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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베개

2017.08.05 10:3108.05

 

베개가 죽었다. 베개는 두 살. 겨울에 태어난 아이. 우리는 강남 꿈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나처럼 불면증을 앓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은 영일이의 일기장에서 꿈 카페를 발견해 찾아간 날이었다. 목 디스크 때문일 수 있어. 좋은 베개로 바꾸면 잠도 잘 온다고. 영일이는 목을 주무르며 그렇게 말했었다. 꿈 카페로 들어섰을 때 베개는 컨베이어벨트에 떨어져 선물용 크라프트지로 싸이기 직전이었다. 나는 갓 나온 베개를 가리키며 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걸로 주세요.

  베개는 좀 비쌌다. 고작 베개인 놈이 오십 만원이나 했다. 꿈쟁이라고 적힌 보라색 플라스틱 명찰을 가슴에 단 직원은 보급용으로 판매하는 제품보다 꿈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 커 그렇다고 설명했다. 할인점에서 파는 외장 하드도 500기가보다 1테라바이트짜리가 비싸지 않느냐면서. 나는 부드러운 알파벳 B자처럼 생긴 베개의 곡면을 쓰다듬고는 베개마다 성능이 달라 가격도 천차만별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고장도 나나요?

  고장도 납니다.

  그럼 어떡하죠. 오십 만원이나 줬는데. 일 년 쓰고 고장 나면 버려야 해요?

  걱정 마세요. AS 해드리니까요.

  꿈쟁이는 부드러운 행주로 오랫동안 닦아 반들반들해진 나무 계산대 밑으로 들어갔다. 검은색 플라스틱 뚜껑이 달린 서류철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무상으로 수리해준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꿈은 꾸자마자 베개에 자동 저장되고요. USB 케이블을 꽂아 TV와 연결하면 어제 꾼 꿈을 볼 수도 있어요. 외장 하드와 똑같죠. 중요한 꿈은 따로 분류해야 편할 거예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면요.

  어쨌든 이걸로 불면증이 낫는다는 소리죠?

  그럼요. 대신 오래 쓰면 베개가 아플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프다고요?

  베개긴 한데 특이해서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어쨌든 인간의 꿈을 흡수하는 게 이 녀석들의 일이니까요. 하루 20시간 이상 쓰면 안 돼요.

  그건 마치.

  네?

  선인장 같은 겁니까.

  그렇죠. 가끔 돌봐주셔야 해요. 안 그럼 갑자기 병이 들거든요.

  베개가요.

  네. 고작 꿈이어도 다른 사람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게 쉽진 않겠죠. 그래서 저흰 꾸준히 무상 서비스를 해드리고 있답니다.

  12개월 할부로 베개를 샀다. 꿈쟁이는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입양을 축하드린다고 말했다. 종이가방에 베개를 넣고 그냥 가긴 뭐해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엉덩이보다 작은 나무스툴에 앉아 돌아보니 치렁치렁한 자주색 벨벳 커튼을 칸막이 삼아 둥근 철제 테이블에 흩어져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조명에서 퍼진 빛을 밥 대신 먹는 것처럼 밝았다. 초췌한 낯은 찾기 어려웠고 살찐 새끼돼지처럼 탐스러운 기운까지 풍겼다. 저 얼굴이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 오십 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어쨌든 무이자였으니까. 신형 스마트폰보다도 쌌다. 꿈쟁이가 거품 없이 꽉 찬 맥주를 건넸다.

  저희 가게엔 단골이 많습니다.

  그렇군요.

  가맹점이 없어서요.

  꿈쟁이는 행주로 닦은 유리컵을 뜨겁게 달궈진 커피머신 위에 내려놓았다. 내 관심이 모여 앉은 사람에게 향하자 주문하지 않은 보충설명이 이어졌다.

  저분들 꿈 스터디를 한다더군요. 과거의 일을 꿈으로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모임인가 봅니다. 베개에 저장된 꿈을 다시 보는 기능이 있으니 분석도 수월한 게지요. 영화 감상하는 것처럼.

  신기하네요.

  오백 명 정도 된다던데요.

  그렇게 많이요?

  네.

  꿈쟁이가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에서 도금한 명찰을 꺼냈다.

  스터디 회장이 남긴 겁니다. 관심이 생기면 연락해보세요.

  종이가방에 명함을 넣고 거품 빠진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 뒤 카페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덤으로 받은 명함의 존재는 잊어버렸다.

  2년간 잘 썼다. 베개를 베면 곧장 잠들었다. 매일 많은 꿈을 꾸었는데 승강기에 갇혀 하늘로 솟는 꿈처럼 주기마다 반복해 꾸는 꿈도 있었지만,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지인과 죽은 쥐로 들끓는 하수구에서 어이없이 재회하는 꿈도 많았다. 어젯밤 꿈에 무엇이 등장했는지는 USB 케이블로 TV와 연결해야 알 수 있었다. 로맨스와 무협으로 구분하기엔 주제나 장르에 일관성이 없었다. 좀 더 간단한 기준이 필요했다. 나는 폴더 두 개만 남겼다. 폴더의 제목은 1과 2였다. 1은 다시 볼 꿈, 2는 한 번 보고 지울 꿈만 저장해두었다. 1년쯤 지나자 베개가 꽉 찼고 1에 저장한 꿈도 조금씩 지워야 했다. 새로운 꿈을 꾸려면 늘 자리가 필요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가 머릿속을 휘저은 뒤였다. 잠에서 깰 때마다 정성껏 그린 소묘를 지우개로 지운 듯 머릿속이 뿌옜다. 하지만 멍한 느낌과 별개로 몸은 방금 태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어디 하나 결리는 구석이 없었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토막잠에 취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가 한발 앞섰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내 밤은 평온하다는 생각이 지겨운 생활의 위로가 되었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자취방으로 몰래 침입한 부모님이 베개를 베지 않도록 묵은 이불 밑에 베개를 깔고 출근하는 것도 새 습관이 됐다. 나를 위해 샀는데 다른 사람 꿈까지 감당하긴 싫었다.

  밤의 세계를 쉽게 잊는 사람과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은 삶의 태도부터 차이가 나는 법이다. 나는 사원이 겪는 권태기를 꿈의 연료로 바꿔 소진했다. 별스러운 일을 겪어도 잠이 편해 얼굴이 폈다. 매일 후련한 기분으로 회의실 문을 열었고 깐깐한 상사 앞에서도 쉽게 주눅 들지 않았다. 오늘만 넘기면 날아간다. 오늘만 넘기면 리셋이다. 나는 내일 새로 태어난다. 그 암시가 거만한 용기를 줬다. 먼저 눈을 피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눈을 피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2년 동안은.

 

    수술하려면 부작용부터 살펴야 한다. 수술이 잘 돼도 후유증으로 고생할 확률이 높을 땐 짧은 목숨과 긴 고통 사이에서 어떤 삶을 살지 결정하는 게 좋다. 내게 불행이 닥친 이유는 두 가지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아서다.

 

   베개가 아팠다. 베개는 열 감기에 시달리는 다섯 살배기 꼬마처럼 뜨거웠다. 베개를 베면 덥고, 그간 겪지 않고 미룬 꿈이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안 왔다.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마다 뒤에서 누가 끌어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에스컬레이터가 다 올라갈 때까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무엇이든 잡지 않으면 내 삶이 통째로 넘어갈 것 같았다. 베개에 맞춰 변형된 목이 새로 산 베개와도 합 맞추길 거부한 탓에 매일 한 시간, 세 시간씩 자다 깼다. 한번 깨면 출근할 때까지 눈만 뜨고 누워있었다. 7시엔 일어나야 하는데 어쩌지. 지하철로 내려가다 쓰러지면 어쩌지. 기획서를 엉망으로 써서 깨지면 어쩌지. 그럼 기분이 좆같을 텐데. 어쩌지. 그렇게 어쩌지, 어쩌지 하다 출근했고 한 달 동안 뜬 눈으로 고생하고서야 장롱 밑에 박아둔 계약서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베개가 고장 난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강남 꿈 카페 입구는 항의하러 온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다. 스터디 회원이 오백 명이라던 꿈쟁이의 말이 허풍은 아닌 모양이었다. 참치 집 앞에서 풍선껌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횟집 직원한테 묻자 저 가게 문 닫은 지 몇 주 됐다고 했다. AS가 안 되면 나, 사기당한 건가. 간신히 무리를 뚫고 문 앞까지 나가니 유리문 안에 연필로 쓴 짤막한 안내 문구가 노란 포스트잇에 적혀 붙어 있었다.

    ‘베개가 아프면 오세요. 저는 캐나다에 삽니다.’

  적극적인 사람이 있어야 행동하기도 쉽다. 퇴직 후 낮잠이 늘어 꿈을 저장할 방법을 찾아다녔다는 스터디 회장은 핸드폰에 저장된 지인의 연락처가 세 자릿수를 가뿐히 넘는 마당발이었다. 그는 계속 통화하면서 도망친 꿈쟁이를 잡지 못하면 앞으로 평생 불면증에 시달릴 거라고 호들갑 떨었다. 십 초마다 비음 섞인 목소리로 짜증을 냈는데 그걸 듣고도 상대가 끊지 못한 걸 보면 이쪽이 요직에 앉은 사람인 것 같았다. 회장은 원하는 답을 구한 듯 전화를 뚝 끊었다. 꿈쟁이가 진짜 사라진 걸 알고 한층 더 소란스러워진 회원들이 회장 주변으로 모였다. 사람들은 회장보다 회장의 베개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베개는 천만 원짜리였다. 상위 제품 중에서도 고가품이었다. 회장은 대회에 나가 받은 트로피를 자랑하듯 베개를 두 손에 안고 구경꾼과 적당히 떨어져 있었다. 고작 베개인데 뭐 그리 비싸냐고 묻자 옆 사람이 저건 저장 공간이 무한이라고 했다. ‘무한.’이라고 중얼거렸다. 주변 사람들은 평생 쓰는 건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회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 해. 

  어디로요? 

  캐나다로.

  캐나다까지요?

  놈이 어디 숨었는지 알았어. 확실한 정보야.

  회장은 까맣게 죽은 눈 밑을 비비며 우물거렸다.

  이렇게 살 순 없지 않나. 예전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럴 순 없잖아. 난 못해. 잠은 자야 하니까.

  다른 방법은 없나 싶어 돌아보니 팔짱 낀 회원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월차 낼 거예요.

 

  캐나다 땅을 덮은 구름 속엔 아직 얼지 않은 빗방울이 숨어있었다. 비행기가 난기류를 뚫고 예정된 항로로 진입했을 때 불안장애가 도진 나는 흔들리는 좌석 속에서 비행기가 추락할 것이고 일이 분 뒤에는 천장에서 산소마스크가 쏟아져 사방이 난장판으로 변할 거라 느꼈다. 내 망상을 증명하듯 결이 거친 진눈깨비가 비행기 창문을 때렸다. 베개의 체온은 40도까지 치솟아있었다. 나는 승무원한테 차가운 물 한 컵만 달라고 부탁했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 베개의 가슴을 문질렀다. 어디가 등이고 배인지 몰라 움푹 들어간 부분부터 닦았다. 베개가 까르르 웃었다. 이런. 웃기도 하는구나. 2년 동안 같이 살면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이 들었을까 싶어 고개를 든 찰나 굉음과 함께 불이 나갔다.

  교통사고로 죽는 것보다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이 낮아 사람들은 비행기를 탄다. 빠르고 안전하고 다른 비행기와 충돌해 머리 터질 일도 없으니까. 비행기를 타면 내가 살던 곳에서 정말 벗어난 기분이 든다. 낡은 픽업트럭을 타고 외진 시골길로 달리거나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일과 차원이 다르다. 어딘지 와선 안 될 곳에 온 느낌. 이름도, 전화번호도, 나이도 모르는 애송이한테 함부로 목숨 건 느낌. 만약 고도를 잘못 계산한 신출내기 조종사가 새가 날아다니는 길로 방향을 꺾으면 어떻게 될까? 우울증에 걸려 어떻게 자살할지 고민해온 기러기 떼와 마주친다면. 기러기들이 비행기의 프로펠러로 돌진하자마자 내 삶도 박살 날 것이다. 운 좋게 몸과 머리가 분리되지 않으면 떨어지며 생각하겠지. 공중에서는 구름도 의지하게 된다고. 추락하면서는 뭐가 있긴 있구나 공기가. 하다가 그런데 죽겠구나. 하고는 비로소 살 수 없는 곳까지 떠밀린 걸 알게 될 것이다. 아 여긴 내 집이 아니구나. 하고.

  통계로 보면 세상에 어떤 기적이나 비극도 일어나선 안 될 것 같지만 그날 나는 기적과 비극을 동시에 겪었다. 첫 번째 기적은 불면증이 만든 불안장애가 난기류 속에서 잦아들었고, 공항에 안전히 착륙한 뒤에는 입가에 말라붙은 침을 다른 회원들 몰래 훔칠 수 있었다는 거다. 가방에서 캐나다 국기를 꺼내든 회장은 차를 타고 이동하자며 두 줄씩 서라고 채근했다. 내 곁에 나란히 선 여자가 독일어로 쓰인 책을 읽더니 문장이 걸린 듯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가 질문할까 봐 명령받길 기다리는 이등병처럼 초조한 척 제자리걸음 했다. 버스로 갈아탈 때 옆구리에 낀 베개가 간지러운 듯 또, 까르르 웃었다.

  AS 센터는 신호가 잡히지 않는 산속에 있었다. 이십만 원씩 지출해 일주일 동안 대여한 중고관광버스에 오른 회원들은 창밖으로 펼쳐진 설경에 붙박였다. 저마다 다른 고민을 품은 듯 했다. 눈 쌓인 자작나무 위로 V자 대열에 속한 까마귀들이 날아갔다. 가시나무처럼 낮고 둥글게 쳐진 철조망이 양옆에서 조금씩 길을 좁혔다. 버스가 더 진입하지 못하자 회장은 두 손을 말아 확성기 대신 쓰면서 목청껏 외쳤다. 

  좌표를 보니!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삼십 분이면! 갑니다! 짐 챙기고! 따라 오세요!

 

  아니 저기, 여보세요. 그렇게 걷지 말고 쉬면 안 될까요. 우리 오래 걷지 않았나요. 어쩜 그리 체력도 좋으세요. 눈이랑 산 많은 강원도가 고향이신가요. 캐나다로 올 줄 알았나요. 베개가 아플지 몰라 미리 체력 단련하신 건가요. 그게 아니면 삼십 분 째 쉬지 않고 걸을 순 없잖아요. 저기 보이는 산장에서 숨 좀 고르다 가죠? 이렇게 말하는데 듣는 척도 안 하시네요. 바람이 부는데 바람도 모르시네요.

  눈보라가 쳐도 일행은 멈추지 않았다. 언덕만 넘으면 과수원이라도 나올 것처럼 서둘렀다. 다들 회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고작 베게 하나 사는데 천만 원이나 썼으니 그만한 재력을 지닌 부자면 무모한 장르에 목숨 걸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걸까. 나는 나만 불안해 불안했다. 내가 모르는 장소로 가는 게 불안했다. 보증 없이 열만 내는 것이, 걷고 또 걸어봤자 낮고 따뜻하고 한 뼘만 한 풀로 덮인 평지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했다. 마지막 회원의 빨간색 등산 가방이 내 앞에서 멀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들을 부르려 했을 때 비극이 닥쳤다.

 

  남만 따랐을 뿐인데 나는 왜 잘못된 곳으로 굴러떨어졌을까. 낙오.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지면에서 5m 정도 떨어진 낭떠러지였다. 올라가는 길이 높지도 않았다. 하지만 구르며 정신을 잃은 탓에 일행과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해병대 출신인 산악인끼리 맨몸으로 생존하는 다큐멘터리에서는 긴 작대라도 꺾어 눈앞의 눈을 찌르며 걷는다. 낭떠러지에 낀 가짜 눈길을 구분하려는 것이다. 그걸 보고도 미끄러졌으니 학문과 삶은 일치하지 않는다던 어느 철학자의 말이 옳은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이 뻐근했다. 뻐근한 것만 빼면 심각한 상처는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는 걸 확인한 뒤엔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베개는 펄펄 끓어 베개 주변만 눈이 녹아있었다.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용머리처럼 튀어나온 바위 너머로 베개와 나일론으로 만든 등산용 가방을 던졌다. 울퉁불퉁한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조금씩 기어올랐다. 지표면으로 올라오니 역시 일행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지붕에 캐나다 국기가 꽂힌 산장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밟을 때마다 무릎까지 젖어 드는 눈을 푹푹 헤치며 가벼운 눈보라 속에서 한줄기 태양처럼 펄럭이는 캐나다 국기를 좌표 삼아 걸었다. 산장엔 아무도 없었고 누가 피워놓은 불이 주물난로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외엔 사람이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사슴이나 토끼를 잡으러 온 전문 사냥꾼이 방금 떠났을지도 몰랐다. 누가 왔던 곳이라고 생각하자 기운이 났다. 네 다리 모두 삐걱대는 나무 의자 등받이에 젖은 옷부터 널었다. 안과 밖이 골고루 그을린 주물난로와 가까이 붙어 앉았다. 팬티만 입었는데도 따뜻했다. 체온이 점차 회복되면서 낙오된 불안감도 흐물흐물하게 녹았다. 나는 마른 옷을 입고 탐색에 나섰다. 소파 팔걸이와 푹 죽은 쿠션 틈에 뜯지 않은 육포 봉지가 소가죽 같은 더께로 덮여있었다. 끈적끈적한 비닐봉지를 잡아 뜯었다. 도서관에 잠든 낡은 소설책의 표지 같은 육포를 우적우적 씹으며 가방에 든 초코바와 물은 최대한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다. 늑대울음이 자작나무숲을 돌아 얇은 유리창을 때리고 사라졌다. 그제야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온 게 체감됐다. 담배라도 피울까 했지만 올봄부터 금연한 게 떠올랐다. 미련한 놈. 책도, 텔레비전도, 아마추어 VJ들이 주말마다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는 외계인에 관한 유튜브 영상도 시청할 수 없는 곳이다. 핸드폰은 배터리가 다 된 지 오래다. 어차피 신호도 터지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그동안 내 꿈은 베개가 먹었다. 베개가 아파 꿈을 먹질 못하니 내가, 꿈속에 있었다. 2년 만이었다. 영일이다. 영일이가 소파에 앉아 훌쩍훌쩍 운다. 새벽 3시고 우리는 자러 왔다. 나는 너무 지쳤다. 영일이가 울어도 달랠 수 없을 만큼 지쳤다. 영일아 억울해도 그냥 자. 아니면 내가 나갈까. 네가 우니 떠나고 싶어져. 네가 너무 밉게만 보여 영일아. 나는 영일이가 우는소리를 참지 못한다. 청바지를 입고 호텔 복도로 나간다. 나오자마자 좁은 통로로 눈보라가 친다. 여긴 내가 예상한 장소가 아니라고, 완전히 반대로 나왔다고,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나갔어야 했다고 느껴 돌아보니 나온 문은 온데간데없고 붓으로 그은 듯한 수평선만 펼쳐져 있다. 밤이구나. 나는 그제야 영일이가 어디로 갔는지 허둥대며 찾는다. 하지만 여기선 우리가 사랑한 공간이 너무 멀다. 어깨에 짐을 진 보따리 행렬이 지평선과 맞닿은 눈길로 차분히 걸어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행상인이 아니라 아까 놓친 회원들이었다. 나는 무리에 합류하려고 팔을 휘저으며 내달렸다. 대열 꼬리 부분에 무거운 배낭을 이기지 못해 휘청대는 사람이 보였다. 겨우 따라잡아 그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영일이었다. 내가 호텔에 버린 영일이. 영일이는 짐이 무거워 더는 걷지 못하고 눈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멀어지는 일행을 보면서 자꾸 일어서려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영일이는 저기로 간다고 했다. 저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가야 할 곳이라는 답만 되돌아왔다.

  어디든 도착해야 눕지 않겠니. 누워야 잠을 자지. 서서 잘 순 없지 않겠어? 

  동사한 토끼 두 마리를 허리춤에 단 스터디 회장이 무리에서 이탈해 시적시적 걸어와 잔소리했다.

  이보게. 여기서 뭐 하나. 자네 때문에 기다리잖아.

  영일이는 낙담한 표정으로 돌아보더니 가방을 고쳐 맨 다음 땅을 짚고 일어섰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다 펴지기도 전에 등껍질에 물이 찬 거북이처럼 나동그라졌다. 나는 영일의 어깨를 누르며 어떻게 이걸 다 짊어지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회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 정도도 못 메면 사람 아니야. 사람이면 이 정도는 메야 하는 거야.

 

  침입자다. 밖에서 무엇이 문을 긁고 있다. 사람이면 이 추위에 밖에서 손톱으로 문을 긁진 않을 거다. 문을 부수고 들어오거나 목이 쉴 때까지 도와달라고 외치다 기운이 빠져 얼어 죽겠지. 그게 인간이니까. 그러니 꾸준한 열정과 리듬감으로 문을 긁는 저것은 사람이 아닐 게야.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추웠다. 손을 뻗어도 베개가 잡히지 않아 이리저리 몸부림쳤다. 고열에 시달리는 베개가 발에 걸렸다. 나는 조개껍데기가 자신의 배꼽을 보고 웅크리는 것처럼 베개를 끌어안았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밖에서 나는 소리가 거슬렸다. 무엇인지 몰라도 들어오면 꽤 골치 아플 것 같았다. 눈에 반사된 달빛이 창을 투과해 어두운 실내를 푸르게 밝혔다. 얄따란 창문은 헐거운 창틀과 맞부딪히며 떨었다. 나는 베개를 안고 일어섰다. 인간에게 치명적인 병을 옮기는 벼룩에 물린 듯 속이 쓰리고 추웠다. 하지만 문 앞에 당도할 때까지 뜨거운 열기로 내 품을 덥히는 베개의 온기 덕분에 두려움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문과 문지방의 좁은 틈새로 둥근 갯과 짐승의 주둥이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늑대였다.

  동물은 치밀하다. 먹고 살아야 하니 더 그렇다. 복지정책이 잘 된 유럽이나 희생이 가훈인 가족처럼 누가 알아서 생고기를 잘라 입에 넣어주는 법이 없다. 힘이 없으면 죽어야 한다. 매정한 듯 들리지만 나중 가면 훨씬 이롭다. 지구한테든 늑대한테든. 그런데 저것은 왜 자꾸 들어오려는 걸까. 여긴 먹을 게 없는데. 뱃속에 든 내장이 기생충처럼 우글거리는 사슴이라고는, 먹을 것이 총알밖에 없어서 총구를 물고 방아쇠를 당긴 시체라고는, 하다못해 가죽처럼 칙칙한 육포도 내가 다 씹어 먹었는데. 어쩌면 놈은 내가 굶어 죽는다고 확신한 게 아닐까.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입맛부터 다시느라 마음이 급해진 것 아닌가. 언제든 죽긴 죽을 테니. 언제든 여기서. 죽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진 걸까. 내 눈과 혀가 구더기로 득시글해지기 전에 한입이라도 베어 물고 싶어서. 그럼 대체 

  

  뭘 달라고.

  하찮은 놈아.

 

  쓸모없는 놈아. 그렇게 긁으면 뭐 나올 것 같으냐. 손도 없는 네가 내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물고 달아날 성싶어? 봐라. 여기 내가 버린 게 들었다! 그런데 이놈이! 아프고! 먹을 것도 없고! 시발 산장에 전기도 안 들어오는데 너무 추워서 입김까지 어는 곳을 피난처랍시고 지은 놈이 대체 누구냐! 가! 가! 이 개새끼야! 없어! 있어도 못 줘! 그러니 꺼져! 꺼지라고!

문을 때려 부술 듯 두드리자 늑대가 깨갱 하고 눈밭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잃어버린 열기를 보상받듯 베개를 꼭 껴안았다. 

 

괜찮아.

 

다시

괜찮아.

 

하자, 놀랍게도 베개의 체온이 조금 식은듯하다. 여기서 따뜻한 건 베개밖에 없는데 이대로 베개가 괜찮아지면 베개는 살고 나는 죽을까. 이대로 괜찮아져서 얼마 남지 않은 난로 속 장작까지 까맣게 수그러들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은 뒤였다. 가구가 되기로 작심한 듯 벽으로 돌아선 회원들이 보였다. 첫날엔 무시했다. 먼저 떠난 사람이 돌아왔을 리 없으므로. 지금 미치기에는 내 정신이 지나치게 정상이었다. 가방에 남은 초코바를 아껴 먹을 만큼 말짱했다. 그런데 둘째 날이 되어도, 셋째 날이 되어도 사람들은 꼼짝 않고 벽만 바라본 채 서있었다. 점차 강화된 호기심이 넷째 날 두려움을 이겼다. 나는 벽으로 돌아선 사람들을 한 명씩 돌려세웠다. 공항에서 버스로 갈아탈 때 스치듯 본 얼굴이었다. 모두 열 명이었는데 그 중엔 스터디 회장과 독일어책만 들들 볶아대는 여자도 섞여 있었다. 회장은 밀랍으로 만든 인형처럼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정말 인형인가 싶어 눈동자를 찌르려 하자 그제야 뒤로 움찔 물러나며 낄낄 웃었다. 다른 회원도 뭐 거대한 몰래카메라 이벤트라도 성공한 양 박장대소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따지지도 못했다. 회장은 나를 놀랠 셈이었다며 눈물을 훔치더니 난데없이 스터디를 하자고 했다. 산장에 고립된 사람끼리 할 게 뭐 있느냐면서. 회원들은 수건돌리기라도 할 셈인지 둥글게 자리 잡고 앉았다. 하나같이 싱글벙글했다. 졸업생끼리 MT라도 온 분위기였다. 나는 아직도 독일어만 중얼대는 여자 옆에 쭈뼛쭈뼛 앉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눈길만 보고 걷던 사람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래도 되나 싶은, 이건 아닌 것 같은, 그만 가자고 해도 듣지 않는 단호함이 서린 등이었다. 이번에는 그 등이 해쳐선 안 될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나는 다섯 사람씩 짝지어 밖에서 젖은 나뭇가지라도 주워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싶었다. 누군 물을 끓이고, 먹을 게 얼마만큼 남았는지 파악하고, 구조대의 헬리콥터가 올 때까지 난로 속 불이 꺼지지 않게 지키고 앉아있을 사람 한 명은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저마다 살 방법은 있는가보다고, 여기서 살아나갈 방법 하나씩은 염두에 둔 모양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화기애애할 순 없을 거라고 혼자 착각해버렸다. 회장은 덜덜 떨면서 내 베개를 안고 있었다. 내가 그건 내 거라고 말하기 전에 그가 운을 띄웠다.

  이 베개가 말입니다. 움푹 팬 곳으로 뒤집히면 각자 인상 깊었던 꿈부터 하나씩 말하는 거로 합시다. 한 명당 1분씩 말합니다. 반대로 뒤집히면 오른쪽 사람한테 기회가 넘어갑니다. 10초 이내에 말하지 못해도 기회는 없습니다.

  회장은 윷을 던지듯 베개를 던졌다. 처음부터 부드러운 쪽이 나왔다. 회장이 쪼글쪼글한 목젖을 엄지와 검지로 쓰다듬더니 미리 생각한 꿈이라도 있던 양 막힘없이 말했다.

  실내체육관만한 하수구였습니다. 천장이 아파트 3층 높이였어요. 전쟁이 났을 때 대통령이나 고위 공무원이 대피하려고 지은 방공호 같았지요. 거기서 어떤 청년과 만났습니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름이…….

회장이 머뭇거리자 그의 오른쪽에 앉은 남자가 대신 말했다.

  영일이.

  그는 그 말만 보탠 뒤 손톱으로 나무 바닥을 긁었다. 회장이 이어서 말했다.

  영일이었는데 공시 준비하다 애인과 헤어지고 고시원 주인은 월세 올려 달라 하고 겨우겨우 구한 주말 아르바이트도 나이 많다고 잘리고 스트레스 받아 잠도 안 오니 공황장애까지 걸려서 뭐 여러 가지로. 아파서 내려왔다고 하더라고요. 가난했죠. 거긴 가난한 놈만 오는 곳이었어요. 나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곳인데 말이죠. 영일이가 내 앞길을 막아선 상태로 자꾸 자기 목덜미를 쓰다듬는 통에 내 관심은 온통 그 청년의 구불거리는 뒤통수에 쏠렸습니다.

  나는 회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영일이라는 이름이 불편했다. 회원들끼리 영일이의 이름을 공유하는 상황도 낯설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영일이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만, 회장의 차례가 끝난 뒤 자신의 순서가 된 남자도 내가 아는 영일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와 영일이는 하수구에서 만나 친해졌다. 잠이 안 온다는 소리를 듣고 꿈 카페를 소개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이 카페로 들어가 계약서에 서명까지 하고는 돈이 없다는 것 아닌가. 돈이 없는데 왜 따라왔느냐고 묻자 서명이라도 해보고 싶었더란다. 어떻게 계산하는지 알아야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뭘 사게 될 적에. 나는 옆에 앉은 여자한테 물었다.

  이거 다른 사람과 꿈이 공유되는 겁니까?

  모르셨어요?

  누구 와요?

  당신이요.

  제 꿈이요?

  네.

  나는 마주 앉은 회원을 바라보았다.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스터디가 진행되는 동안 맞은편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영일이었다. 영일이가 건너편에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겨울 광장에서 코트를 벗은 것처럼 오싹해졌다. 영일이가 베개를 굴렸다. 둥근 쪽이 나왔다.

  영일이는 대학 시절 빚보증을 서준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영일이가 빌려준 돈을 다 갚았습니다. 좋은 직장에 다녔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베개를 사려면 돈이 필요한데 영일이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한테 돈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친구는 호텔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현관에 가스총을 찬 경비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려면 출입증이 필요한 고급 호텔이었습니다. 영일이는 로비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호텔 보이한테 쫓겨날 것 같아서였습니다. 친구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좋은 옷만 골라 입었는데 숨기지 못한 가난이 자신의 얼굴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예약한 객실에 먼저 들어가야 할 것 같았지요. 숙박부에 서명할 때 꿈 카페에서 연습한 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후 6시에 친구가 왔습니다. 영일이는 조기 퇴근 한 친구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두 사람은 밤새 섹스했습니다. 새벽이 되었습니다. 영일이는 친구한테 잠이 안 온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다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도 잠이 안 와 미칠 지경이라면서. 영일이는 목을 주무르며 잠이 안 오면 베개를 바꿔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아무래도 네가 지긋지긋해서 그런 것 같다고 네가 사라지면 잠이 올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영일이는 섭섭한 마음이 들어 그럼 나를 왜 불렀느냐며 울었습니다. 친구가 섹스하고 싶어서 불렀다고 말했습니다. 개새끼. 그 말을 하지 못해 영일이는 집으로 돌아가 자살했습니다.

  베개가 돌고 돌았다. 내 차례였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영일이가 계속 쳐다봐 그랬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회장이 말을 끊었다.

  시간 초과입니다. 오른쪽 분께 기회가 넘어갑니다.

  현금인출기에서 뺀 보증금을 가방째 뺏긴 기분이었다. 어쩌면 지금이 죽은 영일이한테 고백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옆 사람이 베개를 가져가려 했다. 나는 그보다 앞서 베개를 가로챘다. 굴렸다. 굴리고 또 굴렸다. 베개는 구를수록 느려졌다. 마지막엔 둔탁한 소음까지 내며 투박하게 멈췄다. 베개는 이제 웃지 않았다. 나는 저것이 진짜 죽었는지 미심쩍었다. 그래도 베개가 내 꿈에 등장한 영일의 그늘로부터 어떤 문장을 이고 재우느라 닳았는지 궁금해 계속 굴리기만 했다. 영일이는 1번 폴더에도 2번 폴더에도 없었다. 보이면 지웠기 때문이다. 내가 버렸으니까, 버린 걸 또 버리는 게 뭐 나쁘냐 싶었다. 영일이는 스펙이 후졌다. 자존심만 세서 어쩌다 들어간 회사도 육 개월 다니고 때려치웠다. 길에서 오천 원이라도 주우면 이천 원은 로또하고 나머지는 저금했다가 만 원쯤 모여야 커피전문점으로 불러 한 잔씩 사는 인간이었다. 영일이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우리가 헤어지지 않으면 좋겠다면서 친한 척 굴었다. 나는 호텔에서 기본으로 제공되는 콘돔을 쓰고는 언젠가 영일이와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까지 가난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원하는 회사에 입사한 다음 몇 번 더 만났고 그게 끝이었다. 나는 예고 없이 전화번호를 바꿨다. 무탈하게 잘살고 있었는데 2년도 더 지나 이름도 까먹은 대학 동창이 영일이가 자살했다고 전해왔다. 나는 영일의 사연으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친구의 정의감에 소름이 끼쳤다.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을 정리하면서 인간의 무게를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영이었다. 영이라는 숫자만 떠올랐다. 그런데 영이 쌓이고 쌓이면 기압이 될 줄 몰랐던 거야. 기압도 무게라는 것을, 내가 나 아닌 무게로 살아있는 걸 잊었던 거야. 지붕에 쌓인 눈이 물기둥으로 녹아 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 이게 내가 버린 너의 무게일까. 영일이는 맞은쪽에서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억울해졌고 갑자기 화가 났다. 영일이가 나만 봐서 그랬다.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한순간 말이 없어져 그랬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무언가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울컥하고 쏟아지기 직전의 말들이 내 손에 담겨있었다.

 

  그래. 이 말이 듣고 싶은 거지. 내가 다 잊었다는 말. 나는 다 잊었다. 이제 와서는 네 코가 높았는지 낮았는지 어금니는 몇 개였는지 우리가 싸구려 모텔에서 서로의 입안을 들여다보고는 우리 안에 썩은 것들이 많으니 다 잡아먹어야겠다며 시시덕댄 밤도 잊었다. 그게 잘못이면 빌겠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있다. 네가 나를 잊은 게 정말이냐? 나랑 헤어지고서 죽은 게 정말이냐? 네 몸이 가루가 됐고 너라는 덩어리가 이 세상에서 지워진 것도 정말이냐. 묻겠다. 정말이냐. 뭐가 무거웠냐. 뭐가 무거워서 그랬냐. 네가 뭔데. 너보다 무거운 사람도 많은데 너는 너도 못 졌냐.

  무거운 게 아니고.

  맞은편에 앉은 영일이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무서워서.

  뭐가?

  사람들이.

  그럼 넌 죽어. 혼자 살 순 없으니까. 너는 죽어. 빚도 많은데 돈까지 없으면. 너는 죽어서 죽어. 죽으면 계속 죽는다고. 알아? 죽은 사람은 죽는 것밖에 못 해. 죽는 게 다라고.

  영일이가 웃으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너는 살아서 다행이다.

 

  내가 살까. 나는 못 살 것 같은데. 마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지방이라고는 내장지방이 다인데. 먹어도 찌는 체질이 아니어서 따로 비축한 영양분도 없이 내가 살아? 어떻게. 여기서? 캐나다인데. 진심이니? 진심이어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 전엔 안 되지. 제대로 사는 방법도 몰랐으면서 내가 살 거라고 단정 지으면 안 되지. 너처럼 무턱대고 긍정적이면 누가 살게 둔다니. 너는 죽었으니 좋겠다. 나는 그것도 못하는데. 그래서 시대적으로 쪼다가 내가. 시발. 그래도 네가 진짜 그렇게 갈 줄은 몰랐어. 다시 만나면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너도 좀 살지 그랬느냐고.

 내 오른쪽에 앉은 여자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들고 읽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더니 한마디 했다.

그래서. 자랑스럽나요? 이렇게 죽게 된 것이.

  뱃속에서 비비 꼬인 장기가 식도로 넘어오는 것처럼 메스꺼웠다.

  ‘아니요.’라고 말했다. ‘아니요.’라고 말했는데도 메스꺼웠다. 그래서 ‘아니요, 아니요, 전혀요.’라고 했다. 나는 속이 쓰려 식어 빠진 베개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여자가 당황해 내 등을 두드렸다. 

  나중에 꿈에서 만나면 그 꿈은 지우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회장도 어찌할 바를 몰라 덧붙였다.

  그래. 나도 안 지울 게. 내건 무한이라고.

  졸지에 희극의 구경꾼이 된 다른 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구조대가 왔다. 조난 신고를 받았다고 했다. 구조대원은 산장에 숨었으니 운이 좋았다면서 밖이었으면 동사했을 거라고 을렀다. 헬기에서 투하된 모포가 내 어깨에 둘렸다. 실내로 들어온 몇몇이 산장 구석에 오줌을 갈겼다. 오줌은 흐르지 않고 굳었다. 나는 모포로 싸여 일주일 동안 단식한 사람처럼 인도됐다. 본부와 연락한 대원의 말로는 구조된 사람이 나뿐인 것 같았다. 구조대원이 건넨 코코아를 마시며 다른 사람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난로 주위에 열 명가량 있을 텐데 못 찾았느냐고, 안 보이면 십 초만 눈을 감았다가 떠보라고, 아마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을 거라고. 무전기를 끈 대원이 코웃음 치더니 꿈이라도 꿨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반박하는 대신 묽게 탄 코코아를 한 모금 더 삼켰다. 구급대원은 나를 헬기로 이송할 모양이었다. 헬기와 연결된 간이침대에 눕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런데 오른쪽에서 안전띠로 내 몸을 고정하는 대원의 얼굴이 익숙했다. 꿈쟁이었다. 꿈쟁이가 쓴 안전모가 벗겨지며 말리는 대원과 치받으려는 나 사이에 실랑이가 생겼다. 꿈쟁이는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떠나더라도 제대로 된 주소는 남겼어야지!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디로 연락하라는 거요! 베개가 아팠다고요! 아팠다고요! 내 베개가!

  하하. 그랬군요. 어린아이들은 자주 아프죠. 베개는 괜찮습니까.

  나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판정패 당한 권투선수처럼 주먹을 쥔 채 말없이 고개만 떨궜다. 꿈 전문가는 어슬렁거리며 산장을 둘러보더니 잠시 후 새로 들어온 시신 명단을 확인한 장의사처럼 말했다.

  베개가 죽었군요.

  그래요. 그런데 정말 죽었습디까?

  네. 완전히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장례식을 치러야 할 것 같군요. 소각하는 분도 계시지만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베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던 것 같으니까요. 따라오시죠. 

 

회장의 베개는 불치병이었다. 암이 겉감까지 번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AS 센터 인근 화장터에서 베개를 소각했는데 어떤 회원이 꿈이 아까워 어쩌느냐고 묻자 꿈은 컴퓨터로 옮겨놔서 괜찮다고, 다음에는 더 튼튼한 걸로 사 써야겠다며 맥없이 웃었다고 한다. 회장은 소각장 굴뚝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를 등진 채 반으로 쪼갠 대나무끼리 이어붙인 배가 얼지 않는 강에서 둥둥 떠내려오는 걸 보고 갔단다. 그게 벌써 일주일이나 됐다고.

 

  베개는 갔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는 AS 센터 옆에 마련된 작별의 다리로 향했다. 거기서 넘실대는 물결을 타고 멀어지는 베개를 바라보았다. 다리에 선 많은 사람들이 하구로 떠내려가는 나무배를 보며 울고 있었다. 나는 내가 띄운 뗏목이 언제쯤 뒤집힐지 생각해보았다. 그게 오늘은 아니었으면 했다. 멀리서 꿈쟁이가 다가와 인사차 물었다.

  베개가 많죠?

  네.

  당신 베개는 저기 있군요.

  잘 가네요.

  잘 가나요?

  잘 가는 겁니다.

  건강히 살고, 반가운 인연과 만나고, 각자 원하는 걸 하다가 외로워지면 연락해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50살쯤 되었을 때 같이 살면 어떨까 싶은 관계. 그걸 못해도 좋은 관계. 그래서 네가 죽어도 괜찮은 관계. 내겐 그런 친구가 있었다. 너무 아파 건강했으면 했던, 마음이 병든 사람이. 그래서 내가 많이 때리고 버린 친구가.

  꿈쟁이가 바지 주머니에서 부러진 담배를 꺼내 피웠다.

  다치지 않게 아끼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이겠죠.

  네.

  아꼈습니까.

  아니요.

  아.

  아니요. 아니요. 아끼지 않았는데요.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울지 마세요.

  네.

  울지 마세요.

  네.

  다음에 잘 쓰면 됩니다.

  하지만 끝났어요. 저 베개는 끝장났다고요.

  꿈쟁이는 입에 문 담배로 새 담배에 불붙여 건넸다.

  하나 더 사실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일이의 베개는 고시원에서 사라졌다. 가족도 없었으니 주인이 치웠을 거다. 가까운 쓰레기장으로 보내져 까치들의 부리에 쪼이다가 다른 베개와 함께, 한때 누군가의 침이나 이가는 소리, 일이 분에 한 번씩 끊겼다가 이어지는 코골이까지 받아낸 그 많은 쓰레기와 불태워졌을 것이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벽처럼 우아하고 힘찬 영으로. 나는 강에게 묻듯 말했다.  

  가난하면 어떡하죠.

  형편에 맞는 걸 사야죠. 십 원어치만 골라 써도 우리한테 상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십 원짜리 베개도 있나요.

  찾으면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동안 잘 주무셨습니까.

  네. 그랬던 거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지금,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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