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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안개 저편의 이상향

2006.03.23 10:4603.23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를 이상향이라고 부른다.

  에덴(Eden), 무릉도원(武陵桃源), 유토피아(Utopia) 등의 명사로 그것을 부를 수 있지만 단지 그것 뿐,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실체는 알 수 없다. 단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막연히 ‘아, 모두가 바라는 이상향이라는 곳은 이럴 것이다.’ 하고 추측되어 이야기 될 뿐이다. 불완전한 존재가 쌓은 블록이 완전하게 쌓였을 리가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 와르르 쓰러뜨릴 것이다.

  나는 토마스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를 읽으면서 이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중세적 사회 질서에서 근대적 사회 질서로 옮아가는 혼돈스런 변환의 시기에서 생기는 사회 모순의 반성과 문명에 대한 기대 때문에 유토피아를 쓴 동기라고 했다. 낙원이나 다름없는 곳, 이상향. 그렇다면 이상향이라는 곳은 있을까? 있다면 과연 어떤 곳일까? 그러다 이내 일어섰다. 도서관에서 읽은 단편적인 지식이 이상향에 대한 답을 줄 리가 없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것이 겨우 책 몇 권 읽었다고 머릿속으로 들어왔을 리가 없다. 나는 학교를 빠져나옴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다. 서적을 좀 더 뒤져보고, 일을 해야겠다. 돈을 벌어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흔적 탐구를 하러 여행을 나서보는 거다. 등에 맨 가방 끈을 홱 당겼다.

  서점에서 책을 나르고, 정리하고, 재고 파악하는 도중에도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몇 권의 책을 더 볼 수 있었는데, 정립된 견해로는 이상향이란 단지 허황된 상상의 대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상상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의견을 구해보았다. 공학도인 그는 즉시 대답해 주었다.

  “그런 거에 뭐 하러 파고 들어간다니? 쌀이 나온대? 돈이 나온대? 그건 이야기꾼들이 청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머리를 짜내어 지어낸 얘깃거리에 불과한 거야.”

  역시 공학도란 것인가 보다. 이상은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려는 성격임을 함께 일하면서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말에는 더 이상 신경 써 주지 않고 전공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하긴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 다르니까. 그는 미래의 꿈이 우주 공학자라고 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쌀과 돈을 원한다. 하지만 이상적으로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공 서적을 읽으며 공부한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길은 어떤 것일까? 지금은 목적을 이루는데 도와줄 수단을 최대한 손에 넣으라는 것이었다.

  이 개월 뒤에는 전부터 꼬박꼬박 모은 급여가 여행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이 되었고, 이상향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았던 예상지 중 한 곳인 고지(高地)를 찾았다. 그곳은 지구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이었다.  내가 도착한 날은 짙은 구름이 끼어있었다. 카트만두 공항에 내리니 멀리 하늘 아래에 상상 이상의 위용과 신비를 간직한 실체는 구름 속에 감추고 가슴 아래 배만 내놓은 거인이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예리하게 깎여진 우람한 어깨 위에 만년설을 얹고,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있는 거인들은 유구한 세월을 지내면서 자기 발밑으로 다니는 인간들을 귀여운 애완동물 내려다보듯 하고 있었다. 그 위엄은 함부로 대지를 딛는 생명이 자신의 몸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게 하였다. 가장 높고 위대한 산은 20세기 중반에야 겨우 몇몇 인간의 발자국을 허락하였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진치고 있는 현지 사람들이 자신을 고용해주지 않겠냐면서 달라붙기 시작했다. 달랑 배낭 하나 매고 온 나에게 벗겨 먹을 것이나 있을까? 그들은 관광객과 등산객을 상대로 안내인과 요리사, 짐꾼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갈 생활비를 벌고 있다고 가이드북에서 읽었다. 유감스럽게도 가난한 여행자인 나에게는 돈이 없었기에 그들을 간신히 뿌리치고 택시를 잡아서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안개가 짙게 끼기 시작했다. 시계가 전방 백 미터에 불과했다. 이곳 지리에 익숙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나이든 운전사도 길을 가는데 쩔쩔매고 있다. 증거로 속도가 부쩍 줄었다. 나는 중간에 내리겠다고 하고 요금을 지불했다. 이런 곳을 걸으면서 사람 사는 것 구경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었다. 매연이 심해서 준비한 마스크를 착용했다.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배낭 줄을 바짝 당겨 매고 천천히 걸었다. 양옆으로 서있는 건물들과 사람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동안 걷자 큰 사원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벽과 기둥을 잿빛 벽돌로 쌓았고, 하얀 돔을 얹었다. 돔 위에는 잿빛 첨탑이 가부좌를 틀고, 탑을 받치는 방형 사면체에는 독특한 눈 문양이 그려져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여기는 불교를 믿으니 저 눈은 중생들을 보고 있을 것이다. 정확한 명칭은 오기 전에 읽었던 가이드북에 있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원 관광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숙소부터 찾아야했다. 내 몸은 피곤해져 있었다. 잠을 좀 자고 싶었는데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야 있다는 숙소는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발걸음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운전사가 그려준 약도를 들여다보았지만 그림이 조잡하고 글자도 알아먹지 못해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참 헤맨 끝에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50대 쯤 되어 보이는 중년 주인아주머니가 이마의 주름에 친절한 미소를 담아 손님을 맞이한다. 5분쯤 틀어놓으면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샤워기와 자면서 구르지 않으면 무난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은 침대는 무시하고 곧바로 주변 지리를 익히기 위한 관광에 나섰다. 오늘은 피곤하기도 해서,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인근만 둘러보고 처음 보는 것은 사진을 찍어두었다. 내일은 산행이 계획되어 있어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가 좁아서 웅크리고 자야했다. 몸을 뒤척이면 다리가 침대 바깥으로 떨어지고, 다리를 따라 몸뚱이도 추락하려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간신히 잠든 것은 아마 자정이 넘어서였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독하게 짙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나는 도보로 등산을 하기로 결정했다.

  산 밑으로 가는 길에 앞서 가던 한 등산객이 물기 있는 경사 바닥에서 주룩하고 미끄러졌다. 얼른 손을 짚어서 넘어지지 않았지만 내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고는 창피한지 후닥닥 뛰어가 버린다. 아침인데다가 짙게 낀 안개 때문인지 땅이 축축해서 미끄럽다. 조심조심하면서 올라갔다. 오늘은 등산하는 이들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내 위로는 겨우 몇 명이 있고, 아래로는 외국에서 온 산악인 십 몇 명이 등정에 도전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 숨어버린 이름 모를 거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너무 꼭꼭 숨어버려서 일부러 안개 보자기를 꼭 붙들고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질 정도였다. 어쩌면 거인은 덩치 큰 오빠들 틈새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수줍음 많은 소녀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주인공은 머리 꼭대기가 산에서 가장 높은 나무 끝에 닿는 거인 소녀였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잃어서 우락부락한 오빠들 손에 자랐는데, 산 아래 마을에 살고 있는 똑바로 서서 팔을 올려도 자기 무릎에도 닿지 않는, 작지만 마음 착한 나무꾼 청년과 사랑에 빠졌고, 그들의 연애를 이야기하는 로맨스 동화였다.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배드엔딩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산에는 등산객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이 나있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 동안 이 위로 많은 원주민들과 야크들이 왕복하면서 만들어진 길일 것이다. 인공적인 면이 없진 않다.

  나는 자연에 사람 손때가 많이 가는 것을 싫어한다. 산과 들에 난 길은 오솔길까지는 봐줄 수 있지만, 현대식으로 포장된 길은 혐오한다. 몇 년 전에 지리산을 올랐다가 중턱에 아스팔트로 덮은 길을 보고 구역질이 난 적이 있었다. 자연 그대로인 길이란 물기 있는 부드러운 흙으로 덮여있고, 군데군데 자갈도 굴러다니며, 잡초도 돋아있으면 자연 속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덤으로 길가에 이름 모를 풀꽃도 피어있다면 금상첨화겠지. 사람의 손이 닿은 자연은 서서히 죽어간다. 밀도 높은 인공이 가미된 길은 죽은 길이다. 21세기에 지구 곳곳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수천 년간 불침(不侵)을 지켜온 높은 산들도 쉽게 굴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진 인간들에게는 정복당했다.

  나는 등산로 한 쪽에서 잠깐 쉬면서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고운 명주옷을 걸치고 희끄무레한 베일을 두른 성모는 하늘에 고하는 기도를 올리고, 산 아래 도시로 통하는 오솔길을 가는 야크 행렬은 새들의 날갯짓 소리에 고개를 든다. 시끌벅적한 도시는 안개에 덮였고, 나는 오랜만에 현대문명이 낳은 이기(利器)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대인은 문명이 낳은 이기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가 힘들다. 하지만 나는 적응력이 좋아서 시간이 흐르면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을 자신이 있다. 마음을 비우고 외부세계와 신경을 끊는다면 코뿔소 가죽으로 만든 끈에 묶인 것처럼 질기게도 인간을 속박하는 문명이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문득 원시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막연한 공상일지도 모르지만 원시의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던 것은 그다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시스템 같은 것에는 적어도 자유로웠을 것이다. 만약 현대인에 비해 자유로웠을 그들을 속박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오래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다시 올라가야한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떴다. 저녁때까지 산장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두운 산속에서 옴짝달싹 못한다. 주변 환경에 의해 철학적인 사색이 제한받는 것은 슬프겠으나 어쩌겠는가? 나약한 인간에게 주어진 불리하지만 조그만 조건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올라가는 발길을 서둘렀다.

  가이드가 없으면 힘들기는 하지만 스스로 찾아가는 즐거움을 알았으나, 외국에서 초행길을 혼자 움직이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다음 코스부터는 얼마를 주더라도 가이드를 고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전문 등산가도 아닌 아마 등산가가 히말라야를 뒷산 오르는 것처럼 하이킹하겠다고 나선 것은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알았다.

  짐작은 했었지만 가이드 고용은 산 아래에서 수배하는 쪽이 쉬운 것을 알았다. 중간 기착지인 산장에서 주인에게 가이드를 구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때가 성수기라서 공급이 수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올라오는 사람이 별로 적지 않았냐는 물음에 요 며칠간 등산객들이 돼지 떼처럼 북적였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결국 히말라야 여정의 끝까지 혼자 돌파하리라고 마음먹었을 때에 내게 말을 걸어오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하루 1달러에 히말라야 토박이가 질 좋은 가이드를 해주겠소.”

  갈색 피부에 풀 냄새, 나무 냄새가 풍기는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나무를 잘라다 파는 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중간키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고 있고, 맑은 눈빛이 선량한 인격임을 알게 했다. 나는 그 조건을 받아들여 청년을 가이드로 고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사는 마을을 거쳐 가면 더 인상 깊은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면서 그가 한 말이었다. 이곳 토박이라고 하고, 앞서가는 몸놀림이 무척 날렵한 것을 보면 산길을 한두 번 타지 않았을 싶으니 전적으로 가이드의 말을 믿기로 했다. 안개는 이틀이나 짙게 끼어 있었다.

  히말라야여. 무엇이 부끄럽기에 나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냐. 나는 안개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얼마 후에 되돌아온 메아리는 오히려 히말라야가 자기를 뵈러오지 않는다고 날 호통 쳤다. 오만한 작은 알현자의 태도에 왕은 두꺼운 휘장을 치고 돌아앉은 것이다.

  정오가 넘었는데도 안개는 걷힐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 청년도 유달리 짙은 안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처럼 짙은 안개는 일곱 살 이후로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험한 길을 가기도 하고, 평탄한 길을 가기도 하면서 늦은 오후 즈음에 가이드가 산다는 마을에 도착했다.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가운데의 분지에 집 예닐곱 채가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촌락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야크 한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나무 상자들과 야크 가죽을 잇대어 쌓아놓은 곳이 있는데, 왠지 그 뒤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마치 직감적으로 어디론 가로 통하는 길이 있는 것만 같았다. 나의 시선은 그쪽을 향해 있는 것을 가이드가 알고 나를 불러서 집으로 안내했다.

  마을의 집은 풀과 흙을 이겨서 벽을 만들었고, 지붕은 긴 억새로 이은 것이 마치 조선 시대의 초가집을 보는 듯 했다. 가이드는 나를 그중 가장 작은 집으로 안내했다. 혼자 살고 있다는 그는 슬슬 신부를 맞아들여 집을 넓게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멋쩍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집안은 비좁은 편이었지만 방 중앙에 있는 화덕에서 불씨가 남아있어서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고, 작은 창문으로 저녁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 아늑했다. 가이드가 화덕에 솥을 걸고 야크 죽을 끓이는 사이에 나는 잠시 밖을 둘러보았다. 죽을 담은 솥에서 김이 피어오를 즈음에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을 주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야크 떼를 몰고 들어오고 있었다.

  가이드가 먼저 나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들은 기쁜 표정으로 기꺼이 오랜만에 찾아온 외부 손님을 환영하겠노라고 해서 나는 귀한 손님 대접을 받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 한 노인이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이 저절로 노인을 향하게 되는 것 같았다. 수수께끼의 흡입력이다.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되셨소? 동쪽에서 온 젊은이.”

  노인이 내게 묻는다. 점쟁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내가 동쪽에서 온 것을 알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내 목적을 사실대로 말했고,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는다. 노인이 좌우를 둘러보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필 왜 여기에 오셨소? 젊은이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좀 더 멀리, 높은 곳을 찾아가야하지 않겠소?”
  “이상향이라는 곳이 꼭 외진 곳에 있다고는 생각 않습니다. 어느 농부가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 먼 길을 떠났는데, 결국 못 찾고 허탈해져서 돌아오는 길에 눈앞에 떨어져 있는 것을 집어 들고 보니, 그곳이 처음 출발점이었다는 우화도 있지요.”

  노인은 혀를 끌끌 찬다.

  “그렇게 말하면 젊은이가 원하는 이상향을 찾는 의미가 없지. 자네 말대로라면 지금 여기도, 자네가 사는 곳도 이상향이라는 곳이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사람 마음먹기 나름이지.”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노인의 성함을 물었다.

  “촌로의 이름을 알아 무엇 하려고? 산중노인(山中老人)이라 부르시게.”

  그러고 마을 반대편으로 가는데 노인의 나이는 80세쯤으로 보이지만 허리는 꼿꼿했고, 지팡이를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가는 발걸음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저 노인은 이 마을뿐만 아니라 산 아래까지 알려진 괴짜 노인이라고 한다. 노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고무줄 당겨지듯 늘어나고 있었다.


  밤이 되자 잔혹한 보름달이 뜨고, 산들은 은색 후드를 뒤집어쓴다. 이름 모를 새가 밤하늘에 시위하듯 울어 젖히며 몇 번 날갯짓하면서 남쪽으로 날아가고, 깊은 산속에는 있을지도 모르는 늑대의 여린 울음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안개가 서서히 걷혀지고 있었다. 이틀째 밤에야 겨우 별이 얼굴을 내밀었다. 얼굴을 가린 거인들도 지금껏 두르고 있던 베일을 걷어낸다. 내일은 정말 얼굴을 보여 달라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아직 어둠이라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다.

  마을을 가볍게 한 바퀴 돌았는데, 나무 상자가 가득 쌓여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소리를 죽여 가며 부근을 조사했다. 우선 상자들은 나무로 짜 만든 평범한 상자이다. 두들겨보니 밑에 놓인 몇 개를 빼놓고 안은 텅 비었다. 위를 덮은 짐승 가죽은 야크 가죽을 벗겨서 말린 것이다. 옆으로 돌아가 보니, 작은 틈새가 있고 거기에서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 뒤에는 분명 넓은 공간이 있거나, 어디론가 통하는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상자들을 밀어 틈새를 만들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쌩쌩 거리고 불어오는 찬바람이 무척 차가웠다. 겨울이라서 두껍게 입고 온 점퍼의 솜마저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은 순식간에 피부를 거북 등처럼 트게 했다. 양 옆은 높은 절벽인데 나를 덮치려는 산속의 거대한 괴물처럼 생겨서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경사가 급한 지형은 대지를 걷는 생명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걸어갔다.


  나는 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눈은 비비고, 생살도 꼬집어보았으나 이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내 눈 앞에는 지금으로는 도저히 논리나 과학, 철학 따위로는 설명이나 논증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에베레스트보다도 높아 보이는 산이 일곱 빛깔 목도리를 두르고서 의젓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고, 발치에 펼쳐져 있는 끝없는 벌판은 생명을 머금고 있지는 않았지만 정숙했다. 처녀지라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 지구에서 몇 남지 않은 순결한 땅이다. 나는 발을 내디디는 것을 망설였다. 과연 나 자신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가졌다.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 위에 태양이 떠있는데, 한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치우친 쪽은 밝았고, 그 반대쪽은 그늘이 져서 어두웠다. 밝음과 어두움. 마치 선과 악을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보지 않으면 굉장히 후회할 것 같아. 손해 볼 짓은 하지말자.”라고 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대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즉각 차고 센 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어찌나 시기적절하고 차가운지 날 쫓아내려고 하는 바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바보 같은 젊음이란 위기 상황에 처할수록, 장애물이 많을수록 오기가 치솟는다.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이를 갈면서 내기하자고 외치면서 힘껏 걸어갔다. 어찌되든 간에 걸어가고 보는 거다.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산 밑에 도달했을 때, 이 황황한 벌판에 작은 나무들이 존재하고 있다. 거기에서 쭈그려 앉은 채 나무들을 돌보고 있는 산중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노인이 뒤돌아본다. 주름 잡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오는 데 힘들지 않았나? 젊은이.”

  올 때까지의 느낌을 말하니, 노인은 허허 웃으면서 바로 맞혔다고 말한다.

  “무척 수줍음 많은 처녀가 길 잃은 외지인이 묵어가기 위해 집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네. 나야 아버지 같은 자라서 괜찮지만 말일세.”

  노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왜 이곳에 나무를 심는 것이냐고 묻자, 노인은 늘그막에 취미 삼아서 하는 것이 첫째 이유라고 했고, 딸을 위해 심는 것이 둘째 이유라고 대답했다.

  부근에 묘가 있었다. 노인이 그것은 자기 딸의 묘라고 말했다. 이 산과 땅은 자기 딸과 같다고 흙을 한 줌 쥐면서 쓸쓸한 목소리로 당장 입을 열 것 같지만 더 말하지 않는다.

  노인은 자리에서 손을 털고 일어나면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한 번 깊이 빨아들이면서 나를 돌아보고 예정한 목표를 이룰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자신감 있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노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꿈은 허황된 뜬구름 잡기라며, 그만 둘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해가 올라오기 전에 가장 어두운 새벽이 찾아왔다. 가련한 빛을 내고 있는 샛별만이 달도 저문 새벽하늘의 주인이 되어있었다. 어디에선가 새가 슬프게 목청껏 울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의 추위를 가장 밝게 보이는 샛별에게 호소하듯이 목을 길게 뽑고 울고 있었다.

  “힐단새는 밤에 추위에 떨면서 아침이 되면 반드시 집을 짓겠다고 다짐하지만, 날이 밝으면 까맣게 잊고 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추위에 몸을 웅크리지. 자네와 닮지 않았는가?”

  노인은 껄껄 웃는다. 새가 목을 길게 뽑아 한 번 울부짖었다.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산들이 실은 황금 산이 아닐까하는 착각을 했다. 산들이 덮은 흰색 외투에 반사된 햇빛은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되어 황금박지를 덮어놓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해가 뜨자 좀 전까지 울부짖던 새는 울음을 그치고 언제 울기라도 했냐는 듯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산봉우리 너머로 큰 새 하나가 날아오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헛걸음을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노인이 말한다.

  “너무 그렇게 애통해 할 것 없네. 자네는 다른 곳의 삶을 보았네. 앞으로도 좀 더 세계를 보게.”

  이런 저런 꿈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바스러지는 것을 느낀 나는 툭 한 마디 내뱉었다. 할아버지 같은 노인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애통해 하지 않았습니다.”

  노인과 함께 마을로 돌아온 나는 더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가이드에게는 집히는 대로 달러를 쥐어주고 짐을 꾸려 산을 내려갔다. 덕분에 공항에서 곤란을 겪긴 했지만 어찌어찌 위기를 넘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꿈을 꾸는 것은 멋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은 정말로 멋있다.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알고는 다른 곳에 관심을 돌려서 힘을 쏟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앞 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것은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 같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살지만 바보스러움을 덕지덕지 뒤집어쓴 이상주의자 같기도 하다.

  비행기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히말라야는 나를 전송하려는 듯이 어둠이라는 모자도, 안개라는 베일도 벗어던지고 얼굴을 환히 내비쳐 보이고 있었다. 거인 소녀가 손수건을 흔들어 작별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할까? 우선 다시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세계를 빙 돌을 것이다. 젊음은 두 번 다시 오지 않고, 신들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고국으로 돌아와서 한 달 후에 다시 서점으로 재 출근했다. 공학도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꽤 질긴 친구이다. 손님 없는 시간에 공학 서적과 그의 절친한 친구 공식과 씨름하고 있던 그는 내가 다시 출근한 것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영영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는 한 번 빙긋 웃어 보이고 일을 시작했다. 전보다 빠르고 생기 있는 손놀림으로 책을 정리하는 나를 보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공학도가 묻는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아. 그뿐이야.”

  일하는 것이 배는 즐거웠다.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었다. 어찌되는 간에 천천히 계단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것은 쉽고 빠르게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해준다. 과속하는 차는 교통사고가 날 확률이 매우 높고, 밥을 빨리 먹으면 체하며, 남녀 간에 관계가 너무 빠르면 책임질 일이 불어난다.

  다시 언제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밑부터 단단히 접착제를 발라가면서 쌓는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휩쓸어도 쓰러지지 않는 모래성을 쌓는 비법’이라고 명명하면 좋을 테지. 서점에는 큰 거울이 하나 설치되어 있다. 떠나 올 때, 거인 소녀와 산들은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공학도가 미친놈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거울에 대고 미소를 흉내 내 보았다. 아, 고놈 참 잘생겼네.
나길글길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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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3.27 09:42 댓글 수정 삭제
    끝에 산신령님이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좀 신소설 느낌이기는 했지만, 뭔가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경건한 맛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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