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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당직

2019.08.07 20:4408.07

아광속 우주선의 가장 깊은 곳, 파둘라의 동면튜브가 백 년만에 꿈틀거렸다. 강화유리 너머로 보이던 불투명한 액체는 썰물처럼 밀려내려가고, 아직 잠들어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한없이 반짝이던 동면튜브의 계기판이 마침내 초록불로 가득찼다. 백 년에 단 하루, 파둘라의 당직이 시작된 것이다.

파둘라는 튜브에서 나오자마자 맞은편에 있는 벨라의 동면튜브를 확인했다. 돌고래호의 유일한 동승자는 오십 년 전에 당직을 마지고 곤히 잠들어있다. 이제 또 오십 년이 지나면, 이번에는 벨라가 일어나 파둘라를 확인해 줄 것이다.

벨라의 튜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파둘라는 튜브의 강화유리를 어루만졌다. 불투명한 고립액 너머로 동승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우주선 안에서의 기억은 고작 한 달도 채우지 못했는데, 파둘라는 벨라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파둘라는 한참동안이나 강화유리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다.

 

파둘라는 비틀거리며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서랍 앞으로 다가갔다. 오랜 동면은 항상 근위축증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힘겹게 서랍문을 열고서도 파둘라는 알약을 찾는데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그건 벨라가 근육보강제를 먹고나서 아무렇게나 던져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를 것이다.

그토록 찾아 헤맨 근육보강제는 타이레놀 사이에 쑤셔넣어져있었다. 파둘라는 떨리는 손으로 붉은 알약 하나를 입에 털어넣었다. 약효가 돌기까지는 10분이나 남았고, 파둘라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작은 창 너머로 드넓은 우주가 보이는 자리였다.

아직 지구에 있었을 적, 벨라는 자기 손바닥보다 작은 이 창을 넓히려고 애를 썼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안전문제를 운운했고, 이마저도 관광용이 아니라 카메라 고장시 시야 확보용이라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한 치도 넓어지지 않은 창을 파둘라는 멍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 우주선이 이백 년 전에 거시공동 (Void)안으로 진입한 이후로, 풍경은 꽤 단조롭게 변했다. 파둘라는 묘한 인상을 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이백 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무것도 없는 거시공동을 지나쳐왔다는 사실이 신경쓰였을 것이다.

 

근육보강제의 약효가 온 몸에 돌 무렵, 파둘라는 그 손바닥만한 창에 거의 얼굴을 붙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몸은 예전처럼 돌아왔고, 당직 근무를 설 시간이 돌아왔다. 파둘라는 착찹한 표정으로 일어나 항행실로 향했다. 아까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모니터들이 오직 검은색을 빛내고 있었다.

파둘라는 의자에 앉자마자 항해기록을 열어보았다. 작은 모니터에는 우주선의 현재 속도와 항행 거리, 경과 시간이 나타났다. 광속의 90%에 달하는 속도를 수천년째 유지중이지만, 목적지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 있었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파둘라의 손가락에는 불안감이 스며들어있었다. 하루 밤 자고 일어나면 90광년을 움직이는 여행이지만, 이해할 수 조차 없이 넓은 우주에서는 아기가 아장거리는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파둘라를 휘감은 것 같았다.

벨라가 잠든 후 오십 년 동안 쌓인 로그에도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파둘라는 이 모든 것에 질려버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당직이 끝나면 백 년 동안은 잠들겠지만, 파둘라의 머릿속에는 휴일 하루 없이 내리 수십 일을 일한 기억 뿐이다.

파둘라는 죄없는 패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벨라를 깨울지도 모를 정도로 큰 소리가 났지만, 강화 티타늄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점이 파둘라를 더욱 화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또 백년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간다는 사실이.

이제 파둘라의 일은 모두 끝났다. 다시금 동면튜브로 들어가 백설공주처럼 잠들 일만 남아있을 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먼 훗날 잠을 깨우는 것이 왕자의 키스가 아니라, 파둘라의 체중에 맞게 잘 계량된 각성제라는 점 뿐이다.

파둘라는 치과에 가기 싫은 아이처럼 두 발을 질질 끌어가면서 자신의 동면튜브 앞에 도착했고, 저번 당직때에는 보지 못했던 포스트잇 한 장을 발견했다. 벨라의 글씨였다:

 

[근육보강제는 타이레놀옆에 놨어.]

 

볼펜으로 눌러 쓴 그 짧은 글귀를 파둘라는 한참동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천천히 젖어들어갔고, 결국 파둘라는 흐느끼며 주저앉았다. 그 자리에서 끅끅거리며 눈물 흘린 파둘라의 표정은 한결 개운해보였다.

파둘라는 훨씬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항행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 개나 되는 서랍 안을 휘저은 후에야 볼펜 한 자루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파둘라는 포스트잇의 글귀 아래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글씨를 써내려갔다.

 

[볼펜은 의자 위에 둘게.]

 

항행실에서 걸어나온 파둘라는 우주가 잘 보이는 의자 위에 볼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동면실로 돌아가 벨라 앞에 섰다. 강화유리에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파둘라는 수천년만에 처음으로 키득거렸다. 어쩌면 벨라도 파둘라 자신처럼 볼펜을 찾아 헤메진 않으려나 하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수십 번의 당직처럼 이제는 다시 깊은 잠에 들 시간이 돌아왔다. 오십 년이 지나면 벨라가 일어나고, 또 오십 년이 지나면 파둘라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파둘라는 이제 썩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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