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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페인트

DialKSens

나의 일상은 치가 떨릴 정도로 단조로웠다.

 아마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이해의 차원을 뛰어넘어 공감의 수준에 이르러서야 겨우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난해한 문제였다. 난 이제 잠시 그 치가 떨릴 정도의 단조로움이 끝나버린 어느 날의 이야기를 하겠지만, 아마 당신은 이런 이야기에 익숙지 않을 것이다.

 난 아침에 일어나 자물쇠를 걸어놓은 후 집을 나섰다. 한 시간이 걸린 걸 보면 이런저런 과정이 더 있었겠지만 세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시절의 내 일상은 끝없이 쌓여있는 복사지의 일면처럼 같은 모양의 반복이었다. 출근인파로 가득 찬 거리를 가로질러 내가 일하는 공장으로 가기 시작했다. 당신은 아마 이 부분부터 내가 일하는 곳이 다른 곳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실 분은 3번 게이트에 서주세요.]

 이 소리는 출근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일 년 넘도록 같은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고정멘트다. 설명을 하자면, 내가 다니는 공장은 지하에 있다. 비단 그 공장만이 아니다.

 20여 년 전 도시계획부는 주택지 면적을 확대한다는 이유를 첫 째로, 미관상 좋지 않다는 하찮기 그지없는 이유를 둘째로 들어 모든 공장들을 지하로 쫓아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이 출퇴근용 엘리베이터다. 언제나 초만원인 이 엘리베이터는 한 번에 50여 명 씩 하루에 십만 여명의 직공들을 지하로 실어 날랐다.

 <공장이 들어선 땅은 공기마저 검다>는 말이 있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있어서 그건 진실과 다름없었다. <공장>이란 무미건조하고 냉소적인 단어가 그에 준할 만한 <지하>란 음침한 단어와 만나게 되며, 그런 믿음은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라도 쉽게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식으로 공장에 출근을 하였다.

 출근카드를 찍고, 상관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동료들과 만나 가벼운 농담을 하고, 한껏 다려 입은 와이셔츠 대신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후, 업무시간 전까지 신문이나 TV뉴스를 보다가, 작업복 위에 두터운 방호복을 겹쳐 입고, 아귀가 큼지막하게 벌어진 벽들이 모빌처럼 걸린 복도로 들어가 4번 작업대 위에 선다. 그러고 나면 모빌 같은 벽들이 철컹철컹 내 주위로 서서히 압축되어 들어와 육방면체 모양으로 아귀를 맞추고 이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공기 한 모금도 새어나가지 않는 스탠질 독방을 만들어 낸다.

 이것으로 나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아마 당신은 좀 당혹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잠시 기다리니 전면부에서 캔버스 한 장이 컨베이어 벨트에 고정되어 밀려내려 오고, 난 벽에 매달려 있는 페인트 건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캔버스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벽 아래쪽으로 밀려 사라지고, 새로운 캔버스가 위에서 밀려 내려오도록 되어있다. 어쨌거나 이곳은 공장인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공장.

 난 하루에 12장의 그림을 그리고, 점심식사를 제외하곤 8시간을 근무했다. 한 장의 그림에 8/12=0.66시간을 쏟아 붓고 있던 셈이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에는 장난 같은 시간이지만 나와 같은 그림 그리는 직공들은 그 시간마다 기어코 한 장의 그림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컨베이어 벨트에 밀려 내려간 그림은 101명의 익명심사위원들에 의해 즉각 심사되어, 상품으로 내놓을 것인지 폐기처분 시킬 것인지를 정하게 되어 있었다.

 이 공장에 나와 같은 그림쟁이는 모두 200여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이 공장이 하루에 생산해 내는 그림은 모두 2400여 점이나 되는 셈이지만, 냉정하게도 상품이 되어 지상으로 올라가는 그림은 단 10점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폐기처리 되어 버린다.

 그림들을 폐기처리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페인트 건으로 발사하는 물감은 화학폐기물을 원료로 해서 만들어진 유독물질이었고, 이것을 고착시켜 특수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찍어 넣는 것엔 만만치 않는 돈이 들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방호복을 입는 것하며, 전후 사방을 꽉 눌러 닫은 독방 같은 안전장치들은 모두 이 유독 물질에 대한 대책이었다.

 [4번 작업대. 18096번째 그림입니다. 어떤 종류의 물감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컴퓨터가 팔레트에 대한 질문을 하자 난 주저 없이 무채색 그림용 물감을 선택했다. 그리고 페인트 건 손잡이에 달린 휠을 이용해 명도를 조절한 다음, 마치 화분에 물을 주듯 캔버스를 향해 물감을 분사했다.

 유독물질에 반응한 독방은 전면에 걸린 사각 등에 <OnPaint>라는 깜빡거리는 빨간색 글씨를 띄우며, 만약에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사항에 대해 나에게 경고했다.

 그렇다. 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물질을 그렇게 무덤덤하고 서슴없이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전에 여섯 장의 그림을 그리고 점심식사를 위해 방호복을 벗었다.

 복도를 통해 일렬로 걸어가는 동료들과 함께 식당으로 가 식판을 들고, 국을 뜨고, 밥을 뜨고, 반찬을 뜨고. 다시 일렬로 걸어가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는 식탁에, 지네의 한쪽 발이 된 것 마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숟가락으로 밥을 넘기면서도 난 사실 제대로 된 맛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넘기면서도 난 사실 제대로 된 맛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13번 작업대에서 일하는 사내가 다가와 수작을 걸었다. 그의 이름을 알진 못했으나 다만 성이 최 씨라는 건 알고 있었고, 다른 직공들 역시 그를 최 씨라고 불렀다.

 “4번 작업대 수이 아닌가? 요즘 그림이 제법 늘었다 더니, 과연 얼굴색이 활짝 폈네 그려.”

 별 어림없는 수작을. 난 혀를 차며 냉큼 고개를 돌렸다.

 “지난주에도 9점이나 즈으- 위로 올려 보내지 않았나? 거참 이 친구 다른 건 몰라도 허였고 꺼멓고, 그냥 무채색 그림이라면 아주 끝내주지. 요즘은 계속 무채색 그림만 그린다지?

 “아니요. 뭐 운이 좋아서 그리 된 거지, 어디 제 실력이 좋아서 그렇습니까? 저도 요즘은 페인트건만 잡으면 아저씨랑 똑같이 우물쭈물 감을 잘 못 잡겠습니다.”

 난 간단히 겸손한 척 하면서 최 씨를 나무랐다.

 최 씨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숟가락을 쥐어 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있으면 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겨도 그렇다.

 “수이씨, 편지에요.”

 내 이름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급사 한 명이 나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나갔다. 누가 보내는 편지일까? 보낸 이는 ‘당신이 아는 사람’이라고 되어있었으나, 이미 권태로움이 기름때처럼 진득하게 눌러 붙은 감성이라 아무런 기쁨이나 기대감도 생기지 않았다.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도 햇수로 따지면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붓을 잡던 섬세한 손가락은 여전한지 궁금합니다. 당신의 꿈꾸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에 다시 들리는 것 같아요. 당신의 졸린 듯, 아니면 조금 흥분되어 있는 듯한 목소리로 묘사하던 이곳의 산과 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거닐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당신을 위해 선물을 동봉하기로 했습니다. 몇 년 전 찍었던 그 들판 위의 사진이에요.]

 의문의 편지였으나 그 의도는 확실해 보였다. 고향에서 보내온, 그것도 틀림없이 들판 위를 같이 뛰어 놀던 단짝에게서 온 안부편지다. 난 봉투입구를 마름모 모양으로 벌리고 안에 든 사진을 꺼냈다.

 전체적으로 노란색 색조를 띈 사진이었다. 하얀 구름언덕 아래로 가득 들어찬 풍성한 들판, 녹색의 풀 위에 잔치를 벌이듯 피어난 유채꽃의 바다와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한가득 풍성한 고향의 사진이다. 내 기억은 사진 언저리의 작은 소나무의 그림자 밑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난 콧물을 엿물처럼 흘리고 다니던 어린애였다. 조그만 소나무는 나의 은신처이자 비밀기지이기도 했다. 그즈음엔 그 소나무의 앞뒤로 두터운 수풀이 지붕처럼 우거져 어린애 한 명이 드나 들기에 더없이 안락했기 때문이다.

 난 하루 종일 그 안에서 서성거리며 ‘적들이 쳐들어온다!’라느니, ‘보호막을 올려라!’라느니 혼자 한껏 몰입해 있었다. 물론 큰 소리를 지르지는 못하고 입안으로 웅얼웅얼 목소리를 삼켰다. 전에 한 번, 나를 찾으러 온 부모님에게 내 모습을 들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부끄러움이 내 목소리를 막았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 가족은 근방의 작은 셋방에서 살고 있었다. 셋방주인은 워낙에 성격이 좋아, 어쩌다 세를 밀려도 사람 좋은 소리로 ‘사정되면 줘.’하고 충청도 특유의 어투로 말하며 넘어가곤 했다.

 셋방주인에겐 6살 난 애가 하나 있었다. 나보단 2살이 어렸던 그 애는 나를 강아지 꼬리 마냥 방정맞게 쫓아다니는 게 일이었다. 난 그게 조금 귀찮기도 해, 그 아이를 멀찍이 때놓고 언덕 뒤쪽 유채꽃 들판으로 줄행랑을 치곤했다.

 어느 날은 그 아이가 불현듯 내 비밀기지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기서 뭐해?”

 아직 발음이 채 고정되지 않은 목소리가 어찌나 우습게 들리던지 난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아일 내 옆에 들여다 놓고, 여기저기에 박힌 돌멩이와 나무껍질, 동강 난 나무둥치의 숨겨진 성능과 기능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레이더 장치고, 저것은 로켓발사장치, 그리고 저것은 보호막 발생장치다 하고.

 잠시 뒤에 한 남자가 우리 앞을 지나쳐 갔다. 앞니가 유난히 긴 그 사람은 마을 사람들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하는 일 하나 없는 건달이었다. 부모님에게 그리 설명을 들은 후 나 역시 그를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난 기지 앞쪽의 뭉툭하니 못생긴 돌덩어리를 꾹 누르며 ‘미사일 조준’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내 눈엔 깜빡이는 십자선이 그 남자의 머리통에서 비슬비슬 웃음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내 옆에 꼬맹이도 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내 품을 따라 돌멩이 눌렀다.

 “미사일 조준.”

 꼬맹이의 목소리는 좀 컸다. 비실비실 걸어가던 남자가 돌연 고개를 돌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지각이 뚜렷치 못했던 나는 나무둥치를 잡아당기며 “발사!”하고 속삭였다. 그런데 이 꼬맹이는 오히려 나보다도 담이 컸다. “발사”라는 말에 감동이라도 받은 것인지 나뭇잎이 오스스 떨 정도로 큰소릴 지른 것이다. 난 얼른 꼬맹이의 손을 잡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리고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 언덕까지 개처럼 헐떡헐떡 뛰어가다, 그 남자가 쫓아오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겨우 큰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꼬맹이는 너무나도 중차대한 대 사건을 겪은 듯이 엉엉 울음보를 터트리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우습게 보여서 난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운 풍경.

 나는 이제 거칠어진 손으로 티 없는 풍경을 한 차례 쓰다듬었다. 추억은 추억일 뿐 어차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편지를 보낸 사람은 그 꼬맹이였을까? 별 생각 없었는데 새삼 의문이 든다.

 우리가 가족은 몇 해를 더 그 고장에서 머물렀고, 이사를 자주 하긴 하였어도 그 꼬맹이네 집과는 연락이 닿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되살아난 유년시절이 잠시나마 내 기분을 고양시켰다. 난 나도 모르게 국그릇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렇게 하면 미사일이 조준되기라도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제야 내가 이미 서른에 가까운 어른이란 사실을 상기해냈다.

 난 사진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양손으로 쥐고 한참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 시절의 목소리가 사진 속에서 흘러나와 나에게 생기를 북돋워 줄 듯.


오후 첫 번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업실로 돌아갔다. 사방의 벽이 다시 조여와 겹쳐지고 전면의 벽에서 강요하듯 사각형 캔버스가 밀려 내려왔다.

 [4번 작업대. 18102번째 그림입니다. 어떤 종류의 팔레트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컴퓨터의 목소리는 환상이 말을 거는 것 같이 모호하게 들렸다. 목소리는 고막을 지나서 머리 안쪽으로 들어가 주름 사이를 미끄러지다가 혈관을 따라 흩어져 버렸다.

 난 이때까지도 사진에 대한 생각으로 뜰 떠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정말 그 꼬마아이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런 다소곳한 말로 언덕배기의 추억을 곱씹을 만한 사람은 내 주위를 암만 뒤져봐도 그 꼬마애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고 ‘꼬마애’라고 쓰는 이유는 당시 내가 그 꼬마애의 이름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사람이름 외우는 데는 영 재능이 없다.

 고등학교 무렵에 난 그 언덕에서 멀리 떨어진 도회지에서 살고 있었다. 학교생활은 평탄했고, 크게 삐뚤어지는 일도 없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 나를 지배하게 내버려두는 삶을 이어갔었다. 이런 생활에 가끔 발작처럼 찾아오는 사건은 친척의 결혼이나 부고, 아니면 절기마다 있는 체육대회 같은, 역시나 일상적인 사건들이 전부였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전화를 받고는 깜짝 놀란 듯, ‘네?’하고 격양된 어조로 되물은 적이 있었다. 부고였다. 내가 어렸을 적에 세를 살던 집 주인이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조금은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이었다.

 부모님은 갈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난 괜찮다고 하며 장례식장에까지 따라나섰다. 이제 몸이 한층 성장한 그 꼬마애는 눈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문상객들을 받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응.”

 무뚝뚝한 말 이외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며칠 뒤 아저씨는 하얀가루로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난 그 일행에 동행해 어린 시절의 그리운 풍경 하나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는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강에서 돌아오는 길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 언덕이었고, 나는 상주 옆에서 착잡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꼬마애가 말했다.

 “같이 여기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다.”

 “응.”

 “그런데 언제나 ‘응’이라고만 해? 내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뜬금없이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러나 꼬마애는 자기가 질문을 했어도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를 받침대 삼아 밑바닥으로 추락하려는 마음을 끌어올리려는 안타까운 몸짓으로 보였다. 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꼬마애는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4번 작업대, 어떤 종류의 물감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난 언덕배기를 수줍게 걷던 철없는 고등학생에서 순식간에 방호복을 거추장스럽게 입은 별 볼일 없는 그림쟁이로 되돌아왔다. 그 갑작스런 전환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내 입에서 나조차도 의아해 할 단어가 튀어나왔다.

 “노란색.”

 [알겠습니다. 노란색 계열의 물감을 선택하셨습니다.]

 난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한지 깨닫고 다시 정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페인트건에 연결된 튜브는 이미 꾸룩꾸룩 배곯는 소리를 내며 노란색 계열의 물감들을 충전시켜놓은 상태였다.

 되돌리기엔 시간이 아깝다. 벽에 걸린 녹색 디지털시계는 이미 5분이 지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될 대로 되라지. 나라고 색깔그림을 못 그릴 리 있나? 나도 여태 무채색 그림만 그리진 않았다.

 난 페인트건 손잡이의 휠을 돌려 노란색을 선택하고 노즐을 ‘넓은 분무’상태로 맞추었다. 붉은 색 레이저 포인트로 캔버스 한가운데를 노리고 방아쇠를 당기자 뿜어져 나간 물감이 캔버스를 온통 노랗게 덧씌워버렸다. 난 다시 휠을 아래쪽으로 슬슬 돌려 높은 채도의 연두색을 골라 캔버스를 향해 쏘아댔다. 마치 그동안 차곡차곡 눌러왔던 색에 대한 열정을 지금 한 순간 모두 쏟아내고 있는 듯. 그러고 있자니 이렇게 거침없이 색을 골라 뿌려대는 자신감이 도리어 겁이 나기까지 했다. 그 조바심에 제동을 걸어준 것은 전면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는 ‘OnPaint’라는 글귀. 그리고 그 글귀의 수족이라고 말해도 다름없는 디지털시계의 꾸준한 감산이었다.

 난 다시 휠을 돌려 깊은 갈색과 녹색을 섞고, 노즐을 좁힌 다음 거친 필터를 덧붙여 화폭위에 긴 가지를 그려내었다. 나도 모르게 사진에서 본 고향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들꽃이 촘촘히 들어찬 풍성한 들판과 언덕배기 소나무들의 거친 나무껍질과 하늘에 점점이 박힌 양떼구름들을. 그것도 마치 신들린 듯이 그려내었다.

 디지털시계가 이제 1분이 남았음을 알릴 무렵 난 새로운 계획을 떠올렸다.

 색을 하얀색으로 맞추고 최대한 작은 노즐을 골랐다. 레이저의 포인터를 캔버스 한 가운데 들판 위쪽으로 겨누었다. 난 작은 점 두 개를 그려넣었다. 바로 어린 시절의 나와 그 여자애의 상징이었다. 그 점 두 개가 그려지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북받쳐 올라왔다. 횡경막 부근이 좌우로 당겨지고, 가슴언저리에 피가 끓는 듯 해서 잠시 현기증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이건 걸작이야.”

 그 감동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한마디의 단어가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걸작. 자기 그림에 걸작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디지털시계는 10여 초가 남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난 재빨리 검은색을 골라 화면의 한쪽 구석에 내 서명을 남기려고 했다. 난 왜 그때까지 그림에 내 서명을 남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건 틀림없이 내 삶을 지배하는 공장의 세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명을 남김으로서 이 지옥 같은 쳇바퀴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수’를 쓰고, ‘이’를 쓰기 위해 레이저 포인터를 옮기는 순간 디지털시계가 0에 도달했다. 미쳐 내가 행동하기 전에 그 그림은 컨베이어 벨트에 밀려 방밑으로 사라져 버렸고, 대신 새로운 캔버스가 밀려나와 공허한 얼굴로 날 응시했다.

 [4번 작업대, 18103번째 그림입니다. 어떤 종류의 팔레트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난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 전 재산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강탈당한 기분이었다.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이 공장에서 10년 가까이 일해 왔지만 여태껏 한 번도 이런 감정에 휩싸여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스스로 반문해보면, 그 그림이 걸작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떠올랐다.

 순간, 짜증이 솟구쳐 올라 페인트건을 캔버스 위에 집어던져 버렸다. 페인트건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한숨 같은 노란색 물감을 뿜어냈다. 난 컴퓨터를 향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작업 중지!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알겠습니다. 작업 일시 중지.]

 벽에 달린 팬이 공기 중에 남아있는 유독한 화학 물질을 흡입하고, 한편으로 고착물질이 사방에서 분사되어 벽이든 방호복 위든 물감이 진득하게 눌어붙게 만들었다. 안전이 확인되자 육방면체를 이룬 벽들이 다시 공중으로 올라갔다.

 난 복도로 걸어 나와 헬멧을 벗었다. 복도 좌우엔 내가 들어가 있던 곳과 같은 수많은 스탠질 독방들이 군인처럼 일렬로 늘어선 채 ‘OnPaint’라는 붉은 불빛을 토하고 있었다.

 난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관리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 난폭하게 문을 열었다. 관리실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던 남자는 예상한 것처럼 불만이 섞인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이름은 ‘관노’라고 했다. 오래 전부터 복도를 감시하는 역할을 맞고 있던 그는, 성질이 고약하고 화를 잘 내서 동료 그림쟁이들도 모두 쉬쉬하는 인물이었다. 난 뒤룩뒤룩 살이 찐 관노에게로 걸어가 최대한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방금 그림의 점수를 알고 싶습니다.”

 “어떤 그림?”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였다. 그러나 내가 더 무어라 말하기 전에 그의 손은 이미 자판의 버튼 몇 개를 누르고 있었다. 작은 모니터 위에 푸른색 숫자들이 나타났다. 깨알 같은 숫자들은 조그만 벼룩들이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신없이 많았다. 저 많은 숫자들 중 하나가 나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알 수 없는 당혹감과 절망감이 날 엄습했다.

 ‘4번 작업대. 18102번째 그림. 심사완료.’

 찾았다. 난 불쾌감을 억누르며 관노에게 그 항목의 세부사항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관노는 어쩐 일인지 순순히 내용을 보여주었다.

 ‘상품화 부적격. 가:1 부:99 무효:1’

 한 줄의 문장이 사형선고가 되어 내 심장에 쿡 박혀버렸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 어떻게 나의 걸작이 99명의 심사위원에 의해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할 수 있는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누군가의 수작이 분명하다. 틀림없이 관노의 짓일 것이다. 그럼 그렇지! 순순히 내 부탁을 들어줄 때부터 수상했다. 그는 틀림없이 나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루한 일상에 특별한 생기를 보충하려는 수작일 게다. 이런 날강도 같은 놈! 그 특별함은 나를 위한 것이었어. 어떻게 당신이 그걸 빼앗아 갈 수 있지!

 그러나 관노는 나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평소엔 잘 하지 않던 말을 해주었다.

 “다 그렇지. 5분 전에 그린 그림이 벌써 심사가 끝나서 이렇게 영수증 같은 명세서만 달랑 붙어있는 걸 보라고. 요즘 사람들은 진득하게 음미할 줄을 모르거든. 한 번 봐서 아니다 싶으면 두 번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아. 왜냐하면 세상엔 볼 게 너무나도 많아서 봤던 걸 다시 보기엔 시간이 모자랄 정도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 회사의 심사 기준도 한 번 보고 즉결심사!”

 난 화가 났다.

 “그 그림은 특별합니다!“

 “알아. 화가는 언제고 특별한 그림을 만나게 될 운명을 타고났어. 그러나 공장 그림쟁이들은 자기 그림에 그렇게 빠져들면 안 돼. 그렇게 되면 다시 페인트건을 잡을 수 없게 돼버려. 알겠나?”

 그렇게 말하며 그는 관리실 한쪽에 걸려있는 조그만 상패를 가리켰다. ‘관노’라는 이름이 붙은 회사의 감사패였다. 그런데 그 감사패는 ‘관리인’이 아니라 ‘직공’, 즉 그림쟁이로서의 관노에게 수여된 감사패였다. 난 그제야 언젠가 동료에게서 관노 역시 오래 전 공장의 그림쟁이였다는 것, 그리고 어느 날 대단한 그림을 하나 그려내고 나서는 페인트건을 부셔버렸다는 이야길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 역시 나와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방금 전의 순순함은 동류의식에 의한 작은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그 화를 잘 내던 관노는 뜻밖에도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겼다.

 “그만 돌아가게. 그리고 그림을 그려.”

 난 그의 말대로 다시 복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은 엉킨 잡초들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이 거대한 늪이 되어 날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다시 유리로 된 헬멧을 썼다. 순간 유리 헬멧에 눌러 붙은 노란색 물감이 눈에 들어왔다.

 탕!

 머릿속에서 방아쇠가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2, 30년간의 삶을 한순간에 뛰어넘어, 내 미래의 종착지가 저 조그만 관리실 골방의자일 거라는 통찰이 내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난 절대로 그 의자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의자에 앉아 노상 화만 내는 제 2의 관노가 될 수는 없었다.

 난 오던 길을 다시 관리실로 돌아갔다. 그 순간 날 지배하고 있던 건 오로지 내 작품을 되찾아야겠다는 분노뿐이었다.

 “제 그림은 어디 있죠?”

 스스로 느끼기에도 내 목소리는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관노는 가만히 자판을 눌렀다.

 “지금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폐기 처리장으로 가고 있어. 한 10분 쯤 후엔 제 1분류소에 도착할 거야. 그곳에서 분류된 후 완전히 폐기처리장으로 가게 되는 거지. 그런데 그건 왜?”

 난 쏜살같이 관리소를 뛰쳐나와 분류소를 향해 뜀박질을 시작했다. 등 뒤에서 관노의 만류소리가 들렸지만, 당시의 나에게 있어 그건 한낱 거미줄보다도 못한 방해물이었다.


지하 300미터 아래를 파놓은 지하로는 토끼굴처럼 어둡고 축축했다. 반복되는 천장등을 지나쳐 달리면서 내내 난 이런 곳에서 용케 10년을 일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꺾어지는 복도를 돌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그동안 난 정해진 길 외엔 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며 겨우 제 1분류소에 도착했다. 먼저 컨베이어벨트 다섯줄이 동시에 끼리릭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컨베이어벨트를 감시하는 감독들이 그림들을 어느 폐기장으로 보내야 할지를 고르는 중이었고,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일상의 작은 변화에 흥분을 느끼는 것일까? 그러나 그들의 놀람엔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들 중 키가 큰 사람 하나가 자신의 가슴 쪽을 찌르며 말했다.

 “방호복은 왜 입고 있어요?”

 그는 자신의 가슴을 찌르며 내가 입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방호복을 가리켰다. 난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거추장스럽던 그간의 움직임을 머리로서 이해하기 되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걸 입고 달리다니.

 난 정신을 차리고 내가 온 목적을 밝혔다.

 “제 그림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림을 찾으려거든 저 위로 올라가서 상품대기실을 찾아보세요. 여기 오는 것들은 모두 폐기처리 할 것들입니다.”

 “아니요, 제 그림도 이 중에 있습니다. 곧 폐기 처분하기로 되어 있어요.”

 어리둥절. 키다리의 얼굴에 그런 류의 표정이 떠돌았다. 난 답답함이 온 혈관을 틀어막는 것 같고 한편으론 조바심이 일었다. 키다리의 뒤에서 묵묵히 컨베이어 벨트를 살피던 난장이가 말했다.

 “어림없소. 나 원. 정신 나간 양반이구먼. 무슨 수로 여기에 온 그림을 다시 찾아가겠다는 거요? 그렇게 찾고 싶거들랑 애초에 번듯하게 잘 그려내놔서 상품으로 뽑혀 올라가면 되는 것이지. 하여간 그림쟁이들 고집은 못 말리겠군.”

 “그 그림은 굉장히 특별하단 말입니다! 심사위원들 눈이 다 썩은 거지!”

 열불이 치솟아서 풍경이 온통 새빨갛게 보일 정도였다. 난 난장이를 밀쳐내고 모니터를 바라봤다. ‘4번 작업대 18102번 그림’이 막 분류소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때, 분류소의 다른 직원 중 어깨가 떡 벌어진 젊은 애가 내 겨드랑이 사이에 양팔을 쑥 집어넣고 날 번쩍 들어올렸다. 발을 허공에 붕 떨어져 올라 마치 어른에게 잡힌 어린아이 신세나 다름없었다. 키다리가 날이 바짝 선 날카로운 어조로 얼른 내보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 이거 놓지 못해! 난 미친 사람마냥 악을 바락바락 지르고, 허공에 뜬 다리를 마구 버둥댔다. 순간,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있던 내 그림이 분류소 안으로 들어왔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그 노란 물감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기운은 ‘날 어서 살려주세요!’하고 비명을 지르는 자식놈같이 느껴졌다. 난 번쩍 다리를 들어 작업대 위의 단추들을 제멋대로 걷어찼다.

 “아니, 이 미친!”

 분류소 사람들이 이리 때처럼 나에게 달려들어 내 팔이나 머리끄덩이를 붙잡았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머리카락이 끊어졌는데, 이상케도 나는 저 유리 밖 내 그림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을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난 몸이 닿는 대로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내가 걷어차고 있는 것인지, 뭉툭하게 튀어나온 버튼이 내 몸에 찍혀 눌리고 있는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을 즈음, 유리벽 밖의 풍경이 쿠웅! 살벌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분류소 직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마 뭔가가 크게 잘못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난 겁이 나지 않고 오히려 잘 되었구나 싶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노란색 그림을 찾기 위해 유리벽에 바짝 붙었다. 불행히도 내 노란색 그림은 막 3번 폐기실로 떨어지고 있었다. 난 다시 분류소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3번 폐기실로 이어진 기다란 화살표를 따라 온힘을 다해 달렸다. 그제야 내 몸 여기저기가 사내들의 억센 손아귀에 의해 멍들고 터져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웬일인지 오히려 또 다른 쾌감이 되어 내 전신을 휩쓸었다. 그런 쾌감은 내 목청에 이르러서 응어리져 있는 소리를 폭발시켰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3번 폐기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의 어리둥절한 낯빛이 눈에 들어왔고, 그 중 키 큰 양복신사의 퀭한 시선이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다. 난 다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막무가내 식의 울림이었을 따름이지만, 그건 지금까지 내가 발성해 본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림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 순간, 내 시선은 공중으로 붕 떠오르다가 차가운 돌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한참 뻐근하던 상처부위가 일시에 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댔고, 피를 흘리던 곳에선 피안개라도 터진 것 같았다. 날 덮친 것은 분류소에서 내 뒤를 줄곧 쫓아온 키다리였다. 그는 내 팔을 뒤로 꺾어서 뼈마디가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뒤틀더니 변명하듯, 아니 오히려 자랑하듯 말했다.

 “작업실 직공입니다. 이놈이 글쎄, 분류소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지 뭡니까? 이놈 때문에 제 일터가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키 큰 양복신사가 뚜벅뚜벅 차가운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당시에 나는 금방 떠올리지 못했지만, 그와 나는 구면이었다. 양복신사는 잠시 사냥 당한 초식동물을 보는 것처럼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날 깔고 앉은 키다리에게 물었다.

 “그림을 찾으러 왔다는데, 그건 무슨 말인가?”

 “자기 그림이 폐기장으로 가고 있다면서 도로 찾아가겠다는군요.”

 난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이들이 나에게 있어 절박한 사안을 한탄 그림쟁이의 발작쯤으로 치부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양복신사는 키다리를 돌아가게 하고 날 일으켰다. 그리고 내 옷에 묻어 있는 허연 먼지를 손수 탁탁 털어 내며,

 “4번 작업대의 수이로군. 무채색의 대가께서 이 무슨 꼴이지.”

 “절 아십니까?”

 날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 양복신사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낯이 익고, 그 역시 생판 남을 대하는 얼굴이 아니라 친구를 만난 듯 얼굴 표정이 은근히 풀어져 있었다. 양복신사가 대답하기 전에 한 작업인부가 날 꾸중했다.

 “이봐! 어딜 그렇게 눈 똑바로 뜨고 보는가? 부사장님 앞에서!”

 부사장. 내 눈앞의 그 양복신사가 이 공장의 부사장이었다. 사보 1면에서 늘 사원들의 생산성 향상을 독려하는. 또 심사위원을 고르고, 작업시간을 정하고, 실력 없는 그림 직공들을 가지치기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아, 이 반복적인 톱니바퀴 골조 내부의 가장 중요한 태엽 중 하나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과 안면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언젠가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던 순간, 내가 이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로서 조립되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때는 여름이었지만, 피서를 생각하기보다는 막 내 앞에 떨어진 불똥을 끄는 것이 우선이었던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은 아르바이트로 버텼다. 아니, 버텼다기 보다는 버티는 흉내를 내고 있었으며, 사실 난 계속해서 질척한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고독한 작업이다. 부모님에게 그 고독을 보여주기보단 차라리 남들처럼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었다.

 언제부터 그림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오는 뱃길에서였나. 아니면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풍경이 언젠가 보았던 그림 속 풍경과 똑같은 걸 봤던 탓인가.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런 싹수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샛집의 그 꼬맹이가 날 보면 언제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난 어렸을 적부터 그림을 곧잘 그리곤 했었던 것 같다. 인생이란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물들어 가는 게 틀림없다. 특별한 계기 없이 난 이미 그림쟁이였고, 그것은 그 어떤 강렬한 동기보다도 날 그 길에 얽어매는 족쇄였다. 대학교에서는 디자인을 전공했으나 그다지 열심은 아니었다. 난 그저 그림만을 그렸을 뿐이다.

 그 시절, 난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시기가 좋지 않아 디자이너나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자리는, 소위 말하는 ‘대가’들이 영토전쟁을 모두 끝낸 후였다.

 어느 날 선배에게서 가뭄의 빗방울 같은 연락이 왔다. 나에게 어울릴 만한 일자리가 있는데 마침 사람이 모자라다는 것이었다. 난 만사를 제쳐두고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햇볕을 피한 카페 구석자리에서 커피 한 잔 씩을 받아와 앉았다. 동석한 사람은 나와 선배, 그리고 키다리 양복신사였다.

 양복신사의 이름은 ‘형석’이라고 했다. 그때 그의 직책은 전무였으니, 난 붓질이나 겨우 놀리는 그림쟁이를 맞기 위해 전무씩이나 되는 사람이 온 것에 감격하기 까지 했었다.

 “사람을 잘 뽑느냐 못 뽑느냐는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지요. 특히 저희 같은 대중문화사업자들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뽑을 땐 이렇게 제가 찾아다니며 직접 면접을 하지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던 것 같다. 하긴, 그러니 지금 부사장까지 올라와 있는 거겠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일주일 뒤였다. 이번엔 선배 없이 그와 단 둘이서 만나는 자리였다. 그는 가방에 커다란 장비를 넣어 가지고와서는 내 자리 앞에 그걸 탁 내려놓았다.

 ‘페인트건’이라고 했다. 양손으로 들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이 쓸 만큼 큼지막했고, 어쩐지 소총을 연상케 하는 날렵한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회사에선 이걸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색하지요? 그러나 한 번 쓰고 나면, 내가 예전엔 어떻게 붓으로 그림을 그렸나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난 한 번 페인트 건을 옆구리에 끼고 기억나는 대로 소총처럼 쥐어보았다. 마치 날 위해 만든 것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고,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도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때 그 기계에 대해 매료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 기계로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일지, 내 호기심에 불이 당겨진 셈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난 이 공장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회상을 모두 마칠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때 나와 부사장은 의자에 앉아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부사장님이 되셨군요. 모르고 있었어요.”

 “꽤 되었네. 그런데 그림을 다시 찾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심사에 부정이 있었나?”

 “아닙니다.”

 “그럼 작업기계가 실수를 했나?”

 “그것도 아닙니다.”

 나는 얼른 말을 꺼냈다.

 “그 그림은 걸작입니다. 다만 오로지 저에게만 걸작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이제 전 그 그림을 찾아야겠습니다.”

 부사장은 눈을 감고 주름을 살짝 구겼다. 자신이 써야할 단어를 고르는 것 같았다.

 “4번 작업대 수이. 우리 회사는 어느 한 사람에게만 걸작인 그림은 필요 없네. 지상 만인에게 평균 이상인 그림만이 필요할 뿐이야. 예전에 28번 작업대에도 자네와 같은 사람이 있었지. 자네가 이 회사에 오기도 훨씬 전의 일이야. 그도 역시 이 장소에 와서 자기 그림을 돌려달라고 말했었네.”

 난 부사장의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28번 작업대의 주인공이 관리실의 관노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내 결심은 더더욱 강해지고 말았다. 그 그림을 찾지 못한다면 내 운명의 물꼬는 그 관리실을 향할 것이다. 정말 줄기차게 뻗어나갈 것임을 직감했다.

 부사장은 내가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 것을 깨달은 듯 온화하던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화가 난 모양이다.

 “4번 작업대, 수이. 난 자네를 잃고 싶지 않아. 자넨 훌륭한 직공이고, 훌륭한 직공이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자네가 그린 흑백그림은 요즘 최고가로 팔리고 있어. 정말 유행을 잘 읽는 사람이지. 자네란 사람은.

 “유행을 따라 그린 게 아닙니다. 단지 그때의 제 마음이 오로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래, 그렇지. 우울증은 현대인의 감기 같은 거지.”

 부사장은 더 이상 날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훌륭한 권력자이자 지도자의 표상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선택을 하게. 첫 번째는 이 대화가 끝나는 즉시 다시 작업대로 돌아가 무채색 그림을 그리는 것이네. 두 번째는 지금 방호복을 입고 폐기실로 들어가서 자네 손으로 자네의 그 걸작을 구해서 나오는 것일세. 그럼 내가 그 그림을 플라스틱 판넬에 고정시켜 주지.”

 난 너무나도 관대한 제안에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부사장의 제안은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첫 번째를 선택한다면 자네의 급료를 150%로 올려주겠네. 그러나 두 번째를 선택한다면 우리 회사와 자네의 인연은 오늘로 끝일세.”

 폐기실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내 입으로 쏠린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나는 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부사장은 나에게 모든 것을 줌과 동시에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서 그의 권력과 화해를 할 수 있으리라.

 “제 그림을 찾아오겠습니다.“

 배부른 예술가가 되고 싶었건만, 아무래도 모든 것들이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여기저기 찢어진 방호복 대신 새 방호복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헬멧은 여전히 예전 것이었다. 헬멧을 쓰자마자 아까 전의 노란색 물감이 든든한 동지가 되어 날 맞이했다.

 폐기실로 들어가는 길은 3중문으로 되어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을 통과하고 세 번째 문을 열자 수많은 색깔들이 거대한 강철 방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보였다.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풍경들이 시시각각으로 바다로 변했다가 폭풍이 되고, 전쟁이 되었다가 이내 도시 위 군중들의 혁명으로 변하는 그 풍경들이 날 압도해왔다. 난 폐기실의 누군가가 알려준 대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렀다. 그제야 그 풍경은 서서히 잦아들고 이내 색들의 잔잔한 호수로 탈바꿈했다. 난 유해화학물로 범벅이 된 그 호수 안으로 기어들어가 그곳에 뚫려있는 다섯 개의 구멍에 신경을 집중했다. 컨베이어 벨트의 말단이 구멍 바닥에 붙어 도르르 회전하고 있고 하나둘 그림들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벽에 달린 스피커가 목소리를 쏟아냈다.

 [조금 있으면 4번 작업대 18102번 그림이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폐기실내 화학 위험도가 계속 올라가고 있어서 위험할 수도 있어요. 그림을 찾는 대로 바로 빠져 나오세요.]

 난 오른손을 들어 모두 잘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다. 어느 구멍에서 나의 그 노란색 걸작이 나타나게 될까? 언제부터인지 그 그림이 나의 아기인 것처럼 느껴져서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었다.

 맨 오른쪽 구멍에서 노란색 그림 하나가 훌렁 튀어나왔다. 난 재빨리 뛰어가 그림을 낚아챘다.

 “찾았다!”

 내 그림이었다. 나의 자식 같은 내 그림이었다. 난 헬멧과 방호복을 벗고 맨손으로 그 그림을 만져보고 싶은 갈증을 느꼈다. 그러나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당부를 들은 터라 꾸물거릴 수 없었다.

 난 거친 그림무더기를 헤치며 내가 들어온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스피커에서 다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사람의 음성이 아닌 기계로 합성한 무기질적인 음성이었다.

 [폐기실 내 화학 위험도가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긴급방출을 실시합니다.]

 뒤이어 땅이 한 번 크게 울렸다. 난 뭐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다시 한 번 땅이 울리고 컵을 한 쪽으로 기울이는 것처럼 나는 갑자기 미끄러지며 낙하했다. 폐기실이 기울어진 쪽으로 입구가 열리고, 그 입구를 통해 수만 가지 그림들이 쏟아져 내려갔다. 통로는 수많은 팬들이 달린 터널을 지나 분쇄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잃었다면 난 한 줌의 핏물이 되고 말았을 테지만 난 간신히 천장의 작은 사다리에 매달릴 수 있었다. 아래를 보았다. 분쇄기를 통과한 그림들은 걸쭉한 물과 섞이어 잿빛의 죽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기에 빨려 들어갔다면 한 줌 핏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난 한 손 한 손 왼쪽으로 이어진 사다리 손잡이를 옮겨 잡으며 몸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탕!

 순간 내가 잡은 사다리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독한 화학물질에 부식되어 버린 것인지. 사다리는 내 가벼운 체중도 버텨내질 못했던 것이다.

 철퍽 하는 큰 소리와 함께 회색 죽 위로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에 난 품에 있던 내 걸작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회색 죽으로부터 최대한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빨려 들어가는 속도도 늦춰진 상태라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흘러내리는 회색죽 사이로 머리빗 사이만큼의 시야가 확보되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회색죽이 차올랐던 수위만큼 벽에 자국이 묻어난 게 보였고, 회색죽이 허벅지 쯤 수위에서 흐르는 것도 느껴졌다.

 나는 회색죽이 진득하게 묻어있는 손을 들어 헬맷을 덮고 있는 회색 죽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헬멧 유리를 쓸어내리고 나서 내가 본 것은, 집념에 가득 찬 손과 그 끝에 매달린 찢겨진 그림이었다. 사다리 손잡이에 걸려있는 나머지 부분은 기막힌 타이밍으로 통로 안에 몰아친 바람에 내가 똑똑히 보는 앞에서 분쇄기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사장은 약속을 지켰다. 사분의 일밖에 남지 않은 내 그림을 플라스틱 판넬 속에 고정시켜 나에게 넘겨준 것이다. 난 그 초라한 사분의 일을 옆구리에 끼고 쓸쓸한 귀갓길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니 어느새 밤이었고, 거리마다 켜놓은 울긋불긋한 네온사인은 차라리 해보다도 눈부셨다. 저 많은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보고 살았을까? 내 사분의 일뿐인 걸작을 내려다보니 ‘수’라고만 적혀있는 내 서명은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었다.

 집에 와보니 자물쇠가 열려있었다. 무슨 일이지? 난 틀림없이 자물쇠를 잠가놓고 출근했는데.

 나는 문틈으로 안을 엿보았다. 안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 부랑아가 내 집에 기웃거리는 건지도 모른다. 난 경찰에 신고를 할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이제 나 역시 그들처럼 직업 없이 쓰레기통을 전전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쓰레기통? 쓰레기통이라. 그러고 보면 한 작가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자기는 등단한 후에도 한동안 식당 쓰레기통에서 끼니거리를 구해 다녔는데, 그런 생활도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긴다고 한다. 일단 그 생활을 장기간 이어가려면 부자들이 가는 식당을 타겟으로 삼으랬다. 그런 식당에서 버리는 음식들은 맛도 좋고 영양가도 있어 하루 한 끼만 먹어도 기운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팁이 하나 있는데, ‘아주’ 부자들이 가는 식당은 가면 안 된다. 아주 부자들이 가는 식당은 칼로리를 낮춘 합성식품만 취급해, 음식들이 맛은 기가 막힌 데도 그것만 계속 먹다보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된다.

 그런 작가후기를 적어놓은 책이 있었다. 역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 책만 읽을 수 있다면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가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난 덤덤히 집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어두컴컴한 실내는 그런대로 아늑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만 나오세요. 먹을 거라면 드릴게요. 돈은 없고, 그 외에 가진 거라면 이 걸작뿐입니다.”

 이때 맞은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걸작이라면 꽤 돈이 될 텐데요.”

 굵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였다. 거리를 떠도는 부랑아스럽지 않은 목소리다. 난 저 사람이 대체 누굴까 의문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렇진 않아요. 이건 나만의 걸작이거든요. 게다가 이젠 사분의 일 밖엔 남지 않았어요.”

 “이런, 그거 참 안 됐네요.”

 불이 켜졌다. 내 앞에 앉아있던 사람은 검은 머리카락에 키가 크고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2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난 이 순간 아무런 문답 없이도 이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까맣게 잊어먹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상하지만 우린 이때 서로의 안부라던가, 갑자기 내 집을 방문한 사연이라던가. 하다못해 인사말 같은 것도 나누지 않았다. 무언가 모를 공감이 우리 사이를 오고 갔었던 것 같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회사를 그만뒀나요?”

 “그래, 특이한 경험을 했지. 내가 회사를 그만뒀단 건 어떻게 알았어?”

 “어제 입사했어요. 제가 오늘 그 그림에 합격점을 주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그림은 ‘누나’ 혼자에게만 걸작이 아니란 거죠.”

 누나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내 인생은 이상하리만치 그 단어를 들을 일이 없게 흘러갔었고, 그런 인생에서 딱 한 사람만이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다녔었다. 어릴 적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마애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바로 그 꼬마애였다. 더 이상 꼬마애라곤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듬직하고 어른스럽게 자라 있지만.

 “이렇게 해요. 제가 그 그림을 살게요.”

 “비싸게?”

 “아니요. 사분의 일밖에 남지 않은 그림을 비싸게 살 순 없죠. 하지만 대금으로 드릴 게 누나 마음에 들 거예요.”

 “뭘 주려고?”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물건을 나에게 내놓았고, 난 그 물건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부드러운 끄트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보다가 내가 아직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드러운 붓만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때요?”

 난 그 질문에 대답했다.

 우린 그 후로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이름은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만큼 깊게 각인되고야 말았다. 지금 우리 둘의 거실에 걸려있는 둘 만의 걸작처럼.

 이렇게 해서 난 그 시절의 길고 길었던 무력감과 권태의 늪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었다. 모든 것이 마치 마술 같은 하루였고, 난 아직까지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글자를 읽어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래도 좋다. 결국 모두에게 공감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이것으로 내 이야기는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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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온페인트 2017.08.31
선정작 안내 심사평1 2017.08.31
후보작 유통기한 보는 여자 2017.07.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3 2017.07.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1 2017.06.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7.05.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 2017.05.01
후보작 블런더버스 2017.03.31
선정작 안내 심사평2 2017.03.31
우수작 개나 고양이 2017.02.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1 2017.02.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 2017.01.31
선정작 안내 2016년 4분기 우수작 및 2016년 최우수작 2017.01.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1 2016.11.30
후보작 다수파 201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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