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녀가 잠을 자는 이유

2013.03.09 21:1203.09

그녀가 잠을 자는 이유 (부제 : 영원히 꿈꾸는─)

by 민아



01. 


 세아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팔을 베고 책상에 누워 있었다. 세아의 고요한 숨소리만이 새근새근 방안을 채운다. 저 자세, 저 표정, 나는 백과사전에서 언뜻 보았던 사진과 설명을 떠올린다. 그 장면이 실제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믿기 어렵다. 

 나는 문을 닫는다. 그 소리를 듣고 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부은 눈을 비비며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잠시 후,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조, 조금 일찍 왔네?"


 고요. 침을 꿀꺽 삼킨 뒤, 나는 정적을 깬다. 


 "너 방금……."


 세아는 뭔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문다. 


 "방금, 잔 거야?"


 세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살짝 숙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아를 바라본다. 


 "너라면 괜찮겠지." 

 세아가 조용히 말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간절한 눈빛이 내게 비밀을 요구한다. 

 어쩌겠는가,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세아가 환하게 미소 짓는다. 그러더니 한 번 깊게 심호흡한 뒤 말한다. 


 "응, 나 잠 자."




 과학자들은 카페인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각성 효과가 뛰어나고 내성과 이뇨 작용 및 중독성이 획기적으로, 거의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줄어든 개조 카페인을 만들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아무런 피로감 없이 매일 밤을 새울 수 있게 되었고, 잠이라는 건 한참 전에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왜, 왜 세아는 잠을 자는 걸까?

 이번만큼은 세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세아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한다. 


 "부모님은 아셔?"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부모님도 잠을 자셔."

 "왜 잠을 자는 거야?"


 세아는 조금 생각하더니 답한다. 


 "몸에 노폐물이 쌓이니까?"

 "전부 해결 가능한 것들이잖아. 무료로."

 "약을 사용하는 게 찝찝해서?"

 "전부 의학적으로 안전하다잖아. 그런데도 불안하면 믿을 수 있는 게 없을걸?"

 "머릿속에 정보를 정리하기 위해서?"

 "가설일 뿐이었잖아. 그런 거 잠 없이도 충분히 가능해."

 "육체와 정신이 쉬기 위해서?"

 "수면 부족으로 오는 정신적 고통은 각성제가 모두 해결해 주잖아."

 "그런 게 아니라, 왜, 동물들이 많이 자는 이유는 그거라잖아. 지루해서."

 "맞아. 동물들은 의식적 가사상태를 통해 지루함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을 차단해. 그래서, 지루해? 우리는 지루할 틈이 없잖아?"

 "……."


 세아가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너 되게 많이 안다. 토론 준비라도 했어?"

 나는 피식 웃는다. "괜히 전교 1등이 아니거든."

 "그런가."


 세아가 내 방바닥에 드러누운 채 몸을 쭉 편다. 


 "잠잘 때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잖아."

 "그게 왜 좋은 거야? 최대한 많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효율적인 거 아냐?"

 "그 '효율적'이라는 단어, 약간 차갑지 않아?" 


 세아가 약간 슬픈 듯 말한다.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세아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내민다. 


 "공부해야지."

 "조금만 더 쉬고." 세아가 어리광을 피운다. 

 "내일이 시험이라고."

 "쳇."


 세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손을 잡는다. 



02.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담임선생님께서 교실을 나가시자마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모두 재빨리 가방을 챙긴 뒤 삼삼오오 모여 교실을 나간다. 


 "유리야." 서영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약속 없으면 같이 놀자."

 "안 돼."


 내 목소리가 아니라 세아의 목소리다. 세아가 뒤에서 내 양어깨를 감싸며 말한다. 


 "오늘 유리랑 나랑 어디 가기로 했어.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세아가 내게 시선을 보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애써 세아와 말을 맞춘다. "응? 아, 어, 으응."

 "그러면 같이 가자!"

 "미안. 둘이서만 가기로 했거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서영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쳐다본다. 

 "수상한데. 둘이서만? 어딜 가려고?"

 "그런 곳이 있어." 세아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둘이 데이트라도 해?"

 "응." 세아가 장난스럽게 답한다. 서영이가 웃는다. 

 "그래, 그러면 둘이서 데이트 잘 해!"


 서영이는 금새 다른 그룹에 섞인다. 귀가 뜨겁다. 나는 서영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한다. 


 "부끄러우니까 하지 마."

 "뭐가 부끄러워, 친구끼리."

 "갈 곳이라는 게 도대체 어디야?"

 세아가 내 귀에 속삭인다. "비밀."


 그렇게 말할 거였으면 도대체 왜 내 귀에 속삭인 건데,라고 말할 틈도 없이 세아가 내 손을 끌고 달려나간다. 

 잠깐만! 나는 겨우 보폭을 세아에게 맞춘다. 




 "제대로 가는 거 맞아?" 나는 노파심에 물어본다. 

 "맞아."


 세아는 앞장서서 어두운 골목을 꾸불꾸불 뚫는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세아의 뒤를 따라간다. 세아가 웃는다.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아무것도 안 나와."

 "그래도……."

 "다 왔다!"


 세아가 외친다. 눈앞에 녹슨 철문 하나가 보인다. 세아는 녹슨 철문을 연다. 왠지 들어가기 꺼려진다. 


 "뭐 해? 빨리 들어와."


 멀뚱멀뚱 서 있는 내게 세아가 말한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안으로 옮긴다. 




 사방이 보라색으로 물든 강당이 나타난다. 심지어 조명마저 보라색이다보니, 묘하게 신비한 느낌이 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강당에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소름 끼쳤다. 


 "앉아." 세아가 조용히 말한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왜……."

 "곧 알게 될 거야. 일단 앉아."


 나는 찝찝한 마음을 품은 채 자리에 앉는다. 잠시 후, 누군가 강단 위로 올라온다. 흰 삼베옷을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딱딱한 얼굴로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본다. 표정이 마치 나무로 만든 도깨비 탈 같다. 

 마치 먼 곳에서, 우리를 관망하는 듯한 눈. 

 굳게 닫힌 채,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입이 열리고, 우렁찬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불과 반세기 만에, 우리는 달콤한 죽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말에 강단 아래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하고, 빛이 더욱 밝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손으로 어둠을 없앴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회색으로 바래버렸습니다. 인간은 효율만을 생각하며, 잿빛 세계를 살아갑니다. 아아, 여러분."


 그는 잠시 말을 끊은 뒤, 강조하듯 짧게 끊어 말한다. 


 "우리는, 잠을, 되찾아야 합니다."

 또다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잠은, 죽음입니다. 수면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임사체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험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 뒤에 무엇이 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아니요,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잠을 되찾아야 합니다."


 나는 목구멍을 뚫고 올라와 입가에 맴도는 한숨을 겨우 다시 삼킨다. 하마터면 커다랗게 한숨을 내뱉을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모두 나를 쳐다봤겠지. 

 나는 세아를 슬쩍 쳐다본다. 세아는 진지한 얼굴로 그의 헛소리를 경청하고 있다. 아, 어쩌면 이 사이비 종교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반사회적인 종말론을 제창하며 자신들의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 믿는다. 그렇기에 더욱 맹목적으로, 열성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며 교리라는 이름의 궤변을 늘어놓는다. 기어코 종말론을 수단 삼아, 자신들의 종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을 망상의 수렁 속에 빠트린 뒤,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 스스로 더욱 깊게 들어가도록 만든다. 

 그 사람은 결국 그곳을 허우적대다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나는 그런 하찮은 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세아도 아마 부모가 아니었다면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세아는, 그래, 세아는 내가 구할 것이다. 내가 세아에게 손을 뻗어 수렁 속에서 세아를 끄집어낼 것이다. 

 예전에 세아가 나를 끄집어내 준 것처럼. 


 "이것들이 잠을 자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 잠을 자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전부 식상한 이유. 

 그때,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는 기분나쁜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이것들은 중요한 이유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번 뒤집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 사실 잠을 자는 이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잠을 자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꿈을 꾸기 위해서입니다."


 꿈을 꾸기 위해서. 아,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잡음을 애써 무시하며, 그곳에 앉아 세아를 어떻게 구할지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저 간단한 어구가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돈다. 

 꿈을 꾸기 위해서




 박수 소리가 들린다. 나는 세아와 함께 일어선다. 


 "어땠어?" 세아가 내게 물어본다. 나는 대충 말을 지어낸다. "괜찮았어."

 "그것뿐?"

 "괜찮았다니 고맙구나." 


 섬뜩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그 노인이 서 있었다. 


 "너는 어땠니?" 그가 세아에게 물어본다. 

 "좋았어요!"

 "고맙구나." 


 그는 세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늘도 좋은 꿈 꾸렴."

 그 말만을 남긴 뒤,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도 나가자."

 세아가 말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세아를 따라 나간다. 



03. 



 꿈은 어떤 느낌일까? 책에서 읽은 적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설명이고, 지식일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감을 잡기 어려웠다. 




 "세아야."

 "응?"

 "너 꿈이라는 거 꿔 봤어?"


 세아가 놀란 듯이 나를 본다. 잠시 후, 세아는 웃으며 대답한다. 


 "응, 꿔 봤어."

 "어때? 무슨 느낌이야?"

 "음, 어떠냐면, 으음……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세아가 곰곰이 생각한다. 잠시 후, "잘 모르겠어, 헤헤. "라고 내게 말한다.

 "한 번 직접 꿔 보는 건 어때?"


 세아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한다. 


 "별로 위험한 것도 아닌데."




 우리 집 문을 열자, 어둠이 펼쳐진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며칠간 오지 않으신다. 불을 켜도 텅 빈 교실만 보일 것이기에 굳이 불을 켜지 않는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나는 부엌에서 컵을 꺼내 물을 한 잔 마신 뒤, 내 방에 들어간다. 책상에 앉아 책상등을 켜니, 학교 가기 전까지 풀다 덮어 둔 문제집이 보인다. 문제집을 펼치려는데, 시선 한구석에 뭔가가 들어온다. 

 카페인. 

 그러고 보니 곧 카페인의 효력이 떨어진다. 나는 결정형 카페인을 하나 꺼낸다. 그리고 입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손을 멈춘다. 


 -꿈을 꾸기 위해서. 

 -별로 위험한 것도 아닌데.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결정형 카페인을 손바닥 위에 굴리며 생각한다. 한 번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머릿속에 그 구절이 떠다닐 것 같다. 공부에 집중이 안 될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한 번 해보고, 호기심을 명쾌하게 날려버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나는 결심한다. 세아에게 전화를 건다. 




 카페인을 물에 녹인다. 그리고 극미량을 하수구에 버린다. 


 -조금만! 아주아주 쪼오금만!


 세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웃는다. 눈으로 보기에는 양의 변화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게 조금씩 줄여가면 된다고 세아는 말했다. 


 -별로 위험한 것도 아닌데. 


 나는 물을 마신다. 괜찮을 것이다. 내 방으로 들어가 책상등을 끈 뒤, 바닥에 눕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숫자를 세며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하나, 둘, 셋, 넷…다섯……여섯……. 



04. 



 언제부터 나는 사랑에 빠진 걸까. 


 수능 1등, 몇백 년간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던 수학 문제를 증명해 낸 수학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모두 개조 카페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 카페인 복용을 최대한 일찍부터 시작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추세였다. 처음으로 카페인을 복용하는 나이가 점점 줄어들고 줄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욱 일찍 카페인을 복용해왔다. 내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나는 결정형 카페인을 먹고 있었으며, 다른 아이들이 잠을 잘 때 나는 선생님께 과외를 받았다. 덕분에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을 미리 끝마친 상태였다. 

 '그것도 모르냐 이 멍청아?' 깔보듯, 무시하듯 이 말을 내뱉어버린 것이 내 잘못이었다. 실수였지만, 내 잘못이었다. 일부러 무시하려 한 건 아니지만, 그들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역으로 그들에게 무시당하기 시작했다. 그들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끝없이 몸부림쳤지만, 그 때마다 싸늘하고 어색하게 얼어붙을 뿐이었다. 뭘 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건 한 달 후. 

 지쳐서 포기했다. 

 작은 학교 전체에 소문이 퍼졌고, 그 누구도 나와 대화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만큼 사교성이 떨어졌다. 할 수 있는 건 기계처럼 손을 움직여 문제를 풀고 전교 1등을 하는 것 뿐이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수군거렸다. '어머, 또 쟤야?' '재수 없어.' 그만큼 나는 그들로부터 더욱 괴리되었다. 

 아래로 향하는 나선. 끝없는 외로움. 나는 그 모든 것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해서 공부했다. 먼 곳의 좋은 고등학교에 가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다짐했다. 내심 헛된 다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화에 서툰 아이가 다른 곳에 가서 잘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줘.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5년이 지났다. 새로운 반에 앉아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세아였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세아를 쳐다봤다. 말을 더듬고, 얼굴을 붉히며, 너까지 말려들 거라고 서툴게 경고했다. 하지만 세아는 한 번 웃고 말 뿐이었다. 

 세아에게는 특유의 친화력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나를 그렇게 대하고도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나를 끌어낼 수 있었던 거겠지. 나는 세아 덕분에 끔찍한 지옥을 탈출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작고 사소한 것으로 시작된 것은 작고 사소한 것으로 끝난다. 그 작고 사소한 행동 하나로 세아는 나를, 내 주변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작고 사소한 것 덕분에 나는 세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05.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상관도 없다. 중요한 것은 세아가 내 앞에 있다는 것. 

 세아가 미소와 함께 내게 입을 겹친다. 가벼운 입맞춤. 이마를 맞대고 서로 교환하는 사랑의 시선, 동시에 터지는 웃음. 다시 키스, 이번에는 길게. 풀로 붙인 듯 진하게 달라붙은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일지 모를 숨결이 새어 나온다. 오고 가며 얽히는 혀. 세아는 내 목을, 나는 세아의 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가슴과 가슴이 닿는, 부드러운 감촉. 서로의 체온으로 달아오르는 몸. 어느 순간, 나와 세아는 알몸이 되어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황금빛으로 녹아들어, 끈적하게 섞이고, 하나가 된다……. 




 알람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깬다. 밖은 아직 어둡다. 나는 천천히 일어난다. 볼과 귀가 뜨겁다. 오랜만에 불을 켜고, 내 방의 거울을 본다. 얼굴이 빨갛다. 백과사전에서 보았던 꿈의 정의가 떠오른다. 

 [꿈이란, 수면 중에 생시와 같이 여러 가지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게 꿈이라는 거구나. 나는 다시 바닥에 눕는다. 냉기가 뜨거운 내 볼을 식힌다. 꿈이라는 건 이렇구나. 이렇게 생생한 거구나. 

 이렇게 좋은 거구나. 

 꿈속의 입맞춤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입술을 어루만진다. 가슴을, 허리를 만져 본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꽉 끌어안는다. 내 손으로 내 양어깨를 누르며,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한 번에 내쉰다. 

 상상 속의 세계에 빠진다. 




 "안녕!"


 세아가 나를 보자마자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묘하게 다른 때보다 나를 더욱 반기는 듯하다. 세아가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물어본다. 


 "그래서, 어젯밤은 어땠어?"


 세아의 입김이 내 귀에 닿는다. 꿈에서 느낀 세아의 입김이 떠올라 귀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한다. 


 "괜찮았어."

 "겨우 그 정도?"


 세아가 실망한 듯 입을 삐죽 내밀고 말한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07. 



 그때 했던 그 말과는 다르게, 시간이 날 때마다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 잠을 자려고 노력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끝없이 잠을 원한다. 아니, 원하는 것은 잠 자체가 아니다. 진짜로 원하는 것은, 그 꿈.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 꿈. 

 나는 다시 한 번 그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잔다. 제발 오늘은 그 꿈을 꿀 수 있기를 기원하며. 그러나 언제나 펼쳐지는 것은 암흑뿐, 그 꿈을 다시 본 적은 없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잠을 자는 데 집착한다. 




 눈 앞에 세아가 있다. 나는 세아에게……. 




 누군가 나를 격렬하게 흔든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짝.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뺨에 불길 같은 격통이 밀려온다. 고통에 잠결이 확 달아난다. 어머니가 눈앞에서 도끼눈으로 날 바라보고 계신다. 


 "너 미쳤지? 나이가 몇인데 잠을 자? 도대체 이딴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이 정신 나간 년아,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그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정신 차려! 너 임마, 다른 애들이 공부하고 있을 때 이딴 쓸모없는 짓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줄 몰라? 알잖아! 네 인생 휴지통에 쳐박히는 거야. 쓰레기 되는 거라고. 있는 시간 가지고 다른 애들 따라잡을 생각은 못할망정 이딴 짓이나 하고 있어? 그렇게 내가 너를 못 믿어, 응? 아니, 백수라서 할 게 없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 카페인을 못 사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잠을 왜 자 잠을? 참 가지가지 한다."


 어머니가 말을 멈춘다. 매서운 시선이 더욱 날카롭게 변한다. 


 "이 년 봐? 뭘 잘했다고 엄마를 그딴 눈으로 쳐다봐?"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깔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째려본다. 잠을 방해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다. 꿈을 방해해서 화가 나는 것이다. 얼마 만에 다시 꾸게 된 꿈인데, 그걸 끝까지 보지 못했다. 

 나는 이를 꽉 물고 내뱉는다. 


 "……쁘죠?"

 "뭐?"

 "도대체 잠 자는 게 뭐가 나쁘냐고요!"

 "이, 이 년이 진짜 돌았구나!"


 어머니가 다시 내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올린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밀치고 내 방을 나온다. 현관문까지 달려간다. 거기 안 서! 어머니가 외친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현관문을 쾅 닫는다. 




 "들어와."


 내 상황을 듣고 세아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준다. 나는 몇 번을 고맙다고 말한다. 


 "천천히 설득했어야지."

 "아니, 보여줄 생각은 없었어. 그저 어머니께서 생각보다 일찍 들어오신 것뿐이지."


 세아가 내게 잠을 잔다는 걸 들켰을 때를 연상시키는 말을 내뱉으며, 우리는 둘 다 웃는다. 

 세아는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간다. 


 "부모님은?"

 "일 나가셨어." 


 세아가 바닥에 털썩 앉는다. 나도 세아를 따라 바닥에 앉는다. 


 "그나저나 너 '괜찮았어.'라고 말한 거, 그저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 아니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야, 거짓말이었으니까. 


 "뭐, 어쨌든. 그러면 이제부터!"


 세아가 내 앞에 책상을 쾅 내려놓으며 말한다. 


 "작전을 세워보자."




 물론 여자 둘이서 그게 순조롭게 될 리가 없었다. 우리는 작전을 짠다는 핑계로 비디오 게임과 보드 게임을 하며 놀았다. 밤까지 신 나게 논 뒤, 우리는 피곤함에 절어 바닥에 누웠다. 


 "잘 자."

 "응."


 세아가 눈을 감는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눈에 각인시킨 뒤, 나도 눈을 감는다. 그때 못 꿨던 꿈을 마저 꿨으면……. 




 눈앞에 세아가 있다. 나는 세아에게 고백한다. 


 "사랑해."


 토해내듯 내뱉은 뒤, 세아를 꽉 껴안는다. 


 "사랑해, 세아. 진심으로, 사랑해. 예전부터 친구 이상으로……쭈욱, 좋아해 왔어."

 "나도 너를 사랑해," 

 유리. 세아가 양손으로 내 볼을 감싸며 말한다. 나는, 나는 세아에게……. 



08. 



 나는 꿈에서 깬다. 세아 방 천장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본다. 세아는 옆에 없다. 



09. 



 "안녕."


 세아에게 인사한다. 세아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는다. 


 "응, 안녕."


 그 말만을 남기고 세아는 자기 자리에 가서 앉는다. 이상하다. 




 세아는 변했다. 자신의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내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해다닌다. 일부러 어색한 표정을 숨기려는 게 눈에 보인다. 학교에서 내가 말을 걸어도 "어, 그래." 정도 짧은 대답만을 할 뿐이다. 다가가려 하면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 일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너 요즘 유리 피해 다니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세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응? 그렇게 대놓고 보여?"

 "당연하지."

 "엄청 티 나던데."


 세아는 한숨을 쉰다. 


 "그게……."


 나는 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아, 그날 내가 잠꼬대를 했구나. 깨닫는다. 

 세아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유리조각. 


 어머, 기분 나빠.

 걔 뭐야? 설마 말로만 듣던 레즈?

 그렇게 안 봤는데, 우웩.

 그런 눈으로 우릴 쳐다본 거야? 친구가 아니라?


 내 가슴에 박힌다. 



10. 



 모두가 나를 의식한다. 나는 나를 의식하는 시선을 의식한다. 그 시선은 내가 그들에게 닿을 수 없도록 공간을 일그러뜨린다. 

 나는 다시는 그들에게 닿을 수 없다. 끔찍한 지옥으로 되돌아온다. 나를 구원해 줄 세아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구덩이로 나를 밀어넣은 것이 세아다. 내 마음이 뭔가를 가두어 놓은 철상자처럼, 삐걱거린다. 비명을 지른다. 쇠 긁는 소리 같은 비명이 내 귀에 울린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나는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나온다. 세아의 집에는 가지 못한다. 가방 주머니에 집 열쇠가 있다. 나는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간다. 부모님은 아마 지금쯤 일터에 계실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베란다에 서서, 아래를 본다. 무표정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한참동안 본 뒤, 나는 카페인이 가득 담긴 통을 가방에서 꺼낸다. 

 카페인 통이 어느새 저 아래로 떨어진다. 실수로 놓친 걸까, 일부러 던진 걸까? 모르겠다. 너무 졸려서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꿈속의 세아를 떠올린다. 만나고 싶다. 아아, 영원히 꿈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피식 웃는다. 잠 때문에, 꿈 때문에 이 지옥에 돌아왓으면서, 나는 다시 그것들에 의존하려 한다. 하지만 그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약효가 다 떨어질 시간이다. 아니, 꽤 지났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피곤이 몰려온다. 모든 게 꿈 같아. 


 나는 쓰러진다. 앞으로, 뒤로, 좌로, 우로, 어느 방향으로, 잘 모르겠다. 그저, 쓰러진다. 



*



 나는 눈을 뜬다. 나는 어딘가에 누워 있다. 옆에서 세아가 걱정스러운 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일어났어? 괜찮아?"


 내 눈 주변이 촉촉하다. 나는 눈을 비빈다. 세아가 웃으며 말한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꿈?"

 "그래, 꿈."


 세아가 내게 손을 내민다. 왠지 세아가 내민 손을 잡는 게 망설여진다. 꿈? 꿈이라고?


 "잠꼬대로 그런 걸 알 리 없잖아. 너희 어머니는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니시고. 설령 네가 날 친구 이상으로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널 싫어할 리도 없고. 그걸 친구들한테 기분 나쁘다는 듯 말할 리는 더더욱 없고."


 머리가 살짝 아프다. 세아가 환하게 웃고 있다. 내가 아는 세아. 내 기억 속의 세아. 아름다운 얼굴. 나는 천천히 세아의 손을 향해 내 손을 뻗는다. 그리고 세아의 부드러운 손을 잡는다. 세아가 손에 힘을 줘, 나를 일으킨다. 


 "그래."


 세아가 나를 꽉 안아준다. 포근한 세아의 품. 세아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이제 다 괜찮아."


 너무나도 편하고 기분 좋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035 단편 워프기술의 회고 하루만허세 2013.06.03 0
2034 단편 데팅스에 관하여 고설 2013.05.28 0
2033 단편 맑고 흐림을 논하다 먼지비 2013.05.10 0
2032 단편 주점 오큐먼 2013.05.02 0
2031 단편 그걸 깜박했네 그리메 2013.04.27 0
2030 단편 블루 제트 (Blue Jet) 숨쉬는 돌 2013.04.25 0
2029 단편 비(雨)의 행성 숨쉬는 돌 2013.04.27 0
2028 단편 사유하는 철갑 니그라토 2013.04.23 0
2027 단편 도둑과 경찰 그리고 마피아 진영 2013.04.23 0
2026 단편 켄타우로스 eartison 2013.04.07 0
2025 단편 켄타우로스 eartison 2013.04.07 0
2024 단편 유령선 Cpt.kirk 2013.04.03 0
2023 단편 남들과 조금 달랐던 어떤 소녀의 이야기 나즈 2013.04.01 0
2022 단편 아스텔라 길 빛옥 2013.03.15 0
2021 단편 콜 미 코미 그리메 2013.03.26 0
2020 단편 기록된 이야기 진영 2013.03.30 0
2019 단편 동전 전쟁 빛옥 2013.03.15 0
2018 단편 불지 않을 때 바람은 어디에 있는가 먼지비 2013.03.15 0
2017 단편 어느 심사평 바닐라된장 2013.03.08 0
단편 그녀가 잠을 자는 이유 민아 2013.03.09 0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