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떠오르는 얼굴

김오롯

 

매대에 컵라면들을 채우며, 세영은 편의점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9시 30분. 퇴근까지 30분이 남았다. 세영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가 왔는지 확인했다. 세영의 메시지를 영석은 한 시간이 넘도록 읽지도 않았다. 세영은 영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열 번 정도 울리고 나서야 영석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야. 쏘오리.”

영석의 목소리는 노래방 음악에 섞여 울렸다.

“노래방이니?”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 와 보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콧소리를 내며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여자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자 영석이 휴대폰을 손으로 가렸는지 소리들은 웅웅거렸다.

“설마 여자도 불렀니?”

“아니, 남자들밖에 없어.”

영석이 옆방으로 이동했는지, 전보다 주변은 조용해졌다. 방전 전까지 술에 취해 혀가 꼬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영석은 차분하게 말했다. 세영은 그런 영석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정말 실망이야.”

“생사람 잡지 마. 거리두기가 완화돼서 모처럼 팀 전체가 노래방 온 거뿐이라고.”

세영은 의심을 지울 순 없었지만, 입씨름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됐어. 그래서 데리러 올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진짜 미안. 도저히 먼저 빠져나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야. 인사고과 기간이라 눈치 봐야하는 거 알잖아. 오늘은 택시 부르면 안 될까?”

“참 이기적이다. 그치?”

“이기적? 며칠째 데리러 갔었잖아. 그리고 누가 편의점에서 일하라고 그랬니? 돈 몇 푼이나 된다고.”

세영은 영석의 말에 화가 나 당장 집으로 오라고 이야기하려 했다. 그때 편의점 출입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됐어. 이따 집에서 이야기해.”

세영은 전화를 끊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검은색 점퍼를 입은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생활용품이 진열된 곳으로 향했다. 막 샤워를 하고 말리지 않은 채 나왔는지 머리칼이 축축하게 늘어져 있었다. 세영은 계산대에 서서 영석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언제부터 어긋난 것일까? 요즘 들어 영석과의 대화는 짜증으로 끝나곤 했다. 대화는 서로에 대한 교감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삼 년의 연애 동안 작은 싸움조차 없었다. 오래된 커플들이 흔히 겪는다는 권태기도 세영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세영은 개학을 앞두고 밀린 방학숙제를 몰아서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다급하게 해내는 숙제들은 잘 될 일이 없다. 치이다 보면 결국 지쳐서 숙제들을 내팽개치기 마련이다. 세영은 자신의 결혼생활도 그렇게 될 거 같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손님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양손에 물건을 집어 들고 세영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물건들을 계산대에 내려놨다. 콘돔 열 개. 세영은 깜짝 놀라서 여자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유난히도 작아서 마스크가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세영은 여자의 눈을 보고 싶어 고개를 비스듬히 젖혔다. 물에 젖은 앞머리가 눈을 가리고 있었다.

“계산 좀 해주세요.”

여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목소리였다. 세영은 여자의 나이가 생각보다 젊어서 다시 놀랐다. 세영은 여자를 흘끗흘끗 쳐다보면서 바코드를 찍었다. 가려진 그녀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느껴지는 거 같았다.

“요즘 날씨가 많이 춥죠?”

세영은 이상한 낌새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했다. 여자는 미동도 없었다.

“사만오천 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여자는 대답 없이 단말기에 신용카드를 꽂고는 점퍼 양쪽 주머니에 콘돔을 넣었다.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소리가 들리자,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여자는 카드를 챙겨 빠르게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세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편의점 밖으로 나가 보았다. 거리는 유흥가 특유의 빨간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황량할 정도로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여자는 골목으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편의점 파라솔에서 갈색으로 염색한 남자가 담배를 끄고는 골목길 쪽으로 걸어갔다. 파라솔은 금연이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세영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뿜으며, 양손을 주머니에 꽂고 뛰고 있을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야간 파트타이머가 삼십 분 지각하는 바람에 세영은 평소보다 늦게 퇴근할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영석이 오지 못하는 날에 벌어지고야 말았다. 세영은 어플로 택시를 잡아보고자 했지만, 짧은 거리라 그런지 번번이 실패했다. 코로나로 야간에 운행하는 버스가 줄어든 탓에 마을버스는 이십 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세영은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걸어서 이십 분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무슨 일이 생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천변을 걸으며 차가운 겨울 공기를 마시고 싶기도 했다. 여덟 시간 동안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건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세영은 걸으며 남편과의 관계가 언제부터 틀어졌을까 생각했다. 지난봄 코로나로 경영이 악화된 회사는 세영에게 희망퇴직을 권했다. 퇴직금 조건이 나쁘지 않았기에 퇴직하기로 했다. 임신한 지 막 삼 개월이 지날 때라 잠깐 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세영은 지역 맘카페에 가입해, 어느 산후조리원이 좋은지, 어느 어린이집이 좋은지 정보를 공유하며 또래의 여성들과 소통하며 지냈었다. 유산 때문이었을까? 세영은 천변에 서서 우뚝 솟은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봤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 이사 한 아파트였다. 비록 전세지만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아파트에서 안전하게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이젠 필요 없지만. 세영은 마스크를 벗었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모처럼 맡는 겨울 냄새였다. 그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영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만이 천변을 밝히고 있었다. 천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 늦은 시간까지 산책하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세영은 왜 지금 이곳에 홀로 있는지 깨달았다. 며칠 전 천변 배수구에서 세 번째로 살해된 여성의 시신 일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잘린 채로 발견된 여자의 얼굴. 세영은 신중치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실 택시가 잡히길 기다릴 수도 있었다. 몇천 원 웃돈을 줬으면 금방 잡혔을 것이다. 세영은 돈이 아까웠다. 그런 마음이 들었던 자신을 떠올리자 세영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호흡은 거세지면서 가빠졌다. 다시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영은 그 소리가 아까 전보다 가까워졌다는 걸 직감했다. 뛰어야 했다. 누군지 모를 그 녀석이 찌를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신체를 절단하고 어딘가에 버릴 것이다. 세영은 떨어진 낙엽들을 밟으며 뛰었다. 낙엽 소리 때문에 더욱 세영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세영은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아파트가 어둠에 불빛을 수놓았다.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만 있다면, 술에 취해 돌아올 남편을 아무 말 없이 안아줄 것이다. 세영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파트 경비실에 도착할 때까지 세영은 쉬지 않고 달렸다.

 

*

“정말 이상해. 또 사러 왔어.”

“누가?”

“저번에 말한 젊은 여자 있잖아.”

“아, 콘돔 왕창 사가는 여자 말이야?”

세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차창 밖을 바라봤다. 여대생이라고 적힌 바람풍선이 뻘겋게 번쩍였다. 좌회전 신호로 바뀌자 차는 다시 움직였다. 세영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멀어져가는 유흥가의 불빛들을 봤다.

“뭐 이상할 게 있어? 업소에서 일하는 여자겠지.”

편의점이 유흥가 한복판에 있으니 영석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녀는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음에 걸리는 이물감은 무엇일까? 머리도 채 말리지도 않은 채, 지난 일주일 동안 삼십 개가 넘는 콘돔을 사고 사라져 버린 그녀의 뒷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하는 영석의 태도 때문일까? 목에 탁 걸린 듯한 이물질을 영석에게 쏟아내고 싶었다. 그러면 또 며칠간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지낼 것이다. 세영은 지난 노래방 사건을 떠올리며 참기로 결심했다. 세영은 팔로 턱을 괴고 말없이 차창을 바라봤다. 영석은 운전하며 그런 세영을 흘끗거렸다.

“또 내가 말실수했다는 표정인데?”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모가 아니야. 여하튼 너무 예민해.”

“예민?”

“지금 자기를 데리러 온 것도 그렇잖아. 모든 남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그런 태도 말이야.”

“데리러 오겠다는 건 당신이 먼저 말했어. 동네에서 계속 여자들이 살해되고 있는데 예민한 거니?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우리 구 인구가 사십만이 넘어. 그중에 여자가 반이라고 치면 이십만 명. 지난 육 개월 동안 살해된 여성 세 명. 예민을 넘어서 이건 피해망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안 그래?”

“차 세워.”

영석은 세영의 말을 무시한 채, 전방을 주시하며 자동차 속도를 높였다.

“차 세우라고.”

세영은 영석에게 소리를 질렀다. 영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로변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다신 데리러 오지 마.”

세영은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세게 닫았다. 차는 큰 배기음을 내며 세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세영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사라져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휴대폰을 꺼내 버스 도착 시간을 확인했다. 버스는 이십 분 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세영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

세영은 편의점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을 앞둔 식품들을 골라냈다. 열흘 전, 사장은 실수로 평소 발주량보다 갑절이 넘는 초코우유를 주문했다. 유통기한이 십 분도 채 남지 않은 초코우유가 한가득 트레이에 쌓여 있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편의점으로 가고 있다는 영석의 메시지가 왔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지난 열흘 동안 세영은 영석과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친 적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냉전기를 가져도 각방을 쓴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영석은 드레스룸으로 쓰는 작은방에서 잤다. 세영은 그런 영석의 행동이 오히려 편했다. 세영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이 출근한 낮에 옷장에서 옷가지를 꺼내 안방으로 옮겼다. 세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초코우유들을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여자를 그날 이후로 편의점에서 보지 못했다. 일하지 않던 시간에 온 것일까? 세영은 사무실로 가서 지난 일주일 치 입고 목록을 살펴봤다. 콘돔은 없었다. 세영은 문득 그녀에게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때 종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잠겼던 세영은 어서 오세요, 라고 외치며 사무실에서 나왔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젖은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여자가 생활용품 진열대로 걸어갔다. 계산대에 선 세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 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왜소한 그녀가 오늘따라 더욱 작아 보였다. 여자는 콘돔이 필요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다른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여자는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아 진열대 하단도 살펴봤다. 세영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물건 찾으세요?”

움츠린 여자는 말이 없었다.

“말씀해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

세영은 무릎을 굽히고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댔다. 젖은 머리칼에 얼굴이 가려있어 여자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몸에서 여자가 긴장하고 있단 걸 세영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영은 양손으로 어깨를 잡아 여자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뭐든 말해요. 도와드릴게요.”

여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자그만 목소리로 세영에게 말했다.

“임…임테기 팔아요?”

세영은 깜짝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세영은 문득 여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니, 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려온 여자의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미끌미끌하면서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손에서 느껴졌다. 여자의 왼쪽 관자놀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괜찮아요? 누가 때렸어요?”

그때 종소리가 들렸다.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젊은 남자가 여자 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괜찮아? 어쩌다 다쳤어?”

남자는 눈썹을 올리며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별거 아니야. 집에서 부딪혔나 봐.”

여자는 얼굴을 뒤로 빼며 고개를 숙였다. 내려온 앞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남자는 여자의 젖은 머리를 만지며 글썽거렸다.

“얼른 병원 가자.”

남자는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세영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여자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세영은 편의점 통유리로 다가가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여자는 가기 싫은 것처럼 몇 번이고 걸음을 멈췄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세게 자신 쪽으로 여자를 끌어당겼다. 남자의 손은 짐승의 목줄 같아 보였다. 그제야 세영은 남자가 낯이 익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자가 편의점에 들를 때마다 편의점 밖 파라솔에서 담배를 피웠던 갈색머리의 남자. 몇 번이고 세영이 주의를 주려다가 말았던 그 남자. 세영은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 가?”

영석이 차에서 나와 세영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세영은 다급한 표정으로 영석의 어깨를 밀치며 뛰었다. 세영은 저기요, 하고 크게 외쳤다. 여자는 세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큰 눈은 울먹이고 있었다. 영석은 세영을 쫓아와 세게 손목을 잡았다.

“뭐해?”

“여보. 저 남자 좀 잡아줘. 데이트 폭력 같아. 아니다. 경찰에 신고해야겠다.”

세영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세영은 벌벌 손을 떨면서 키패드를 눌렀다. 영석은 세영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뭐하는 짓이야. 여자가 피 흘리고 있었다고. 분명 저 남자가 때린 게 분명해.”

“때리는 거 봤어?”

“아니. 그래도 어디 부딪힌 상처는 아니었어. 내가 직접 만져봐서 알아.”

“제발. 그만 좀 해.”

영석은 세영의 양어깨를 잡으며 외쳤다. 영석의 몸에 가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세영은 몸을 좌우로 흔들며 여자를 보려 했다. 그럴 때마다 영석은 손에 힘을 세게 주며 세영에게 소리쳤다. 증거도 없이 신고했다가 오히려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둥, 왜 이리 오지랖이 넓냐는 둥, 연애 때는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변했냐는 둥. 영석이 쏟아내는 말은 아득하게 들렸다. 하지만 영석의 손가락 끝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온몸의 감각들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프니까 그만해, 하고 세영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제야 영석은 깜짝 놀라며 꽉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여자는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세영은 집에 혼자 가고 싶다고 영석에게 말했다.

퇴근한 세영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세영은 지쳐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차창에 머리를 대고 바깥을 바라봤다. 세영은 애써 잊으려 했지만, 끌려가던 여자의 얼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여자는 병원에 갔을까? 도대체 그 남자와 무슨 관계지? 임신테스트기는 왜 필요했을까? 콘돔 수십 개를 사는 그녀가 임신테스트기를 찾을 때,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일어나고 있단 걸 직감했다. 다음에 그녀를 만난다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물어볼 것이다. 그러고 어떤 일이든지 꼭 도와줄 것이다. 세영은 수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렇게 다짐했다.

 

사 년 전 봄, 회사 점심시간이었다. 세영은 여느 때처럼 회사 동료들과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뒤, 아이쇼핑을 하려 강남역 지하상가로 향했다. 강남역 10번 출구로 다가가자 소리 지르는 여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동료는 매일 같이 왜 저러냐면서 혀를 찼다. 세영도 지하철 타는 게 불편하다고 맞장구쳤다. 그 당시 세영은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절하게 싸울 일인가 싶기도 했다. 10번 출구에 도착했을 때, 에워싼 여자들 때문에 계단에 진입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녀들과 엉기고 또 엉겼다. 다른 출구로 갈 걸, 하는 후회를 하면서, 그녀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가까스로 세영의 무리는 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다. 그때 층계참에서 유인물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짧은 머리를 한 수진을 발견했다. 십여 년이 흘렀지만, 또렷한 눈매에, 입을 다물 때마다 호두껍데기처럼 올라오는 턱 주름에, 수진은 그대로였다. 세영은 순간 멈칫하고 자리에 섰다. 수진은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건넸다. 멍하니 서 있는 세영을 향해 세영씨 뭐해, 하고 동료가 외쳤다. 수진은 깜짝 놀라 행동을 멈추고 세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영은 그 눈길을 피하고는 도망치듯이 동료들 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날 세영은 지하철 대신에 버스로 퇴근했다. 다음날은 길 건너 다른 출구를 통해 출근하고 퇴근했다. 며칠 후, 세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0번 출구 쪽으로 가봤다. 여전히 층계참에서 수진은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건네고 있었다. 세영은 다른 출구로 도망쳤다. 이삼 주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들의 목소리가 희미해질 때 즈음에 세영은 영석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 주 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10번 출구로 세영은 무심코 걸어 올라갔다. 누군가 건네주는 유인물을 세영은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 읽었다.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세영은 깜짝 놀라 유인물을 건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진이 해사한 얼굴로 세영에게 눈인사를 했다.

 

천변으로 가는 이정표가 차창 밖에 보였다. 여기서 내려 천변을 가로질러 간다면 5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영은 벨을 누를까 망설였다. 이대로 지나친다면 버스는 여러 정거장을 돌고 돌아 집 앞으로 데려 줄 것이다. 세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들었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 정도였다. 영석의 말들이 떠올랐다. 별일도 아닌데 유난을 떠는 걸까? 예민하게 구는 걸까? 여자는 분명히 어딘 가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자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망상에 빠진 걸까? 세영은 벨을 눌렀다. 버스는 천변으로 들어가는 굴다리 앞에 섰다. 버스는 세영을 내려주고 떠났다. 세영은 멍하니 굴다리를 바라봤다. 바람이 세차게 세영의 마스크 속으로 파고들었다. 겨울 강바람은 매서웠다. 세영의 얼굴은 얼얼해졌다. 세영은 굴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천변에는 아무도 없을 거 같았다. 굴다리를 통과하면서 세영은 뒤돌아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돌아갈까 수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천변에서 몇몇은 조깅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있었다. 세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데크로 된 길을 걸었다. 세영의 아파트가 보였다. 남편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이사 온 바람에 한 달에 갚아야 할 돈이 백만 원 가까이 됐다. 가계에 도움이 되고자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영석의 말대로 오지랖이 넓어 보일지도 모른다고 세영은 생각했다. 그날 의류수거함에 가지 않았더라면 남편과의 관계는 괜찮았을까?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삼 주가 지났을 때, 두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 시신 일부가 검은 비닐에 담긴 채 의류수거함 속에서 발견되었다. 실종된 십 대 소녀의 팔과 다리였다. 맘카페는 분노에 찬 글들로 도배되었다. 일부는 의류수거함에 조화를 두고 오자고 주장했다. 강남역에서처럼. 임신 칠 개월이었던 세영은 수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열댓 명이 모여 꽃을 사고 포스트잇에 글을 썼다. 미안해, 라는 말밖에 세영은 할 말이 없었다. 하얀 국화를 손에 들고 의류수거함에 갔지만, 폴리스라인이 쳐져있어 의류수거함에 조화를 둘 수 없었다. 세영의 일행은 의류수거함 옆 다세대주택 담벼락 밑에 추모공간을 만들려 했지만, 동네 사람들과 경찰의 제지로 포기해야만 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세영은 주머니에 넣은 포스트잇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나흘 뒤에 세영은 유산했다. 세영은 태어나지 못한 아기를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걸음을 멈추고 아파트를 바라봤다. 산부인과 의사가 넌지시 세영 부부에게 여자 아기라고 암시를 줬을 때, 영석은 딸바보가 될 거라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영석이 핑크색 아기옷들을 사서 집으로 들어올 때, 우리 딸은 핑크색을 입히지 않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모든 게 행복했으니까. 그걸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행복은 산산조각이 되어 버렸다. 세영이 의류수거함에 갔다 온 걸 알자 영석은 세영을 비난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왜 하필 거길 갔냐고.

세영은 눈물을 닦으며 길 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하천 중간쯤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작은 축구공처럼 검고 하얀 것이. 세영은 난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 얼굴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 하얗게 질린 얼굴. 깜빡이지 않는 큰 눈. 편의점 그녀였다. 떠오른 얼굴은 몇 초 동안 세영을 응시하더니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세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서 산책하던 사람들은 세영 쪽으로 달려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세영은 공포에 질려 몸을 떨며 하천을 가리켰다.

“여자 얼굴이 물에서 떠올랐어요.”

 

경찰 수색대가 투입되어 하천을 샅샅이 뒤졌다. 세영은 추위도 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천에 떠오르는 얼굴은 여자의 얼굴이 아닌 추위에 지친 수색원들의 얼굴이었다. 여자의 얼굴은 발견되지 않았다.

 

*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영석은 부산사무소로 발령받아 떠났다.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영석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메시지였다. 영석 역시 자신처럼 마음을 정리하고 있다고 세영은 느꼈다. 계속 편의점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영은 구직사이트에서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여자의 시신 3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인근 야산에서 중학생이, 의류수거함에서 40대 가정주부가, 공원 화장실에서 50대 교사가. 사지가 절단된 상태였다. 범죄전문가들은 유기 방식 비슷해 동일범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리고 초기보다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이 매끄러워졌다고 했다. 연쇄살인범은 진화하고 있었다. 세영은 근무 시간대를 낮으로 바꾸고 싶다고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은 낮에 일하는 파트타이머에게 묻겠다고 했지만, 그녀 역시 밤에 일하는 게 두려워 그런지 거절했다. 세영은 맘카페에서 호신용 스프레이와 호루라기를 공동 구매했다. 주머니에 호신용품을 넣은 채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 퇴근했다. 절대로 밤에는 천변으로 가지 않았다.

세영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살인범을 맞닥뜨리면 어쩌지? 세영은 끔찍한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과연 호신용 스프레이로 건장한 남자를 제압할 수 있을까? 제압된 채 끌려가는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 뒤로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그날 분명히 그녀는 울먹이는 얼굴로 세영을 바라봤다. 구조 요청이었을까? 살인사건이 뉴스에 나올 때마다 유심히 기사를 읽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세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후회했다. 종소리가 울렸다. 빨간색 롱코트를 입고 진하게 눈화장을 한 여자가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키가 무척 컸는데 부츠까지 신어 모델처럼 보였다. 여자는 생활용품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콘돔 한 개를 집어 계산대 쪽으로 왔다. 아무 생각 없이 바코드를 찍으려는 찰나에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하고 말하며 출입구를 바라봤다. 갈색머리였다. 남자는 계산대 쪽으로 오더니, 여자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말보로 골드도 하나 주세요.”

세영은 담배 진열대 쪽으로 긴장한 채로 몸을 돌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여자는 왜 그토록 많은 콘돔이 필요했던 거지? 그날 여자는 임신한 상태였을지도 몰라. 여자를 어떻게 한 거지? 그녀에게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담배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보로 골드 모르세요? 저기 오른쪽 아래 있잖아요.”

세영은 남자가 지시한 쪽으로 움직였다.

“콘돔 안 끼고 하면 안 돼?”

남자는 여자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알았다고 말하며 콘돔을 집어 생활용품 쪽으로 걸어갔다. 세영도 말보로 골드를 집으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네?”

“신분증 보여 달라고요.”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단호한 말투에 세영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갈색머리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아이 씨. 갑갑하네. 아줌마는 내가 민짜로 보여요?”

“신분증 안 보여주시면 담배 못 드려요.”

“오, 민증 검사. 오빠 어려 보여서 좋겠다.”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 인상 쓰던 남자는 갑작스럽게 표정을 바꾸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건넸다. 박성진. 서울 ○○구 ○○번길 ○○. 짧은 수 초의 시간에 세영은 이름과 주소를 되뇌었다. 계산한 남자와 여자는 자기네끼리 속닥거리다가 편의점을 나갔다. 세영은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남자의 이름과 주소를 메모했다.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는 되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지난번 오인 신고로 경찰은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다음 파트타이머가 십 분 정도 늦는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세영은 파라솔로 가 담배를 꺼냈다. 한 달 전 그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거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진이 건네준 문구를 마음속으로 외쳤다.

 

세영은 맞은편에 앉은 수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커피 한 잔 하자는 수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회사에는 신혼여행으로 몸살이 났다고 둘러댔다. 오전 시간이라 카페 손님은 세영과 수진뿐이었다. 카페는 음악도 흘러나오지 않아서 고요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깨고 수진이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했다. 어떠한 증오나 원망이라도 해달라고. 그러면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수진이 어떤 힘든 시간을 견디고 왔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 먼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그때는 무지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다. 그루밍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어떤 말도 세영은 할 수 없었다. 수진과 세영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짝으로 처음 만났다. 모의고사에서 학교 일등을 할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팝송을 잘 알던 아이였다. 아이돌 그룹에 빠져있던 또래들과 달리, 쉬는 시간에 아이팟으로 수진은 가펑클의 노래를 들었다, 세영은 그런 수진이 마냥 신기해서 자신도 모르게 수진을 뚫어지게 봤다. 한번 들어 볼래, 하고 입을 가린 채 웃으며 수진은 한쪽 이어폰을 세영에게 건네줬다. 세영과 수진은 같이 팝송을 들었다, 어느 날은 야자를 건너뛰고 영화관 매표소 직원을 속이고서 청소년관람불가인 <킬빌>을 보기도 했다. 맥도날드에서 밀크셰이크를 마시며, 우마 써먼 같은 화끈한 여자가 되자고 다짐하며 까르르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둘은 매일 편지를 주고받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부끄러움 없이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서로에게 꺼내어 놓았다. 수진은 입을 다물 때마다 턱에 생기는 호두껍데기 주름이 콤플렉스라고 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면 성형수술을 할 거라고, 그러면 세영도 외꺼풀인 눈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같이 성형외과 가자고 맞장구쳤다. 그래도 입은 가리지 마, 웃을 땐 정말 예뻐, 라고 적으며 하트를 정성스럽게 편지지에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수진이 음악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음악선생님이 팝송을 잘 안다고. 팝송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희귀한 엘피판과 씨디를 모으는 게 선생님의 취미라고. 이제 갓 부임한 훤칠한 음악 선생님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수진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와 나눈 대화를 시시콜콜하게 털어놓는 수진의 편지를 또다시 받자 세영은 답장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냐고, 무슨 잘못이라도 했냐고, 묻는 수진을 무시하고 일부러 옆에 있는 다른 친구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 수진과 사이가 멀어지고, 어느 순간부터 수진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생님 앞에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을 수진을 상상하자 이내 사라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겨울방학이 지나고, 고3을 앞둔 개학일에 수진은 보이지 않았다. 학교는 발칵 뒤집어졌다. 수진이 음악교사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했기 때문이었다. 수진은 그에게 반복적으로 성관계를 요구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동료 교사들에게 억울하다고 말했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수진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더니 수진이가 돌변한 거라고. 물론 도덕적으로 비난당해 마땅하니 어떠한 징계도 달게 받겠다고. 수진과 가까운 친구들을 참고인 자격으로 경찰은 불렀다. 세영 역시 경찰서에 갔다. 세영의 엄마는 입시를 앞두고 이런 일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당부를 하며, 잘 모른다고만 하고 오라고 했다. 오십은 넘어 보이는 남자 경찰이 거짓 없이 말해야 한다고 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평소 수진과 교사가 어떤 관계였냐고 물었다. 엄마의 지시처럼 대답하면, 거짓말했다고 처벌받을 거 같았다. 수진과의 편지 내용을 경찰에게 말했다. 며칠 뒤, 수진의 부모는 고소를 취하했고, 교사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수진은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교무실에서 나오는 수진의 뒷모습을 멀찍이 떨어진 데서 친구들과 바라봤다. 친구들은 히죽거렸다. 교복 상의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움츠린 자세로 학교 복도를 빠져가는 수진. 그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세영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꺽꺽거리는 울음이 사방이 조용한 카페를 가득 채웠다. 수진은 세영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로 화장이 다 지워진 세영은 고개를 들어 수진을 바라봤다.

“너 쌍수했구나.”

수진의 눈도 눈물로 붉게 번져있었지만, 수진은 웃고 있었다. 수진은 더 이상 입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세영은 알아차렸다.

 

세영은 집으로 가는 대신에 남자의 주소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곳에 여자가 있길 바랐다. 혹시 여자를 만나지 못하면, 남자에게 여자의 행방이라도 물어볼 심산이었다. 다음날에 찾아가 볼 수도 있겠지만, 세영은 마음이 급했다. 여자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버스 의자에 앉은 세영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호신용 스프레이를 만지작거렸다.

세영이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 골목길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길 양옆에 빼곡하게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듬성듬성 가로등에 놓여 있어 그런지 골목길은 어두웠다. 요즘에도 어두운 골목이 있다는 사실에 세영은 놀랐다. 자신의 동네와 너무나도 대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영은 휴대폰으로 주소를 검색하며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골목길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구불구불했다. 미로 속에 들어온 거만 같았다. 이상하리만큼 사위는 조용했다. 야밤에 짖는 개들도 없었다. 하긴 다세대주택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 큰 개가 있진 않겠지, 하고 세영은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행인마저 드물었다.

세영은 긴장한 탓에 겨울밤인데도 얼굴에서 땀이 흘러나왔다. 마스크는 축축해져 숨 쉴 때마다 입에 달라붙었다. 마치 습지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골목길을 헤맸다. 그때 목적지 근처라는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세영의 모든 감각들이 날카롭게 주뼛 섰다. 의류수거함이 보였다. 의류수거함이 노려보고 있는 거만 같았다. 세영은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는 마비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석은 넌 망상에 빠졌다고 말할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무서웠으면 나랑 같이 오지 그랬니. 하고는 우쭐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주머니 속 스프레이를 꽉 쥐고는 세영은 의류수거함 옆 빌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걸어갔다. 남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은 지층이었다. 지층에 난 창문은 철제 방범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방안은 미세한 불빛도 하나 없이 어두웠다. 무슨 소리가 나는가 싶어서 세영은 무릎을 굽혀 방범창 사이로 귀를 댔지만, 방안은 고요했다. 차가운 창살에 얼굴이 시렸다. 세영은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창살 속 어둠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세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자가 걸어오기만을 기도했다. 그때 지층으로 내려가는 현관 계단에서 주황색 불빛이 번쩍 들어왔다. 세영은 긴장한 채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유리로 된 문으로 상의가 다 벗겨진 채로 어떤 여자가 뛰쳐나왔다. 여자의 양손은 케이블타이로 묶여있었다. 공포의 질린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세영을 발견하고는 흐느끼면서 뛰어왔다.

“살려주세요.”

세영은 놀랄 틈도 없이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줬다. 여자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세영의 품에 안겨 벌벌 떨었다. 여자의 상태를 확인하려,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다가 세영은 경악했다. 갈색머리와 같이 왔던 여자였다. 모델처럼 화려했던 여자의 얼굴은 핏물들로 망가져 있었다.

“아까 편의점 그 새끼가 한 짓이죠?”

여자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세영은 휴대폰을 꺼냈다. 세영은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세영은 손이 떨려서 번호를 제대로 누를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어떤 것이 세영 쪽으로 다가왔다. 여자가 겁에 질린 채로 비명을 질렀다. 세영은 다가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주먹이 날라왔다. 세영은 쓰러졌다. 코피로 마스크는 질퍽해졌다. 세영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어둠 속 존재는 세영이 놓쳐버린 휴대폰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세영의 머리를 잡고 일으켜 세우고 주먹으로 복부를 수 차례 때렸다. 여자는 옆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어서 도망쳐요.”

여자는 울먹이면서 끄덕이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화가 났는지 거친 욕지거리를 해대며, 어둠속 존재는 세영의 머리채를 잡고 빌라 안으로 끌고 내려가려 했다.

“너, 박성진 맞지?”

그는 깜짝 놀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세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세영은 주머니에서 스프레이를 꺼내 그의 얼굴에 발사했다. 빨간색 액체가 그의 눈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박성진은 세영을 빤히 바라보고는 눈에 묻은 액체를 손으로 닦았다. 그러고는 세영의 멱살을 잡았다. 스프레이가 효과가 없다는 생각에 세영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목을 조르고 있는 그 힘이 너무 세서 세영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세영은 그가 자신을 토막 내지 않고 그냥 이렇게 죽여줬으면 했다.

“아이, 씨발.”

그는 멱살을 잡던 손을 풀고, 얼굴을 비벼댔다. 그러고는 숨이 막히는지 컥컥거렸다. 그는 검은색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마스크로 가려있던 박성진의 얼굴이 드러났다. 구역질하느라 박성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세영은 그 얼굴을 노려보았다. 다시 박성진을 향해 스프레이를 쐈다. 빨간색 액체를 한 발 한 발 맞을 때마다, 박성진은 울부짖었다. 붉게 물든 박성진은 침과 눈물을 쏟아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을 보니, 그의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을 여자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세영은 온 힘을 다해 그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 박성진은 힘없이 고꾸라졌다. 세영은 피로 물든 마스크를 벗었다. 주머니에서 호신용 호루라기를 꺼내 있는 힘을 다해 불었다. 어둠 속 골목을 깨우는 호루라기 소리. 늦은 밤, 잠에서 깬 동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삼삼오오 호루라기 소리 쪽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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