과정을 다시 지켜본 내가 섬뜩한 건 아버지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어째서 어린아이의 말이 저토록 두려운 거지?

나는 답을 안다. 인간에게 진실보다 두려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리고 뭔가가 더 있다. 그 뭔가가 나를 끔찍하게 만들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 이후에 벌어질 일…. 아까 창문 아래서 느꼈던 익숙한 섬뜩함이 다시 한번 온몸을 휘감는다. 나는 여기서 무엇인가를 봤고…. 필사적으로 이 모든 것을 잊어왔다. 그리고 거의 성공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생각에 빠졌다가 퍼뜩 정신이 든다. 내 앞에 누가 서 있다. 아버지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하다. 순간 나는 패닉에 빠져 현관문으로 돌진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내리치자 정신이 든다. 아드레날린이 가라앉으며 왼쪽 팔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피부가 길게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빌어먹을! 급하게 문을 열다 베인 모양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버지와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마당 끄트머리에서 몸을 돌려 별채를 본다. 아버지가 별채 문 앞에 서 있다. 그는 그곳에서 나를 보고 있다. 아마도 내가 누군지 짐작하고 있으리라. 내가 그를 향해 다가가다 흠칫- 한다. 흉흉한 농가 유리창 너머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는 뭔가가 있다. 검은빛이 나는 조명도 있나? 있다 해도 저 폐가 안에 그런 게 있다는 건 부자연스럽다. 젊은 아버지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검은빛을 본다. 그리곤 다시 날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의미지?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피어난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과 저 빛이 관계가 있단 뜻인가? 그 때 갑자기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한다. 놀라서 내려다보니 몸 전체가 투명해지고 있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 옆에 자그만 실루엣이 있다. 어린 나다. 어린 나는 공포에 질려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댄다. 하지만 그 비명이 채 전달되기 전, 나는 서서히 의식을 잃는다. ‘맞아, 저 때 난 귀신을 봤었어….’ 라며….

 

마치 낮잠이라도 잔 것처럼 나는 거실 소파 위에서 깨어났다. 아버지는 내 왼팔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울고 있다. 그의 눈물이 마치 방금 본 젊은 아버지의 후일담처럼 느껴진다. 기묘하다. 나는 흠뻑 젖은 채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본다. 좀 전 과거에서 의식을 잃었던 그 감각이 죽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괜찮니? 과거의 자기랑 마주치면 힘들게 돌아와.”

아버지가 달래듯 말한다. 문득 그의 존재가 멀게 느껴진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그냥 늙고 병든 남자. 평생 죄의 무게에 짓눌려 산 비겁하고 불쌍한 인간. 동정과 경멸이 동시에 찾아온다. 이해할 순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 동시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아버지는 삼 개월 후 돌아가셨다. 그 석 달 동안 나는 아버지가 해온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농가에서 자연 발생하는 작은 웜홀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농가에 집착했던 거다. 귀신 소문도 사람들이 근처에 오는 걸 막으려고 직접 지어낸 것이었다.

그는 웜홀을 손톱만 한 실리콘 공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고, 그 공을 사람이 삼키면 과거로 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는 그걸로 비밀리에 사업을 했다. 시간여행을 원하는 부자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실리콘 공을 판매해온 것이다. 그래서 상당한 재산도 모았다. 하지만 사업은 뜻밖의 위기에 봉착했다. 재개발. 어이없지만 부동산 불로소득의 욕망 앞에서 웜홀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재개발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농가는 깨끗이 철거됐고, 이제 웜홀을 담은 실리콘 공은 만들 수 없다. 이전에 만들어둔 이백여 개가 남아있을 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는 살인에 관해 함구했다. 내가 계속 추궁하자 그 이야길 엄마한테 하는 바람에 엄마가 갓난쟁이였던 날 데리고 떠났다고 했다. 죄는 나누는 게 아니라고, 나눈다고 해서 절대 가벼워지지 않는다고. 그러니 자신이 모두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다. 그의 말에서 나는 깨달았다. 과거로 갈 순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게 가능했다면 아버지는 진작에 과거로 가서 그 일을 막았을 테니 말이다. 나의 추론을 말하자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준일이 넌 참 똑똑하구나. 날 닮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남은 실리콘 공으로 아버지와 완전히 반대 방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 그것이 아버지가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이자 시간여행의 올바른 활용법이라고 여겨서다.

나는 도시 한복판의 상가에다 가게를 냈다. 상호는 ‘추억교정소’로 정했다. 내 추억이 교정되었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방문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그가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시간여행을 제안한다. 돈을 벌 생각은 없지만, 구매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눈치껏 고객이 감당할만한 금액을 요구한다.

실리콘 웜홀을 다 소진할 때까지만 가게를 유지할 생각이다. 아버지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그의 전파사 전화번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전화번호만이 그의 유일한 흔적이자 유지(遺志)다.

누구든 찾아오시라. 추억을 교정하고 싶은 사람은 대환영이다.

추억교정소 T. 6335-1209

 

3

한밤중, 박창용씨가 벌떡 일어난다. 옆에 누운 아내의 표정이 안 좋다. 아내는 만삭이다. 산달이 코앞인데, 남편이 자꾸 이러니 짜증이 나는 것이다. 다행히 며칠 후면 아내는 친정으로 떠난다. 거기서 해산하고 몸까지 풀고 올 계획이다.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지금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건 주인집에서 본 웜홀이다.

“이게 뭔지 알겠어?” 집주인 아저씨가 창용씨 앞에서 그것을 가리키며 묻는다. 창용 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허공에 떠 있는 검은 색의 공이다. 공 자체는 시커먼데 테두리에서 은은하게 빛이 난다. “요게 진짜 희한한 게, 봐봐.” 아저씨는 창용씨 앞에서 공을 손으로 밀어보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지탱하는 것 없이 허공에 떠 있는 물체가 힘을 줘도 움직이지 않는다니!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아저씨는 구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이럴 수가! 아저씨 손이 공을 관통했는데 공 뒤편으론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저씨 손 괜찮아요?” 놀란 창용씨가 묻자 아저씨가 자네도 넣어보라고 한다. 창용씨가 주저하자, “내가 여러 번 해봤는데 별일 없어.”라면서 재촉한다. 경험한 사람이 괜찮다니까…. 창용씨가 조심스레 손을 넣는다. 오호라! 집어넣은 손은 마치 벽장에 들어간 것처럼 서늘하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질감이 다르다. “신기하지?” 아저씨가 씩 웃으며 말한다. 밭일로 검게 탄 얼굴 덕에 이가 더 하얗게 보인다.

주인아저씨의 얘기론 며칠 전부터 집안 구석, 창고방 가는 길목에 이것이 생겼다, 없어졌다 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무서워서 근처에도 못 갔는데 며칠 보니 익숙해졌다고 했다. 도리어 빛이 은은하게 나서 창고방 오가기는 편하단다. 주인아저씨는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나온 창용씨면 뭔가 알까 싶어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창용씨는 광구(光球)를 마음껏 살펴보기 전에 주인집을 나와야 했다. 주인아저씨 부인, 주인아줌마가 가족 외의 사람, 특히 남자가 집에 있는 걸 굉장히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창용씨는 그 광구가 웜홀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차원, 다른 시간대, 혹은 다른 공간으로 가는 문인 것이다. 아니, 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아서 구멍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조금만 더 컸다면 머리를 집어 넣어봤을 텐데…. 아쉽다. 그가 웜홀을 확신한 건 늘 이런 것들에 관해 읽고 보고 상상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창용씨는 어릴 적부터 공상과학 소설에 푹 빠져 살았다. 창용씨를 둘러싼 비루한 현실을 잊게 해주고, 좀 더 심오한 문제를 고민하게 해주었다. 재미없는 촌동네, 지독한 가난과 가망 없는 학업, 무심한 부모와 무자비한 형제들보다 인간의 존재의의, 외계인 침공에 대한 대비, 타임패러독스에 대처하는 자세 따위가 훨씬 가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창용씨는 실업계 고교로 진학해 전자 계통을 전공했다.

창용씨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났다. 시골이 지긋지긋해 대도시 한복판에 살고 싶었다. 허나 보잘것없는 학력에 무일푼인 창용씨가 뿌리내릴 터는 없었다. 그래서 도시를 살짝 벗어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운이 좋아 읍내 전파사 할아버지 밑으로 들어갔고 지금의 아내도 조수시절에 만났다. 몇 년 후 사장 할아버지가 은퇴하며 전파사를 물려받았다. 아직도 가게인수대금을 보내고 있지만, 어쨌거나 나이 서른에 번듯한 사장님이 되었다.

아내가 임신한 후 지금 집주인 아저씨의 별채로 이사했다. 본채보다 좋은 별채다. 큼직한 방 두 개에 주방에도 장판도 깔린 신식이다. 아내는 너무 좋아했다. 당연하다. 가게에 딸린 골방서 살았으니 어딘들 낫지 않을까? 가게도 가까워 오토바이로 2분이면 출퇴근할 수 있다. 창용씨는 여기까지의 인생에 큰 불만이 없었다. 고향을 탈출해 비록 도시 외곽이지만 자기 힘으로 가게도 얻었고, 결혼도 했고, 곧 아이도 생긴다. 가게 쉴 때 홀로 저수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워놓고 인류에 대한 고민, 기술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해 공상하는 삶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주인아저씨가 창고방 앞에서 자연 발생하는 웜홀을 보여준 이후 매일, 매 순간 그 생각뿐이다. 그것을 연구하고 싶다. 갖고 싶다. 온전히 내 것으로, 나의 업적으로 만들고 싶다.

보통 상상 속 미래에서 창용씨는 엑스트라였다. 뭔가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사람을 먼발치에서 보며 응원하고 기뻐하며, 그 기술을 기꺼이 이용하는 사람. 하지만 이 웜홀을 차지하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농사밖에 모르는 주인아저씨가 소유하기엔 너무 아깝다!

주인아저씨는 처가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얘길 종종 했었다. 아내 때문이다. 주인아줌마는 창용씨와 비슷한 연배로 지능이 좀 떨어지고 약간 자폐끼가 있다. 몇 번 부대껴보면 어리숙하고 겁이 많은 게 보인다. 행동도 굼떠서 농사일을 돕긴커녕 살림도 전전긍긍이다. 지금은 아들 낳고 습관이 들어 겨우 해내는 거라고 들었다. 그래서 주인아저씨는 처가에서 아내를 봐주고 살림도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일 년 내내 된장찌개와 김치로만 밥상을 차리는 아내와 사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처가로 못 가는 건 외동아들 때문이다. 곧 국민학교에 들어가는 주인집 아들은 또래보다 덩치는 작지만 활달하고 수다스러운 녀석이다. 제 부모와 달리 눈치가 빠르고 영특해서 말귀도 잘 알아듣는다. 학교에 들어가면 공부를 곧잘 할 것 같다. 그래서 주인 내외도 도시와 가까운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들의 교육 때문에.

창용씨가 혹시나 해서 주인아저씨를 슬쩍 떠봤는데 어림없었다. 아들이 대학 갈 때까지는 죽으나 사나 여기 붙어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별채를 수리해 세놓은 거란다. 아들 학비 벌려고.

 

창용씨는 아내를 버스터미널까지 바래다주었다. 헤어지면서 두어 달, 어쩌면 석 달 후에 데리러 가기로 했다. 아내는 속 편하게 백일까지 치르고 왔으면 하는 눈치다. 상관없다. 버스로 두 시간 거리니, 주말이나 일 있을 때마다 창용씨가 오가면 될 일이다.

가게로 돌아와 라디오 하나랑 전화기를 고치고 나니 할 일이 없다. 선풍기에 의지해 손님을 기다리는데 날이 너무 덥다.

‘낚시나 가야겠다!’

가게를 닫고 일어선다. 아내 눈치를 안 봐도 되니 홀가분하다.

저수지는 외딴곳에 있고 잡목과 풀이 우거져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 창용씨가 높이 자란 갈대를 꺾어 앉을 자리를 만드는데 커다란 비단잉어들이 다가온다. 누가 버리고 간 모양이다. 잡아볼까 하다 그만둔다. 여기 온 목적은 낚시가 아니다. 웜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싶어서다. 강제로 훔치거나 뺏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웃돈을 주고 주인집을 통째로 사버릴 형편도 안된다. 안기부에다 신고해볼까 했지만, 정부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일대를 봉쇄라도 하면 지금처럼 한 번씩 볼 기회마저 뺏길 것이다. SF에 정통한 창용씨는 책이나 영화에서 이런 광경을 많이 봐서 잘 안다.

‘도저히 방법이 없나? 이렇게 포기하는 게 맞을까?’ 왠지 억울하다. 근사한 일을 할 기회가 코앞에 나타났는데 말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내려놓긴커녕 아쉬움을 넘어 억울한 생각까지 든다.

창용씨는 낚싯대를 뻗쳐놓고 상상에 빠진다. 특수장비로 웜홀을 잡아당겨서 크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창용씨는 두려움과 기대를 안고 웜홀로 걸어 들어간다. 웜홀을 건너간 최초의 인간이 된 것이다!

웜홀을 통과하는 동안 환한 빛이 눈을 찌른다. 몇 걸음 걷자 아늑한 곳에 도달한다. 들어본 적 없는 새소리와 맡아 본 적 없는 풀 내음이 가득하다. 빛 때문에 열렸던 동공이 닫히면서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런데 나무가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 나무가 아니라 거대한 고사리다. 아! 이번에 열린 웜홀 너머는 고대의 지구다. 산소가 풍부해서인지 호흡이 쉽다. 공기도 맑다. 거대한 잠자리가 윙-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날아가 깜짝 놀란다. 그때 집채만 한 육식공룡이 창용씨를 발견하곤 슬금슬금 다가온다. 놀란 창용씨가 웜홀로 도망치려는데 웜홀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창용씨가 온몸을 던져 간신히 웜홀을 통과한다. 휴~ 위험했다. 웜홀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있지도 않은 방법을 고민하는데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어린아이들이다. 여긴 애들이 놀기엔 위험한 곳이다. 갑자기 수심이 깊어져 사고도 종종 났었다. 이런 데서 얼쩡대지 말라고 한마디 할까 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주인집 아들이다. 의기양양하게 “어때? 내 말이 맞지?”라며 뻐겨댄다. 창용씨는 얼음땡 놀이를 할 때처럼 동작을 멈추곤, 자기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킨다. 구레나룻서 흐르는 땀이 거슬린다. 여자아이 목소리도 들린다. 소리가 작아 뭐라고 하는진 모르겠다.

창용씨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폭발하듯 수많은 목소리가 쏟아져나온다. 혼란스럽다. 아내의 염려스러운 말투, 주인아저씨의 너털웃음과 주인아줌마의 겁내는 비명,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비집고 가슴 한가운데 꽂히는 자신의 목소리, 자기 목소리건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건조한 톤이다.

‘저 꼬맹이만 없으면 웜홀은 네 거야.’

창용씨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무서운 이야기다. 하지만 몰랐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아이만 없다면, 꼬맹이만 없으면!’이라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간절히 기원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 염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창용씨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가능성이 커지리라.

그런데 그때, 왼쪽 앞의 갈대가 사르르 갈라진다. 창용씨 자리와 단차가 있어 벌어지는 모양을 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다. 뭐지? 라고 생각하는 찰나, 검은 그림자가 스르륵 나타나더니 서서히 또렷해지며 사람이 된다. 여자다.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는데 계절에 맞지 않게 길고 도톰하며 모양도 좀 이상하다. 요즘 사람들은 입지 않는 그런 디자인이다. 그렇게 귀신처럼 나타난 여자는 한동안 가만히 누워있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창용씨는 큰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사람이 갈대밭 한가운데서 스윽- 나타날 수 있지? 정상이 아니다. 저 현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문득 웜홀과 상관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여자에게 말을 걸어볼까? 하지만 여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위험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어어어! 꼬맹이 목소리가 들리더니 풍덩- 한다. 물에 빠진 모양이다. 창용씨가 고개를 돌려보지만 높이 자란 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여자를 본다. 여자는 아직도 제자리에서 꼼지락대고 있다.

 

“난 갈 테니까 따라오지 말고. 꼴 보기 싫으니까.”

“꽃목걸이 내일까지 만들어놔. 받으러 간다.”

 

날카롭게 외치는 여자애와 꼬맹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툰 모양이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조금씩 움직이던 여자가 아이들의 인기척에 그대로 멈춘다. 의식적인 행동이다. 창용씨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 여자 정체는 뭔가? 꼬맹이는 혼자 저수지에 남은 건가? 복잡한 생각과 호기심, 욕망이 뒤섞인다. 동시에 마음속 목소리가 다시 외쳐댄다. 마치 주술을 걸듯 끊임없이 다채롭게.

‘저 아이만 없으면, 저 꼬맹이만 없으면 웜홀은 네 것이야!’

행동해야 한다. 답이 무엇이든, 창용씨가 결정할 순간이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신경 쓰여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짜증 나는 계집애!”

꼬맹이가 십여 미터 앞 저수지 가운데서 배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창용씨도 꼬맹이를 봤고, 여자도 꼬맹이를 봤다. 여자가 갑자기 소리친다.

“꼬맹아! 아줌마랑 얘기 좀 하자. 이리 나와봐.”

제기랄, 말투로 봐서 여자는 주인집 아들을 물에서 끄집어낼 생각이다. 그래서 안 된다. 못하게 해야 한다. 저 여자가 이대로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리게 놔둘 순 없다. 여자가 더듬더듬 일어서 물가로 간다. 창용씨는 옆에 있던 돌을 주워 급히 여자한테 간다. 여자의 목소리에 꼬맹이가 이쪽을 보며 말한다.

“아줌마, 뒤에... 아저씨!?”

창용씨가 여자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갈긴다. 퍽- 소리가 나며 여자가 앞으로 꼬꾸라져 물에 빠진다. 헉헉- 창용씨가 거친 숨을 내쉰다. 꼬맹이는 그런 창용씨를 보고 놀라서 그대로 굳었다. 물에 빠진 여자가 허우적거리다 갑자기 소리친다. “도망쳐!” 그 소리에 꼬맹이가 퍼뜩 정신을 차려 저수지 한 가운데로 헤엄친다. 도망치는 것이다. 창용씨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빌어먹을! 도깨비처럼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모든 걸 망치고 있다. 창용씨가 첨벙첨벙 저수지로 들어가 여자의 멱살을 잡으려고 한다. 따져 묻고 싶다. 넌 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이 사달이야!? 라고. 창용씨가 첨벙첨벙 물로 걸어 들어가는데 허우적대던 여자의 실루엣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얼른 손을 물에 담궈 여자를 붙드는 순간, 여자는 완전히 사라진다. 수면 아래 여자의 피가 몽실몽실 옅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창용씨의 꽉 쥔 주먹만 남는다. 창용씨가 손을 꺼내 펴본다. 손바닥에 노란색 팔찌가 있다. 여자가 팔에 끼고 있던 것이다. 팔찌는 말랑말랑한 고무로 된 것인데 글자가 있다. 내용을 읽던 창용씨는 머리털이 곤두선다. ‘추억교정소’에 이어 음각된 전화번호는 창용씨네 전파사 전화번호다.

창용씨는 저수지를 세 바퀴 돌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꼬맹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인기척도 없었고,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창용씨가 기억하는 주인집 아들의 마지막 모습은 저수지 가운데로 전력을 다해 헤엄치는 것이었다. 창용씨로부터 도망치려고….

사람들은 사람이 물에 빠지면 살려달라고 소리치면서 첨벙대는 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얼굴을 수면 밖으로 꺼내지 못해 허우적대다가 힘이 빠져 조용히 가라앉는다. 이 저수지는 여섯 살짜리가 수월히 가로지를만한 크기가 아니다. 꼬맹이는 바닥에 있는 걸까? 아닐 수도 있다. 벌써 집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별일 없을 것이다. 여자는 사라졌으니, 꼬맹이가 뭐라고 하면 더위 먹고 헛것을 본 거라고 하면 된다.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손에 남은 노란 팔찌만 잘 숨기면….

창용씨는 가게에 낚시 짐을 놓고 대중탕에 가서 오랫동안 목욕을 한다. 해가 길어 목욕 마치고 나왔는데도 주변이 환하다. 근처 국밥집에서 늦은 저녁을 때운다. 국밥집 주인이 탁주를 권하지만 거절한다. 맨정신으로 있어야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갔는데 주인집에 사람이 없다. 드문 일이다. 방에 앉아 소설책을 읽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바깥이 부산스럽더니 주인아저씨가 창용씨네 문을 두드리며 묻는다. “우리 아들 봤어?” 창용씨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한다.

“못 봤어요.”

아저씨는 아들이 돌아오면 꼭 좀 붙들어 놓으라며 손전등을 챙겨 집을 나선다. 주인아줌마도 불안한 얼굴로 아저씨 곁에 딱 붙어 따라 나간다. 아줌마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같이 다니는 모양이다. 창용씨는 부탁받은 대로 주인집 마루에 앉아 꼬맹이를 기다린다. 속으로 ‘오지 않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어쩐지 남이 그 생각을 대신해주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자신은 여기 있는데, 또 다른 창용씨가 꼬맹이는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고, 그걸 자신이 읽어내는 것이다.

‘꼬맹이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주인아저씨가 불길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는지 모든 방의 불을 켜놨다. 멀리서 봐도 집이 환해 보일 거다. 창용씨는 팔찌를 꺼내 또 살펴본다. 어째서 전파사 전화번호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그 여자는 본 적이 없는데…….

문득 창고방 앞에 웜홀이 생겼는지 궁금하다. 일어서 창고방 앞으로 간다. 꼬맹이는 오지 않을 테니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요염한 빛을 뿜어내며 창고방 앞에 떠 있다. 창용씨가 가만히 웜홀을 본다. 불편해하는 주인아줌마도 없고, 자길 찾는 만삭의 아내도 없다. 이것만 보고, 이것만 연구하고, 이것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웜홀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뜨거워진다. 노벨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꼬맹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창용씨의 심장이 요동친다. 빌어먹을!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그랬으면 주인집 아들은 자신을 못 봤을 것이다. 창용씨는 의식적으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이건 사고야, 그 여자가 나서는 바람에 생긴 우발적 사고! 화가 난, 아니 일부러 화를 낸 창용씨가 쥐고 있던 노란 팔찌를 힘껏 던진다. 팔찌가 웜홀에 맞는다. 그러자 놀랍게도 웜홀이 뒤로 쭈욱- 밀려난다. 창용씨가 깜짝 놀란다. 웜홀은 절대 움직여지지 않았다. 안에 손을 넣을 순 있었지만, 힘을 줘서 위치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고무 때문인가? 창용씨가 날아간 팔찌를 주워 그걸로 웜홀을 건드려본다. 어렵지 않게 움직인다. 이럴 수가! 창용씨는 웜홀을 움직이는 방법을 발견했다. 고무로 건드리면 된다. 그러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창용씨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드디어 인생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살아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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