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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몽중살 : 꿈속의 살인

2021.01.01 15:5901.01

몽중살 : 꿈속의 살인

 

 

1.

아빠. 이제 그만해줘. 제발.’

열한 살 아이의 절박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아빠가 항상 말했잖아.’

아빠제발…….’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아이 앞에 우뚝 선 남자.  

 

남자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집나간 친아버지를 대신해 엄마가 들인 남자였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엄마는 매일 저녁 술집에서 웃음을 팔았다.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 점심에 술집으로 나간 엄마가 새벽이 되어 단골 아저씨와 함께 돌아왔다

오늘부터 이 아저씨가 네 아빠야.’

친아버지 얼굴조차 몰랐던 아이는 망설임 없이 낯선 아저씨를 아빠라 불렀다.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를 한번 보고 미소 지었다.

'착하구나.'

아이의 어깨 안쪽을 붙잡고 하늘 높이하늘에 닿을 정도로 안아 올려준 아저씨를 보며 아이는 웃음 지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제부터 아빠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잘 들어야한다고 단호한 어조로 일렀다

아빠가 집에 온지 2개월이 지났다엄마는 그 사이 술집을 그만두고 마트 캐셔로 취직 했다. 아빠는 건설업 신축 공사 현장 일용직 잡역부로 일했다. 몸은 힘들지만 일을 마치고 가족이 함께 마주하는 저녁시간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는 그런 저녁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그날은 월요일 저녁이었다. 먼저 집에 돌아온 엄마는 마트에서 팔다 남은 고등어를 사다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매콤한 고등어조림을 만들었다. 아이는 김이 모락 나는 계란말이 앞에서 포크를 꼭 쥐고 아빠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날따라 유독 아빠의 퇴근이 늦어졌다. 먹음직스럽던 고등어조림과계란말이가 차갑게 식어갔다. 식탁 위로 엄마와 아이 사이에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불현 듯 엄마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어댔다. 핸드폰을 받은 엄마는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서둘러 지갑을 챙기더니 아이를 두고 집을 뛰쳐나갔다. 엄마와 함께 휠체어에 탄 아빠가 돌아온 것은 엄마가 나간 지 나흘이 지나서였다.

흉추 12번 압박골절. 아빠가 일하는 신축공사장 2층 난간 거푸집이 무너졌다고 했다.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아빠가 일을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엄마는 마트를 그만두고 다시 술집에 나갔다. 엄마 입에서 다시 술 냄새가 풍겨났다. 방에만 있던 아빠에게도 술 냄새가 풍겨났다. 더 이상 가족이 함께 하는 저녁식사는 없었다.

 

', 잠깐 들어와'

문 닫힌 방안에서 아빠가 소리쳤다. 학교에서 돌아와 거실에서 만화를 보던 아이는 안방 문을 열었다. 방바닥에는 굴러다니는 소주병과 담배꽁초가. 뒤이어 지독한 술 냄새와 알 수 없는 찌든 냄새가 아이의 코를 찔렀다. 이불에 앉아 낮술에 벌게진 얼굴로 아빠가 말했다.

'이리 와봐. 아빠가 좋은 선물 줄께.'

방안 가득한 악취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아빠가 말한 선물이 궁금해진 아이는 한걸음에 다가갔다.

'눈 감고 누워봐. 절대 눈뜨면 안 돼. 그럼 선물도 없어.'

평소와는 다른 아빠의 얼굴. 눈빛. 숨소리…….아이는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눈을 떴을 때 앞에 있을 선물을 기대하고 누웠다. 순간 축축한 거친 손길이 아이의 옷을 찢을 듯 벗겨냈다. 아이가 움찔하자 아빠는 협박하듯 말했다

'눈뜨지 말고 가만히 있어!'

방 안을 채운 눅지근한 공기를 가르는 아빠의 목소리에 아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 피부에 느껴지는 역한 숨결. 전신을 마비시키는 지독한 고통. 짐승 같은 헐떡임. 끝나지 않을 것 만 같던 끔찍한 시간이 지났다. 꼼꼼히 몸을 씻기고 정성껏 옷을 입힌 아빠는 주머니에서 꼬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네가 갖고 싶은 거 사. 오늘 일은 엄마한테 아니 다른 누구한테도 절대로 말하면 안 돼. 비밀이야. 약속 지키면 다음에 또 줄께.'

금세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자는 아빠를 피해 구겨진 지폐를 쥐고 힘겹게 집 밖으로 나왔다하복부에 통증이 밀려왔다. 다리가 떨려 똑바로 서있을 수가 없었다. 낮부터 세차게 내리치던 비가 금세 아이를 흠뻑 적셨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아이는 비 오던 그날 모든 것을 잃었다.

 

아빠. 이제 그만해줘. 제발.’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아빠가 항상 말했잖아.’

아빠제발…….’

아이는 열한 살이 됐다지옥 같은 1년이 흘렀다책상 서랍 속 지폐가 수북해지는 만큼 아이의 몸과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선물을 주던 아빠는 언젠가부터 방법을 바꿨다. 엄마가 나가고 없는 사이를 틈타 벌을 줬다. 아무리 잘하려 해도 아이는 언제나 벌을 받아야만 했다.

열한 살 아이는 철저히, 지독하게 혼자였다. 엄마도, 선생님도 그 누구도 아이를 구원해주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속에 분노가 켜켜이 쌓여갔다. 이제는 끝내고 싶었다. 끝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오전부터 쏟아지던 장대비가 오후가 다되도록 그치지 않던 날. 그날도 엄마가 나간 사이 아빠는 한바탕 일을 치르고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아이는 주섬주섬 발목에 걸려있던 속옷과 바지를 올리고 아빠가 깨지 않게 조용히 일어났다. 행여 아빠가 깰까 발끝을 들고 조심스레 부엌으로 갔다싱크대 안쪽 칼꽂이에 식칼이 보였다. 아이는 천천히 식칼을 빼내 손에 쥐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끝이 아이의 찢긴 마음 같았다. 아이는 칼끝을 가슴에 대고 살며시 힘을 주었다. 티셔츠 깊숙이 파고 든 칼끝의 생생한 고통에 깜짝 놀라 손에 쥔 칼을 놓쳤다. '쨍그랑' 부엌 바닥을 치고 튕긴 칼끝이 안방을 향했다. 한참을 칼끝과 안방을 번갈아 보던 아이는 다시 칼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잠시 후 안방을 향했던 칼끝은 곤히 낮잠을 자고 있는 아빠를 향해 높이 들려 있었다. 아이의 머리 위로 쳐들린 칼끝이 아이의 마음 인양 어지러이 흔들렸다.

'내가 끝내야 해. 내가 이 지옥을 끝낼 거야.'

세찬 비가 내리치는 창문에 섬광이 번쩍였다. 곧이어 하늘을 찢는 굉음이 이어졌다. 아이의 쿵쾅거리는 심장과도 같은 요란한 천둥이 시작됐다. 아이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이리저리 떨리던 칼끝이 한 곳을 향해 멈췄다. 칼을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콰콰쾅!'

천둥이 세상천지를 흔드는 순간.

''

'흐억

단말마의 비명. 아빠는 감고 있던 두 눈을 부릅떴다. 식칼의 칼끝이 자고 있던 아빠의 목에 꽂혔다. 아빠는 미친 듯이 몸부림 치고 허우적댔다. 아이는 식칼에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아빠의 부릅뜬 두 눈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흔들리던 아빠의 동공이 아이에게 멈췄다. 그 순간 아빠와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영원 같던 순간의 찰나. 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쥐고 있던 식칼에 몸무게를 실었다. 서서히 식칼의 절반이 아빠의 목 안으로 삼켜졌다. '. .' 아빠의 입에서는 자전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몇 분이 지났을까. 피를 쏟아낸 아빠의 입에서 바람 소리가 줄어들었다. 아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희뿌연 눈을 부릅뜨고 영원히 멈춰버린 아빠가 보였다. 발밑으로 흐르는 새까만 피가 보였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왈칵 겁이 났다.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을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아이는 그제야 손에 쥔 칼을 놓았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어 현관에 갔다. 문 밖으로 세찬 비가 쏟아졌다. 처음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그날과 꼭 같은 장대비. 이제 아이에게 더 이상 잃을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는 문밖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내딛은 쪽의 바지와 신발이 금새 비에 흠뻑 젖어들었다.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 아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빗속으로 뛰어 들었다.

비속으로 달려 나간 아이는 이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2.

". 제가 하나, , 셋 하면 당신은 현재로 돌아와 최면에서 깨어납니다."

"하나……."

"......."

"."

편안한 안락의자에 쌓인 기정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얼굴 위로 흐른 눈물자국이 물기를 머금었다. 얼굴 가득 떠오른 편안함이 눈물자국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아직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셨죠? 약 용량을 늘려 처방전을 새로 써드리겠습니다."

"."

"수면제도 처방해 드릴게요. 잠은 주무셔야죠. 그렇죠?"

안락의자 맞은편 고급스러운 원목 책상에 앉아 처방전을 작성하는 의사가 말했다.

". 감사합니다."

"다음 주 예약도 같은 시간으로 잡을게요. 괜찮으시죠? 점점 안정되고 있어요. 포기하지 마시고 지금처럼 노력해요."

기정은 두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훔치고 일어섰다. 문 앞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잡고 말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의사의 인사를 뒤로하고 정신과 상담실을 나섰다.

 

오후 3. 닭장 같은 빌딩 속 샐러리맨들이 정신없이 바쁠 시간병원을 나온 기정은 건물 지하에 세워 놓은 붉은색 포르쉐 카이엔에 올랐다. 기정은 엔진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액셀을 밟았다. 포르쉐의 우렁찬 엔진소리가 다운됐던 기분을 업시켰다. 스포츠 선글라스를 쓰고 백미러를 조정해 자신을 살폈다아무 문제없었다자신감이 차올랐다. 주차장 차단기가 올라가자 포르쉐가 건물을 빠져 나와 도로로 합류 했다곧이어 포르쉐는 빽빽이 들어선 빌딩 숲을 벗어났다. 기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마천루 아래 강남대로를 질주했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붉은색 차체에 비친 빌딩 그림자가 기정을 따라 물결치듯 흘러갔다.

삼십여 분을 달려 청담동에 도착했다. 붉은색 포르쉐는 전면이 유리로 덮인 7층짜리 고급 빌라 속으로 사라졌다. 빌라 펜트하우스 자동 도어 록을 열고 기정이 안으로 들어갔다.

'. . . .'

도마 위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 버터가 섞인 고기 굽는 냄새가 기정을 반겼다. 소리를 따라 거실에 놓여있는 천연 소가죽 소파 세트를 지났다.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서자 요리에 열중인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기정이 온 줄도 모르고 돌아서서 요리에 열중인 그녀. 작년에 입학한 세중 대학교 첫 엠티에서 가까워져 사귀게 된 동갑내기 미정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미정의 뒤에 섰다. 바람을 머금어 양 볼이 볼록했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저절로 미소 지어졌다. 정신없이 분주한 미정의 뒤에서 지그시 바라보던 기정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겼다

그 순간 기정의 마음속에서 격렬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안 돼…….' 기정은 애써 마음의 소리를 무시했다. 기정의 품안에서 여전히 호박을 썰던 미정이 말했다.

"왔어?" 

호흡을 가다듬고 기정이 말했다.

". 방금. 언제 왔어? 오늘 수업 있잖아."

여전히 돌아선 채 미정이 말했다.

"오후 전공 수업 교수님이 사정이 있어서 휴강이래. 자기 오늘 상담 받는 날이잖아."

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정이 안고 있던 그대로 돌아선 미정이 발끝을 들고 기정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자기 상담 받는 날은 점심 안 먹잖아. 늦게라도 내가 차려주려고."

". 나 감동 먹었어. 정말로."  

양 볼이 발그레 상기된 미정이 돌연 기정의 등을 떠밀고 말했다

"아직 조금 더 해야 돼. 어서 손 씻고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어. 다 되면 부를게"

미정의 성화에 못 이겨 손을 씻고 돌아온 기정은 소파에 앉아 요리에 분주한 미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균형 잡힌 몸매. 상냥한 성격 그리고 과 퀸카로 칭송받는 미모그런 그녀가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있다니. 기정의 가슴속엔 묘한 승리감이 싹텄다. 언제까지나 그녀와의 행복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담은 어땠어? 어릴 적 기억이 조금이라도 돌아왔어?"

미정의 말에 손에 든 와인 잔을 놓고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이제 곧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힘내."

미정이 위로하듯 와인 잔을 기정 쪽으로 내밀었다

''

선혈 같은 레드 와인이 출렁거렸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기정은 남아있던 와인을 단숨에 비우고 미정을 바라봤다.

"재작년 자기 양부모님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자기 혼자 이 집에서 쓸쓸하게 지냈잖아

빨리 기억을 찾아서 잃어버린 친부모님 찾았으면 좋겠어."

술기운이 돌아 양 볼이 발그레한 미정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동안 뵌 적도 없고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데, 지금 내가 그분들을 찾는 게 맞는 걸까?"

기정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미정은 그런 기정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어머 시간 봐. 나 이제 가야겠어."

함께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기대 TV를 보던 미정이 일어났다. 벽걸이 시계속 시침이 8시를 가리켰다. “벌써?” 이제 그녀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가까스로 억눌렀던 욕망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거칠게 그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기정은 일렁이는 격렬한 욕망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괜찮으면 자고 가도 돼."

"아냐. 집에 가서 내일 수업준비 해야 해. 무역 수업 리포트 아직 손도 못 뎄거든. ."

"그럼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께"

"아냐. 바로 앞이 역이고 지하철 타면 금방이자나. 지금 차타면 꽉 막힌 도로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해. 상담하고 피곤할 텐데 푹 쉬어. 안녕."

말을 마친 미정은 서둘러 도어 록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풍기던 은은한 향기가 그녀를 따라 사라졌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

미끄러지듯 닫히는 현관문 틈 사이로 기정이 소리쳤다.

집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또다시 혼자가 됐다. 기정은 그녀가 있던 자리의 온기가 천천히 식는 것을 느꼈다텅 빈 적막감이 기정을 엄습했다. 기정은 거실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미정이 서둘러 돌아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 미정이 기정의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기정에게 있어 미정은 첫 경험을 나눈 여자였다. 기정은 멍하니 그날을 회상했다. 사귄지 얼마 안 돼 처음으로 미정을 집으로 초대했다. 오늘처럼 함께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셨다. 더 이상 할 말이 떨어지자 기정은 그윽한 눈으로 미정을 응시했다. 미정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다가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가벼운 입맞춤이 키스로 바뀌고 이내 서로의 달콤한 혀가 휘감겼다. 소파에 앉아 오래도록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미친 듯이 심장이 요동치던 기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기정은 미정을 안아들고 침실로가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 눈을 마주쳐 키스를 하고 천천히 옷을 벗겼다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 미정의 나신은 비너스처럼 아름다웠다. 기정과 미정은 오래오래 정성들인 전희를 나눴다.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마침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려던 기정은 치욕적인 실패를 맛봤다. 꼿꼿이 치솟았던 성기가 결정적 순간에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기정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고, 미정은 그런 기정을 조용히 안아줬다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이후에도 실패의 나날들이 이어졌다기정의 자존심은 추락했고 자괴감과 굴욕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기정이 정신과 상담을 결심한 이유는 잃어버린 11년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지워진 기억과 자신의 발기부전이 연결돼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기정은 자신을 괴롭히는 비극을 하루 빨리 끝내고 싶었다.

새벽 1. 밤늦도록 서재에서 해리성 기억상실증을 검색한 기정은 노트북 커버를 닫았다. 오랜 집중 탓에 눈이 모래알처럼 까끌 거렸다. 기정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침실로 갔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수면제 한 알을 물과 함께 삼키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 뒤 약기운이 돌자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기정이 눈을 뜨자 어두운 밤거리를 쫓기듯 달리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거리에 진동했다. 사악한 어둠에 침잠된 골목은 낭떠러지와 다름없었다우뚝 선 담벼락과 거대한 주택들이 쓰러질듯 다가왔다. 무심코 내려다 본 손은 어린 아이의 손이었다.

매일 밤 기정을 괴롭히는 끔찍한 자각몽이 다시 시작됐다. 멀리서 가래 섞인 거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기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등 뒤로 피투성이 괴물이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기정을 향해 달려왔다. 어린 기정은 공포에 질식할 것 같았다. 끔찍한 괴물을 피해 달리고 또 달렸다.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골목 끝 장막 같은 어둠 사이로 파란 지붕의 주택이 보였다. 낡은 녹색 철 대문담장 밖으로 늘어진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핏물을 떨어트리는 썩은 감이 매달려 있었다. 평소에는 이 파란지붕 앞에서 쫓아온 괴물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고 잠에서 깼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느새 등 뒤로 기정을 쫓아온 괴물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기정은 서둘러 녹색 철 대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멈추지 않는 헐떡임. 미친 듯 쿵쾅대는 심장소리. 기정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애써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문 틈새로 밖을 살폈다. 그때였다. 문득 기정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기정이 돌아보려던 찰나 누군가가 기정의 어깨를 거칠게 낚아챘다.

기정은 갑작스러운 어깨의 통증에 깜짝 놀랐다. 등 뒤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여자가 기정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손톱자국이 파고들 정도로 움켜잡힌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뒤이어 여자는 기정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여자는 입을 크게 벌리고 뭐라 소리 쳤다. 하지만 기정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낯선 여자에 휘둘려 속절없이 흔들리던 기정은 현기증이 밀려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기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흔들리는 몸을 멈추고 싶었다. 기정을 흔들어 대는 여자를 멈추고 싶었다기정은 두 손을 힘껏 뻗었다. 손끝에 부드러운 피부가 닿았다. 여자의 목인 듯 했다. 팔을 좀 더 뻗어 손가락으로 와락 움켜잡았다.

'날 놔둬. 그만! 그만하라고.'

손등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손가락에 힘을 줬다. 점점 강하게. 그리고 오래도록기정의 팔을 붙잡고 거칠게 때어내려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뒤이은 적막. 가득한 어둠. 기저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눈에 초점이 잡히고 망막에 상이 맺히자 흐릿한 실루엣이 실체를 갖춰갔다. ‘!’ 기정은 숨이 막혔다. 누워있는 상대를 알아본 순간 강렬한 충격이 밀려왔다.

여전히 기정이 조르고 있는 목 위로 부릅뜬 두 눈에 드러난 흰자위. 벌린 입가에 하얀 거품을 물고, 일그러진 얼굴로 기정을 쏘아보는.

기정. 바로 그 자신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기정은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머리가 깨질듯 조여 왔다베개와 침대보에는 기정이 흘린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기괴하고 끔찍한 악몽이었다.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생경한 감촉이 기정을 몸서리치게 했다.

'그 꿈. 뭐였지? 평소하고는 전혀 달랐어.'

머릿속을 잠식한 끔찍한 잔상들을 떠올리는 사이 협탁 위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에서 울리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 꿈속의 기정을 현실로 끌어냈다기정은 팔을 뻗어 휴대폰을 받았다.

"아직도 자?"

", . 지금 일어났어."

"벌써 낮 12시야. 어제 늦게 잤구나?"

". 조금."

휴대폰 너머 미정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간밤 꿈속의 일이, 부릅뜬 눈빛이 아직도 기정을 사로잡았다. 불쾌감이 밀려왔다. 쉬고 싶었다.

"저기 씻고 조금 이따 전화할게. 미안해."

휴대폰 너머 미정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두통이 가시지 않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기정은 침대를 빠져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문을 열고 머그컵에 우유를 가득 따랐다. 차가운 우유가 말라붙은 목안으로 흘러들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짐을 느꼈다. 조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기정은 우유를 마시며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검정 브라운관에 빛이 번쩍이고 곧이어 영상이 흘러 나왔다.

순간 TV를 지켜보던 기정의 눈이 화면에 고정됐다.

'쨍그랑'

기정의 손에서 떨어진 머그컵이 대리석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깨진 머그컵에서 흘러나온 우유가 양가죽 카펫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TV 화면에는 원거리 앵글로 찍힌 주택 사진이 고정돼 있었다파란 지붕에 녹색 대문, 담장 밖으로 늘어진 감나무기정이 꿈에서 봤던 그 집이었다화면의 절반을 가린 붉은 띠에 커다란 글자가 고정됐다

'긴급속보. 천안시 연선동 주택서 잠자던 주부 목 졸려 숨진 채 발견'

 

3.

천안시 주부 살인사건이 매스컴을 타자 관할인 동남경찰서에는 빠르게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수사 회의는 국과수 부검결과를 토대로 진행됐다자리에는 동남서 강력계 형사 영섭 경사와 우성 순경이 동석했다. 충남을 통틀어 1년 만에 발생한 강력사건이었다. 형사들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먼저 승종 경감의 사건 개요 설명으로 회의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912일 목요일. 연선동에서 발생한 주부 살인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피해자의 이름은 장순애, 44세 여성, 160cm, 몸무게 60kg 입니다피해자는 자신이 살던 단층 주택 안방에서 목이 졸려 숨진 것을 상갓집에서 돌아온 남편에 의해 12일 오전 6시경에 발견됐습니다." 

승종 경감이 프로젝터의 조작 버튼을 눌렀다.

"범행이 이루어진 현장 사진을 봐주십시오."

회의실에 앉은 모두가 스크린을 쳐다봤다.

"대문과 현관은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발견 당시 피해자는 일반 박스 테이프로 손목과 발목이 결박 된 채 천장을 향해 누워있었습니다. 피해자의 하의가 속옷까지 모두 벗겨진 상태였으나 부검결과 성폭행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방안은 어지럽게 어질러져 있었고, 집에서 없어진 물품은 현금 25,000원입니다."

스크린은 피해자의 목 부분이 확대된 사진으로 전환됐다.

"국과수 부검결과 피해자의 목에 뚜렷한 액흔 자국이 발견된 점안면에 종창 및 국소적 청색증이 발견된 점. 설침의 치열 외 돌출, 대소변 배출종말성 구토가 발견된 점등을 미루어 액살에 의한 사망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다만 손톱에 의한 손상 등이 없던 점으로 보아 장갑을 착용 했을 가능성이 제시됐습니다. 위장 속에서 발견된 음식물로 사망시각은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남편 47세 박철구 씨는 천안 상갓집의 확인으로 알리바이가 확인됐습니다. 여기까지 질문 있습니까?"

묵묵히 상석에 앉아 브리핑을 듣고 있던 강력계 팀장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 말씀 하십시오."

"대체 어떻게 기자들이 먼저 냄새를 맡고 뉴스에 터트린 건가?"

"사건 당일 아침 때마침 지역신문 기자가 근방에서 원도심 부흥 걷기 대회를 취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상을 구긴 팀장이 팀원들을 향해 매섭게 다그쳤다.

"사건이 매스컴을 탄 이상 우린 조속히 성과를 보여줘야 하네. 성질 급한 매스컴이 비판 기사를 쏟아 내기 전에 말일세."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회의실 안은 엄숙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팀원들을 짓누르는 무거운 적막을 깨고 승종 경감이 입을 땠다.

". 다른 질문 있으신 분?" 

가만히 앉아 있던 영섭 경사가 손을 들고 말했다.

"피해자의 상태로 미루어 보아 금품을 노리고 침입한 강도가 충동적으로 강간살인을 저질렀거나성도착자가 침입 후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생각 됩니다. 범행 장소 근처 폐쇄회로에 찍힌 것은 없었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범행이 발생한 연선동은 구도심으로 슬럼화가 진행 중이네아무래도 범죄 감시에는 취약하지. 주택 근방은 폐쇄회로가 없는 사각지대였어."

회의실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일단 우성이와 제가 현장 주변을 탐문 하겠습니다승종 선배님과 성완인 천안 내 성범죄 전과자들을 맡아 주십시오."

승종 경감과 성완 경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특수강도 전과자를 조사할게."

동석한 재만 경사가 말했다.

잠시 텀을 두고 승종 경감이 말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시면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팀장님 한 말씀 하시죠."

강력계 팀장이 팀원들을 둘러보며 마무리 했다.

"이번 사건으로 시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네. 시민들의 안녕을 위해 하루 빨리 범인을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길 바라네. 이상!"

회의가 끝나자 형사들이 저마다 사건에 대해 논의 했다.

영섭은 어수선한 회의실을 나서며 말했다.

"우성아 가자."

"선배님 같이 가요."

휴대용 수첩에 깨알같이 회의 내용을 적던 우성이 서둘러 뒤따랐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보이는 흉물스러운 속살영섭은 말없이 낡은 녹색 철 대문을 바라봤다주인의 비극도 모르고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감나무에는 잘 익은 단감이 매달려 있었다영섭은 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영섭은 열려있는 현관문을 거미줄처럼 막고 있는 노란색 폴리스 라인을 북북 뜯어낸 뒤 주택 안으로 들어섰다. 범행이 있었던 안방에는 그날의 끔찍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섭은 그 흔적들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당시 상황을 그려봤다.

- 안방 한가운데 주부가 누워 있었다.

- 초인종이 울리고

- 주부는 잠에서 깬다.

- 주부가 묻는다.

- 범인이 대답한다.

- 주부는 현관문을 열고 범인을 안방으로 들인다.

- 범인은 돌연 주부를 제압하고 손발을 결박한다.

- 범인이 방안을 뒤진다.

- 주부의 지갑에 있던 현금 이만 오천 원을 갈취한다.

- 훔칠 물건을 찾는 것을 그만두고 주부의 하의를 벗긴다.

- 범인은 강간을 그만두고 주부의 목을 졸라 살해한다.

- 이후 집을 빠져 나간다.

영섭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범인의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만 오천 원만 갈취한 이유, 강간을 시도하려다 말고 살인을 저지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새 생각에 잠겨 있던 영섭 옆에 우성이 수첩과 볼펜을 꺼내들고 섰다방안은 볕이 내리쬐는 한 낮 임에도 불구하고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둡고 서늘했다.

"이방이 범인이 피해자를 목 졸라 살해한 방이군요. 그래서인지 조금 을씨년스럽네요. “

두 손으로 어깨를 비비던 우성은 핸드폰을 꺼냈다. 우성은 핸드폰의 플래시 기능을 켠 뒤 그늘진 방안을 천천히 훑었다. 옷장과 협탁의 서랍은 전부 밖으로 열려 있었다어지럽게 널린 옷가지들과 쓰레기들이 방바닥에 가득했다. 각각의 물건에 놓인 노란색 증거품 번호표는 영섭에게 무질서 속의 질서로 보였다.

"발 디딜 틈도 없어요. 선배님. 집을 이렇게 파헤쳐놨는데 돈이 없자 홧김에 살해한 것 아닐까요?"

"피해자의 옷장 속에는 귀금속과 폐물이 그대로 있었어. 처분이 어렵다지만 보석을 그냥 두고 간 건 이상해. 단순히 금품을 노린 강도는 아닌 것 같아."

"새벽시간에 지장 없이 주택에 침입한 점을 봐서 면식범의 소행이 아닐까요?"

방안을 둘러보던 영섭이 돌아서며 말했다.

"지금부터 그걸 알아봐야지. “

영섭과 우성은 주택을 나와 녹색 철 대문 앞에 섰다.

"이 집을 기점으로 왼쪽은 네가. 오른쪽은 내가. 피해자의 이웃관계와 사건 시간대 행적을 자세히 조사하자. 오케이?"

"? 선배님이랑 같이 하는 게 아니고요? 제가 돌아야 되는 왼쪽 집들이 대충 봐도 선배님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 데요……."

"그러니 더 네가 돌아야지. 수사의 기본은 탐문이다! 고로 베테랑 형사가 되려면 탐문을 많이 해야 된다 이거지."

". ."

우성이 체념한 듯 말했다.

"정보가 있건 없건, 16시에 저기 보이는 구멍가게 앞에서 보자고."

"!"

우성이 힘차게 대답했다

 

영섭은 탐문수사를 마치고 구멍가게 앞 평상에 걸터앉아 우성을 기다렸다. 휴대폰의 시계는 165분을 지나고 있었다가을의 문턱이라지만 아직은 뜨거운 볕에 땀이 흐르는 9월이었다. 혼자서 집집마다 탐문조사를 하고 있을 1년차 우성이 조금 딱하게 생각됐다.

'경험이 실력을 만드는 거지.'

우성의 사수 영섭은 강력계 형사로서 후배 우성을 하드 트레이닝 시켰다

"선배님! 다했어요."

고개를 든 영섭은 골목 어귀에서 뛰어오는 우성을 봤다. 폴로셔츠 가슴께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수고했어."

"좀 늦었습니다. 헉헉."

한걸음에 달려온 우성이 숨을 고르며 평상에 앉았다. 영섭은 미리 사 둔 시원한 이온 음료를 우성에게 건넸다.

"뭐 나온 게 있어?"

목구멍에 이온 음료를 쏟아 붓던 우성이 들고 있던 수첩을 펼치고 말했다.

"열다섯 집중 3집은 폐가, 7집은 부재중, 5집에서 거주자와 만났습니다."

영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피해자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피해자는 서울 출신으로 스무 살에 현재 남편과 결혼 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고향인 천안에 정착 했다고 합니다. 이사는 없었고, 부부사이는 원만했다고 하네요.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포항대 학생이라고 합니다. 현재 아들은 포항에서 혼자 자취중이고요."

"사건 시간대에 별다른 건 없었어?"

"새벽 시간이었고 모두 연로하신 노인 분들이라 본 것도, 들은 것도 없었답니다."

우성이 수첩을 탁 덮으며 말했다.

"이상입니다. 선배님은 어땠어요?"

"수고했어. 나도 마찬가지였어. 대부분 버려진 집 아니면 홀로 사는 노인들뿐이더군."

"면식범의 범행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씀이시죠?"

"일단 피해자 근방에 사는 이웃은 배제해야 할 것 같아."

"그럼 이제 어쩌죠?"

영섭은 손아귀 속 빈 캔을 구기며 말했다.

"서로 돌아가야지. 승종 선배네 조가 맡은 성범죄 전과자 쪽에서 뭐라도 건졌길 바래보자."

그때 범행이 벌어졌던 녹색 대문 앞에 서있는 남자가 영섭의 눈에 띄었다. 남자는 집 앞에 서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중인 듯 했다. 이십대 초중반의 나이에 180cm대 큰 키와 약간 마른 듯 적당한 체격온화해 보이는 얼굴의 귀공자풍의 청년이었다.

영섭의 시선을 눈치 챈 우성이 영섭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선배님. 저기 서있는 도련님 장난 아닌데요?"

"뭐가?"

"실크 셔츠는 발망, 정장바지는 지방시, 로퍼는 구찌. 얼핏 보이는 손목시계도 천은 넘을 것 같고……. . 저게 다 얼마야. 완전 재벌 집 도련님인데요?"

얼굴을 찌푸린 영섭이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어떻게 한번 보고 다 아는 건데?"

"제가 동남경찰서를 주름잡는 패셔니스트 아닙니까."

"패션 테러리스트는 아니고?"

"? 선배님. 무슨 말씀을 그리 섭하게 하십니까."

"하하. 농담이야. 농담."

영섭은 낡아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작은 동네에 명품을 휘감은 청년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 생각했다. 영섭은 녹색 대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청년의 뒷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범행이 벌어진 주택 앞을 서성이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영섭에게 우성이 말했다.

"설마 대학 다닌다는 피해자 아들은 아니겠죠?"

"그사이 로또라도 맞았다는 거야설마. 그건 아닌 것 같아."

녹색 대문 주택을 한 참을 바라보던 청년은 자신의 두 손을 응시했다.

순간 청년의 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 경련하기 시작했다.

", ? 왜 저래?"

우성이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영섭과 우성이 청년의 상태에 놀라 벌떡 일어선 순간 청년의 무릎이 힘없이 꺾여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처박혔다. 영섭과 우성은 서둘러 쓰러진 청년에게 달려갔다영섭이 청년의 좌측 목의 맥을 짚는 사이 우성은 청년의 뺨을 때렸다. 다행히 혼절한 청년은 곧바로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 . . 씨 이제 그만 하시고 가서 물 좀 사다주세요."

여전히 뺨을 때리던 우성은 그제야 멋쩍은 듯 일어나 구멍가게로 뛰어갔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세요?"

풀린 눈으로 초점이 돌아온 청년이 말했다.

". . 이제 괜찮아요.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가까이서 본 청년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그늘져 있었다. 영섭은 청년의 어깨 안쪽으로 손을 넣고 힘을 줘 일으켜 세웠다. 청년은 영섭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일어섰다.

"선배님 물 사왔어요."

때마침 우성이 물을 건넸다.

". 이거 마셔요."

영섭은 우성의 손에서 건네받은 생수병의 뚜껑을 따 청년에게 건넸다. 차가운 생수가 청년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젠 괜찮은 것 같습니다."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습니까? 저희가 모셔다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젠 정말로 괜찮습니다."

영섭과 우성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려 녹색 대문 집 우측 외따로 뻗은 골목길로 걸어갔다.

"뭐죠? 저 도련님은? 허우대는 멀쩡한데 속은 곯았나 보네요. 쯧쯧."

우성이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딱한 듯 혀를 찼다.

"내가 부축할 때 몸이 돌덩이 같았어. 보기와는 다르게 꽤 근육질 몸이던데……."

청년은 영섭과 우성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언덕배기로 난 골목을 따라 걸었다저 멀리 작아진 청년이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영섭은 청년이 주시하는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저 건물은 뭐지? 아이보리색 건물 말이야."

우성이 고개를 쭉 내밀고 영섭이 가리키는 건물을 살펴봤다.

"천우, 유치원. 유치원인 것 같은데요. 도련님은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이만 서로 돌아가시죠. “

영섭은 청년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 그래. 가자고."

멀리 청년을 뒤로하고 영섭과 우성은 차를 주차해둔 동네 초입으로 돌아왔다.

"이야. 이 차. 아까 그 도련님 차인가 봐요. “

우성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영섭의 구형 소나타 뒤로 붉은색 포르쉐가 주차돼 있었다. 우성은 외제차로 달려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구석구석 살펴봤다.

으이구. 못 말려…….”

영섭은 그런 우성을 개의치 않고 소나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켰다. 백미러로 바라본 붉은 외제차가 내리 쬐는 태양빛에 반사됐다. 영섭은 명품으로 휘감은 청년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구도심에 서있는 고급 외제차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조수석 문을 연 우성이 차에 타며 말했다.

". 포르쉐 카이엔. 저차 차 값만 12천만 원은 하는데. 아까 도련님 못해도 이십대 초반으로 밖에 안보이던데 장난 아니네요. ! 나도 이십대인데……. 갑자기 우울해 지네."

"우성이 너도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그랬어. 하하"

영섭이 대꾸하고 핸들을 360 틀어 시내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영섭은 서에 가는 내내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위화감의 정체를 고민했지만 명쾌하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조용히 전방을 주시하던 영섭이 말했다.

"아까 그 외제차 번호판 봤어?"

". 왜 그러세요?"

"그 번호판 번호 나한테 문자로 보내봐."

우성이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 부잣집 도련님이 수상하세요?“

수상이라기 보단……. 십 년 경찰 밥 먹은 형사의 감 이랄까? 뭔가 있는 것 같아."

우성이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또 감이에요? 흐흐."

영섭은 동남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건물 앞에 서있던 청년의 이질적인 모습이 영섭의 뇌리에 맴돌았다

 

4.

꿈에서 봤던 집이 실제로 존재한다. 게다가 꿈속의 살인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기정은 하룻밤 사이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기정은 급히 현관으로 뛰어갔다. 현관에 나란히 정리돼 있던 신발이 헝클어져 있었다.

'신발이 원래 이랬었나? ‘

잠들기 전 거실에 가지런히 개어뒀던 옷 역시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집안의 모습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기정은 몹시 초조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기정은 무의식 상태로 좀비처럼 걸어가 사람을 죽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숨통을 조여 오는 불안감에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기정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치듯 떠올랐다기정은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핸드폰을 잡고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의 통화음이 지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이미소 심리 클리닉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미소 박사님? 박사님 저, 저 좀 도와주세요!”

. 환자분. 전 간호사 정세아입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박사가 아니었다. 기정은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사님께 긴히 상담 드릴게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전 박사님 환자 조기정입니다. 생년월일은……."

기정은 직원에게 생년월일을 읊었다.

". 조기정 . 오늘은 이 박사님이 개인 사정으로 휴진하셨습니다. 전하실 말씀 있으시면 제가 쪽지 남겨 놓……."

미소가 부제중이라는 말을 들은 기정은 전화를 끊었다. 뒤이어 미소가 긴급 상황 시 알려준 직통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오랜 대기음 끝에 미소가 전화를 받았다.

". 이미소 정신의학 박사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께 상담 받고 있는 조기정입니다. 몹시 중요한 일이라서 전화 드렸습니다."

"네 기정 씨. 제게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에게서 몽유병이 나타날 수 있습니까?"

"기억상실과 몽유병이요."

기정의 말을 곱씹은 미소가 말했다.

"드문 케이스지만 해리성 기억상실증 환자에게서 수면 중 보행증이 나타난 사례가 있긴 합니다. 두 증상 모두 뇌의 중추신경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생기는 증상이니까요."

", 그럴 수가……."

휴대폰을 꽉 잡은 기정의 손이 하얗게 변했다. 기정은 충격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기정의 침묵에서 이상을 눈치 챈 미소가 다급하게 말했다.

"기정 씨 혹시 몽유병 현상을 경험 하신 거예요? 제게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아니. 다음 주 상담 일정을 앞당길까요?"

"........"

"기정 씨. 기정 씨!"

기정은 자신에게 일어난 미스터리한 일을 털어 놓고 싶었다. 하지만 범죄 사실까지 고백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격렬한 갈등 끝에 기정은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기정은 뒤이어 미정에게 전화했다. 얼마간의 연결음 뒤 미정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깐 목소리가 안 좋던데 몸은 괜찮아?”

여전히 미정의 목소리는 밝았다.

, . 그보다 말이야. 넌 어제 잘 들어갔어?”

후훗. 뭐야. 일찍도 물어본다. 지하철 타고 바로 집에 갔지. . 전화 한다고 했던 거 깜빡했네. 미안. 미안.”

기정은 머뭇거리며 망설이다 물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줘. 혹시 어제 밤에 내가 너희 집에 찾아가거나 그런 일은 없었지?”

? 없었는데? 나도 집에서 리포트 좀 쓰다가 10시쯤 잠들었어. 그런데 왜? 무슨 일 있었어?”

, 아냐. 별일 아냐. 좀 있음 수업시간이지? 수업 잘 듣고 이따가 전화할게.”

, . 근데 오늘 수업 끝나고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힘들 것 같고 내일 봤음 좋겠는데.”

친구들? 오랜만에 보는데 재미있는 시간 보내.”

응 밥 잘 챙겨먹고 있어. 안녕 자기야.”

미정은 기정의 이상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했다.

불안감에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운 기정은 직접 사건 현장에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노트북을 켜고 포털 검색창에 천안 주부 살인사건을 검색 했다. 사건은 온라인상에 큰 화제인지 관련 기사만 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중 개인 블로거의 포스팅에서 사건 현장의 주소를 어렵사리 찾아낼 수 있었다.

"천안……."

천안은 어릴 적 기억을 잃은 그가 양부모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기억을 잃고 헤맸던 곳에서 꿈속의 살인이 벌어진 우연이 기정의 마음을 불안케 했다그곳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하지만 기정의 두 눈으로 현장을 확인해야 했다. 망설이는 마음을 다잡고 결심했다. 기정은 곧바로 외출복을 꺼내 입고 포르쉐에 올랐다.

기정이 탄 포르쉐는 경부 고속도로를 달려 한 시간여 만에 천안 IC를 빠져나갔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집은 차로는 들어 갈 수 없는 조그만 골목길에 위치했다. 골목 초입에 차를 주차한 기정은 휴대폰 지도를 보며 길을 따라갔다. 드문드문 서있는 집들을 지나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정의 앞에 낯익은 집 한 채가 서있었다.

꿈속의 파란 지붕, 녹색 대문, 담장 밖 감나무까지. 꿈속의 집이 기정의 눈앞에 현실로 존재했다. 기정의 꿈과 다른 하나는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현관의 노란색 폴리스 라인뿐. 범죄 현장임을 알리는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오롯이 현실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가슴이 요동쳤다얼굴에 몰려 있는 핏기가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꿈속의 일들이 현실이라는 말인가. 꿈속에서 저지른 살인마저도…….

목을 졸랐을 때 손끝에 전해졌던 미세한 떨림이 다시 떠올랐다. 기정은 살인으로 더렵혀진 두 손을 응시했다. 순간 기정의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진 듯 혼란이 밀려왔다. 처음 느껴보는 격통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정의 귓가에 늘어진 테이프를 재생한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괘에에에엔 차아아안 으으으으시이이이입니니니가아아아아."

정체를 알 수없는 소리가 뺨의 통증과 함께 실체를 갖춰갔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세요?"

기정의 눈에 짧은 머리를 한 강인한 눈빛의 남자가 비쳤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을 깨달은 기정이 천천히 말했다.

". . 이제 괜찮습니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기정은 짧은 머리 남자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선배님 물 사왔어요."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파마머리 남자가 짧은 머리 남자에게 생수를 건넸다.

". 이거 마셔요."

짧은 머리 남자가 직접 생수병의 뚜껑을 따 기정에게 건넸다. 차가운 생수를 마신 기정의 흐릿한 정신이 이내 맑아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젠 괜찮은 것 같습니다."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습니까? 저희가 모셔다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젠 정말로 괜찮습니다."

자신을 도운 두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한 기정은 기분 나쁜 녹색 대문을 지나 골목길을 올라갔다. 대낮의 골목은 꿈속의 어두운 골목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주택 몇 채 너머 아이보리 페인트로 칠한 건물 한 채가 기정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기정은 천천히 아이보리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건물 우측 목재 현판에 검은색 글자가 쓰여 있었다.

"천우 유치원. “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낯익은 이름 같았다. 기정은 천천히 건물을 살펴봤다. 무척 오래된 2층 건물이었다. 본래의 색상이었을 아이보리색 페인트는 본연의 빛깔을 잃고 거무튀튀하게 변색 돼있었다. 낡은 건물 밖으로 희미하게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운영 중인가……. ! 여전히?’

데자뷔처럼 기정에게 건물은 너무나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리움 보단 이유모를 불쾌감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기정의 머릿속 깊은 곳이 간질 거렸다. 어렴풋이 떠오르려는 기억을 차단당하는 느낌이었다. 잃어버린 기억과 매우 깊이 연관된 곳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유치원 정문이 열리자 안에서 머리가 희끗하게 바란 중년 여성이 걸어 나왔다. 손에는 작은 물뿌리개가 들려 있었다. 건물 앞에 마련된 작은 화단에 물을 주려는 듯 했다. 기정의 예상대로 중년 여성은 화단에 심겨있는 식물들에 물을 뿌렸다. 기정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여성을 관찰했다.

금테 안경. 낡은 감색 투피스 정장. 도드라진 광대. 유독 튀어 나온 광대만 봐도 그녀가 마른체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치원 건물처럼 기정의 눈에 비친 여성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중년 여성에게서 익숙함을 느낀 순간, 갑자기 기정의 손이 세차게 떨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용솟음 쳤다. 숨이 차오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강렬한 살의가 머릿속에서 말을 걸었다.

'죽여! 저년을 죽여 버려!!!'

머릿속의 목소리가 기정에게 속삭였다. 하이 톤의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기정은 여성의 말대로 왠지 눈앞의 중년여성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머릿속의 목소리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깨부숴. 저 망할 년의 머리를 깨부숴버려! 흘러나온 뇌수를 잘근잘근 짓밟아 버려!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끔찍한 유혹의 속삭임기정은 어느새 그녀의 머리를 깨부숴 버리겠다고 생각했다결심이 서자 손의 떨림이 멈췄다.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중년 여성이 기정의 몇 발자국 앞에 있었다어느새 주워들었는지 기정의 손에 차가운 벽돌이 들려 있었다. ‘지금이야. 내리쳐!’ 기정이 홀린 듯 막 여성을 향해 벽돌을 내리치려던 순간.

'안 돼!'

갑작스러운 내면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기정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손안에 차갑고 단단한 벽돌의 감촉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악마에게 홀린 것 같았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공포에 몸서리가 쳐졌다. 기정은 골목 가에 벽돌을 집어 던지고 도망쳤다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분노와 살의였다. 자신을 유혹하던 달콤한 목소리. 기정의 안에서 살인을 부추기는 자는 누구일까.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정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기정이 빌라로 돌아온 것은 땅거미가 지고 난 한밤중이었다. 계속된 극도의 불안감은 기정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하루 밤을 꼬박 지새운 기정은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고 다시금 깊은 몽환의 세계로 침잠했다.

 

어두운 . 기정은 익숙한 골목길에서 눈을 떴다. 어김없이 기정의 자각몽이 시작됐다.

등 뒤로 피투성이 괴물이 달려왔고. 어린 기정은 괴물을 피해 골목길을 달렸다. 장막 같은 어둠 사이로 녹색 철 대문 주택이 보였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쳤다필사적으로 달렸지만 어느새 괴물은 기정의 등에 입김이 닿을 정도로 바짝 뒤쫓아 왔다. 괴물을 떨쳐내기에는 어린 기정의 속도로는 역부족이었다절박한 상황. 끝없이 계속되는 골목사이로 익숙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기정이 현실에서 봤던 천우 유치원.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괴물의 역겨운 냄새가 코앞에서 풍겼다. 괴물의 날카로운 손톱이 당장이라도 기정의 등에 박힐 것 같았다. 기정은 유치원 정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건물 안은 어두컴컴했다. 기다란 복도 끝에 마른 여성이 돌아서 있었다. 복도를 지나기 위해서는 여성을 지나가야만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기정은 여성에게 다가갔다. 기정이 돌아선 여성을 피해 지나가려던 순간. 갑자기 여성의 머리가 기정을 향해 360도 홱 돌았다. 기정은 심장이 멎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여자의 얼굴은 튀어 나올 것 같은 광대와 말라비틀어진 얼굴 가죽이 흡사 해골과 다름없었다. 금테 안경 속으로 광기 어린 안광이 빛났다. 기정은 흉측하지만 현실에서 자신이 죽일 뻔했던 바로 그 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정은 깨달았다. 기정이 겪은 현실이 기괴한 꿈으로 재현 됐다는 것을. 어쩌면 그동안 반복됐던 꿈들이 기정의 어린 시절의 일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골같은 여성이 비척비척 기정에게 다가왔다. 기정은 여성을 헤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의 여성이 죽게 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기정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들린 두 팔이 여성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서히 손가락에 힘이 가해졌다.

'안 돼! , 그만…….‘

 

5.

두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첫 번째 살인과 동일한 수법이었다.

동남경찰서는 발칵 뒤집혔다. 사건은 연쇄살인 사건으로 전환됐다. 재빨리 서북경찰서와 합동 수사본부를 마련했고 본청에서도 공조를 위해 형사들이 내려왔다. 두 건의 살인에서 박스 테이프로 결박한 수법을 따 박스 테이프 살인사건이라 명명했다.

동남경찰서의 형사들은 그야말로 비상상황이었다. 첫 번째 살인에서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두 번째 살인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이다. 고위급 간부와 수십 명의 형사들이 모여 2차 수사 회의가 재개됐다.

"박스 테이프 살인사건 수사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사건의 피해자 신원부터 설명 하겠습니다."

시끌벅적한 회의실에 앉은 영섭에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피해자의 이름은 박찬숙, 56세 여성, 158m, 몸무게 45kg 입니다. 첫 번째 사건이 발생한 주택에서 80m 떨어진 천우 유치원 원장인 피해자는 첫 번째 피해자와 같은 수법으로 결박당한 뒤 액살 되었습니다......."

영섭의 머릿속은 사건 발생 전 만났던 청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청년이 오래도록 주시하던 곳. 바로 그날 밤 그곳에서 똑같은 살인 사건이 발생됐다.

우려되는 점은, 연쇄 살인에서 나타나는 살인 이후 심리적 냉각기가 매우 짧다는 점입니다. 1차 살인 이후 단 삼일 만에 2차 살인이 추가로 발생된 점은 범인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살인을 지속하는 쾌락살인범의 유형이라 생각합니다. 범인체포가 늦어질수록 3차 살인의 위험성이…….”

고성과 질타가 빗발치는 회의실에서 영섭은 청년의 모습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내가 부탁한 거 찾아봤어?"

기나긴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온 영섭이 우성에게 물었다.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우성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 선배님 회의 들어간 동안 자동차 번호를 조회했는데요. 참 양파 같은 남자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도련님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선배님 신진물산 아시죠?"

"한국 50대 기업 안에 든다는 무역회사?"

". 47위요. 근데 이 도련님이 그 신진물산 후계자였어요. 놀라셨죠?"

"어쩐지 귀티가 흐른다더니……. 이름은?"

"조기정. 나이 21현재 세중 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휴학 중입니다."

뒤이어 우성이 비밀 이야기인 듯 영섭에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런데 좀 파보니, 몇 가지 수상한데가 있더라고요."

"수상하다니?"

"재작년 신진물산 회장 부부가 죽은 거 알고 계세요?"

영섭은 어렴풋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진물산 일가 사망 기사를 떠올렸다.

"교통사고로 죽었잖아."

"이 조기정이 죽은 신진물산 회장의 외동아들인데, 입양아라는 겁니다. 조기정이 열한 살에 기억을 잃고 천안 거리를 헤매는 걸 지나가던 신진물산 회장이 목격한 거죠."

"천안?"

". 근데 애는 자기 이름도 몰라. 사는 곳도 몰라. 엄마, 아빠 이름도 몰라. 기억이 하나도 없었대요. 더 미스터리한건 아이를 잃어 버렸다는 실종 신고도 없었다는 겁니다."

우성은 애용하는 수첩을 넘기며 말했다.

"결국 부모를 찾을 때까지 애를 돌보던 부부는 어린 조기정을 입양했습니다. 부부가 불임으로 아이가 없었는데, 조기정을 하늘이 부부에게 내린 아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지금은 죽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수십억의 주식과 부동산을 소유한 초 재벌로 등극했죠. 이거 완전 신분탈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 아닌가요?"

"수고했어. 조기정이 지금 사는 곳이 서울인가?"

". 주소지 조회해보니 서울 청담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성은 주소를 적은 쪽지를 영섭에게 건넸다.

"찾아가시게요? 이 도련님은 왜요? 아직도 형사의 감이 조기정을 가리키는 거예요?"

"너도 기억하지? 조기정이 서있던 유치원에서 2차 살인이 일어난 거. 2차 살인을 위한 사전 답사였을지도 몰라."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간다. 이말 이시군요."

"맞아. 그래서 말인데 나 좀 다녀올게."

영섭이 몸을 돌리자 우성이 깜짝 놀라 영섭의 팔을 붙들었다.

"선배님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 어딜 가세요? 그러다 큰일 나세요."

자신의 팔을 잡고 매달리는 우성을 보고 영섭은 씩 웃었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이고 선배님 고집을 누가 말리겠어요. 그나저나 신진물산 회장 교통사고에 조기정이 연루 됐다는 카더라도 있더라고요. 몸조심하세요."

"오케이. 땡큐."

우성에게 엄지를 척 들어 올리고 영섭은 발길을 서둘렀다.

 

기정이 살고 있는 빌라에 도착한 영섭은 출입문이 잘 보이는 맞은편 도로가에 차를 세웠다.

영섭의 차 너머로 개방된 1층 주차장으로 기정의 레드 포르쉐가 보였다. 영섭은 일단 감시가 용이한 이곳에서 잠복 할 생각이었다. 경찰로서 감에 의존한 수사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오랜 현장 생활을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촉은 증거이자 단서이기도 했다. 그 촉이 기정을 향했다.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영섭은 자신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영섭은 화장실을 다녀온 몇 분을 제외하고 내리 여섯 시간째 구형 소나타 안에 앉아 있었다. 한 낮이었던 밖은 한 밤중이 되었다. 그동안 기정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밤을 새워 감시할 수는 없었다결국 영섭이 별 소득 없이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빌라 정문이 열리고 환한 가로등 아래 기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색 점퍼를 걸친 기정이 다급하게 주차된 포르쉐로 뛰어갔다영섭은 핸들을 꽉 움켜쥐고 시동 걸 준비를 했다. 갑자기 포르쉐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르고 영섭의 소나타를 정면으로 비췄다. 깜짝 놀란 영섭은 운전대 아래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어차피 못 알아 볼 텐데 뭐하는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영섭은 출발하는 포르쉐를 뒤따랐다.

 

6.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75인치 대형 TV가 기정이 던진 머그컵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꼬박 하루를 잠들었었다. 또다시 꿈속에서 사람을 죽인 기정이 반신반의 하며 TV에서 두 번째 살인사건 뉴스가 흘러 나왔다. 천우 유치원 건물이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기정은 힘겹게 이어온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탁자를 뒤집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기들을 집어 던졌다. 기정을 괴롭히는 불안과 공포, 울분을 거침없이 토해냈다그럼에도 기정을 짓누르는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출구 없는 미로를 끝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기정은 차키를 들고 빌라를 뛰쳐나갔다.

    

규정 속도를 무시한 포르쉐가 심야의 텅 빈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미친 듯이 악을 쓰며 악셀을 힘껏 밟았다. 불과 45분 만에 포르쉐는 연선동에 도착했다. 시동도 끄지 않은 차에서 뛰어내린 기정이 골목길을 따라 달렸다. 가로등 없이 어둠에 휩싸인 골목은 꿈속의 암울한 골목과 똑같았다. 다시 악몽 속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등 뒤에서 피를 흠뻑 뒤집어쓴 괴물이 자신을 쫓는 것 같았다.

또다시 공포가 밀려왔다. 괴물에게 쫓기듯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다리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쏟아지는 땀방울이 온몸을 적셨다. 쉼 없이 토해내는 날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사라졌다. 꿈속에서와 같이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난 녹색 대문을 지나쳐 달렸다대문을 지나치자 곧이어 어둠이 깊게 드리운 유치원이 보였다. 기정은 유치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상체를 숙여 양팔로 허벅지를 짚고 숨을 골랐다. 수그린 기정의 등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유치원을 주시했다

유치원 정문 역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다. “젠장할!” 또다시 꿈속의 살인이 실현됐다. 기정은 절망했다. 머리가 깨질듯 아팠다. 두통 사이로 불현듯 오래되 흐릿한 기억이 기정의 뇌리를 스쳤다. 유치원 너머. 골목 끝 언덕배기에 있던…….

기정은 홀린 듯 유치원을 지나 언덕길을 올라갔다. 드디어 골목 끝에 다다랐다. 길 끝에는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오래된 주택 한 채가 서있었다. 집은 얼핏 보기에도 처참했다. 버려진지 오래된 듯 지붕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창문은 모두 깨져있었다. 당장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은 폐가였다. 폐가와 마주하자 기정 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찌잉' 기정의 귀속에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점점 커지는 이명은 고막을 찢을 듯 끝도 없이 커져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귀를 막고 바닥에 엎드렸다. '' 머릿속 현이 끊어지고, 막혀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기정의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아아악!"

어둠을 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차츰 귓속의 소음이 줄어들고 잃었던 기억과 현실이 맞물려 재정립됐다.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있던 기정이 땅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기정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기정을 적시는 통한의 눈물이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기정이 전화를 걸었다.

"기정 씨?"

기정의 흐느낌이 전화기 너머 박사에게 전해졌다.

"기정 씨. 무슨 일이에요? 제게 말씀해주세요. 고통을 혼자 떠안지 마시고 털어 놓으세요."

오랜 침묵 뒤 기정이 말했다.

"박사님. 모든 것이 기억났습니다."

"기억났다고요?"

". 열한 살까지 잃었던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지금 기정 씨는 충격으로 인한 심리적 카오스 상태에요. 어디에요? 제가 찾아갈게요. 만나서 이야기해요. 부탁해요."

"이렇게 끔찍한 기억일줄 알았으면 차라리……. 차라리 모른 채로 살아갈걸 그랬습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지금 어디인지 말씀해주세요. 제발요."

"박사님은 절 도와주실 수 없어요. 전 이 기억 때문에 평생을 후회하고 살게 될 테니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기요. 기정 씨 끊지 마세요. 잠깐……."

기정은 전화를 끊었다.

마침내 어린 시절 기정이 받았던 고통이 현실의 기정에게 닿았다. 연약한 어린 기정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너무나 가혹하고 참혹했다. 기정을 학대한 악마를 용서할 수 없었다. 기정을 모른 채 한 사람들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기정은 너무나 지쳤다. 지독한 피로가 분노를 억눌렀다. 혼란스러운 기정의 머릿속에서 미정이 떠올랐다. 수줍게 미소 짓는 미정의 얼굴을. 미정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당장 미정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수는 그 다음이었다.

 

딩동.’

누구세요.”

문밖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나야.”

기정 씨? 이 시간에 전화도 없이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갑자기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잠깐 들어가도 괜찮아?”

“.......”

기정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미정은 갑작스러운 방문에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하긴 사귀는 사이지만 혼자 사는 애인의 집에 불쑥 찾아가는 게 예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의 혼란과는 별개로 미정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저기 내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지. 불편하면 내일 만날까?”

그때 문이 열리고 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아냐. 집이 너무 어질러져 있어서……. 기정 씨한테 보이기 창피해서 좀 치우느라 시간이 걸렸어. 미안해.”

한쪽 눈을 감고 생긋 미소 짓는 미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문이 열리자 미정의 향긋한 내음이 퍼져 나왔다. 기정은 눈을 감고 그 향기를 후욱 들이마셨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내음. 기정은 역시 미정을 찾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방안은 역시 깔끔했다. 미정은 급히 방안을 정리했다고 했지만 기정이 보기엔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기정은 신발장 한 편에 진흙이 묻어있는 미정의 운동화를 발견했다. 말라붙은 진흙에 묻어있는 선홍빛 코스모스 꽃잎. 영선동에 다녀온 기정의 신발에도 그것과 꼭 같은 꽃잎과 진흙이 묻어있었다. 즐비한 빌딩 숲 시멘트로 둘러싸인 잠실에서 진흙길이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 산책 갔었어?”

기정의 물음에 미정이 대답했다.

. 조금 답답해서. 그보다 우리 뭐할까? 기정 씨 배 안고파? 우리 야식 사먹을까?”

, 그럴까.”

미정은 현관에 서있던 기정의 팔을 붙들고 방안으로 들였다.

 

7.

포르쉐의 전속력을 구형 소나타로는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이내 포르쉐는 영섭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기정의 목적지를 예상한 영섭은 연선동으로 차를 몰았다. 예상대로 연선동 초입에 시동이 걸린 채 운전석 문이 활짝 열린 포르쉐가 있었다. 영섭은 서둘러 골목길을 올라갔다. 외길을 따라 단숨에 천우 유치원까지 올라갔지만 기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악!"

그 순간 언덕 너머에서 고통에 찬 절규가 들렸다. 영섭은 소리의 출처가 기정임을 직감했다. 영섭은 골목 끝 언덕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 했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쓰러져 가는 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기정에게 다가가려던 영섭은 발걸음을 멈췄다바닥에서 일어선 기정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영섭은 재빨리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기정의 통화를 엿들었다. 기정의 목소리는 분간할 수 있었지만 전화기 너머 상대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기정은 힘없이 온 길을 되돌아갔다. 영섭은 기정의 통화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힘없이 돌아가는 기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힘이 빠지고 허탈감이 밀려왔다. 자신의 감을 확신할 수 없었다.

 

8.

다음날 오후. 영섭은 우성과 다시 연선동을 찾았다. 영섭과 우성은 언덕 위 폐가로 향했다.

"선배님. 아침에 팀장님한테 엄청 깨지던데. 괜찮으세요?"

".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영섭이 우성을 보고 씨익 웃었다.

"우리 선배님 참 강심장이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우성이 말했다.

"그나저나 기껏 팀장님 눈 밖에 나면서까지 염탐했는데 전혀 수확이 없네요. 교통상황실에 조기정 번호판으로 조회 요청했는데 사건 시간대 전후로 천안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IC, 나들목은 운행 기록이 없었어요. 물론 포르쉐 말고 다른 차를 탔다면 모르겠지만요.“

조기정이 사는 빌라는? 워낙 고급 빌라라 보안 감시도 철저했을 텐데.”

안그래도 강남 경찰서에 동기가 있어서 부탁했는데요. 세입자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영장을 가져오지 않는 이상 협조는 절대 불가하다고 했답니다. 아무래도 부자 동네라 민감하다나 어쩐다나……. 대신 빌라 주변 CCTV를 조회했지만 별다른 건 없었답니다. 이번엔 정말로 선배님 감이 틀린 거 아닐까요?”

아직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관계없다고 확신하기도 일러.”

그럼 어제 뭔가 단서를 잡은 거예요?"

"그래. 지금 단서 보러 가는 거야."

"단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우성이 영섭을 바라봤다. 영섭은 말없이 폐가를 차근차근 뜯어봤다.

"내가 말한 거 뽑아왔어?"

영섭이 우성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성은 수첩사이에 끼워둔 종이를 꺼내 건넸다.

"이 다쓰러져 가는 주택 등기부 등본은 어디에 쓰시게요?"

차근차근 등본을 살피던 영섭이 말했다.

"현재는 빈집인데 9년 전까지 살았던 사람이 아직 그대로 거주자로 등록돼 있어. 아무래도 이사를 가면서 주소이전을 안한 것 같아. 9년 전까지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을 조사해 봐야겠어. 1차 살인 이후 조기정은 첫 번째 피해자가 있던 집을 살펴봤어. 범인은 범행 후 현장으로 돌아온다그 말에서 비롯된 심리적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 다음으로 조기정이 머물렀던 천우 유치원에서 두 번째 범행이 벌어졌어. 그리고 바로 어젯밤 조기정은 이 폐가 앞에서 모든 것을 알아냈다고 말했어."

"누구한테요? 선배님한테요?"

"아니. 그건 아니고……. 어쨌든 이 폐가가 조기정의 연결고리인건 분명해. 이곳에 살았던 사람을 찾아야해."

영섭의 말을 듣고 휴대폰을 조작하던 우성이 말했다.

"그럼 선배님 절 따라오세요.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성을 따라간 곳은 연선동에서 하나뿐인 공인중개사 사무소였다.

사무소라 부르기도 민망한 5평짜리 공간. 무척이나 낡아 보이는 외관에서 복덕방, 부동산, 공인중개사무소를 거쳐 시대를 아우르는 세월이 느껴졌다. 영섭이 사무소로 다가가자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나이 지긋한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하얗게 샌 수북한 수염이 살아온 시간을 설명하는 듯 했다. 노인은 자신을 연선동 토박이라 말했다. 연선동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신했다.

"안녕하세요. 동남경찰서 오영섭 경사 입니다. 살인사건 때문에 여쭤볼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저 언덕배기 골목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찾아왔수?"

". 혹시 골목 끝 슬레이트 지붕이 덮인 폐가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그곳에 살았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거기 살았던 사람은 내가 좀 알지."

"알고 계신가요?"

영섭이 반기며 말했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지금이야 노숙자, 동네 양아치들도 안 찾는 폐가가 됐지만, 예전엔 부부랑 늦둥이 아들까지 셋이서 살았었어. 그런데 빈집이 된 사연이 있지. 그게 뭐냐 하면. “

뭐냐 하면요?”

우성이 얼굴을 들이대고 노인의 말끝을 따라했다. 노인은 그런 우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부부가 도박에 완전 미쳐있었어."

"도박이요?"

노인의 이야기를 수첩에 적던 우성이 다시 되물었다.

"그려. 화투판 말이여. 아무나 하나만 미치면 좋았을 텐데. 부부가 쌍으로 미쳤으니 어린 아들만 텅 빈 집에 홀로 방치된 거야. 부부가 애는 집에 내팽개치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몇 날 며칠을 화투판에서 돈을 탕진하는 겨이주였나? 아무튼, 이주일 뒤에 탈탈 털리고 빈털터리로 돌아가니 쫄쫄 굶은 어린 애가 피골이 상접해서 방바닥 장판을 빨고 있더래. 에휴.“

어느 날 갑자기 나가버린 부모.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이주일. 전기마저 끊긴 집에 홀로 남은 아이는 과연 어떤 심정으로 하루를 버텨냈을까. 영섭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이의 고통에 가슴이 갑갑해졌다.

한껏 인상을 찌푸린 우성이 말했다.

"어휴 정말 끔찍하네요."

"그런데 돈을 잃고 성질이 난 부부가 애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애를 죽도록 때린 거야. 뼈밖에 안남은 애를 말이야……. 쯧쯧쯧"

우성은 화가 치미는지 얼굴이 상기됐다.

",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 하도 맞아서 숨이 넘어갈락 깔딱 거리던 애가 지 부모를 피해 집에서 도망쳤다나봐. 아마 지도 그렇게 맞다간 영락없이 죽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그렇게 뛰쳐나간 애가 며칠이 지나도 집에 안돌아오더래. 부부는 지독한 학대가 세상에 드러날까 봐 신고도 안했다더구먼. 애는 그렇게 없어지고, 몇 년 있다 남편은 도박 빚에 도망가 버리고. 여자 혼자 살다가 이웃들이 하도 손가락질 하니까 저도 못살겠던지 야반도주 해버렸어."

노인의 말을 들은 영섭은 그제야 어젯밤 기정이 한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부부가 잃어버린 아들이 기정이었던 것이다. 영섭은 드디어 흩어져 있던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섭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 그 여성이 사는 곳은 모르시나요?"

"그게 5년 전엔가 애 엄마가 날 찾아왔어. 혹시라도 집나간 아들이 찾아오면 전해달라고 자기가 사는 집 주소를 적어 주더라고. 나야 진즉에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내색 안하고 그냥 받아뒀지."

영섭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어르신. 혹시 그 주소 아직도 갖고 계신가요?"

"있지. 잠깐 기다려봐."

노인은 사무실에서 두꺼운 명함첩을 들고 나와 한장 한장을 살피며 쪽지를 찾았다.

"어디 뒀더라. 아 여기, 여기 있네."

한참을 뒤지던 노인이 빛바랜 작은 쪽지를 건내며 말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쪽지를 받아든 영섭은 휴대폰 카메라로 주소를 촬영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그 살인사건 범인이야?"

영섭에게서 쪽지를 돌려받은 노인이 물었다.

"어르신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 여자 찾는 이가 왜 이리 많아."

노인의 말에 영섭이 깜짝 놀라 다그쳤다.

"저희가 처음이 아니라고요? 혹시 키가 180cm 정도로 마른 체형의 남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니……. 웬 예쁘장한 처자였는데.“

, 여자였다고요?”

그려. 다소곳하니 말도 사근사근 잘하더만.”

영섭이 노인의 말에 다급하게 외쳤다.

"우성. 얼른 시동 걸어! 지금 당장!"

 

경광등을 매단 소나타가 이리저리 차선을 변경하며 꽉 막힌 천안 시내를 질주했다.

운전에 집중하던 영섭이 말했다.

조기정 조사할 때 전화번호 확보했지?”

. 제 수첩에 적어뒀죠.”

지금 조기정한테 전화 걸어.”

우성은 수첩을 펼치고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울리고 기정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휴대폰 스피커 밖으로 기정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차안을 울렸다.

영섭이 다급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조기정 씨. 천안시 동남경찰서 오영섭 형사입니다. 무척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사람의 생명이 걸린 긴급 상황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동안 침묵하던 기정이 말했다.

……. 말씀 하시죠.”

조기정 씨 지금 계신 곳이 어디인가요?”

잠실입니다. 제 여자 친구 자취방에 있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조기정 씨 외에 어릴 적 친부모님의 학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 , 그걸 형사님이 어떻게 알고 계시죠?”

긴급 상황이라 자세히 설명 드리지 못하는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부탁이니 말씀해주십시오.”

다급한 영섭의 마음이 닿았는지 기정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없습니다. 저도 어제 밤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영섭은 탄식했다.

조기정의 친모를 찾는 여성은 누구란 말인가…….’

그때 영섭의 머릿속에 폐가 앞에서 통화하던 기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젯밤 연선동 언덕배기 폐가에서 전화통화 하셨던 상대가 누구입니까?”

기정이 분노와 불안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절 미행하셨던 겁니까?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거듭 사과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조기정 씨의 한 마디로 박스 테이프 3차 사건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영섭의 말이 기정의 마음을 움직였다.

제 심리상담 주치의인 이미소 박사입니다. 이미소 박사님께 심리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조만간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영섭의 말이 끝나자 우성이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영섭이 급히 외쳤다.

! 조기정 씨!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지금 여자 친구 분과 함께 계신가요?”

아뇨. 여자 친구는 대학교 수업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여자친구분의 사진과 전화번호를 이 번호로 전송해주십시오.”

하아. 이번엔 제 여자 친구입니까?”

기정은 체념한 듯 깊은 한 숨을 쉬었다.

 

9.

천안과 인접한 변두리 외곽. 산골짜기에 인적이 드문 오솔길 사이로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견뎌낸 낡은 시골집 한 채가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쓰러질 것 같은 이 낡은 집에 어울리지 않은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여성은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고 어깨에는 검정 숄더백을 매고 있었다.

"어머님. 집에 계세요?“

여성이 마당에서 사근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당과 맞닿은 방문사이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열린 방문 사이로 수수한 오십대 중년 여성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여?"

"안녕하세요. 충남 복지재단에서 나왔어요. 외곽지역에 홀로 사시는 분들을 위해 복지 예산이 편성돼서 찾아뵙고 안내드리려고요. 어머님도 들어서 알고 계시죠?"

젊은 여성의 살가운 미소와 붙임성 있는 목소리에 중년 여성이 경계를 풀고 말했다.

"아뇨. 여기선 그런 거 못 들어 봤는디."

". 그러셨구나. 어머니 제가 안에 들어가서 설명 드려도 될까요? 나라에서 어머님께 쌀도 사고, 난방도 하시라고 돈 드리는 거예요."

"그려? 그럼 어여 들어와요."

돈을 준다는 말에 방문을 활짝 열은 중년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복지사를 맞이했다. 복지사는 대청마루 아래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고 열린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방이 차지? 이불이라도 깔아야겠네. 잠깐 기다려봐."

중년 여성이 살갑게 말한 뒤 등을 돌려 이불장을 열었다. 이미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 순간 중년 여성의 뒤에선 복지사의 미소가 사라졌다. 복지사의 살갑던 눈빛이 무섭도록 차갑게 빛났다.

복지사는 천천히 숄더백 속에서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냈다. 중년 여성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장롱에서 빛바랜 이불을 꺼냈다. 복지사의 검지가 스프레이 발사 버튼 위로 올라갔다. 중년 여성을 향한 복지사의 스프레이가 막 분사되려는 찰나.

덜컹.’

옆방 장지문이 벌컥 열리고 영섭과 우성이 뛰어들었다. 시선을 장지문으로 돌린 복지사의 스프레이가 허공을 향해 분사됐다. 우성이 스프레이를 들고 있는 복지사의 손목을 매섭게 낚아챘다. 뒤이어 허리춤에서 꺼낸 수갑을 재빨리 복지사의 손목에 채웠다. 영섭은 그런 복지사 옆에서 크게 소리쳤다.

"정세아 씨. 당신을 천안 부녀자 살인 및 살인미수 현행범으로 체포 합니다!"

두 손에 걸린 수갑을 본 정세아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10.

정세아의 가방 안에서 범행에 쓰일 박스 테이프와 가죽장갑이 발견됐다. 그녀는 모든 혐의를 순순히 시인했다. 하지만 혐의 이외의 내용은 입을 닫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영섭은 차미선 검거 당시를 떠올렸다.

조기정의 친모가 사는 집으로 출동하던 영섭은 가까스로 이미소 박사와 전화가 연결됐다. 이미소 박사는 병원에 출근한 상태였다.

영섭은 낙담했다. 범인은 조기정의 여자 친구로 쏠리고 있었다. 그때 상황 설명을 듣던 이미소 박사가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1, 2차 사건발생일 전후로 심리 클리닉 간호사인 정세아의 월차, 반차 일자가 겹친 다는 것이었다. 영섭은 이미소 박사로부터 간호사 정세아의 사진을 전달 받았고 마침내 3차 범행미수 현장에서 검거할 수 있었다.

정세아는 체포 후 청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1심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모든 혐의를 인정하는 만큼 검사측은 법정최고형을 자신했다. 그녀가 청주 교도소에 수감 되면서 박스 테이프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은 일단락 됐다.

연일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던 박스 테이프 사건도 새롭게 터지는 강력 사건들에 밀려 대중들에게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렇게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 찾아왔다.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청주 교도소를 찾은 영섭은 정문에서 교도소로 통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길가에 심은 가로수들이 영섭을 맞이했다. 앙상한 가지엔 겨울을 버텨낸 생명을 가득 품은 꽃봉오리들이 가득 열려 있었다.

영섭은 정세아의 면회 신청서를 작성하고 대기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영섭의 이름이 불렸다. 면회실에 들어선 영섭은 앞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철컹' 철창문이 닫히며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감옥과 면회실을 나누는 투명한 분리격벽 뒤로 죄수복을 입은 정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세아를 체포하던 날 이후로 투명 아크릴 판을 사이에 두고 정세아와 영섭이 다시 마주했다.

"면회신청 거절 할 줄 알았는데……."

"언제든 한 번은 오실 줄 알았어요."

영섭의 눈을 마주하며 정세아가 말했다. 영섭이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시죠?"

"보다 시피요. 이 안에서는 다 그렇죠.“

"정세아 씨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 물어보세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첫 번째로 조기정 씨의 개인상담 내용을 어떻게 아신 건지 묻고 싶습니다.”

정세아는 입가에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그 부분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 제 입으로 듣고 싶으시다면 설명 드리죠. 이미소 박사님 상담소에서 보조간호사로 근무했지만 사실 제 꿈은 정신과 상담의였습니다. 하지만 불우한 가정형편에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전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죠. 제 사정을 이해해 주신 이미소 박사님은 절 직원으로 채용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심리상담소에서 일을 하다 보니 더욱 상담의에 대한 꿈이 간절해 졌어요. 이미소 박사님이 환자들을 어떻게 케어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결국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상담실 내부에 몰래 녹음기를 설치했어요. 그렇게 기정 씨의 상담 내용을 듣게 됐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영섭이 다시 물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조기정 씨의 불분명한 꿈속에서 어떻게 실제 장소를 찾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간단해요. 기정 씨의 잠재 기억은 기정 씨가 살았던 연선동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어요. 기정 씨의 꿈은 생각보다 구체적이었어요. 기정 씨가 발견된 곳이 천안이란 건 아실 테고, 천안과 천우 유치원. 그리고 감나무가 있는 녹색 대문몇 개의 키워드만으로도 위치는 쉽게 찾을 수 있었죠."

"성폭행을 연상시키는 벗겨진 하의와 소액의 절도는 어떤 의도였습니까?"

"예상하셨겠지만, 경찰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했습니다. 경찰의 시선을 특수강도나 성범죄로 돌리려 했죠. “

영섭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1차와 2차 사건의 피해자들은 조기정 씨와 어떤 관계였습니까?"

열한 살의 기정 씨가 부모의 학대를 피해 도망치던 날. 그가 문을 두드려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들입니다. 유독 기정 씨를 귀여워 한 이웃집 신혼부부나 기정 씨가 어릴 적부터 의지했던 유치원 원장이었죠. 불행하게도 모두 기정 씨를 외면했지만요. 생사의 갈림길에서 친절을 베풀어 준 이들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지만 매몰차게 버림받은 기억은 기정 씨의 기저심리에 심각한 상처를 줬습니다. 그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어 악몽의 형태로 기정 씨를 계속 옭아맸던 거죠. 사람의 뇌는 참 섬세하고 기능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끔찍한 기억을 지워 버린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 터득한 의식의 방어기재이죠. 기정 씨도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을 스스로 기억 영역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뒀습니다. 하지만 억제돼 있던 무의식이 풀려나는 수면시간에는 봉인돼 있던 기억이 악몽의 형태로 나타났어요. 부모와 이웃들에 대한 학대와 배신의 기억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정 씨를 괴롭혔죠. 마치 자신에게 상처준 이들을 절대로 용서하면 안 된다는 듯이 말이죠. 이미소 박사님은 기정 씨의 끔찍한 기억이 한꺼번에 풀려버리면 감당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최면을 통해 악몽 같았던 기억을 기정 씨의 의식 더 깊숙한 곳으로 숨기셨습니다. 물론 이미소 박사님의 치료 녹음을 통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영섭은 곰곰이 생각한 뒤 네 번째 질문을 던졌다.

"네 번째로 정세아 씨가 조기정 씨를 대신해 복수 했던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제 이야기를 들려 드려야 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오프 더 레코드로 약속하신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영섭은 한참을 생각하고 말했다.

". 약속드리겠습니다. “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세아가 말했다.

"제 진짜 이름은 정세아가 아니라 박다솜입니다. 전 열 살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받아왔어요. 지옥 같던 학대는 1년이나 이어졌습니다. 결국 열한 살에 전 의붓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했죠. 그리고 얼마안가 제게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전 제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만취해 잠든 의붓아버지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죠. 막상 사람을 죽이고 나니 겁이 덜컥 나더군요. 그래서 집을 나와 멀리 도망쳤습니다. 한동안 거리를 헤매고 떠돌다 결국 고아원에 들어갔죠.

아무도 제 진짜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 죄가 알려질까 두려워 기억을 잃은 척 했거든요.

덕분에 정세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전 다시 태어난 것 같았어요.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정말로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하지만 고아원 출신이라는 사회의 편견과 열악한 환경은 의욕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어요. “

친모는 정세아 씨를 찾지 않았나요?”

사회에 나오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집을 나갔던 날. 어머니가 시신이 된 의붓아버지를 발견하고 스스로 목을 맸다는 걸요. 누구도 박다솜을 찾지 않았던 이유를 그때서야 알게 됐습니다. 아마 어머니도 어렴풋이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분명 성적학대 이후 제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다만 어머니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으셨겠지요. 전 정신과 상담실 직원으로 힘들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정 씨가 상담소에 찾아왔어요."

정세아는 그때를 회상하는 듯 잠시 말이 느려졌다.

"최면으로 토해내는 기정 씨의 끔찍했던 과거를 들으면서 잊고 있었던 열한 살의 절 다시 만났습니다. 끝없는 절망과 고통에 빠진 열한 살의 저를요. 기정 씨는 자각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오래도록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최면을 통한 망각치료에도 한계가 있었어요. 기정 씨에게 각인된 아픔이 너무나 지독해 스스로는 극복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제가 대신 도와주기로요. 지난날 저 스스로의 힘으로 절망을 끊어냈던 것처럼……. 기정씨도 고통의 굴레를 끊어 주자고요. 그래서 제가 기정 씨의 악성인자를 하나씩 제거했습니다. 현실의 기정 씨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내면의 기정 씨는 분명 원한을 풀 테니까요. 결국 결과는 이렇게 됐지만요……. “

단지 그 이유만으로 안정된 삶을 버리기엔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역시 형사님은 예리하시군요. 사실 제가 기정 씨를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의붓아버지를 죽이고 집을 뛰쳐나갔던 그날……. 사실 그때 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제 몸속엔 악마가 뿌린 씨앗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길거리를 전전하다 고아원에 들어갔을 땐 이미 배속의 아이를 지울 수 있는 시기가 지나있었죠. 11살의 전 제 몸의 급격한 변화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줄 알았어요. 제가 저지른 죄에 대해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 몸에 생명이 잉태된 거였죠. 비록 악마가 보낸 축복이었지만 어느새 제겐 뱃속의 아기가 제 전부이자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적 같은 10개월이 지났습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작은 몸이었지만 무사히 출산을 마칠 수 있었어요. 오랜 진통과 지옥 같은 고통에 전 탈진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낳은 아이를 보고 싶었어요. 아기를 제 품에 안고 싶었어요. 제 젖을 아이의 작은 입에 물리고 싶었습니다.”

망연히 벽을 응시하던 정세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세아는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한 소망이 헛된 희망이었다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 아기는 세상밖에 나오자마자 고아원 사람들에 의해 다른 가정으로 입양 돼 버렸거든요. 제가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곳으로요. 작고 예쁜 아들이었다더군요. 전 얼굴조차 보지 못했지만요.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이른 나이에 치른 출산은 여성으로서의 기능도 앗아가 버렸습니다. 출산직후 얇아진 자궁 근층에 천공이 발생해 파열됐고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돼버렸어요. 악마가 뿌린 씨앗의 저주를 받은 거겠죠. 그런 제게 기정 씨가 찾아왔습니다. 제 아들과 꼭 같은 나이의 상처투성이 아이가요. 기정 씨를 통해 제 어릴 적 상처와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하게 떠나보낸 아들의 그림자를 봤던 것 같아요. 아니, 기정 씨에게서 제 아들을 떠올렸습니다. 최면치료를 통해 매번 기정 씨가 토해내는 끔찍한 상흔들이 제 아들이 겪은 일처럼 다가왔습니다. 반복할수록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 커졌습니다. 어느새 기정 씨는 제 아들이 되었어요. 지독한 감정이입은 이성을 마비시키더군요. 엄마는 아들을 괴롭히는 장애물들을 치워주는 거잖아요. 전 그저 모성이 향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

충혈 된 눈, 일그러진 표정에 희미하게 올라간 입 꼬리. 영섭은 정세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정세아가 짓는 표정은 살인을 완수하지 못한 아쉬움일까? 아니면 저지른 일들에 대한 회한일까?’

정세아는 시선을 다시 영섭에게 두고 말했다.

이제 제 이야기는 모두 끝났습니다. 저도 속에 있던 얘길 누군가에게 털어 놓으니 한결 후련하네요. 제 비밀을 형사님께 고백 할 줄은 몰랐지만요."

허탈하게 웃음 짓는 정세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돌아가세요."

인사를 마친 정세아는 뒤돌아 철창으로 걸어갔다. 영섭은 멀어지는 정세아를 향해 크게 외쳤다.

"정세아 씨! 조기정 씨가 이 말은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고맙다고요. 앞으로는 스스로 싸우겠다고요. 꼭 극복하겠다고요."

영섭의 말에 잠시 발길을 멈춘 정세아는 그대로 철창 안으로 사라졌다.

영섭은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 새싹이 피는 봄이라지만 불어오는 시린 바람은 영섭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영섭은 바람을 막기 위해 점퍼 옷깃을 여몄다면회 내내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던 묵지근한 통증이 퍼졌다사람의 추악한 욕망이, 비인간적 폭력과 학대가 두 사람의 인생을 산산이 부쉈다. 경찰이 된 이후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영섭이었다. 입안을 가득 채운 쓴물이 아주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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