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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음모론

2012.08.15 13:5608.15

음모론  
(은영의 죽음을 둘러싼)






  그녀가 죽었다. 처음엔 연락이 두절되었고, 다음엔 실종되었고, 종국엔 자살하였다. 그렇게... 그녀가 죽었다.

  나도 죽었다. 처음엔 연락을 두절시켰고, 다음엔 실종, 종국엔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누군가 나를 찾아내어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나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그런 상태였다.

  나는 죽고 싶을 만큼, 그럴 만큼...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내가 닥터 타코야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노란색 카디건을 걸치고 포르노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나의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집중해 있었고, 포르노 테잎을 앞뒤로 돌려가며 보다가 기록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행동을 아무 말 없이 잠깐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만, 타코야 선생님이 맞으십니까? 나는 용기 내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닥터 타코야는 나를 힐끔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영화를 계속 보았다. 김학필씨의 소개로 왔습니다만. 그제서야 그는 돌아보았다. 그럼 자네가 도은성인가? 네. 그렇군. 잠깐 앉지. 이걸 마저 끝내야 해. 알겠습니다.

  나는 어지럽게 놓여있는 책이며 잡동사니 사이로, 다리를 올릴 수 있도록 세로로 길게 뻗은 가죽 소파에 몸을 누이다시피 앉았다. 소파는 포근했고, 포근했고, 포근했으므로 며칠 동안, 아니 몇 백 년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잠이 쏟아졌다. 장거리 운전 탓이겠지. 나는 비디오테잎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자장가로 꾸벅꾸벅 졸았다. 한참이 지난 후 문틈으로 새어드는 한기에 재채기가 나와 잠에서 깨어났다. 닥터 타꼬야는 그때까지 여전히 같은 자세로 포르노테잎을 보고 있었다. 열두시였다. 그의 옆에 쌓여 있는 포르노 테잎의 개수가 몇 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저걸 다 보겠다는 건가. 나는 무작정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지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기다리기 싫으면 먼저 가. 그녀가 말했다. 싫은 게 아니라, 벌써 두 시간째 이러고 있으니까 그렇지.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먼저 가라고. 나는 강바람도 좋고, 달리는 차도 좋고, 하여튼 여기가 너무 좋아. 그녀가 말했다. 춥지도 않냐? 지금 영하 50도쯤 되는 것 같지 않아? 한 겨울에 한강다리 한복판에 서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돌아보며 웃었고, 난간을 붙잡고 강으로 떨어지는 시늉을 했고, 또 꺄르르꺄르르 웃어댔다. 나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불안했으므로 모든 것이 두려웠다. 추웠지만 열이 났고, 뒷머리가 뜨거웠지만 너무너무 추웠다. 때문에 무서웠다.

  나 죽고 싶어. 그녀가 말했다. 또, 또, 또!!! 그런 말 다신 하지 말랬지? 내가 말했다. 그럼... 니가 나 죽여줘. 그녀가 말했다. 뭐? 내가 말했다. 너 때문에 나는 내가 못 죽으니까 니가 나 죽여 달라고.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할 테니까 죽고 싶단 말 하지 마. 내가 너 죽여줄 테니까... 내가 너 죽이기 전까진... 그런 말 하지 마. 제발!!! 나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을 어디에서 들은 것도 같았고, 그녀가 가여웠고, 한없이 불쌍했고, 안아주고 싶었다. 그녀는 끝도 모를 만큼, 깊이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나약한 존재였다.


  어이. 도은성군. 너...자냐..? 닥터 타코야가 나를 깨운 것은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한데서 잠을 잔 것처럼 굳어버린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목이 돌아간 것 같았다. 잠을 자다니 아직 절실하지 않은 겐가? 닥터 타코야의 입에서 썩은 내가 훅 풍겨 왔다. 역겨웠다. 새벽 3시가 넘도록 기다리게 만들더니 오히려 화를 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오. 나는 잠을 잤지만, 잔 것 같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일 수도 있잖아, 라고 생각하도록. 아니긴 개뿔. 자네가 무얼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욕망이 그만큼 강해보이지 않네. 그냥 돌아가게.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닥터 타코야는 미친놈인가. 포르노테잎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이나 했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자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혹시, 봐주길 바랐던 건가. 어려운 한숨이 나왔지만, 어쨌거나 내가 부탁하러 온 입장이니 그에게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했다. 나는 며칠 동안, 아니 지난 오개월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장거리 운전으로 지쳐있었으며, 당신의 소파가 너무나 포근했다고. 정말 너무 포근했다고. 닥터 타코야는 그제서야 정상참작을 해주는 형사처럼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해한다는 듯이. 일단 뭐 좀 먹지. 닥터 타코야는 심야식당으로 나를 데려갔다.

  학필이 형이 당신을 찾아가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나는 뜨거운 우동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닥터 타코야는 나를 한 번 보더니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뜨거운 우동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먹는 행위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도 먹지 못하게 만들 수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더 식기 전에 먹어둬. 나는 어쨌거나 이걸 빨리 먹어야만 본론에 들어갈 것 같아 먹는 시늉정도는 해 보였다.
근데 말이야 학필군이 날 찾아가라고 했다는 게 좀 납득이 가지 않고만. 학필군은 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대립,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내 이론이 터무니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며 자기발로 나갔단 말일세. 내 기억이 맞는다면 말이지. 벌써 삼년 전의 일이지. 그러다 어제 저녁 전화가 왔네. 뜻밖이었지. 도은성이라는 사람이 찾아갈 테니 우리가 해 온 작업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좋겠다고 말이야. 나는 우리? 라고 물었고, 학필군은 우리, 라고 대답했네. 어쨌거나 그 이론을 세우는데 공을 세운 건 사실이었고. 믿든 안 믿든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니 어쩔 수 없는 거지.

우동의 면발만큼이나 서론은 길었다. 그 이론을 말하기가 두려운 건지, 아니면 부끄러운 건지, 그것도 아니면 말을 하지 않을 심산인지 알 수 없었다. 하여간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점점 알 것 같았다. 그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식당 안엔 우리 두 사람 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목소리는 공간을 울리고 다시 내 귀로 들어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의 말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으나 허공을 부유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하여간 무슨 말인가를 계속 쏟아내고는 있었다.
  근데 학필 군은 뭘 하며 지내나?

  닭 튀기는 것도 힘들다, 너.


학필 형이 찾아온 것이 병원이었는지, 내 오피스텔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죽 먹을 기운도, 입맛도, 생각도 없던 내게 치킨 두 마리를 튀겨 왔었다. 그리곤 위로인지 충고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닭이 잡내가 얼마나 나는 줄 아냐? 돈지랄하는 것들이나 체인점해서 주는 거 받아다 튀기는 것만 하겠지만, 우리같은 입장이 어디 그 치들과 같냐. 도매가서 닭 받아다가 손질해야지, 잡내 없애야지, 온도를 조금만 틀려도 바싹하게 안 튀겨지지, 그리고 튀김옷 만드는 거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 그거 진짜 아무나 못한다. 게다가 한여름에도 펄펄 끓는 기름 앞에 서서, 땀을 1.5리터 패트병으로 세병이나... 말을 말자. 내가 너한테 이런 말해서 뭐하냐.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닭 튀기는 고충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때 눈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내리는 거였다.

  형.
  왜!
  형.  
  왜 이 미친놈아!
  그 기름에, 펄펄 끓는 닭 튀기는 기름에 들어가면 그때는 실패 따윈 안하겠지?
  형이 누워있던 내 멱살을 잡았었는지, 그냥 나를 껴안았었는지 그건 지금에 와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형은 나에게 닥터 타꼬야를 만나보라고 말해줬다. 어쩌면 그 사람이 나에게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그 사람이라면 비밀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형은 변두리에서 치킨집을 합니다. 그렇군. 함께 연구할 때도 그렇게 치킨을 시켜먹더니만. 나는 닥터 타꼬야를 한 대 친 다음 우동국물을 얼굴에 끼얹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았다. 저... 이제 그만 제가 왜 왔는지 들어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알고 있네. 학필이 보냈다면 뻔한 거지. 자네...

  자살을 원하지? 그것도 성공적인 자살.


  넌 왜 그렇게 죽으려고 하는 거야? 나는 은영과 호텔방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섹스가 끝난 후였다. 그때 은영이 담배를 피웠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지만 은영의 표정은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모르겠어. 아니, 이유를 대라고 하면 너무 많지. 어릴 때 부모가 죽었고, 큰아버지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자란 거. 또 학교 다닐 때 왕따 당해서 학교를 세 번이나 옮긴 거. 그래서 친구도 하나 없고,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 이정도면 이유가 될까? 더 있어. 스무 살 됐을 때 알고 보니 부모님 유산을 그동안 큰아버지가 가로챘었더라구. 다행히 그때 남친이 법대 다녔는데, 어찌어찌 알아보고 소송해서 다 받아냈어. 이건 자살이유일까, 아닐까. 어쨌거나 난 돈 많은 스무 살이 됐고, 흥청망청 써대며 파티에 술에 명품에 쩔어 살았는데, 그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지 않을까.

  어이, 도은성군?
  나는 닥터 타코야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은영을 생각했고, 그녀가 가졌던 슬픔을 생각했고, 함께 했던 섹스를 생각했다.
  혹시... 실패했나?
  나는 네, 라고 대답했다. 똑 똑 원치 않은 눈물이 리드미컬하게 우동국물에 떨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고, 다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죄를 지었다거나 부끄러웠다거나 억울하다거나 뭐 그런 감정들이 순차적으로 왔다갔고, 그 사이 눈물은 우동그릇의 수면 위에서 4/4박자 왈츠를 춰댔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닥터 타코야는 손목의 흉터를 내게 보여줬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네. 나는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원했었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은 다 해보았지. 목도 매달아보았고, 아파트에서, 한강에서 투신도 했었고, 약을 먹기도 했네. 그러나 죽지 않았어. 왜 그런 줄 알아?
  ...아니오.
  죽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거든.

  잘 못 본 건지 잘 본 건지, 순간 닥터 타코야의 우동 그릇의 수면 위도 파장이 일었던 것 같다. 왈츠는 아니더라도 장송곡정도로. 그게 눈물이었든 콧물이었든 또는 공기의 파장이었든 나는 못 본 척하려고 다 식어빠진 우동을 몇 줄 건져 먹었다. 불어터진 우동은 그 분위기와 만나 갓 나왔을 때보다 훨씬 맛있었다. 내가 우동을 건저 먹는 걸 바라보며 닥터 타코야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그의 말보다 우동 그릇의 파장에 더 신경을 썼으므로 그가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그제서야 곰곰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독심술사처럼 내 생각 속에서 물음이 시작될 때 입을 열어 내게 답을 말해 주었다.

  그 말은 죽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지. 너처럼. 혹은 나처럼.

  나는 순간, 그따위 개소리 집어치우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저따위 말장난이나 들으려고 5시간 운전해서 온 내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 없이 죽게 된다, 아니 고통은 있더라도 죽을 수만 있게 된다면, 하는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온 터였다. 그 희망은 나로 하여금 고통이 아닌 행복의 끝이고, 은영과의 또 다른 시작이고, 나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세차게 내려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그럼! 대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말이지... 우리는... 있네.... 우리는 있고, 그 사람들은 없지. 내가 바로 그걸 연구한 거야. 우리한테는 있지만, 그 사람들한테는 없는 것. 음...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긴데, 어때?  우리 집으로 가겠나? 여기서 10분이면 가니까. 닥터 타코야는 나의 흥분과는 상관없이 차분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 없었지만, 학필이형의 말대로라면 그는 죽음의 명약정도는 발명한 사람 같았기에 그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심야식당의 문을 열고나오니 신비롭게도 아침이었다. 어둠속에서 나온 순간,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듯 이미 해는 떠 있었고, 공기는 상쾌했다. 닥터 타코야의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담배 2갑과 탄산수, 커피 그리고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도 샀다. 나는 어쩐지 이 그를 만난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되어 그에게 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형 같이 가요. 형 10분이면 집에 간다더니 벌써 20분이잖아요. 형. 다리아파요. 타꼬야 형. 하고 말이다. 결국 30분이 다 되어서야 그의 집에 도착했고, 나는 정말 한꺼번에 피곤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집은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 지어졌을 법한 빨간 벽돌집으로 내부 벽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었다. 거실에서 이어진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 다락방이 나왔는데, 그는 나를 그 방으로 안내했다. 다락방은 그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벽벽으로 쌓여있는 비디오 테잎과 포근하고 포근하던 그 소파가 쌍둥이처럼 닮아 있어 이상하기도 하고, 이상하지 않기도 했다. 잠시 적요가 맴돌았다. 그러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닥터 타꼬야였다. 근데 말이야,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그들은 없고, 우리는 있는 거요.
  맞아. 분명 그렇지. 정확히 그래. 그런데 말이야,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하지. 그래야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듣고 싶기도 했고,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지금 내 입장에서 남의 과거사라던가, 사정이야기 따위는 전혀 내 알바가 아니었지만, 그걸 들어야만 본론에 들어간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내 마음 만큼이나 닥터 타꼬야도 말하고 싶기도 했고,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려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나는 자살을 결심했었네. 나는 기계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사장이었어. 사업은 잘되었고, 가족은 건강했고, 나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믿었었지. 일이 바쁘긴 했지만 나는 가정적이었고, 마누라도 밖으로 나도는 성격이 아니라 집안을 잘 돌보았어. 우린 참 잘 맞는다고 믿었네. 중학교 2학년이던 딸아이가 이탈리아로 유학가기를 원하기 전까지 말이지. 그 아인 첼로를 전공했었는데, 곧잘 했어.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입상도 할 정도였으니까. 음악은 아무래도 본고장에 가야 인정받을 수 있다니까 유학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딸아이라 걱정이 된 게 사실이었네. 나는 좀 망설였고, 애엄마는 그런 걸 망설이다간 애 앞길 망친다며 나를 채근했지. 나는 중학교만 마치고 유학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딸아이는 듣지 않았어. 두 모녀가 나를 반대편에 두고 칼날을 세웠지만, 나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 아직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맞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다가 IMF가 왔네. 우리 회사도 피해갈 수 없었지. 다행히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이긴 했어. 완전히 망하진 않았으니까. 대신 통째로 회사를 넘겨주게 되었어. 나는 거래처와의 관계도 있고 하니까 허울 좋은 사장으로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었어. 새로 온 사장은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재벌가 먼 친척쯤 된다더군. 나는 그 자리라도 지키기 위해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있는 내가 치욕스러웠지. 집에 말할 순 없었고, 상황을 알지 못했던 애엄마와 딸아이는 유학문제로 계속 대립 중이었어. 이젠 정말 보내줄래야 보내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 상태로 사는 삶이 괴로웠네. 가족과는 냉전상태였고, 친구라곤 없었지. 가족밖에 몰랐으니까. 그래서 나는 결심했어. 아이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하고 다시 내 사업을 시작하기로. 아내라면 분명 나를 도와줄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일이 터졌네. 딸아이가 자살을 했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지. 무려 21층에서 말이야.

  닥터 타코야는 이 대목에서 크게 한 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의 딸이 죽었으나 한 번도 보지 못했으므로 크게 불쌍하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그가, 그런 시간을 견뎌내었을 그가, 안쓰러웠다. 그는 일종의 나와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은영의 죽음이 가져왔던 커다란 충격을 고스란히 내 안으로 흡수시켰다. 처음엔 느끼지 못했던 불행의 그림자가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이대로 살 수 없을 것이라 직감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 즈음 나는 은영이 죽기 직전까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증상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유학을 못가서 그것 때문에 비관해서 자살한 줄 알았네. 알고 보니 딸아이는 중1때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유학을 그토록 원했었고. 아이엄마는 그 충격으로 쓰러졌고. 실어증이 먼저 찾아오더니 우울증이 뒤이어 따라왔어. 아이 엄마는 석 달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아무 말도, 유서도 남기지 않고 딸아이를 따라 떠났네. 아이 방 창문에서 뛰어내렸지. 어디선가 봤는데 자살하는 사람 유가족이 따라 자살할 확률이 아주 높다더군. 나는 몰랐지. 나는 내 슬픔, 내 괴로움에 빠져있었어. 온통 나밖엔 안보였지. 모든 게 다 책임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고, 아내의 괴로움이 그땐 보이지 않았어.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보다 덜 후회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어. 이러다 말겠지, 이러다 괜찮겠지... 근데 그러다 죽었지. 나만 남겨두고 말이야. 결국 나는 아무도 살리지 못했어.

  은영의 불안은 자살 두 달을 전으로 꽤나 큰 폭으로 증폭됐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날이 서서 파르르 떨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생각보다 많은 생각, 삶보다 많은 삶,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자신이 맴맴 주위를 도는 것 같다고 했다. 너무 많아서, 너무 느껴져서 징그럽다고도, 했다.

  자살을 처음 시도한 건 아내가 죽고 정확하게 일 년이 되던 때였어. 일 년을 어영부영 술로 보냈는데 돌아보니 집도 차도 아무것도 없더라고. 살아갈 의지도 없었지. 죽자, 가 아니라 살기 싫다, 였어. 살기 싫다. 이렇게는 살기 싫다. 그럼 예전처럼 살고 싶으냐? 또 그것도 아니었거든. 그냥 살기가 싫은 거야. 잘 살고 싶지도 않았고, 행복해지고 싶지도 않았지. 더  이상은 하루도 살고 싶지 않더라니까. 그래서 나도 앞서간 모녀처럼 뛰어내렸어. 높은 곳만 있으면 뛰어내렸지. 한강 다리 위에서도 뛰어내렸고,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뛰어내렸어. 근데 ......... 안 죽더라고.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은 게 다른 사람은 잘만 죽더니....... 진짜 희한한 게 사람 미치겠더라니까.
  저도....... 그랬어요.
  나는 일 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요?

  그래서? 다른 방법도 시도해봤어. 그건 알겠고, 시도했는데 안됐다, 그래서요? 중요한 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요? ....그래. 여기서 부터가 내가 자네한테 들려주고 싶은 진짜 이야기이긴 하지. 잘 듣게나. 나는 자살사이트 모임에서 알게 된 한 친구, 그게 바로 학필 군이지. 그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어. 왜 우리는 실패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잘도 죽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매번 좌절을 경험하는가? 하고 말이야. 우리한테 뭔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준비과정이 미흡했었나? 뛰어내리는 건물의 층이 너무 낮았나? 면도칼이 뭉퉁했었나? 아님 노끈의 매듭이 허술했었나? 하고. 그 생각이 시발이었네. 우린 그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지. 우리가 실패한다면 우리처럼 실패하는 사람이 분명 또 있을 테니 말이야. 그래서 우린 카페 내에서 그룹을 만들었네. 그리고 여러 사례자들을 불러 모았지. 왜 실패를 하게 됐나 하고 말이야. 생각보다 이유가 다양했었지만, 생각보다 납득할 만한 이유는 없었어. 우리가 죽지 못한 것처럼 말일세. 그래서 우린 연구를 시작했네. 죽기 위한 연구였지.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나, 하고 말이지. 한 카페 내에서라도 극비리에 팀을 조직해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팀들을 만나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반대로 팀들을 만났다는 게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의 위장잠입이 들킬 염려는 없었어. 그리고 나와 학필군은 각각 다른 팀에 들어가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네.

  나는 닥터 타코야의 말을 들으며 은영과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녀에게는 없고, 나에게는 있는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그의 말에 차츰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다섯 팀, 학필군이 일곱 팀, 우린 도합 열두 팀의 자살 팀에 참여했고, 그들은 모두 서른여덟 명이었네. 그 중에 스물세 명이 죽고, 열다섯 명이 살아남았어. 우리는 첫날 만남부터 죽기 직전까지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기록했고, 기록할 수 없는 것은 녹음했지. 처음엔 한 사람 한 사람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그 사람들의 인성이나 행동 등을 관찰했네. 아무래도 성격이 일부분 반영되지 않을까, 했던 거였지. 가령, 약을 먹을 때에도 마지막 순간에 조금의 망설임이라도 있는 사람이랄지,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번개탄을 피울 때 방문에 테이프를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랄지. 아니면 약을 먹을 때 약의 양을 좀 적게 먹거나 물을 많이 먹어서 약이 희석될 수도 있는 가능성까지 관찰에 관찰을 거듭했었어. 하지만, 찾아내지 못했어. 문틈이 새어 있었어도, 약을 적게 먹거나 물을 많이 마셨어도, 죽는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았거든. 그래서 우리는 다른 관찰을 하기로 했네.

  어떤 관찰이요?
  몸. 죽은 사람의 몸. 그리고 산 사람의 몸.

  성격이나 인성이나 그 사람의 역사나 행동이 아니라면 남은 건 몸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던 거지.

  닥터 타코야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의 상황인양 말을 이었다.

  그것이 시체건 시체가 아니건 간에 아무래도 여자의 몸을 수색한다는 게 죄책감이 드는 것 같아 처음엔 남자로만 구성된 그룹에 참여했네. 그러다 차츰 여자의 몸까지 수색하게 되었지. 우리는 도합 58명의 몸을 수색했고, 이 중에 죽은 자가 30명 산 자가 28명이네. 모두 다 죽거나 모두 다 산 그룹도 있었고, 몇몇은 죽거나 산 그룹도 있었네. 어쨌거나 그들은 모두 술을 마셨었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 우리는 죽은 자 앞에서 묵념으로 명복을 빈 후, 그들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네. 처음엔 옷을 입은 채로 하나씩 체크하기로 했네. 우리가 겉모습 중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죽은 사람이 손톱과 발톱이 좀 긴 편이었고, 머리카락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긴 편이었지. 이것 말고도 귀지가 좀 많은 편이었고, 눈이 나쁜 사람이 많았어. 안경 쓴 사람이 많았거든. 그런데 이게 확실하게 분간이 되는 게 아니라 난처했을 뿐더러 통계를 내기에는 부족한 수치였네. 게다가 정확한 게 아니라 눈대중이었기에 더욱 그랬지. 그래서 이번엔 옷을 벗겼네. 팬티까지 몽땅 다 벗겼지.

  닥터 타코야는 세계대전 무렵에나 침몰되었을 보물선을 발견한 탐험가의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러난 알몸을 보고 우린 그제서야 알게 되었네. 죽지 못하는 비밀을 말이야. 옷을 벗겨낸 순간 모든 것이 명백했거든.
  죽은 모두에겐 없고, 산 모두에게 있던 것.

  그게 뭡니까?
  그건 바로


  음모였네.


  네? 음모요?
  그래, 음모. 털 말일세. 죽은 자에겐 음모가 없었다네.


  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머뭇거렸다. 웃기다거나, 놀랐다거나, 이상하다거나, 진짠가 싶었다거나, 저 새끼 또라이 아냐? 라거나 하는 감정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말해줄 표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나도 알지 못하는 감정이 들었다.

  바로 그 표정이었어. 본인 눈으로 확인한, 명백한 것이었지만, 학필은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이유를 대고 떠났지. 내 확실히 말하지만 학필은 음모가 있었을 걸세. 나도, 그리고 자네도.

  그의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학필형의 음모를 생각했고, 그 생각과 함께 내 이성은 돌아와 있었다. 나는 본인 스스로 하는 말을, 당사자인 그가 진정 믿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이없고, 어이없는 마음을 천천히 친절하게 되물었다.

  이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에겐 다양한 마음이 있고, 다양한 몸이 있을 겁니다. 결국 직접 몸을 본 것 게 고작 육십 명 정도고, 그들도 유전이라거나 성적 취향이라거나 등등의 이유로 음모가 없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나는 어쨌거나 반박을 위한 반박을 위해 닥터 타코야를 향해 소리쳤으나 속으로 은영을 생각했다. 그리고 믿기 힘들었지만, 이건 다 가짜고 저 새끼 변태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은영은 말 그대로 백보지였다. 한번 보았다면 그걸 잊어버릴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가짜 상상을 진짜 기억 위에 덧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방공무원이 되서 자살한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고, 또 하나가 포르노테잎을 보는 거라네. 이걸 보면 사람들의 알몸을 볼 수 있을 테고, 그런 다음 무모인 사람들을 기록하고 그 사람들을 추적해서 생사를 확인한 후 사인까지 알아내는 거지. 시작한지 얼마 안되지만 어느 정도 성과는 있다네. 소방공무원은 2년째 낙방이지만 말일세.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네. 자네가 진심으로 성공적 자살을 원한다면, 털을 밀게.

털을 밀게. 털을 밀게. 털을 밀게.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닥터 타코야의 마지막 말이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집에 오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족히 24시간은 잤다. 나는 잠에서 깨 샤워를 하면서 내 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면도를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믿고 면도를 한다는 게 우스꽝스러워 나는 크게 웃었다. 거울을 보았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웃고, 웃고 또 웃었다.


  그리고 나는 털을 완벽하게 다 밀었다. 죽도록 웃으면서 말이다.
오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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