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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메리 크리스마스

2012.07.15 22:5407.15



1. 지전수는 초조하다.
  2011년의 크리스마스이브, 일본 하네다공항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지붕의 무게를 거의 느끼지 않는 듯 서 있는 강철 기둥들 사이로 캐리어를 끄는 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텅 빈 라운지에도 사람 대신 밝은 빛만 가득 들어차 있어 먹먹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도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함정 같았다. 어쨌든 그곳, 라운지에 홀로 앉아 있는 지전수는 초조했다. 어린 시절 보육에 맡겨지던 날처럼 손톱을 물어뜯었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지전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보육원으로 가는 길 내내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목구멍으로 손톱을 넘기며 다짐하듯 되뇌었다. 생각해 보면 별로 달라질 것도 없어. 사실 정말로 다를 게 없기도 했다. 지전수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았고, 일용직 노동자였던 아버지도 자주 집을 비웠다. 그러니까, 어린 지전수가 싱크대 앞에 노란 전화번호부를 딛고 올라서서 쌀을 씻고 있으면 아버지가 별 인사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식이었다. 아버지는 가끔씩 집에 올 때조차 술에 취해 있었다. 때문에 지전수는 혼자서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된 지전수는 하네다 공항 화장실의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화장실에 간 여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전수는 여자가 그 길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처음으로 대면한 사이. 재일 교포인 그녀는, 정확히 말해 나오코이면서 동시에 김순정이기도 한 그녀는 한 달 전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김 원장 아시죠? 그녀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도쿄 대형병원의 원장인 김 원장의 개인변호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한 달 전 도쿄에 온 지전수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고 했다. 당황한 지전수는 대답했다. 자신은 김 원장을 모르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김순정은 원장아들의 장례식 날 우연히 지전수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며 그를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라고 했다. 지전수가 박 사장을 벗어나 혼자 자립할 수 있을 만한 액수의 돈과 새로운 신분을 제공해 주겠다는 거였다
. 처음 지전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선뜻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게 의심이 갔다. 지전수에게 있어 지나친 친절은 곧 상대방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여러 차례의 전화와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지전수는 속는 셈 치고 김순정을 따라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냥 뜻밖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다정하게 말하는 김순정의 말투가 어쩐지 신뢰가 가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이토록 친절하게 구는 까닭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김순정이 화장실에 간지는 십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지전수는 꼭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뭔가 윙윙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간간이 들리는 안내방송과 크리스마스 캐럴 소리만이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지전수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회전문을 빠져나가자마자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덮쳐 왔다. 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전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연스레 칠년 전 사건이 떠올랐다.
  어느 날 새벽, 지전수는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보육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보육원은 편의점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외곽에 있었지만, 택시 탈 돈이 아까웠던 그는 늘 걸어 다녔다. 커다란 은행나무들 사이로 좁게 뻗은 이 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한 시간쯤 걸으면 보통 새벽 두 시 전에 보육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가에는 논과 빈 건물 몇 채뿐이었다. 어둠 속의 사물은 가로등 대신 반쯤 허물어진 달빛이 어슴푸레 비쳐주었고, 텅 빈 거리는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가 채워 주었다.
  그렇게 지전수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걷는 사이, 그의 등 뒤로 갑자기 한 차가 달려왔다. 차는 순식간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전수를 들이받았다. 그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지전수의 몸은 멀리뛰기를 하는 선수처럼 뒤로 접혀 날아갔다. 지전수는 자신이 하늘로 천천히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멍한 표정으로 큼지막하게 다가오는 노란 달을 잠시 바라보다 까만 아스팔트 위로 곤두박질쳤다. 곧 뜨거운 피가 쿨럭, 하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만치 떨어져나간 라디오에선 여전히 청취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DJ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한동안 지전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뒤틀려 꺾인 자신의 다리가 허리 근처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두 눈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져 있는데도 왠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몸을 움직이려 애를 썼다. 하지만 팔도, 다리에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 머리통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체온이 빠르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진흙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 이게 죽는 건가? 사위가 어두워져 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전수는 왠지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없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전수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스스로가 놀랄 뿐이었다.
  그랬는데, 지전수는 죽지 않고 다시 눈을 떴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벽이었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지전수는 천천히 팔다리에 힘을 주어봤다. 찢어진 옷과 그 위로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과는 달리 그의 몸은 너무나 멀쩡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마치 며칠 동안 잠을 푹 잔 것처럼 힘이 넘쳐흘렀다. 몸속에서 아주 작은 물질들이 쉴 새 없이 분자운동을 일으켜 몸을 덥혀주는 것 같았다. 지전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텅 빈 차도를 바라보았다. 은행나무 사이로 연노란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지전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저만치 하얀 김을 피어 올리고 있는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창을 두드리자 운전대에 넓은 이마를 박은 채 의식을 잃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잠시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얼굴이 차츰 흙빛으로 변하며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곤 지전수를 향해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남자에게서 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지전수는 가뿐하고 상쾌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것이 박 사장과의 첫 만남이었다.
  지금쯤이면 박 사장도 내가 사라진 것을 알겠지? 지전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이어 회전문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외롭게 서 있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뒤 쪽으로 몸을 숨기고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김순정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푸른 실크 블라우스와 회색 맞춤 바지. 하이힐. 어깨에 걸친 검은 핸드백. 길지도 짧지도 않은 갈색 머리와 동그스름하고 피부가 매우 고운 얼굴. 어쩐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전수는 휴대전화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짙은 눈썹과 날렵하게 솟은 코, 적당히 그을린 얼굴이 비쳤다. 조심스레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자신의 얼굴 역시 낯선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2. 박 사장은 섹스를 한다.
  바로 그 시간, 세종로의 한 빌딩 사무실에서는 박 사장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섹스를 하고 있었다.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0층짜리 꼭대기 층이었다. 미국의 고객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4시간 전이었다. 지전수가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는데요. 김 비서가 늘 그렇듯 졸린 목소리로 통역을 해 주었음에도, 그는 직감적으로 일이 틀어져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 사장은 김 비서의 엉덩이를 손으로 때리면서 생각했다. 찰싹찰싹. 제길, 이놈이 어디 갔을까, 잡히기만 해 봐라. 찰싹찰싹. 이놈이 미쳤나. 이런 기회는 정말 쉽게 오는 게 아닌데. 찰싹찰싹. 그는 김 비서의 엉덩이를 점점 세게 때리며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찰싹찰싹, 하는 소리가 커질수록 그는 화가 치밀었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확대되어 떠올랐다.
  1999년 가을, 경찰이었던 박 사장은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리봉동 일대 룸살롱 사장들과의 돈독한 유대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푸념을 늘어놓는 대신 곧바로 특기를 살려 흥신소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뉴밀레니엄 서비스센터’라고 이름 지어진 박 사장의 인생 2막은 영등포 사창가 입구 근처에서 태동했다. 사 층짜리 낡은 상가건물의 지하였다. 통풍이 잘되지 않아 한 해의 절반은 온몸에 축축한 땀이 마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견딜 수 없었던 건 지나치게 울리지 않는 전화기였다. 희망차게 시작된 새천년과는 달리 그의 사업은 도무지 가망이 없었다. 박 사장은 떼인 돈 찾아다 주기, 간통 현장 급습하기, 가출 청소년한테 일수놀이 하는 놈들 협박해서 푼돈 뜯어내기 같은 일들로 간신히 사무실 월세를 채워 나갔다. 나중에는 할 일이 없어 매정하게 떠나버린 전(前) 마누라의 뒤를 밟아 보기도 했다.
  아무튼 그놈의 돈 때문에 복날의 개처럼 헉헉거리던 박 사장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왔다. 사무실을 개장한 지 딱 삼 년 만인 2003년 봄이었다. 그야말로 운명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그 새벽녘 지전수와의 조우로 말미암아, 박 사장의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해 갔다. 아니, 사실상 사업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아무튼 그 특별한 능력에 비해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는 녀석 덕분에 박 사장의 사업은 특별해졌다. 그러니까 꽁초 냄새 때문에 늘 머리가 지끈거렸던 반지하가 유명한 스님의 표구가 걸린 광화문 사무실로, 삼천만 원짜리 전세방의 세입자가 담 높기로 유명한 성북동 주민의 일원으로 바뀔 정도로. 박 사장은 더 이상 고린내 나는 홀아비가 아니라 큰 코와 살짝 벗겨진 이마가 매력적인 사십 대의 독신남이 되었다. 그 때문에 박 사장에게 있어 그날 새벽 지전수와의 만남은 신이 주신 행운이었고, 이제 와서 그 행운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찰싹찰싹. 박 사장은 활처럼 휘어진 김 양의 허리를 바라보며 지전수와 함께 뉴욕으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처럼 은밀하고 위험 부담이 높은 사업에서는 무엇보다 신용이 생명이었다. 공항 출국 심사대까지만 따라간 것이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은망덕한 자식. 갈 곳 없는 고아 놈을 거둬 준 은혜도 모르고. 박 사장은 꼭 십 년 전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는 책상 위의 전화기를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씨발,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연락이 없어. 지전수를 잡아오라고 시킨 나태한과 나다분 형제가 아무래도 못 미더웠다. 형사 시절에 알게 된 둘은 게으르고 행동이 굼떠 조직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한 놈들이었다. 이게 얼마짜리 계약인데. 박 사장은 그런 생각을 하다 순간 척추 위로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제기랄, 너무 빨랐다.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군. 박 사장은 실망한 표정으로 옷을 주워 입는 김 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곤 넓은 이마 위로 깊은 주름을 만들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박 사장이 지전수의 특별한 능력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술 때문이었다. 박 사장은 그날 도망간 베트남 여 종업원을 두 명이나 잡아다 준 답례로 다방 주인에게 거하게 술 접대를 받았다. 그리곤 다방 주인의 만류에도 박 사장은 기어코 차를 몰고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왼쪽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취한 그는 톨게이트로 가는 길 대신 가로등 하나 없는 지방의 국도로 차를 몰다 지전수를 친 것이다. 그러니까, 잠에서 깬 박 사장이 차에서 튀어나와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다짜고짜 지전수를 차에 구겨 넣은 것, 지전수를 싣고 영등포 사무실까지 내달리고, 대기하고 있던 나태한, 나다분 형제를 시켜 지전수를 사무실로 끌고 간 것도 모두 숙취 때문이었다. 박 사장은 사람을 치었다는 생각, 더욱이 음주운전을 했다는 사실에 겁을 먹고 지전수를 납치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박 사장은 그 일을 두고 정말로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판단이었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끝이 행복하면 다 좋다는 얄팍한 결과론. 박 사장이 그렇게 우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신의 뜻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지전수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도 박 사장은 지전수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학생,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끌고 가다시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혹 나중에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서였다. 박 사장은 싸구려 중화요리를 대접하며 지전수의 눈치를 살폈다. 흐릿하긴 해도 분명히 차로 친 기억이 나는데, 지전수는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이상하긴 했지만 박 사장은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만 더 지켜본 뒤 각서라도 받아 보낼 셈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일이 묘하게 흘러갔다. 새벽에 목이 말라 물을 찾고 있던 지전수를 도둑으로 착각한 나다분이 무식하게도 유리재떨이로 지전수의 머리를 내리쳐 즉사를 시켜버린 것이었다. 잠에서 깬 박 사장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있는 나다분을 한동안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구석에 앉아 담배만 피우던 박 사장이 기적을 목격한 것은 다음날 해가 뜰 때였다. 울다 지쳐 잠든 나다분 옆에 있던 시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떴다. 분명히 숨도 끊어지고 미동도 없었던 지전수는 마치 한숨 푹 자고 일어났다는 듯이 기지개까지 켰다. 박 사장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다시 한 번 재떨이로 지전수를 후려갈길 뻔했다. 그 바람에 잠에서 깬 나다분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박 사장의 머릿속으로 어떤 계시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신은 절대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박 사장이 누구보다 신의 존재를 가슴 깊이 새기게 된 계기였다. 이건 누가 뭐래도 신이 내린 기적이었다. 그것도 돈이 되는.
  그 뒤로 몇 번의 시험을 거쳐 지금의 사업 형태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전수가 어떤 상처를 입어도 일주일이면 회복된다는 사실을 안 박 사장은 먼저 성형의과의 한 명을 구했다. 불법 의료 행위를 하다 면허를 잃었지만, 솜씨는 좋은 의사였다. 그리고는 박 사장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은밀하게 소문을 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못된 직장상사를 죽이고 싶은 사람, 그냥 사람을 한번 죽여 보고 싶은 사람, 특이하게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거액을 지불했고, 지전수는 그들을 위해 그들이 원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몇 번이고 대신 죽었다. 삶보다 죽음을, 아니 죽은 모습을 더 원하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유일한 문제는 지전수뿐인 듯했다. 그는 점점 모든 감각을 잃어 갔다. 눈에 띄게 말수도 줄었다. 일을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무렵부터는 감각 대부분을 느끼지 않게 됐다.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된 건 오히려 다행이었지만 박 사장은 지전수가 혹 일을 그만둔다고 할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지전수는 얌전하고도 묵묵히 일을 해 나갈 뿐이었다. 곧 박 사장은 생각해 보면 지전수가 달리 갈 곳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고아. 그런 지전수에게 생계를 유지할 만한 다른 일은 없었다. 박 사장은 지전수에게 잠자리와 식사, 약간의 돈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밤에는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게 했다. 그러는 사이 박 사장이 버는 돈은 계수기를 동원해도 모자를 정도로 점점 쌓여 갔다. 박 사장이 보기에 세상은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3. 김순정은 설렌다.
  화장실에서 나온 김순정은 곧 지전수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전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화장실 거울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이 사람은 나카타가 아니야, 하고 되뇌었던 것도 소용이 없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서글서글한 눈매, 심지어 턱 밑에 있는 작은 사마귀까지 지전수는 김 원장의 아들 나카타의 모습 그대로였다. 김순정은 되도록 지전수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전수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꼭 가슴 속의 무엇인가가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순정은 고개를 돌린 채 택시를 불러 세웠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말했다. 제가 시내에 호텔을 예약해 두었어요. 오늘은 일단 거기서 묵고 내일 아침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 될 거예요.
  김순정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없이 앉아 있는 지전수의 옆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진짜 나카타가 요트를 타고 나간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모든 과정이 꿈처럼 희미하게 느껴져 다시 되짚어 보았다. 나카타가 실종된 지 육 개월이 지나자 그의 외할머니는 죽은 손자의 고추라도 만져야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병원의 소유자였던 외할머니는 손자의 시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병원의 소유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난감해진 사람은 바로 나카타의 아버지인 김 원장이었다. 김 원장은 가난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게이오 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사내였다. 김 워장은 초혼이었음에도 병원을 물려받을 생각에 애까지 딸린 이혼녀와의 결혼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철 지난 조선의 유교 윤리인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통해 자신이 배달민족의 후손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사내였다. 아내가 전 남편 사이에서 얻은 나카타의 죽음은 오히려 그에게 인생의 호재일 뿐이었다.
  결국 원장은 지전수를 이용해 나카타의 장례를 치렀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됐다. 성당에서 치러진 장례식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성대하게 이뤄졌다. 검은 리본을 단 수백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고, 나카타의 할머니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오열을 토해 내기도 했다. 하지만 김순정이 모든 사건의 전모를 깨달은 것도 장례식 날이었다. 그날 그녀는 박 사장과 김 원장이 아무도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나눈 말들을 모두 똑똑히 알아들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 원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박 사장과 세찬 악수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김순정은 사건의 전모를 확신할 수 있었다.
  김 원장은 나오코가 김순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 김순정이 보기에 원장은 그녀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김 원장이 김순정에 대해 몰랐던 또 다른 사실은 그녀가 한때 나카타의 연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김순정이 원장의 개인 변호사가 되던 해 여름, 법대생이었던 나카타가 과제를 핑계로 사무실에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비록 법학에 대한 나카타의 이해도는 끔직했지만 그럼에도 김순정은 그의 말투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나카타는 시종일관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고, 열정에 차 말을 이어 갔다. 정확하고 논리적인 말에만 익숙했던 그녀에게 그것이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 뿐만 아니라 나카타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순정에게 꽃을 자주 선물하고, 혼자 사는 그녀를 위해 종종 먹을거리를 챙겨 와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비록 나카타가 그들의 관계를 주변 사람들에게 감추려 하고, 때론 연락이 잘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나카타는 침대에서 달콤한 말을 잘했는데, 하얀 이불 속에 나란히 누워 나카타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런 게 바람둥이라니까! 다시 현실로 돌아온 김순정은 차창 밖의 짙고 푸르게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며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쓴웃음이 지어졌다. 김순정은 하늘 아래로 마치 온 힘을 다해 경계선을 지키려는 듯 빛나는 거대한 오렌지빛 도시로 시선을 옮겼다. 모든 것이 변하는데 도시의 야경만은 늘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지금까지도 어떻게 나카타가 자신을 버릴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카타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를 떠났다. 사랑해서 떠나는 거야, 같은 입에 발린 변명조차 없이, 서글서글했던 웃음 대신에 묘한 냉소만을 남긴 채. 사실 처음 나카타의 실종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온 세상이 발밑으로 꺼지는 듯했다. 그동안 그를 원망했던 자신의 모습을 질책하며 나카타가 살아 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다른 여자와 함께 실종됐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녀의 감정은 거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둘이 오래전부터 만나 왔고, 곧 결혼 할 계획이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순정은 곧 나카타가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순정이 나카타의 장례식에 간 것도 실은 마지막으로 그를 완전히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기 위해서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나카타를 다시 한 번 더 죽이고 싶을 정도였지만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분노와 원망을 순식간에 하나의 열망으로 변화시켰다. 그녀는 살아 있는 나카타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비록 나카타가 아닌, 나카타와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일 뿐임을 알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나카타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말하고, 만지고 싶어. 김순정은 여전히 자신이 나카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도. 그 사실이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그녀는 지전수를 위한 아무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밤 그와 함께 죽고 싶었다.


  4. 박 사장은 쫓는다.
  박 사장은 빈 담뱃갑을 신경질적으로 구겨 버렸다. 그는 점점 더 초조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번 계약은 날아가 버린 게 확실했다. 제길, 이번 건만 하면 죽을 때까지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사실 처음에 미국의 고객이 접촉해 왔을 때만 해도 박 사장은 자신의 사업이 지구 반대편까지 알려졌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했다. 이번 건만 잘 해결하면 앞으로 전 세계에서 돈이 굴러 오게 될 거란 생각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순식간에 상황이 돌변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건 오직 지전수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잃어버린 돈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지전수와 함께 그의 사업이 사라지는 건 더 큰 문제였다. 짜증이 인 박 사장은 일부러 김 비서가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그런데 지전수를 잡으라고 보낸 이 두 놈은 도대체 왜 연락이 없는 거야? 수사의 기본이 뭐야 중간보고 아냐 중간보고! 그러면서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드디어 전화가 울렸다. 형님, 일본으로 간 것 같은데요. 전화기를 받자마자 나태한의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사장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기 시작했다.
  네 시간 뒤, 박 사장 일행을 실은 차는 도쿄 시내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어두운 고속도로를 뿌옇게 비췄다. 박 사장은 이제 지전수를 찾으려면 원장의 변호사인 나오코라는 여자를 쫓아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전수의 비행기 표가 일본에서 결제된 것임을 알게 된 박 사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 원장에게 전화했었다. 원장은 전화를 받자마자 어제부터 자신의 변호사랑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순간 박 사장은 직감적으로 지전수와 변호사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장례식장에서 애써 눈물을 참고 있던 나오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그년 장례식장에서 질질 짤 때부터 이거 뭔가 있겠다 싶었는데, 역시 형사의 직감은 죽지 않았어, 하고 박 사장은 생각했다.
  한 시간이 걸려 도착한 시내는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반짝였다. 수천 개의 작은 전구가 만들어 내는 불빛들이 어두운 밤하늘을 밝혔다. 밤 열 시가 넘었는데도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박 사장은 나태한, 나다분 형제에게 주위를 잘 둘러보라고 일렀다. 저 수많은 사람 속에 지전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박 사장은 마음속으로 일단 도쿄 시내의 호텔부터 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 사장의 생각으로는 이 밤에 그 둘이 한가하게 시내를 돌아다닐 것 같지 않았다. 공항에서 먼 곳으로 이동할 리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둘이 무슨 사이지? 무슨 사이긴 무슨 사이야 젊은 남녀 사이지. 그럼 일단 호텔부터 뒤져보는 거야. 박 사장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득였다.


  5. 지전수는 혼란스럽다.
  지전수와 김순정은 시내의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말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던 김순정이 갑자기 배가 고프지 않느냐며 택시를 세우고 들어간 레스토랑이었다. 간판이 없는 외부에는 회색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모던한 느낌을 풍겼다. 내부로 들어서자 홀 한가운데에서 핀 조명을 받고 있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는 어른 키만 한 초록색 트리가 서 있었다. 너무도 평화로운 풍경. 지전수는 여유를 부리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잠자코 김순정의 말을 따랐다. 사실 아까부터 그녀의 표정이 계속 신경 쓰이기도 했다. 지전수가 생각하기에 김순정은 그의 얼굴을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그건 말하자면, 깊은 애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을 꺼리는 느낌이 역력했다.
  지전수는 식사를 하며 마주 앉은 김순정을 쳐다보았다. 김순정은 포크를 길쭉한 버섯 위로, 새하얀 스파게티 위로 움직이기만 할 뿐 거의 먹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골똘히 빠진 모습이었다. 가끔 눈에 띌 듯 말 듯 창백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가슴 뭉클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가슴속에 진흙처럼 가라앉은 무엇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지전수는 여자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미인과 함께 저녁 식사라니. 더군다나 크리스마스이브에. 꼭 김순정의 말처럼 지전수는 뜻밖의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왜 나를 따라왔어요?
  갑자기 김순정이 고개를 들고 물어왔다. 감상에 젖어 있던 지전수는 기습처럼 내뱉은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왜라니? 이곳으로 나를 데려온 건 당신이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무언가 기대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지전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록 여기까지 오자고 부추긴 것은 김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 그가 그녀를 따라나서야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지전수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처음에 박 사장과 일을 시작했을 때도, 보육원에 갈 때처럼 딱히 다를 것도 없어, 하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왜? 언제부터인가 들었던, 자신이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고,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실 생각이라기보다는 들려온다는 말이 정확한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전수의 머릿속은 그런 소리가 윙윙거렸다. 또 어쩌면 다시 살아날 때마다 들었던 생각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 지전수는 살아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몹시 혼란스러웠다. 왜 이런 몸을 갖게 되었는지도. 심지어 현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도쿄타워 가보지 않을래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아주 예쁜데.
   김순정이 다시 말했다. 마치 데이트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6. 김순정은 참을 수 없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 40분이었다. 도쿄 타워는 주황색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쿄 타워에는 전망대가 두 개 있었다. 일반 전망대와 특별 전망대로 구분되어 올라갈 때 타는 엘리베이터가 달랐다. 김순정은 지전수에게 묻지도 않고 특별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표를 두 장 샀다.
  타워 내부는 의외로 한산했다. 크리스마스 때문에 특별히 야간 개장을 하는 거라 값이 세배나 올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결국 단둘만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김순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매표소 옆에 있던 안내문의 내용을 되새겼다. 높이 333m. 무게는 약 4,000톤. 사용된 페인트의 양은 28,000리터. 매년 크리스마스이브 자정, 즉 크리스마스 당일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열린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문구를 되뇌던 김순정은 순간 자신이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책 없이 지전수를 일본에 데려오고, 나카타와 함께 갔던 레스토랑에서 지전수와 저녁 식사를 한 자신의 모습이 새삼스레 믿기지 않았다. 나카타가 죽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지금 나카타와 그랬던 것처럼, 지전수와 함께 도쿄 타워에 왔다.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 가슴속에 있는데, 그걸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갯속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듯한 막막한 기분. 확신할 수 있는 건 자신이 그 안갯속에서 끝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전망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을 보자, 그 공간을 메꾸려는 듯 김순정의 머릿속으로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억이 밀려 들어왔다. 그때는 열두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처음 한동안 김순정은 전망대 밑으로 투명한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흐르는 불빛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거대한 창 너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지전수, 아니 나카타는 갑자기 빨리 내려가자고 재촉했었다. 뭐 때문에 그러느냐고 묻는 김순정에게 나카타는 웃으며 불꽃놀이는 땅에서 봐야 멋있어,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가늘고 부드럽던 손의 감촉. 그런 순간들이 떠오르자 김순정은 왠지 모르게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 모든 일이 마치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어.
  김순정은 자신도 모르게 일본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더없이 침착하다고 믿었지만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며, 이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의미 없어졌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김순정은 손을 뻗어 나카타, 아니 지전수의 손을 잡았다. 나카타의 손과는 달리 곳곳에 굳은살이 박인 딱딱한 손이었다. 김순정은 나카타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래, 오늘 밤까지만이야. 이제 정말로 이것으로 됐어, 하고 김순정은 다짐하듯 되뇌었다.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웬일인지 손을 뿌리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는 지전수의 모습마저 그녀의 그런 생각에 말없이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나요?
  김순정이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7. 지전수, 아니 모두의 크리스마스
  호텔은 도쿄 타워 근처에 있었다. 예약된 방은 맨 꼭대기 층의 스위트룸이었다. 지전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자코 김순정의 뒤를 따랐다. 방에 들어선 김순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욕실에 들어갔다. 조금 전 자신의 손을 잡을 때와는 다른 차가운 몸짓이었다. 지전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나요? 라니. 물론 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죽는 건 지전수가 그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용과 달리 마치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듯한 김순정의 말투가 맘에 걸렸다. 더 알 수 없는 건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 도대체 도쿄 타워에는 왜 간 것인지, 자신의 손은 왜 잡은 건지 지전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전수는 크림색 이불이 깔린 커다란 침대 위로 자리를 옮겼다. 문득 왜 자신이 이토록 그녀를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호텔로 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김순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입 밖에 내는 순간 무너져 버리고 마는 어떤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지켜 내기 위한 의지라기보다는 체념에 더 가까운 무엇이었다. 마치 지전수가 어린 시절 처음 보육원에 갔을 때와 같이, 그러니까 아버지의 손을 꽉 잡고 좁은 길을 걸어가던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지전수는 자신의 양손을 꼭 쥐어 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전해져 오던 손길. 어쩌면 자신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김순정이 욕실에서 나왔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 모습이었다. 물에 젖어 색이 더욱 짙어진 갈색 머리와 가운 사이로 드러나는 희고 긴 다리가 눈부시게 느껴졌다. 문득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자와 호텔방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뭐 좀 마실래요? 하고 물으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는 김순정의 모습이 믿기지가 않았다. 지전수는 그녀의 목소리와 손길에서 짙게 배어 나오는, 떨림을 감추려는 의도를 느꼈다. 자신과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은 김순정의 하얀 목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맥주 캔을 부딪치며 김순정이 읊조리듯 말했다. 지전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순정이 살며시 자신의 머리를 지전수의 어깨에 기대어 왔다. 깜짝 놀란 지전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손을 뻗어 지전수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전수의 얼굴을 향해 입술을 내밀어 왔다. 한순간 지전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김순정은 입술이 닿자 이번에는 혀를 내밀었다. 지전수의 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지전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김순정은 자신의 혀를 지전수의 혀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빨기도 하며 지전수의 몸 위로 넘어졌다.
  지전수는 자신의 몸 위에 올라 귓가에 대고 작은 숨을 내뱉는 김순정이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셔츠를 밑자락부터 말아 올리고 있는 대담한 그녀의 몸짓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꼭 피가 빠져나갈 때처럼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그러면서도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가 마치 양피지에 새겨지는 쐐기 문자처럼 온몸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는 사이 김순정은 어느새 자신의 몸 안으로 지전수를 밀어 넣고 있었다. 머리를 살짝 숙인 채 양손으로 지전수의 허리를 잡고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전수는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몸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김순정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방 안에 자신과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김순정이 상체를 숙여 지전수의 귓가에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리고는 몸을 꼭 붙인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전수는 처음 김순정이 자신을 설득할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뜻밖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와 함께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 선물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지전수는 어쩌면 이것이 바로 그 선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런 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기분인 것일까.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인지 알면서도 이 밤이 마치 선물이라는 달콤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지전수는 이내 현실로 다시 빠져나올수 밖에 없었다. 김순정의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지전수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꽉 다문 그녀의 조그만 입에서 신음처럼 울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나를 용서해 주세요. 나를 용서해 주세요.
  지전수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김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목소리도 그녀의 작은 몸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엽다. 지전수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가엽다니!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를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김순정은 곧 울음을 멈추고 침대에서 몸을 빼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침대 옆에 놓아둔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작고 날카로운 송곳을 꺼냈다. 하지만 지전수는 분명 자신의 두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김순정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송곳을 휘둘렀다. 그녀가 세차게 내지른 송곳이 정확히 지전수의 양 볼을 꿰뚫었다. 때문에 지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엎어졌다. 지전수는 여전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김순정은 힘이 부치는지 왼발을 지전수의 얼굴 위에 지지대 삼아 송곳을 빼냈다. 그리고는 심장을 향해 깊숙이 송곳을 쑤셔 넣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안 돼, 내가 못 보내!
  김순정의 작은 입술에서 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전수는 또 다시 당황스러워졌다. 이런 것이었나.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왜 김순정이 지금까지 자신의 얼굴을 꼭 아는 사람처럼 보았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김순정은 자신에게서 나카타를 보고 있었다. 지전수는 평정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 수도 없이 겪어 왔던 일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렇게 오늘 일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녀는 지칠 때까지 나를 찌를 것이고 난 늘 그렇듯이 죽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내일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날 것이다. 아마도 잔금은 탁자 위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럼 난 유럽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곳에서 노천카페에 앉아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훌륭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번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여전히 그녀가 가엽게 느껴진다는 놀라운 사실 뿐이었다.
  김순정은 가운이 온통 피로 젖을 때까지 찔러 댔다. 하지만 지전수는 여전히 죽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가늘고 긴 숨이 목젖에서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았다. 김순정은 언제부터인가 되는 대로 송곳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팔, 손바닥, 베게, 침대 위로 송곳이 꽂혔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대신 그녀의 목에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소리, 신음과 흐느낌 사이의 어디쯤 속할 숨 막히고 목 졸린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전수는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송곳 끝에서 죽이겠다는 단호함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풀려버린 송곳을 팽개치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박 사장이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들어올 때의 기세와 달리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전수와 김순정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하던 박 사장은 곧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자신의 목에 송곳을 대고 방바닥에 앉아 있던 김순정이 갑자기 일어나 지전수를 꼭 껴안았다. 침대에 누운 지전수의 상체에 자신의 몸을 꼭 붙인 채 꼼작하지 않았다. 목덜미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길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박 사장이 김순정을 방바닥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지전수는 성한 나머지 한쪽 눈으로 김순정을 바라보았다. 빨간 가운을 걸친 채 방바닥에 너부러진 그녀에게서는 어떤 목적도, 희열도, 심지어 증오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방에 있는 것은 자신과 주인 잃은 연민뿐 어떤 대상도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벼락처럼 고통이 찾아왔다. 상처 자국 하나하나에, 흐르는 피 한 방울 속에 수년 동안 잊고 지내던 고통이 살아 요동쳤다. 온몸이 저마다 살아 있음을 소리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그 느낌이 너무나 강렬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것만 같았다.
  지전수는 고통이 심해 소리를 질렀다. 길고 무거운 소리였다. 지전수는 소리를 지르며 천장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혼이 나간 듯 쓰러져 있는 김순정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얼어붙은 박 사장 일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지된 화면처럼 미동조차 않는 그들의 모습이 문득 꿈처럼 느껴졌다. 지전수는 자신도 모르게 허공에 손을 뻗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게 되면 파리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예약해야겠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 거야. 새로운 것을. 깨고 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달콤한 피곤함이 밀려왔다. 창 밖에서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소리처럼 여겨졌다. 지전수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정말로 오랜만에 기분 좋은 상상에 젖어든 채로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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