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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로부전 勞婦傳

2012.08.16 00:1808.16

로부전勞婦傳

충청도 청원에 청천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산세가 포근하고 학이 많아 선비들이 공부하기를 즐겨하며, 흙은 온순하고 바람이 매섭지 않았다. 흙과 물의 성정이 순하고 맑으니 사람도 그에 뿌리를 딛고 서는지라 인심이 좋고 개짖는 소리보다 큰 노성이 들리지 않는 고장이었다. 담 너머 웃음소리는 흘러 나와도 고함소리 한번 흘러나오는 것을 못 들었다 하는 집이 최학인의 집이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있던  조부의 밑에서 집안을 이어받은 최학인은 노비가 열에 소작지의 소출이 매해 이만 석을 넘었으나 반찬은 세 가지 이상을 상위에 올리지 않았고 노비들을 매질 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마당에서 키우는 개에게 조차도 더운밥을 먹이며 고함질러 부르지 않는 곳이 최학인의 집이었다. 아침이 밝기 전에는 최학인의 글 읽는 소리가 부뚜막의 연기보다 먼저 집안에 피어올랐다.
최학인에게는 아들 하나, 딸이 하나가 있었다. 열여덟에 진사시에 급제한 아들은 서울로 벼슬길에 올랐다.
최학인은 때때로 젊은 임금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들은 대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었다. 보내는 때와 어조의 높낮이만 약간씩 다를 뿐 내용은 한결 같았다.

내가 그대에게 같은 글을 보내고 있는 것이 몇 해인가. 돌아오는 치례에 실망하며 나의 부덕을 한탄한 것은 몇 번인가. 그대의 조부가 내게 보여준 깊은 학식과 깨우친 도는 만인의 귀감이다. 내가 겪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대의 조부는 경서를 가져와 나에게 읽혔고, 나를 훈육하였다. 그대의 조부가 베푼 가르침은 귀하다. 나는 밤낮으로 그대 조부의 가르침을 따라 선현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백성을 입히고 먹이는 일을 걱정한다. 백성의 일로 걱정하는 것도 그럴진대, 보위를 이어갈 세자를 걱정함은 어떠하겠는가? 아비가 제 모자람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아니한 마음은 여염집의 아비도 그러한대 어찌 왕가에는 없다 하리오. 나는 심히 걱정하고 걱정한다. 세자는 날로 장성하고 있다. 그 뿌리가 곧게 내리도록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 그대의 조부가 나에게 전한 지혜를 온전히 세자에게 물려주지 못할까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그대의 학식과 덕망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대는 칭송하는 소리가 높을수록 고고한 뜻을 품고 기품 있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대의 덕망은 귓가에서 날로 높아 가는데 어찌하여 그대는 내 앞에 모습을 보이는 것을 주저하는 것인가.
그대의 아들인 수찬을 가까이 들이고 여러 해 지켜본바 아비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겠구나, 오히려 이보다 높겠구나 하며 기대를 품고 있다. 그대는 초야의 고고한 학과 같이 살며, 선현의 말씀을 흠앙하고, 그대가 깨우친 도를 그 아들로 보여주었다. 그대는 이와 같은 도를 넓힐 생각이 없는 것인가? 그대가 깨우친 도가 아들에게 이어져 뜻을 펼치고 있으니 이를 모자라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매한 도를 세자에게도 열어 보일 마음이 없는 것인가? 나를 훈육하여 나라에 큰 뜻을 이루려하던 조부의 의리를 그대는 모른다 하려 하는 것인가?
나의 기다림은 쌓이고 쌓여 갈기를 견디지 못하고 모래를 입에 넣을 지경에 이르렀다.
경은 이와 같은 나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  

최학인은 임금의 유시를 받들 때마다 고민에 빠졌지만 더 큰 고민은 집안에 있었다. 딸인 여진이 스무 살이 넘어 혼기를 놓치도록 마땅한 혼처를 못 찾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의 혼담은 임금의 유시만큼이나 여러 번 깨졌다. 여진은 침묵으로, 때로는 완강한 거절로 혼담을 늘 깨부수었다. 답답한 마음에 최학인은 여진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차더냐. 용모더냐, 집안이더냐, 학식이더냐.
세월은 비바람 같아서 단단한 바위라도 능히 깎고 쪼개니 용모가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풍파에 스치면 깎여 사라질 것에 마음을 두라고 소녀가 아버님께 그리 배웠겠습니까.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설 때가 있으면 주저앉을 때도 있는 것이오, 아예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앞 모르는 생이옵니다. 그러니 또한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학식은 고매하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니 그 끝이 있다 하겠습니까. 모자란 것은 채울 때가 한참이니 그 때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없다 하겠습니까. 그러니 학식의 모자람도 아니옵니다. 단지 미련한 아녀자이오나 어버이와 오라버니의 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인을 만나고픈 마음이 없다하겠습니까. 다만 배우고 듣고 깨우친바가 있어 어버이와 오라버니의 깊은 속을 닮은 정인을 스스로 가려보고 싶사옵니다. 아녀자의 좁은 뜻이오나 배우고 깨우친 것 대로 뜻이 있사옵니다.
딸의 말에 최학인은 더 이상 혼사 이야기를 채근하지 않았다.

하루는 여진이 얼마 전 해산한 동무를 만나러 출타하였다가 계집종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었다. 여진의 앞으로 먼발치에 선비 하나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서는 과거를 치르고 귀향길에 오른 이 같아보였다. 여진과 걷는 길이 같았는지 선비는 여진보다 오십 보 거리를 같은 간격으로 앞질러 가고 있었다. 여진은 계집종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느라 선비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으나 마을 어귀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을 무렵에 계집종이 조용히 선비를 손가락질 하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가씨. 뭘 저리 두리번거리며 걷는다는 말입니까. 간자나 암행 나온 어사는 아닐까요.
초행길이라 그런가보구나. 행색을 보아하니 이 고장 선비가 아니라 먼 길을 가는 길인 것 같은데.
말을 한 여진도 다시 눈여겨보니 계집종의 말대로 그러하였다. 선비는 때때로 담낮은 집안을 휘 둘러보고 망설이고 돌아서다가 중얼거리기를 반복하였다.
여진과 계집종은 선비를 뒤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선비는 집들을 두리번거리다가 여진의 집 대문 앞에 멈춰서 담장을 죽 둘러보고 있었다. 선비가 멈춰서는 바람에 여진과의 거리는 가까워져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을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이 집이라면 괜찮겠구나.
여진과 계집종은 선비를 앞질러 대문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계집종이 선비에게 말을 걸었다.
선비님, 이 댁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시오.
화들짝 놀란 선비는 뒤를 돌아보고는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는 여진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얼굴을 붉혔다. 계집종이 재차 채근하자 선비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서울에서 과거를 마치고 담양으로 내려가던 길입니다. 곧 날이 저물 것 같아 하룻밤 신세질 곳을 찾던터라…….
말꼬리를 흐리는 선비를 보며 여진이 조용하게 물었다.
그리 하오면 사람을 불러내어 유숙할 수 있는지 물어보시면 될 일이지 어찌 마을 어귀부터 집집마다 염탐하듯이 둘러보셨단 말입니까.
여진의 말에 선비가 답했다.
하룻밤 머문다 해도 유숙할 집에 하루 신세를 지는 일이니 집안의 살림새는 봐가며 청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식솔 먹일 쌀 한 톨 없어서 손님을 내치면서도 걱정하고 민망해 하는 집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길가는 나그네를 하룻밤 받아주는 것이 도리란 걸 알면서도 당장 주린 배를 채울 길 없어서 도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그 마음을 안다면 몸을 맡겨도 발 뻗고 쉴만한 곳을 찾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여진은 장옷을 슬며시 내려 선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을 붉힌 선비는 개밥바라기별이 꾸무정거리며 올라오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희집에 머물다 가시지요. 행랑채에 쉴 곳이 있사옵니다. 이 고을 인심은  다른 곳보다 결코 못하지 않고, 더군다나 저희 집은 집안의 노비 먹이는 일도 걱정하지 않는 집이니 선비님인들 하룻밤 못 모시겠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선비는 몇 번을 거절하다가 얼마 후 못이기는 척 여진을 따라 집안에 들어섰다.
별채에서 나온 여진은 행랑채로 밥상을 들고 들어가는 계집종을 불러 세우고 상차림을 들여다보았다.
청빈하신 아버님께서야 찬을 나물 세 가지만 놓고 드신다하여도 집안에 들인 손님에게까지 밥상을 이리 내놓는다면 손님 뵙기 부끄럽고, 집안 인심을 두고 타박할까 두렵다. 자반이라도 넉넉하게 올려 드리거라. 먼 길 오가시는 분이니 시장하실 터이다.
여진의 말에 계집종은 자반을 올리고 올갱이국을 다시 끓여 저녁상을  차려내 왔다.
밥상을 물리고 나니 안채에 있는 최학인이 선비를 불렀다. 서울의 저자와 도성에 떠도는 세상 이야기나 듣자고 청한 것이었다. 최학인은 선비의 용모를 찬찬히 살펴본 다음 본관과 이름을 물어 보았다. 함께 수학하던 동문과 같은 본관이라는 이야기에 근황을 물어보고  집안의 사는 것과 글공부 하는 것을 물어보았다. 선비는 겸손하게 말을 낮추었지만 최학인은 그의 말 속에 품은 학식과 기품을 읽었다. 자신이 맞게 선비를 읽은 것인가 궁금해진 최학인은 여진을 불러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였다. 집안의 서책과 문방구를 관리하는 것은 늘 여진의 일이었다. 최학인과 선비가 마주보고 앉고 여진이 문간에 앉아 선비와 자신의 아비가 글을 나누는 것을 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최학인은 선비를 행랑채로 보내고 문간에 서성이던 여진을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름이 약현이고 본관은 담양 이李가라고 하더구나. 나이는 스물 하나에 노모를 모시고 산다. 영특하고 비범하다. 눈가도 아주 맑구나.
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느꼈사옵니다.
문간에서 계속 서성이더구나.
그랬사옵니다.
내일 약현이 떠나는 길에 사람을 딸려 담양에 보낼까 한다. 사는 것을 좀 보고 오라고 해야겠다. 괜찮겠느냐.
여진은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뜻대로 하옵소서.
최학인은 간만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게 어찌 내 뜻이더냐. 이 녀석아.

청천의 아전이었다가 지금은 최학인의 집안을 돌보는 집사가 약현을 따라 담양을 갔다 온 뒤로 혼담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혼인은 다음해 봄에 이루어졌고 약현은 노모를 청천으로 모시고 와서 최학인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작지만 최학인이 직접 사람을 불러 구들을 새로 앉히고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딸의 출가를 반기는 임금의 유시가 내려왔다. 유시에는 축하인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학인은 사위인 약현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는 딸의 핑계를 대려 했지만 약현이 식년문과에 급제하자 그럴 명분마저 사라졌다. 이듬해 가을걷이가 끝난 뒤 최학인 일가는 한양의 북촌으로 집을 옮겼다.
최학인은 세자의 서연관으로 입직되었고 약현은 집현전의 학사가 되었다. 선왕의 업적을 정리하여 편찬하는 학사들 사이에서 말단이었지만 그가 따로 정리한 초서를 우연히 읽어 본 임금이 흡족해 하며 상을 내리자 약현의 재주를 질시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약현과 여진은 금슬이 좋았다. 약현의 노모 역시 여진을 딸처럼 아끼었다. 한양에 오고 난 다음해에 여진은 아들을 잉태하였다. 세자의 서연을 위해 입궐하는 최학인은 늘 입가에 웃음을 띠게 되었다.

조회에 나온 임금의 표정은 어지러웠다.
끌로 서툴게 조각한 듯 거칠게 생긴 턱을 굳게 다물고 찌를 듯 한 안광으로 신료들을 노려보던 임금은 노여움을 삭이며 말을 하였다.
일전에 대사성을 통해 이른바와 같이 정학을 이끌어야 할 성균관의 유생들이 패관을 통해 들여온 난문으로 글을 어지럽히고 수양할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 책망하였다. 그대들은 아둔한 백성들이 남자와 교접하지도 않고 아들을 수태했다는 여인의 그림에 절을 하는 해괴한  미신에 대해서 말한다. 이러한 사학과 미신을 물리치지 않으면, 백성의 근본이 흐려지고 유자의 도가 땅에 떨어져 나라와 조정, 사직을 뿌리째 뒤흔들 것이라고 염려하며 그들을 잡아다 근본을 망각한 죄를 엄하게 물으라고 하였다. 그대들은 바닥에 머리를 찧고 눈물을 뿌리며 나에게 고하였다. 나는 다시 말한다. 사학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정학의 근본이 바로 서지 못해서이다. 뿌리를 곧게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와 잎을 만개하는 나무의 주변은 늘 향기로운 것만 감돈다. 가지를 활짝 펴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뿌리를 딛는 것의 그늘아래 어찌 상서롭지 못한 것이 자랄 수 있겠는가. 이치는 이와 같다. 유자儒者는 뜻을 갈고 닦아 도와 의리에 정진하기에도 열두 달과 낮밤이 너무도 짧다. 젊어서 이러한 의리를 가까이 하고 몸과 마음을 수양을 하여야 할 자들이 어찌 누워서 선현의 말씀을 읽겠다고 당판본을 들이는 짓을 단절하지 못하는가. 정녕 그자들은 스승 앞에서도 그러한 불경을 저지른단 말인가.
보라, 이것이 나라의 근본을 바르게 할 책무를 진 자들이 오늘날 벌이고 있는 작태이다. 난문으로 정학을 어지럽히고 그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의 작태이다. 잡문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학문을 바로 세우라 책망을 받은 자조차도 반성은 안하고 이런 난문을 내 앞에 들이 댄다. 그대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자들이냐. 무엇을 위해 글을 읽고 수양을 하는 것이냐. 정학의 근본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데 그대들이 어찌 사학을 단죄 하겠다는 것이냐. 돌아가서 그대들의 뿌리부터 돌아보거라.
임금은 유생 이옥이 올린 글을 집어던지며 말을 맺었다.

최학인이 사학의 무리들과 가까이한다는 상소를 올린 대신들은 임금이 오히려 이옥의 글을 들어 맞서자 머쓱해져 퇴궐하게 되었다. 기방에 모인 몇몇은 사람을 물린 다음 저희들끼리 속닥였다.
사학의 일로 서연관을 치고 들어가려 한다면 도리어 주상의 화만 불러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입니다. 이럴 때는 방법을 달리 하여야 합니다.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마침 재미있는 것이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규장각의 대교 하나가 규장각 제학에게 서책 한 권을 슬며시 건네었다. 제학은 침침한 눈을 가늘게 뜨고는 표지가 닳고 손때가 묻은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주상의 명을 따라 궐내에서 도는 서책을 점검하여 부정한 문체를 사용하는 잡서들을 모두 거둬들여 불태우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궐내 나인들끼리 돌려보던 잡서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궐 밖 아녀자들이 즐겨 읽는다는 잡서인데 서책을 들여온 출처를 추궁하다보니 재미있는 이름이 튀어나왔습니다.
제학은 언문으로 필사된 서책의 첫 장을 곰곰이 읽어보며 눈을 끔뻑였다. 대교가 말을 이으려 하자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다음 한동안 묵묵히 서책을 읽어 내려갔다. 서책 한권을 다 읽고 난 다음에야 제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난문이지만 재미있네. 너무 재미있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야. 이 글을 쓴 자도 이 글만큼이나 재미있는 사람이던가.
대교는 빙긋이 웃으며 답하였다.
서연관 최학인의 사위 이약현이 그 글을 쓴 자이옵니다.  집현전 학사로 있는 자입니다.
제학은 글쓴이의 이름을 듣고는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와 그 장인의 이름이 재미있다는 생각은 거두지 않았다.

임금은 고하를 막론하고 자주 신하들과 독대하였다. 사관이 없는 자리에서 독대하는 일이 잦자 삼사가 불평을 하였다. 임금은 마냥 흘려들었지만 삼사의 의견을 매번 모른 척 할 수는 없었기에 독대하는 일을 되도록 삼가려 하였다. 그러나 제학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전한 서찰과 서책들을 본 임금은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서찰의 내용은 명료하였다. 서연관 최학인을 탄핵하려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목적을 이루려 할 것이다. 제학은 당론에 따라 최를 탄핵하려 하지만 임금의 뜻이 그러하지 않으니 당론을 달래고 잠재울 방도로 약현을 들이밀고 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제학과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으며 당파를 조종하던 임금은 서찰에 알았다고만 써서 답장을 보냈다.
며칠 뒤 임금은 제학이 답신으로 보낸 서찰을 불태우고, 그가 보낸 서책들을 읽어보고 있었다. 책은 총 세권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 권을 읽는 도중에 상선이 조용한 목소리로 약현이 왔음을 알렸다. 임금은 약현을 보지 않고 서책에만 눈길을 주었다. 부복하고 있던 약현의 귀에는 임금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약현은 가까이에서 임금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도 가장 말단이었고, 그가 선대왕의 업적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중에 나름대로 정리한 초서를 우연히 임금이 읽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가 그 초서를 보고 순수하고 정한 문장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수없는 일로, 하지 않은 일로도 무슨 죄를 뒤집어 쓸지 모르는게 구중궁궐의 일이었다. 약현은 손마디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임금의 침묵 속에서 한장 한장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두려움도 그만큼 쌓여가고 있었다.

마침내 세 번째 권을 모두 읽은 임금은 책장을 덮었다. 임금은 세권의 서책을 서안 위에 올려놓고 내려보다가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참으로 해괴한 글을 썼구나.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던 약현은 구들을 파고 고개를 집어 넣을 듯이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학사 이약현, 고개를 들라.
임금은 눈가에 두려움이 어린 청년의 얼굴을 보았다.
너를 따로 부른 것은 죄를 추궁하기 위함이 아니다. 너의 죄는 이미 너무나 명백하여 따로 추궁할 필요가 없다. 단지 궁금한 것들이 있어 너를 부른 것이다. 그러니 답하거라.
네, 전하.
너의 이야기는 참으로 해괴하다. 이것은 중국의 요설이나 저자의 떠도는 야담에서 본 이야기가 아니다. 대게 이러한 요설들은 전해 내려오는 옛 이야기가 있어 그것을 고쳐 읽기 좋게 만든다. 하지만 너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는 이야기이다. 신선을 돕고 얻은 청실과 홍실을 나무토막 인형에 묶어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게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참으로 해괴하다. 이렇게 해괴한 이야기를 너는 오늘의 조선에서 하고 있다. 너의 이야기에서 백성들은 고을의 수령이 바뀔 때마다 송덕비를 세우느라 노역에 동원되고, 그 송덕비를 세우자마자 수령이 다시 바뀌어 또 다른 송덕비를 세우다가 농사의 때를 놓친다. 백골징포에 시달려 집안이 야밤에 산으로 도주하고 풀뿌리를 끓여먹으며 모질게 살아간다. 나도 이것을 들어 알고 있다. 내 백성들이 그렇게 죽지 못해 살며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이야기의 첫머리에 너는 백성의 모진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삶 위에 이렇게 허황된 이야기를 놓고 말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옛 현인의 도를 따라 오늘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이야기도 아니며 오늘의 곤궁함을 일깨워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글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약현은 임금이 자신이 난문을 썼다는 것 자체를 힐책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뻔 했다고 여겼다. 약현은 머리를 조아린 채로 말이 없었다.  

약현의 글은 대략 이러하였다.
진천 지방에 가뭄이 극심한 해였다. 연이은 기근으로 백성들은 말라가고 밭가는 소마저 잡아먹는 이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가뭄과 치수를 다스리지 못한 질책을 받아 고을 수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기 일쑤였다. 수령이 바뀔 때마다 도리를 다한다하여 송덕비를 세우고, 떠나는 수령에게 전별금을 걷어 바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떠나는 수령의 전별금을 걷어 바치고 나면 오는 수령을 맞이해야 했다. 일 년에 이 같은 일이 한번이 있어도 민가의 솥단지조차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많게는 세 번을 치르니 견디지 못하고 야음을 틈타 산으로 도주하는 일가들도 늘어났다. 죽은 자 마저 병적에 올리고 노역에 동원하니 산자들은 죽은 자의 이름에 묶여 노역에 시달렸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산해도 그런 자였다. 기근에 시달리며 죽은 아비의 군포를 짊어지자 홀어미의 봉양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산으로 도망친 자였다. 산해는 손재주가 좋아 목불상을 조각 하거나 수레바퀴를 고치는 일을 즐겨 하였다. 때때로 불상을 조각하며 살던 산해는 어느 날 나무를 하러 숲속을 거닐다가 올무에 잡힌 사슴을 발견하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올무를 벗겨 사슴을 구해주었다. 사슴은 산의 신령이 잠시 기거하던 몸이었으니 신령은 그 일로 산해를  어여삐 여기었다. 어느 날 나무를 하러갔던 산해는 신령을 다시 만나 청실패와 홍실패, 대추나무 토막 하나를 받게 되었다. 산해는 청실과 홍실이 가진 신묘한 음양의 힘을 깨닫고 목각을 조각하여 그 마디에 청실과 홍실을 엮어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게 된다. 불상을 조각하던 솜씨로 대추나무 토막에 인자한 여인의 얼굴을 만들어준 산해는 인형을 로부勞婦라 칭하였다. 로부는 스스로 걷고 일하며 밥을 짓고 산해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눈이 어두운 산해의 노모는 로부를 사람처럼 여겨 가까이 하고 로부를 스스로 며느리로 여겼다. 로부는 힘이 좋아 깊게 박힌 돌뿌리를 걷어내어 밭을 혼자 일구었다. 몇 해가 지나자 산해의 집 주변으로 소문을 듣고 몇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수확한 것을 서로 나누어 먹고 힘든 일에 서로 나서 돕고 살았다. 산적 떼가 기습 해와도 로부가 스스로 활을 들어 그들을 쫓아내고 두령의 다리를 부러뜨리자 마을은 로부를 심산선녀深山仙女라 칭하며 절하였다. 로부는 해가 갈수록 얼굴이 사람처럼 변하고 머리털이 자랐다. 얼굴은 하얗고 뺨에는 복숭아 빛이 돌며 몸에서는 향기가 감돌았다. 쪽진 머리에는 윤기가 흐르고 눈빛은 총기로 넘쳤다.
산해의 마을은 집이 스무 채로 늘어나고 있었다. 살림이 나아지고 마을이 커지자 로부는 산해에게 청을 하였다. 본디 소녀는 인간이 아닌 당신의 손끝에서 태어난 존재이옵니다. 산에 떠돌던 영기가 모인 나무가 그대의 손끝에서서 갈리고 깎여 태어나 인간의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낭군이라 부를 수는 없으나 그대를 낭군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심산선녀라 부르며 내게 절을 하고 나를 반겨줍니다. 어머니도 나를 아가라 부르며 아끼고 귀하게 여겨줍니다. 그대만이 나를 부를때는 어이, 거기라고 부르며 호칭에 깃든 정情이 없사옵니다. 나에게 이름을 주소서. 당신과 함께 밭을 일구고 나무를 뽑아 살 곳을 이룬 나에게 이름을 주소서. 공허한 말로 나를 부르지 말고 당신의 마음이 담긴 이름을 주어 당신이 깃들어 있는 말로 나를 부르소서.
그러나 산해는 로부의 뜻을 듣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산해가 이름을 주지 않자 로부는 실망하여 마을을 떠났다. 로부가 밤중에 마당에 홀로서서 산해의 노모가 잠든 방을 향해 절을 올리고 마을을 떠나간 아침에 관군이 마을을 덮쳤다. 밭을 경작하고 나무를 베어 땔감을 삼으면서도 고을수령에게 보고 하지 않고 세금을 내지 않은 죄를 물어 산해의 마을을 포위한 것이다.
약현의 이야기는 여기서 세 번째 권이 끝나고 있었다.

임금은 약현에게 로부가 움직이는 원리를 물었다. 약현은 대답하였다.
청실은 양의 기운이오, 홍실은 음의 기운입니다. 양의 기운은 위로 솟으며 음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니 그것이 서로 맞대면 이렇게……. 두 손을 맞대어 비벼 붓대를 돌리는 것처럼 회전하는 움직임이 얻어지게 됩니다. 만물의 움직임은 이렇게 위, 아래로로 향하고 둥글게 도는 것 안에 모든 움직임이 속하니 로부가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약현의 말에 임금은 손을 비벼 붓대를 돌리는 시늉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여유당與猶堂이 그러한 이치를 거중기로 내게 보인 적이 있다.
임금은 중얼거렸다.

처음에 임금과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약현의 목소리는 떨림을 멈추었고 때때로 임금의 용안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본디 인상이 거칠고 안광이 매서운 임금이었지만 약현이 이야기 할때는 눈빛에 호기심과 경탄이 함께 머물었다. 임금은 약현의 말이 끝난 다음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나라의 근간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군왕은 백성을 자식으로 여기고 보살피며 백성은 군왕을 어버이로 섬기고 그 삶을 충과 효로 이루어간다. 이러한 선현의 도가 있기 전에도 나라는 존재하여왔다. 도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나라의 모습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약현이 대답하였다.
충과 효의 도는 나라를 평안케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충과 효를 위하여 나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것은 단지 밭을 가는 쟁기와 같은 것입니다. 밭이 쟁기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흙이 갈리기 위하여, 밭이 되기 위하여 나온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좋은 밭을 일구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도입니다. 나라는 백성들이 이루어 만듭니다. 그들은 흙과 땅같이 태초부터 있던 것들입니다. 무언가를 위해서 태어나게 된 것들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약현은 임금의 안색이 찰나에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어둡게 찌푸린 것이 금방이라도 우레를 쏟아 부을 먹구름 같았다. 약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이 마지막에 한 말의 무게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애시당초 그렇게 있어왔던 것들이다.
임금은 이 한마디에서 반역을 이끌어낼지도 모른다. 임금은 찌를 듯한 안광으로 약현을 노려보았다.
네 말이 괴이하다. 날개가 달린 것이 날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달린 것이 헤엄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약현은 대답을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 안의 총기와 의기가 그를 벼랑으로 몰고갔다.
날개가 있기에 날고, 아가미가 있기에 물속에서 숨을 쉬고 헤엄치는 것이옵니다. 그것을 위해 날개를 달고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다.
네 이야기속의 로부도 그러한 것이냐. 밭을 갈고 산해의 일을 돕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냐. 산해가 그를 만들었을 때는 그러한 목적이 없었던 것이냐. 그 뜻에 따라 로부가 산해를 돕고 살았던 것이 아니냐.
약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산해가 뜻한 바이지 로부가 뜻한 바는 아니옵니다. 무릇 음양의 이치에 따라 태어난 것들은 스스로의 뜻으로 먹이를 구하고 잠자리를 찾습니다. 로부가 산해에게 이름을 구한 것이 그 뜻이 옵니다. 산해는…….
임금은 서안을 손으로 내려치며 약현의 말을 잘랐다.
그대는 밭가는 쟁기가 스스로  뜻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필묵이 스스로 뜻을 구하여 제 몸을 움직여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무슨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런 공허하고 허황된 이야기였단 말인가. 그런 허황된 요설로 무지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려 했단 말인가. 현자의 도를 따라 학문을 흠앙하고 문장을 바로 세울 것이 너의 할일이다. 문장이 바로서야 도를 전할 길이 닦이는 것이고 그 길을 따라 군왕의 뜻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대는 그 길을 닦기 위하여 이곳에 있는 것 아니던가. 그 말은 백성이 도를 따라 군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살핌을 받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묻노라, 그대는 이와 같은 요설로 백성에게 어떤 길을 열어주려 한 것이냐. 그것이 나에게로 오는 길이더냐. 네가 이 글을 읽을 백성들에게 열어주려 했던 길이 무어냐. 답하라.
약현은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소신은 길을 열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옵니다. 그 길이 전하께로 가는 길은 더더욱 아닙니다. 소신의 글은 백성을 위로하고 잠시 곤궁한 삶에서 마음이나마 벗어나 위로를 구하고자 할 때 쓰이기 위한 잡문이옵니다.
임금은 약현의 책을 들어 흔들었다. 그의 격한 성정처럼 책장이 거칠게 펄럭였다.
말하라. 로부는 어찌하여 그 쓰임을 망각하고 산해의 곁을 떠나는가. 이름을 달라하였다가 거절당한 것만이 그 참뜻은 아닐 것이다. 너는 숨기고 있다. 글을 읽는 자들은 저마다 로부의 처지를 동정 할 것이다.  밭가는 쟁기와 로부가 다를 것이 무언가. 너는 쟁기의 쓰임이 쟁기의 뜻과 다르다 하고 있다. 너는 애초부터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쟁기가 어찌 뜻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백성은 쟁기가 아니옵니다.
약현은 이곳이 어전이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임금은 침묵했다. 약현은 등줄기에서 짜르르 흐르는 떨림을 느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말하여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약현은 물러나고 싶었다. 살아서 이 방을 나가고 싶었다.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떨림은 임금에게도 전달되었다.
백성은 흙이다. 애초부터 그렇게 존재 하여왔고 쟁기에 갈려 밭이 되기 위해 존재하고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더냐. 너는 네 글을 읽는 백성이 나에게 오는 길로 오지 않는다 하였다. 다시 묻노라. 네 글을 읽는 나의 백성들이 가는 길은 어디냐. 네 글은 백성들에게 어떤 길을 열어줄 것이냐. 답하라.
약현은 마른 침을 삼켰다. 임금이 재촉하는 답은 약현을 반역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약현의 눈에는 갑자기 여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를 안아 조용히 어르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었다. 주상이 나를 죽이고자 하였다면 어찌 그것을 물어볼까. 약현은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감았다. 주상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약현은 말했다.
그것은 백성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약현은 침묵했다.
임금도 침묵했다.
멀리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런 미물조차도 구중궁궐을 겹겹이 감싸는 벽채와 장지문을 넘어서 제 울음소리를 전하는구나. 눈앞의 임금에게조차 마음에 본디 담은 소리를 전하지 못하는 내신세가 저 미물들보다 낫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약현은 생각했다.
바늘 하나가 떨어져도 놋쇠그릇 깨지는 소리처럼 들릴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약현은 허리를 세우고 앉아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날이 지나고 나서 너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돌아가라.
임금은 조용히 말했다.

사흘 뒤 임금은 전교를 내렸다.
학사 이약현은 학문과 도를 따르고 선현의 말씀을 흠앙하여 정진하여야 할 자이다. 젊은이가 흔히 빠지기 쉬운 호기심에 잠시 정도에서 눈을 돌려 난문에 재주를 허비하였다. 젊은 날의 조급함과 경박함은 탓하기 쉬우나 그것을 엄히 다스리려고만 한다면 자칫 그 기개를 잃을까 두렵다. 학사 이약현은 이러한 나의 뜻을 깊이 헤아려 반성하고, 그 반성한 뜻을 나에게 보여라.

전교를 내리고 보름이 지나 임금은 약현이 올린 서책 한 권을 받았다.
임금은 약현이 올린 책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언문이 아닌 정문 正文으로 쓰인 반듯한 글이었다. 문장은 흠잡을 곳 없고 순정하였다.

임금은 쌍욕을 하며 서책을 집어던졌다.  

난문의 일로 파직된 이옥과 비교하여 약현의 처벌이 너무 가볍다는 상소를 임금은 물리치지 않았다. 은밀히 서신을 보낸 대제학조차도 서연관을 파직시키려는 당원들의 뜻을 꺾을 수 없기에 대신 그 총명한 사위라도 내어줄 것을 청하고 있었다. 임금은 거래에 응하기로 했다.
임금은 약현의 유배를 명하였다.
약현의 유배가 결정되자 최학인에 대한 상소는 없던 일이 되었다.

약현과 임금의 일을 알고 있던 상선은 임금이 따로 명한 약현의 유배지에 의문을 품었다. 약현의 일이 비록 대역죄에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유배지가 강화도로 결정되고 임금은 따로 사람을 불러 그의 유배지에 사람의 출입을 엄히 금하고 지필묵을 충분히 갖다 줄 것을 명했다. 상선은 임금의 심기가 맑아 보이는 때를 골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인에게 지필묵을 따로 챙겨서 보내심은 어째서 입니까?
임금은 약현이 마지막에 정문으로 써서 보내온 로부전勞婦傳의 네 번째 책을 들어보며 불평했다.
이게 당최 재미가 있어야 말이지. 문장은 바르고 고우나 전처럼 유려하고 힘이 있지 못하다. 씹는 맛이 없는 고기 같고 싱거운데 앞으로 나아갈 이야기는 미리 알아버렸으니 안 읽느니만 못하다. 그리고 사권이면 끝날 줄 알았더니 아직 안 끝났다. 그래서 다시 쓰라고 하였다. 원하는 대로 쓰고 글이 완성되면 다시 보내라 하였다.
임금은 자세를 고쳐 앉은 다음 중얼거렸다.

다음이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있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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