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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바이칼 Baby - 3

2017.08.18 20:5108.18

옴스크 정부 붕괴

 

볼셰비즘 확산을 우려한 연합국들은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보루인 옴스크 정부를 지지했다.

그 지지는 국제연합군과 체코군단의 옴스크 백군 지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깔끔한 군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국제연합군에 비해 산적처럼 지저분한 복장의

무질서한 체코군단은 옴스크 정부의 수장인 고상한 러시아 귀족 콜챠크의 기분을 잡치게 했다.

그래서 연합군은 손님으로 예우 받은 반면에 떨거지 용병집단으로 취급된 체코군단에게는

불편한 잠자리에 부실한 보급이 돌아갔다.
시베리아 최강의 무력집단을 괄시한 그 어리석음은 불과 수개월 만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콜챠크 자신이 체코군단에 체포되어 붉은 군대로 넘겨지는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이니.... 

갈등은 또한 연합군 진영 내부에도 싹트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현격히 많은 병력을 보낸 일본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동부 3주(연해주, 흑룡강주, 바이칼주)에 괴뢰국을 세우려는 것은 아닌가?

   옴스크 정부지원도 결국은 그 괴뢰국과 소비에트 사이의 완충 지대로 삼겠다는 속셈은 아닐까?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꿰뚫어 본 자못 예리한 통찰이었다.

연합국 외교관들 역시 개연성이 충분한 의문이라며 끄덕였다.

그래서 옴스크 공방전에 나선 연합군은 무척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프랑스 참모부는 체코군단을 전투에서 아예 열외 시켜버렸다.

보다 못한 일본군이
“왜 체코군단을 투입하지 않는가?” 항의하자
“체코군단을 콜챠크와 바꿀 수는 없다.”는 싸늘한 답변만 돌아왔다.
출병목적은 어디까지나 체코군단 구출이지 적백내전에 끼어들어 백군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재확인한 셈이었다.

 

그 동안 옴스크 정부가 상대해온 것은 혁명 초창기의 허약한 적위대에 지나지 않았다.

파르티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그들은 중화기로 무장한 러시아 정규군과

막강한 코사크 기병대로 편성된 백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연히 백군은 승승장구했고 사령관 콜챠크에게는 불패의 제독이라는 찬사가 바쳐졌다.
그 명성에 혹한 귀족들과 정교사제단, 지주들은 가족과 패물을 챙겨

옴스크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막강 백군의 아성, 옴스크는 붉은 재앙의 피난처였고

믿음직한 노아의 방주였다.

덕분에 호황을 맞은 옴스크 시가지는 소비에트의 박해를 피해

몰려든 제정러시아 고위인사들로 성시를 이루며 연일 흥청대고 있었다.

 

그러나 10월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프룬제 장군의 붉은 군대가 옴스크를 포위한 것이다.

볼셰비키의 독보적 군사이론가 프룬제는 트로츠키와 함께

부실한 적위대를 강력한 붉은 군대로 재편한 핵심당원이다.

이윽고 1개월 남짓한 공방전 끝에 옴스크는 붉은 군대에 함락된다.
국제연합군 8만과 체코군단 5만이 가세해 한층 막강해진 진용에도 불구하고

지휘체계 혼란이라는 자중지란을 맞은 옴스크 정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체코군단이 내준 시베리아 열차덕분에 간신히 옴스크를 탈출한

백군 고위층과 옴스크 정부요인 그리고 연합군 수뇌부는 이르쿠츠크로 피신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패전책임이 거론되는 바람에 연합군과의 관계가

사뭇 불편해진 콜챠크는 일본군 특무대의 보호를 요청했다.

콜챠크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비록 사면초가에 몰려 보호는 받을지언정 일본군 또한 믿기 어려운 상대일 뿐.

그래서 그의 마지막 희망인 군자금 마차는 기차를 타지 못한 백여만 명의 피난민들,

그리고 25만의 장병들과 함께

그해 따라 유난히 혹독한 한파가 밀어닥친 시베리아 벌판으로 떠났었다. 
 
바이칼 가는 길 2

 

또 하루의 지옥 같은 밤이 지났다.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던 피난대열은 이윽고 바이칼호수 기슭에 이르렀다.

마차가 다닐 만큼 두텁게 얼어붙은 호수에 반사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묵묵히 멈추어 선 사람들은 드넓게 펼쳐진 아득한 얼음벌판 너머로

두려움에 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삐에르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나온 벌판은 온통 눈으로 덮였었다. 그런데 왜 호수에는 쌓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호수에서 몰아치는 사나운 광풍에 얼굴을 한 차례 얻어맞자

의문은 바로 풀렸다.

드센 바람이 쓸어낸 것이었다.

맹렬한 바람이 두터운 빙판을 휩쓸며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큼지막한 눈더미에 연마된 빙판은

톱밥으로 밀고 문지른 뻬쩨르부르그의 무도회장처럼 매끄러웠다.

그 위를 걷기는 땅 위보다 아마도배는 힘들 것이리라.

 

호수바딕에 짙게 깔린 냉기는 옴스크를 떠난 이래 겪어온

그 어떤 추위와도 달랐다.

그것은 도저히 이 세상의 기운이 아니었다.

악의에 찬 사신死神이 뿜어내는 독하고 음습한 저승의 냉기였다.

과연 이 속을 무사히 지나 호수를 건널 수 있을까?

서리로 하얘진 눈썹과 고드름이 주렁주렁한 수염으로 덮인 얼굴들에

절망과 두려움이 서서히 번져간다.

그러나 지난 한 달간 지옥을 경험해온 그들에게는 이제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자라나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겪어온 그 지독한 고난보다 더 심한 고난이 설마 또 있으랴!

 

 

“아악...!!”
호숫가의 암울한 침묵을 깨뜨리며 새된 비명이 사람들의 귀청을 울렸다.

타티아나였다.
화들짝 놀란 삐에르가 썰매를 들여다보며 외쳤다.
“겁내지 마, 타냐. 나 여기 있어.”
“아으~ 흐흐흐 여보, 아기가... 아기가 지금 나오려고 해요.”
고통과 두려움에 지친 타티아나는 아이처럼 소리 내 울고 있었다.

드디어...!

내내 두려워하던 순간이 드디어 닥치고 말았다.
혹한 속에서 맨살을 드러내면 바로 동상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삐에르는 절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만 지을 뿐 말을 아꼈다.

 

저만치 떨어져있는 짐마차 부대가 삐에르의 눈에 확 들어왔다.

나무궤짝을 잔뜩 실은 마차 호위대의 코사크 기병들은 출발 이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마차 주변에는 얼씬도 못하게 막아서곤 했다.

지금 삐에르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불을 피워야 한다. 불을...! 저 궤짝들을 태운다면,“

 

삐에르는 코사크 기병에게 다가갔다.
“따와리쉬(동무),  6연대의 삐에르 대위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아내가 산통을 겪고 있소이다.

어떻게 땔감을 좀 구할 수 없을까요...?”
눈만 껌벅이던 코사크 장교는 난처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애원하는 삐에르와 통곡하고 있는 타티아나를 묵묵히 바라보던

코사크 부대 지휘관 이반 대령이 뚜벅 말했다.
“막심, 짐마차 하나를 비워라. 땔감으로 해체한다.”
놀란 표정의 한 장교가 나서려하자 손을 들어 제지한 이반 대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책임은 내가 진다.”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들 이보다 더 반가울까?
“고맙습니다. 대령님”
감격한 삐에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순식간에 해체된 짐마차는 땔감이 되어 타냐의 썰매 옆에 쌓였다.
“상자들로 바람막이 벽을 쌓아라.” 이반이 지시했다.

 

모닥불을 본 사람들은 먹이를 본 아귀 떼처럼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진통을 겪는 산모가 있어요. 제발 좀 물러서주세요.”
삐에르가 호소했지만 군중들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병사들이 공포까지 쏘며 위협하자 겨우 물러섰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모닥불에 겨우 몸을 녹인 타티아나는

모피외투를 벗겨달라는 시늉을 했다.

이미 말조차 어려운 중태였다.

 

“출산을 도와주실 분이 계시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삐에르가 외치자 병사들에게 밀려났던 군중 속에서 주춤거리며

부인 두 명이 나섰다.

잠시나마 곁불을 쬘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 그녀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철모에 눈을 담아 와라. 물을 끓여야 한다.” 
막심이 코사크들에게 일렀다.

 

산통은 좀체 끝나지 않았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며 추위에 시달린 탓이리라.

아니, 어쩌면 아기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으로 나오기 싫은 것인지도 모른다.

짐마차 한 대를 부순 땔감이 바닥날 때까지도 아기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저 궤짝들을 땔 수는 없을까?
 하지만 아마도 귀중한 무엇이 들어있겠지.’
절망에 빠진 삐에르는 대령을 힐끗 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반 대령도 표정이 점점 심각해진다.

이윽고 신음하듯 명령했다.
“막심, 짐마차 한 대를 더 비우게.“

 

“대령님!” 지켜보던 부관 드미트리가 비명처럼 외쳤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대령님.”
이반은 부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봐, 책임은 내가 진다 하지 않았나?”
그러나 차돌처럼 야무지게 생긴 드미트리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형식상의 직책은 부관이지만 진짜 임무는 콜챠크의 심복장교들로 편성된 직할대를 인솔해

수송대를 감시하는 것. 
“대령님, 저는 특명을 받았습니다. 이 임무에는 옴스크 정부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이반 대령은 허탈하게 웃었다.
“콜챠크의 특명... 이란 말이지?
 수십만의 인민들을 얼어 죽게 한 콜챠크 각하의... 흐흐흐”

 

존칭조차 붙이지 않으며 자신의 우상인 콜챠크를 비아냥대자

격분한 부관은 대뜸 권총을 뽑아들었다.
“이반 대령, 옴스크 정부수반 콜챠크 제독 각하의 이름으로 당신을 체포한다.”
순식간에 기병총을 장전한 러시아제국 장교들이 이반을 에워싸며 총구를 겨누었다.

동토 속의 가녀린 희망처럼 타오르던 작은 모닥불 주변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귀청을 쩌렁 울리는 노성이 터져 나왔다.
“어떤 곰 투가리 새끼가 감히 우리 아타만을 체포하겠다는 거냐!”
덮개가 벗겨진 짐마차에서 모습을 드러낸 맥심 기관총이

드미트리와 장교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 뒤로 5연발의 모신나강 소총을 꼬나든 막심과 코사크 대원들이

살기를 뿜으며 버티고 서 있다. 

 

짐마차의 궤짝들은 짜르의 군자금인 로마노프 금화였다.

보안유지에만 급급했던 콜챠크는 러시아 정규군 대신

코사크 기병대를 수송부대로 차출했었다.

그러나 이는 코사크식 전통이나 기질에 무지한 해군출신 콜챠크의

치명적 실수였다.

코사크들은 주로 강을 낀 마을들에 거주했기 때문에 강 이름 또는

강 근처 도시이름을 붙여 부족을 구분한다.

우크라이나에는 자포로제 코사크들이 살았고

러시아에는 돈 코사크, 볼가 코사크, 예니세이 코사크, 시비르 코사크 등이 있다.
인근 마을 또는 같은 마을출신인 부대원들은 거의가

친인척 아니면 친구 사이이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일단 유사시에는 조직의 명령보다 혈연이나 지연을 더 우선시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부대장 이반을 대령이라는 계급대신 아타만(두목)이라고 불렀다.

이 또한 끈끈한 정으로 결속된 코사크식 문화의 표현이었다.

 

살아온 배경과 문화가 판이한 그들과 러시아 정규군의 귀족장교들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다. 게다가 옴스크 출발 이래 지금까지 벌어진

참상을 목격한 코사크들의 마음은 이미 옴스크 정부로부터 천리만리 달아나 있었다.

기관총을 겨누며 포위한 병사들의 험악한 기세에 질린

직할대 장교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임무를 버리면 군법회의 감이다. 너희는 돌아갈 곳마저 사라진다.
그래도 항명하겠는가?”
막심은 가소롭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건 댁들 사정이겠지. 백군이고 적군이고 우리한텐 다 그놈이 그놈이야.

의리없는 자식들. 이번에 노는 꼬라지를 보니까 콜챠크는 싹수가 노래.

인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식이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성과 함께 기관총좌의 병사가 썩은 짚단처럼 폭삭 무너졌다.

다음 순간 날쌔게 달려든 직할대 장교들이 쓰러진 병사를 밀쳐내고 기관총좌를 차지했다.

 

“수미노프!!”
몇몇 병사가 절규했다. 일제히 소총을 쳐든 코사크 대원들이 기관총좌의 장교를 겨누었다.
다음 순간 맥심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댓 명의 병사들이 말굽에 채인 것처럼 펄쩍 튀어 오르며 쓰러져갔다.

격분한 병사들의 대응사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작은 엄폐물조차도 없는 허허벌판에 노출된 그들이

분당 8백발을 쏟아내는 기관총에 맞서기란 무리였다.

병사들이 짐마차 뒤로 숨자 우박처럼 쏟아진 총탄이 짐마차의

궤짝들을 박살냈다.

삽시간에 조각조각으로 부서진 두터운 나무파편과 함께 반짝이는 노란 금속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음 순간...
총성이 뚝 그치며 벌판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바닥에 무더기로 쌓이며 사방으로 흩어진 금화들을 본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천천히 짐마차로 걸어간 이반이 허리를 굽혀 금화 한 닢을 집어 들었다.
“흠, 로마노프 금화로군. 그러니까 이걸 옮기는 게 아기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지?”
이반은 드미트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대령님. 하지만 이건 군자금입니다. 반드시 이르쿠츠크에 전달해야 합니다.”
이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군자금이라...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지켜야 할 인민들은 이미 다 얼어 죽지 않았는가?”

무골호인처럼 늘 미소만 감돌던 이반 대령의 얼굴에 보기 드문 분노가 확 피어올랐다.

 

코사크 병사들은 숨을 죽였다.
돈이나 규칙 따위보다 인간과 의리를 내세워 온 아타만.
여간해서는 화내지 않는 자애로운 아타만,
하지만 일단 분노하면 악귀처럼 무섭다는 소문이었다.
“지금 우리한테는 말야,”
버럭 하는 것과 동시에 빼어든 이반의 권총에 기관총좌의 두 장교는

단번에 이마를 관통 당했다. 단 두 발로 두 명을 명중시켰다.

코사크 치고 명사수 아닌 자는 드물지만 지금 보인 솜씨는

그 중에서도 드물게 빼어난 사격술이었다.
아타만의 단호한 태도에 기세가 오른 코사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눈치 빠른 병사 두 명이 잽싸게 뛰어나와 기관총좌를 차지했다.
“금덩어리 따위보단 땔감이 훨씬 더 중요해.”
벌겋게 달아오른 이반이 울부짖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짐마차를 모두 부셔서 불을 피운다. 이의 있나?”
드미트리와 남은 직할대 장교들은 창백해졌다.
“대령님, 그럼 상자들은 어떻게 옮길...”
“옮기지 않는다.” 이반은 단호하게 잘랐다.
“필요한 놈이 와서 가져가라지.”

 

신이 난 코사크 병사들은 일제히 짐마차에 달려들어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타티아나의 썰매를 중심으로 수많은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워낙 많은 모닥불을 피웠기 때문에 땔감은 이내 동이 나 버렸다.

사람들은 아쉬운 얼굴로 여기저기 흩어진 나무궤짝을 흘낏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반 대령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슬며시

피어올랐다.
“어이, 자네들.” 불을 쬐던 코사크 병사들을 불렀다.
“저 상자들을 말이지 모닥불에 올려봐.”
“예에... ?”
다음 순간 드미트리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갔다.
“대령님, 제발..."
“이미 말 했잖나? 금이 제아무리 있어봤자 땔감 한 조각만 못하다고.”
이반은 이죽거렸다.

포장도 뜯지 않은 묵직한 궤짝이 모닥불에 올려졌다.

두터운 나무로 짠 마른 궤짝은 이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시범을 보이자 사람들은 저마다 상자를 모닥불에 올려놓았다.

사방에서 불길이 기세를 올리면서 사람들 얼굴에도 서서히 화색이 돌아왔다.

 

이윽고 맨 처음 불에 올린 상자의 금화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숱한 시선들이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마법처럼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흐름에 쏠려있었다. 그리고 모든 모닥불에서 차례차례로

영롱한 황금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금을 머금은 벌건 숯들이 환상적인 황금색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그 비현실적인 장면에 홀린 사람들 귓가로 갑자기 가냘픈

아기 울음이 들려왔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든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모닥불에 몸을 녹이던 코사크들이 말했다.
“틀림없이 기막힌 녀석일 거야. 황금 모닥불에 둘러싸여 태어나다니.”

 

“타냐, 수고했어.”
삐에르는 땀에 젖은 타티아나의 창백한 이마에 키스했다.
“산모는 위독한 상태예요”
출산을 도운 아낙이 삐에르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 추위 속에선 아기를 씻길 수 없어요. 잘 싸서 보온만 해주세요.”
모닥불들이 꺼지기도 전에 타냐는 숨을 거두었다.

가냘프던 목숨은 마지막 한 톨의 불씨까지 사른 하얀 재처럼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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