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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루의 태엽>

 

따뜻한 김이 몸 위로 오른다. 늦여름의 바람이 불었고 젖은 머리칼이 휘날린다. 시원하다. 미코는 목욕탕의 회벽에 머리를 기대어 입김을 불었다. 앞머리가 찰랑거린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띠리릭.

 

투박한 벨 소리. 미코는 전화를 열었다. 간호사 선배의 번호. 병원 일을 하다 뛰쳐나왔다. 분명 무슨 일이냐고 캐물을 심산이겠지. 심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선배는 다그치지도 따져 묻지도 않았다. 선배는 담담히 오늘 벌어진 일들을 하나씩 읊어 갔다. 병원에 실려 온 응급환자와 일손이 부족했던 위급상황. 선배는 상황을 설명하고는 낮게 이르었다. 잘리고 싶은 거니. 미코는 발을 땅에 박은 채 돌렸다. 물론 잘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모르겠어요.

 

그 아이와 똑같은 대답. 미코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저. 변명과도 같은 말을 찾으려 애썼다. 선배는 내가 롤 모델로 삼은 인물답게 단호하였다. 미코는 짧은 대답만을 반복하며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네. 네. 네.

 

통화를 끝내고는 고개를 들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지금 대체 뭐하고 있는 걸까. 소년. 갑자기 실종된 어머니의 고향을 찾은 남자아이. 스바루가 목욕탕에서 나와 미코의 통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갓 목욕을 마치고 나와 두 사람에게서 비누향이 폴폴거렸다. 

 

이리 와, 뭣 좀 먹어야겠으니.

 

저녁은 먹었잖아요.

 

잠자코 따라와. 넌 내 비위만 맞춰주면 되니까.

 

단 게 필요하다. 선배는 나의 일탈을 아주 잠깐 눈감아 주기로 하였다. 돌아갈 날짜는 확실하게 말하지 못했다. 저 아이와 함께하는 이상한 여정이 언제 끝날 지 저 아이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머리가 아프지만 거리는 조용했다. 어떤 투정을 하여도 다 받아줄 것처럼.

미코와 스바루는 전통 찻집에 마주 보고 앉았다. 맛있는 케이크 가게로 가고 싶었지만 소박한 오와히라 마을은 미코의 마음에 들 만한 가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빠를 따라서 친척들의 선물을 사러 온 기억밖에 없는 촌스러운 가게에서 미코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죽 내밀었다.

 

먹고 싶은 거 시켜.

 

그럼 전 말차로.

 

저기요!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가게 점원은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정중하고 정갈한 접시들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다. 밤 양갱과 팥 모찌. 이나까 만쥬와 이시고로모. 너덧 개의 접시들이 점원의 손에서 정렬된다. 미코가 작은 플라스틱 포크를 집으며 양갱을 한입 물었다.

 

먹어.

 

우물우물. 노란색 밤들이 박힌 양갱은 달았다. 미코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곳도 나름 괜찮구나. 스바루는 차를 홀짝이며 이시고로모를 깨작거렸다. 미코는 왠지 소년과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제 다음 계획은?

 

없어요.

 

정말?

 

소년이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화과자만 우물거렸다. 미코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대관절 저 아이가 누구라고. 미코는 눈을 부라렸다. 눈을 힐긋 들어 보이던 스바루는 미코의 표정을 보고는 다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

 

모르겠어요.

 

또 그 대답. 자신이 없어 보이는 목소리. 미코는 조용한 동네의 조용한 찻집에서 고함을 질렀다.

 

됐어.

 

스바루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로 미코를 마주 본다. 

 

하루 더 있다 보면 알게 되겠지. 

 

스바루가 눈에도 띄지 않을 만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플라스틱 포크를 내려 놓으며 등받이로 몸을 기댄다. 미코는 줄곧 묻고 싶었던 것을 소년에게 말하였다.

 

엄마랑은 왜 사이가 안 좋아진 거니?

 

스바루는 머뭇거렸지만 감추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런 얘기를 할 상대를 기다려 온 것은 아닐까. 미코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은 척을 할 수 있도록. 역시 이런 사람과 이야기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요.

한 곳에 있지 못하고 자꾸 이사를 하셨죠.

제가 사라져도 신고조차 하지 않으셨어요.

마치 제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아니, 엄마 스스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에요.

 

아직도 기억해요.

제 눈앞에서 

바로 제 눈앞에서

 

미코는 숨을 죽였다. 다음에 나올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하였다. 언젠가 읽은 우울증에 관련한 책 같은 것에서. 마음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어린 자녀가 보는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만 어른들. 그런 사례들. 손이 저도 모르게 꼭 쥐어 쥔다.

 

아빠를 부르는 걸요.

 

미코는 소년 쪽으로 몸을 기울었다. 왜 그랬는지 그녀 자신도 몰랐다. 그저 저 소년이 너무도 작아 보여서였을까. 너무도 작아져서 사라져 버릴까 걱정했던 걸까.

 

그 기억에서 엄마는 제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어요.

엄마에게 아빠는 있었지만

저는 없었어요.

 

기억은 태엽을 감는 것과도 같다. 태엽을 돌려 음악이 흐르면 냄새도 함께 뿌려진다. 태엽처럼 기억은 한 번 돌리면 끝까지 돌아가게 된다. 과거를 없었던 기억으로 치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미코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아직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소년이 지금 자신의 기억을 돌리는 것에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미코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줄곧 저는 없었어요.

 

미코는 스바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으실 거야.

절대 그렇지 않으실 거야.

 

역시 좋은 어른은 되지 못한다. 그럴싸한 말 하나, 그럴싸한 반응 하나. 미코는 저 스스로 씁쓸해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또 뻔한 소리나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소년을 쓰다듬었고 또 쓰다듬었다.

 

 

누나!

 

근처 값이 싼 여관에서 미코는 머리를 감고 있었다. 스바루의 목소리가 물소리에 묻힌다. 스바루는 문 앞에 서서 다시 두드렸다.

 

누나.

 

잠깐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문이 벌컥 열린다. 물이 줄줄 흐르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며 미코는 고개를 옆으로 튼 채 안으로 들어간다. 스바루는 미코를 따라 방으로 들어오며 자신 있게 말하였다.

 

누나, 저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요.

 

미코가 우뚝 선다. 겁이 많던 소년의 모습에서 어쩐지 설레하던 그때 그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이 아이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좋아, 우선 아침은 뭘 먹을지 생각해놔.

 

아이는 용기를 가지기로 하였다. 태엽이 돌아간다. 앞으로 걸어간다. 무섭지만 발을 내딛는다. 미코는 그런 그의 다짐을 웃으며 반겨주기로 하였다. 당장은 그런 걸음조차 그에게는 힘이 될 테니까. 스바루만큼 괴로운 기억을 가진 적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자기의 몫은 꼭 짊어져야 한다. 스바루라는 소년의 과거로 돌아가는 길의 끝에 소년은 소년으로서의 무게를 져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될 것인지. 제 스스로를 굶주리게 할 슬픔이 될 것이지. 온전히 스바루의 선택이 되리라. 

 

배가 든든해야 하루가 잘 풀릴 테니까.

 

미코는 믿어보기로 했다. 소년이 잘 견뎌낼 것이라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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