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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밖 세상

도도

우석은 여기서 배우로 일하기 전에는 이렇게 작은 공연장이 있는 줄도 몰랐다. 소극장이라고는 해도 관객은 한 줄에 겨우 예닐곱 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고 팔걸이조차 없었다. 그렇게 여덟 줄 정도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만석이라고 해도 50명이나 앉을 수 있으려나. 그 정도였다. 무대는 방 하나, 조금 무리하면 두 공간 정도를 표현할 수 있었다. 다소 열악한 여건이기는 해도 우석은 여기서 아동극을 하며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극이 끝나고 관객석을 향해 인사할 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면, 이 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결국 무대보다 훨씬 좁은 고시원이라는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인터넷에서 우석이 토끼 역을 맡은 이 공연이 입소문을 탔고 관객석은 그럭저럭 채워졌다. 우석은 개와 고양이, 사슴과 양을 만나 함께 살 집을 만드는 부분을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주역을 맡은 우석이 받는 돈은 한 달에 100만원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극단장은 조금 더 여건이 좋은 공연장을 찾아다녔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소득이 없는 모양이다.

 이 소극장에는 화장실도 한 곳 뿐이어서 출연자와 관객이 같은 화장실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무대 위에서 우석은 토끼 탈을 쓰고 토끼 옷을 입고 연기한다. 탈과 옷, 특히 탈이 덥기 때문에 우석은 극이 다 끝나고 나면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곤 했다. 청바지에 티를 대충 걸친 남자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화장실에 있으면 화장실을 찾은 관객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연극에 대한 감상을 듣기도 했다. 다들 일행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대화를 누가 듣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라 우석은 이곳에서 많은 피드백을 받았고 극단에 이 내용을 전해 아이들이 좋아하던 동물들이 밝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을 늘리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공연 잘 봤어요.”

 아이 두 명의 손을 잡은 한 여성이 우석을 향해 인사했다. 우석은 다른 사람을 보고 말하는 줄 알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화장실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저 말씀이세요?”

 여성은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토끼 옷 입고 있으시잖아요.”

 우석이 그 말을 듣고 놀라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토끼 옷이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화장실 바닥이 젖어 있어 옷에도 약간 물이 들었다.

 “네. 제가 좀 멍청했네요.”

 “와아, 토끼 형아다!”

 공연용 의상을 그대로 입고 세수를 하면 신발 쪽이 아니더라도 옷 위쪽이 젖을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 우석은 늘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오늘은 너무 더워서 정신없이 나오느라 옷 갈아입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두 아이는 우석이 토끼 탈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잊었는지, 신경 쓰지 않는지 우석의 다리를 하나씩 나눠 안았다. 우석은 미소를 띠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들이 정말 예쁘네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 재미있었어요? 고마워요.”

 우석은 극 중 토끼 말투를 쓰느라 아이들에게 말을 높였다.

 “물에 빠진 사슴 구하는 강아지 짱이에요.”

 “고양이 어디 있어요? 고양이 보고 싶은데.”

 우석은 아이들이 마냥 좋았다. 토끼를 붙잡은 아이들이 막상 토끼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개와 고양이를 찾자 같이 있던 여성은 당황했는지 얼굴이 빨개졌지만, 우석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음, 강아지랑 고양이는 집에서 편하게 쿨쿨 잘 거예요. 사슴이랑 양이랑 토끼도요. 토끼는 잠깐 집 주변에 무서운 어흥 호랑이가 숨어있나 보러 나왔어요. 그런데 어흥 호랑이는 없고 어린이 친구들만 있네요.”

 “와아!”

 “이제 어린이 친구들도 집에 갈 시간이에요. 그렇지요?”

 “네.”

 아이들 눈에 졸린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잘 가요. 나는 토끼예요.”

 우석은 마지막으로 웃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여성과는 가볍게 목례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석은 혼자 남았다.


서연은 자신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만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 남자친구 우석은 여전히 그녀에게 따뜻했다. 서연은 대학 시절 얼떨결에 동아리 홍보하는 선배를 따라 갔다가 가입한 연극 동아리에서 우석을 처음 만났다. 다들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입시를 준비해 대학에 가야한다고들 했지만 마음에 드는 대학에 진학한 것도 아니고 이후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로드맵도 없다보니 서연은 답답하고 우울했다. 그럴 때 동아리에서 늘 밝고 성실한 우석을 보고 처음에는 신기했다. 서연은 항상 구김살 없이 즐겁게 살아온 듯한 그에게 처음에는 샘이 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그녀의 학교생활에서 단 한 줄기의 빛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동아리 회식에서 술을 깨기 위해 잠시 바람을 쐬려고 나온 우석을 보고 서연이 뒤따라 나왔다. 벽에 홀로 기대 손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던 우석에게 서연이 다가가 키스한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다. 그 후로 서연은 동아리 활동에 흥미를 잃었고 우석은 여전히 연극 동아리에 열심이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둘은 연인으로 지냈다.

 서연은 대학 시절 공부를 그다지 열심히 한 편은 아니었는데 그 결과는 졸업반이 되면서 피부로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꼭 성적 때문에 공개채용에서 계속 떨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기도 했지만 면접전형에서 탈락하기도 했고, 어느 대기업은 전형과정이 4차까지 있었는데 마지막 임원면접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처음에 탈락하는 것은 오히려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아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는데, 전형 막바지에서 탈락하면 정신적 충격이 더 커서 며칠씩 마음고생을 하곤 했다. 결론적으로 이력서를 넣은 수백 곳 가운데 최종합격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서연은 취업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2년을 그냥 보냈다. 하긴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반복해서 작성한 일은 이력서에 작성할 수도 없었으니까 사회적으로는 그냥 공백기였다.

 다른 친구들은 몇 년간 취업에 실패하면서 결혼을 하기도 했다. 서연의 부모님은 지금 서연의 나이보다 어릴 때 결혼해 서연을 낳았다. 서연은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 답답했다. 그렇다고 배우자에게 의존하는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설령 서연이 의존할만한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그게 우석은 아니었다. 우석의 경제적 여건은 서연 이상으로 절망적이었다. 우석은 학부 시절 공부를 하고 싶었기에 복수전공까지 했다. 전공은 철학, 복수전공은 사학이었는데 성적이 잘 나와 장학금을 받는 것은 좋았지만 졸업하고서는 지원할만한 직장이 없었다.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박물관이나 연구소 자리는 석사나 박사가 아니면 지원 자격도 없었다. 근근이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취업 자리를 찾아보는 와중에 동아리 선배가 작은 극단을 소개해 주면서 그나마 하루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늘었을 뿐이다. 다행히 아이들이 좋아서 재미있다고는 하지만 서연이 보기에는 우석이 아이들을 싫어했더라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석은 천애고아라 무언가를 준비할 여력이 없었고 살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우석과 그나마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날은 공연이 없는 월요일과 서연이 월요일에 일이 끝나는 6시 이후의 짧은 시간밖에 없었다. 주말에 서연이 우석의 공연장으로 가면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서연은 아이들이 시도때도 없이 소리 지르는 공연장도 싫었고 무대에서 우석이 바보처럼 웃긴 연기를 하는 것도 싫었다. 우석의 부탁에 두 번을 가봤지만 서연에게 그 곳은 온통 보기 싫은 것들만 모아놓은 곳이었다.

 이런 와중에 서연이 다니는 회사에서 재직자를 대상으로 한 회사의 프레젠테이션은 흥미로웠다. 피험자로 참여만 해도 매달 60만원을 더 받을 수 있고 케이스가 발생하면 그에 대한 보조금으로 매달 200만원을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아이를 낳을 경우 낳는 사람의 성별에 관계없이 일시금으로 5000만원을 지급한다고 하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아니, 서연으로서는 만족스러웠다. 서연이 이 회사에서 일하고 받는 돈은 고작 한 달에 10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참여하실 분은 끝나고 남아서 서류 좀 작성해주시고요. 이외에 추가로 질문하실 게 있으시면 그것도 서류 작성하시면서 개별적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서연은 자신이 참가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생각해봤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서연은 우석과 달리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경제적 상황에 비추어 봐도 자신이 아이를 낳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절실하게 돈이 필요했다. 돈을 벌 기회라면 무엇이라도 잡아야 했다.

 지금 취업을 하기는 했지만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서연과 친하게 지내던 학교 동기 유나가 졸업하자마자 바이오메이어사에 입사했는데 그 회사에서 계약직 연구 보조원을 선발한다고 했다. 취업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알던 유나가 서연에게 채용 정보를 알렸다. 비록 바이오메이어사가 세계적인 회사라는 타이틀은 있었지만 그 자리는 최저시급을 적용하는 자리였고 계약직이라 길어야 2년 정도 있을 수 있었다. 물론 회사의 이름값과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그런 자리조차 1명을 뽑는데 이력서는 40개가 넘게 들어왔다고 한다. 회사에서도 그리 비중을 두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력서 심사를 갓 입사한 유나에게 넘겼다. 유나는 면접 대상자로 세 명을 골랐는데 그 중 한 명이 서연이었다. 면접을 보고 나서는 다 고만고만해서 반드시 뽑아야겠다 싶은 사람도, 반드시 떨어뜨려야겠다 싶은 사람도 없다는 게 면접관들의 중론이었다. 면접관들은 결정을 면접관도 아니었던 유나에게 미뤘고 유나는 서연을 선택했다.

 그 자리는 말이 좋아 연구 보조원이지, 실상은 실험이 끝나면 병 씻는 자리였다. 어른들이 하라는대로 하고 살아왔는데 지금 돌아온 것은 단순한 일에 적은 돈, 그럼에도 보장되지 않는 안정성. 서연은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꿈과 희망은 오래 전에 떠났고, 취업하고서는 자유도 사라졌다. 실험의 내용보다도 숫자에 시선이 간 것은 서연에게 너무나 당연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한 직원과 단상 위에서 멍하니 화면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앞에 자리를 마련해놓고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회사 규모에 비해 프레젠테이션에 온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상담을 받으려고 서성대는 사람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서연은 자연스럽게 그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참여하시겠어요?"

 프레젠테이션을 했던 직원과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까는 멍하니 앉아 있던 직원이 내게 물었다.

 "네? 그러고 싶기는 한데…."

 프레젠테이션을 했던 직원이 서연의 말을 끊었다.

 "아, 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제약3부 코디네이터 유희진입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희진이 옆에 앉은 남자에게 손짓했다.

 "나도?"

 "네 프로젝트잖아."

 서연은 앞에 앉은 두 사람이 제법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오민철입니다. 저도 제약3부고요."

 민철이 작은 목소리로 겨우 자기 이름을 말했다. 희진이 민철의 말을 이었다. 서연은 희진이 미묘하게 한숨을 쉰 것 같다고 얼핏 느꼈다. 서연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것 하나를 물었다.

 "그럼 이 남자분이 이 약을 만드셨다고요?"

 대답한 것은 민철이 아니라 희진이었다.

 "이 친구도 처음부터 그럴 의도였던 것은 아니고요. 원래는 생리주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약을 만들려고 하다가 사이드 이펙트, 아니 부작용이 발견되어 개발 절차를 다시 밟았어요. 그래서 나온 신약이에요."

 서연은 프로젝트 책임자인 민철이 대답할 줄 알았기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분은 말씀을 안 하시나요?"

 희진은 민철을 살짝 바라봤다. 민철은 앞에 있는 서연에게 설명할 생각은 않고 아래에 시선을 둔 채 서류만 쳐다보고 있었다. 희진은 서연을 바라보고 손짓을 섞어 설명했다.

 "원래 이런 프레젠테이션이나 피험자에게 설명하는 일을 전부 이 친구가 하는 게 맞는데 보다시피 그런 일을 영 내켜하지 않아서요. 회사가 크다보니까 구성원들 성격도 다양하고 그래요. 그래서 연구 외에 부서간 의견 조율이나 대외 협력 같은 것은 전담할 담당자를 코디네이터라고 해서 따로 지정했어요. 부서마다 다르지만 회사에서는 대개 요청하는 부서에 코디네이터를 보내요. 간혹 없는 부서도 있고 많게는 서너 명도 있습니다."

 "아…."

 "더 궁금하신 게 있나요?"

 "아뇨. 회사 구조는 별로."

 희진은 프레젠테이션 요약본과 계약서를 서연의 앞에 놓았다. 서연도 앞에 놓인 서류를 넘겨가며 내려다 봤다. 어쩐지 희진을 계속 쳐다보기가 부담스러웠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희진은 자신감 있게 본인의 일을 말했고 또 당당했다. 단순히 희진의 말 몇 마디에 지나지 않는 것, 별로 대단하지 않아 보이면서도 서연은 어쩐지 스스로가 작아보였다.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서연은 궁금한 것 하나를 물었다.

 "실험에 참여해서 임신하게 되면 아이를 지우는 것도 안 되나요?"

 "오프더레코드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그런 문제에 관여하지 않아요."

 희진은 약간 맥이 빠진 목소리로 조용하게 답했다. 회사의 입장이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민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게 자신의 임무였다. 희진은 이 약에 대해 민철이나 다른 제약3부 연구팀 다음으로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오늘의 프레젠테이션부터 지금 이런 이야기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여자분이 임신하시든, 남자분이 임신하시든 아이를 지울지 말지 여부에 대해서는 저희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관여해서도 안 되고요."

 "물론 저희는 출산이나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까지 알고 싶기는 합니다만."

 입을 열지 않던 민철이 한 마디 했다.

 “그러니까 비용을 그렇게 책정하신 거겠지요.”

 “네. 저는 약에 대해 완전한 검증을 원합니다.”

 서연은 출산할 경우 5000만원이라고 적힌 부분을 보고 있었다. 희진은 건조한 목소리로 무표정하게 말했다.

 "참여하시게 되면 6개월간 매일 저희 부서에 오셔서 약을 먹고 저희에게 확인받으셔야 합니다. 참여 중단을 원하실 경우 비용은 일할 계산이 될 거고요. 중도 포기하셔도 따로 위약금을 받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바이오메이어사는 위약금 조건이 항상 있다고 들었는데요."

 서연은 실험 참가자 위약금 장사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간에 유명한 바이오메이어사인데 왜 그게 빠져 있는지 의아했다. 희진은 여기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이어갔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약효는 약을 먹고 일정 시간 지속됩니다. 저희 예상으로는 24시간에서 72시간 사이인데 이 부분도 실험 결과로 결론을 낼 것이고요. 약효 내용은 이성간 성관계를 할 경우에 여성이 임신할 확률의 87%가 남성에게 강제로 부여된다는 것이고 그 이외의 어떤 문제나 효능이 있는지는 저희도 아직 잘 모릅니다. 약은 여성이 복용하셔야 합니다."

 "그 말뜻은…"

 "임신 확률 중 13%는 여성분이 져야한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민철의 말이 끝나고 침묵이 찾아왔다. 순간적으로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희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실험 중인 약이기 때문에 이 수치는 전부 추정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험에 대해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회사 내부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려고 하는 거고요. 사이드 이펙트, 아니 부작용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서연은 마음을 굳혔다.

 “할게요. 서명하면 되나요?”

 민철이 그렇다고 답하려던 찰나, 희진이 그를 막았다.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보시는 게 좋습니다. 저희는 계약서를 빈틈없이 쓰는 편이라 한 글자 한 글자 다 읽어두지 않으시면 나중에 피해를 보실 수도 있거든요.”

 “그래요? 음…”

 희진의 말을 들은 서연이 5페이지에 달하는 깨알같은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민철은 당황해서 희진의 팔을 툭 쳤다. 민철은 따로 나가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희진은 아무런 반응 없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사실 서연은 읽고는 있었지만 이런 공식적인 문서를 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여기 ‘바이오메이어사는 실험 참가자 및 그 영향을 받은 자에 대해 실험 과정 및 결과에 대해 일체의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아, 그건 쉽게 말해서 약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다치더라도 회사는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회사에 고소나 소송 못하신다는 거지요.”

 “그 윗줄 한 번 읽어보십시오. 실험 참가자는 언제든 실험 중단이 가능하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아, 그런가요?”

 서연은 독소 조항에 대한 희진의 해석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는 뜻일까? 무슨 의미인지 못 알아챈 걸까? 희진은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서연의 반응이 해석되지 않아 속으로는 생각이 복잡했다. 민철은 희진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자꾸 방해하려는 것 같아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불편한데도 자꾸 서연에게 말을 걸었다.

 “네. 서명할게요.”

 민철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희진이 서류 하단 서명란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네,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바이오메이어사 옥상. 워낙 높아서 이 도시의 높다고 할 만한 어지간한 건물을 전부 눈 아래 둘 수 있다. 낮이면 그늘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식물이 많은 곳. 삭막한 회사에 편히 쉴만한 공간을 만들자는 생각에 회사가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인 장소였지만 아는 이가 없으니 찾는 이도 없었다. 이는 희진이 이 곳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 이렇게 큰 은행나무가 있다는 게 믿어져?"

 옥상에는 희진 혼자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가을맞이를 못한 잎들은 아직 노란 물이 들지 않았지만 모양은 은행잎의 그 모양이었다.

 “이게 은행나무인지도 몰랐는데, 나는.”

 희진은 나무에 기대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뒤에는 민철이 있었다.

 "은행나무야. 은행나무."

 "몰라, 그런 것은. 난 식물과는 친하지 않다고."

 희진의 신경질 섞인 말을 들은 민철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나타났다. 은행나무를 등지고 앉아 있던 희진은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도 식물은 잘 모르지만 은행나무랑 단풍나무는 알겠더라고. 아까는 왜 그런 거야?"

 "이거 꼭 해야 해?"

 희진이 말을 내뱉었다. 희진 스스로가 느끼기에 소리를 지르는 것도 같았다.

 "난 이 일이 앞으로 불러올 결과가 뭐가 될지 모르겠어. 그래서 무서워."

 희진은 민철을 향해 돌아섰다.

 “나도 몰라. 그런 것은. 이미 참가자랑 계약서 쓰는 절차까지 다 끝났는데 고민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분명히 콜래트럴 대미지가 생긴다고. 만약 네 아내가 이 약을 먹으면 넌 어쩔 생각이야? 오늘 참가한다고 한 사람들, 누군가는 그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할 거라고. 크게 상처받을 거야,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그냥 업적이라고 생각해. 이건 혁명적인 발명이야. 참가하기로 한 사람들은 다 자발적으로 참여했어. 그렇다면 나와 우리 팀은 이제 실험과 연구 성과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야. 난 그런 일을 좋아하고.”

 “정말 그게 다야? 너도 아이를 낳을 수 있어?”

 민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희진이 약을 입에 넣었다.

 “뭐, 뭐하는 거야? 얼른 뱉어. 아직 임상실험 시작 단계라고.”

 “내일부터 매일 볼 장면인데 뭘 그렇게 놀라?”

 희진은 약을 삼키고는 팔짱을 낀 채 민철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민철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옥상에서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서연은 실험에 참가한지 한 달이 지났다. 매일 민철에게 가서 그가 주는 약을 먹고 그 약을 삼켰는지 확인받는 일이 썩 즐겁지는 않았다.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서연이 직접 서명한 계약서에 포함된 절차였다. 우연히 복도에서 희진을 만나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물었더니, 피험자가 약을 빼돌리거나 복용하지 않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외에 날마다 어떤 증상이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와 성관계를 갖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약을 먹을 때마다 질문 받아야 했다. 회사가 말한 효과가 강력한 만큼 처음에는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며칠간은 뭔가 대답을 해줘야하나 싶어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아무 증상도 없고 성관계를 한 적도 없다고 말하는 게 뭔가 잘못하는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하지만 서연이 민철에게 조심스럽게 아무 일 없었다고 몇 차례 말했는데도 그가 전혀 불쾌해하는 것 같지 않아 서연은 점차 무뎌졌다. 그저 하루 일상에 새로운 일 하나가 더해졌을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나 서연의 통장에 원래 받던 월급 외에 한 줄이 더 찍혀 있었다. 세금공제 없이 60만원. 평소보다 높은 숫자가 찍힌 통장을 본 서연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60만원은 꼭 자신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서연은 하고 싶은 것들을 떠올렸다. 여행을 가고 싶기도 했고 보석 박힌 멋진 목걸이를 사고 싶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찾아본 끝에 평생 가본 적 없는 고급 호텔에 가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것은 서연에게 시간과 공간, 어쩌면 미래까지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서연은 우석에게 리카니 호텔에서 하루를 함께 있자고 연락했고 우석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이곳은 전부터 서연이 눈독을 들였던 남산 부근의 호텔이다. 서연은 하루쯤 편하게 자고 싶었고 멋진 야경을 보고 싶었고 조용한 시간을 원했다. 소박하고 사치스러운 꿈이었다. 객실에 들어간 우석은 세상이 눈 아래 모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창가에 다가갔다. 상상할 수 있는 풍경이면서 본 적이 없는 풍경이기도 했다. 뒤이어 서연이 들어왔고 우석과 같은 곳을 바라봤다.

 “마음에 들어?”

 “응. 이런 건 처음 보거든.”

 “높은데로 한 보람이 있었네. 그러면.”

 “이런 걸 예상한거야?”

 서연은 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우석의 뒷머리를 가볍게 잡고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우석의 눈을 잠깐 쳐다보고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아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쉬는 거?”

 말을 끝내고 서연은 다시 우석에게 키스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키스했다. 두 사람이 잠시 떨어진 찰나, 우석이 서연의 재킷을 조심스럽게 벗기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

 “콘돔, 쓸까?”

 서연은 거칠게 우석의 바지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다 풀고는 그의 품에 기댔다. 팔로는 우석을 꼭 안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녹아들었다.


꿈꾸는 듯한 하루를 보내고 우석과 서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서연은 업무가 끝날 때쯤 민철을 찾았고 우석은 흰 토끼로 지냈다. 그 외에는 서로의 비는 시간을 이용해 연락하는 게 연애의 전부였다. 우석은 서연과 함께 하루를 보낸 그 날 이후 서연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우석이 보기에 서연은 딱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음이 복잡한 것인지,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 이후 좀처럼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우석이 서연을 사랑한다고 느낀 게 착각일 수도 있었다.

 서연과 만나고 난 이후 우석은 가끔 심한 복통에 시달렸다. 몇 시간쯤 그러다가 아픔이 가라앉곤 해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런 고통이 반복되자 홀로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제대로 진단을 해주거나 특별한 이유를 말해주는 병원은 없었다. 처음에는 동네 병원을 찾았다가 점점 큰 병원을 찾았는데도 작은 양성 종양이 있기는 하지만 악성 종양도 아니고 이 정도는 큰 이상이 아니어서 통증의 원인이 아닐 거라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결국 병원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병원에서 별다른 말을 못하는 것과 달리 우석은 너무 큰 통증에 무대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공연에 지장을 줄 수 없어 우석은 극단장에게 잠시 쉬겠다고 말하고 휴가를 가졌다. 서연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공연히 부담을 주는 것 같기도 해서 그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쉬면서까지 병가를 냈다는 말을 하지 않기는 어려워 서연에게 아프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이 바이오메이어사에 전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두 달 전에 한 번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지금 많이 아프다네요. 이렇게 되면 케이스가 발생한 게 맞나요?”

 서연이 민철을 찾아 약을 먹고 확인받던 중, 서연이 무심히 말을 꺼냈다. 민철도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꼭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요. 자세한 것은 검사를 해봐야…”

 “배 아래쪽이 많이 아파서 대학병원까지 갔는데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던데요. 양성 종양같은 게 하나 있는데 별 거 아닐 것 같다고 했다고.”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 일개 병원에서 상상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니까 HCG나 초음파 검사를 할 생각은 못했겠지요.”

 병원을 언급한 민철은 우월감을 느꼈는지 조금 신나 보였다. 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희진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서연에게 물었다.

 “그럼, 서연씨는 남자친구분한테 실험 참가에 대해 얘기를 안했어요?”

 “네. 굳이 말할 필요 있나요? 좋아하지도 않을 텐데. 케이스 맞으면 거기 해당하는 돈 저한테 주시는 것 맞지요?”

 “네? 아, 네. 그건 그렇기는 한데.”

 희진이 고개를 떨궜다. 서연은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요?”

 민철이 대답했다.

 “회사로 남자친구분 데리고 와 주세요. 저희는 확실히 할 수 있으니까.”

 “언제쯤 오면 되나요?”

 “뭐, 저는 내일이라도 좋습니다. 회사 로비에 와서 제 이름 대고 방문증 끊으라고 하세요. 이쪽으로 안내하라고 부탁해 두지요.”

 “굳이 그래야 하나요? 그냥 두면 알아서 하겠지요.”

 민철은 서연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만약에 이 실험이 저희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다면 남자친구분은 지금 의학사상 전례 없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저희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요. 물론 데이터로써도 필요하고…”

 “예. 그러면 제가 나쁜 사람이 되는데 그러기는 싫어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회사로 남자친구분만 오게 하시면…”

 “그렇게는 못해요! 신청서 써주시고 그걸 저희가 확인해서 결재 받는 거예요! 지금 하시는 말씀만으로는 케이스가 발생했다는 데 대한 근거가 없어서 회사에 돈을 청구할 수 없다고요!”

 “아, 그러면 어쩔 수 없겠네요.”

 서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민철이나, 우선 순위가 사람보다는 이미지, 이미지보다는 돈이라는 따위의 말을 사내에서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서연이나 희진의 눈에는 답답했다. 코디네이터 일을 하려면 아무리 이상한 것을 봐도 두 명 이상이 보는 앞에서 화는 내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고 실천하려고 애썼다. 희진은 자신의 언어를 드러내느라 소리를 높였고, 그 순간 자신의 그릇이 이 일을 하기에 너무 작지 않은가 생각했다.


우석은 바이오메이어사에 와서 민철의 이름을 적고 방문증을 끊었다. 로비에서는 민철이 있는 제약3부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었고 우석은 그쪽으로 찾아갔다.

 “저, 여기가 제약3부 맞나요? 오민철이라는 분 계신가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민철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주어진 일을 마무리하느라 남아있던 희진이 혼자 남아 있었다.

 “혹시 서연씨 소개로 오셨나요?”

 “네.”

 “이쪽에 앉아서 좀 기다리실래요? 점심시간을 딱 맞춰 오셨네요.”

 한동안 통증에 시달린 우석은 꽤 초췌해 보였다.

 “마실 거라도 좀 드릴까요?”

 “네. 물 좀 있나요?”

 “그럼요.”

 희진이 따뜻한 물을 떠서 건네는데 민철이 들어왔다.

 “저, 누구신지?”

 희진이 대답했다.

 “조서연씨 소개로 온 분이야.”

 “김우석이라고 합니다.”

 우석이 습관처럼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민철은 악수를 받지 않았다.

 “네. 좀 기다리세요. 아니, 저 좀 따라오시지요.”

 우석은 무안해진 손을 안고 민철이 가는대로 따라갔다. 희진은 조용히 두 사람을 따라갔다. 민철은 검사실로 향했다.

 “혈액 검사랑 초음파랑 몇 가지 검사를 할 거예요. 괜찮지요?”

 “아, 네.”

 민철은 검사실 직원에게 검사할 것들을 적은 쪽지를 주고 처리해달라고 하며 자리를 떴다. 직원은 컴퓨터로 무언가를 입력했고 곧 간호사가 왔다. 우석은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맞네. 실험 성공이야.”

 희진은 민철이 부서 사람들과 실험 결과를 공유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들은 검사실에서 제약3부로 보내준 우석의 검사 결과를 살펴보며 기뻐했다.

 “참가자가 적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풀렸네요.”

 “그렇지. 이렇게 성과가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지지.”

 이들은 검사 결과를 우석에게 설명할 생각은 않고 자축하고 있었다. 부서 분위기를 살펴보고는 어쩔 수 없이 희진이 우석에게 가서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검사 결과와 서연이 참가한 실험 내용을 설명했다.

 “그럼 지금 제 몸 속에 아이가 있다는… 그것 때문에 이렇다는 말씀인가요?”

 “예, 뭐라고 더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한은 그렇습니다.”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요?”

 “저희 회사는 실험을 지속하기를 바랄 거예요.”

 “그 말뜻은…”

 “본인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아마 수술로 아이를 지우는 건 가능할 거예요. 아직 얼마 안 되셨으니 그 편이 덜 위험할 거고요. 아이를 낳겠다고 하시면 제 생각에는 그것도 아마 나중에 수술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분이시니 수술 외의 다른 방법은 없는 것으로,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석은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감쌌다. 서연에게 어제 전화를 받은 일이 떠올랐다. 바이오메이어사에서 검사를 받게 해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고마웠다. 그 검사 뒤에 이렇게 엄청난 일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 황망해 한동안 숨만 쉬다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큰돈이 없어요.”

 “수술비나 의료비 문제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저희 회사에는 병원도 있어요. 회사에서 최고수준의 입원실과 의료진을 지원하도록 할게요. 그 외의 지원이나 회사 차원의 보상도 제가 가능한 선까지는 최대한 수용하겠습니다.”

 우석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희진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그러자 우석의 몸과 파티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서연이 제약3부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서연씨, 어떻게 오셨어요?”

 서연의 이름을 듣고 우석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서연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우석을 바라보고는 희진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희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읽었다. 실험에 유용한 데이터를 생성한 대가로 우석의 임신 상태가 종료되기 전까지 서연이 매달 200만원을 지급받겠다는 신청서였다. 희진은 쓰게 웃고는 그 문서를 든 채 부서 바깥으로 자리를 피했다. 희진의 자리에 서연과 방문증을 단 우석 둘이 남았다.

 “그래.”

 우석이 입을 떼었다. 서연은 차마 우석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희진의 정갈한 자리와 몇 가지 귀여운 소품으로 시선을 옮겼다.

 “좀 전에 들은 말로는 내 몸에 아이가 생겼고, 그 원인이 생기도록 동조한 게 너라는데 말이야.”

 우석은 말을 잇기 전에 목이 메어 침을 삼켰다.

 “사실이 아니겠지?”

 서연은 우석의 낡은 운동화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 친구 회사에 온 모습으로 안쓰럽기보다는 구질구질해 보였다. 그러자 미안한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됐구나. 사실일걸.”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인정하는 서연을 보자 우석은 찬물로 얻어맞은 듯했다. 그렇게 차가운 이성을 찾았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 이런 실험에 참가했다고.”

 “내가 말해야 하는 거였어?”

 “딱히 달라질 건 없었을지 모르지만, 너는 미리 알려줄 수 있었잖아. 다 알고 있었잖아. 내가 아이를 가질지도 모른다고.”

 “너도 처음에 내가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잖아. 그뿐이야.”

 “넌 피임을 할 방법이 많았잖아. 난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았어.”

 “그래. 리카니에서도 그럴 수 있었지. 안한 건 너인데 왜 나한테 그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면서 회사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서연은 입을 다물고 자리를 떠났고 우석은 서연의 뒤를 따랐지만 다시금 찾아온 복통에 서연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했다. 우석은 주저앉은 채로 서연이 지나간 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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