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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뱀파이어] Becoming

2006.03.20 22:0903.20

1
1980년 어느 여름 날. 도로를 달려오던 스텔라 택시 한 대가 어느 건물 앞으로 멈춰 선다. 기사가 건넨 잔돈을 물리고 택시에서 내리는 인수. 고개를 들어 보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신경 정신과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인수는 막 병원을 개업 한 신경 정신과 의사였다.

의대 졸업 후 선배가 있는 종합 병원에서 경험을 쌓던 인수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병원을 차리게 되었다. 곧 수익이 생기면 그 돈을 갚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다짐을 크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있지는 않았다. 굳이 그 돈을 갚지 않아도 집 형편에 타격을 주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인수의 부모는 새해 들며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으나 인수는 그런 문제들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근무하던 시절 데모대에 참가했다 부상을 당해 실려 들어오는 같은 또래의 남녀들을 봤을 때나 잠시 병원 밖 상황에 관심을 갖곤 했는데 그 관심도 데모대가 목청 높여 부르짖던 외침의 내용들에 대한 것들이 아니라 곤봉이나 방패 등으로 어떻게 가격 당했고 현재 부상 정도가 얼마나 심한 정도였다. 그것도 잠시, 24시간 병원에 쳐 박혀 일하는 시간 아니면 잠을 자야했던 인수에겐 그런 것들은 금세 쉽게 잊혀 지곤 했다.

2
오전 동안은 기세 좋게 찬바람을 내뿜던 선풍기는 한낮의 무더위를 이길 수 없었는지 곧 항복을 하고 그들의 편에 서게 된다. 선풍기는 어느새 인가 열을 내뿜는 히터로 변해 버린 것이다. 며칠 째 손님이 없어 심심했던 김 간호사는 아침에 미리 얼려 놓은 얼음을 꺼내 먹기 위해 쉴 새 없이 냉장고 문을 여닫고 있었다.

김 간호사는 간호 학원 출신으로 다른 병원에서의 경력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눈치는 빠른 편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한다며 안심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뭐 그런 것들 보단 빨리 퇴근 해 친구들을 만나 자잘한 사건, 사고나 연예인에 대한 수다 떨기를 더 좋아하겠지만. 생각해 보면 인수 자신도 김 간호사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고 시간이 지나자 쉽게 잊어 버렸다.
  
손님이 없어 고민하는 초짜 개업의로 보이길 원하지 않은 인수는 최대한의 느긋한 표정으로 미국의 저명한 신경 정신학 박사의 원서를 읽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아직 젊은 의사인 인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 하지 않았다.

3
병원 근처 레스토랑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고 있는 인수. 대학교 다닐 때 만났던 그녀는 현재 환경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 중이었다. 여자 친구와의 대화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수를 다그치고 있는 여자 친구. 인수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지만 그녀가 꺼내 놓은 문제들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병원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며 인수를 찾는 레스토랑 직원. 인수는 그 전화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일단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신을 구해주었고 무엇보다 개원 첫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4
급하게 병원으로 뛰어 온 인수는 병원 문 앞에서 심호흡하며 애써 흥분된 자신을 진정 시킨다. 최대한 품위 있는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병원으로 들어간 인수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에게 외부에서 회의가 있었다며 양해를 구한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내.
김 간호사는 병원 개업 후 첫 손님의 등장에 자신만큼 흥분 되어 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뭐 그녀는 이미 다른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비염이나 축농증이 있는지, 아니면 한여름 감기인지 계속해 코를 훌쩍거리는 초라한 행색의 이 사내는 첫 손님을 맞은 인수의 기쁨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굳이 히포크라테스 선서 같은 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내를 무시하거나 차별은 할 생각은 없었다. 인수가 사내를 관찰하는 짧은 순간에도 사내의 콧물은 멈추지 않고 있다. 콧물과 콧속 이물질을 새로 들여 놓은 대기실 소파에 문지르는 사내를 보자 얼굴을 찡그리는 인수. 문득 사내의 손에 들린 잡지에 눈이 간다.
사내는 대기실에 놓인 잡지를 보며 인수를 기다리던 것으로 보인다. 사내가 보던 병원용 잡지에는 그가 흥미롭게 볼 만한 내용들이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사내는 그 안에서 무언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글을 발견 한 것 같았다.

사내를 진료실로 부르는 인수. 다리가 불편한지 힘겹게 인수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오던 사내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 않아 벌벌 떨기 시작한다. 이유를 묻자 진료실 벽면을 가리키는 사내.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무 십자가 걸려 있다.

인수의 부모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다. 지금의 사업도 모두 교회의 인맥을 통해 정, 재계까지 연결 되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었다. 병원의 벽에 걸린 십자가는 병원을 차려 준 부모에 대한 성의 표시 정도였다. 인수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부조화 속의 조화 같아 보였는지 별 말없이 부모의 뜻을 따랐다. 신경 정신과와 교회라... 누군가의 고백이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똑같지 않는가.

십자가를 치워 달라는 사내의 요구에 십자가를 재빨리 서랍 속으로 치운 뒤 그를 진정 시키는 인수. 인수가 최대한의 안정감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사내는 여전히 싸움에 져 꼬리 내린 개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놓는 두식. 모자엔 노란색 새마을 운동 마크가 크게 수놓아져 있었다. 42살의 오두식이라는 이 사내는 자신이 흡혈귀들에게 끌려가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으며 곧 자신도 그들처럼 흡혈귀로 변할 것이라는 말로 상담을 시작한다. 황당해하는 인수의 표정을 읽었는지 자신의 송곳니를 보여 준다며 손가락으로 크게 벌린 입을 인수의 얼굴 앞으로 가져온다. 뭘 먹었는지 두식의 입으로부터 악취가 밀려 나왔다. 순간 얼굴을 찡그린 인수. 시작부터 어려운 상대를 만났다. 두식을 진정 시킨 인수는 그가 왜 흡혈귀가 되어 간다고 생각 하는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요구한다.

흐릿한 가로등만이 골목길을 밝히고 있는 황량한 어느 밤. 어둠 속에서 귀가 중인 두식을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번뜩인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길게 늘어지는 흡혈귀들의 그림자. 술 한 잔 걸친 두식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조금씩 두식에게 가까워지는 그림자들. 곧 검은 망토를 걸친 흡혈귀들이 두식을 데리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텅 빈 밤거리. 그 작은 소란의 목격자는 하늘에 떠 있던 커다란 보름달뿐이었다.

진지하게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은 두식.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인수는 사실 자신을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외국의 다른 사례들을 머리에 떠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인수가 흡혈귀에 대해 묻자 자신이 본 그들에 대해 설명하는 두식.

항상 피에 굶주려 인간들의 피를 마셔야 하는 초자연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해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는 베일에 감추어진 존재.
영혼 속에 숨겨 진 야수를 끄집어내는데 있어 어떠한 강박관념이나 죄책감이 없는 존재.

인수는 흡혈귀에 대한 두식의 설명이 그가 받은 교육 수준 이상에서나 나올 만한 것임에 놀란다. 두식에게 정신과에서 사용하는 테스트용 설문지를 건네는 인수. 기본적인 조사이며 정신병과는 관련 없으니 걱정 말라는 인수의 말에 잠시 두려운 눈빛을 보이던 두식은 제발 그것만은 쓰지 않게 해 달라며 바닥에 엎드려 빌기 시작한다. 아니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 두식을 진정시킨 인수는 얼음을 입에 문 채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 온 김 간호사에게 아무 일 없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만 돌아가겠다는 두식에게 약을 처방하는 인수. 약을 먹으면 흡혈귀로 변하는 것을 늦춰 줄 수 있냐는 두식의 질문에 흡혈귀로 변하는 것을 막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인수.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한 대답이었는지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두식은 경험 많은 환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의사 선생에게 충고 하듯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처방전을 들고 나가려던 두식이 문 앞에 멈춰 서서 인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믿느냐고 묻는다. 정신과 의사가 모든 환자의 이야기를 다 이해 할 수는 없지만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해 나가고 해결책을 찾는다고 말하는 인수. 그럴 줄 알았다며 다시 몸을 돌려 인수 앞으로 다가오는 두식. ‘뭐하려는 거야?’ 순간 당황하는 인수. 두식은 증거를 보여 주겠다는 듯 자신의 상반신을 인수 앞으로 내 민다. 상의 속에 감춰져 있던, 두식의 목 부분에 난 두 개의 구멍 자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순간 놀라는 인수. 드라큘라 영화에서 보던 상처와 비슷해 보인다. 아니 똑같다. 생긴지 오래 되어 보이는 상처는 아물어 가고는 있었지만 그 상처가 두개의 날카롭고 뾰족한 것에 의해 생긴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었다. 상의를 여민 두식은 당황하는 인수를 뒤로 하고 병실을 나선다. 똑똑하고 젊은 의사 선생에게 자신이 이겼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멍한 얼굴로 두식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던 인수는 생각에 빠져 든다. 자신의 의사 생활에게 있어 이런 환자는 큰 도전거리 중 하나로 보였는지 아니면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한참을 고민 하다 두식을 쫓아 나가는 인수.

대기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두식에 대해 묻자 약을 탄 후 바로 사라졌다고 짧게 대답하는 김 간호사. 그녀는 대기실에 있던 TV에서 사회 정화 정책으로 폭력배들을 군부대 내의 기관에 입소시킨다는 뉴스가 흘러나오자 나라의 정책에 찬성 한다는 듯 동조의 뜻을 내비추고 있었다. 사회가 안정이 되어야 야간 통행금지가 빨리 해제 된다는 게 그녀의 평소 주장이었으니 그 뉴스는 방금나간 이 병원의 첫 환자보다 분명 더 관심 가질 만한 것이었다.
두식이 나갔다는 병원 문을 바라보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는 인수.  

5
어느 밤, 어두운 골목길을 걷던 인수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쫓는 괴한의 추격을 받는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검은 그림자. 긴 송곳니를 꺼내 인수에게 달려드는 흡혈귀와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인수의 추격전. 하지만 인수의 달리기로는 박쥐처럼 날아다니는 흡혈귀를 따돌릴 수 없었다. 곧 괴성을 지르며 다가와 인수의 목에 송곳니를 꽂아 넣는 흡혈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거친 숨을 내쉬는 인수, 여긴 어두운 골목이 아니라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악몽을 꾸며 흘린 식은땀이 푹신한 베개를 적신 것을 보고나서야 잠에서 깨는 인수. 흡혈귀에게 물린 목을 살펴보는 인수. 그의 목은 작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 보인다.
두식이 병원을 찾아 온 이후로 그의 목에 나있던 이빨 자국이 인수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후 두식은 더 이상 인수의 병원을 찾아오지 않았다. 찌는 무더위가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지내다간 두식에 대한 사건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6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언제인가 아버지의 소개로 온 손님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는 이 손님이 자신의 사업을 걱정하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중이라는 귓뜸을 미리 해준 상황이었다.
진료실로 들어오는 손님을 마중하는 인수. 막 닫혀 지는 진료실 문틈으로 두식이 병원을 찾아 온 모습이 보인다. 잠시 정신이 나간 듯 문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인수.
손님이 있으니 기다리라는 김 간호사의 말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대기실 소파로 다가가 앉는 두식. 아버지의 손님이 자신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 차리는 인수.
닫는 문틈으로 대기실에 있는 잡지들을 뒤적이는 두식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간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표정의 인수. 아버지의 손님이 요즘 불면증에 시달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부터 국민들은 나랏일에 걱정하지 말고 생업에만 열중해야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바람에 인수는 엉덩이만 들썩이고 있었다.

상담을 마친 아버지의 손님을 건물 밖까지 마중 나갔던 인수가 다시 병원으로 뛰어 들어온다. 첫 날처럼 대기실에 놓인 병원용 잡지를 읽고 있는 두식을 진료실로 부른다. 인수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가던 두식은 그 자리에서 얼굴을 감싼 채 주저앉는다.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가 다시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인수는 처음처럼 빠르게 십자가를 떼지 않고 잠시나마 두식을 관찰 한다. 인수가 알고 있는 사실과 상식들 안에서 십자가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존재는 흡혈귀뿐이었다. 십자가를 숨기는 인수를 보자 이제야 고개를 드는 두식. 혹시 십자가를 싫어하는 존재가 또 있나 생각해보던 인수는 의자를 끌어다 앉는 두식을 보자 다음으로 미룬다.
그동안의 행적을 묻는 인수의 질문에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는 두식. 인수가 첫 상담에서 두식이 납치되었던 이야기를 하다 말았다고 상기시키자 그 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두식.

하얀색 불빛을 내뿜는 두 눈을 가진 말들이 이끄는 마차는 지붕에서 붉은 불을 뿜으며 칠 흙 같은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마차가 달려가는 길들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어 나중에 또 찾아오기는 힘들 것 같아 보인다. 산책삼아 이곳에 다시 올 일도 없겠지만.  
흡혈귀들을 똑바로 바라 볼 용기가 없었던 두식은 얼핏 마차 밖 풍경을 보게 된다. 어렴풋이 보이는 주위 풍경으로 보아 인적이 드문 산속이 분명했다. 구름이 살짝 걸친 보름달만이 두식이 탄 마차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멀리서부터 보이던 첨탑 같은 것이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두식. 탑 꼭대기 위엔 크기가 다른 두개의 붉은 색 눈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들은 마치 세상을 감시하듯 내려다보며 번갈아 깜빡이고 있었다. 곧 마차의 속력이 줄고 있음을 느끼는 두식. 마차는 그들의 소굴로 보이는 지하 동굴로 들어간다.
흡혈귀들에게 끌려 작은 방에 갇힌 두식. 자신들의 먹잇감이나 포획물을 잠시 가둬 두는 곳으로 보이는 이 방에는 작은 우물 같은 것도 있다.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피를 빨리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와 그들의 포식자인 흡혈귀들의 괴이한 웃음이 동굴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악마의 웃음소리에 한기가 느껴지는 듯 몸을 감싸는 두식. 곧 비명 소리가 멈추자 자신의 일인 듯 안도하며 한 숨을 내쉰다.
저 사내에게 일어난 일들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있던 두식은 이 방으로 다가오는 듯 점점 더 커져오는 발소리에 다시 몸을 움츠린다.
잠시 후 낡은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부터 긴 그림자가 두식 앞으로 늘어진다.
문 밖에서 두식을 지켜보고 있는 흡혈귀. 두식은 그가 방금 자신이 들은 괴이한 웃음소리의 주인임을 눈치 채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림자 주인의 눈은 크고 검은색에 광택이 나는 듯 미끈했다. 겁에 질린 두식이 비칠 정도로.

두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머리 속으로 분석 중이던 인수는 뒤늦게 두식이 이야기를 멈춘 것을 알고 고개를 든다. 마침 두식이 자신의 코 속에 있던 이물질을 꺼내 인수의 책상 아래에 숨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씨익 웃어 보이며 자신의 주머니로 그 손을 가져가는 두식을 보자 머리가 복잡해지는 인수. 두식은 자신도 민망했는지 흡혈귀들에게 끌려갔다 온 이후로 콧물이 대책 없이 흐르거나 코딱지가 많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코딱지와 축농증이 흡혈귀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두식에게 그의 개인사를 묻자 아내와 9살 쯤 된 아들이 있다고 말한다. ‘9살 쯤 이라고? 자기 아들의 나이를 모르는 건가?’ 두식은 지방 어딘가에서 살다 서울로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한 뒤 그 이상의 개인사는 더 이상 털어 놓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 인물들 역시 언제 흡혈귀의 목표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 상담들도 잠시.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두식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몸을 떠는 두식. 반갑지 않은 기억들을 꺼내려하자 두식의 육체가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간질 환자나 갓 잡은 물고기처럼 몸을 파닥거리던 두식은 입에 거품을 문 채 바닥에 쓰러진다.
인수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 와 두식을 본 김 간호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진정제와 주사기를 들고 온다. 두식의 팔에 진정제가 든 주사 바늘을 꼽는 인수와 그를 돕는 김 간호사. 진정제가 바로 효과를 보이는지 두식은 인수의 품에서 잠들어 버린다.
인수는 짧은 경력에도 빠른 대처를 보이는 김 간호사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순간 김 간호사의 목덜미와 허벅지가 눈에 들어온다. 빠르게 눈길을 돌리는 인수. 치마를 끌어 내리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선 그녀가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내가 왜 이러지?’ 생각지 못한 자신의 이런 행동에 당황하는 인수.
최근 들어 이상해진 자신과 기절해 있는 두식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의 상담을 걱정하는 인수.      

병실 침대에 누워 잠이 든 두식. 그가 숨을 쉬기 편하도록 열어 놓은 상의 안으로 얼핏 두개의 이빨자국이 보인다. 상의를 조금 더 벌려 이빨자국을 확인하는 인수. 혼란스럽다. 잠시 얼굴을 찡그려보다 손가락을 핀셋모양으로 만들어 두식의 윗입술을 들어 올려 본다. 그의 송곳니는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길어 보이는 것 같다.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뾰족하지는 않지만...
두식이 경련을 일으키자 흠칫 놀라는 인수.
「사... 살려 주세요. 정말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애원하듯 소리 지르다 다시 조용해지는 두식. 여느 때처럼 빠르게 반응해 병실로 달려 와 문 앞에 서는 김 간호사를 뒤로 하고 생각에 빠지는 인수.

7
선배와의 술자리를 가진 인수. 바텐더 뒤로 장식장을 가득 채운 양주병들이 보인다.  
서로의 환자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문득 두식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인수.
「정신이상이야, 아, 정신 질환이라고 해두자. 자세한건 나도 봐야 아니깐」
바로 두식에 대해 결론을 내려버리는 선배.
「넌 정신과 의사야. 환자의 공상에 같이 빠져들지 말라고...」
인수가 여전히 두식이 뭔가 의심스럽다고 말하자 선배는 그 사내를 연구해 보라고 말한다. 치료 과정이나 결과가 흥미 있는 연구 사례가 될 만 하면 얼마 후 일본에서 있을 신경 정신학회에 제출 될 논문으로 추천 한다는 제안을 한다. 물론 환자의 심리상태, 가족이나 친구,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주변 환경 등의 개인사에 관련된 모든 자료가 첨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선배가 제안한 논문에 들어 갈 내용들은 사실 정신과 의사의 심리 치료를 위한 정보보단 사립 탐정의 뒷조사에 더 가까웠다.  

8
인수는 갈수록 악몽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밤중에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허겁지겁 침대에서 빠져나가기도 했다. 차츰 여자 친구와의 관계도 어색해지기 시작한다. 그녀 역시 자기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9
  환자와의 상담 시간 중 멍하니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인수.
「선생님?」
환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는 인수.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말씀하셨죠?」
「요즘 뭔가에 계속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요. 방금 선생님처럼 요.」
환자의 말에 놀라는 인수, 점점 얼굴이 굳어진다.
자신과의 상담 중에 식은땀을 흘리는 의사를 보자 당황하는 환자.
테이블 위 두식의 진료 차트를 보고 있는 인수.

쫓겨나 듯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 분위기를 파악한 김 간호사는 다음 예약이나 처방에 관한 말들로 환자의 주위를 끌고 있다. 대강의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진료실을 나서는 인수.  
「나 좀 나갔다 올게요.」
「선생님, 방금 여자 친구 분한테서 전화...」
「어, 미안 나중에...」
김 간호사의 말을 뒤로하고 급히 병원을 나서는 인수.

10
서울의 어느 달동네, 오후가 다되어가는 시간에도 여전히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태양이 보인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 인수. 그의 얼굴에 비 오는 듯 쏟아지는 땀. 인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양복 상의처럼 축 늘어져 있다.
한 할머니가 집 밖으로 시원스럽게 뿌린 물이 길을 걷던 인수에게 덤벼든다. 갑작스러운 물세례를 피한 인수는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물을 들고 있던 자신의 양복 상의로 막은 것을 후회한다. 인수가 푸념 섞인 표정을 짓기도 전에 집으로 들어 가버리는 할머니.
아직도 한참 남은 오르막길과 물에 젓은 양복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인수.
  
동네 주민에게 쪽지에 적힌 주소를 보이며 길을 묻고 있는 인수. 인수를 훑어 보다 어느 집을 가리키는 동네 주민. 급한 듯 자리를 뜨는 동네 주민은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인수를 흘깃거리고 있다.

두식의 집을 찾아 온 인수. 마당엔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혼자 놀고 있었다.
아이에게 말을 시키던 인수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다. 문 앞에 선 채 인수를 경계하는 두식의 아내. 인수를 훑어보던 두식 아내의 시선이 인수의 젖은 양복에서 멈춘다.

방 안, 엄마 옆에 앉아 인수를 쳐다보고 있는 두식의 아들. 어색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  보던 인수의 시선에 방 한쪽 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어린이 만화 잡지들이 들어온다.
소년중앙, 어깨동무, 소년경향... 종류가 다양해 보이는 만화책들. 모두 월간 잡지들이었지만 정기구독처럼 연결성은 없어 보였다.
「너 만화책 좋아하는구나.」
어색한 분위기를 깰 겸 말을 꺼내는 인수.
「내꺼 아니에요.」
자신의 물건이 아니라는 듯 단호하게 대답하는 두식의 아들. 두식의 아내가 나가 놀라며 아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인수가 두식 아들에게 과자 사먹을 돈을 내밀자 적당히 거절한 후 바로 낚아채는 두식의 아내. 그녀는 자신들의 형편을 좀 보라는 듯 약간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인수의 돈을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자신의 돈이 두식 아내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민망해하는 인수. 대신 엄마의 주머니 속 잔돈을 넘겨받은 아이는 그것도 신난다는 듯 밖으로 뛰어나간다.
아이가 나가자 이제 물어 볼 것이 있으면 물어 보라는 표정을 짓는 두식 아내. 인수가 두식의 현재 상태와 원인에 대해 궁금해 하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 사실은 알고 있지만 함부로 말 할 수 없다는 듯.

두식의 아내를 따라 방을 나서는 인수. 지방에 살다 봄쯤에 서울로 올라왔고 첫째 아들은 오래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두식의 아내는 아는 이웃의 일을 도와주고 몇 푼 번다는 것. 어느 날 갑자기 막 개업한 정신과 광고가 실린 신문을 보더니 병원에 다녀왔다는 두식 이야기 정도 뿐, 그리 특별할 만할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인수는 여전히 두식 가족이 살던 그 ‘지방’이 어디인지 그의 아내에게서도 알아 낼 수 없었다는 게 계속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자신은 일을 나가야한다며 인수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서는 두식 아내. 인수는 그녀에게서 두식이 올 때까지 마당에서 기다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훔쳐 갈 것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이었지만.
집을 나서면서까지 남편의 이야기를 캐묻던 인수를 경계하는 두식 아내. 인수는 자신의 정신과에 찾아 온 환자에 대해 가정 방문까지 하는 의사는 무척 드물 것이라고 생각하니 두식의 아내가 이해되기도 했다. ‘드문 게 아니고 아예 없는 일이던가?’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는 두식의 아들을 지켜보는 인수. 평소엔 이렇게 부모가 없는 텅 빈 집을 혼자 지키고 있는 듯 보이는 두식의 아들. 하지만 오늘은 한 봉지에 50원하는 새우깡 한 봉지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좀 좋은 것 같아 보인다. 나중에 또 과자를 사먹을 생각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가끔씩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남은 동전을 확인하는 두식의 아들.
「너도 아빠 어디 갔는지 모르니?」
고개 흔드는 두식의 아들.
「그럼... 너 여기 오기 전에 어디서 살았는지 알지?」
고개 들어 인수를 바라보는 두식의 아들. 막 녀석의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오려고 꿈틀대고 있다. 대답을 기다리며 입맛을 다시는 인수.
「선생님이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문 앞에 서 있는 두식을 보자 마루에서 일어서는 인수.

11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인수와 두식. 인수는 병원을 벗어난 이런 상담이 두식에게서 더 많은 것을 끌어 낼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다.
「저번에 병원에서 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잠꼬대 같은 것을 하시던데 그게 누구죠?」
인수의 질문에 당황하는 두식.
「제가요? 저는 기억이 통...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그런데 분명히 하셨어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진짜 모르신다고... 그 사람이 누구죠?」
인수의 재촉에 소주를 들이 키고 입맛을 다시는 두식. 잠시 후 그의 경험담은 계속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찾기 위해 두식을 데려 온 것이었다. 그들이 찾는 인물은 흡혈귀에 대항하는 인물로 유명한 자중 하나이고 얼마 전에 있었던 흡혈귀와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 인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쫓기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 인물은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면 숫자적으로 불리한 흡혈귀들을 공략 하는데 어려울 것이 없다고 주장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수의 피해만 주고 살아가는 흡혈귀 세계의 법칙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며 그들이 큰 사고를 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인수는 이부분에서 미국의 큰 도시 안 엔 대략 5만 명이 조금 넘는 숫자의 흡혈귀가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진 채 자신의 구역에서만 조용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가십기사를 본적이 있음을 짧게 떠올려 본다.

잠시 이야기를 끊고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는 두식. 인수는 그제야 소주가 떨어졌음을 알고 한 병 더 주문한다. 인수에게 한 잔 따른 후 자신의 잔에 혼자 부어 바로 마시는 두식.
고추장에 찍은 해삼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 두식을 보는 인수. 해삼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그의 송곳니가 날카롭고 잔인해 보인다.

다시 소주 따르는. 맑은 소주가 가득 찬 소주잔을 바라보며 두식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소주 잔 안이 그가 갇혀있던 방안의 우물 안으로 변한다. 마치 인어처럼 헤엄치고 있는 두식. 작고 좁은 입구를 가진 우물이었지만 그 속은 바다처럼 넓고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한가롭게 헤엄치는 두식이 점점 아래로 헤엄쳐 가보지만 우물 밑바닥은 끝이 없어 보인다. 이때 두식을 쫓아 물 속까지 들어온 흡혈귀. 두식은 온 힘을 다해 다리를 저어 흡혈귀에게서 도망치려한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흡혈귀는 마치 작은 물고기를 노리는 상어처럼 보인다. 얼마 못가 흡혈귀에게 낚아 채여 수면으로 끌려가는 두식의 모습.
한바탕 추격전이 끝나고 그들이 사라지자 다시 고요해지는 물 속.

마지막 잔을 비운 두식은 집에서 기다릴 아들놈 때문에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말한다. 이제 그만 말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의 상의 속에 숨어있는 이빨자국을 훔쳐보며 시간이 나면 다시 병원으로 찾아오라는 말을 전하는 인수.

12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두식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수.
인수의 얘기가 끝나자 양주잔을 살짝 돌려 얼음을 움직여 보는 선배. ‘덜컥’소리를 내며 위치를 바꾸는 양주 잔 속 얼음들을 보다 입을 연다.
「이야, 너 병원 원장 되더니 많이 변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적극적인 사람이 아닌데...」
선배의 말에 자극을 받은 인수. 화가 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럼, 우리 병원으로 한번 데려와라. 나도 한번 보자.」  
선배는 너무나 간단한 해결책으로 이 대화를 끝냈지만 인수는 왜 그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자책하고 있었다.

13
인수는 매일 병원에서 퇴근하는 대로 두식의 집을 찾아갔지만 두식은 집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두식의 아내가 꺼려해 그의 집 안으로 발을 붙이지는 못했다.

다른 날처럼 다시 두식의 집을 찾은 인수는 열린 문틈으로 집 안을 훔쳐본다, 일요일 오전인데도 두식의 아내는 일을 나가고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아들의 신발만 보였기 때문이다.  도둑고양이처럼 집 안으로 들어가는 인수. 몇 걸음 못가 문 밖의 인기척을 들은 두식의 아들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순간 인수는 자신의 선택 가능한 직업 중에서 도둑을 빼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어색하게 방 안에 앉아 있는 인수와 두식의 아들. 두식의 아들은 TV에서 방영중인 만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은하철도 999라는 제목의 만화 영화인데 요즘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는 것쯤은 인수도 알고 있었다. 이 만화 영화는 기계인간이 되어 영생을 누리라는 엄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한 소년의 모험담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흡혈귀와 이 만화의 주인공인 철이라는 소년은 영생에 대한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접어두고 다시 두식 아들의 시점을 따라 TV로 얼굴을 돌리는 인수.
‘메텔’이라는 금발의 여자 주인공이 평소처럼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전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남기는 거야.」
인수는 여전히 TV에 몰두해 있는 두식의 아들을 보며 이 아이가 저 말뜻을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인수 자신도 생각해 볼수록 더 어려워지는 대사가 아닌가. 하지만 인수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쓴다. 자신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깐. 다시 방 한 귀퉁이에 쌓여 있는 만화책들에 눈이 가는 인수. 그 만화책들은 모두 최근 몇 년 사이의 7.8월 여름 특집호 들이었다.
「저기... 저 만화책 니꺼 아니라고 했지? 그럼 누구 꺼니?」
김국환이라는 사람이 부른 만화 주제가가 다 끝난 뒤에야 인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두식 아들.
「아빠 꺼 예요.」
「아빠가 원래 저런 거 보는 거 좋아 하시니?」
「아니요. 그런데...」
「그런데?」
잠시 생각에 빠지는 두식의 아들.
「의사 선생님이 진짜 우리 아빠 안 아프게 해줄 수 있어요?」
「그럼. 아빠 고쳐 줄려고 온 거야.」
고민하다 입을 여는 두식 아들.
「병원에 갔다 오면서 사왔어요.」
「병원에?」
「네, 그때부터 몇 개씩 사왔어요.」
두식 아들의 말에 만화책 한권을 집어 훑어보는 인수. 요즘 잘나가는 만화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지만 그 외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거 만지면 아빠한테 혼나요.」
두식 아들의 핀잔에 만화책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두는 인수.
「그래. 미안하다. 그런데...」
인수의 다음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두식의 아들.
「아빠랑 니가 살던 곳이 원래 여기 아니지?」
「네.」
「거기가 어디니?」
순간 말을 머뭇거리는 두식 아들.
「너 알고 있지? 너 다 컸잖아.」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이가 그렇게 말한 후 입을 닫아 버리자 난감한 인수,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지폐 한 장을 꺼내든다. 좀 비열한 방법이지만 분명히 효과적인 작전이었다. 인수가 과자나 사먹으라며 돈을 내밀자 두식 아들의 눈빛이 금세 흔들렸으니깐 말이다.    
인수가 내민 지폐를 보며 고민에 빠지는 두식의 아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제 지쳐 버린 인수 앞으로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 두식이 보인다. 애인을 기다렸다는 듯 환한 얼굴로 두식에게 달려가는 인수.

14
환자의 진료를 마치자 다시 외출 준비를 하는 인수. 마침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지금 나갈 테니 기다리라고 말한 후 급하게 진료실을 나서는 인수.

진수가 다시 외출한다고 말하자 그동안 많은 손님들이 왔다 그냥 돌아갔다는 말을 전하는 김 간호사. 인수는 그녀가 그 말 외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병원을 자주 비우는 자신에게 프로답지 못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원을 나서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 친구가 보인다.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인수였지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친구를 보자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레스토랑에서 여자 친구와 마주 앉게 되자 어색해진 인수. 여자 친구 역시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얘들 과외 해?」
마땅히 할 얘기가 생각나지 않자 가벼운 질문을 던져 보는 인수.
「뉴스도 안 봐? 과외 금지령 내렸어.」
주위 일에 무관심한 자신을 꾸중하는 여자 친구의 말투에 무안해지는 인수.
둘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어서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인수는 환경 단체가 벌이는 행사가 있어 잠시 지방으로 떠나야한다는 그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일을 말릴 생각도 없고, 말린다고 하지 않을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환경을 보호하러 간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런 와중에 여자 친구의 목덜미를 훔쳐보는 인수. 왠지 그녀의 목덜미를 한번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는 인수. 혼란스럽다. 김 간호사에게서 느낀 것과 비슷했다. 보통 남자들이 흔히 가질 수 수컷의 본능이 아닌 그것과는 조금 다른. 아니 그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의 것이었다.
시계를 쳐다보던 인수는 세미나 때문에 시간이 없다며 여자 친구를 돌려보낸다. 서울로 다시 올라오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지는 인수를 보고 있다 슬픈 표정으로 돌아서 걷는 여자 친구.

15
선배의 종합 병원으로 두식을 데려간 인수. 검사실로 걸어가는 도중에도 주위를 돌아보며 두려워하는 두식을 안심시키려 노력한다.
검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배는 인수를 밖에서 기다리게 한 뒤 두식을 검사실로 데리고 들어간다. 뒤에 남겨진 인수를 보며 엄마에게서 떨어지기 싫은 아이의 표정을 짓는 두식.

병원을 나서는 인수와 두식. 택시에 오른 인수는 단순한 검사를 받은 것이니 걱정 말라며 두식을 달래 본다. 어두운 얼굴로 창밖만 보고 있는 두식.
택시가 명동을 지나칠 때 쯤 두식이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한다. 무언가 충격을 받았을 때 일어났던 발작이 다시 시작 된 것이다. 두식의 발작에 놀라는 운전기사. 인수가 병원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치자 급히 핸들을 꺾는다. 두식을 진정 시키던 인수는 문득 두식이 바라보던 방향을 응시한다. 그곳엔 내년쯤 일반에 공개될 것이라는 남산 타워가 서있었다.

16
자신의 진료실 안을 서성이며 안절부절 못하는 인수. 전화벨이 울린다. 재빨리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드는 인수. 결과가 나왔다며 인수를 부르는 선배. 전화로는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봐선 분명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굳이 선배의 심각한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선배의 병원을 찾은 인수는 선배가 내민 신경정신 분석용 뇌 촬영 사진을 받아 든다.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냐?」
「뭐하는 사람이냐니?」
「장난하지 말고 대답 해. 그 사람 누구야?」
선배는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마치 아빠의 물건을 만지면 안 된다는 약속을 어긴 막내 동생을 혼내는 형처럼.
선배에게 두식이 자신을 찾아 온 이야기부터 최근까지의 일을 자세히 말해 주는 인수. 사실 전에 선배에게 모두 했던 얘기들이다. 다만 선배가 관심이 없었을 뿐.
아무 말 없이 인수의 말을 듣고 있던 선배가 입을 연다.
「혹시 일하는 곳이 전기를 다루는 곳이야?」
「잘 모르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인수의 대답을 듣고 미간을 찡그리다 다시 말을 잇는 선배.
「Defibrillator¹나... 뭐 그런 걸로 자주 충격을 먹은 거 같아.」  
놀라는 인수.
「누가? 왜 그 사람한테...」
「그게 문제야. 어떤 놈들인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는 선배.
「급성 부비동염²하고 비슷한 증상도 있어서 콧물을 멈추지 못 하는 거야,」
「비슷한? 형이 그런 얘길 해?」
잠시 고민하다 말을 잇는 선배.
「나도 잘 모르겠는데 물속에 자주 들어가 있었던 것 같아. 수영장에서 물먹는 거랑은 좀 다른 건데...」
선배는 말하기가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원래 심장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까 말한 충격들로 더 나빠지고 있어. 다리 관절도 아주 나쁘고... 술까지 많이 마셔서 몸 전체가 엉망이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그래서 결론이 뭐야?」
인수의 말에 화난 듯 받아치는 선배.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그렇게 듣고 싶어? 너 이제부터 그 사람 진료 하지 마. 그리고 이 얘기는 다른 데 가서 하지 말고. 알았어?」
「형?」
「이제 내 얘기는 다했어. 나 바쁘니깐 그만 가라.」
평소와 다른 선배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는 인수.

선배의 병원에서 바로 두식의 집으로 달려 온 인수. 오후 들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저녁이 되자 폭우로 변하고 있다. 양복 상의로 우산을 만들어 쓴 채 두식의 집 앞으로 달려 온 인수는 마당에서 나무로 깎아 만든 말뚝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는 두식과 그것을 말리려는 그의 아내가 몸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양복을 내던지고 그들의 몸싸움에 끼어드는 인수.
퍼붓는 빗속에서 하늘로 들어 올려진 말뚝과 몸싸움하는 세 사람, 마루에서 울고 있는 두식의 아들. 그 풍경은 마치 폭우 속에서 치러진 월드컵 결승전 경기에서 우승 한 직후 다 같이 쥴 리메 컵을 들어 올린 채 기뻐하는 선수들의 모습 같아 보였다.

17
평소처럼 진료 중인 인수. 대기실에서 작은 소란이 일더니 검정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진료실 문을 열고 쳐 들어온다. 그 뒤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김 간호사를 보니 꽤나 힘 있는 사람들이 분명했다. 인수의 의중은 묻지도 않은 채 그를 데리고 병원을 나가는 사내들.

여자 친구가 활동하던 환경 단체는 지금까지 반정부 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반정부 활동이라는 것은 그들의 표현이다. 그러나 자신의 여자 친구가 테러리스트 같은 존재라는 말에 인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수는 그녀와 사귀었다는 이유로 끌려 온 것이었다. 그녀가 숨어 있을 만한 거처를 말하라는 사내들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인수. 생각해 보니 정말 그녀의 일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인수에게 곧 입을 열게 해주겠다는 사내는 자신이 들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고 있었다. 이때 문이 열리고, 사내를 불러내는 다른 사내. 둘이 한참을 얘기하다 방 안에 있던 사내가 다시 들어온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떨고 있는 인수. 눈을 질끈 감아 보지만 곧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사내가 자신의 포박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운이 좋네요. 이젠 나가도 됩니다.」
놀라는 인수 보며 빈정대는 사내.
「누군 부모 잘 만나서 호강하면서 살고 누군 이 짓거리나 하고 있고... 그런 생각 들지 않아요. 의사 선생님?」
인수는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 사내의 비아냥 따위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사내의 부축으로 몸을 일으킨 인수는 방을 나서다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빠르게 뒤돌아보는 인수. 그가 있던 방 안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의 창살이 십자가 모양이었다.
햇볕을 등진 창살은 바닥으로 커다란 십자가를 그리고 있었다.

사내의 부축으로 방을 나와 다른 사무실로 향하는 인수. 사내의 동료로 보이는 다른 사내들이 막 잡혀 왔다는 환경 단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놀라는 인수. 혼란스럽고 두렵다. 하지만 인수 자신도 누군가에게 끌려 다니는 처지라 그것에 대해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방문이 열리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부모 옆엔 이곳의 책임자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어두운 이곳에서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인수에게 달려 와 뺨을 때리는 인수의 아버지. 계속해 인수의 뺨을 때리던 그는 인수를 데리고 온 사내가 말리자 그제야 뒤로 물러선다. 선글라스에게 계속 허리 굽히는 인수의 부모. 인수는 분명 이 상황도 교회에서 뻗어 나온 인맥 중 하나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인수에게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걱정 말라는 선글라스. 도대체 무엇이 해결 되었다는 것인가? 그 해결되었다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몸이 떨리기 시작하는 인수.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인수. 마침 반대편에서 붉은 색 경광 등을 번쩍이며 다가온 검정 벤이 인수 가족이 타고 있는 차를 스쳐 지나간다. 인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혹시 저안에 그녀가 타고 있을까?’ 혼자 상상을 하다 다시 공포에 질리는 인수.
인수의 아버지는 이번 일이 자신의 사업에 어떤 영향 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인수. 자신의 여자 친구가 저 안에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을 걱정하고 있다. 혼란스럽다.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인수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사이드 미러에 시선을 둔 인수는 그 속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남산 타워를 보게 된다. 타워의 송신탑에선 헬기나 비행기 등을 위한 충돌 경고의 불빛이 번갈아 가며 반짝이고 있었다.

18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인수에게 그를 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늘어놓는 아버지.
「더 이상은 이 애비 얼굴에 먹칠 할 생각하지마라. 알겠냐?」
울먹이는 인수.
「아버지...」
「이 놈이 그래도... 우리 집 안을 아주 망가뜨릴 셈이냐? 니 병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서 그래?」
「아버지...」
인수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려다 돌아서서.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한텐 아무 일없다. 한동안 행동 조심하고, 그 아이는... 잊어라.」
인수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방을 나가 버리는 아버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울음을 터뜨리는 인수. 방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자신의 팔을 물고 있다. 점점 통곡으로 변하는 인수의 울음소리.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인수.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거나 혼자 울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19
순간 잠에서 깨는 인수. 그가 있는 어두운 방안은 그로테스크한 문양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 친구. 나체인 몸을 드러낸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 친구를 감싸 앉는 인수. 그는 그녀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왜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나오는지 따위는 생각 할 시간도 없이 금세 그녀의 육체로 빠져 든다. 그들은 마치 짐승처럼 서로를 뜯어먹는 듯 애무하고 있다.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던 인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목덜미로 얼굴을 가져가 댄다. 이때 인수의 몸을 만지며 다가오는 또 다른 손. 역시 벌거벗은 채 온 몸을 드러낸 김 간호사였다. 자연스럽게 나체의 두 여자를 품은 인수는 꿈을 꾸듯 몽환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다. 인수의 어깨나 목을 무는 두 여자. 인수는 작고 짧은 괴성을 지른다. 곧 그녀들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인수는 여자 친구의 목을 향해 날카롭고 흉악한 이빨을 드러낸다.

잠에서 깨어나는 인수,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방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던 인수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안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인수의 병원과 아버지의 사업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0
병원으로 들어오는 인수. 막 퇴근하려는 김 간호사가 보인다. 오랜만에 인수를 보자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 김 간호사. 인수는 자신의 꿈속에 등장했던 그녀를 보게 되자 죄책감을 느끼는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괜찮다고 대답하는 인수.
김 간호사는 의사와 손님이 없는 병원을 혼자 잘 지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이제 다시 진료를 시작할 것이라는 인수. 잘 됐다며 기뻐하는 그녀를 퇴근 시키고 빈 병원을 둘러보는 인수.

오랜만인지 낯설게 느껴지는 병원. 김 간호사는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청소를 깨끗이 해 논 것 같다. 처음 병원을 개업했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기실 소파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 쉬는 인수. 이곳에 다시 적응하려는 듯 보인다. 이때 인수의 눈에 들어오는 대기실 잡지들. 이제야 두식이 다시 생각났는지 그가 읽던 잡지를 찾아 든다.
잡지를 넘겨보면 의학 약품이나 관련 장비 광고들, 전문적인 의학 상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별다른 것이 없어보이자 실망하며 대충 훑어보던 인수는 잡지를 내려놓다 문득 다시 집어 든다. 잡지의 뒷부분을 향하는 빠르게 움직이는 인수의 손.
그가 펼쳐 든 잡지 뒷부분엔 흡혈귀와 피에 관한 기사가 들어있었다. 여름 납량 특집 정도 되어 보이는 가십기사였지만 병원 잡지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듯 빈혈 등의 피와 관련된 증상들과 연관 지어져 있었다.
흡혈귀를 소개하는 부분에 이르자 얼굴이 굳어 버리는 인수.

항상 피에 굶주려 인간들의 피를 마셔야 하는 초자연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해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는 베일에 감추어진 존재.
영혼 속에 숨겨 진 야수를 끄집어내는데 있어 어떠한 강박관념이나 죄책감이 없는 존재.

무엇인가 자신의 머리를 강타한 듯 충격을 받는 인수. 병원 대기실에서 잡지를 읽던 두식을 떠올려 본다. 곧 잡지를 내던지고 병원을 뛰쳐나가는 인수.

21
두식의 집으로 달려가는 인수의 머리 속에 두식을 납치한 흡혈귀들과 불울 뿜는 검은 마차, 붉은 눈을 가진 거대한 첨탑, 작은 우물이 딸린 방, 광택이 나는 검은 눈의 사내가 스치듯 지나친다.

두식의 집을 찾은 인수는 방 안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두식을 본다. 한동안 못 본 사이에 두식의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집안엔 아내와 아들은 물론 얼마 안돼 보이던 살림살이들마저 보이지 않았다. 인수를 알아보곤 힘겹게 웃음 지어보이는 두식. 그동안의 일에 대해 묻는 인수에게 다시 보게 되서 반갑다는 대답만 되풀이한다.
이제 그에겐 도망간 가족이나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목숨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흡혈귀가 될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두식은 인수에게 자신을 이대로 버려두지 말라고 말한다. 그가 흡혈귀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인수는 두식이 힘겹게 말뚝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본다. 인수에게 말뚝을 내미는 두식.
「이걸 심장에 박으면 그 놈들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대요.」
「무슨 소리하시는 거예요?」
「이걸 해줄 사람은 선생님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흡혈귀가 어떤 놈들인지 잘 모르거든요.」
이제 그만 하라며 두식에게 소리 지르는 인수. 두식에게 그것은 병이며 모두 두식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소리친다. 한쪽 귀퉁이에 쌓여 있는 만화책들을 끌어와 넘겨보는 인수. 책 뒷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납량 특집 기사를 찾아내는 인수. 흡혈귀, 처녀 귀신, 구미호 등의 기사가 보인다.
흡혈귀의 그림과 기사가 실린 책을 두식의 얼굴에 들이대는 인수.
「이것 봐. 당신은 병원에 있던 잡지를 보고 꾸며 낸 거야. 그리곤 여기 있는 이런 만화책을 보고 더 구체화 시켰어. 당신은 미친 거야. 이 세상에 흡혈귀 같은 건 없다고!」
「진짜 있어요.」
힘겹게 대답하는 두식의 상의를 열어 그의 목에 나 있는 상처를 가리키는 인수.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인수는 두식의 눈에서 나온 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의 상의에서 손을 뗀다.

병원에서 상담하듯, 두식의 경험담은 계속 된다. 하지만 이제 그의 경험담은 예전처럼 비현실적이지 않다. 인수 역시 그가 말한 장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방에 딸려있는 작은 욕조에서 막 나온 듯 흠뻑 젖어있는 두식. 팬티 만 걸친 몸을 끌어 앉은 채 바닥에 누워 떨고 있다. 그런 두식 앞에서 설렁탕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는 사내. 며칠을 굶은 듯 초췌해져있는 두식은 사내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설렁탕과 깍두기를 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다.
설렁탕을 절반 정도 먹다 배를 문질러보는 사내는 속이 안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저를 내려놓는다.
「어이, 이거 먹을래?」
설렁탕이 담긴 쟁반을 두식 앞에 내려놓는 사내. 두식은 개처럼 달려들어 설렁탕을 먹어치운다. 설렁탕을 먹다 잘 익은 깍두기를 보자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 두식. 혀를 돌려가며 입 안을 정리하던 사내는 행복한 표정을 짓는 두식을 보자 코웃음 친다.
「맛있지? 그거 먹고 그 놈 어디 있는지 말해야 돼. 응?」
순간, 입안에 가득 차있는 음식 씹는 것을 멈추는 두식, 울컥 하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두식의 입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식물들을 보며 얼굴을 찡그리는 사내.
「먹으면서 잘 생각해봐. 왜 니가 니 동생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되? 안 그래.」
울먹이다 사내의 말에 몸을 떠는 두식. 정신이 나간 듯 보인다.
「우린 그놈만 잡으면 된다고 했잖아. 몸 상하기 전에 얼른 말하고 여기서 나가야지. 자식새끼 안 보고 싶어?」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있는 얼굴의 두식. 그의 시선에 자신의 손 안에서 떨리고 있는 젓가락이 들어온다. 젓가락을 손바닥 안으로 모아 쥐는 두식.
「자, 빨리 먹고 이제 끝내...」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목을 찌른 두식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야, 이 새끼야!」
놀란 사내가 두식에게 뛰어가 그의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아낸다. 젓가락이 뽑힌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사내가 두식의 목을 붙잡아보지만 이미 많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뒤늦게 쫓아 들어오는 다른 사내들. 정신을 잃은 두식과 난장판이 된 고문실 안의 풍경. 두식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의 타일을 따라 퍼져나가고 있다.

담담히 이야기를 마친 두식을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는 인수. 두식의 목에 나있는 상처가 더 선명해 보인다. 두식은 인수의 손을 끌어 당겨와 말뚝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 위로 겹치도록 올려둔다. 이젠 말할 힘도 없어 보인다.
「선생님, 제가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괴물이 되면 저 세상에 있는 제 동생을 볼 면목이 없잖아요. 선생님이 도와주세요.」
인수와 두식이 감싸 쥔 말뚝이 두식의 심장 위로 세워진다. 두식의 죽음을 막아보려던 인수는 그가 살아가며 겪을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떠올려 보자 문득 결정을 뒤로 미루게 된다. 두식의 가슴 위에 올려진 말뚝을 바라보며 갈등하는 인수. 두식의 생명을 자신이 결정 하게 되었다. 이건 의사로서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인수와 달리 편안해진 표정을 짓는 두식. 항상 어둡고 불안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그 표정을 본 인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말뚝을 감싸 쥔다.
말뚝을 든 채 떨고 있는 인수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메텔의 목소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남기는 거야.」
절규하며 비명을 지르는 인수. 말뚝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인수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있는 두식의 모습은 마치 드라큘라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22
서울 역 안 매표소로 다가오는 인수. 한동안 고생스러웠다는 듯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매표소 위에 걸려 있는 열차 시간표를 올려다본다. 각 지역별 출발, 도착 시간들이 적혀 있는 열차 시간표의 한곳에 인수의 시선이 고정된다. 매표원이 어디로 가는 표를 살 것인지 물어봐도 대답이 없는 인수.
「손님, 어디 가세요?」
다시 재촉하는 매표원의 말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한참 만에 시간표에서 눈을 뗀 인수가 입을 연다.
「광주 가는 거 한 장 주세요. 제일 빨리 출발하는 걸로요.」
매표원이 내민 티켓을 받아 들고 물러난 인수는 역 대합실 기둥에 걸려 있는 TV를 둘러싸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본다. TV에선 막 장충 체육관에서 벌어진 11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저마다 자신들의 의견을 내놓느라 분주한 사람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와 사람들을 바라보던 인수는 몸을 돌려 역 안을 오가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기계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한 채 지구로 돌아가는 은하철도 999를 타러가는 철이처럼.

-끝-

¹ Defibrillator (재세동기) : 심실세동이나 심정지가 발생하였을 때 심장의 박동을 정상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장비.

² 급성 부비동염 : 축농증

댓글 2
  • No Profile
    배명훈 06.03.21 18:21 댓글 수정 삭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묵직한 글이네요. 이렇게 풀어낼 수 있군요. 놀랍습니다.
    서술체가 아닌 문장 종결 방식은, 개인적으로는 판단 유보입니다. 좀 음미해 봐야 진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 No Profile
    박성우 06.04.01 09:58 댓글 수정 삭제
    음.. 글씨가 깨져나오는데 비밀 번호 재 입력 하는 곳이 사라져버려 수정이 안되네요. 대신 이곳에 적습니다.

    박성우 sky50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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