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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의 탑(餓塔)

판하이톈(潘海天)

해 질 무렵, 그들은 탑을 발견했다.

순백색의 탑은 몹시도 높았다. 길고도 뾰족한 탑의 끝이 산봉우리가 드리우는 컴컴한 그림자를 뚫고 삐죽이 솟을 만큼 높았다.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세 개의 태양이 탑 위로 낙조를 뿌리자, 탑은 검푸르게 가라앉은 사위 속에 자리한 가늘고 기다란 빛줄기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들은 그 빛줄기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침묵에 잠긴 희망을 우러러보듯이.

이곳에서 다 함께 죽음을 맞이하리라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그들은 두 주일이나 쉬지도 멈추지도 않고 걸었다. 널따란 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안 체력 부족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버리고, 쨍쨍한 햇빛을 견디지 못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자들을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흉악한 짐승이 나타나 일행 가운데 가장 통통하고 먹음직스러운 자를 골라 물어갔고, 생존자들은 거죽만 남은 심각한 영양 부족 상태로 좀비처럼 걷고 또 걸었다.

두 주일 전, 그들이 탄 우주선이 사막에 추락했다. 그 사고로 승객 절반이 즉사했다. 조종사 역시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고깃덩이로 변했다.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어지는 절망의 나날 동안 분노에 빠진 생존자들 손에 상상하지도 못할 참혹한 형벌을 받았을 테니까.

찐득한 피와 짓이겨진 살덩이로 엉겁이 된 우주선의 잔해에서 엉금엉금 빠져나와, 2만 피트 상공에서 곧장 땅바닥에 처박힌 충격과 히스테리에서 겨우 벗어나,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자신에게만 자비를 베풀어준 하느님을 찬미하고 나자, 생존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들어 끝 모르게 펼쳐진 망망한 사막을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득한 먼 곳까지 죽 늘어선 크고 작은 바위들은 작렬하는 세 개의 태양 빛에 해골처럼 은빛으로 반짝였다.

생존자들은 침묵에 빠졌다. 하느님은 그들 중 절반을 곧장 천국으로 데려가셨지만, 그 나머지도 무사히 놓아줄 마음은 없으신 모양이었다.

우주선 승무원 대부분은 추락할 때 죽었으니, 승객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날 수밖에 없었다. 특수 부대 출신의 대위가 자연스레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잔해를 꼼꼼히 살핀 뒤 생존자들에게 알렸다. 무전기가 망가져 구조 요청을 보내거나 위치를 알려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빨라도 석 달 후에나 구조선이 올 것이다. 물론 척박하고, 황량하고, 거대하기 짝이 없는 이 행성에서 조난자들을 수색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빼고.

“쓸모 있는 물건을 찾아서 다 같이 나누도록 하겠소. 어려운 때이니 모두 한 마음으로 일치단결해야만 살아날 수 있소.”

대위가 말했다. 굳세어 보이는 잿빛 눈동자와 근육질의 목, 탄탄한 가슴을 가진 듬직한 그의 모습을 보자 생존자들은 믿음이 샘솟았다.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신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칼뱅 교파의 신부가 말했다. 이제 그는 생존자들과 하느님을 잇는 유일한 끈이었다.

“굳게 믿으면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생존자들은 열과 성을 다해 우주선의 구석구석을 뒤졌다. 심하게 망가져 승객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맨 앞의 선실도 빼놓지 않았다. 그곳은 마치 딸기 아이스크림을 믹서에 넣어 마구 갈아놓은 것 같았고, 수색을 맡았던 승객들은 그 후로 끊임없이 구토하는 악몽을 꾸었다.

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찌그러진 파이프에서 꾸르륵꾸르륵 소리를 내며 냉각수가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름 냄새가 조금 났지만 독성은 없었다.

먹을 것도 제법 있었다. 여행자들이 이곳저곳의 행성에서 가져온 지역특산품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라도 예순 명이 석 달 동안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물며 생존자 중에는 남들보다 식성이 좋은 것이 분명한 뚱뚱한 자들이 꽤 많았다.

으스러져 죽은 어느 순례자의 가방에서 낡고 너덜너덜한 지도가 발견되었다. 대위와 우주선 보일러공, 휴가 차 여행을 나온 화학 교수, 그리고 신부까지 총 네 명은 나침반과 계산자를 사용해 한참을 끙끙댄 끝에, 생존자들을 임시 대피소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그 대피소란 어느 유명한 금욕주의 참선 교파의 수도원으로, 지도에서 유일하게 인적이 있는 장소로 표시된 지점이었다.


열 나흘의 강행군이 끝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수도원의 탑을 볼 수 있었다. 탑은 머나먼 하늘 끝자락에서 석양을 받아 금빛 광채를 덧입고 서 있었다.

반짝이는 석양 아래에서, 생존자들은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비쩍 마른 다리가 뽀얗게 모래 먼지를 일으키고, 바짝 타들어 가는 폐 속에서 거친 호흡이 삐져나왔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몸을 곧추세우고 머리를 푹 숙인 채 쓸모없는 등짐과 텅텅 빈 물병을 내던지면서, 끈 떨어지고 찢어진 부츠가 벗겨지건 말건 맨발로 펄펄 끓는 모래밭을 밟으며 나는 듯이 달렸다.

흉포한 괴수가 뒤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똑똑히 알고 있었다. 태양이 서산으로 질 때마다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남루한 차림에 지치고 고개를 푹 숙인 여행자들 가운데 희생자 한 명을 골라가곤 했다. 두 주일 동안 열네 명이 당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괴수가 누구를 희생자로 삼을지 모르는 판국에 제일 뒤에 있는 자가 당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은 누구나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그 누가 살아날 희망을 코앞에 두고 희생당하고 싶겠는가?

그들은 앞다투어 달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내달리는 침묵의 광기는 대오에 있던 모든 이들을 휘감았다. 젊은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부는 지독한 수치심을 느끼며 달렸다. 달리면서 다윈의 잔인한 생존 법칙을 떠올렸다. 괴수가 출현한 이후로 종교와 인간의 존엄성은 어마어마한 치욕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제일 뒤로 쳐지지만 않는다면 살아날 희망이 있었으니까.


처음 출발했을 때만 해도 일행은 제법 규칙이 서 있었다. 길을 찾거나 부녀자와 다친 이를 돌보거나 번갈아 가며 야간 파수를 서는 등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모두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고 서로 양보하며 마치 휴가를 맞아 모험을 즐기러 온 배낭 여행객처럼 행동했다.

괴수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괴수가 나타나는 순간, 가녀린 문명의 연결고리는 박살이 나고 질서는 무너졌다. 오로지 살고자 하는 본능만이 문명인들의 몸을 지배했다. 그날 밤 캠프에서, 젊은 신부는 덩치 큰 보일러공이 허둥지둥 달아나며 텐트 두 개를 짓밟고 뚱뚱한 여자를 바닥에 고꾸라뜨리는 장면과 화학 교수가 제 몸을 불태우기라도 할 듯이 모닥불로 뛰어드는 광경을 당혹스러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대위는 멀리서 괴수를 향해 레이저 총을 두 발 쏘았지만, 그 후로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모두 숨을 곳을 찾느라 야단법석을 떠느라, 아름답던 배낭 여행객들의 휴가는 혼란의 도가니로 변모했다.

괴수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이 성운(星雲) 전체를 통틀어 몹시 보기 드문 식인 괴수로, 속도는 귀신같이 빠르고, 둥글게 휘어진 날카로운 발톱은 비수처럼 번쩍였으며, 쇠도리깨 같은 꼬리는 독사의 혀처럼 끝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그 외양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인간에게 뼈에 사무치는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공격을 시작하면 놈은 마구잡이로 덮치고 물어뜯었고, 연민을 보이거나 포기하려는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지난한 괴로움 속에서 유일하게 찾아낸 기쁨이라면, 괴수가 최선의 먹이를 고를 줄 안다는 사실이었다. 놈은 생존자 가운데 가장 뚱뚱한 자, 남들보다 많이 먹는 데다 걸음도 느린 자들을 차례차례 잡아갔다. 덕분에 대오에는 건강하고 의지가 굳건한 젊은 남녀만 남았고, 재촉하지 않아도 행군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대위는 대오의 가운데쯤에 있었다. 레이저 총을 단단히 움켜쥐고, 목을 꼿꼿이 펴고, 숨을 길고 고르게 내쉬면서, 서두르지도 미적거리지도 않고 적당한 속도를 유지했다. 대오에서 벗어나는 것은 위험했으니까.

그는 일행의 혼란스러운 발소리 사이로 또 하나의 소리가 섞여드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두툼한 살집이 모래 위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였다. 짐승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불안한 열기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대위는 달빛 아래에서 소리 없이 자신들을 뒤쫓는, 털이 반질반질한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넓적하고 커다란 얼굴을 덮은 곱슬곱슬한 털들이 맞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비스듬하게 찢어져 유난히 흉악해 보이는 큼직한 눈은 반쯤 감긴 채 아무런 소리도 없이 대오에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괴수가 또다시 나타나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자들에게는 놈에게 대항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높은 곳에서 경멸하는 눈길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괴수의 모습은 대위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빌어먹을, 언젠가 네 놈을 해치워주지.

대위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레이저 총을 꽉 움켜쥐었다.

일행은 마구 내달리며 골짜기의 입구와 골짜기를 에워싼 숲을 살펴보았다. 골짜기 안에는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선 조그만 광장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자그마한 분수대도 있었다. 이교도들이 모시는 모녀신(母女神)이 분수대 한가운데 만들어놓은 연꽃잎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보름달처럼 둥그런 얼굴에는 자애롭고 신비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일행은 광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겨우 쉴 곳을 찾은 이들은 바닥에 털썩 쓰러져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하고, 울음도 웃음도 잃은 멍한 얼굴로 굳은 듯이 서 있기도 했다.

하지만 광장의 집 중에는 불이 켜진 곳도,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나는 곳도 없었다.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달려 나와 그들을 반겨주지 않았다. 살던 사람들이 떠나고 이미 폐허가 된 수도원이었던 것이다. 희망은 비누거품처럼 몽글몽글 하늘 위로 솟아오르다가 ‘뻥’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우는 것, 그저 우는 것밖에 없었다.

일행은 바짝 붙어 앉아 하룻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자 서로 다른 빛깔을 띠는 태양 세 개가 차례로 떠올랐다. 노란색 태양이 제일 먼저 골짜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였고, 그다음은 가장 큰 파란색 태양이, 마지막으로 열기가 없는 주홍색 태양이 떠올랐다. 남은 이들의 수를 세어보니 혼란했던 간밤에 두 명이 줄어 있었다. 달에서 온 세오니와 에밀리 부부였다. 신부는 두 젊은이의 주근깨투성이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일행은 퐁퐁 솟아나는 분수대에서 물을 마셨다. 기나긴 도피행이 끝나고 찾아온 잠깐의 휴식 덕분에 흥분했던 감정이 한결 가라앉자, 그들은 냉정함을 되찾고 주위를 살폈다. 수도원을 둘러싼 숲은 크지도, 울창하지도 않았고, 이 행성에서 자라는 일반적인 나무들-왼쪽으로 나선을 그리며 자라는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덩굴은 단단한 고리를 만들며 하늘높이 뻗어 있었고, 꼭대기에서는 뿌리에서 솟아난 뾰족한 세 잎사귀가 바람이 불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고요한 수목원의 풍경이었지만, 일행은 삼삼오오 붙어 서서 그쪽을 바라볼 뿐 깊이 들어가 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대위는 화학 교수, 보일러 공, 신부 등 수뇌부를 소집해 나지막한 반지하 방으로 데려갔다. 사암(砂巖)으로 지은 술 창고로 보이는 그 방에는 텅 빈 유리병들이 잔뜩 있었다. 튼튼하고 피부가 가무잡잡하게 그을려 건강해 보이던 대위도, 썩 안전해 보이지 않는 유리병 위에 걸터앉아 모포를 걸치고 있는 지금은 수염이 까슬까슬하게 자라고 주름이 깊이 팬 데다 야위고 창백해져, 수분이 쏙 빠져나간 시든 채소 같았다.

“식량이 떨어졌소.”

그는 수뇌부들에게 무시무시한 소식을 전했다.

“빵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소. 오늘 아침 수도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버려진 곳이 분명하오. 숨겨놓은 음식이라도 있을까 싶어 집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없었소. 아무것도.”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구조선은 두 달 후에나 올 것이고, 음식이 없으면 그때까지 버티기는커녕 굶어 죽는 수밖에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위협에 비하면 괴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싸워야 하오. 그놈을 쓰러뜨릴 거요.”

대위가 말했다.

“총은 소용없소. 놈의 정면에서 총을 쏘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더군. 무슨 물총이라도 쏜 줄 알았소.”

대위는 그렇게 말하며 불만스럽게 코를 훌쩍였다.

“하지만 놈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소. 골짜기를 둘러보았더니, 주위는 온통 깎아지른 절벽이고 입구는 단 하나뿐이오. 물자나 도구는 여기 있으니 그곳에 울타리를 쳐야 하오.”

“맞습니다. 레이저 총 같은 것은 소용이 없지요.”

화학 교수가 맥없이 말했다. 볼살이 빠진 덕에 큼직한 귀가 몹시 괴상해 보였다.

“어떤 여행서에서 읽었는데, 이 행성의 운모석에는 결정체의 함량이 어마어마하게 높다더군요. 이 결정체의 공명 때문에 이 행성에는 특유의 초음파가 가득하고, 이곳 생물들은 날 때부터 물체의 진동을 이용하고 제어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 괴수의 머리에 난 잔털을 생각해 보세요. 녀석은 그것을 이용해서 진동에 반응하는 겁니다. 레이저 총도 결국에는 진동 원리를 이용한 것이니, 대위님의 공격이 녀석을 조금 괴롭힐 수는 있지만 다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진동이라고? 그러니까, 총으로는 놈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거요? 놈이 뚫고 들어오면 육박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군. 흥, 좋소. 몸으로 싸워주지!”

대위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이곳에는 나무가 많이 있던데, 나무를 먹을 수는 없수?”

보일러공이 물었다. 그는 얼굴이 넓적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우람한 남자였다. 입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송곳니가 죽은 물고기같이 흐리멍덩한 인상을 희석해주는 유일한 특징이었다.

“고향에 있을 때 나무를 먹는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수다.”

“안됩니다.”

교수는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마치 자기 스스로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기라도 하는 얼굴이었다.

“행성 여행자들이 늘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지요. 이런 행성에 있는 식물들은 DNA 나선이 우리와는 기본적인 구조부터 다릅니다. 설사 독성이 없다 해도 먹어보았자 우리 몸에 필요한 단백질 분자로 분해할 수가 없지요.”

“하지만 저 괴수의 입에는 우리 고기가 딱인 것 같지 않았소?”

대위가 조롱하듯이 내뱉고는 신부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하겠소. 신부님은 수색을 맡아주시오. 상태를 보니 수도승들은 잠시 동안만 이곳을 비운 것 같소. 식량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을 리가 없소.”

그는 입술을 뒤틀며 한 번 더 강조했다.

“절대 그럴 리 없소. 신앙을 따르는 자들은 일반인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지. 수도승이나 신부나 신앙심은 다 같지 않소?”

“다릅니다.”

신부가 항의했다.

“내 말대로 하시오.”

대위는 그렇게 명령했다.


금욕주의 참선 교파는 거의 사라져가는 오래된 종교였다. 그들의 교리는 모든 욕망을 버리면 성불하여 백일승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교파를 창시한 사람은 고대 동방의 어느 승려였는데, 실제로 신의 기적을 보여주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전파된 곳이 몹시 적어 이 대성운에서도 외진 행성 몇 군데에만 겨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발견한 낡은 지도에는 이 수도원이 참선 교파 교인들의 성지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식량을 찾는 임무를 맡은 신부는 골짜기를 따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행이 들어온 골짜기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높디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절벽들은 흘러내린 물줄기에 침식되어 안쪽의 불그스름한 퇴적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골짜기 한 가운데 서서 올려다보면, 이 거대하고, 고요하고, 싸늘한 거암들이 가리개처럼 시야를 가려 그 끝에서야 둥그스름하게 비치는 하늘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마치 우물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신부가 어디서부터 수색을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보일러공이 벌목할 이들과 함께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숲속에서 뛰쳐나왔다.

그들이 버블피쉬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둥글둥글한 몸에 햇빛을 받아 오색빛깔로 반짝이는 버블피쉬들은 공기 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위아래로 헤엄을 쳤다. 바람이 불어오면 이리저리 밀리는 모습이 마치 터지기 쉬운 비누 거품이나 아이들이 공중에 띄운 애드벌룬을 연상시켰다. 얼핏 보기에도 약하고 아름답고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버블피쉬들은 말 그대로 관상용이었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생존자들은 그 낯선 모습에 놀라 마구 달아난 것이었다.

버블피쉬의 투명한 뱃가죽은 보이지 않는 주파수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이 진동을 이용해 햇빛 속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공기 속에 있는 기체를 빨아들여 적절한 고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버블피쉬들은 커다란 눈동자로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허둥거리는 인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더니,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며 더욱 높이 헤엄쳐 올라갔다.

길을 찾으러 나갔던 대위와 건장한 남자들이 세오니의 시체를 찾아 왔다. 세오니는 어젯밤 있었던 광란의 질주에서 발을 헛디뎌 개울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졌다. 수색대는 세오니 외에 말라붙은 바퀴 자국을 발견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바퀴 자국이 향하는 곳이 천국일지, 아니면 또 다른 어딘가 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세월에 침식되어 거의 지워져 가는 그 자국은 오랫동안 아무도 그 길을 이용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말해주었다. 그 말인즉 이 수도원은 버려진 것이 확실했다.

신부는 죽은 이를 위해 기도했고, 일행은 세오니를 숲속에 묻었다. 양치식물 덩굴은 꽈배기를 틀며 그들의 머리 위로 높이 뻗어 있었다. 대위와 보일러공은 각자 삽을 들고, 무너져가는 돌기둥이라도 되는 양 적갈색 진흙으로 대충 쌓아 올린 거대한 무덤 옆에 서 있었다.


태양이 떨어지기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일행은 나무를 베어 울타리를 쳤다. 굵고 튼튼한 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아 땅속 깊이 박고, 뾰족한 침엽을 얼기설기 엮어 가시 박힌 그물망을 만들어 나무 사이사이 빈틈에 채워 넣었다. 공격 지점이 될 만한 약한 곳에는 커다란 돌멩이를 잔뜩 쌓아 튼튼히 받쳤다. 배고픔을 참아가며 고생스럽게 일한 덕분에 마침내 이 위대한 공사가 끝나자, 비록 허망하지만 다소나마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신부는 감탄할만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골짜기 곳곳을 탐험했지만, 찾아낸 것이라곤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핀 빵과 건포도 조금뿐이었다. 술 창고 뒤쪽에 바싹 마른 포도 덩굴이 있는 것을 보면 수도승들은 이곳에서 직접 술을 빚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뿐, 그 외에는 편지 한 장, 책이나 노트 한 권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신부는 오래 전에 읽은 금욕주의 참선 교파에 관한 책을 애써 떠올렸다. 그 책에는 그 교인들이 노동과 명상을 좋아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배고픔이 신부의 위를 잠식하여 눈앞이 어른어른해졌다. 탑 아래를 또다시 한 바퀴 돌면서, 신부는 자신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그 질문을 반복했다.

그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그가 수색하지 않은 곳은 탑이 유일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탑은 너무 높았다. 100미터가량 높이의 탑에 올라가려면 600개는 됨직한 계단을 올라야 했다. 지금 몸 상태로 그 계단을 기어오르기란 몹시도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신부는 오르기 시작했다. 탑 속의 계단은 왼쪽으로 나선형을 이루며 위로 이어져 있었는데, 한 층, 한 층 아무리 올라가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탑은 마치 바깥의 숲을 이루는 양치식물처럼 햇빛을 받아 조금씩 조금씩 자라면서 점점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신부는 별수 없이 몇 차례나 계단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쉬는 동안 그는 탑의 안쪽 벽을 가득 채운 새하얀 벽화를 구경했다.

제일 상단에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마도 이교도들의 지옥을 형상화한 듯했다. 그 외에는 보검(寶劍), 악기, 생쥐 갑사, 페르시아의 선녀들,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 수련, 그리고 아름다운 암사슴 등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그림이건 그 아래에는 깊이 잠든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어쩌면 이 번잡한 세상이 사실은 그저 부처의 꿈속에 존재하는 허상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고대 인도인들은 세상이란 본디 꿈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던가?

길고 긴 시간이 지나, 마침내 신부는 탑 꼭대기에 이르렀다.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큼직큼직한 하얀 돌로 둘러싸인 독특한 원형 구조의 방은 꽃이 자라는 온실 같기도 하고, 아기가 자라는 자궁 같기도 했다. 석조 자궁의 정중앙은 오랜 세월 수도승들이 앉아있었기 때문인지 살짝 패어있었다. 둥그스름한 방을 둘러싼 아치형 벽에 뚫린 좁고 기다란 틈 세 개는 창문인 모양이었다. 세 창문 사이사이에 벽화 여섯 개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신부의 눈에 띄었다. 앙상하게 마른 자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들은 배가 태산처럼 불룩해진 채 굶주림으로 가득한 욕망의 눈빛을 번뜩이며, 거미처럼 팔을 뻗어 마구 낚아채고, 먹고, 구걸해댔다.

기아의 탑.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머릿속에 이 네 글자가 불쑥 떠오르자, 신부는 두려움에 부르르 떨었다. 그는 달아나듯 그 높다란 탑을 떠났다.


밤이 되자 괴수가 다시 찾아왔다. 놈은 울타리 밖에서 씩씩 숨을 내쉬며 육식동물 특유의 비린내를 뿜어냈다.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등잔 같았다. 골짜기 입구에서는 밤새도록 무시무시한 타격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괴수가 달려들 때면 돌로 쌓은 벽 전체가 끼익끼익 흔들리는 소리를 냈고, 땅에 꾹꾹 눌러 박은 나뭇가지도 쓰러질까 봐 겁이 날만큼 요동을 쳤다. 그날 밤 괴수는 울타리를 뚫지 못했고, 눈 한 번 못 붙이고 밤을 꼴딱 새운 굶주린 영혼들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이제 일행은 오로지 울타리를 복구할 때만 한마음이 되어 다 같이 애를 쓰고, 그 일이 끝나면 각자 흩어져 먹을 것을 찾아 땅을 파거나 집과 공터를 마구 뒤져댔다. 포도 넝쿨이 제일 먼저 뱃속으로 들어갔고, 그다음은 각종 가죽 제품들 - 가죽 신발, 가죽 허리띠, 가죽 물통 같은 것들이 속속 사라졌다. 이 빌어먹을 행성에는 지렁이나 쥐조차 없었다. 있었다면 일찌감치 대재앙을 맞았을 것이다.

대위가 식량 수색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깜빡한 탓에 신부는 지치고 힘 빠진 몸을 이끌고 끈질기게 골짜기를 쏘다녔다. 어느 컴컴한 방 안에서 그는 마른 풀뿌리나 나뭇가지같이 생긴 것들을 모아 외투 안감에 쑤셔 넣는 화학 교수를 발견했다. 신부를 본 교수의 얼굴이 민망한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교수는 창백한 얼굴에 야윈 몸집을 했고, 코는 우뚝 솟고 새파란 물방울 같은 눈은 커다랬다. 그 생김새 덕분에 그는 항상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겁먹은 듯한 교수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선심이라도 베풀 듯 식물 줄기 두어 개를 신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병을 치료할 때 쓰는 약재라며 우물우물 덧붙였다.

“내가 말라리아를 앓는 중인데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약재라……”

골짜기에 있는 평범하디 평범한 집들을 모두 살펴본 신부는 수도승들의 수수께끼는 바로 저 탑에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허약한 몸이었지만 그는 다시 한번 탑에 올라 벽화와 텅 빈 명상실을 조사했다. 탑에 사용된 자재는 이 행성에서 나는 사암이 아니라 멀리서 운반해온 하얀 운모석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지구의 운모석과는 또 달랐다. 안쪽에 자그마한 알갱이 같은 수많은 결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창문 세 개는 몹시 좁고 작아서 한 명이 겨우 비집고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창문 밖으로 자그마한 테라스가 있어서 골짜기 밖에 눈부시도록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을 내다볼 수 있었다. 장애물 하나 없는 사막 위를 거친 바람이 제멋대로 할퀴어대며 모래 먼지를 휘말아 올렸다. 부연 모래 먼지 위쪽으로는 끝 간 데 없이 아득하고 소리 없이 고요한,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늘은 유난히도 넓고 푸르렀다. 세 개의 태양이 오색찬란한 빛을 띠고 하늘 위를 미끄러져 갔다.

그들은 바로 아무도 관심 없는 이 사막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모두에게 잊힌 채로.

그러는 동안 대위도 탑에 올라왔다. 텅 빈 방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생존자들을 지휘하여 울타리를 수리하느라 너무 바쁜 탓이었다. 울타리에서 벌어지는 반복된 싸움은 이미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밤이면 괴수가 달려들어 울타리를 부수고, 낮이면 생존자들이 열심히 보수했다. 나중에는 밤에도 당번을 세워 계속 보수를 해야만 했다. 괴수의 공격은 점점 더 사나워졌다. 놈은 본래부터 그리 튼튼하지 않았던 나무줄기를 물어뜯고, 침엽을 섞어 짠 그물망을 찢어발기고, 튼튼한 몸으로 쉼 없이 울타리를 들이박았다. 덕분에 울타리 뒤에 웅크리고 있는 이들은 심장이 떨어질 만큼 두려움에 떠느라, 잠깐이나마 뱃가죽을 긁어대는 듯한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보일러공은 이 싸움을 퍽 좋아했다. 그는 인디언들이 전투할 때 쓰는 문양을 얼굴에 그려 넣은 채 울타리 틈을 통해 날카롭게 깎은 나뭇가지로 괴수를 찌르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의 미치광이 같은 열정이 나머지 생존자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보일러공은 확실히 용감무쌍했다. 다른 일행들은 소리를 지르며 질긴 나뭇가지를 짜 만든 그물로 구멍을 막고 커다란 돌을 쌓아 뒤를 받쳤다. 흙을 뭉쳐 울타리의 빈틈을 막고 이름 모를 외계 덩굴 식물로 나무줄기들을 단단히 묶었더니 제법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먹을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몇몇 이들이 탑을 살펴보러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많은 수는 아니었다. 허기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그들에게100미터나 되는 탑은 아무래도 너무 끔찍한 도전이었다.

화학 교수도 탑에 올라온 자 중 한 명이었다. 허기로 반죽음이 된 그는 열여섯 번이나 앉아서 쉬고, 두 번이나 말라리아 치료제를 먹으면서 어렵사리 탑에 올랐다. 꼭대기에 도착한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텅 빈 석실을 샅샅이 살피고 테라스 세 곳도 빠짐없이 조사했지만, 결국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신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직접 와서 살펴보지 않으면 가슴을 할퀴는 고통스러운 책임감을 벗어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노라고 해명했다.

교수가 내려간 뒤로 신부의 작업을 방해하는 이는 더 없었다. 신부는 방 한가운데 움푹 팬 자리에 점점 더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참선 교파의 역대 고승들이 바로 이곳에 앉아 천 년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정말로 성불하여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던 그는 그 자리에 앉아 그 유명하다는 명상을 해보기로 했다. 이 명상실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원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그는 금세 마음이 편안해져 비몽사몽 한 상태에 빠져들었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괴수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고, 악마 같은 노란 눈동자가 보였다. 놈의 날카로운 발톱이 목을 낚아채려는 순간, 신부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꿈속의 광경에 놀라 마구 소리라도 질렀던 것일까, 목이 따끔따끔했다. 상상 탓인지는 몰라도 명상실이 괴수가 뿜어내는 야성의 비린내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혼곤히 탑에서 내려온 그는 어젯밤 괴수가 끝내 울타리를 뚫고 들어와 세 명을 물어 죽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중 매튜의 시체는 일행이 힘을 합쳐 겨우 되찾아왔다고 했다.

매튜는 열여덟 살의 소년이었다. 어젯밤 메튜는 괴수의 입속에 들어간 후에도 살아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불나방의 가냘픈 날갯짓에 불과했다. 울타리에 생긴 구멍이 너무 작아 괴수는 매튜를 단번에 끌어내지 못했고, 그 사이 대위가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나머지 일행은 울타리를 향해 총을 쏘고, 뾰족한 나뭇가지로 괴수의 입과 머리를 찔러대며 매튜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결국 매튜의 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태양이 솟아오르자 괴수는 전리품을 가지고 달아났다. 화학 교수는 태양이 거대한 초음파의 진원지이기 때문에 괴수의 감각기관에 혼란을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장례식은 간소했다. 땅에 똑바로 눕힌 매튜의 너덜너덜해진 옷 사이로 뼈만 남은 팔과 앙상한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팔 한쪽은 괴수에게 잡아 먹혀 싹둑 베어낸 나무 그루터기 같았고, 날카롭게 찢어진 부분에서는 살이 섞인 핏물이 뚝뚝 떨어져 피부조직과 살덩이가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창백해서 더욱더 부드러워 보이는 그의 살덩이를 보자 둘러선 이들의 눈동자에 빛이 번뜩였다. 신부가 기도하는 동안, 그의 등 뒤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일행은 속닥속닥 귓속말을 해대더니 결국 비밀 투표까지 진행해 매튜를 매장하기 않기로 결정했다.

“우리에겐 아직 쓸모가 있어요.”

일행이 굳은 얼굴로 말했고 대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낮에 일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큰 솥을 걸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광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일행은 나무를 자르던 도끼와 톱으로 소년의 몸을 해체했다. 대위는 손을 떨지도 않았고 냉정하리만치 정확하게 칼을 놀렸다. 소년의 가슴을 수박 쪼개듯 열어보니, 메마른 피부밑으로 얄팍하지만 노란 지방층이 나타났다. 지방 안에는 붉은 점이 쏙쏙 박혀있었다. 가슴 근육에 붙은 연골을 잘라내자 내장이 몸을 비트는 빨간 뱀처럼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쏟아졌다. 일행은 소년의 내장과 머리를 솥에 넣어 끓이고, 팔다리와 근육들은 불에 구운 후 말려 비축했다.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는 생존자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그릇들을 들고 있었다. 목 부분을 자른 유리병, 삽, 모자, 비닐봉지 같은 것들이었다. 가죽 신발을 먹어치운 이들은 계속해서 올라오는 신물 때문에 몹시 후회했다.

허리띠가 사라진 바지춤을 풀잎을 꼬아 동여맨 보일러공이 어디선가 커다란 국자를 가져와 가혹할 정도로 정확하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이 한 줌의 공평함만이 지금 그가 주무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 이상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남들이 그런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최후의 순간까지도 즐겁게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흥분과 기대로 인해 신물을 토해내면서 손에든 비닐봉지를 꼭 붙들었다. 소금이나 마늘은 없지만, 더 바랄 것이 없는 풍요로운 점심 식사를 눈앞에 두고, 어쩌면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오후, 일행은 더욱더 열성적으로 울타리를 수리했다. 먹을 것이 있다는 생각에 힘이 불끈 솟았고 자신감도 붙었다.

신부는 배식받는 줄에 서지 않았다. 배고픔이 거미줄처럼 서서히 창자를 졸라맸지만, 그는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고기를 받지 않았다.

사실 대위는 이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다. 신부는 제법 잘생겼고, 특히 젊은 신앙인답게 몹시 예민한 얼굴이 사암같이 새하얗고 연약해 보여 남들의 호감을 샀다. 처음 이 젊은이를 보았을 때, 대위는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세월의 먼지에 덮여 아득하게 잊힌 어느 곳에서 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창백하고 야윈 얼굴의 선량한 젊은이를 만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이런 젊은이를 많이 보았다. 몸담고 있던 부대나 혹은 다른 곳에서. 하지만 종국에는 전쟁의 불길이 그들 모두를 집어 삼켜버리곤 했다.

“주님께서는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 애쓰는 우리를 탓하지 않으실 거요. 안 그렇소?”

대위가 말했다.

“압니다. 잘 알지요.”

신부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대위는 구워 말린 육포를 신부에게 내밀었다. 깨끗하고, 깔끔하게 잘라낸 육포에서는 거뭇한 향기가 솔솔 풍겼다. 훈제 솜씨가 꽤 괜찮았다.

“이런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 스트레스를 더할 뿐이오. 당신이 자기들을 비난한다고 생각할 거요.”

대위는 친절하게 충고했다.

“그러니 받으시오.”

그는 신부가 주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압니다.”

신부는 그렇게 말했지만, 끝내 주어진 음식을 거부했다. 대위는 한참 동안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신부는 또다시 탑으로 올라갔다. 무궁무진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 탑으로. 이제는 그 자신도 여기서 무엇을 찾아내기를 바라는 것인지 어떤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 있으면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새하얀 벽은 어둠 속에서도 부드러운 형광을 발했고, 결정 알갱이들은 보일락 말락 떨리고 있었다.

혹시 명상이 수도승들의 절식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그는 팬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벽에 그려진 글자들 - 오래된 그림 같은 상형 문자들을 매만졌다. 상상력으로 그 글자의 의미를 알아내려 애쓰면서.

짧은 몇 초 동안, 흐리멍덩해진 그의 머릿속에 신비하고도 색다른 감각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훗날 일어날 일을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를 그 감각을 붙들어놓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예상대로 놓치고 말았다.

버블피쉬들이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버블피쉬의 피부는 팽팽하게 당겨진 투명한 장막 같았다. 버블피쉬는 노란색으로, 주홍색으로, 파란색으로, 또 황금색으로 반짝이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물거품이었다

배식은 엄격하게 이루어졌지만, 얼마 되지 않는 식량은 순식간에 굶주림에 허덕이는 자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 골짜기 안을 순찰하는 피골이 상접한 생존자들에게는 무언가 다른 것이 생겨났다. 광대뼈가 높이 솟고 뺨은 우물처럼 푹 꺼진 야윈 얼굴들은 항상 시선을 바닥에 깐 채 남들을 마주 보려 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가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괴수가 공격해오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었지만 울타리는 몹시도 견고했다. 괴수는 울타리 밖에서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이었다. 놈도 벌써 며칠째 먹이 구경을 하지 못했다. 굶주림 때문에 바싹 마른 피부밑으로 갈빗대가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놈은 핏발이 선 무력한 눈동자로 울타리 뒤에 있는 생존자들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달아나곤 했다. 괴수가 자신과 다름없이 잔뜩 굶주린 자들을 포기하고 물러나자 울타리를 지키던 일행은 알 수 없는 실망감 때문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가능한 한 아끼고 또 아꼈지만 이틀 만에 또다시 식량 문제가 대두되었다. 건장한 자들이 앞장서서 죽은 소년의 뼈를 파냈다. 다리뼈를 분질러 골수와 관절 부위를 빨아먹었지만, 모두를 구해내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그 덕분에 어느 날 아침, 대위는 일행을 이끌고 가서 세오니를 다시 묻어야 했다.

어젯밤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던 것이다. 세오니의 시체를 어찌해볼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그 시체는 지독한 더위를 이기지 못해, 시체 먹는 구울조차 손사래를 칠 정도로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새벽녘이 되자 일행은 골짜기를 진동하는 악취를 느끼고 무덤을 찾았다. 세오니는 붉은 흙으로 쌓아 올린 무덤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눈구멍에는 썩은 물이 고여 있고, 이마에는 시커멓게 썩은 자국이 가득했으며, 입 안쪽으로 바짝 말라 들어간 뺨 밖으로는 이가 훤히 들어나 마치 활짝 웃는 것 같았다.

이 잔혹한 행위를 비난하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구덩이를 더욱 깊이 파서 시체를 다시 묻을 뿐이었다. 모르면 몰라도, 저 어마어마한 열량과 아미노산, 단백질 덩이를 고스란히 썩히고 말았다는 사실에 남몰래 후회하는 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다른 생존자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숲에 있는 양치식물을 시험해보았다. 줄기를 잘라내고 껍질을 벗긴 다음 짧게 잘라 불에 살짝 구웠더니, 뜻밖에도 시체 썩는 냄새보다 더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몇몇은 화학 교수가 경고할 틈도 없이 버블피쉬 사냥에 나섰다. 아크투루스 항성에서 온 다이아몬드 광부 두 명이 작살로 버블피쉬를 찔렀다가 그 배에서 뿜어져 나온 암모니아수에 눈이 멀고 말았다. 얼굴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하자 광부들은 분수대에 드러누워 밤새도록 신음을 흘렸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오르며, 신부는 마치 천국으로 통하는 거탑(巨塔)을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하느님은 영원하시며, 무소불위하시며, 모든 것을 아시며, 인자함과 관대함으로 세상 만물을 대하신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시며 무한한 지혜를 지니신 하느님께서 옛사람들이 천국으로 통하는 이 어마어마한 탑을 만드는 것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셨을까?

천국이 어딘가?

바로 저 위, 끝은 있지만 끊임없이 확장해나가는 이 드넓은 우주에 있는 것이 아닌가?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종교는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결국 서로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것은 과학이 언제까지나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어디 가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이 근원적인 질문보다 훨씬 중요했다.

신부는 첫 번째 미사 때 즐겼던 성찬을 떠올렸다. 포도주와 빵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의미했고, 그것을 먹음으로써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가죽 띠는 오래되고 질겨 씹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는 억지로 잘근잘근 씹고 침에 흠뻑 적셔 눅눅하게 만든 다음 꿀꺽 삼켰다.

크로노스는 자식을 잡아먹고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의 동료를 불에 구웠고, 당나라인 장순은 부인과 첩들을 부하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뿐인가. 이탈리아의 우골리노 백작은 높은 탑에서 자기 살을 뜯어 먹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었고 지금도 다를 바 없었다.

버블피쉬들이 무리를 지어 헤엄치며 기도실 바깥에서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 때문에 대기는 마치 거대하고도 투명한 유리 어항 같았다.


악취는 줄곧 골짜기 상공을 맴돌았다.

광부들이 죽었다.

포식자였던 그들도 마침내 피식자가 되었다. 골짜기 안에 살아남은 모든 이들은 이 성대한 연회를 손꼽아 기다린 것 같았다. 불길이 활활 타올랐고, 솥에서는 펄펄 끓는 물이 하얀 거품을 일으켰다. 두 광부의 희생정신에 힘입어 일행은 또 한 주를 버텨냈다. 구조선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신부도 기적처럼 버텼다. 화학 교수가 준 식물 줄기는 무척 효과적이어서, 조금만 삼켜도 오랫동안 버틸 에너지가 되어 주었다. 그때쯤에는 교수도 야윌 대로 야위고 눈에는 벌겋게 핏발이 서서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처럼 약해졌지만, 여전히 정신이 맑았고 두 뺨에는 이상하리만치 발그레한 생기가 돌았다. 그는 끊임없이 물을 마셨다. 바싹 타들어 가는 입가에는 물집이 잡혔는데, 아무래도 말라리아 치료제로 인한 부작용인 듯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일행은 울타리를 돌보지 않고 방치했다. 그동안 누군가 울타리에 구멍을 뚫었고, 괴수의 포효가 골짜기에 요란하게 울리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행은 대위의 지휘로 잔뜩 흥분하여 전투를 치렀다. 승리의 불꽃이 열기로 뜨거워진 그들의 머리 위로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그들은 삽과 몽둥이, 칼은 물론이고 손톱이며 이까지 동원하여 굶주림 때문에 힘이 빠진 괴수의 입안에서 시체를 끌어냈다.

대위는 칼을 움켜쥐고 괴수의 이빨 사이에 갇힌 몸에서 열심히 다리 한쪽을 도려냈다. 또다시 해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했다.

한때는 그 역시도 망설이고, 헤매고, 두려워했었다. 그런 감정을 부끄러운 것으로 가르쳤던 훈련 때문에 수치심을 느꼈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알아낸 이상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그는 구조선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승리의 기쁨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괴수가 울타리를 뚫고 달아난 뒤, 그는 털이 숭숭 나고 아직도 피를 뚝뚝 흘리는 화학 교수의 다리를 든 채 소리 내어 웃었다.

옆에 선 신부가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해골 같은 신부의 얼굴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 대위는 얼어붙은 듯이 웃음을 뚝 그쳤다. 자신과 신부에게 불같이 화가 났다.

빌어먹을, 대체 제까짓 놈이 뭔데 저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거야! 목숨이 위험한 판국에 신앙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라고!

신을 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자이건, 재앙이 눈앞에 닥치는 순간에는 누구나 똑같이 잔인하고 무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교수의 다리를 닥치는 대로 자르고 베어 아까운 피와 살덩이를 바닥에 마구 뿌려댔다. 구태여 물어보지 않아도 신부의 태도가 모든 이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는 사실은 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분수대에서 교수의 몸을 씻었다. 교수의 몸에서는 기이한 약 냄새가 났다. 한참 동안 씻고 또 씻어도 그 냄새는 가시지 않았지만, 살 속 깊숙이 스민 향기로운 냄새 덕분에 더욱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반쪽만 남은 야윈 몸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뱃속으로 사라졌다. 몸에서 나는 약 냄새를 맡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도 일행은 여전히 배가 고팠고, 먹을 것이 필요했다.

신부는 움푹 팬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솟아나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숱한 하얀색 결정들과 공명했다. 공명에 파르르 떨리는 진동 소리는 몹시 크고 요란하면서도 또 몹시 연약해서, 마치 폭우가 파초를 두드려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에가 뽕잎을 씹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공명은 우주처럼 드넓은 신호를 담고서 조그마한 방안을 빙빙 맴돌다가 아치형 온실 벽을 통해 신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신호를 받은 그의 머리는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과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고, 나아가 그가 겪지도 않은 기억들까지 그려냈다.

욕망은 어디서 오는가?

진동. 또 한 번의 진동.

진동은 마치 파닥거리는 나비의 날개 같았다.

이 세상은 허상이로다.

어느 백발노인이 그에게 말했다.

꿈에서 나비를 보았건만, 그 나비야말로 현실이었느니라.

신부는 반짝 눈을 떴다. 검붉은 빛깔의 날개 한 쌍이 방 안에서 이리저리 파닥이고 있었다. 지구에서나 볼 수 있는 나비였다. 나비는 좁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고, 날개에 묻은 금가루가 새벽 햇살을 받아 하늘 위로 둥그런 금빛 궤적을 남겼다.

환상일까?

신부의 몸은 신이 내려주신 깨달음으로 충만하게 차올랐다. 별안간 그는 몹시도 두려워졌다. 어쩌면 이 또한 상상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상상일지도 모른다. 지금 그는 환상을 보고 있다는 상상에 빠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잠시뿐이었다.

그런들 어떤가?

이 세상이 허상이라면 그 속 허상 속의 환상도 그저 허상일 뿐이었다. 그 환상 속에서, 신부는 벽에 그려진 그림인지 글자인지 모를 도형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처는 제자 수부티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환상이니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반대로 생각해볼 때 환상은 곧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정말 그게 가능할까?

신부는 눈을 감았다.

정말로 이 세상은 일장춘몽인가?

그는 마음속으로 향기롭고 노릇노릇한 빵을 떠올렸다. 머리가 결정들과 공명하면서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정말로 빵 한 덩이가 놓여 있었다.

진짜 빵이었다.

참깨를 넣어 노릇노릇 구운 빵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싹 마른 신부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림의 떡으로 허기를 달랜다는 말이 사실이라니! 비로소 음식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선 교파의 비밀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욕망을 내던짐으로써 그 욕망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온갖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그 욕망의 고통을 실감하게 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그는 빵이 식을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눈앞에서 별이 반짝거리고 귓속이 윙윙 울렸다.

이것은 기적일까? 아니면 과학일까?

진동으로 가득한 행성.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란 무엇이고, 물질이란 또 무엇인가?

생각이란 또 하나의 진동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신경 세포들 사이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이 높디높은 탑의 특이한 형상이며 탑을 쌓는데 사용한 자재들, 심지어 이 행성 자체가 방대한 생각의 힘을 증폭시키는 도구였던 것이다. 굳건한 믿음으로 꼼꼼하게 마음속으로 그리기만 한다면 심지어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었다.

그는 찌르는 듯한 두통을 억누르면서 머릿속에 무전기를 그렸다. 안개에 가린 것처럼 희미하게 떠오르던 형상이 점차 선명해지더니, '땡그랑' 하고 무엇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단단하고 새롭고 파르스름한 그 소리가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머릿속을 찔렀다. 그는 열이 오른 손으로 그 물체를 어루만졌다. 이것을 일행에게 가져가야 했다. 누군가 사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구조선이 오는 동안, 그들은 명상과 믿음을 통해 먹을 것을 만들어내면 되었다. 신부는 벌떡 일어났지만 지독한 현기증 때문에 하마터면 계단으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오랜 고뇌와 명상 때문에 그의 몸은 잠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허약해져 있었다.

무전기는 너무 무거웠다. 80파운드나 되는 물건을 짊어지고 600개의 계단을 내려갈 힘 같은 것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신부는 무전기를 남겨둔 채 비틀대며 일어나 왼쪽으로 꺾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천천히, 느릿느릿 아래로 내려갔다.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나머지 생존자들이 광장에 걸어둔 솥 주위에 삥 둘러앉아 있었다. 불꽃이 날름날름 혀를 내밀며 솥을 핥고, 솥에서는 물이 보글보글 끓었다. 또 누가 죽었는지, 신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 어서 빨리 대위에게 가서 임무를 완수했다고 알려야 했다.

식량! 식량을 찾아냈다고!

굳게 믿으면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할렐루야!

일행은 교회 성가대가 합창할 때처럼 둥그런 호를 이루고 서 있었다. 모두 부드러운 시선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희생자들 역시 거대한 하늘 저 위에서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정과 연민을 담은 눈빛으로.

대위는 광장 한가운데 높은 곳에 서서 비딱하게 고개를 돌려 골짜기 반대편을 바라보았고, 보일러공이 반쪽만 남은 삽으로 만든 철퇴를 들고 신부에게 다가왔다. 둘 다 꼿꼿한 자세였다.

그 순간 신부는 깨달았다. 이 자리가 그 자신의 심판대라는 사실을. 모든 이들을 위해 희생할 대상이 필요한 순간이 온 것이다. 최후의 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신부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식량을…”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스러져가는 의식 속으로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가 들리고, 생존자들의 새하얀 치아와 공기 속을 둥둥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였다. 신이 호루라기를 불어 알리기라도 한 듯, 멀리서 괴수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이 모든 것의 위로, 높다란 기아의 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과환세계(科幻世界)》 2003년 6월 호에 수록

 

* 작가 : 판하이톈

판 하이톈은 1975년 생으로 전통적인 정의의 과학소설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제 3세대 중국 SF작가 군에 속한다. 그의 소설은 과학과 판타지 그리고 우화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작품으로는 장편 SF인 「24초 낙원(24 Second Paradise)」,  SF 단편선 『뛰어! 다쟈오! 뛰어!(Run, Dajiao! Run!)』 그리고 노보랜드(Novoland) 세계관을 차용한 4편의 판타지 장편소설이 있다. 그는 중국의 유력 잡지 「Odyssey of China Fantasy」를 설립한 편집자이기도 하다. 중국 최고의 SF 상으로 일컬어 지는 중국 갤럭시 상을 4회 수상하였다. 단편 소설 “기아의 탑”은 영어로 번역되어 해외 잡지 「클락스월드(Clarkesworld)」 에 게재되었다. 「위어드(Wired)」 지(志)의 로렌 힐거스(Lauren Hilgers)는 그를 “중국 SF 작가 중에서 가장 깊이 있는 냉소로 웃음을 주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 번역가: 전정은

중국 소설이 좋아서 중국어를 배웠고, 좋은 소설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번역을 시작했다. 『무림객잔』, 『천관쌍협』, 『보보경심』, 『대막요』, 『운중가』 등의 소설과 대중가요 가사 등을 번역하였다. 미출간 무협 소설을 번역,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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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No Profile
    SFan 17.08.16 21:46 댓글 수정 삭제

    심각하게 읽다가 결말에서 웃음이 빵.... 반전이 정말 재미있네요!

  • No Profile
    Sunflower 17.08.17 01:55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배고픔 때문에 조금씩 타협한 행동들이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요.
    설마싶지만, 괴수가 생존자들에게 집착한 건 질투때문인가 싶네요.
    물고기는 커다란 눈에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다른 생물을 안 잡아먹고 배에 암모니아수가 들어가있기까지 한데, 괴수는 생존자들처럼 다른 생물을 먹어야만 배를 채울수 있다는게... 어쩌면...
  • No Profile
    미아 17.08.21 15:22 댓글 수정 삭제

    마지막에 할말을 잃었습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더니...가 이럴 때 쓰이는 말은 아니겠지만요orz

    그런데 구조선은... 언제 올까요? 오긴 올까요?.... 어쩐지 그게 궁금해졌어요.

  • No Profile
    MadHatter 17.08.24 23:11 댓글

    일견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철학적 깊이가 느껴지는 발상의 전환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색즉시공이라는 주제 자체는 여러 작품에서 보아온 것 같지만, 이런 식으로 공즉시색에 천착한 소재는 처음이라서 신선했습니다.

    오타를 발견했는데 도움이 될까요. 처음 탑으로 달리는 대목에서 '미치듯이'라고 되어 있고, 무전기를 소환해 어루만지는 대목에서 '열이'라는 오타가 있습니다.

  • MadHatter님께
    글쓴이 mirror 17.08.27 02:38 댓글

    이런 지적 완전 격하게 환영합니다! 덕분에 수정했어요. 감사드립니다. ^^

  • No Profile
    montesur 17.08.31 02:45 댓글 수정 삭제

    멋진 군상극이네요. 

    유머러스한 엔딩까지 최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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