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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애들한테 무슨 죄가

2012.08.14 18:4908.14

애들한테 무슨 죄가





1.

“아버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이상한 프로그램이 아니구요,”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생사람을 미친사람으로 만들라구 하는데.”
“아니죠. 저희는 그냥, 아버님이 지금 어머님이랑 사이에 문제가 있으시니까, 그걸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드리려고 하는 거거든요.”
“이봐요, 피디양반. 우리 마누라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부부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그게 뭐 자랑할 거리라고, 아니 뭐 자랑 못할 것도 없지마는, 여하튼 왜 그걸 테레비에다 보내서 동네방네 떠들게 합니까? 그게 생사람 잡는 게 아니면 뭐요?”
“그렇죠, 알아서 하셔야죠. 그게 맞는데, 저희는 도움을 드리겠다는 겁니다. 서로 대화도 좀 원활히 나눌 수 있게끔 상담 지원을 해 드리고, 집에서 너무 큰 소리 내서 싸우고 그러시면 아이 정서에 미치는 영향도 있으니까…”
“누가 싸운다고 그럽디까? 얘가? 이봐요. 내가 뭐 아쉬운 게 있어서 스무 살 차이나는 여편네랑 싸우고 있겠소? 물론 내가 간혹 목소리 높일 때도 있고,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지적해 줄 때도 있어요. 근데 그거는, 내가 가장이자 인생 선배로서, 여편네를 꾸짖고 가르치는 겁니다. 이를테면 ‘훈계’ 하는 거라고 해야지, 그걸 갖다가 싸우는 거라고 해서 뭐 동네방네 흔한 멱살잡이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리면 쓰나?”

강PD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말문이 막힌 건 아니었다. ‘훈계’ 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과격한 단어들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찰랑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걸 그대로 내뱉는다면 촬영보다는 일단 경찰서부터 갈 일이 생길 터였다. 참아야 했다.
사오년 전, 그러니까 조연출 시절이었다면 아마 참지 못하고 당장 말싸움을 시작했을 것이다. 일이년 전이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든 사람이 없는 곳까지 달려가서야 간신히 화를 삭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단지 잠시 말을 멈추고, 일그러지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 인간은 변할 수 있는 것이구나. 나도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강PD는 스스로에게 경의를 보냈다.

“그리고 내가 뭐 얼토당토않은 걸로 화를 내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내가 바깥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 지는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이 또 있잖소?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래 뭐, 나한테 하는 건 좀 소홀해도 견딜 수 있다고 쳐요. 빨래는 백날 빨랫줄에 있는데 개키는 꼴을 본 적이 없고, 청소는 안돼서 늘상 주먹 만한 먼지덩이가 거실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뭐 다 괜찮다고 칩시다. 그 뭐, 대화가 없고 소통이 안돼서… 뭐 그런 문제라고 치자 이겁니다. 그런데, 애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빨래 안하고 밥을 안 지으니까 애들이 피해를 보잖아요, 애들한테 밥을 안 준다니까? 피디양반,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요? 우리 집안이 대대로 손이 귀해요. 사십 넘어서 본 아들이란 말입니다. 애를 그렇게 막 대하는데 내가 화가 안나요?”

제풀에 얼굴까지 붉어져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중늙은이의 이름은 김현태였다. 강PD의 사전 조사에 따르면 그는 이 일대에서는 꽤 오랫동안 잔뼈가 굵은 세력가였다. 지난 지방선거에 나섰다가 조금은 우스운 득표율로 낙선하면서 잠시 체면을 구긴 상태이지만, 아직 일개 방송국 PD에게 자존심을 굽힐 단계는 아닐 것 같았다. 더구나 스무 가구 남짓한 마을 주민들이 모두 김현태에 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길 꺼리는 상황에서 미뤄보건대, 아마 평소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도 아내를 대하는 폼과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마을 어른이자 인생 선배로서의 ‘훈계’ 겠지. 지금도 현태는 온 동네가 다 듣도록 쩌렁쩌렁 고함을 쏟아내고 있는 중인데, 조용히 좀 하라고 헛기침이라도 해 볼 사람은 아마 곧 죽어도 나타나지 않으리라.
현태 옆에는 올해 서른다섯이 된 그의 아내, 송연수가 죄인처럼 가지런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사색을 지나 백지장이 된 그녀의 얼굴은 송두리째 땀범벅이 되어 눅눅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저렇게 겁을 낼 사람이 대체 방송국에 전화를 걸 용기는 어떻게 낼 수 있었을까. 강PD는 사연을 보내고 자신의 전화를 받기까지 그녀가 이겨내야 했을 공포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작가로부터 연수의 사연을 처음 건네받았을 때 강PD는 적잖이 당황했다. 연수는 간결한 필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남의 가십거리라도 되는 양 담담하게 적었는데, 그 내용이란 것들이 교양프로그램의 평범한 사연 수위를 과하게 넘고 있었던 것이다. 상습적인 구타, 원치 않는 부부관계, 반 강제적인 낙태, 주기적인 감금. 강PD는 어느 순간 자신이 가정폭력 사건의 조서를 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작가에게 물었다.

“이거 경찰서로 가야 되는 내용 아닌가요?”

작가는 팔짱을 낀 채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제가 메일을 몇 통 더 주고받았어요. 이 분 말로는 경찰에 말씀도 해 보셨다는데 관할 경찰은 집안 문제라고 해서 간섭을 안 하려고 하나 봐요. 눈치를 보아 하니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지만…”

짐작대로, 현태는 아마도 지방 경찰 내부에 모종의 연줄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서를 통해 이미 신고가 들어가고, 조사가 도중에 묵살된 정황도 확인할 수 있었다.증거불충분이 주된 명분이었다. 외딴 산골, 이렇다 할 목격자도 있을 수 없는 가정폭력사건. 거기에 이웃까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니 유일한 증거라곤 연수의 증언뿐인데, 불과 십수년 전까지 지방 사창가를 전전했던 연수의 전력이 증언의 신빙성을 깎아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현태는 연수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하게 퍼뜨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핑계 김에 새 아내라도 얻으려는 포석 같아 보였다.
문득, 가슴속에서 뭔가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목구멍에서 말을 끓어 넘치게 하고 머릿속에는 도무지 삭힐 수 없는 화를 불러일으키던 그것. 강PD는 취재에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책임 프로듀서 최PD는 당연히 반대했다.

“정신 차려. 너, 니가 지금 무슨 프로그램 만드는 줄은 알고 있냐?”
“…<우리부부 행복 찾기>입니다.”
“그럼 행복을 찾아가야지 근데 왜 범죄자를 찾아가겠다는 거야? 시청자들이 바보인줄 알아? 심리상담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랑 감방에 가야 하는 사람도 구분 못할 거 같아? 경찰에 넘겨. 경찰이 못미더우면 보도국에 넘기던가. 야, 이게 어딜 봐서 교양국 아이템이냐?”
“그게,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 김현태라는 사람이 보통내기가 아니라… 그렇게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일단 방송국에서 사람이 온다 하면 곧바로 신상조사 들어가서 어디로든 힘을 써보려고 할 텐데, 똑같이 방송국 사람이 가더라도 보도국에서 가는 거랑, 교양국에서 가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들어가는 편이 증거를 포착하기에도 더 좋습니다.”
“탐정놀이 하냐? 뭔 증거를 포착해? 프로그램 안 만들고?”
“만들죠. 만듭니다. 일단은 이 아내분도 문제가 시끄럽게 해결되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 저도 솔루션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은 해 볼 겁니다. 사실 저라고 해서 이 사람 말을 백 프로 신뢰할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정말 피해망상에 걸린 사람일 수도 있는 거죠. 저는 누가 진짜든 간에 정말 재밌는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폭력남편 아니면, 피해망상 아내.”

최PD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둘 다 끔찍하다. 넌 보도국이나 가지 왜 여기서 날 괴롭히고 있는 거냐. 응?”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아마 보도국이 아니라 경찰청에 들어갔어도 같은 소릴 들었을 겁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딜 가나 늘 같은 소리를 듣게 되더라구요.”

지리한 설득의 나날이 필요했다. 최PD는 베테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끝내 설득시킨 것도 끓어오르는 정의감 따위는 아니었다. 일단 수위만 잘 조정한다면 시청률 올리기에 적당히 자극적인 소재가 될 수도 있다는 명분이 잘 먹혔고, 그보다는 결재가 떨어지는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명분을 애써 지어내느라 고생한 후배를 아끼는 맘이 적당히 작용한 결과였다. 만약을 대비한 대체아이템이 선정되었고 강PD의 동기가 취재에 나섰다. 그리고 최PD는 강PD의 기획안에 최종 결재를 하며 중얼거리듯 말해주었다.

“방송 내보낼 걱정 말고 그냥 찍고 싶은 거 찍어. 나도 아무 기대 안 할 테니까.”

최PD의 푸념에는 은근 따뜻한 구석이 있었다.




현태는 끝내 촬영을 승낙하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강PD의 관심도 관찰용 스파이 캠 설치장소를 찾는 것이었다. 일단 연수의 제보가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고, 사실로 확인될 경우 경찰에 제출할 증거자료도 필요했다. 현태의 불같은 분노를 반쯤 건성으로 들어가며 집안 곳곳을 눈으로 살핀 강PD는 적당한 자리 몇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헌데 찬찬히 살펴본 현태의 집은 정말로 지저분했다. 부엌 구석에는 갈 곳을 잃은 그릇 더미가 가득했고, 잡동사니가 수북이 쌓인 거실 TV장 같은 곳에는 진짜 주먹 만한 먼지 덩이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전업주부인 아내가 좀처럼 청소와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다는 현태의 불만도 마냥 헛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카메라를 숨길 장소를 제공하기 위한 고도의 계획이었거나.
다음 날 점심 무렵, 연수의 연락을 받은 강PD는 부리나케 현태의 집으로 달려갔다. 현태는 군의회 의원을 만난다고 읍내로 떠나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맨발로 뛰어나와 대문을 열어주는 연수의 얼굴에는 조급함과 두려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지만, 일단은 시간이 없었다. 강PD는 간단히 목례만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태가 자리를 비운 집은 침입자를 향해 잔뜩 털을 곤두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작은 사물 하나까지도 이방인을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마당에 있던 강아지 한 마리가 줄에 묶인 채 땅을 파다가 그를 보고 소리를 높였다. 강PD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어젯밤에 들렀을 때만 해도 기척조차 없었던 녀석이었다.

“뭐야? 엄마, 이 아저씨 왜 또 왔어?”

마당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던 강PD는 소파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이방인을 쏘아보는 눈초리가 그대로 김현태의 축소판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강PD가 자기도 모르게 머뭇거리는 사이, 그를 뒤따라 거실로 들어온 연수가 아이에게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 방으로 안 들어가!” 조금 전까지 극도로 겁에 질려 있던 사람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표독스러운 고함이었다. 아이는 잔뜩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엄마 저 아저씨랑 바람 펴?”

그만 말문이 막혀버린 강PD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지만, 그보다 연수가 빨랐다. 소파로 달려와 아이의 목덜미를 움켜 쥔 연수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아이의 뺨을 향해 손을 날렸다. 고개가 삐걱대며 뒤로 젖혀질 만큼 강한 손길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손이 날아가고, 이윽고 아이가 울음과 비명이 섞인 괴성을 내지를 때까지 강PD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누가 봐도 상당히 감정적인 폭행이었지만 때리는 연수나, 맞는 아이나 상당히 익숙해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다. 강PD는 허겁지겁 연수에게 달려들어 아이를 떼어놓았다. 폭풍 같은 울음이 집안을 집어삼켰다. “엄마 싫어! 엄마 존나 싫어!” 아무래도 아이는 더 심한 말들을 내뱉는 것 같았지만 뭉개진 발음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만하세요! 애한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애새끼가 지 애비한테 못된 것만 배웠어요. 아까 말 하는 꼬라지 보셨잖아요? 야, 너 그딴 소리 또 아빠 있는데서 하기만 해라. 내가 확 그냥 죽여버릴거니까… 시끄러! 뚝 안 그쳐!”

연수는 이성을 잃은 듯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더 세차게 울다가 연수와 눈이 마주치자 이윽고 제 입을 손으로 막아 소리를 죽였다. 진짜로 겁을 먹고 있다는 표시였는데, 그마저도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울부짖는 아이의 본성을 억지로 짓누르는 초월적 생존본능의 발현이었다. 강PD는, 무슨 이유든 간에 현태가 공포에 질려 울게 된다면 꼭 저런 표정을 지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겨우 겨우, 애들한테 무슨 죄가 있냐, 는 말을 하려던 강PD는 문득 어제 현태가 똑같은 소리를 했다는 걸 떠올렸다. 무릎을 굽혀 눈물범벅이 된 아이와 눈을 맞춘 강PD는 최대한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말고… 꼬마야, 이름이 뭐니?”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소파에 앉은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연수가 뒤에서 대신 말했다.

“처음 보시는구나. 지수에요. 김지수. 어젯밤엔 자고 있었어요.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유치원 방학이라 집에만 있으니 쟤는 어디로 없앨 수가 없더라구요. 신경 쓰지 말고 작업부터 하세요. 애 아빠 들어오기 전에 끝내야 하니까…”
“그건 그런데… 얘가 보는 건 괜찮습니까?”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할 거에요.”
“아… 그래요. 말을 잘 듣나보죠?”
“안 들으니까 때리죠.”

그러지 마세요,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연수는 다시 조급함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안 곳곳에 스파이 캠을 설치하는 동안, 연수는 강PD 바로 옆에 있었고 지수는 집에서 사라져버린 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강PD는 집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지수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찝찝한 기분에 시선을 뒤쫓다보니, 지수는 마당 풀숲에 몸을 숨긴 채 한 손으로는 강아지 목줄을 잡고 강PD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수의 몸짓은 위험한 먹잇감을 노리는 어린 맹수의 매복과도 같았다. 경계심과 기대심이 반쯤 섞인 눈초리에는 거대한 거리감보다는 집요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불쾌한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일단 아이에게 어울리는 눈빛은 아니었다.

“제가 보기엔 어머님도 상담이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설치를 끝내고, 강PD는 간결하게 말했다.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요. 애한테 무슨 죄가 있나요. 쟤는 그냥, 지 아빠가 저를 막 대하는 걸 보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자꾸만 그게 반복되다 보니까, 이제 저도 지수를 보면 지 아빠가 떠오르는 거 같아요. 말로 해도 될 걸 자꾸 손부터 올라가게 되고…”
“잘 아시네요. 저도 이런 프로그램 많이 진행해 봐서 드리는 말씀인데, 상대방을 바꾸려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바뀌어야 하는 거 같아요. 사람 본성이란 게 단순해서 주먹은 주먹으로 갚고 사랑은 사랑으로 갚거든요. 그러니까 누구 한 명이, 사실 누구랄 것도 없지만, 우선적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생산하는 게 중요해요. 맞고 자란 아이가 결혼해서 자기 아이도 때리면서 키운다는 거… 아시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강PD는 입맛을 다셨다.

“메일로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보기에 이건 경찰로 넘어가야 하는 사안이거든요. 우선 스파이 캠 설치는 완료됐고, 앞으로 제가 매일 올 겁니다. 그리고 최대한 상담에 참여하시도록 설득하면서 한편으로는 증거 수집을 할 거에요. 만약에 경찰에 넘길만한 폭행 사실이 확실하게 포착됐다, 싶거든 바로 신고 들어갈 겁니다. 아셨죠?”
“경찰에 넘기면… 다 해결될까요?”
“경찰에서 해결 안 되면 시사다큐라도 만들 겁니다. 시민단체건 검찰이건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다 끌어들여서 도와드릴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연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간 그 날 밤, 기어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강피디, 미안하지만 니꺼 방송 내야겠다. 내일까지 방송분 들고 와서 가편집해.”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이었다. 전화기 너머 최PD는 잠자는 걸 깨워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잠이 덜 깬 강PD가 머리를 긁으며 하품을 섞어 대답했다.

“내일이면 언제요. 24일?”
“그래, 새벽에 깨워서 미안하다. 23일. 오늘이다.”
“오늘 저녁이요? 선배, 농담이시죠?”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니 동기가 대체 아이템 펑크 냈다. 별 방법이 없어.”
“그냥 재방송해요. 여름 스페셜 뭐 그런 걸로…”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인데, 그거 한 달 전에 했다. 그리고 네 아이템이 경찰서로 가야 한다는 걸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여기엔 나밖에 없어. 국장님은 당연히 본래 아이템은 잘 되고 있고 대체 아이템만 펑크 났다고 알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 갑자기 왜 재방송을 하자고 그러겠냐? 미안하지만 별 수가 없다. 대충 1주 분만 만들어 와봐.”
“그게 그럴 수가 없는데…”
“그럴 수 없으면 펑크 낸 니 동기한테 전화를 해 보던지!”

전화가 끊긴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앞이 깜깜해지며 고생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는데, 그 문을 열어 재낀 동기와의 통화에도 별 소득은 없었다.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시달렸는지 동기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한데, 이거 애초에 본래 아이템도 아니었잖아? 인터뷰고 상담이고 하나도 응할 수 없고 이미 촬영된 것도 방송에 내면 소송 걸겠다고 달려드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응? 갑자기 왜 그러냐고? 점쟁이가 하지 말랬다잖아! 그 점쟁이 찾아가서 도대체 왜 그러냐고 했더니 묻는 말에는 대꾸도 않고 그냥 나한테도 수호령이 필요하다고 부적 한 장 챙겨주더라. 내후년에 결혼 운이 있는데 수호령이 없으면 그 전에 억울하게 죽는다나 뭐라나. 여하튼 오늘 국장님까지 면담했고, 접기로 했어.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쉽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멍하니 카메라를 바라보던 강PD는 곧 작업에 돌입했다. 다행히 찍어놓은 그림들이 있긴 했다. 읍내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 중 현태 부부에 대해 그나마 들어줄 만한 말을 해 준 사람들의 인터뷰, 그리고 현태를 처음 설득할 당시 가방 속에 숨겨 들여왔던 캠 영상이었다. 하지만 촬영할 때부터 어디까지나 경찰 참고자료로 제출할 생각이었으니, 이대로라면 교양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그림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하루 만에 추가할 수 있는 영상이라곤 어제 집안에 설치한 스파이 캠 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루 만에 쓸 만한 그림이 나왔을까? 혹시 너무 극단적인 장면이 포착된 건 아닐까? 그것보다, 이 정도 내용으로 1주 분을 때울 수나 있을까?
이튿날 연수의 연락이 오기까지 피 말리는 섭외작전이 이어졌다. 그간 프로그램을 연출하면서 인연을 맺은 심리상담사, 가족상담 전문가, 대학 교수들이었다. 강PD는 대강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현태와 연수 부부의 상태와 해결책에 관하여 급히 전문가 인터뷰를 따오도록 했다. 현태와의 첫 만남 영상을 노트북으로 옮겨 가편집을 하는 도중, 연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PD는 카메라를 꺼내 들고 주저 없이 현태의 집으로 달려갔다.
헌데 문을 열어주는 연수의 얼굴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군데군데 붓고 멍든 연수의 얼굴을 보고 강PD는 인상을 찌푸렸고, 연수는 강PD의 카메라를 보고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맞으셨어요?”

연수는 고개를 돌린 채 힘없이 대답했다.

“네.”
“왜요? 무슨 일로…”
“어디서 제가 피디님이랑 바람피운다는 이야기를 들었대요. 지금도 그거 확인한다고 읍내 나간 거에요. 피디님 숙소가 어딘지도 다 알고 있던데요?”
“세상에… 가만, 그럼 카메라에 다 찍혔겠네요?”
“아마도 그럴 거에요. 그럼 경찰에 신고하시는 건가요?”

연수의 목소리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사오년 전의 그라면, 분명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이년 전의 그라면, 아마 다른 말로 둘러댔을 것이다. 어떻게든 눈치 채 주길 은근히 바라면서. 하지만 지금의 그는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머뭇거림만을 동반한 채, 똑똑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야죠.”

강PD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숙소로 돌아와 확인한 영상 안에는 분명 무자비한 폭행 장면이 담겨 있었다. 헌데 그 맥락이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현태는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을 들어설 때 까지는 딱히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거실에 발을 디뎠을 때에도 예의 불결한 청소상태와 방치된 빨래들을 보고 그렇고 그런 폭언을 날렸을 뿐, 본격적으로 주먹을 휘두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연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느라 그런 현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본격적인 문제는 현태가 아이 방으로 들어가 지수를 안아주면서 시작됐다. 아버지 품에 안긴 지수는 깔깔 웃으면서 귀엣말로 숨죽여 뭔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현태는 그 말을 귀 기울여 듣다가 별안간 지수를 내려놓고 부엌으로 나간다. 그리고 설거지 중인 연수를 뒤에서 낚아채, 냉장고로 밀어붙이더니 맨손으로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한다. “이 년이 집에서 조용히 있으라고 했더니!” 철썩, 철썩. 오밤중의 고요를 가득 채우는 둔탁하고 잔인한 소리에 맞춰 연수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지만, 어차피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을 것이다. 먹먹한 기분으로 영상을 바라보던 강PD의 머릿속에 문득 어린 아들을 때리던 연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아이 방에 설치된 캠 영상을 찾아 그 순간에 지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피기로 했다. 아버지가 닫은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댄 지수는 어머니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얻어맞는 소리를 들으며…
키득대고 있었다.





“이럴 수 있습니까? 교수님, 이런 사례 보신 적 있어요?”

서울로 가는 밤기차 안에서, 강PD는 인터뷰에 응해 준 심리상담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정신을 추슬러야 했다. 심리상담사는 딱딱한 말투로 대답해 주었다.

“친어머니는 맞다고 했죠?”
“네. 그, 전처는 아이를 못 낳고 죽었고… 마흔 일곱에 둘째 부인을 들였는데 아들을 낳은 겁니다. 근데 이전에도 아이를 가지긴 했는데 딸이라서 강제로 낙태를 시켰다고 들었어요.”
“손이 그렇게 귀한데도 아들을 따져요?”
“사람이 좀 고지식해요. 아마 그전까지는 거의 포기하고 있다가 자기 생각엔 이제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고…”
“마지막 기회인데 딸을 낳을 수는 없다, 는 거군요. 아내가 아니라 씨받이잖아요 그거?”
“…생각보다 말씀이 격하시네요. 인터뷰에는 그런 말씀 안하셨죠?”
“얘기를 들어보니까 짜증나잖아요. 아내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니까 아이도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애정이 생기질 않는 거에요. 지금 폭언하고 폭행하는 것도 전부 아이 핑계를 댄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내 입장에서도 아이가 웬수같겠죠. 어쩐지 상전 같기도 하고, 남편 같아 보이기도 하고… 애한테 무슨 죄가 있어요? 애가 아무리 악마 같은 짓을 하더라도, 애한테는 죄가 없는 거에요. 다 어른들 잘못이지.”
“근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상황이 연출될 수 있습니까?”
“씨받이라고 했잖아요. 사실상 부부가 아닌데 부부처럼 살고 있으니까 그렇죠. 난 솔직히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게 만드는 건 자신 없네요. 그 여자 분은 그냥 어떻게든 거기서 빠져나와야 해요. 하지만 남편 성격상 그게 쉽진 않을 것 같고… 일단은 경찰이 개입을 해서 아이하고 아내 분 안전을 확보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차마 내일 저녁에 방송이 나갈 거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강PD는 대충 얼버무려 전화를 끊고 곧바로 가편집 작업에 돌입했다. 초반부터 기획의 초점은 현태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아이와 연수의 관계를 부각시키는 수정을 가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스파이 캠에 포착된 영상에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연수의 모습도 적잖이 담겨 있었는데, 이런 것까지 다 공개했다간 자칫 방송의 방향이 위태할 수도 있었다. 강PD는 영상을 고르고 다듬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편집실에 도착하자 새벽이었다. 약속과는 달리 아직 전문가 인터뷰 영상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조연출들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받는 사람도 없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뭘 만들어야 할지 확신도 서지 않는데 그걸 만들어 낼 여건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코피가 터지는 건 전혀 두렵지 않았지만 이번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강피디.”

누군가 어깨를 두들겼다. 대체 아이템을 펑크 낸 동기였다.

“오늘 밤에 올 거란 소리 듣고 혹시나 싶어서 나와 봤지. 여기 이거… 조연출들한테 부탁했던 인터뷰 테잎들이다. 내가 받아오고 다 퇴근 시켰어. 미안하다, 야. 혹시 필요한 거 있음 말해. 도와줄게.”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됐어. 도와줄 거 없어. 급히 만들어 온 거라서 정리가 하나도 안 돼 있거든… 그러니까 씨발 내가 다 해야 돼. 내가 대체 이걸 왜 하겠다고 했지?”
“…미안하다. 그래도 뭐 도와줄 거…”
“그래? 내가 금방 죽을 거 같으니까, 그 수호령인가 뭔가 지금도 갖구 있거든 나한테 좀 주고 가라. 살아나거든 금방 돌려줄게. 총각귀신은 안되게 할 거니까 걱정 말고…”

강PD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기척이 없다 싶어 힐끗 뒤를 돌아보니 동기는 정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뒤늦게 화가 치밀어 오른 강PD의 눈에, 얼핏 봐도 부적처럼 생긴 누런 종이조각이 하나 들어왔다. 정말 두고 간 모양이었다. 반으로 접힌 채 선풍기 바람에 흔들거리는 부적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진심으로 허탈한 기분이 들어서, 강PD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드라마 혹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몇 시간이 흘러갔다. 강PD는 간신히 시간에 맞춰 방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워낙 급히 만든 탓에 내용이 뭐였는지는 강PD 자신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쩐지 간절한 마음이 든 강PD는 한 손에 수호부적을 꼭 잡은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방송을 모니터했다.
방송은 강PD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혼란스럽고 다급했으며 무엇보다 독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본래 현태에게로 집중되어야 할 증오는 극도의 혼란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유령처럼 화면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었는데, 덕택에 아주 잠깐씩, B급 공포영화에서나 느낄 수 있는 오싹하고 찝찝한 기분이 도드라지게 불거지곤 했다. 여러모로 평일 저녁 교양프로그램에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강PD는 어느 순간부터 뒷수습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청자들의 반응, 방송국 내부의 반응, 그리고 그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현태의 반응이었다. 사전 허락도 받은 적이 없는 영상들인데, 심지어 엽기 호러영화처럼 편집이 되어버리다니. 어쨌거나 가능한 변명을 생각해 보던 강PD의 머릿속은 현태의 폭행 장면을 다시 보는 순간 그만 백지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이 년이 집안에 조용히 있으라고 했더니!

철썩, 철썩. 허, 허, 철썩, 철썩. 아, 저 부분을 하나도 안 들어냈던가? 철썩, 철썩. 하긴 저 부분이 제일 중요하긴 했지. 철썩, 철썩. 젠장, 큰일 났다. 심지어 모자이크나 블러Blur 처리도 안 되어 있었고 음향도 손 본 것 같지가 않았다. 방송은 흡사 생방송으로 폭행 현장을 포착한 듯, 생생한 날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프로그램은 이미 끝난 후였다. 강PD는 자기도 모르게 오른 손의 수호부적을 꼭 쥐고 있었다.






2.

- 지수 아빠 집에 없어요.
- 예? 어디 가셨는데요?
- 몰라요. 여하튼 피디님은 안 만나겠다고 했어요. 오셔도 소용없어요.
- 하지만 어제까지는 직접 와서 해명을 하라고…
- 여기 없다니까요. 오지 마세요. 끊을게요.

전화를 받은 연수는 마치 딴 사람 같았다. 망설이는 기색도 없었고 떨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화통이 폭발하도록 소리를 지르던 현태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는 강PD는 이 갑작스런 반전이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선배님. 안 만나겠다는데요.”

옆자리에서 강PD를 노려보던 최PD의 눈썹이 소리 없이 꿈틀거렸다.

“일 났구나. 소송 들어가겠다, 이거지?”
“글쎄요. 그런 말은 없었는데 그냥 만나고 싶지가 않다고…”
“그럼 어제까지만 해도 널 죽이니 살리니 내 모가지를 끊니 마니 하던 양반이 왜 갑자기 그러겠냐? 변호사가 한소리 한 거야. 아주 그냥 본때를 보여주겠다 이거지.”
“지금 사람들이 이 난리인데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가려고 할까요? 여기저기 발도 넓은 사람이니까, 제 생각에는 그냥 정정보도 요구하고 아는 기자들 불러서 언플로 물타기 하면서 조용히 잠재우려고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러겠지. 방송이 조금만 덜 이상했으면 그랬을 거야. 그런데 너 어제 방송 얼마나 이상했는지 아냐? 보긴 봤냐? 인마 너, 그런 사람들이 진짜 열 받으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모르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제 너나 내가 손 쓸 단계는 지나간 것 같으니까 그냥 얌전히 고개 숙이고 시말서나 써. 설마 진짜로 죽이기야 하겠냐…”

최PD의 푸념에는 이상하게도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특히 ‘손 쓸 단계가 지나갔다’ 는 평가가 그러했다. 강PD가 보기에 이 문제는 이제 ‘너와 나’ 뿐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 섣불리 손을 쓸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하는 중이었다.
사실 인터넷 경향각지에서 자기 맘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큰 문제꺼리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방송 종료와 함께 현태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향해 출격한 각종 언론사의 기자들이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슈를 생산하고 확대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고학력 글쟁이들을 보며, 강PD는 그만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그간의 촘촘한 사전 조사를 통해 강PD가 알아냈던 거의 모든 자료들이 고작 몇 시간 사이에 기사화되어 인터넷에 살포되었다. 방송을 보고 분노한 현태가 쏟아낸 말들도 따옴표 안에 담긴 채 적절히 순화되어 강PD 앞에 친절히 배달되었다. <‘폭력남편’ 입을 열다 “제작진, 가만두지 않을 것”>
방송이 나갔던 그날 밤은 참 길고도 요란했다. 하지만 강PD는 아주 낙담하거나 절망해 버리지는 않았는데, 그 혼란 속에서도 그나마 자신이 목표했던 바가 어렴풋이 이뤄지고 있다는 인상 정도는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방송을 타 버린 현태의 폭행 장면은 그 어떤 변명과 권모술수로도 무마할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이제 현태는 어떤 방법으로도 모종의 책임을 기피할 수가 없을 터였다. 물론 삽시간에 인터넷을 점령해 버린 분노와 두서없이 기사화되는 각종 가십거리들은, 어떤 면에서는 현태의 폭력 그 자체보다 무서운 부분이 있었고 그 때문에 강PD 역시 질겁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 적어도 뿌듯한 마음을 묻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용기 있게 ‘사회 정의’에 기여한 언론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기분은 하루를 채 넘기지 못했다. 현태가 정말로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기자들은 현태의 거취에 대해 각종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냈지만, 사실 그 조그만 시골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하룻밤 사이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는 것은 영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자들은 연수와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지수 아빠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하지만 기자들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이윽고 연수의 신변보호 요청을 받은 경찰들이 현태의 집 주변에서 기자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아는 기자들과도 통화 한 통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던 강PD는, 뭔가 심하게 마뜩찮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각종 문의와 질책에 녹초가 되어버린 최PD를 찾아가 자못 비장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저, 아무래도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PD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딜 가겠다는 거야?”
“현태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습니다. 이 양반이 기자들을 이렇게 막 다룰 사람이 아닙니다. 취재원에게서 격리된 기자들이 얼마나 악의적으로 변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고요. 가만있어도 여론이 좋지 않은 판국에 이렇게 뜬금없이 자취를 감출 리가…”
“강피디. 내가 가만있으라고 했지? 네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선배, 이 가족에 대해선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한 폭력가장 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족이에요. 예감이 너무 불길해서…”

강PD의 눈앞에 지수를 때리던 연수의 독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뭐, 어디 가서 죽기라도 했다는 거야?”

고개를 푹 숙인 강PD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최PD는 몸을 반쯤 옆으로 돌린 채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야, 강피디. 일단 나는 기본적으로 네 실력이나 감각을 믿는다. 그리고 이 껀에는 이렇게 너를 믿었던 내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거고. 이 두 가지만 확실히 해 두자고. 쉽게 말하자면 난 어지간하면 네 편이란 뜻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나랑 부딪히는 이유가 뭔지 아냐?”
“…죄송합니다. 제가 계속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그게 아냐. 너 경찰한테 크게 속았던 적이라도 있냐? 왜 경찰을 못 믿어? 네 예감에 따르자면, 지금 현태 이 양반이 어디 가서 자살했거나 누군가한테 살해당했다는 거잖아. 그런데 지금 며칠 새에 가장 태도가 이상해진 사람은 이 양반한테 맨날 얻어맞던 연수, 이 여자니까 이 여자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거고. 맞지? 그런데 지금 경찰한테 신변보호 요청한 게 누구지? 연수잖아? 네 말은 이 여자가 지금 사람 죽여 놓고 하루 만에 경찰들을 제 집 마당까지 부를 만큼 독한 여자라는 뜻이고, 경찰들은 살인자를 눈앞에 두고 24시간 경호조치를 취하면서도 아무 낌새도 느끼지 못하는 바보라는 뜻인데, 난 둘 다 못 믿겠다. 넌 어떠냐?”
“그거야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잖습니까. 현태가 진짜 실종됐는지, 아니면 단순히 몸을 숨기고 있는 건지도 확실치 않은 단계고…”
“그것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럼 며칠 더 기다려 봐. 왜 그렇게 급해?”
“그게…”

할 말은 떠올랐지만, 강PD는 그 말이 과연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짜증과 피곤이 들끓고 있는 최PD의 눈빛 어느 구석에는 여전히 어떻게든 강PD를 배려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다. 강PD는 더 이상 이 대화를 끌고 나가는 것이 굉장히 무례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최PD는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어째 내 허락은 그냥 스킵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귀찮은 일은 더 만들지 않겠습니다.”
“지킬 수도 없는 약속은 관두고. 하나만 묻자. 진짜 너 왜 그러냐?”

아까 생각났던 말을 꺼낼 타이밍이었다.

“선배. 애들한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뭐?”
“애들한테는 죄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럽니다.”

최PD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걸로 봐서는 역시 설득력이 없는 말인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강PD는 우선 관할 경찰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문제가 된 ‘그’ 방송의 담당PD라는 소개만으로도 경찰서장까지 통화가 가능했다. 경찰서장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던 것이다. 정확한 관계를 이야기할 수야 없지만 일단 현태와 ‘잘 아는’ 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서장은, 강PD에게 취재에 나서게 된 경위와 후속방송의 계획에 대해 시시콜콜히 따져 물었다. 대부분의 질문은 지나치게 여러 이슈를 빙빙 돌고 있었지만 결국엔 ‘사태를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협조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느냐’ 는 점잖은 협박에 가까웠다.
반면 강PD의 질문은 대부분 현재의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연수가 신변보호를 요청하게 된 경위라던가, 기자들의 취재 현황이라던가, 방송 이후 현재까지 ‘파악된’ 상황 전개라던가, 현재 시행되고 있는 신변보호의 수위라던가. 겉도는 질문을 통해 확인된 사실은 피차에게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강PD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경찰은 여전히 이 사안이 ‘경찰까지 나서야 하는 사안인지’ 의문을 품은 나머지 그저 자꾸만 일을 키우는 기자들의 접근만 막고 있을 뿐, 그 어떤 상황도 소상히 파악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강PD와 서장은 전화통 너머로 느껴지는 서로의 답답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답답함은 그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질문에 이르러 절정으로 치달았다.

- 그럼, 김현태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 그러게. 이 양반 어디로 간 거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강PD는 말라가는 입술에 침을 축였다.

- 서장님. 제 말을 믿어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아무래도 상황이 이상합니다. 김현태씨의 실종에 대해서 수사에 나서야 합니다.

서장은 짧고, 느리게 대답했다.

- 실종이라니, 누구 맘대로 실종이라는 겁니까? 자꾸 그렇게 일 키울 겁니까?

말이 통할 단계가 아니었다.
수확 없이 통화를 마친 강PD는, 자신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은 길고 가늘게 이어졌다. 어차피 연수가 순순히 전화를 받을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던 강PD는 머리를 굴려 대안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기껏 동네에 도착해 봐야 경찰한테 저지당할 게 뻔하고, 연수도 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남은 대안이라곤 숨어들어가는 것뿐인데…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다음은?
머릿속이 먹먹해지는 순간, 귓가에 들리던 통화음이 멈추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아이였다.

- 너 누구니. 너 지수니? 지수 맞지?

강PD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전화기 너머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아이는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정적 속에서,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네. 나 지순데요. 아저씨 누구야?
- 아저씨, 지난번에, 집에 카메라 두고 갔던 아저씬데? 기억하니? 엄마랑 같이 봤지?

지수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 아, 바람 핀 아저씨?
- 그래!… 바람 핀 건 아닌데, 하여튼, 너 지금 어디니? 엄마랑 같이 있어?
- 아니. 숨어있어. 아저씨 좀 조용히 하면 안돼? 엄마한테 들키는데…
- 들키다니, 그건 무슨 소리야.
-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 엄마가 나 죽여…

숨죽인 지수의 목소리에는 진짜 공포가 묻어나고 있었다. 강PD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막아버렸다. 진짜 중요한 질문을 할 때였다.

- 지수야. 아저씨 말 잘 들어.
- 응.
- 아빠 지금 어디 갔니?

지수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 땅 속에 있어.
- …어디라고?
- 땅 속. 아빠가 막 자고 있는데, 엄마가 끌고 나와서 묻었어. 브라우니도 같이 묻었어.
- 브라우니… 는 누구니?
- 집에 왔을 때 마당에서 브라우니 못 봤어? 엄마가 브라우니 자꾸 땅 파고 시끄럽게 군다고 아빠랑 같이 묻었어… 엄마가 이거 누구한테 말하면 죽여버린다고 했어. 진짜 죽여버린다고…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 엄마가 너 찾고 있니, 지금?
- 응. 나땜에 이렇게 됐다고, 아까부터, 자꾸 소리 지르면서 쫓아다녀서 숨어있어. 아저씨 나 전화 끊을게. 들키면 진짜 안 되거든. 안녕.
- 지수야? 지수야! 잠깐만, 잠깐만!

대답 없는 수화기 너머로, 강PD는 한참동안 소리를 질렀다.






길목을 막아선 경찰들은 막무가내였다. “저희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돌아가세요.” 강PD는 냉담하게 서 있는 경찰 저지선 너머를 향해 악을 썼다. “연락하지 말아요! 지금 나한테 얘기했다는 걸 알면 애 엄마가 애를 죽일 거란 말입니다! 당장 올라가서 애만 구출해서 나오라니깐요? 이거 진짜 위험한 상황이에요!” 하지만 정작 경찰들의 관심은 강PD의 뒤쪽에서 눈을 반짝이며 녹음기와 카메라를 돌리고 있는 다섯 명의 기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속절없이 일이 더 커지는 중이라는 걸 느낀 강PD는 일단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경찰들이 제 발로 저지선을 치워줄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요. 그럼 지수 엄마랑 통화를 하게 해 줘요.”
“그러니까,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한다지 않습니까.”
“미안하지만 제가 해야 합니다. 저는 물론 경찰을 믿습니다만, 지수 엄마가 당신들을 믿지 않아요. 이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니까 당신들 모두를 속이고 있는 겁니다. 일단, 지수의 안전만 확보합시다. 내 말이 영 말도 안 된다 하더라도, 일단 속는 셈 치고 믿어 보라구요. 당신들, 이러다가 정말 내 말이 맞으면 어쩌려고 하는 겁니까? 살인자에게 살인과 시체유기를 위한 시간을 무조건 제공하겠다 이겁니까?”

설득력이야 있는 말이었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현장의 보고를 받은 서장은,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일이 자꾸만 커지는 것에 노골적인 불만부터 표시했다.

- 우리는 언론으로부터 오연수 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있는 거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바로 댁 같은 사람들한테 저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댁들이 보호를 잘 하니 마니 상관할 바가 아니란 말입니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연행하겠습니다. 이거 지금, 공무집행 방해에요.

전화를 통해 서장의 협박을 들은 강PD는 경찰 저지선 테이프를 두 손으로 잡은 채 결연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 좋아요. 절 쫓아낼 수는 있겠지만 제 말이 틀리진 않았습니다. 지금 제 뒤에는 기자 다섯 명이 있고, 아마 몇 십 분 뒤에는 이 해프닝에 대한 기사를 완성하고 송고할 준비가 끝날 겁니다. 만천하에 제 우려가 알려지고, 나중에 가서 제 말이 맞았을 경우에, 너무 후회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서장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도대체, 당신이 받았다는 그 애 전화 말고, 뭐 다른 증거라도 있어요? 애 엄마가 애를 죽일 거라는 증거 말입니다.
- 제가 방송에 내보내지 않은 영상들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공해 드릴 수 있고, 취재 중에 제가 접하게 된 사실들도 얼마든지 증언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연수 씨랑 통화만 하게 해 줘요.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어쨌든 상황은 잘 풀려가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연락을 받고 미방영 테이프들을 확인한 최PD도 경찰을 통해 협조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무전 연락을 받은 경찰들이 총총걸음으로 현태의 집을 향해 사라졌다. 저지선에 남아 있던 경찰 한 명이 강PD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말했다.

“우선 아이의 안전을 확인해 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강피디님은 못 올라가시고, 통화만 하실 수 있습니다. 자요. 이 전화로 하면 받을 겁니다.”

강PD는 정신없이 전화를 낚아챘다. 통화음이 귓가에 울려퍼지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저지선 너머의 경찰은 경찰대로, 강PD 뒤편의 기자들은 기자들대로 팔짱을 낀 채, 오늘의 해프닝에 정점을 찍을 이 전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강PD는 문득 걱정이 들었다. 정말,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거면 어떡하지. 오연수, 이 착한 여자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안방에서 덜덜 떨고만 있었는데, 지수가 골탕 먹이려는 작정으로 괜한 소리를 한 거였다면… 강PD는 아버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자기 방에서 혼자 키득대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골탕 먹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아이. 누구보다 지 아버지를 많이 닮은 악마 같은 아이… 소름이 강PD의 등 뒤를 타고 올랐다.

- 여보세요.

늘 그랬듯, 연수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 아, 예, 안녕하세요. 저 강피디입니다.
- 어머. 어떻게 이 번호로 거신 거에요? 경찰 번호였는데…
- 죄송합니다. 제가 연수 씨 신변이 좀 걱정돼서 경찰에 통화를 요청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 걱정해주신 건 감사한데, 전 더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만 끊을게요. 그럼…
- 잠깐만요! 지수는, 지수는요?

강PD가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그를 주목하던 열두개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전화는 다행히 끊기지 않았고, 연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 지수가 뭐요?
- 지수 말입니다. 지수 지금 무사합니까?
- 그럼 무사하죠. 왜요, 누가 지수한테 해코지라도 한대요?
- 아뇨. 아니죠. 그럼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만…

입술에 침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판단을 마쳐야만 했다. 아들과 어머니 중,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 했다. 강PD는 아무래도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 저 연수씨,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지수를 좀 만날 수 있을까요?
- 지금요?
- 예. 지금 좀 만나고 싶습니다. 경찰들이 곧 도착할 테니까 그 편에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지수는 왜 만나시게요?
- 그게…

거대한 벽이 생각의 길을 가로막은 느낌이었다. 도무지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강PD는 눈을 꼭 감으며 말을 이었다.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전 지금 지수가 불안합니다. 일전에 지수가 지 아버지처럼 보인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그럴 때면 도무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고 말로 할 것도 손으로 해결하게 된다고 하신 적이 있죠?
- 그래서, 지금 제가 지수를 어떻게 할까봐…

연수는 불쾌하다기보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맞습니다. 괜한 걱정일 겁니다. 하지만 제가 아주 없는 소리를 하는 건 또 아니라고, 뭐 그런 생각도 듭니다. 연수씨. 분노는 사랑으로 끊어야 합니다. 아무리 악마 같은 사람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연수씨 아들이고, 또 애 아닙니까? 애들한테 무슨 죄가 있어요? 미워하면 같이 미워하고 사랑해 주면 같이 사랑해 주는 게 애들입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잠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강PD는 자신도 모르게, 간절한 맘으로 몇 번이고 되묻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누구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진실은 항상 누군가와 누군가의 마음 중간 정도에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자신 같은 제 3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누가 들어도 뻔한 시쳇말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빗나간 기도처럼, 무력한 의사처럼.
연수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 고마워요.

강PD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 아이가 그렇게 걱정되신다니 보내드릴게요. 그런데 애도 며칠째 기자들을 너무 많이 봐서 좀 놀랐는지 어디로 숨어버렸네요. 경찰들 도착하거든, 같이 찾아볼테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신경 써 주셔서…
- 아뇨. 아닙니다. 애초에 약속해 드린 대로 일이 조용히 처리되질 않아서 오히려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 괜찮아요.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연수의 목소리에는 희미하나마 웃음도 묻어있었다.
잠시 뒤 지수가 경찰들의 손을 붙들고 저지선에 도착했다. 아이는 온몸이 진흙투성이였는데, 마당 구석에 몸을 바싹 숨긴 채 마지막까지 들키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는 것이다. 진한 공포가 가득 서린 아이의 얼굴을 보니, 강PD는 그만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수야.”

지수는 입을 꾹 다문 채 강PD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건지, 그렇지 않은지도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강PD는 문득, 아직 주머니에 있는 부적조각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지금 수호령이 – 그런게 있던 없던 간에 –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 아이일 것 같았다. 그는 부적을 꺼내 아이의 손에 꼭 쥐어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 너무 무서우면, 이게 널 지켜줄 거야. 여기에 아주 힘 쎈 귀신이 들어있거든. 무슨 말인지 알았지?”

지수는 무표정한 눈동자로 손아귀에 들어온 부적을 내려 보았다. 문득 자신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강PD는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여 지수를 꼭 안아주었다. 그는 지수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미안하다.”

강PD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현장에서 강PD가 했던 발언과 행동들이 모두 기사화되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방송 이후 며칠간이나 잠적을 감췄던 담당 PD가 불쑥 나타나 내뱉은 충격적 발언들은 금세 꺼질 수도 있었을 상황을 더 뜨겁게 달궈버렸다. 최PD는 전화를 걸어 갖은 욕을 퍼부어댔지만, 아마도 방송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역할을 하는 듯 했고, 경찰서장 역시 겉으로는 짜증을 부렸지만, 이제는 현태의 실종에 대해 정식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사 협조를 위해 읍내에 숙소를 잡은 강PD는, 이제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 그는 그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연수의 마지막 목소리를 위안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새겨들었기를 기대했다. 아마도, 틀림없이 그러했으리란 확신이 – 오로지 서로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확신이 섰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날 새벽, 현태의 집에서 찢어지는 듯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3.
곧이어 연수의 다급한 전화도 걸려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살려줘요!’ 연수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겁에 질려 있었고, 응대하는 경찰의 말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뿐더러, 주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가득해서 경찰 역시 연수의 다른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받은 당직 경찰은 생전에 그런 소음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경험이 없었는데, 울림통의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이 왕왕거리며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흡사 무저갱에서 새어나오는 강아지의 울음소리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당직 경찰은 저지선의 경찰들에게 무전을 통해 긴급출동을 지시했다.
동일한 순간, 저지선에 있던 경찰들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순찰조를 경찰 한 명이 다급히 출동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현태의 집으로 뛰어가는 와중에도 비명은 점점 더 크게, 더 자주, 더 다급하고 분명하게 들려왔다. 뛰어가는 경찰의 이마에 진땀이 흘러내렸다. 실탄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문득 걱정이 되었지만 아이와 여자 둘이 있는 집안에 실탄까지 써야 할 사건이 터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현장에 도착해 대문을 두들기다 점점 더 커지는 비명소리만 확인하고는 강제로 문을 넘어트렸을 때만 해도 그랬다.
집 마당에 현태가 서 있었다.
방금까지 진흙탕을 뒹굴다 오기라도 한 듯, 온 몸에 흙범벅을 한 현태는 아무래도 제 몰골이 아니었다. 눈빛이나 얼굴도 그러했다. 썩다 말아서 곱지 못한 색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녹아내리다가 무언가에 긁혀버린 듯 제멋대로 구겨진 얼굴 근육이 희미한 불빛을 받아 꿈틀거리며 표정 비슷한 것을 만들고 있었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핀 아랫배에는 구멍이라도 난 듯 붉은 내장이 새어나와 있었고, 현태는 하얀 뼈가 보이는 한 손으로 그 구멍을 막은 채 비틀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는데, 그의 뒤편에는 역시 방금 땅 속에서 튀어나온 몰골을 한 강아지 한 마리가 왕왕대며 끔찍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경찰관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목뼈에서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현태가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한 가지 질문을 할 겨를은 남아 있었다. “너 뭐… 뭐야!” 현태는 대답 대신 길고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경찰을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경찰이 뒷걸음질 치며 허둥지둥 실탄을 찾는 사이, 뒤에서는 강아지가 캉캉대는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팍으로 덤벼들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경찰은 그만 뒤로 엎어져 나뒹굴고 말았다. 강아지는 악취를 풍기며 경찰의 가슴을 박박 긁고, 얼굴로 달겨들고, 괴성을 질러댔다. 견디지 못한 경찰이 버둥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이 광경을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기는 현태의 썩은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꼭 미소라도 짓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어디선가 아이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거기 아냐. 엄마 저기 있잖아.”

경찰은 바닥에 누운 채 손에 힘을 줘서 강아지의 공격을 막으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종이조각을 손에 든 지수가 마당 수돗가에 쪼그려 앉은 채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수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걔는 브라우니가 알아서 할 거야.”

강아지- 브라우니가 지수의 말에 화답하듯 크게 울어댔다. 고막을 찢어놓을 것 같은 기세였지만, 그보다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괴이함이 더 강렬했다. 쓰러져 있던 경찰의 손에 힘이 빠져나갔고, 브라우니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목덜미를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피가 터지고, 비명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기어 나왔다.
연수는 마당 구석에 주저앉은 채 이 광경을 모두 보고 말았다. 이제는 비명을 지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현태는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을 기세로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왔고, 지수는 그 뒤에 반쯤 몸을 숨긴 채 곁눈질로 연수를 살피고 있었다. 그 눈빛이 여전히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수는 기가 막혔다.
지수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보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연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아이가, 마당에 묻혀버려 썩어가던 제 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완견을 일으켜 세워서 사람을 죽이고 이제는 나를 위협하고 있다고? 내가 무서워서? 연수는 현태를 죽였던 날, 그리고 마당에 암매장하던 날, 자꾸만 곁에서 시끄럽게 굴던 브라우니도 죽이고 현태와 같이 묻어버렸던 날을 떠올렸다. 연수는 지수를 붙잡아 세우고 똑똑히 경고했었다. “어디 가서 이런 소리 했다간 너도 죽여서 묻어버릴 거야.” 이제 지수는 그 치졸한 위협에 대해 분명한 회답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좆같은 년아.”
현태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썩어 내린 근육이 미묘한 굴곡을 만들고는 있지만 저걸 표정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그 얼굴에서 악마의 기운을 읽은 것도, 그게 현태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도, 그러니까 다 연수 자신의 두려움일 것이다. 어쩌면 지수도 그랬을 것이고, 현태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움직이다가 결국 꼭두각시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이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연수는 이를 악 물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꺼져! 이 악마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비명이 멈추고, 지수가 깔깔대며 웃었다.






다음 날 아침, 강PD는 경찰서에서 간밤의 소동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마당에서 뭔가가 기어 나온 흔적과 함께, 경찰 한 명과 오연수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둘 다 무언가에 잔인하게 씹어 먹혀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경찰은 야생동물의 습격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지수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강PD는 심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비극입니다. 정확한 사실은 수사를 해 봐야 하겠지만, 여하튼 큰 비극이죠. 제 심경보다야 일단은 사라진 아이를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큰일은 없을 테고, 아마 놀라서 어디엔가 숨어있을 것 같은데, 다른 누구보다 지금은 이 아이가 걱정입니다. 애한테 뭔 죄가 있습니까. 다 어른들이 죄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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