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연인

2013.02.02 18:3502.02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을까?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을 때 김의 얼굴색은 초록빛에 가까웠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의미 없이 입을 크게 벌려보았다. 얼굴 근육에 힘을 주어 표정을 최대한 일그러뜨려보았다. 양 손을 사마귀처럼 들고 공격하는 시늉을 해 보았다. 그는 시간을 들여 꼼꼼히 세안을 했다. 평소에는 비누만으로 끝냈지만 이번에는 세안제까지 동원했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얼굴을 문지르고 난 뒤 다시 뒷목이 뻐근하도록 수돗물로 헹궈냈다. 그런 뒤에 다시 거울을 보았다. 얼굴은 여전했다. 오히려 씻기 전보다 더욱 선명해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사마귀 흉내를 내어보려고 팔을 들었으나 곧 기분이 나빠져서 관두었다. 그는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엎드린 채 누워있었다. 이불은 그녀의 몸 위쪽으로 말아 올려져 알몸인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김은 읽다만 책을 펴서 한 단락 정도 읽어보았지만 도무지 의미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들이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그림으로 보였다. 그는 일반적인 독서법을 포기하고 그림을 감상하듯 활자들을 따라갔다. 몇 몇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다이빙 했다. 그것들은 동심원이 되어 퍼져나갔고 긴 여운으로 그곳에 남아있었다. 조금 지나자 호수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는 호수 깊숙한 곳에 사는 잉어가 비를 감지하듯 매우 천천히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얼굴색이 왜 그래?

  그는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앉아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희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고 일어난 모습은 더했다. 그녀의 얼굴은 태풍이 지나간 하늘처럼 말끔하게 개어있었다. 숙취라고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김과 동갑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김보다 대여섯 살 쯤 아래로 보였다.

  -병이라도 있는 것 아냐?

그녀는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 거 아냐.

김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아니라면 얼굴색이 왜 그래? 뭐라도 잘못 먹은 거야?

김은 그녀가 상당히 격양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쉽게 그것을 억누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고 있었다.

  -거울 봤어?

  -응

  -대체 뭘 먹은 거야?

  -아무것도. 너와 같은 것을 먹었을 뿐이야.

  -사람의 얼굴색이 아니야. 피부가 그런 색이 될 수는 없어. 뭔가 병이 있는 게 분명해. 빨리 병원이라도 가보지 그래?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아픈 데도 없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람의 얼굴색이 아니라니까? 무섭다고.

탁 하고 김은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양손을 사마귀처럼 치켜들었다. 그녀가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러지마. 무서워 죽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욕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는 다시 책을 조금 읽다가 거울을 보았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 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김은 옷을 벗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머리를 말리는 모습을 거울로 지켜보았다.

  -좀 더 있을거야?

  머리를 말리며 그녀는 한 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김은 그 말이 ‘먼저 나갈테니까 그런 얼굴을 하고 따라올 생각 하지마.’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나갈 생각인데?

  그녀가 거울을 통해 잠시 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좀 더 있지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원피스를 입는 중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지퍼가 있는 곳을 더듬어 힘겹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도와줄까?

  김이 물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김은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 까다로워 보이는 지퍼를 올려주었다. 그녀가 화장을 하는 동안 김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셔츠와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조였다. 양말을 찾아 신는데 한 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보고 침대 밑을 살폈다. 양말은 보이지 않았다.

  -내 양말 못봤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녀는 화장품 케이스를 탁 하는 소리가 나게 닫았다. 김은 욕실입구에 팽개쳐져 있는 구겨진 수건들 사이에서 양말을 찾았다. 그녀는 구두를 신고 있는 중이었다. 김은 재빨리 양말을 신고 가방을 챙겼다. 그녀는 현관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위 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예뻐.

  김이 말했다. 그는 이미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그녀는 옷매를 가다듬고 있었다.

  -내 얼굴 아직도 그래?

  그녀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어 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못 골똘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김이 아니면 못 알아보았을 그런 미소였다.

  -안 나갈 거야?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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