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M.U.S.E #29 ; LUNA

2019.11.21 17:3511.21

[Aldrin Research Center, Mare Tranquillitatis]

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어이, 베시. 이거 네가 갖다둔 거야?”금속판에 새겨진 글귀. 그 옆에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발자국. 바로 옆에 세워진 건물로 로버 하나가 다가왔다. 로버는 서쪽 끝에 위치한 차고로 들어갔다. 로버가 지정된 위치에 멈춰 서자 로버에서 짐칸이 뒤로 밀려나며 건물 벽에 연결되었다. 로버에 실려 있던 화물은 금세 기지로 옮겨져 검역 단계에 들어갔다. 그사이에 내린 마이네르도 에어 록의 격벽을 지나 우주복 소독을 시작했다. 세척액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몇 초 후 다시 뜨겁게 가열된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번갈아 나왔다. 소독이 끝난 후 마이네르는 다음 방으로 이동하여 우주복 환복 장치에 몸을 맡겼다. 하나하나 해체된 우주복은 그의 개인 로커에 순서대로 들어갔다. 마이네르는 검역을 통과한 화물을 캐리어에 옮겨 담았다. 곧바로 연구실로 향하는 그를 따라 캐리어는 전용 레일을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의 책상에 소다 한 캔이 올려져 있었다.

스크린에 빠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몸을 숙이고 있던 엘리자벳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허리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이 젖혀지며 그녀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그냥, 너, 너 오는 거 보고… 나도 마실 겸 너도….”

엘리자벳은 고개는 돌렸지만 정작 마이네르의 눈을 바로 보지는 못했다. 발끝을 보며 곱슬머리를 손가락에 감는 게 엘리자벳이 누군가에게 말할 때의 기본 자세였다. 심지어 목소리도 작고 말끝도 흐리는 게 다반사였다. 방금은 연구실에 두 명밖에 없었기에 그나마 다른 소리에 묻히는 것 없이 들린 편이었다.

“마침 목 말랐는데, 고마워. 다음엔 포도 맛으로 부탁해.”

마이네르는 캔을 따서 한 모금을 마시고는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다시 캐리어를 이동시켜 연구실 중앙의 보관 케이스에 채굴한 시료들을 옮겨 넣었다. 회색 일체의 돌과 모래들이었다.

“아니 내가 고맙지. 나도 나가야 하는데….”

“굳이 무리할 필요 없어. 근데 내일 중앙에서의 교육 때문에 다들 일찍 자러 들어간 모양인데, 여태 안 들어가고 뭐 했어? 안 그래도 아침잠도 많으면서.”

“오늘 늦게 나왔으니까… 그만큼 좀 더 하려고.”

마이네르는 자신이 캐 온 암석 시료들이 번호대로 제자리에 찾아간 것을 확인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캔을 들고는 연구실 출입문으로 향했다.

“또 게임하다가? 하긴, 네 방 만한 플레이 그라운드도 없지. 그럼 내일 아침 일찍 가야 하니까 난 먼저 들어갈게. 너도 내일 아침에 또 늦지 말고 적당히 하다가 들어가.”

엘리자벳은 말없이 손만 작게 흔들었고, 마이네르도 손 인사로 답하며 연구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엘리자벳은 스크린 한쪽에 뜬 채굴 시료들의 목록을 확인했다. 이번 것들은 전부 감로주의 바다 근처에서 캐온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몬 펜크 산언저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느리지만 착실히 채굴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손가락을 움직여 시료 일부를 중앙 케이스에서 자신의 분석 장치로 옮겨오도록 했다.

-쿵쿵쿵-

마이네르는 문을 두드리는 생경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혹시나 알람을 잘못 설정해서 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아직 알람 시각도 아니었다. 마이네르는 마른세수를 하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두꺼운 문이 옆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엘리자벳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인! 마인! 이거! 어디서 찾았어? 거기에 이런 거 더 있었어?”

엘리자벳은 전에 없이 격앙된 목소리로 마이네르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아래를 바라보지도 않고 눈을 정확히 마주쳤고, 말끝을 흐리거나 작게 말하지도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간밤에 그녀를 흥분시킬 사건이 터진 것만은 확실했다.

“잠도 안 자고 밤새 분석한 거야? 근데 전화를 하지, 뭐 나도 잘 때는 뉴브라칩을 끄니까 별반 다를 거 없지만. 그런데 얼마나 급했길래 이렇게 직접 왔어?”

눈을 반쯤 감고 하품을 하는 마이네르에게 엘리자벳은 들고 왔던 것을 내밀었다. 마이네르가 어제 캐 온 암석 중 하나였다. 밀봉 케이스에 따로 넣지 않고 평범한 금속 통에 넣어왔다는 점이 문제였다. 상황을 이해 못 하고 있던 마이네르는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자마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걸 그대로 들고 오면 어떡해! 하다못해 뚜껑 같은 거라도 찾아 덮었어야지!”

마이네르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은 엘리자벳은 입을 벌리며 탄식하고, 눈동자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입술을 숨기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마이네르는 급히 욕실 쪽으로 가서 수건을 가져와 훤히 드러난 통을 덮었다. 그러는 바람에 엘리자벳의 사과를 듣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거, 여기서 단백질이 발견돼서….”

“단백질? 암석에서?”

마이네르나 다른 연구원들이 채굴해오는 시료들에서 유기물이 발견되는 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개중엔 다소 복잡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단백질이라 불릴 만한 것까지는 없었다. 그런 걸 상기해보면 실로 놀라운 발견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놀라기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이네르는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러면 더더욱 오염 방지에 신경 써야지. 일단은 이거나 다시 돌려놓자.”

마이네르는 엘리자벳이 들고 있던 통을 대신 들고 연구실로 향했다. 마이네르는 반쯤 걷고 나서야 잠옷을 입은 그대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어 봤자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결국 둘은 그대로 연구실에 들어갔고, 마이네르는 재빠르게 암석을 중앙 케이스에 도로 넣었다. 이어서 엘리자벳이 암석을 넣어왔던 통과 수건은 폐기물 처리 장치에 넣었고, 연구실 한편에 있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이네르는 뒤돌아서서 잔뜩 움츠러든 엘리자벳을 쳐다봤다.

“하, 피곤하지는 않아?”

“미안…. 앞으로는 밤에는 꼭 잘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안전 절차만 제대로 지키자고.”

마이네르는 뉴브라칩이 알려주는 시각을 확인했다. 중앙으로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다시 잠들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는 알람을 해제했다. 엘리자벳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딱히 무슨 말을 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지도 않고 바닥만 보고 서서 우물쭈물했다. 마이네르는 그런 그녀가 눈에 밟혔다. 결국 그는 다시 한번 마른세수를 하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 정도는 충분해 보였다.

“그래, 잠도 다 깼고, 일단 얼마나 대단한 건지 들어나 보자. 대체 무슨 단백질이길래 이렇게 야단이었던 거야?”

마이네르의 말을 들은 엘리자벳은 냉큼 고개를 들었다. 내부에서 터져 나오려는 환희를 겨우겨우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말야, 이 단백질이….”

 

 

[Columbia University, New York]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시아라의 답변이 끝나고 스크린 너머의 질문자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사이 마이크를 넘겨받은 사람이 객석 한가운데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이 시아라의 수업을 몇 번 들었던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시아라는 어렴풋이 그가 기억이 나는 듯했다.

“현재 점점 확산되고 있는 정신질환 증세와 관련해서 떠도는 이야기를 캐러반 교수님께서도 들어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첨단 기술 속에서 유리된 개인들이 증가함에 비례하는 거라고도 하고, 적도 상공에 지어진 O-Ring에 의한 미세한 일조량의 변화나 지구 자기장의 변화 혹은 달 사이의 중력 교란 등을 원인으로 꼽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시 제일 큰 힘을 얻는 가설은 뉴브라칩에 의한 뇌조직 변형에 따른 부작용으로 보는 시선인데요. 뇌신경 과학자의 입장으로서 교수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아라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치 이 질문을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그 얘기를 빼놓지 않고 나눴고, 언론도 하루가 멀다 하고 관련 내용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마치 세계 전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시아라는 옆의 테이블에 손을 뻗어 목을 한 번 축이고는 답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정신의학 전공은 아니지만, 현재 전세계적으로 정신착란과 환각, 인지 및 사고 능력 저하 등을 호소하는 정신질환자가 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일단 제 전공과 그나마 관련 있는 뉴브라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사실 뉴브라칩이 뇌신경 기능의 장애나 정신 질환 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는 뉴브라칩이 개발되던 초창기부터 있었습니다. 외부장치처럼 연산을 끝낸 정보를 넘겨주던 초기의 기계적 칩셋 모델은 물론, 인공 세포로 디자인한 칩셋이 시냅스 사이에 간섭하는 2세대도 그렇고, 현재 주요 이식 모델로 자리 잡은, 트레게놈 사가 선두로 개발한 유도줄기세포를 이용하여 뉴런을 재배치하는 모델까지.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두 뇌에 직접적인 조작을 가하다 보니 이런 비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죠. 하지만 아직 뉴브라칩이 이런 질환들의 원인으로 작용한 적은 없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최근의 추세 또한 뉴브라칩이 아닌 다른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게 대다수 연구자들의 추측입니다. 뭐, 그래봤자 추측일 뿐이고 아직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신뢰할 만한 몇 가지 연구를 말씀드리자면…”

시아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리 위에 올려놓았던 탭을 다시 들었다. 잠시 후 무대 뒤편의 홀로그램 기기가 작동했다. 어차피 평면인 논문만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지만, 10년 전에 리모델링한 세인트 폴 교회에는 홀로그램 기기가 영상 장비의 전부였다. 곧 일련의 그래프들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올해 초 예일 의대 연구진들의 통계 조사로는 최근 2년, 그러니까 해당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난 기간 동안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환자들의 뉴브라칩 이식 이력을 보면 전체 진단 환자의 12%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마저 1년, 반년으로 기간을 줄이면 7%, 4%로 줄어든다고 하고요.”

무대에는 이어서 중국과 인도의 지도가 나타났다. 지도에 찍힌 붉은 점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점점 번져나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좀 다른 이야기지만 중국 칭화 의대와 인도의 AIIMS에서 각각 시행한 연구에서는 최근 질환의 발병 추세가 마치 전염병의 확산과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고 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학계에서는, 진드기로 전염되는 라임병의 증상 중에 무기력증과 같은 정신병적 현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전염병 증세가 아닐까 하고 그 병원체를 찾으려는 연구진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발병자들 간의 뚜렷한 공통분모가 없어 추적이 힘들다고….”

그때였다. 앞쪽에 앉아 있던 관객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관객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그 관객으로부터 멀어졌고, 시아라와 사회자도 몸을 뒤로 젖히며 그 관객을 주시했다. 곧 사회자는 안전 요원을 불러 해당 관객을 안전하게 퇴장 조치하도록 했다. 무대 양쪽에서 달려온 안전 요원이 그 관객을 바로 제압했지만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객석 여기저기서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사람들 중에서도 몇몇이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난장판을 멍하니 관망하던 시아라는 정신을 차리고는 강당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대기실로 달려가 짐을 챙기면서 뉴브라칩으로 신호를 발생시켰다. 공학적인 형태로 변형된 전두엽의 일부가 곧바로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와 연결이 됐다. 사람과 사람 간의 직접적인 연결은 금지됐어도 사람과 사물 간의 연결은 다시 합법화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교회를 빠져나오자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차가 보였다. 시아라는 얼른 달려가 조종석에 탔다. 스크린에 활짝 웃고 있는 가족들의 사진이 보였다.

‘제발, 제발! 안드레, 카라, 카르멘… 제발!’

 

 

[The Ellipse, Washington DC]

“저는 지금 더 엘립스의 시위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우주 및 해양 개발의 중단, 유전자 조작 및 배양 식품에의 규제 강화, 폐기물 재활용 정책 추진, 뉴브라칩 이식 및 인공두뇌 연구 전면 금지 등을 주장하며 각종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 무대에서는 바이오 해킹 범죄의 죄목으로 최초로 수감됐던 브루스 피온 네메라를 선구자라 칭해 논란을 일으켰던 팔리 귄트 목사가 연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린 피스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환경 및 의료 관련 민간단체들이 주최한 이번 시위에는 총 63개 단체, 70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기자의 말마따나 기자의 뒤편은 구호를 외치거나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한쪽 끝에는 워싱턴 기념탑이 송곳처럼 솟아 있었다. 하늘에서는 제한 고도를 벗어난 미허가 사설 드론들이 전파 방해로 추락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탑의 끝보다 높이 뜬 언론의 드론으로 찍은 영상에서도 시위대 전체의 모습을 온전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기자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은 환경운동가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미 정부와 세계 각국 정부 및 기업들의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를 규탄하려고 모였습니다. 자연을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곧 인류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기업가와 개발주의자들의 목소리만을 듣고 구시대적인 개발지상주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바다고 땅이고 할 것 없이 지표면은 각종 폐기물로 가득하고 생태계는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은 각종 방법으로 변형된 식품으로 가득합니다. 하늘, 우주로까지 뻗친 기계적인 이기심은 우주 전체를 쓰레기로 채우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주변 환경을 넘어 인간까지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은 우리들의 뇌에까지 그 마수를 뻗치고 있습니다. 이런 각종 파괴의 영향은 결국 우리의 몸과 정신도 피폐하게 만들고 맙니다.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인류와 자연 간의 상생의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전세계에서 70여 개 단체, 120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겁니다.”

그러고는 환경운동가는 뒤를 돌아봤다. 기자도 뒤를 돌아봤고, 카메라도 각도를 틀어 그 뒤의 상황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까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구호 대신 비명이 들려왔다. 춤을 추던 발은 이리저리 내달렸다. 상공 영상에서는 마치 끓는 물에서 올라온 기포가 터지고 풍선이 한계까지 부풀어 터지는 것처럼 인파가 흩어지는 게 보였다. 기자와 환경운동가를 보여주던 영상에서는 그 원인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환경운동가가 쓰러졌다. 그는 신음을 내면서 몸을 마구잡이로 비틀기 시작했다. 화면은 환경운동가를 줌인하여 보여주었고 기자는 옆에서 그를 진정시키려는 게 보였다. 그때 환경운동가가 화면으로 달려들었고,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던 홀로그램이 뒤집혔다. 하늘과 땅이 뒤바뀐 영상에서 환경운동가와 기자와 카메라맨이 서로 뒤엉켜 몸싸움하고 있었다.

영상은 데스크로 이동했고 목소리만 들리던 앵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끊어졌다.

 

 

[Orbit-Ring(O-Ring), Altitude 20km above Equatorial Line]

<초프라 국장님, 제 1 지휘통제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초프라 국장님, 지금 바로 제 1 지휘통제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하아, 이 핏덩이들은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구만. 앞으로 대체 어쩌려고 저러나.”

니샤는 작성 중이던 문서를 저장하고 방을 나섰다. 완만하게 굽은 기다란 복도가 보였지만 니샤는 원형 복도에 들어서기도 전에 옆 복도로 발길을 돌렸다. 곧 제 1 지휘통제실의 문이 열렸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직원들이 보였다.

“너희가 나를 아주 죽을 때까지 부려먹을 심산이구나.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별거 아니면 다들 낙하산 없이 기지 밖으로 던질 줄 알아!”

니샤의 불호령에 직원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곧 다시 업무를 시작했고, 통신관제팀의 휴가 달려왔다. 그 뒤로 물류지원팀의 로지도 따라왔다. 휴는 곧바로 탭을 건넸다. 탭 위로 사설 우주선의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개인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국장님. 하지만 현재 상황이 저희들만으로는 처리하는 데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지금 여기를 보시면 트레게놈 사 소속의 화물선 BT-L29S가 접근하고 있는데, 기존 선적 일정에도 없었고, 변경 통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통신이 전혀 안 된다는 겁니다. 화물선에도 연락이 안 되고, 상황 파악을 위해 BEAM(ISC-BEAM, International Space Center-Between Earth And Moon)과 FSM(First Settlement on the Moon)에도 연락을 취했는데 그쪽도 통신이 전혀 안 돼요. 통신 두절의 원인은 현재 파악 중입니다.”

탭 화면에는 화물선의 궤도 정보가 떠 있었고 그 옆으로는 각 기지들과의 통신 기록이 있었다. 말이 통신이지 일방적인 교신 시도였다. 니샤는 휴에게 탭을 도로 돌려주고는 지휘통제실 중앙에 위치한 국장 자리에 앉았다. 휴는 바로 옆에서 탭을 조작했고, 곧 니샤의 바로 앞에 현 상황을 보여주는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달에 세운 기지 FSM과 지구와 달 사이 제 1 라그랑주 점에 위치한 BEAM과의 통신 두절, 아무런 응답 없이 고속으로 지구로 접근 중인 화물선. 니샤는 순간 과거의 안 좋은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어루만졌다.

“저 화물선에 뭐가 들었는지는 확인했나?”

“선적 목록에 없던 터라 확인이 안 됩니다.”

“기록을 알아보려 해도 다른 기지들도 묵묵부답이라 어떻게 방법이 없어요.”

로지의 대답에 휴가 덧붙여 말했다.

“원격 조종도 안 되나?”

“시도는 해봤는데, 외부 접속을 완전히 차단한 것 같습니다. 관리자 코드를 입력했는데도 안 되는 걸 보면 어쩌면 장비 결함이나 파손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혹시 몰라 화물선 내부에 계속 경고 방송을 내보내고는 있지만, 실제로 송출되고 있는지도 확인이 안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화물선은 멈추지 않고 지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으로 14분 후면 O-Ring과의 충돌이 확실해 보였다.

“미치겠네. 예인 미사일 발사 준비해. 인공위성이랑 부딪칠 것 같으면 멀리 날려도 어쩔 수 없는데, 사람 있을지도 모르니까 계산 확실히 하고.”

니샤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니샤 초프라 Orbit-Ring 기지국장이 BT-L29S 화물선에 통보한다. 반복한다. 니샤 초프라 Orbit-Ring 기지국장이 BT-L29S 화물선에 통보한다. 당신들의 미허가 접근은 국제 우주항공비행법에 저촉되고 본 기지에 심각한 안전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바, 본 기지국장의 직권으로 당신들의 화물선을 다른 경로로 예인하기 위한 예인 미사일을 발사할 것이다.”

화면에 계산 결과가 떴다. 다행히 화물선을 멀리 날려 보낼 필요는 없었다.

“화물선의 무게를 특정할 수 없어 정확한 값은 알 수 없지만, 성층권 상부에서 공전하도록 만들 것이다.”

니샤는 말을 마치고 홀로그램 영상에 뜬 미사일 발사 확인 절차를 승인했다. 영상에는 곧 미사일에 달린 카메라가 보내오는 영상과 예상 궤도가 양쪽에서 떠올랐다. 몇 분 후 미사일이 화물선에 부착되는 게 보였다. 미사일의 분사 노즐은 곧바로 계산된 각도로 회전했고, 화물선의 예상 궤도는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다. 중앙 홀로그램과 내벽 대형 스크린의 영상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바로 그 순간 모든 스크린에 경고 표시가 떴다.

[미허가 비행선 접근 중]

“다른 우주선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팔레나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니샤는 경고창부터 치워버렸다.

“총 몇 대야?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레이더망에 새로운 우주선들이 점점이 박히기 시작했다. 각 점마다 충돌까지 남은 시간이 표시됐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남은 시간은 확고하고 정확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반면 우주선의 수는 마치 반비례 공식이라도 되는 듯 늘어나고 있었다.

“70… 100…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지에 적재된 예인 미사일은 얼마나 있지? 남김없이 다 쓸 생각 하고, 모자라면 격추해도 상관없으니까 방공용 미사일도 사용해! 방어 위성도 돌려! 권역의 군사기지와도 연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상에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해!”

“그게, 10분 전부터 대부분의 군기지와도 통신이….”

그 순간 팔레나는 말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이 혹은 헤치려는 듯이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테아도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뭘 보고만 있어! 당장 저 둘을 밖으로 끌어내!”

니샤의 지시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은 그 둘을 붙잡기 시작했다. 발광하듯 몸부림치는 사람을 제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여럿이 달라붙으니 안 될 것도 없었다.

“어떻게 하죠? 그냥 복도에 둘까요?”

“장난해? 의무실에 묶어 놔!”

휴의 물음에 니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NASA에 부임한 초기라면 모를까, 그녀는 이제 웬만해서는 화를 표출하는 일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문제 상황은 그녀의 까끌까끌한 감정은 무디게 만들었다. 다시 스크린을 쳐다보니 아까 치웠던 경고 표시가 그대로 떠 있었다. 니샤가 그것을 다시 치우려는데, 몸이 흔들렸다. 기지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곧 금속이 진동하는 울림소리가 뒤따랐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제 3엔진실에서의 폭발입니다!”

“7구역 화물보관소와 제10번 사출기에서도 폭발이 확인됐습니다!”

“9구역과 10구역 사이에 균열 발생! 사출기 폭발의 여파로 보입니다! 이대로는 기지가 분열될 겁니다!”

O-Ring은 본래 우주 징검다리 프로젝트의 최종 결과물로써 기획됐었다. 그렇기에 우주 개척의 첫 관문 역할만 수행해도 충분했지만, 기상학과 통신네트워크에도 지대한 공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전부 그 독특한 형태 덕분이었다. 그 이름처럼 O-Ring은 가느다란 도넛 모양의 기지였다. 단순히 둥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크기 면에서도 여타 구조물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O-Ring은 마치 목성이나 토성의 고리처럼 지구의 적도 상공을 둥글게 두른 구조물이었다. 전방위적 분사 시스템으로 미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기에 여느 위성들처럼 굳이 지구 주위를 공전할 필요도 없었다. 이로 인해 항공기의 이착륙 시의 효율을 최대화할 수 있었다. 인공 중력을 만들 필요도 없었으므로 기지 인원들의 생활 편의도 동시에 올라갔다.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전체로서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분열된 부분으로서는 균형을 맞출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한쪽에서 아무리 분사를 해봤자 다른 부분들로 그 힘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짓이었다. 절단된 훌라후프는 제아무리 노력해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던 니샤가 입을 열었다.

“추락 시퀀스에 돌입한다.”

니샤의 지휘를 기다리던 직원들은 그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매뉴얼대로! 해체 가능한 모듈 전부 분리 사출하고 충돌 직전에 역추진 분사하도록 입력해. 최소한의 정비 인력만 남기고 비지휘 인원부터 구호선에 태우고!”

“국장님, 12구역 융합로 전력이 기준선 이하로 저하됐습니다! 너무 빠릅니다!”

12구역은 우주 징검다리 프로젝트 초기에 그 역할을 수행하던 ISC-SaTh(International Space Center-Satellite in Thermosphere)를 기반으로 건조된 구역이었다. 12구역의 중심은 SaTh였고, 12구역의 전력은 곧 SaTh의 핵융합로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SaTh의 지위 덕분에 12구역은 O-Ring의 중심이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 1 지휘통제실은 12구역에 있었다.

니샤의 표정은 전에 없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외쳤다.

“당장 대피해! 얼….”

-쾅-

충격이 지휘통제실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벽 스크린에는 기다랗게 금이 갔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점멸하는 경고등에 사람들의 표정은 빨갛게 깜빡거렸다. 스크린에 뜬 경고창 역시 치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커맨드 입력했으면 빨리 탈출해!”

니샤의 외침에 직원들은 탈출용 구호선으로 달려갔다. 정기적으로 받은 훈련대로 벽면에 산재한 구호선에 나눠 탑승했다. 직원들은 안쪽 바디 몰드부터 차례차례 자리 잡고 헬멧을 착용했다. 그리고 손잡이를 당기자 몰드 전체가 부풀어 오르면서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꽉 붙들었다. 비상 탈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휴가 소리쳤다.

“국장님!”

니샤는 지휘통제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늙은이는 걸음이 느리거든.”

구호선들이 하나둘 사출됐다. 니샤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스크린의 경고창을 치웠다. 각종 상황판이 흩어져 있었다. 우주선이 지구와 기지에 충돌하기까지 가장 짧은 것은 2분도 되지 않았다. 천천히 돌아가는 삼차원 기지 설계도에는 빨갛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완전히 절단된 부분만 해도 10곳이 넘었다. 니샤는 기지 전체에 생체 스캔을 가동했다. 아직 설비가 작동하는 구간에 한해서, 남은 사람은 그녀 혼자뿐인 듯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니샤는 다시 마이크를 켰다. 방송 시스템까지 다운된 구역도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초프라 국장이다. 다들 교육받은 대로 잘하고 있겠지만, 혹시라도 아직 기지에 남은 인원이 있다면 이 방송을 듣는 즉시 기지를 탈출하라.”

니샤는 방금의 방송을 기지 전체에 반복 송출하도록 설정했다. 이어서 아직 완전히 다운되지 않은 기지 인공지능을 통해 세계 각지의 정부와 군기지, 항공기지에 연결했다. 반투명한 지구본 홀로그램에 빼곡하게 이름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기지의 예상 추락 위치와 피해 지역이 적도에 빨간 띠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 음성 통신이 열렸다. 휴였다.

“국장님! 이제 곧 기지 전체가 추락할 겁니다! 빨리 탈출하셔야 합니다!”

휴는 그렇게 말했지만 근처에 남은 구호선은 없었다. 그 사실은 오히려 니샤를 더 마음 편하게 만들었다. 쓸데없는 희망에 가능성을 따지고 있는 것보다는, 깔끔하고 확실한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 순간 니샤는 몸이 뜨는 것을 느꼈다. 12구역도 다른 부분들처럼 자유낙하에 동참하는 듯했다.

“휴, 원래 선장은 마지막까지 남아야 하는 법이야. 아직 해야 할 게 남아 있으니, 기지를 떠날 수야 없지. 그냥 은퇴식이 몇 달 앞당겨졌다고 생각해.”

휴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니샤는 곧 통신을 끊었다. 니샤가 말한대로 세 달 후면 그녀의 은퇴식이었다. 아무리 의료 기술과 뉴브라칩 성능이 좋아졌다고 해도 나이는 나이였고, 이제는 여유롭게 노후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 때문인지 왜 하필 자신의 임기일 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곧 아예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게 최선이고, 발생할 거라면 자신의 임기 내에 생기는 것이 죄책감이 덜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샤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연결되든 말든 상관없어. 각국 정부, 군기지에 연결해서 미사일 전부 써서 어떻게든 피해 최소화하라고 해. 예인이 안 되면 폭파를 해서라도. 적도 권역 국가들에는 비상 대피령 권고해. 해안선 근처도.”

니샤가 지시한 대로 인공지능은 각국의 정부와 기지에 통신하기 시작했다. 12구역과 가장 가까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부터 시작해서 스리랑카, 인도, 끝으로는 에콰도르까지. 눈 깜짝할 새에 통보가 완료되었다. 이제 니샤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상공 20km에서 지상까지 공기 저항을 무시하고 단순 계산으로는 1분 남짓. 엄청 높은 높이도 아니니 중력의 변화도 거의 없을 것이고 공기 저항을 고려해도 체공 시간이 유의미하게 길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충돌 직전에 역추진한다 해도 무거운 선체를 얼마나 밀어낼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기지가 지상에 충돌할 것이었다. 니샤는 무릎 언저리에 떠 있는 자신의 탭을 집어 들고는 갤러리에 들어갔다. 다른 사진들은 대충 넘기던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에 멈춰 섰다. 이미 30년은 족히 된 사진. 부모님과는 여러 면으로 충돌이 잦았던 그녀였지만, 그리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붉은 경고등, 여러 방향에서 울려오는 방송 소리, 자유롭게 떠다니는 작은 물건들, 그 사이에서 니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near the Equator off Nyeri International Spaceport, Nanyuki]

파르샤는 차량을 세우고 원격조종석이 있는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때 본부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왔다.

“무슨 소리야? 철수하라니? 이제 막 현장에 도착했는데?”

파르샤는 차량의 한중간에 서서 외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그녀는 결국 원격조종석을 코앞에 두고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운전석 스크린에 뜬 관제사는 허둥지둥하며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 와중에도 관제사는 다시 한번 본부로의 복귀를 지시하는 걸 잊지는 않았다.

“시신 수습은 해야 할 거 아니야? 하다못해 블랙박스라도 건져야지! 안 그럼 고작 기사 자격 있다고 나까지 내보낸 의미가 없잖아!”

파르샤의 말대로였다. 기사 자격증을 몇 개 갖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우주선 엔지니어였다. 물론 지면에서 발을 뗀 적이 없었고 O-Ring 프로젝트에도 참여한 적은 없었다. 단순히 몇몇 중장비를 다룰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고 현장 수습에 차출된 것이었다. 기지에 숱한 기사들이 이미 다 나가 있지만 아직 장비가 남았다면서 상부에서는 그녀를 재촉했다. 그만큼 O-Ring의 추락은 상당히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철수하라니, 이해가 안 가는 처사였다.

“안전 문제? 어차피 안전거리 확보하고 장비도 원격으로 조종하는데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병? 무슨 병을 말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저 멀리 돌진 중인 트럭이 보였다. 뒤에 실은 구조용 중장비도 내리지 않은 채로 시선 끝에 보이는 O-Ring의 잔해로 향하고 있었다.

“뭐야? 쟤네 왜 저래? 본부! 일부 차량의 탈선을 확인했나?”

“그거야! 지금 전세계적으로 정신질환이 발병했다고 하니까 일단 복귀하라고! 저 돌진에 말려들기 싫으면!”

파르샤는 자신을 향해 외치는 관제사의 얼굴을 한 쪽으로 밀고는 상황판을 조작하며 각 트럭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20% 정도의 차량이 지시를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서로 연락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위치를 이탈한 차량의 기사들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몇몇 기사들은 벌써부터 본부의 지시대로 귀환하고 있었다.

“알겠으면 빨리 복귀해! 현장 수습은 나중에 안드로이드를 투입하든 해서 하면 되니까!”

파르샤는 많은 것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사고 현장을 지척에 두고 하릴없이 돌아가는 건 영 찝찝한 일이었다. 지시 없이 위치를 이탈한 기사들은 아직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파르샤도 차량 인공지능에게 복귀를 명령했다. 그리고 도로에 접어드는데 다른 기사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들은 하나 같이 주행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파르샤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려는데 갑자기 차량이 급정거했다.

“우악! 무슨 일이야? 운전 똑바로 안 해?”

<도로 위에 생명체가 있습니다.>

차량 인공지능의 안내를 듣고 파르샤는 연락 중이던 기사들의 얼굴을 옆으로 밀었다. 창밖으로 정말로 사람이 보였다. 남루한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도로 한복판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연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건지 그는 마치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파르샤는 경적을 몇 번 울렸지만 효과는 없어 보였다.

“아 씨, 짜증 나 죽겠는데 또 뭐야. 아저씨! 여기 도로인 거 안 보여요? 빨리 비켜요!”

파르샤는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손을 휘두르며 비키라는 신호도 보냈지만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결국 파르샤는 한숨을 한번 쉬고 차량에서 내렸다. 그리고 남자를 도로 밖으로 밀어내려 그의 팔을 건드렸을 때였다. 남자는 고함을 지르며 양팔을 휘둘렀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파르샤는 뒷걸음질을 하며 남자를 지켜봤다. 남자는 팔을 한참을 휘두르다 머리를 감싸며 낮은 신음을 짜내기 시작했다. 파르샤는 남자의 증상이 관제사가 전한 정신질환임을 직감했다. 저런 상태라면 혹시라도 수동 운전이 취미인 사람에게 받칠 위험성이 다분해 보였다.

“저기요, 아저씨. 일단 이곳은 위험하니까 좀만 옆으로 피합시다. 네?”

파르샤는 다시 한 번 남자에게 다가갔다. 혹시라도 신체 접촉이 또 무슨 발작을 일으킬까 싶어 몸을 숙이며 말만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더 안 좋았다. 남자는 이번엔 마치 무슨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맹수처럼 파르샤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피했고, 다시 자신에게 달려들려는 남자를 걷어찼다. 그리 건장한 편은 아니었던 남자는 그대로 밀려 쓰러졌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비틀거리며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파르샤는 그 사이에 차량에 올라탔다.

“주행해! 중앙선 넘어도 상관없으니까 빨리 본부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량은 뒤로 후진을 한 뒤 비틀거리는 남자를 피해 옆으로 빠졌다. 사이드미러로 남자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파르샤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꺾이지 않은 세계 최강국 미국, 최고 수준의 인구밀집도를 자랑하는 동아시아와 인도 등은 물론, 그녀의 아버지의 조국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대륙, 백 년 가까이 저개발국가 타이틀을 떼버리지 못한 아프리카의 나라들까지. 정신질환이 집단 발병한 나라를 세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나라를 세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유일하게 정신질환자가 발생하지 않은 대륙은 남극대륙뿐인 듯했다. 발병한 장소도 다양했다. 그중에는 정부 기관은 물론 군부대도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까지 발병했을까 싶으면 어김없이 있었다. 그만큼 발병한 사람들의 군상도 다양했다.

그때 갑자기 화면 전체가 흐릿해지며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주행 불가>

차량은 또다시 멈췄다. 파르샤는 관성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도 사람이 도로를 막고 있었다. 문제는 아까처럼 한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은 되는 인파라는 것이었다. 어느 차선이고 할 것 없이 차량으로는, 적어도 파르샤가 몰고 있는 대형 트럭으로는 지나갈 수 없어 보였다.

“썅! 이번엔 또 뭔데!”

파르샤는 경적에 손을 댔다. 하지만 누르지 않았다. 아까 전의 상황을 겪고 나니 눈앞의 사람들을 자극하는 게 현명한 행동일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잠금 설정을 하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밖에서 열 도리가 없었지만, 사람들이 차량을 둘러싸면 제대로 운행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파르샤는 숨을 고르고 혹시나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갈까 작게 지시했다.

“도로 외 주행을 허가한다. 본부까지 도달하는 경로를 찾아 이동해.”

<가능한 경로를 찾지 못했습니다.>

파르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케냐가 아직 개발 중인 국가라지만, 몇몇 산유국들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아프리카 내에서 경제 규모로 상위권에 있는 나라였고, 기간산업도 어느 정도 발달한 상태였다. 수도 나이로비와 가까운 니에리였던 만큼 도로망도 어느 정도 촘촘하게 잘 구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길을 찾을 수 없다니, 파르샤는 인공지능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인공지능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병하는 정신 질환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파르샤는 차량 전면부 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화면을 확대했다. 손톱보다 작던 건물들이 서서히 자라나 화면의 위아래를 가득 메우자 도로 가득 꿈틀거리는 것들이 보였다. 사람의 머리. 도로고 인도고 아니면 다른 곳이고 할 것 없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시발…. 이게 대체 뭔데…….”

파르샤는 화면에 손바닥을 대어 수동 운전 제한을 풀었다.

 

 

[the sky of East Siberian Sea]

“그래서 이게 대체 뭔데?”

안드례이는 이제 막 작업을 마치고 들어온 일리야에게 물었다. 일리야는 우주복도 환복하지 않은 채로 안드례이가 질문한 ‘이것’이 든 시험관을 보관함에 넣는 중이었다. 일리야는 마지막 시험관까지 조심스레 옮겨 놓고 환복 장비에 몸을 뉘었다. 곧 해체된 우주복들이 하나둘 정리되었다. 일리야는 기지개를 한 번 피고는 안드례이의 옆좌석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앉았다.

“나야 모르지.”

“그럼 간단한 분석이라도 해보는 게 좋은 거 아냐?”

일리야는 상황판으로 저장된 기록을 불러왔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신형기의 시험 비행이었다. 바로 그 평가 항목 중에 특수 은폐 기능과 전파 방해 기능이 있었고, 마침 그 기능을 활용하여 수행할 작업이 있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상관이 그들에게 한 말이었다. 상관의 지시의 따라 전파 방해의 권역 안에서 일리야는 소형 특수선을 타고 수명이 다한 러시아 인공위성의 블랙박스와 특수 장비를 수거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업을 하고 있는데 신형기의 센서가 무언가를 포착했다. 일리야와 안드례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특수선의 센서도 반응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반경 30m 안에서는 균류의 포자 하나하나까지도 감지해내는 센서를 믿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보이는 건 없었지만 일리야는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대로 허공에서 시험관을 움직였던 것이다.

“뭔지 약간이라도 알아야 분석을 돌리던가 하지. 보이지도 않는데 아무 실험이나 진행했다가 다 오염시키면 완전히 망하는 거잖아. 그리고 이런 허접한 곳보다는 역시 지상의, 모든 장비가 마련된 곳에서 하는 게 훨씬 확실하니까.”

안드례이는 그 말을 듣고는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콧소리를 냈다. 일리야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안드례이의 궁금증은 서서히 커지고만 있었다. 그는 일리야 또한 자신과 비슷한 심정일 거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안드례이는 그런 마음으로 일리야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통했는지 갑자기 일리야가 벨트를 풀었다.

“그래, 현미경 정도는 괜찮겠지? 조금만 떼어낼 수 있으면 전체가 망가질 일도 없고.”

“다음 목표까지 아주 부드럽게 모시겠습니다. 편안한 실험 되십시오.”

일리야는 다시 보관함 쪽으로 가서 시험관을 꺼냈다. 밀봉된 시험관 내부에는 일렁이는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일리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긴 했지만 광센서를 통해 내부를 조사했다. 잠시 후 센서는 이물질의 발견을 알려왔다. 스크린에 세포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으웩, 이게 뭐지? 세균? 포자?”

일리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덩치에 비해 비위가 약한 편인 그다운 반응이었다. 그래도 실험은 실험이었고, 어차피 직접 손으로 만질 필요는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일리야는 기계 팔을 조작해 군집의 일부를 조금 떼어냈다. 그리고 곧바로 시험관을 다시 닫아 보관함에 넣고 떼어낸 조직은 레이저 조사 분석을 시작했다.

“일리야! 그건 됐고, 빨리 와봐.”

안드례이가 일리야를 불렀다. 일리야는 투덜거리면서 조종석으로 다시 날아왔다. 그에 맞춰 안드례이는 스크린을 조작했다. 창 하나에 바깥 모습이 확대되어 보였다. 오른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화물선이 하나 있었다. 각도를 생각한다면 BEAM이나 달에서 오는 것이었다.

“저게 뭔데? 웬만한 우주선은 O-Ring 거쳐서 들어오는 거 아니었어?”

“잠깐만 기다려 봐.”

안드례이는 상황판을 조작했다. 곧 이름 모를 화물선의 정보들이 하나둘씩 화면에 떠올랐다.

“데라디(De-Radi) 주식회사 소속 화물선, 연식을 보니 5년째니까 곧 폐기 절차 들어갈 테고, 근데 저 기종은 지상 이착륙이 불가능한데?”

“그럼 경로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거 아냐?”

일리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물선의 예상 지상 착륙 지점이 계산되어 나타났다. 시베리아 한복판, 우스네라 근처였다. 주변에 공항도 따로 없는 지역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본부에 알려야 하나? 근데 원래 O-Ring이 다 관리해야 하는 거 아냐?”

“나도 지금 그게 이해가 안 돼서 O-Ring에서 송출된 전파를 잡아보려고 했는데, O-Ring 코드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그럴 리가! 재밍 범위 제대로 조절한 거 맞아?”

안드례이의 말을 들은 일리야는 곧바로 부조종석에 앉았다. 안드례이는 믿을만한 우주비행사였지만, 현재 그들이 타고 있는 우주선이 시험기인 만큼 여러 번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일리야는 시스템 체크를 두 번이나 하고 다시 전파를 수집했지만 안드례이가 말한 대로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24시간 내내 지구를 감싸던 O-Ring의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더구나 로스코스모스로부터의 통신도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반면, 둘은 고요 속에 있었다. 묘한 긴장감 위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안드례이와 일리야는 로스코스모스 본부는 물론 체르스키나 페베크 등지의 기지에도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곳도 응답이 없었다. 비밀리에 작업을 수행한다고 한동안 통신을 차단한 사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듯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기지와 통신 두절이 될 만한 상황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안드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무를 지속하는 것보다는 바깥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확인하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다. 비록 장비는 아직 다 회수 못 했지만, 밤부엉이(Ночь Сова)의 성능 테스트는 끝났으니까. 그게 최우선 과제이기도 했고. 그러니 일단은 가까운 공항이나 기지 중에 통신이 되는 곳에 우선 착륙하는 것으로 하자.”

일리야는 몸을 돌리며 러시아의 지도가 펼쳐진 스크린을 가리켰다.

“방금 다 확인했잖아. 근처에는 비밀 기지도 그렇고 민간 공항마저 연락이 안 돼. 러시아 전체가 블랙 아웃된 것 같…. 설마, 너!”

“만약 지금이 코드 다이너스티 상황이라면 통신 두절인 기지로 복귀하는 게 더 위험할 거야. 그러니까 일단 수거한 장치들 전부 소형선으로 옮겨 놓고 사출해야지. 쿠드랴프카(Кудрявка ver 3.5)가 알아서 비상 착륙 프로세스를 가동할 거고, 그러면 어떻게든 알아서 안전하게 착륙할 거야. 난 통신 시도를 계속할 테니까, 너는 빨리 옮겨 놔!”

안드례이는 차단해놨던 모든 주파수 영역의 제한을 풀었다. 그러자 엄청난 양의 데이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러시아와 O-Ring뿐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난리였다. 정보들이 너무 많고 겹치는 바람에 짧은 시간 안에는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쿠드랴프카의 자율적인 정보 처리 덕분에 상황을 오해하거나 혼동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 사이 특수선에 장비들을 옮겨 놓은 일리야가 돌아왔다.

“그래서 어디에 착륙할 건데? 살아 있는 공항이 있어?”

화면에 표시된 곳은 알래스카 북쪽이었다. 알래스카의 다른 공항들과도 멀리 떨어진 데드호스 공항이었다. 안드례이는 선체를 기울여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southern Mianning off the Xichang Satellite Launch Center, Sichuan]

화물선 하나가 몐닝 현 남쪽에 떨어졌다. 가히 기적이라 할만했다. 랴오젠이 근무하는 시창 위성 발사 기지와 가까운 점도 그랬지만, 선체가 무사히 떨어졌다는 점이 더욱 그랬다. 지구로 접근하던 대부분의 우주선들은 미사일에 격추되어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모든 우주선들은 격추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군부대에서까지 발생한 기묘한 정신질환은 모든 지휘 체계를 무너뜨렸다. 부대의 소속이나 규모와는 상관없이 난동을 부리는 인원이 나타났고, 직급이 높을수록 그 영향을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컸다.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조국의 도시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각국 사이의 미묘한 균형은, 그 경계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파괴되었다.

시창 기지는 가장 양호한 편에 속했다. 티베트와 가까운 변방인 까닭에 어느 순간부터 관리가 소홀해졌고, 그만큼 권한도 크지 않았다. 권한이 있다 할지라도 마구 다룰만한 기재도 딱히 없었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단 3명만이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고, 그들 모두 말단이었기에 큰 혼란은 일지 않았다. 운에 운이 겹쳐, 시창 기지에는 지상에 추락한 화물선을 수습할 여유가 있었다. 문제라면 하필 우주선 엔지니어들은 안드로이드 조종 기사 1급 자격이 없었고, 기지 엔지니어였던 랴오젠은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랴오젠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고, 오히려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편이었다.

화물선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자 랴오젠은 차량을 세웠다. 그리고 원격조종석으로 옮겨 앉아 해치를 열었다. 변방의 기지답게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안드로이드만 있었다. 안드로이드에 탑재된 인공지능에는 자율 행동 기능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이는 곧 손가락 움직임 하나까지도 기사가 직접 조종해야 함을 뜻했다. 오로지 1급 기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본부! 목표 지점에 도착했고, 화물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이 구닥다리 안드로이드를 운용해 화물선 해체 및 인명 구조, 설비 회수 작업에 임하겠다.”

“선체가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으니 안전에 각별히 주의하라. 로스펠 공업에서 제공한 설계도를 반드시 숙지하도록.”

랴오젠의 조종과 인공지능의 미세한 보정에 따라 안드로이드는 화물선에 접근했다. 원통형의 선체에는 트레게놈 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대략 20년 전에 랴오젠도 트레게놈 사의 뉴브라칩을 이식 받았었다. 시창 기지에서는 유일한 사례였다.

“혹시라도 외계인이나 유전자 조작 괴물 같은 게 나오면 바로 도망가겠다.”

트레게놈 사가 게놈 기술로 유명한 만큼 연관성은 있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기지에 대기 중인 인원들은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그다지 적절한 농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랴오젠은 우선 화물선을 한 바퀴 돌며 진입할 수 있는 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종석 근처의 문은 지면과 맞닿아 있는 탓에 여는 게 어려워 보였다. 선체 후미의 화물칸 쪽 문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지만 각도가 애매했다. 그래도 선체를 굴려 조종석으로 진입하는 것보다는 화물칸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화물칸으로 진입을 시도하겠다. 혹시라도 이 화물선이 위험물을 적재하고 있나?”

“마지막으로 확인된 기록으로는, FSM에서 무언가를 선적한 건 없네. 뭐,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랴오젠은 화물칸의 키패드를 열어 마스터 코드를 입력했다. 하지만 스파크만 조금 튈 뿐 열리지 않았다. 랴오젠은 한숨을 쉬며 레이저 절삭기를 가동했다. 상황판에 띄운 설계도 정보를 안드로이드에 업데이트하니 권장 절단면이 선체에 겹쳐 보였다. 랴오젠은 인공지능의 보조를 받으며 깔끔하게 문을 떼어냈다. 하지만 랴오젠은 바로 진입하지 못하고 얼어버렸다. 안드로이드의 화면을 공유하던 기지 사람들도 화면을 보느라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사람 맞지? 살아 있는 거야?”

기지로부터 들어온 질문에 랴오젠은 정신을 차리고 선체로 들어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피해 발을 디디기도 힘들었다. 랴오젠은 조심스레 사람들을 옆으로 밀면서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피칠갑인 내벽을 짚기라도 할까 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충돌 시의 충격이면 살아 있을 리가 없지. 화물칸에는 시체 6구가 전부다. 따로 수하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조종석으로 진입하도록 하겠다.”

이번에도 역시 마스터 코드로도 문이 열리지 않았기에 랴오젠은 레이저 절단기를 가동했다. 조종석에도 사람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화물칸보다 더 안 좋았다. 충돌에 의한 단순 충격으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파손이 기기 곳곳에 있었다. 그걸 방증이라도 하듯 조종사로 보이는 사람의 양손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양어깨에 달려 있었기에 그 부분이 팔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랴오젠은 그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멀쩡한 기기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망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속은 혹시 모르는 것이었으므로 랴오젠은 안드로이드에 내장된 공구 목록을 확인했다. 그때 센서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랴오젠! 뒤에!”

기지로부터 고함소리가 들려 왔고, 랴오젠은 바로 동체를 돌려 뒤를 봤다. 사람이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화물칸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었다.

“이게 무슨…!”

랴오젠은 달려드는 사람을 피해 옆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조종사의 몸에 걸려 안드로이드가 넘어지고 말았다. 사람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안드로이드 위로 엎어졌다. 랴오젠은 몸 전체를 비비 꼬며 그 압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다가 아직 가동 중이던 레이저 절단기에 달려든 사람의 어깨가 떨어져 나갔다. 그 틈을 타 랴오젠은 안드로이드를 밖으로 조종했다. 화물칸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 중 두 명이 더 움직이고 있었다. 그 두 명도 안드로이드를 발견하자 달려들기 시작했다.

“랴오젠! 당장 거기서 나와! 안드로이드는 버려!”

랴오젠은 원격조종석을 박차고 일어나 운전석으로 갔다. 화물선 바깥으로 사람이 꾸물거리면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랴오젠은 작은 소리로 욕을 하며 차량을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군부대를 투입하던가 해서 제압해야지.”

“근방에 잔존한 부대가 있어?”

화면 너머에서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없지. 그게 문제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안드로이드의 화면으로는 피칠갑을 한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안드로이드를 파괴하는 게 송출되고 있었다. 그들은 지성이 퇴화한 만큼 야만성이 늘어난 것처럼, 맹수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곧 화면이 암전됐다.

 

 

[Columbus, Georgia]

어두운 지하의 마지막 층. FDF(Freak Doctor Force) 감마팀 대원들은 계단 문을 부수고 내부로 돌입했다. 전력이 모두 차단되어 깜깜한 공간이었지만 복합야간경이 있었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빠르면서도 꼼꼼하게 내부를 수색하던 대원들은 연달아 ‘클리어’를 외쳤다. 그들의 말대로 지하는 버려진 물건들이 즐비한 것 외에는 깨끗했다. 모두가 신체 능력을 전반적으로 향상시켜주는 강화 전투복을 입고 있었지만 지하 전체를 수색하는데 시간이 꽤나 지나 있었다.

“2분대는 지금부터 1분대를 따라 상층으로 향하겠다.”

분대장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지키고 있던 빅터도 돌아오는 대원들을 따라 상층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1분대와 나뉘었던 1층에 도달했고, 빅터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1층에서 경계 중인 가마레가 이상 없음을 알렸다. 건물을 둘러싸고 감시 중인 드론도 아무런 이상을 포착하지 못했다.

2분대는 쉴 틈도 없이 바로 상층으로 향했다. 이미 1분대가 한 번 수색하고 지나간 곳이었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다시 수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분대가 수색을 허투루 할 리는 없었으므로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꼭대기까지 10층가량 남은 상황에서 1분대는 옥상까지 수색을 완료했음을 알려왔다. 그와 동시에 2분대도 수색을 중단했다.

“여기 폐쇄형 건물인 거 확실해? 지하에 아무런 흔적도 없던 거 맞아? 아니면 하늘로 날아간 것밖에 말이 되는 게 없잖아!”

1분대장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혹시나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면 저 소리에 놀라 도망갈 정도로 큰 소리였다. 빅터 역시 1분대장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난폭한 개체가 출현했다는 제보에 우선순위까지 조정해가며 출동했으니 이런 허탈한 결과를 마냥 받아들이기는 아쉽고, 또 억울했다. 여기저기서 정신질환자들에 의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니 화도 났다. 그때 1층에서 묵묵히 경계 중이던 가마레가 물었다.

“엘리베이터 통로도 확인했습니까?”

가마레는 답을 들을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심하게 우그러져 반쯤 열린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그는 상체를 내밀었다. 조명을 아래로 비추니 추락한 엘리베이터의 잔해가 보였다. 서서히 조명을 올리자 내벽에 무언가가 기이하게 붙은 것이 보였다.

“목표 ‘빅 가이’ 발견! 엘리베이터 통로에 있다. 지상 8층 높이!”

가마레의 통신에 2분대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분대는 옥상층의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젖혔다. 가마레는 ‘빅 가이’를 향해 테이저건을 발사했다. 탄환은 명중했다. ‘빅 가이’는 괴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팔을 크게 휘둘렀다. 고릴라도 마비시키는 수준의 고전류 테이저건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테이저건 탄환은 스파크를 일으키며 가마레를 지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빅 가이’는 가마레를 한 번 쳐다보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목표 상향 중! 테이저건은 안 통한다! 반복한다! 테이저건으로는 제압 불가!”

1분대는 옥상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아래를 조준했다. 가마레와 1분대의 복합야간경 화면을 공유하여 분석한 정보로 2분대는 ‘빅 가이’ 근처의 층으로 이동했다. 2분대와 ‘빅 가이’의 높이가 어느 정도 비슷해지자 1분대는 사격을 시작했다. ‘빅 가이’의 괴성이 엘리베이터 통로 전체에 울렸고, 2분대도 그 소리를 들었다. 2분대는 ‘빅 가이’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의무대원이었지만 빅터 역시 소총의 열상탄 제한을 해제했다.

“빅 가이 하향! 빅 가이 하향!”

총격이 시작되면 통로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빅 가이는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마레 역시 전격탄을 연사했지만 ‘빅 가이’의 속도는 늦춰지지 않았다. 가마레는 엘리베이터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곧 문 전체를 박살 내고 ‘빅 가이’가 밖으로 나왔다. 대원들의 공유 화면에 소형 차량만 한 몸집이 보였고, 가마레와의 통신이 끊겼다. 대신 바깥에 대기 중인 드론에 빅 가이가 잡혔다. 드론은 문을 부수고 나와 도주하는 빅 가이를 추적했다. 드론의 화면으로 빅 가이 몸 옆에서 흔들리는 가마레의 몸이 보였다. 빅터는 가마레가 사망했음을 직감했다. 그처럼 의무대원이 아니더라도 힘이 풀린 가마레의 몸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느꼈을 것이었다.

1분대는 옥상 난간에 갈고리를 걸어 외벽을 타고 내려왔다. 2분대도 창문을 깨고 1분대와 같은 방법으로 내려왔다. 지면에 발을 디딘 감마팀은 갈고리 회수는 뒷전으로 미루고 모듈을 해제했다. 그리고 곧바로 드론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따라 빅 가이를 추격했다. 한참을 달린 후에 감마 팀은 병원 앞에 도착했다. 드론들은 진작부터 병원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빅 가이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네트워크에 등록된 정보로는 병원 건물 역시 폐쇄형이었다.

1분대장과 2분대장은 지금 바로 돌입할지 아니면 지원을 기다릴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결론은 쉽게 났다. 지금 당장 이곳으로 지원을 올 수 있는 팀은 없었고, 목표가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아직 바토의 전투복 신호가 살아 있으니 그 신호를 목표로 움직인다. 1분대는 서쪽으로, 2분대는 남쪽으로.”

감마팀은 병원에 진입했다. 병원 안은 여느 건물과 다를 게 없었다. 사람이 떠나간 자리를 버려진 물건들이 채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병원 전체가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곧 대원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기 중 LUNA 농도 급격히 상승! 근처에 LUNA 발현자 무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빅터는 헬멧 한구석에서 빨갛게 점멸하는 수치를 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대원들은 제압용 구속탄을 유탄 발사기에 장전했다. 혹시라도 운동 능력이 왕성한 발현자가 나타날 것을 경계하며 대원들은 천천히 산부인과 병동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사람들이었다. 접수처에서부터 병실 안까지, 앉거나 누운 채로, 발현자들은 머리에 난 그 특유의 뿔을 하늘로 치켜세우고 죽은 듯이 있었다. 근처의 모든 발현자들이 이곳으로 모인 모양이었다.

개중에는 배가 불룩한 산모들도 있었다. LUNA는 바이러스만큼 작은 크기였고, 당연하게도 태반을 통과할 수 있었다. 산모가 LUNA에 감염됐다는 것은 곧 뱃속의 태아도 감염됐다는 말이었다. 그것을 부러 보여주려는 듯 산모의 배를 뚫고 나온 뿔도 있었고, 산모의 질을 비집어 열고 나와 머리만 밖으로 드러낸 채로 뿔을 키운 태아도 있었다.

빅터는 학창 시절 성교육 시간에 본 임신과 출산에 관한 영상을 기억해냈다. 인공 자궁이 합법화된 시대에서도 잉태는 생명의 신비로움으로 여겨졌고 누군가에겐 축복인 일이었겠지만, 빅터에게는 아니었다. 그 자연스러운 피범벅은 그에게 무엇보다 공포스러웠고, 언젠가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를 떨게 만들었다. 빅터는 자신이 월경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었다.

“빅터! 뭐 해?”

빅터는 자신을 부르는 동료를 쳐다봤다. 그는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빅터와 대원들은 가마레의 신호가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을 조심했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발현자들 때문도 있었지만 발에 차이는 뼈들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바닥에는 백골들이 널려 있었다. 어떤 조각은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다소 컸다. 자연적인 부패로는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백골만 남을 수 없었다. 빅터는 수많은 뼛조각 중 몇 개나 사람의 것일지, 혹은 사람의 것이 아닐지를 가늠했다.

분대장이 손을 들었다. 모퉁이 너머에서 가마레의 신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벽 너머 있는 다른 분대의 실루엣도 헬멧 스크린에 표시됐다. 분대장의 카메라에 찍히는 영상으로는 ‘빅 가이’ 주변에 다른 발현자들도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먹고 있었고, 피 묻은 채로 조각난 전투복이 나뒹굴고 있었다.

신호가 떨어지자 대원들은 일제히 뛰어나가 총격을 퍼부었다. 목표는 ‘빅 가이’였지만 다른 발현자들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기에 그들도 총탄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피격 부위는 탄환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르게 망가졌다. 바스러지기도 했고 새까맣게 그을리기도 했다. 내부에서 터져 배만 한 구멍을 만들기도 했다. ‘빅 가이’는 탄창이 다 떨어질 때쯤에야 쓰러졌다. 아무리 다른 발현자들이 몇 발 대신 맞았다고는 해도 상당한 내구성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빅 가이’가 마지막 발악을 할 것을 대비해 제압용 구속탄부터 쏘고 접근했다. 빅터는 벽 뒤로 몸을 숨겨 재장전을 했다. 어차피 FDF 대원들의 상대는 주로 총도 없고 대체적으로 운동 능력도 좋지 않은 LUNA 발현자들이었지만, 이는 대원들 몇몇이 여전히 갖고 있는 습관이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과 눈이 마주쳤다.

“또 다른 ‘빅 가이’!”

빅터는 재빨리 외쳤다. 새로 나타난 ‘빅 가이’는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떨어뜨리고 대원들을 향해 달려왔다. 빅터는 바로 총신을 올려 사격했지만 ‘빅 가이’는 피부가 찢어지는 정도로는 멈추지 않았다. ‘빅 가이’는 입을 벌렸다. 빅터는 소총을 뻗어 몸이 물리는 걸 막았다. 마구잡이로 자라난 치아가 도드라졌다. 빅터는 고개를 돌렸다. 동료들이 급히 재장전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발현자들을 구속하느라 이미 늦은 터였다. ‘빅 가이’는 빅터를 소총째로 들어 올려 던져버렸다.

“빅터!”

잠시 후 대원들은 발현자들을 포박한 후 끌고 나왔다.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개체는 거의 없었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발현자들을 ‘살아 있다’고 표현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발현자들은 미리 대기 중이던 트럭으로 차례차례 옮겨졌다. 마지막으로 들것에 실려 나온 빅터는 의료 헬기로 옮겨졌다.

“제가 없으면 대원들 부상은 이제 누가 치료해줍니까?”

빅터의 여유에 동료들은 그의 헬멧을 두드리며 그의 쾌유를 빌었다.

“M28 구역 클리어.”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Hospitals, North Carolina]

“홉킨스, 자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홀로그램 스크린 너머의 피메테르는 한 손으로 자신의 백발을 쓸어넘기고는 눈두덩이를 눌렀다. 다른 사람들도 기침을 하거나 안경을 내려놓았다. 유진은 그들의 행동에서 숨김없는 불편함을 읽어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내용과 다르다는 점, 어떤 부분은 전면 부정하고 있다는 점도 전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메테르는 다른 손을 들어 보였다.

“지난 연구 내용과 다른 건 문제가 아닐세. 아예 지난 연구들이 틀렸다고 떠들고 다녀도 상관없어. 그런데 그게 설득력이 있으려면 자네 주장이 좀 더 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저도 황당하게 들린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이걸 봐주세요.”

유진은 자신의 뒤에서 빛나고 있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들 각자의 탭이나 스크린에도 같은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간단히 ‘미라’와 ‘늑대인간’으로 구분하는 LUNA 발현자에 대한 비교 분석과 해부도 등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었다.

통칭 LUNA. O-Ring의 추락 이후로 다발성 정신질환은 여러 명칭으로 불렸었다. 중국 남서부에 떨어진 화물선을 통해 그 원인이 바이러스와 비슷한 무언가라는 것, 발원지가 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러시아 우주비행사의 LUNA 채취를 통해, LUNA가 과거에 강한 상승기류에 의해 지구에서 달로 분출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그 후로 사람들은 ‘미치다’라는 뜻도 함께 가진 ‘LUNA’로 증상과 발현자, 병원체를 부르기 시작했고, 정식 학명으로까지 굳혀졌다.

LUNA 증상이 발현된 사람들이 겪는 정신 질환 증세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미라’의 머리에서 돋아난 뿔도 점점 성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저 뿔이 LUNA를 퍼뜨리는 역할을 할 거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뿔은 뼈와 뇌조직 외에도 LUNA로 가득 차 있었다. 대신 그들은 동충하초처럼 운동 능력을 잃어갔고 LUNA를 생산해내는 공장으로 전락했다. ‘늑대인간’들은 뿔이 거의 없는 대신 골격과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다. 양악도 발달하여 마치 맹수의 두개골처럼 변형되었다. 말 그대로 전설 속의 늑대인간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 두 부류 다 똑같이 LUNA에 감염되었지만 증상의 발현은 전혀 다르게 됐습니다. 단순히 외형만 다른 게 아니라 행동도 달라요. ‘늑대인간’은 마치 ‘미라’를 보호하고 ‘미라’들의 양식을 사냥해오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래, 그 모습은 충분히 사회성을 띠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지. 그래서? 그렇게 처참히 무너져내린 전두엽과 지능으로 LUNA 발현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분업한다고? 현재까지의 관찰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늑대인간’의 일방적 호혜뿐일세.”

유진은 피메테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뿔을 만든다고 철저히 유린당한 뇌조직으로는 발현 이전의 사람 같은 고도화된 기능을 기대할 수 없었고, ‘늑대인간’의 뇌도 뿔만 작다뿐이지 심각하게 변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행동의 차이가 소통과 분업의 결과라는 것은 추측이었지 검증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라’가 어떤 반응을 보인 경우라도 있나? 단 한 건도 없었지. 이미 ‘미라’가 된 발현자는 공격당할 때를 제외하곤 어떤 소리나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어. 심지어 눈 깜빡임까지. 그건 한때 FDF로 활동했던 자네가 더 잘 아는 것 아닌가?”

괴상하게 변한 생명체들에 대처하기 위해 창설된 FDF의 대원으로 활동했던 유진도 피메테르의 말대로 그런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소통하는 방법이 그것뿐은 아니잖습니까? 페로몬 같은 화학 성분을 이용할 수도 있고….”

“자네, 전세계에서 ‘늑대인간’이 포함된 발현자 무리가 몇 건이나 보고되었는지 아나? 반년 전에 조지아 주립 병원에서의 ‘늑대인간’ 둘을 각각 따로 쳐도 9건일세. 반면 포함되지 않은 경우는? 세는 게 무의미하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찾아내서 발현자들끼리 어떻게 소통하는지 확인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가? 인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어. 우리가 LUNA를 치료하는 법을 연구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을 잊지 말게.”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인 데에는 분명 감염자 간에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할 겁니다. 어쩌면 그 부분이 치료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단순한 희망 사항 아닌가? 뭐, 자네가 계속 그쪽 연구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말리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연구를 했으면 좋겠네. 그럼, 이번 세미나는 이만하도록 하지.”

피메테르의 말을 끝으로 홀로그램 영상들이 하나둘 씩 꺼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맥없이 늘어져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연구가 치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목받지 못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냉혹한 대우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유진은 피메테르의 말대로 지금의 연구를 관둬야 하나 고민하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홀로그램을 끄려는데 아직 로그아웃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당신은?”

“전 콜럼비아 대학에서 뇌신경학을 연구하는 시아라 캐러반입니다.”

“아, 캐러반 교수님! 저작은 많이 봤는데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네요. 영광입니다.”

유진은 시아라 뒤편에서 빛나는 홀로그램 영상들을 보았다. 그녀의 연구실에서는 ‘미라’와 ‘늑대인간’의 해부도가 실물 크기로 투사되어 회전하고 있었다. 중추신경의 연결망도 확대되어 도는 중이었다.

“아뇨, 무슨 말씀을…. 다른 분들은 홉킨스 씨의 연구를 못마땅해하는 것 같지만, 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사실 제가 주목하고 있는 게 바로 그 부분이거든요. 저는 LUNA의 발현이 다르게 되는 원인을 뉴브라칩으로 보고 있어요.”

“그건 이미 전두엽에 이식하는 3세대 뉴브라칩만이 LUNA의 증식을 막는 데에 효과적이라고 결론 난 것 아니었습니까?”

지난 1년 반 동안의 연구에서 LUNA와 뉴브라칩 간의 관계는 굉장한 화두였다. 초기엔 LUNA 발현자는 비이식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사람들은 뉴브라칩을 이식 받기만 하면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곧 뉴브라칩을 이식 받은 경우에서도 발현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이전 세대의 뉴브라칩을 이식 받았거나 전두엽이 아닌 다른 곳에 이식 받은 경우가 많았다. 불법적인 이식 시술을 받은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뉴브라칩을 이식 받지 않았거나 구식 세대를 이식 받은 구세대들, 뉴브라칩을 이식 받을 정도로 뇌가 성숙하지 못했던 어린 아이들, 정식으로 뉴브라칩을 이식 받을 여건이 미비한 저개발국가의 사람들, 아예 뉴브라칩을 거부하던 사람들. 모두가 LUNA 발현자가 되었다. 뉴브라칩의 이식으로 LUNA의 발현을 막았어도 발현자들의 공격을 받아 생존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상당히 불공평했지만, 부유한 청장년층만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약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부 약자가 되어버렸다.

“네, 확실히 그렇죠. LUNA가 발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그럼 뉴브라칩을 이식 받고 LUNA가 발현한 경우는 어떻습니까? LUNA가 결국 뉴브라칩까지 변형하여 이용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면? 실제로 구세대 뉴브라칩 이식자의 LUNA 발현 사례는 이렇게 보고 있죠.”

“진화가 그렇게 편향적으로 일어날 리도 없고, 설령 약간의 편향이 있을지라도 그렇게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도 없지 않습니까?”

“진화는 그렇겠죠. 하지만 제 말은 이건 일종의 교육 같은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그 방법을 습득한 개체가 아직 그걸 모르는 다른 감염자에게 퍼뜨리는 거죠. 밈처럼.”

유진은 시아라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들렸다. 아까 전의 다른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거들떠보지 않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두뇌가 어느 정도 발달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를 이룬 무리에서만 나타난다고 보이는 밈의 전파를 LUNA 같은 단백질 덩어리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LUNA는 유전물질과 그걸 둘러싼 단백질로 된, 바이러스와 프리온을 섞어놓은 미생물 아닙니까? 아니, 설마, 발현자의 변형된 뇌가?”

“이 가설이 맞는다면 현재 살아남은 사람들도 안전하지는 않겠죠. 물론 발현자들이 어떻게 소통하는지는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이미 우리 몸 안에 들어온 LUNA까지 자극할 수 있다면 남은 인류가 모두 발현 증세를 보이는 건 시간 문제니까요.”

시아라의 연구실에서는 발현자의 두뇌 해부도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Safety Zone at Richmond, Virginia]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말이 없었고, 그 때문에 주방위군과 한 여자의 실랑이는 보다 과열되어 보였다. 소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소란이었지만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모자나 부르카 등의, 머리를 가리는 복장이 금지된 이후로 종종 있던 일이었다. 단순히 안전 구역 내에서 발생한 LUNA 발현자를 가려내기 위함 뿐만 아니라 뿔을 가리고 숨어들어오려는 영악한 발현자가 나타나서 생긴 조치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시행령이 통과되었지만 열성적인 종교인들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로 인해 시행 초기에는 많은 무슬림들이 구속되기도 했었다. 한 번은 원칙밖에 모르는 안드로이드에 의해 차도르를 쓴 여자가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로 무슬림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고, 안드로이드만으로 경계를 서지 않고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사람이 안드로이드를 통제하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이런 와중에도 아직까지 히잡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할 노릇이었다.

사실 주방위군이 지금 당장 저 여자를 쏴 죽여도 큰 문제가 아닌 상황이었다. 모자금지 시행령은 말이 시행령이지 웬만한 법보다 상위로 취급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환경에 의해서든 뉴브라칩을 이식 받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LUNA가 발현했다. 뉴브라칩을 이식 받았어도 뉴로모픽인 3세대가 아니거나 불법 이식을 받은 경우에는 마찬가지였다.

LUNA가 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LUNA 발현자들의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아무리 발현자들의 인지 능력이 저하했다고 해서 뇌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발현자들이 무기라도 들고 있는 경우에는 희생자 수가 더욱 늘어났다. 그렇게 전세계 인구의 5%만이 살아남았고, 그마저도 점점 줄고 있었다. 수많은 도시들이 폐허가 되었고, 아예 사라지다시피한 나라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동아시아의 일부 도시들은 3세대 뉴브라칩 이식자의 비율이 압도적이었기에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런 도시들로 모여들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당장 차도르를 벗지 않으면 모자금지 시행령에 의거해 당신을 체포 구금할 겁니다. 이에 불응 시 사살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히잡이지 차도르가 아니에요! 그리고 뉴욕에선 이마만 드러내면 됐다고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전 뉴브라칩 이식도 받았어요. 감염자가 아니라고요! 이건 명백한 종교 차별이에요!”

여자는 강하게 항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말은 틀렸다. 지구상에 LUNA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LUNA는 공기 중으로도 쉽게 퍼졌고, 비강의 점막으로도 체내에 침투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LUNA에 감염되는 것이었다. 다만 전두엽의 뉴로모픽 뉴브라칩만이 LUNA에 의한 뇌 변형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일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태 초기에는 밝혀진 게 없어 당연히 알 수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연구가 진행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보도 통제를 할 정부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마찬가지로 제 기능을 하는 언론도 얼마 되지 않았다. 임시 기구들은 LUNA의 감염과 발현을 구분하지 않고 감염이라고 통합해서 발표했다. 극도의 불안 위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은 감염되지 않았다는, 혹은 내 옆 사람이 감염되지 않았다는 눈속임이 없이는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할 수 없군. 체포해.”

주방위군 병사가 지시를 내리자마자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안드로이드들이 움직였다. 안드로이드들은 뒷걸음질 치는 여자를 재빠르게 잡아 수갑을 채웠다. 여자는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금속으로 이루어진 골격과 외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놔요! 전 배급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고요. 전 아이가 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저희의 지시만 제대로 따라주신다면 늦어도 오늘 밤 안에는 훈방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검문소 근처에 세워진 검역 시설에서 뇌 MRI 촬영을 하여 LUNA 발현의 징후가 없다면 훈방될 것이었다. 뉴브라칩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걱정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뇌 조직이 등록된 뉴브라칩 설계도와 약간이라도 다르게 변형되기만 했어도 바로 추방이었다. 뉴욕이라고 이곳과 별반 다를 것은 없겠지만, 리치몬드는 근방에 랭글리 연구 기지가 있는 만큼 보안에 더 철저했다. 결국 저 여자는 오늘 하루를 그대로 날려버릴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테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남동생 드미트리와 여동생 란샤가 주방에서 그녀를 맞았다. 테사는 배급품을 식탁에 올려놓고 둘과 차례차례 포옹했다.

“게롤트 오빠는?”

“2시간 전에 일어났어. 검보를 좀 해줬는데 반 정도 먹고 남겼어. 여전히 방에서 나오지는 않고.”

테사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위층으로 향했다. 게롤트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그가 보였다. 그가 언제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일이 흔하지는 않았다. 테사는 조용히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그동안에도 게롤트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대신 무심히 입을 열뿐이었다.

“고요한 거리를 보고 있으면 2년 전 사건은 마치 꿈이었던 것 같아. 실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지. 내가 알던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미쳐갔던 것도,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던 것도.”

게롤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창문을 건드렸다. 투명한 창문에 희뿌연 지문이 미끄러졌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지난 2년이 전부 꿈이어서 눈을 뜨면 원래대로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거지. 어머니도, 사첼도 모두 평소처럼 있고.”

어머니와 사첼, 둘 다 이제는 변함없는 기록으로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테사의 어머니, 달시는 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푸고 삼촌은 할아버지가 무슨 군사 실험에 참여했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알려줬다. 그때 달시는 고작 13살이었고, 아버지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아버지를 잃게 만든 정부와 기술에 대한 분노에 짓눌린 10대를 보냈다고 했다.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었는지, 테사가 공군에 입대한다고 했을 때 달시는 그 누구보다 극렬히 반대했다. 테사에게는 이야기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자 자부심의 원천인 할아버지였지만, 달시에게는 허망한 빈자리이자 슬픈 성장의 상징인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만큼 첨단 기술의 사용을 꺼리던 달시는 뉴브라칩 이식을 받지 않았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 다리를 절게 되고서도 의료용 뉴브라칩조차 거부했다.

사첼은 달시와 가장 닮은 동생이었다. 달시처럼 첨단 기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족들 중 그 누구보다도 달시의 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달시가 쓰러진 후로는 항공승무원이라는 자신의 꿈까지 접고 그녀의 재활을 도우며 재활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할 만큼 사첼은 달시를 살뜰히 챙겼다. 달시가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자 사첼은 잠을 잘 때마저 그녀의 곁에서 잤다.

그리고 O-Ring이 추락했다. 달시와 사첼은 침대 아래로 추락했다. 사첼은 뉴브라칩을 통해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게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옥상에서 태양광 패널을 수리 중이던 게롤트는 집에 같이 있으면서도 전화를 건 사첼을 이상하게 여겼다. 전화를 걸고도 사첼이 얼굴도 비추지 않고 말도 안 하자 게롤트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연장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상한 소리가 나는 달시의 방문을 열었다. 달시는 사첼의 배 위에 올라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게롤트는 연장을 집어던지고 달시와 사첼을 떼어놓기 위해 달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근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일부러 무시하려고 해도, 잠에만 들면 그날이 계속 반복돼. 손의 감촉이 사라지질 않아. 내 손으로… 내 손으로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내가 좀만 더 마음을 굳게 다졌다면 달랐을까? 그럼 어머니를…….”

테사는 떨고 있는 게롤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오빠, 나 이제 한동안 집에 못 들어올 거야.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됐어. 달까지 갔다 오는 거니까 전처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동안 드미트리와 란샤랑 같이 건강히 보내고 있어. 요새 날씨가 좋으니까 산책도 좀 하고.”

게롤트는 천천히 손을 뺐다. 테사는 창문의 비치는 모습으로는 그의 흐릿한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긍정적이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아직도 공군에서 복무 중인 거였어? 어머니는 그렇게도 반대했었는데, 이런 지경이 되고서도 네 고집대로 행동하는 거야?”

게롤트는 고개를 돌려 테사를 쳐다봤다. 테사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푸고 삼촌에게 들은 게 전부였지만, 테사만큼 할아버지의 완강함을 지닌 사람은 가족 중에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군인인 게 싫었던 게 아니라 할아버지처럼 될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하신 거야. 그리고 난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고. 내가 하려는 건 비밀스러운 실험이 아니니까. 그저 지구를 다시 원래대로 바로잡으려는 것뿐이야.”

테사는 게롤트의 방을 나왔다. 집 전체에 고소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주방에서 검보를 다시 데우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막내였지만 아무도 그만큼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정리에는 소질이 없는 듯했지만, 그건 란샤가 보조해주었다. 란샤는 어느새 배급품을 정리해 놓고는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내 건 차릴 필요 없어. 바로 랭글리 기지로 가야 해.”

“그렇지만 언니, 아침에도 우유 한 잔밖에 안 마셨잖아.”

“아니면 내 검보가 입에 맞지 않는 거야?”

“그럴 리가.”

테사는 손을 뻗어 란샤를 끌어안았다.

“오빠를 잘 돌봐줘. 내가 없으면 네가 제일 연장자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테사는 마찬가지로 드미트리도 안아주었다. 드미트리가 국자를 놓지 않아 자세는 좀 이상하게 됐다.

“우리 듬직한 막내. 진짜 남자는 이제 너뿐이니까, 너는 란샤 누나를 지켜야 해. 알았지?”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 누나가 좋아하는 재료로만 검보를 만들어 놓을 테니까.”

 

 

[Langley Research Center, Virginia]

“LUNA에 의해 인류는 전에 없던 위기를 맞았습니다. 95% 이상의 인구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그만큼 많은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인류는 그나마 손에 쥔 것들을 유지하는 것도 겨우겨우 해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절망적인 작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것들이 인류 최후의 방주로 고려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의 인류는 절박합니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은 존재합니다.”

 

“달로부터의 메시지입니다!”

로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다른 관제사들 모두 그녀를 주목했다. 휴는 바로 아미싯에게 연락을 취했다. 수신된 데이터는 곧바로 관제팀 전원에게 공유되었다.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로지는 데이터의 정보를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통신 코드 SM-CF-094-SEP-42-11-2A-4B, 저장 기록 MT-CA-094-SEP-42-0A-11-13, 방금 전에 FSM에서 발신됐고 저장은 3시간 전 올드린 기지입니다!”

“노이즈 제거를 시작합니다.”

아미싯은 휴의 연락을 받자마자 회의를 중단하고 관제소로 왔다. 자기가 없어도 각자 알아서 자신의 임무를 잘한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었지만, 하필 자리를 비운 시간에 이런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점에서 아미싯은 내심 아쉬워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순간에 관제소에 있었어도 달리 할 일이 없었을 거라고 아미싯은 스스로을 위로했다. 노이즈 제거 작업이 거의 끝나자 아미싯은 관제팀에게 지시를 내렸다.

“중앙으로 공유하게!”

곧이어 관제소 중앙의 홀로그램 기둥에 복잡하게 진동하는 파동이 나타났다. 관제소 전체를 울리는 큰 목소리였다.

<저는 올드린 기지의 트레게놈 사 소속 연구원 엘리자벳 칼리스테입니다. FSM 기지를 포함한 달 기지 전체가 사람들의 집단적인 정신질환 발병 때문에 파손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구조도 없는 것을 보면 지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이러스와 프리온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무언가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밝혀냈고, 그 치료제도 합성해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임시로 복구한 통신 장비로는 그 합성법조차 전송이 안 됩니다. 구조대를 요청합니다. 아직 살아남은 인류가 있다면, 구조대를 보내주세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간 중계 기지가 발달하면서 곧바로 우주로 나갈 수 있는 우주선은, 아직 완성도 못 한 실험기와 박물관에 처박혀 있는 고물들뿐입니다. 다른 기지의 우주선을 쓰고 싶어도 LUNA 때문에 모두 차단되어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새로 우주선을 건조한다고 해도 자원을 조달하는 데에만 수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로지는 아미싯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탭을 건넸다. 아미싯은 손가락으로 탭 화면을 이리저리 문지르다가 그것이 답답했는지 홀로그램을 가동했다. 조그만 렌즈로부터 빛이 뿜어져 나왔고 중형 비행선 하나가 구현되었다. 알래스카에 불시착했다는 러시아의 실험기였다.

“그래서 이게 지금 이곳에 있다고? 근데 왜 여태껏 아무도 몰랐지?”

“원래는 알래스카에 있던 건데 연구와 방첩을 위해 NSA에서 비밀리에 옮겨온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NSA 요원들이 LUNA에 걸리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은폐된 듯합니다. 실험기들에 탑재할 설비를 물색하는 와중에 제9 창고에서 찾아냈습니다.”

로지가 옆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동안 아미싯은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곳곳에 달린 러시아어 명칭 밑에 영어로 번역된 설명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가끔 줄이 추가되는 것으로 보면 분석 중인 내용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중요한 건, 이걸 사용할 수 있나?”

“기본적으로 우주 항행 전용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어서 이대로는 무리지만, 약간만 개조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험기들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들 3분의 1이 이 ‘밤부엉이’의 시스템을 분석하기 위해 달라붙어 있습니다.”

“이걸 몰 수 있는 조종사는? 우리 쪽 시스템과 너무 다르면 비행사들이 적응하기 힘들어할 텐데.”

아미싯의 물음에 로지는 즉각적이고 솔직하던 평소와는 달리, 답하기를 잠시 머뭇거렸다. 아미싯이 한 번 더 묻고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걸 타고 망명한 안드례이 벨랴코프 씨가 자원했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군!”

일리야는 안드례이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나아가 안드례이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안드례이는 벽에 등을 대고 그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너의 조국에 대한 애정은 고작 그 정도였어? 타지에서 좀 살았다고 그새 물들어버린 건가? 나라가 무너졌는데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안 쓰고 남의 나라를 돕는다고?”

그렇게 한참을 쏘아대던 일리야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테이블에 올려둔 물병을 집어 들었다. 그날따라 일리야의 어깨는 유독 쓸쓸해 보였다. 일리야는 물병을 다시 내려놨고 안드례이는 굳게 잠갔던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리야에게 다가갔다.

“자네와 나는 확실히 달라. 어머니 러시아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말이야. 나는 어머니에게 배운 그대로, 인민의 생존을 위해 용단을 한 거야.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네 가족이 쿠르스크에 살아 있어!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갈 생각은 않고, 여기 남아 조국의 소중한 정보를 다 넘기고 목숨까지 희생하겠다고? 그게 자네가 말하는 애국인가? 가족을 버리고 타국을 선택하는 게?”

안드례이와 일리야가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취한 행동은 망명 신청도, 대사관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가족들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 대략 10주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안드례이는 쿠르스크 주의 안전 구역으로 피신한 가족들과 통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리야는 지금까지 가족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의 고향인 이르쿠츠크 주에는 안전 구역이 세워지지 않았고, 임시 기구들의 영향은 동쪽 지역으로 갈수록 급격하게 약해졌었다. 10주가 10개월이 되자 일리야는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던 일과를 그만두었다.

“그런 게 아냐.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자네 말대로 러시아는 무너졌어. 하지만 어디 러시아뿐인가? 세계에 ‘국가’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곳이 과연 있기는 해? 냉전도, 무역 전쟁도, 자원 경쟁도 이제는 역사서에나 나오는 일이야. 신앙도 빈 껍데기가 되었고, 이념은 모든 힘을 잃었어. 생존 외에 유의미한 개념은 기껏해야 죽음뿐이지.”

일리야는 안드례이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네 말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지금 너의 판단이 맞든 틀리든 종국에는 후회할 거라고 장담하지. 그때 위성 자료를 모두 버린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안드례이의 설득은 일리야에게 더는 다가서지 못했다. 안드례이는 일리야를 지척에 두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일리야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안드례이는 그가 이 정도로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달은 다시 미지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달의 모든 기지와 연결이 끊어졌고, 위성으로는 내부의 피해 상황이 어떤지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칼리스테 연구원이 2년 가까이 생존한 것을 보면 전력은 유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의 기능은 전부 망가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해야 하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고,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들이 치를 떠는 말이기도 했다. 아미싯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아미싯이 강연대에서 비키고 휴가 대신 탭을 들고나왔다. 홀로그램 스크린 왼편에 우주선이 지구에 추락한 지점과 개수, 격추한 우주선의 개수, BEAM과 달에 잔존할 것으로 추정되는 우주선의 개수가 떴다. 잔존 우주선의 개수는 BEAM의 수용 한계보다 적었지만, 모든 우주선이 BEAM에 정박해 있을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 옆으로 달에 있는 기지들의 구획 별 설계도가 줄을 지어 나타났다.

“칼리스테 박사와 그녀가 합성한 치료제 혹은 그 합성 방법을 확보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표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환하는 것입니다. 칼리스테 박사가 살아있었으니 적어도 올드린 기지의 생명 유지 시설이 일부 가동하고 있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유지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면 괜찮은 것 아닙니까? 달의 기지들 전부 구획마다 비상 발전기가 있고, 반 달간의 태양광 축전으로 나머지 반달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까?”

랴오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의 물음이 물꼬가 되어 다른 기지 엔지니어들도 비슷한 질문을 연달아 했다. 구획 간 잉여 전력의 교환이나 위성 사진으로는 확인되지 않은 태양광 패널의 파손 문제 등등, 휴가 언급할 계획에 없던 것들이 대다수였다. 휴는 그래도 질문들에 착실히 답을 하고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달이 LUNA의 발원지라는 겁니다. 칼리스테 박사의 메시지에서도 LUNA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달의 기지들에도 LUNA 발현이 이뤄졌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 유지 시설의 가동으로 인해 발현자들까지 생존해 있다면 작전 수행에 있어 크나큰 걸림돌이 될 겁니다. 도중에 그들이 기지 시설을 파괴하기라도 한다면 치료제와 합성법의 확보는 몰라도 박사의 구조는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이어서 달 표면 사진이 몇 개 나타났다. 로버와 우주선 몇 대가 파손된 채로 정지해 있었다. 달의 기지들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여기 보이는 로버와 우주선은 기지로부터 나가는 방향을 향한 채 정지해 있습니다. 로버는 무엇에 의해 파손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감식팀에 의하면 우주선은 낮은 고도에서 날다가 추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은 기지들에만 신경을 쓰느라 포착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여기 기지 주변의 바퀴 자국을 비교해보면, 적어도 로버만큼은 2주일 전에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브리핑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로버를 운전한 사람이 칼리스테 박사라면 위험한 상황이었고, 혹시 모를 다른 생존자라면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안드로이드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로버와 우주선이 처음부터 고장 나 있었다면 모를까, 안드로이드가 안전 프로토콜을 무시할 리는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LUNA 발현자가 운행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조심스레 내놓았지만, 발현자의 지능 수준을 문제 삼아 금세 일축되었다. 차량에 오르는 데까지만 하더라도 최소 3번의 인증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게 대체 어쨌다는 겁니까?”

점심시간을 넘기며 점점 길어지는 브리핑에 랴오젠은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전문 분야도 아니었던 노즐까지 손보느라 아침도 거르고 작업하던 그였다. 다른 엔지니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류에게는 더는 충분한 것이 없었고, 한 가지만을 붙잡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랭글리 기지에서는 모두가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했다.

“기지 안에 차량을 운행하려는, 적어도 접근하려는 존재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목적이 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운행 실력을 보았을 때 접근을 가능한 한 차단해야 할 겁니다. 달에 운행 가능한 우주선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어쩌면 우리가 보낼 우주선이 유일한 탈출의 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누군가 우리가 타고 간 우주선을 날려 먹는다면 그대로 기지에 고립될 수도 있다, 그 말인가요? 참 지랄 맞은 임무네.”

파르샤는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녀는 원격 송수신 장갑을 벗지도 않은 채였다. 실수로라도 원격 조종을 해제하지 않은 상태라면 연결된 로봇은 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터였다. 휴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그 어느 때보다 위험도가 높습니다. 안전하게 생환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참여를 원치 않는 분은 지금 회의장을 떠나도 좋습니다.”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파르샤도 턱을 괸 심드렁한 표정 그대로였고, 랴오젠도 점심 식사를 기다릴 뿐이었다. 기지 인원들이 바라는 것은 오히려 지구 밖에 고립된 희망을 건져 올리는 것이었다. 아미싯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구조대를 보낼 것입니다. 첫 번째 구조대는 밤부엉이를 개조한 검부엉이(Черная Сова, Black Owl) 한 대만이며, 구조 계획과 선체 공간을 고려하여 인원은 2명의 조종사, 2명의 엔지니어, 2명의 의무요원, 총 6명으로 제한될 겁니다. 선발대가 보내오는 정보를 토대로 곧바로 다음 구조 계획을 수립해 실행할 것입니다.

 

“아니, 기지나 우주선을 수리해야 하니까 엔지니어들도 동행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군사 훈련까지 꼭 받아야 합니까?”

파르샤는 바닥에 드러누우며 헬멧을 벗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가 땀에 절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다. 헬멧 스크린에는 김까지 서려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유진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파르샤는 그 손을 잡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발현자 무리에 둘러싸였을 때 한 명이라도 더 총질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그런데 체온 조절 시스템은 일부러 끄신 거예요? 웬만해선 그 정도까지 땀 날 일이 없는데….”

“네? 어? 그런 기능이 있었어요?”

파르샤는 벗어 던졌던 헬멧을 다시 썼다. 마이크에 대고 체온 조절 인터페이스를 발음하니 해당 UI가 나타났다. 파르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녔는데 다른 사람들은 시원하게 쿨러를 돌리며 산뜻하게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뭐,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 시원하게 훈련하시면 되죠. 그러니 이제 일어나시죠.”

유진은 다시 손을 뻗었다. 파르샤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대신 손을 까딱거리며 마실 것을 요구했다. 유진은 전투 가방에서 물 한 병을 꺼내 건넸다. 파르샤는 물병을 건네받자마자 급히 목을 축였다. 물은 금세 반이나 사라졌다.

“아, 몰라요. 당신처럼 FDF 출신이면 모르겠지만, 저 같은 일반인은 맨몸으로 뛰기만 해도 쓰러진다고요.”

“그건 당신이 너무 운동을 안 하는 거죠, 파르샤. 그리고 저도 부상자들 치료한다고 고작 3개월간 따라다닌 게 전부예요. 하지만, 보세요. 빅터는 갈비뼈 두 개를 갈아 끼우고도 잘만 훈련하지 않습니까?”

유진의 말대로 빅터는 언덕을 쉼 없이 오르내리며 목표물을 사격 중이었다. 홀로그램 목표물이 사라지자 빅터는 유진과 파르샤가 쉬고 있는 곳으로 왔다. 파르샤는 그에게 물병을 건넸고 빅터는 남은 반병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유진이 꺼낸 병은 결국 텅 비어버렸다. 파르샤도 바닥이 드러난 병을 아쉬운 듯이 쳐다봤다.

“하아, 근데 굳이 이런 위험한 상황에 사람을 투입하는 게 나을까요? 전투용 안드로이드나 몇 대 내보내는 게 훨씬 나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파르샤에게 빅터는 손을 내밀었다. 이마저도 거절하기에는 미안했던 파르샤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유진은 옆에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걸요? 로지 말로는 처음에는 그것도 고려했다고 하는데, BEAM도 잃어버린 지금 몇 초간의 통신 지연을 감수하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고 판단했대요. 웬만한 상황이면 안드로이드의 인공지능으로 대처가 가능하겠지만,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위급 상황에서는 너무 치명적일 거라고 푸념하더라고요.”

“그래서 안드로이드를 대체한다고 사람이 6명이나 필요한 건가요?”

“그렇죠. 안드로이드만 잔뜩 싣고 가도 위급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 한 명이 컨트롤할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무엇보다 달 기지들의 통신을 방해하는 게 안드로이드에도 적용된다면 가져가봤자 고물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죠.”

빅터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파르샤의 소총을 주워들었다. 유진은 파르샤의 헬멧을 대신 들고 다음 훈련 구획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빅터는 소총의 반동 세기를 조절했다. 파르샤는 빅터의 행동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1주일 후에 시작될 작전에 가 있었다. 급하게 진행되는 작전이라 그런지 아직 참가자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것들이 많았고, 기껏 보고 받은 내용도 수정되기 일쑤였다. 시도 때도 없는 계획 변경에도 변함이 없는 건 엔지니어들의 우주선 건조 및 개조 일정뿐이었다.

“그래도 검부엉이가 아무리 중형 우주선이라지만 6명은 너무 적지 않아요? 6명이서 5개 기지를 전부 돌려면 못해도 사흘은 걸릴 것 같은데.”

“로지한테 들었는데, FSM과 올드린 기지를 우선적으로 수색할 계획이래요. 칼리스테 박사의 흔적이 그 두 곳에서 나왔잖아요. 뭐, 그곳에 없으면 결국 나머지 기지들도 들러야겠지만 말이죠.”

파르샤는 입술을 오므리며 팔꿈치로 유진을 가볍게 밀었다.

“아까부터 로지, 로지 하고 있는데, 벌써 관제팀하고도 친해진 거예요? 그래서 그녀가 뭐래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와인 한잔하면서 알려주겠대요?”

“그런 거 아니에요.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됐다간 여동생이 절 죽이려 들걸요? 걔 친구거든요. 뭐, 제가 워낙에 훤칠하니 로지가 반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요.”

파르샤는 이번에는 미간을 모으며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으으, 자신감 하나만큼은 인정하겠습니다. 근데 아는 건 진짜 그게 전부에요?”

“1차 수색 대상인 기지도 2개밖에 안 되고 목표도 1명인 만큼 2명, 3명 이렇게 나눠서 수색할 거라더군요. 나머지 1명은 우주선에 남아 구조 지원과 지구와의 통신을 맡고요.”

그러는 사이 셋은 훈련 구역에 도착했다. 앞서서 훈련을 받고 있던 랴오젠이 다른 엔지니어들과 함께 나왔다. 파르샤는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빅터와 유진도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했고, 파르샤에게 소총과 헬멧을 돌려주었다. 파르샤는 이번에는 체온 조절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소총을 견착하며 자세를 잡았다. 빅터는 파르샤의 뒤 편에서 비켜나며 말했다.

“이번 훈련에선 제자리에서만 사격할 겁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인터페이스에서 다리 고정쇠를 작동시키도록 하세요. 자세 제어 기능은 따로 만지지만 않으셨다면 상시 작동 중이니 설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요? 그냥 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파르샤는 방금 나타난 홀로그램 목표물을 향해 한 발을 쐈다. 묵직한 총성과 함께 그녀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자세 제어 기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공중에 떠서 날아가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파르샤는 대자로 뻗었다. 유진은 이번에도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렇게 되거든요. 무중력 상태에선 말할 것도 없고, 달에선 고작해야 지구 중력의 16%밖에 받지 않아 마찰력도 그만큼 작게 작용하잖아요. 뭐 반동이 작은 모드만 사용한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것도 무중력에서는 무용지물이니 사람이 조심해야죠. 기술이 발전해도 자연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파르샤는 헬멧을 벗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난 이래서 우주가 싫어!”

 

“우리는 다시 우주로 나갑니다. 2년 만에 달을 다시 밟을 겁니다. 미지를 넘어 공포로 가득한 공간으로 들어섭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비행이 두려웠다면 우리는 땅만 보고 사느라 멀리 있는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파도가 두려웠다면 바다가 전부 얼어붙은 후에야 새로운 섬과 대륙에 발을 디딜 수 있었을 것이고, 불이 두려웠다면 아직도 날고기를 뜯으며 다른 동물들처럼 살아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공포를 극복해야 전진할 수 있습니다.”

 

아미싯은 파르샤에게 검부엉이 개조의 진척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의료 설비와 의료 인공지능의 추가와 2대의 소형 탐사선 추가, 이를 위한 선체 공간의 확장 등등 거의 모든 부분이 완료되었다. 남은 것은 쓸데없이 공간을 차지하는 전파 방해 프로그램과 그 설비였다. 시스템이든 우주선 무게든 경량화를 위해 떼어내고 싶은 것들이었지만, 밤부엉이의 주 인공지능 쿠드랴프카는 그런 시도가 있을 때마다 보안 경고를 울려댔다. 러시아에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구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회로를 찾는다고 해도 전파 방해 설비를 해체하려면 스텔스 기능까지 결합된 선체 외벽을 전부 헤집어야 했다.

외벽의 소재도 문제였다. 외벽은 전부 복잡한 구조의 메타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주항공기 소재에 메타물질을 사용하는 건 희한한 일은 아니었다. 센서를 위해서든 렌즈를 위해서든, 특히 외부 파동으로부터의 안정성 때문이든 메타물질의 사용은 흔했다. 하지만 검부엉이에 사용된 메타물질은 달랐다. 그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만 200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특이한 구조에 기인한 특성에는 100시간이 더 걸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구조는 전부 파악했지만 주조가 되지 않았다. 외벽에 일정 수준 이상의 변경을 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인공지능과 외벽 전체를 밀어버리고 새로 구축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른 우주선을 찾는 게 더 나았다.

검부엉이와 쿠드랴프카에 이런 게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습니다. 러시아 항공우주군이 완전 작정하고 만든 것 같아요. 큰 문제가 없다면 그냥 이대로 진행하는 게 제일 빠를 겁니다. 뭐, 전파 방해를 사용할 일도 없으니 신호를 놓칠 일도 없겠죠.”

파르샤는 보고를 끝내고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그 옆으로 휴가 다가왔다. 휴의 뒤에는 테사가 있었다. 스크린에 뜬 작업장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던 아미싯은 휴의 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아, 자네가 부상 당한 친구 대신 부기장에 자원했다는 그 조종사인 모양이군.”

네, 미합중국 공군 중위 테사 마샬입니다.”

휴는 아미싯에게 탭을 넘겼다. 아미싯은 탭 화면을 위아래로 움직이면 빠르게 훑었다.

마샬? 그렇지만 여기에는 타이런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 원래는 타이런이 맞습니다. 마샬은 공군이셨던 제 할아버지의 성입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저 나름의 존경의 표현입니다.”

아미싯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놀라움과 죄책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테사는 표정만으로는 아미싯의 복잡한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자네 할아버지의 성함이 혹시 뷔니시에 마샬인가?”

그제서야 테사는 아미싯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저희 할아버지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알다마다. 자네 할아버지와 함께 연구를 했었지. 그는 정말 열성적이고 세심하고 또 정직한 사람이었어.”

“오랫동안 알고 지내셨습니까? 제가 알기론 저희 어머니께서 아직 어리실 때 돌아가신 터라 이야기로 전해 들은 것밖에 없습니다.”

아미싯은 뷔니시에가 늘 품에 간직하던 사진을 보여주며 가족 얘기를 하던 기억이 얼핏 났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꽤나 어려 보였었다. 그 아이들이 자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시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 아미싯 앞에 선 것이었다.

“나도 마지막 1년밖에 같이 일하지 않았었네. 아니, 이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낫겠군.”

그러면서 아미싯은 조심스레 휴를 살폈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은 이미 이전의 미국이 아니었고, 명맥을 유지하는 정보기관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몸에 밴 습관은 일종의 무의식처럼 작용했다. 테사는 아미싯의 그런 태도를 놓치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있었던 거군요. 하지만 이제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되지 않습니까?”

아미싯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쓸데없는 희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이고, 또 갈 곳 잃은 원망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네.”

묘한 말이었다. 테사는 뷔니시에와 함께한 기억은 고사하고 그를 직접 본 적도 없으니 딱히 원망의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미 40년 전의 일이니 이렇다 할 희망을 품을 일도 없었다. 지금 뷔니시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고 해서 없던 희망이 생길 리도 없었다.

“희망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도 그의 생사를 모른다는 거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그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일세. 그러니 보안이니, 기밀이니 그런 걸 떠나서 내가 더는 해줄 수 있는 말도 없네.”

아미싯은 고개를 숙여 다시 탭을 조작했다.

“그런 것보다는 임무에 대해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우주 항행으로는 BEAM까지 3번, BeSol(Beyond Solar system)까지는 1번 갔다 왔군. 쿠드랴프카에는 적응했나?”

테사는 아미싯이 더는 말할 의지가 없음을 느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미싯의 마음을 돌릴 수단이 없어 보였다. 테사는 작전이 모두 끝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쿠드랴프카는 이제 제 친구나 다름없습니다.”

 

아미싯은 한 번 호흡을 하고 마지막 문단을 읽어 나갔다.

“우리가 언제든지 달의 밝은 면만을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달에도 언제나 밝은 면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됩니다. 인류가 전진해 왔듯이, 우리는 칼리스테를, 인류를 구조해낼 것입니다.”

 

 

[spaceship Черная Сова, near Lagrange Point between Earth and Moon(1st Lagrange Point)]

“이제 약 10분 후면 BEAM 옆을 지나갑니다. 혹시 BEAM의 모습이 궁금하신 분들은 선체 전면부에서부터 12시 방향으로 이어지는 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체에 안드례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던 대원들이 하나둘 조종석으로 모여들었다. 아직 지구 그림자 안에 있는 탓인지 창밖은 어두웠다. 달도 밝기가 조금 줄어들었을 뿐 바뀐 게 없었다.

“지금쯤이면 보여야 하는데 안 보이네요. 쿠드랴프카, BEAM의 시뮬레이션을 창에 덧씌워서 보여줘.”

테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투명한 BEAM의 외관이 창에 떴다. 대원들은 그제서야 눈앞에서 반짝거리던 것이 별빛이 아니라 BEAM의 항공장애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BEAM은 통신 기능에만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기지 전체가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파르샤는 입을 가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야, 저건 진짜 이상한데? 보통 비상 상황이 생겨서 기지 기능이 정지해도 비상 전력은 있고 하니까 활동 구역의 회전은 유지되거든요? 그런데 죄다 멈춰 있네?”

“거기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습니까?”

안드례이가 물었다.

“아뇨, 따로 특별한 게 있진 않아요. 그냥 뭐, 기지 전력이 아예 죽었다거나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정지시켰거나 하는 거죠.”

“충분히 특별하고, 충분히 안 좋네요.”

파르샤의 답에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대원들의 심정도 그와 비슷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BEAM도 LUNA 발현자들로 넘쳐날 텐데 저기까지 안 들려도 되니.”

랴오젠만이 그나마 긍정적인 의견을 표출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 랴오젠도 아래로 축 끌려 내려간 입꼬리는 어쩌지 못했다. 대원들은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봤고, BEAM은 직경 2km짜리 구라는 크기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방금 라그랑주 지점을 지났으니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앞으로 약 50분 후면 첫 번째 사출 지점에 도착할 겁니다.”

안드례이의 말에 다른 대원들은 정면을 쳐다봤다. 확연히 커진 달이 그들을 반겼고, 창 한쪽 구석에 카운트다운이 떠 있었다. 그 아래로 휴의 얼굴이 나타났다.

“달 기지들로부터 송출되는 신호는 없나?”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는다.”

안드례이는 휴의 질문에 즉답했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휴의 목소리가 들렸다.

“FSM과 올드린 말고 다른 기지의 신호도 안 잡히나?”

안드례이는 테사를 쳐다봤고 한참 전부터 레이더 스크린을 보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드례이는 한숨을 한 번 쉬고 휴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다. 달은 고요하다.”

“알겠다. 그럼 BEAM 기능이 완전 정지한 것으로 보이니 2 안대로 작전을 시행하라.”

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사는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기 위해 부조종석에서 일어났다.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소총과 전투 가방을 건넸다.

“매뉴얼대로 미리 좀 챙겨놨어요. 우주복 설정은 안 건드렸고요.”

“감사합니다, 홉킨스 씨. 덕분에 시간을 절약했네요.”

안드례이를 제외한 5명의 대원들은 우주복으로 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비를 꼼꼼히 점검하고는 2대의 탐사선에 나눠 탔다. 랴오젠과 빅터는 1번 탐사선에 올랐고 유진, 테사, 파르샤는 2번 탐사선에 올랐다. 탐사선의 시스템을 가동하자 스크린에 검부엉이의 정보들이 공유되어 표시됐다. 1번 탐사선은 2번 탐사선이 사출된 후 약 1분 후에 사출될 예정이었다.

“모두 작전 내용을 숙지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2 안대로 탐사선 사출 후 달 상공 10km 부근에서 공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달의 전파탑까지 파손되었다면, 한 바퀴 도는데 대략 15분 정도 걸릴 테니, 최소 8분 정도는 교신이 끊길 겁니다. 그 사이에 위급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빌겠습니다.”

“이왕 비는 거, 어느 때건 위급 상황 자체가 안 발생하기를 빌어주시면 안 돼요?”

파르샤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2번 탐사선의 사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유진과 파르샤는 각자의 안전벨트를 다시 점검했고 테사는 탐사선과 분사 노즐의 각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화면의 숫자가 0이 되고, 테사가 조종간을 조작할 필요도 없이 쿠드랴프카의 의한 사출이 진행되었다.

“우리 건 제대로 부탁합니다, 안드례이 기장.”

멀어지는 2번 탐사선을 보며 랴오젠이 말했다. 안드례이는 경례의 손짓으로만 답했다. 1번 탐사선도 곧 사출되었다.

검부엉이가 달의 밤으로 접어들 무렵, 2번 탐사선으로부터 FSM에 무사히 착륙했다는 신호가 왔다.

 

 

[FSM, Sinus Medii]

“여기는 구조 2팀, FSM 기지 동편 비상 선착장에 착륙했다.”

테사가 검부엉이의 안드례이와 무전을 하는 동안 파르샤는 선착장을 한 바퀴 둘러봤다. 화물선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달에 약간의 우주선이 남아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적어도 동 선착장은 텅 빈 것처럼 보였다. 기지 밖으로 나와 활개 치는 발현자 따위도 없었다. 경계해야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선착장은 깨끗하다. 이제 내부로 진입하도록 하겠다.”

유진은 선착장 동쪽 끝에 서서 기지 흑백 일색인 달의 광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FSM 본 기지의 둥그런 외벽을 따라, 저 멀리 마찬가지로 원형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발사 기지의 띠가 보였다. 안전 문제 때문에 우주선이나 로켓이 지표 위에 있을 리는 없었다. 모든 우주선과 로켓은 발사 기지 지하에 보관되었다. 소형 운석들과의 충돌은 차치하더라도 태양풍에 의한 플라스마 폭풍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복구가 불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돈된 발사 기지는 당연하면서도 어색했다. 저 아래에 얼마만큼의 화물선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물선 재고를 파악하는 것은 그들의 임무가 아니었다.

“홉킨스 씨! 이동합시다.”

테사의 외침에 유진은 뒤로 돌아 테사와 파르샤가 있는 에어 록을 향해 걸었다. 파르샤는 지체하지 않고 인증 패드에 손을 갖다 댔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인증 패드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파르샤는 소총을 뒤로 메고 수리 장갑을 장착했다. 전동 스패너와 플라즈마 절단기 등을 바꿔 사용해가며 인증 패드와 외벽을 해체하자 격자형으로 정리된 보드와 전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파르샤는 헬멧이 실사물에 겹쳐서 보여주는 설계도를 확인하며 몇몇 전선에 검침기를 대보았지만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력이 나갔나 보네. 이 구역만 그런 건지 기지 전체가 정전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문은 수동으로 열어야 할 것 같아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기압 조절 설비까지 멈췄으면 기지 내 공기가 모두 빠져나오면서 그 돌풍에 휘말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에어 록은 기본적으로 밀폐 상태로 유지되니까 누군가 중간 문을 일부러 개방해놓지만 않았다면 괜찮을 거예요. 그럼 풍압에 날리지 않도록 옆으로 좀.”

파르샤는 한 손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테사와 유진은 그 손짓을 따라 그녀의 뒤로 움직였다. 파르샤는 전동 스패너를 수동 개폐 장치에 연결했고 스패너가 회전하는 속도에 맞춰 문이 서서히 열렸다. 다행스럽게도 문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돌풍은 없었다. 대신 내부를 밝혀주는 빛도 없었다. 공기가 없어 산란마저 일어나지 않기에 내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세 명은 우주복의 야간경 기능을 활성화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을 때 감압 장치는 제대로 작동했었나 보네요. 여기가 진공인 걸 보면.”

파르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하지만 테사가 곧 끔찍한 가능성을 제기했다.

“아니면 이미 기지 전체가 진공이거나요.”

“그럼 아무도 생존 못 하는 거 아닙니까? 헛걸음하기 전에 생체 스캔을 먼저 해보는 건 어때요?”

“그러려면 기지 중앙 시스템에 접속해야 하는데 전력이 끊겼으니…. 일단 계속 나아가죠.”

파르샤는 유진의 재촉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러면서 중간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공기가 밀려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헬멧 한쪽 구석에 산소 농도는 정상이라고 표시됐다. 하지만 세 명은 야간경 기능과 설계도 대조, 기타 다른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헬멧을 벗지 않았다.

“이 드넓은 기지를 일일이 뒤지기에는 손이 너무 모자라는데요.”

유진은 스크린을 축소하여 구조도를 통해 기지 전체의 크기를 확인했다. 단순 토지 면적만 10㎢를 넘어서는 거대한 기지를 수색할 생각에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한 느낌이었다. 파르샤는 구조도에서 반짝이는 주요 시설들 중 하나를 선택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중앙통제실로 가 보죠. 비상 발전기가 아직도 가동 중이라면 조금이나마 전력을 확보할 수 있을 거고, 기지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예요.”

“문제는 너무 어둡다는 거죠. 아무리 야간경 기능이 뛰어나다지만 광자가 너무 없으면 제 기능을 발휘하기 힘드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테사는 야간경의 감도를 조절해봤지만 바뀌는 건 그다지 없었다. 우주로 몇 번 나와봤던 그녀였지만 지금만큼 공기의 소중함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결국 들킬 각오를 하고 조명을 켜는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려면 아직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았어요. FSM 기지는 투명한 천장의 은하 정원이 트레이드 마크였고, 중앙을 포함한 13개의 채광 기둥도 포진해 있으니 어느 정도 시야 확보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비록 최단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게 멀리 돌아가는 길도 아니고.”

파르샤는 내비게이션 정보를 테사, 유진과 공유했다. 곧 그들의 헬멧 스크린에도 중앙통제실까지 이르는 경로가 표시됐다. 세 명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은하 정원은 2개 층 위였다.

은하 정원의 천장 중심에는 초승달처럼 가는 지구가 있었다. 그 뒤로는 노르스름하게 빛나는 태양이 보였다. 새까만 배경에는 가지각색의 점들이 박혀서 빛나고 있었다. 정원 전체에는 저중력 환경에 맞게 유전작 조작된 식물들이 가득했다. 2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식물들이 죽지 않았다는 건 천장의 투명도 조절 기능과 수분 및 영양의 공급이 유지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행히 기지 전체가 정전인 건 아닌 모양이네.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있나 한 번 확인해볼게요.”

파르샤는 피트니스 센터와 카페테리아 사이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자 불이 들어오면서 숫자가 변하는 게 보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사가 물었다.

“위험하지는 않겠습니까? 중간에 파손 부위가 있다거나, 감염자가 소리나 움직임에 반응해 습격하기라도 하면 큰일일 텐데요.”

“후자의 경우는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파손에 의한 운행 정지를 확인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죠.”

“그게 뭡니까?”

“여기서 맨 아래층까지 왕복시켜보는 거죠. 이보다 확실할 수는 없을걸요?”

파르샤의 답에 테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파르샤는 그 표정을 보고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두 명이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동안 유진은 카페테리아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봤다. 보관고의 식자재들은 썩어서 균 덩어리가 된 지 오래였고, 정수된 물만이 그나마 안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카페테리아 중앙의 채광 기둥 쪽으로 갔다. 은은하게 빛나는 광섬유 다발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했다. 유진은 기둥을 한 번 쓸어 만졌다. 그가 몸을 돌려 테사와 파르샤에게 다가오는 것에 맞춰 엘리베이터도 최하층까지의 왕복을 마치고 은하 정원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운항에는 문제가 없네요. 그럼 곧바로 1층 통제실로 향할까요? 1층 전력도 살아 있을진 모르겠지만 통제실까지 직선 통로이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뭐, 가는 게 어렵진 않겠지만, 헛수고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진의 말에 테사와 파르샤가 뒤를 돌아봤다. 테사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카페테리아에서 뭐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식자재들이 그대로 남아 썩어 있었습니다. 만약 이곳에 산 사람이 있다면 조금의 식량이라도 확보하려고 생난리를 쳤을 테니 음식이 썩을 때까지 방치될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전력이 완전히 차단된 경우라면 그렇겠지만, 어느 정도만 수급돼도 생명 유지 시설에 최우선으로 공급되니 그런 상황은 아닐 수도 있어요. 장기간의 체류를 고려한다면 그 근처에 방호 시설을 구축해 놓고 버티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고요.”

“그럼 통제실에 들르지 말고 바로 그 생명 유지 시설로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파르샤의 답에 유진은 다시 한번 물었다. 수색 시간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파르샤는 전에 없이 엄격한 목소리로 그 제안에 반대했다.

“어떤 경우라도 통제실에는 반드시 가야 합니다. 뭐, 확률만 따지자면 식료 배양 시설 근처에 생존자가 있을 확률이 크죠. 하지만 FSM은, 아니 웬만한 독립 기지는 주 배양 시설 외에도 알레르기 반응이나 유사시를 대비해서 보조 배양 시설도 있어요. 게다가 공기 정화 시설과 정수 시설은 여기저기 퍼져 있고요. 그러니 생존자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생체 스캔을 한 번 해보는 게 좋고, 이를 위해선 중앙 통제실로 반드시 가야 하죠. 그리고 설령 생존자가 없다 하더라도 통신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가야하고요.”

유진은 빠르게 수긍했다.

엘리베이터는 부드럽게 움직였고 세 명은 안전하게 1층에 내렸다. 1층도 정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헬멧 한구석에 직선 경로상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그래도 세 명은 경계를 유지하며 나아갔고, 우주복의 운동 능력 강화 기능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통제실에 도착했다.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파르샤는 곧바로 중앙 컴퓨터로 달려가 작업을 시작했다. 유진은 통제실 구석구석을 살핀 후 다른 출입문이 잠겨 있는지, 열릴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테사는 그들이 들어온 출입문에 서서 경계를 봤다.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네.”

파르샤에 탄식에 유진이 다가왔다. 중앙 홀로그램에 뜬 기지 구조도는 대부분의 지역이 암전이었고 주황색으로 켜진 일부 지역에만 생체 반응이 있었다. 대부분은 식료 배양 시설 근방에 모여 있었다.

“파르샤, 저 생체 스캔 데이터가 기지 전체에 대한 건가요? 아니면 저 반짝이는 구역만 스캔한 건가요?”

유진의 질문을 듣고도 파르샤는 한참을 패드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데스크를 한 대 쳤다. 어스름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퍼졌고 홀로그램 영상도 치직거리며 흔들렸다. 문만 주시하며 경계를 서던 테사도 그 소리에 그녀를 돌아봤다.

“모든 전력이 차단됐어요. 통제실과 생명 유지 시설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동이 멈춘 상태에요. 전구 하나 켤 수 없이.”

“생존을 위해 시스템을 차단한 겁니까?”

테사는 파르샤가 있는 곳까지 다가오며 물었다.

“아뇨. 전선을 끊고 설비를 파괴하고 하는 식으로 차단한 거예요.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건….”

“네, 생체 스캔도 작동이 안 되니 저 어둠 속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거죠. 시설을 파괴한 것도 일반 사람인지 감염자인지 알 수도 없고….”

유진은 쪼그려 앉아 머리를 감쌌다. 테사는 방금 전까지 유진이 유심히 살피던 생체 스캔 데이터를 가리켰다.

“저 생체 스캔 데이터는 믿을 수 있습니까? 감염자들이 어떤 조작을 가했을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유진은 한숨을 한 번 쉬고 그에 답했다.

“감염자들이 일정 수준의 사회 조직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직 전자 장비를 다룰 줄 아는 정도로 인지 능력이 보존된 사례는 보고된 적이 없어요. 기껏해야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수준이죠. 다만, 저 개체들이 감염자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게 문제겠네요. 생체 스캔은 일정 크기 이상의 살아있는 동물만 인식할 뿐이고 개별 개체를 구별해내지는 못하니까요. 활동성 없이 가만히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럼 저 가만 있는 점들은 LUNA 발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군요. 그래도 늑대 인간만 없으면 미라들은 웬만해선 제압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저 저 미라 같은 점들 중에 칼리스테 박사만 없기를 바라야죠.”

그때 열려 있는 통제실 문을 통해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세 명은 일순 침묵에 빠졌고 테사는 문 쪽으로 빠르게 다가가 총구를 밖으로 내밀었다. 총신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복도의 모습이 헬멧 스크린에 떴다. 멀리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테사는 저들의 머리에서 난 것보다 더 큰 뿔을 본 적이 없었다. 달이 LUNA의 발원지라는 게 한 번에 수긍케 하는 모습이었다.

“발현자 출현!”

그 소리를 듣고 유진과 파르샤도 소총의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훈련한 내용들을 상기하며 적당히 거리를 벌려 나름대로 진을 쳤다.

-철컥-

갑자기 유진이 등대고 있던 문이 열렸다. 유진은 단말마를 지르며 총구를 뒤로 돌렸고, 방아쇠를 당겼다. 소총은 유진과 그를 습격한 사람 사이에 사선으로 세워진 상태였고 총탄은 천장에 박혔다. 유진은 검지로 입술을 누르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았다.

 

 

[Aldrin Research Center, Mare Tranquillitatis]

“여기는 구조 1팀, 검부엉이 응답하라.”

무전에서는 치직거리는 잡음만 들켰다. 빅터는 몇 번 더 안드례이와의 교신을 시도했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구조 2팀과의 교신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이놈들 때문인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떻게 그런 건지는 모르겠네요.”

올드린 기지 근처의 버려진 차량을 살피던 랴오젠이 말했다. 그는 하반신만 차량 밖으로 내놓은 채로 조종간을 뜯고 있었다. 어느새 근처에 온 빅터는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섭지도 않습니까?”

“뭐요? 이 녀석이요?”

랴오젠은 조종석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조종석에는 세 개의 뿔이 헬멧을 뚫고 나온 LUNA 발현자가 늘어져 있었다. 조금 전에 랴오젠이 만들어준 총알구멍이 뿔 바로 아래 있었다.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죽은 상태이니 그리 무섭지 않아요. 다만 이 방해 전파는 이 녀석 몸에서 나오는 것 같네요. 죽어서도 말이죠.”

“그럼 저 로버들 안에 전부 이런 놈들이 있을 거라는 얘깁니까?”

빅터는 탐사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다수의 로버가 올드린 기지 주변에 정차해 있던 것을 확인했다. 로버들은 무슨 마법진이라도 그리려고 한 것처럼 기지를 빙 두르고 있었다. 스크린의 확대 기능 없이도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다른 로버의 윤곽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촘촘하기도 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 확률이 크겠네요.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고도 이 모양이니 통신은 잠시 잊고 빨리 임무 마쳐서 여길 뜨는 게 상책일 것 같습니다. 칼리스테 박사가 여기 있다면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통신을 못 한 듯하네요.”

“그럼 그 메시지는 어떻게 보낸 겁니까? 발신지가 여기 올드린 기지가 아니라 FSM이잖아요.”

“그건… 직접 만나서 물어보도록 하죠.”

빅터와 랴오젠은 올드린 기지 문 앞에 섰다. 랴오젠이 수리 장갑을 착용하는 동안 빅터는 문 바로 옆의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과 인용문이 새겨진 현판을 봤다. 백 년도 더 전 인류의 오래된 흔적이었다. 아미싯이 연설에서 한 마지막 말은 저 현판에도 적힌 암스트롱의 유명한 구절을 따라 한 걸 거라고 빅터는 확신했다.

“다행히 기지 전력은 살아 있네요.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랴오젠의 말에 빅터는 몸을 돌려 랴오젠의 옆에 섰다. 곧 문이 열렸고 그 틈으로 사람 한 명이 쓰러졌다. 둘은 멍하니 있다가 서로를 쳐다보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쓰러진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LUNA 발현자는 아니었다. 빅터는 검침기를 찔러 조직 검사를 했다. 칼리스테 박사도 아니었다. 사인은,

“보나 마나 질식사겠네요.”

“무슨 말이죠? 아까 분명 전력이 살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랴오젠은 헬멧을 쓰고도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긴 한데, 시스템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외부와 통하는 에어 록은 기본적으로 밀폐 시설로 건조돼요. 문을 열지 않는 이상 그 안의 공기로만 숨 쉬어야 하는데, 제아무리 노력해도 그 작은 공간에서 장기간 살아남기는 힘들죠. 뭐, 안에 사람이 있는 게 확인된 이상 바로 감압이 되진 않았겠지만 죽어서 생체 스캔에 안 걸리게 되었다면 바로 작동했을 겁니다.”

“안에 사람이 있으면 바로 열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순 없죠. 인공지능이 사람이 밖으로 나가려는지 안으로 들어오려는지 어떻게 알고 제 맘대로 문을 개폐합니까? 게다가 들어오려다가 중간에 마음 바뀌어서 도로 나갈 수도 있는데. 허가 받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요.”

“이 사람도 여기 기지 소속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달에 허가 안 받은 사람이 어떻게 출입합니까?”

빅터는 언성을 높였다. 그 스스로도 괜히 랴오젠에게 성을 내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랴오젠 역시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기에 담담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뭐,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중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아니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겠네요.”

“그게 무슨….”

랴오젠은 소총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빅터는 숨을 한 번 고르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앞장서서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랴오젠은 외부 출입문을 닫자마자 중간 격벽 앞에 섰다. 빅터는 정확히 문틈을 조준했다.

“아, 이럴 거면 아까 차량 블랙박스를 확인하는 건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그 발현자들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잖습니까. 만약 나온 지 얼마 안 됐다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죠. 그럼 어쨌든 ID카드든 DNA든 발현 전 그대로니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빅터는 탄식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참 좋은 소식이군요.”

“나중에 나갈 때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예 잠가두는 게 안전할 것 같습니다.”

랴오젠은 한동안 외부 출입문의 메인 보드를 조작했다. 작게 철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중간 격벽 앞으로 돌아온 랴오젠은 스패너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LUNA 발현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찢어져서 늘어지는 생체 조직이 보였다. 바닥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불그스름한 생체 조직으로 뒤덮여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아까 그 사람도 이래서 문을 안 연 모양이네요.”

“사람입니다.”

“네?”

바닥의 조직으로부터 검침기를 뺀 빅터가 말했다.

“이 조직들은 사람입니다. 적어도 DNA는.”

빅터는 FDF로 활동하면서도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트라우마로 남은 병원의 모습도 이 정도로 비현실적이지는 않았었다. 빅터는 첫 월경에 붉게 물든 속옷과 침대 시트의 비릿한 냄새를 떠올렸다. 욕지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빅터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는지 랴오젠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빅터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떴다. 11시 방향으로 통제실과 연구실로 향하는 경로가 반짝였고, 1시 방향으로 엘리자벳의 개인실이 멀리 보였다. 로비 한 구석에는 아폴로 11호 달 착륙선의 홀로그램이 반쯤 구현되어 있었다. 붉은 살점이 홀로그램 조사 장치까지 뒤덮은 탓이었다.

“칼리스테 박사도 발현자가 됐을 경우를 상정하고 치료제 및 합성법의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합니다.”

빅터의 말에 랴오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은 붉은 살 조직의 물컹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걸었다. 붉지 않은 곳만 골라 걷고 싶었지만 그러자면 천장에라도 매달려야 할 판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로비를 벗어나자 살 조직이 없어지다시피 했다는 것이었다.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살 조직은 로비에만 퍼져 있었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살 조직들 대신 LUNA 발현자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활동성이 적은 미라 형들뿐이었지만 일일이 비살상 제압을 하는 노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빅터가 연구실 문 앞에 서 있던 LUNA 발현자를 제압하고 구속하는 모습을 보던 랴오젠이 입을 열었다.

“근데 발현자들이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니는 건 안 좋은 징조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칼리스테 박사가 진작에 치료제를 만들었다면 왜 이 발현자들을 치료하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뭐, 여러가지 경우가 있겠죠. 여기 시설로는 치료제의 대량 합성이 힘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발현자에게 접근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고요. 아무리 미라 형이라도 어떤 맹목성으로든 움직이기 시작하면 일반인의 완력으로는 제압하기 힘든 게 현실이니까요.”

랴오젠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빅터가 발현자 구속을 마치고 소총을 다시 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빅터가 신호하자 랴오젠은 연구실 문을 열었다. 빅터는 재빠르게 진입해 주변을 살폈다. 곧 따라 들어온 랴오젠도 동작 탐지 센서에 탐지되는 게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랴오젠은 발현자가 없다는 안도감을, 빅터는 칼리스테 박사가 없다는 실망감을 느끼며 총구를 내렸다. 랴오젠은 연구실 문을 잠갔다.

“그럼 자료가 있는지나 수색해봅시다.”

두 명은 엘리자벳의 데스크와 컴퓨터부터 살폈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있었지만 빅터의 눈썰미로 LUNA의 원형으로 보이는 물질에 대한 파일을 찾을 수 있었다. 관련한 문서의 최초 작성 시기는 2년 전이었다. 빅터는 ‘Moon-baby’라는 파일에 정리된 문서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동안 랴오젠은 다른 연구원들의 연구 자료에 비슷한 내용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허탕이네요. LUNA의 구성 성분, 구조, 월면 분포, 화학적 반응 등등 온갖 분석 자료가 있지만 정작 중요한 치료제에 관한 건 없습니다. 데이터 마이닝으로도 뜨지 않는 걸 보면 삭제한 것도 아니고, 아예 다른 곳에서 연구한 듯합니다.”

“다른 연구원들 데스크에는 아예 LUNA 관련한 게 없네요. 뭐, 아직 통제실에서의 교신 기록도 있을 테고, 칼리스테 박사 개인실도 있으니 너무 낙담하지 맙시다.”

랴오젠은 그렇게 말했지만 상황은 반대로 더욱 안 좋아지기만 했다. 통제실에서는 엘리자벳이 발신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ID를 빌려서 보냈나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 기지에서는 엘리자벳이 교신을 시도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만약 여기가 아니라 교신 기록이 있는 FSM 기지에 칼리스테 박사가 있다면, 저희 완전 헛수고한 거 아닙니까?”

빅터의 불평을 듣고 있던 랴오젠은 그에게 데이터를 하나 보냈다. 빅터의 헬멧 스크린에 올드린 기지 구조도가 나타났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단정할 수는 없죠. 칼리스테 박사의 개인실에서 생체 신호가 하나 잡힙니다. 가는 길에 다른 생체 신호도 잡히지만 어쨌든 희망을 갖고 이동합시다.”

구속돼서 누워 있는 발현자들을 뒤로하고 빅터는 문을 두드렸다.

“칼리스테 박사님! 구조대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빅터는 랴오젠을 쳐다봤고 랴오젠은 인증 패드를 작동시켜 문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도 생체 신호 하나가 엘리자벳의 개인실에서 잡혔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빅터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무엇이라도 건지기 위해 방안을 수색했다. 랴오젠은 잠겨 있는 화장실 문을 열기 위해 메인 보드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랴오젠은 엘리자벳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곧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빅터는 다시 소총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Langley Research Center, Virginia]

아미싯은 뒤통수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표정을 잔뜩 구기며 시아라에게 물었다.

“어찌 됐든 임무가 실패할 거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달에서 박사를 구조하든 치료법을 확보하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LUNA 감염이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시아라는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관제소 직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아미싯은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지금 제가 적절치 못한 장소에 있으니 이동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화상 연결을 잠시 끊은 아미싯은 한숨부터 쉬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직원들도 다시 고개를 돌려 각자의 업무에 집중하는 척했다. 휴가 다가와 말했다. 그는 작년에 랭글리에 부임하고 나서부터 상관의 컨디션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여긴 제가 맡고 있을 테니 마저 통화하세요. 가신 김에 좀 쉬고 오시고요. 너무 무리하시면 저희도 걱정됩니다.”

휴의 말대로였다. 안드례이가 구조 1팀과의 통신 두절을 보고한 이후로 관제소에서는 온갖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통신 두절의 원인과 타개책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비단 구조 1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검부엉이에서는 대부분의 통신 시설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었음을 알려왔다. 만약 엘리자벳이 FSM 외에 다른 기지에 있다면 즉각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말이었다. 덕분에 총책임자이자 물리학자인 아미싯도 예외 없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를 싸맨 지 3시간째였고, 데스크에서 떠나지 못한지는 13시간이 다 되어갔다.

달의 수리 인력을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구조팀의 임무에는 통신 시설의 복구가 들어있지 않았다. 그 과업을 수행할만한 여유도 없었다. 인력도 부족했고, LUNA 발현자에 대처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결국 아미싯은 안드례이의 요청대로 안드로이드 사용을 막 허가한 참이었다. 교신 불가 지역에서도 안드로이드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프로토콜을 설정하느라 프로그래머들의 신경도 곤두서 있었다.

아미싯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부터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시아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홀로그램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선, 어떻게 이번 작전의 세부 사항에 대해 알게 되셨는지는 캐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임무가 실패할 거라는 박사님의 주장은 간과할 수가 없군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임무가 실패할 거라는 게 아니라, 임무의 성공 여부는 중요치 않다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 인류 수준으로는 LUNA를 치료할 수 없을 겁니다.”

아미싯이 듣기에 시아라의 말은 동어반복 같았다. 달에서 엘리자벳을 구하려는 목적이 LUNA의 치료였기에 아미싯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주장 또한 납득하기 힘드네요. 당장 여기, 랭글리에만도 30명이 넘는 생명과학자와 생리의학자들이 LUNA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뇌과학자인 캐러반 씨가 일개 물리학자인 저보다 그쪽 분야에 밝으시겠지만, 다른 동료분들의 노력까지 등한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시아라는 다시 화를 내듯 말했다.

“뇌신경학자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LUNA는 바이러스처럼 핵에 침투해 유전자 수준에서 변이를 일으킵니다. 2번 염색체의 동원체 2개를 전부 조각내 놓고는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키죠. 그렇게 뇌를, 특히 전두엽을 LUNA 생산 공장으로 바꿔버립니다. 이걸 어떻게 다시 되돌릴 거죠? 유전자 가위? 그걸로 세포 하나의 LUNA DNA를 적출해낸다 한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걸 적출한다고 해서 이미 변형된 DNA와 뇌조직과 신경망이 돌아오겠습니까? DNA야 가용 효소를 모두 때려 부어서라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 쳐도, 다른 건 어떻게 할 겁니까? 제가 트레게놈 사의 지원을 받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현재로선 정말 뉴브라칩 밖에 답이 없어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던 아미싯도 시아라를 따라 언성을 높였다. 더 이상 눈치를 볼 직원들도 주변에 없었다.

“그럼 언제까지고 이렇게만 두고 보자는 얘기입니까? 뉴브라칩도 어느 정도 뇌가 발달해야만 이식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LUNA는 영유아를 넘어 태아까지 감염시키고 있는 마당에 뉴브라칩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서 임신까지 금지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 와 버렸는데 뭐가 더 필요하신 거죠?”

“지금이라도 모든 인력을 뉴브라칩 연구로 돌려 인간 유전자 자체를 LUNA 면역으로 조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뉴브라칩의 발생 DNA를 수정란에 삽입한 후 안정시켜서 그대로 인간의 유전자로 받아들이는 거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을 선택권도 없이 뉴브라칩 이식자로 만들겠다고요? 모자이크 베이비가 선천성 장애의 치료 외에는 왜 금지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시아라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녀의 둘째 딸 카르멘은 모자이크 베이비 기술의 일부 허용이 없었다면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날 운명이었다. 카르멘의 선천적인 지적장애는 시아라가 전공을 인공지능에서 뇌신경학으로 변경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모자이크 베이비는 그렇게 대단한 기술이 아닙니다. 100년 전부터 시행된 시험관 아기도 모자이크 베이비라고 볼 수 있죠. 자연선택과 성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유전자 선택 역시 그 속도와 정확도만 다를 뿐이지 차이가 있습니까? 게다가 이미 인류의 유전자에는 모두 LUNA가 침투해 있어요. 그 모자이크 기술 때문에 멸종하게 생겼는데, 존속을 위한 모자이크는 안 된다고요?”

“그러니 지금 당장 치료제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박사께서 아무리 반대하셔도 이미 작전은 실행 중이고 곧 구조대가 달에서 돌아올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아무런 권한이나 권력이 없는 시아라가 작전에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시아라 본인도 그것을 기대하고 연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뉴브라칩 연구를 통해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한 명이라도 더 관련 연구를 하게 하여 그 속도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랭글리 기지의 수장급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꽉 막힌 사람일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달에서 LUNA에 잔뜩 오염된 공기와 사람을 데려와 봤자 상황이 악화됐으면 악화됐지 진전하지는 않을 겁니다. 막말로 치료하면 뭐합니까? 이미 지구의 물과 대기는 LUNA로 다 오염됐는데요! 결국 실패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어떻게 책임지실 거죠?”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작전은 실행 중이고, 저희는 어떻게든 LUNA 치료제를 합성할 겁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LUNA를 완전히 소멸시킬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안전한 밤 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미싯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적막에 잠긴 사무실에 홀로 남아 마른세수를 했다.

 

 

[FSM, Sinus Medii]

“그 여자는 미쳤어요!”

“진정하세요, 캐리 씨.”

구조대와 처음 대면했을 때의 침착함이나 대범함 등은 온데간데없고 마이네르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며 테사는 문 가까이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파르샤는 출입문을 수동으로 잠그고 난 후 보조 식료 배양 시설의 전력을 일부 돌려 주변의 카메라 영상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혹시나 싶어 검부엉이와의 교신도 시도해보았지만 마이네르의 말대로 배양 시설은 전파가 터지지 않았다. 마이네르가 무슨 방법을 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밖으로 새지 않게 하는 것은 확실히 은신에 도움이 됐을 터였다.

“칼리스테 박사가 미쳤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두 달 전에 보내온 통신에서는 그런 모습은 전혀 없었는데요?”

“통신이요? 그거 전부 다 연기에요! 칼리스테 박사가 무슨 메시지를 보냈든 간에 전부 가짜니까 절대 믿으면 안 돼요!”

마이네르는 유진의 팔뚝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우주복의 자세 제어 기능 덕분에 유진의 머리는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칼리스테 박사가 보낸 메시지는 분명 음성이나 문자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꼭 달에서 지구로 구출해달라고요. 그렇죠?”

지금까지 마이네르와 구조팀이 나눈 대화는 보조 배양 시설에 관한 것뿐이었다. 구조팀 누구도 그에게 엘리자벳이 보내온 메시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물론이고 파일의 형식까지, 직접 보지 않은 이상 그가 알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녀는 이미 그 이상한 ‘Moon-baby’에 감염돼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변했으니까요! 더 이상 칼리스테라고 부르기도 미안하죠.”

“’Moon-baby’라면 우리가 맞닥뜨린 사람들이 감염된 질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머리에 막 뿔 같은 것이 돋아나는? 일단 저희는 그것을 LUNA라고 명명했습니다만….”

유진은 양손으로 이마의 뿔까지 따라해가며 마이네르에게 물었다. 마이네르는 한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LUNA, LUNA라… 여기서 발견됐다고 LUNA인 건가요? 확실히 미치광이 같은 증상을 보면 어울리기도 하네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선뜻 이해가 되지 않네요. LUNA는 기본적으로 뇌조직에의 영구적인 변형을 일으킵니다. 기껏해야 들개 수준의 지능만 겨우 남는 게 보통인데, LUNA가 발현하고도 전자 장비를 이용하고 남을 속이는 연기까지 한다? 그런 고차원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유진의 의문을 들은 마이네르는 유진, 파르샤, 테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바로 앞의 유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당신들은 ‘Moon-baby’, 그러니까 LUNA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죠? 2년간 그놈들을 피해 살아남은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까? 여기 상황도 모르고 두 손 놓고 편히 지구에 있던 주제에….”

“인류의 95% 이상이 죽었습니다.”

마이네르로부터 가장 멀리 있던 테사의 말이었다. 그녀는 상당히 언짢은 표정이었다.

“손 놓고 있었다는 표현은 듣기 거북하네요.”

“자자, 우리끼리 싸워서 뭐 합니까? 통신이 끊겨서 서로서로 상황을 몰랐으니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서로 알고 있는 정보를 나누면 되죠. 칼리스테 박사를 구하든지 그냥 포기하고 지구도 돌아가든지 정하기 위해서도 그렇고요. 그러니 캐리 씨, 알고 계시는 걸 말씀해주시겠어요?”

유진은 마이네르와 테사를 번갈아 보며 중재에 나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네르는 유진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럼 그것의 목적은 대체… 설마….”

“캐리 씨!”

이번에는 유진이 마이네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혼잣말을 멈추고 유진을 바라본 마이네르는 유진의 헬멧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칼리스테가 있는 곳에 절대로 가면 안 돼요! 그것은 지금 단순한 생식 본능 같은 거로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인류 전부를 LUNA에 감염시키고자 하는 확실한 의지를 갖추고 움직이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아까 지구에서도 LUNA에 감염된 사람들이 사회성을 보여줬다 그랬죠? 그녀는 그 정점에 있는 여왕벌 같은 존재입니다. 아니, 여왕벌보다 심하죠. 여왕벌은 일반 벌에게 폐위당하기라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불가항력의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됐어요. 전 이걸 ‘하이퍼 감염’이라고 부릅니다.”

“하이퍼? 정말 구린 작명이네요.”

옆에서 듣고 있던 파르샤가 끼어들었다. 마이네르는 그녀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봤다. 유진은 파르샤를 애써 무시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사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가설이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즐거운 기분도 아니고 불쾌한 흥분이었으니 더더욱 표현하고 싶지 않아 하기도 했다.

“명령을 내린다고요? 발현자가 다른 발현자에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죠?”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녀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감염자들을!”

“그 하이퍼 감염이 일어나는 데에 무슨 특별한 원인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까? 가령 칼리스테 박사가 다른 사람과 유독 다른 특징을 가졌다거나, 아니면 혼자 다른 행동을 했다거나 하는 거요.”

마이네르는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뉴브라칩 때문일 겁니다. 칼리스테는 평소에 뉴브라칩을 비활성 상태로 두고 생활했거든요. 그게 켜져 있으면 게임할 때 너무 현실 기반으로 분석하게 돼서 방해된다고요. 얼마 되지도 않던 3세대 뉴브라칩 이식자들은 감염되지 않던 마당에 그녀 혼자 감염된 것도 그렇고, 덜떨어진 감염자들 사이에서 혼자만 이성이 남아 있는 듯 말할 수 있다거나 신체 조직이 무너지는 등의 다른 양태를 보이는 것도 그렇고, 이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네요.”

유진은 수많은 LUNA 발현자들을 해부했었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FDF 대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다수의 LUNA 발현자들을 마주쳤었다. 그들은 지능이 낮아진 만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문명의 도움 없이 신체를 온존하기에는 인간의 육체는 너무 나약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너지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몸이 망가진 개체는 없었다. 신체의 변화가 극심한 ‘늑대인간’도 호르몬 분비와 줄기세포 활성도의 변화로 근육과 골격이 급격히 비대해지는 바람에 피부가 찢겼을 뿐이었다.

“신체 조직이 무너졌다고요? 마치 모래성처럼? 그럼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겁니까?”

“꿈틀거리기는 해도 칼리스테 스스로 그녀 방에서 나올 수는 없을 겁니다.”

“다른 구조대가 칼리스테 박사를 구하기 위해 올드린 기지에 이미 가 있습니다.”

테사의 한마디에 마이네르의 눈은 전에 없이 커졌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는 단숨에 튀어나가 테사를 붙잡았다.

“당장 물러나라 그래요! 그녀와 접촉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러고 싶어도 지금 올드린 기지와는 통신이 두절돼서 안 돼요. 그래도 안드로이드를 사출해서 상황을 정리하도록 했다고 하니 어떻게든 되겠죠.”

파르샤는 우주복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를 따라 유진도 일어나며 기지개를 켰다. 그는 마이네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이런 말씀드리는 게 상당히 실례라는 건 알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당신의 말을 100% 신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에요. 물론 당신의 주장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죠. 게다가 이곳의 유일한 목격자시기도 하니 무작정 안 믿을 수도 없고요. 그래도 작전은 그대로 진행될 겁니다. 어찌 됐든 확인은 필요하고 LUNA를 치료할 조금의 실마리라도 있으면 확보해야 하니까요.”

“그럼 이제 그만 기지 밖으로 나가죠. 이 기지에는 구조할 사람이 더는 없는 것 같으니까요.”

파르샤는 전동 스패너를 수동 개폐 장치에 연결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드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연락이 되는군! 구조 1팀이 기지를 떠나 돌아오고 있네!”

 

 

[Aldrin Research Center, Mare Tranquillitatis]

빅터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붉은 기둥이 보였다. 사람 몸 만한 기둥은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빅터는 기괴한 물체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곧 몸이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의자와 함께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제야 눈을 뜬 모양이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빅터는 시선을 올려 서서히 다가오는 붉은 덩어리를 쳐다봤다. 이지러지고 달라붙은 살점들이 꾸물거리며 자신에게도 골격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칼리스테… 박사님?”

“와! 이런 모습인데도 알아봐 준 거야?”

확실히 엘리자벳의 목소리였다. 괴이하게 변한 그녀의 모습에 빅터가 넋이 나간 사이 바닥에서 솟아올라온 붉은 살점들이 그를 다시 안전하게 앉혔다. 엘리자벳은 제자리로 돌아온 빅터의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따뜻한 피가 질척거리며 목까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듣고 온 거야?”

“정말로 칼리스테 박사님이십니까? 그 모습은 대체…?”

“이 모습이야, 뭐, 실패한 거지. ‘Moon-baby’에 걸리고 나서 이것저것 실험을 했었는데, 다 실패하고 결국 몸이 이렇게 변해버렸어. 그래서 영상 메시지도 못 보내게 됐지 뭐야. 이 모습을 보여주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 테니까 말이야. 안 그래?”

엘리자벳은 팔처럼 보이는 붉은 막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LUNA로 인해 절멸의 위기에 빠진 인류가 이런 모습을 본다면 누가 됐든 믿지 못할 게 뻔했다. LUNA가 발현했다고 하면 일단 제압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살부터 하는 게 인류의 현주소였다. 그런 걸 생각하면 엘리자벳이 빅터를 묶어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처사였다.

“그나마 죽진 않았으니 다행이지. 혹시 서쪽 로비로 왔니? 거기에 완전 곤죽인 된 살덩이 있지 않았어? 하마터면 걔네처럼 될 뻔했다니까? 살이 막 부글부글하다가 터질 땐 어찌나 놀랐던지.”

“그럼 치료제는, 언급하신 LUNA의 치료 방법은 어떻게 된 겁니까?”

한창 자기 얘기를 하며 신나 있던 엘리자벳은 조용히 빅터를 쳐다보았다. 잠시만 입을 닫고 있었을 뿐인데 그녀의 입술은 서서히 들러붙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녀가 미소를 짓자 이어진 살점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다시 찢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너희가 왔잖니? 물론 처음에는 너희 둘 다 수컷인 줄 알고 실망했지만 말야. 네 성염색체가 XX라서 깜짝 놀랐지 뭐야. 자궁 쯤이야 우리 회사에서 만든 DP-Regen이면 금방 재생시키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빅터는 그제서야 랴오젠이 안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개를 돌아갈 수 있는 최대 각도까지 돌려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같이 온 수컷을 찾아? 그 수컷은 필요가 없어서 그냥 ‘baby’를 주입했어. 뉴브라칩도 이식 받았던 모양이지만 뭐, 그런 것쯤은 뚫을 수 있으니까.”

“대체 무슨…! 당신 누구야?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장 이거 풀어!”

빅터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의자가 들썩이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넘어지지조차 않았다. 의자와 그의 다리는 붉은 살 조직에 파묻히듯 둘러싸여 있었다. 엘리자벳은 양손을 합장하며 콧소리를 냈다.

“어머? 화내는 건 별로 좋지 않아. 그러고보니 이름이 뭐야? 이제 곧 가까워질 텐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누가 너 따위한테 이름을….”

-짝-

엘리자벳은 빅터의 뺨을 후려쳤다. 그의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되었다. 빅터는 지금 자신의 혀에 느껴지는 쇠 맛이, 엘리자벳의 피가 입으로 들어와서인지 자신의 입에서 피가 나서인지 알 수 없었다. 엘리자벳은 인증 패드 모듈을 가져와 빅터의 왼쪽 팔목에 대었다. 그의 얼굴과 함께 이름과 소속 등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흐음, 빅터 비테르만, 그런 이름이구나. 마음 같아서는 턱을 찢어버리고 싶은데, 그럼 생존하기 어려워지니까 봐주는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줄래?”

빅터는 입속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양을 보니 아무래도 입 안쪽이 찢어진 듯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거지. 그러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하고.”

“내가 그걸 도와줄 것 같아? 날 그냥 죽이….”

엘리자벳이 다시 팔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쾅-

강한 충격에 의해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빅터와 엘리자벳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곧이어 방안을 침범한 총성은 끝없이 이어졌다. 엘리자벳은 달리 반응할 새도 없이 나가떨어졌다. 불꽃과 총성에 놀라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빅터는 그 순간을 보지는 못했다. 눈을 떴을 때는 엘리자벳은 이미 넝마가 되어 바닥에 퍼져 있었다. 덕분에 빅터는 다시 뺨을 맞진 않았지만 엘리자벳의 몸에서 튄 피로 범벅이 되었다.

<비테르만 소위 신병 확보>

곧 안드로이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빅터 바로 옆에까지 걸어온 안드로이드는 이미 쓰러진 엘리자벳의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겨냥하고 총을 한 번 더 쐈다.

<LUNA 발현체의 생명 활동 정지 확인. 괜찮으십니까, 비테르만 소위?>

“너는…?”

<군용 안드로이드 BM-IH-01B입니다. 결박을 해제하겠습니다.>

안드로이드는 빅터의 뒤로 돌아가 그의 팔과 손목을 묶은 철사를 절단했다. 다리를 감싼 붉은  조직들도 칼로 긁어내듯 떼어냈다.

“랴오젠은 어떻게 됐지? 오는 길에 랴오젠은 봤나?”

<카이 엔지니어에게서 LUNA 발현을 확인, 사살했습니다.>

엘리자벳이 LUNA를 주입했다는 게 헛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랴오젠 역시 LUNA에 이미 감염된 상태였을 테니 통상의 LUNA가 발현될 리는 없었다. 그런데 뉴브라칩의 방호를 뚫고 LUNA가 발현되었다면 그녀가 주입한 LUNA는 뭔가 변이가 일어난 것일 수도 있었다. 빅터는 엘리자벳이 실험했다는 게 바로 그 변이와 관련한 것일 거라고 직감했다.

<칼리스테 박사의 신병은 확보됐습니까?>

“방금 네가 쓰러뜨린 게 칼리스테 박사야.”

안드로이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일말의 주저도 보이지 않고 엘리자벳의 몸뚱이에 검침기를 꽂아 넣었다.

<99.9% 이상의 일치율 확인, 엘리자벳 칼리스테 박사를 공식 사망 처리합니다. 치료제는 확보하셨습니까?>

“다 거짓말이었어. 여긴 아무것도 없어!”

<임무 목표 달성 불가. 목표를 빅터 비테르만 소위 복귀로 변경합니다.>

안드로이드의 인공지능은 군용답게 당황하는 연기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선으로 복귀합니다.>

빅터는 안드로이드의 말대로 복귀하기 위해 일어섰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고 한 발짝 떼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맞대보고 관절을 돌려가면서 몸 상태를 확인했다. 세밀한 동작일수록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아까 엘리자벳이 뒤통수를 가격했을 때 소뇌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빅터는 결국 안드로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탐사선에 당도했다. 빅터가 조종석에 앉자 자동으로 안전벨트가 매였다.

“아, 랴오젠의 시신은? 지구로 환송해야 하는 거 아닌가?”

<LUNA 발현자의 시신은 격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지금처럼 외지에서 사망한 경우 검역반의 적절한 처리가 행해지기 전까지 사망 장소에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냉혹한 원칙이었지만 상대가 안드로이드인 만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기실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빅터 자신이었어도 처음에만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원칙을 떠올릴 게 뻔했다.

“그래, 그랬지. 벨랴코프 기장도 이 사실을 전부 알고 있나? 올드린 기지에서의 정보를?”

<사출 시 상공 3km 부근부터 전파 방해가 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전파 방해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상공 3km 부근부터 제대로 된 통신이 재개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젠장,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출발해.”

빅터의 음성에 탐사선은 천천히 위로 뜨기 시작했다. 100년도 더 전에 이곳에 발을 디뎠던 암스트롱이나 올드린과는 달리 사람이 손수 조종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멀리 있는 검부엉이의 불빛이 구분 가능해질 때쯤 통신이 재개됐다.

“…들리는가? 구조 1팀, 들리는가? 젠장!”

“아, 여기는 빅터 비테르만, 들린다. 방금 통신 방해 권역을 벗어난 것 같다.”

빅터와 안드례이는 홀로그램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확인했다. 안드례이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빅터의 몰골은 처참했다. 랴오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안드로이드가 앉아 있었다. 기지에서 구조한 인원도 없었다.

“오, 드디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카이와 칼리스테 박사는 어떻게 됐나?”

“우리 모두 속았습니다! 칼리스테 박사는 이미 LUNA가 발현된 상태였고, 치료제 따위도 없었어요! 카이도 죽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비테르만, 좀 더 자세히 설명을…!”

그때 빅터는 갑작스러운 매스꺼움을 느꼈다. 작은 소용돌이가 시냅스 구석구석을 교란하는 것 같았고 배 속의 내장이 탈장하여 꼬이는 것 같았다. 온몸이 어지러웠다. 위장의 내용물이 식도를 거슬러 올라왔고, 그의 신체 반응에 맞춰 구토 봉지가 바로 입 주변에 달라붙었다. 그 덕분에 토사물이 선내에 떠다니지는 않게 되었다.

“일단 안정을 취하도록 하고 모선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안드례이는 더는 묻지 않았다. 스크린이 꺼지고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안드례이의 말대로 빅터는 자신의 몸 상태부터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탐사선도 인공지능이 조종하고 있고, 통신이 재개됐으니 검부엉이에서의 원격 조정도 가능해졌을 것이었다. 빅터는 헬멧 스크린을 반만 내려 우주복이 지속적으로 체크하고 있던 신체 증상을 확인했다. 국부가 상당량의 혈액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외상은 없었다. 하혈이었다. 빅터는 다시 매스꺼움을 느꼈다.

탐사선은 곧 검부엉이에 도킹했다. 안드로이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빅터를 들쳐 메고 검부엉이 내부로 날아 들어왔다. 그리고 조종실이 아니라 의무실로 가 빅터를 의료 시트에 고정했다. 사람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의료용 인공지능이 할 일이었고 곧 있으면 유진도 도착할 터였다. 자신의 임무를 마친 안드로이드는 다시 격납고로 들어갔다. 올드린 기지에서 얻은 정보는 이미 탐사선에서 모두 전송한 뒤였다.

안드례이는 안드로이드가 기록한 정보, 안드로이드가 랴오젠의 우주복에서 회수한 블랙박스 속 정보, 마찬가지로 빅터의 우주복 블랙박스가 수집한 정보를 검토했다. 엘리자벳의 배신은, 그녀 본인에게는 오랫동안 계획된 것이고 너무나도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구조대에게는 아니었다. 안드례이는 처음에는 그 어느 것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영상 속 광경은 너무나도 확연했다.

곧이어 전파 차단 구역에서 나온 구조 2팀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도 옆 스크린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이네르가 FSM에 LUNA가 발현하지 않은 사람이 더는 없다고 말한 것, 발현자들이 일종의 명령 체계를 구축하고 행동한다는 것, 명령을 내리는 개체는 지성이 살아 있는 ‘하이퍼’라는 개체라는 것 등이었다. 안드례이는 빅터와 랴오젠이 마주하고 안드로이드가 사살한 엘리자벳이 바로 그 ‘하이퍼’로 발현한 것일 거로 추측했다. 그 외에도 마이네르가 독자적으로 알아낸 여러 정보들과 FSM의 정보들이 함께 있었다.

안드례이가 양쪽에서 들어온 정보를 취합하여 지구로 보내는 동안 우주선 유리창에 사람 얼굴이 비쳐 보였다.

“비테르만?”

 

 

[FSM, Sinus Medii]

“사방에서 밀려오고 있습니다! 환복은 다 하셨습니까?”

테사가 소총을 재장전하며 물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LUNA 발현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비살상용 탄환은 전부 소비했고, 이제 남은 것은 전부 살상용이었다. 어차피 제압용 결박 도구도 전부 쓴 참이라 비살상용의 의미가 없기도 했다. 설령 장비가 남아 있었다고 해도 빨리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LUNA 발현자들을 일일이 제압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마이네르가 환복 캡슐에서 나왔다. 그는 헬멧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유진은 소총을 재장전하면서 그 모습을 쳐다봤다.

“그런데 당신 말로는 이것들 햇빛 싫어한다면서요? 확실합니까? 여기서 한발만 더 나가면 바로 햇빛 직격타인데 그냥 계속 오는데요? 아, 그런 거 생각도 못하는 수준인가?”

“다 갈아입었으면 빨리 이동해요!”

파르샤는 세 명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는 진작부터 수동 개폐 장치에 전동 스패너를 꼽고 문을 닫고 있었다. 사람들은 재빨리 에어 록으로 달렸다. 하지만 세 명이 모두 에어 록으로 들어오고도 문은 닫힐 기미가 안 보였다. 기지에 들어올 때에 비하면 상당히 느리게 닫히는 느낌이었다. 테사와 유진은 서서히 좁아지는 틈으로 총을 쏘며 감염자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파르샤는 감압 절차를 실시했다. 그리고 곧바로 외부 에어 록으로 달려가 다시 문을 열었다. 다행히 탐사선 주변은 고요했다.

“검부엉이! 기지 밖으로 나왔다. 이제 거기로 돌아가겠다!”

테사는 조종석에 앉으며 외쳤다. 하지만 검부엉이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검부엉이! 안 들리나? 벨랴코프 기장?”

테사는 급히 홀로그램을 가동했다. 안드례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빅터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정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목에서부터 눈 밑까지 핏줄들이 붉고 선명하게 올라와 있었다. 테사에게 그의 모습이 보이니, 분명 검부엉이의 홀로그램도 가동하여 탐사선의 내부를 비추고 있을 텐데도 빅터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비테르만? 어디 아픈 겁니까? 벨랴코프 기장은 어디 있습니까?”

그 소리에 빅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홀로그램 스크린을 쳐다봤다. 정상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어색한 동작이었다.

“비테르만? 아, 그래. 이건 비테르만이지. 그리고 벨랴코프라면 이걸 찾는 거야?”

빅터는 왼손을 뻗어 안드례이를 끌고 왔다. 안드례이는 두 눈을 뒤집어 까고 있었고 그의 관자놀이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상한 신음을 내는 것을 보면 아직 살아 있는 듯했다. 안드례이의 멱살을 잡은 빅터의 손은 새빨갰다.

“걱정하지 마. 죽은 건 아니니까.”

“저 사람! 저 사람도 감염됐습니다! 절대로 돌아가면 안 돼요!”

마이네르가 탐사선 뒤쪽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빅터는 마이네르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였더라? 기억이 날락 말락 하는데. 지금 이 몸이 아직 익숙지 않아서 말야. 아, 그래, 마인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어?”

“내 이름을 어떻게… 설마 엘리자벳?”

마이네르는 입을 가렸지만 놀라움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빅터는 미소를 지었다.

“난 이제 지구로 갈 거야. 이 우주선에 미사일 같은 게 없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들은 날 따라올 수 없을걸?”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유진, 테사, 파르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천천히 마이네르를 돌아봤다. 마이네르는 엄지를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파르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엘리자벳이라면, 설마 엘리자벳 칼리스테 박사를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은 비테르만 씨가 칼리스테 박사가 되었다는 겁니까?”

“아까 하이퍼 감염이 되면 명령을 내리고 할 수 있다는 게 설마 이건가요?”

유진은 바로 이어서 다음 질문을 했다. 마이네르는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답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닐 거예요. 그건 정말로 명령을 내리는 거지, 저렇게 마치 빙의라도 한 것 마냥 이성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어요. 아마 자신의 조직을 이식한 게 아닐까 싶은데, 과연 그걸로 저런 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합니까? 어떻게든 막아야지.”

테사는 그렇게 말하며 엔진을 점화했다. 탐사선이 흔들리며 이륙하는 게 느껴졌다. 부조종석에 앉은 파르샤는 조종과는 상관없이 이것저것 조작하고 있었다. 유진이 물었다.

“굳이 쫓아갈 필요가 있습니까? 바로 랭글리와 통신 연결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요. 검부엉이에 탑재돼 있던 기능 중에 전파 방해가 있어요. 진작에 뺐어야 했는데, 급히 개조하느라, 그것도 러시아 특수기를, 그래서 결국 그대로 뒀거든요. 근데 그걸 가동한 것 같아요. 통신이 완전 먹통이네. 애초에 이 탐사선으로는 장거리 통신은 어찌어찌 한다 쳐도, 전파 강도가 안 나오니 재밍 권역에 막히는 게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소형 탐사선으로는 따라잡을 수도 없잖아요? 앞으로 10시간 정도 후면 검부엉이가 지구에 도착할 텐데, 속도도 안 되고 통신도 안 되면 어떡합니까?”

“그럼 BEAM은 어떻습니까?”

마이네르가 제안했다. 그는 아직 BEAM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듯했다. 파르샤는 곧바로 BEAM의 제원을 확인했다.

“BEAM의 송출 파장과 강도면 재밍이 제아무리 강하다 한들 통신이 될 가능성이 있긴 해요.”

파르샤는 그 가능성을 확인해주듯이 말했다. 사실 유일한 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마이네르의 제안 외에는 달리 선택지가 보이지 않았다. 정지한 BEAM을 재기동해서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테사는 목적지를 BEAM으로 재설정했다. 인공지능은 BEAM의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고 경고를 했다. 어차피 BEAM의 기능 대부분이 정지했을 것이고, 그곳에서 출항하는 우주선도 없을 테니 항로의 겹침 등으로 인한 충돌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변경된 항로를 따라 노즐의 각도가 기울어졌다. 탐사선이 직선 항로에 들어서자 테사는 몸을 돌려 마이네르를 쳐다봤다.

“캐리 씨, 지금에서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BEAM 역시 달에서처럼 이미 LUNA 발현자들로 가득할지도 모릅니다. 기능이 어디까지 살아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군사 훈련은 받아보셨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그럼 탐사선에 대기하고 계시는 게 안전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라도 함교 구역의 회전이 멈춰 있어서 인공 중력도 없이 총격을 하게 된다면 훨씬 위험해질 테니까요.”

유진, 테사, 파르샤는 우주복의 전력과 산소를 충전했다. 보관고에서 여분의 탄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탐사선은 BEAM의 코앞에 도착했다. 멀리서는 각진 공처럼 보이던 기지가 제대로 보였다. 오각뿔과 육각뿔이 빈틈없이 붙어 축구공 같은 모습이었다. 오각뿔과 육각뿔 내부의 원뿔각 구역들 중 회전을 유지하는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각형 구역은 사출 모듈이었으므로 회전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육각형 구역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구역들이었다. 그곳이 멈춰 있다는 얘기는 중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가장 가까운 함교가 있는 구역 역시 멈춰 있었다.

“이곳에서 저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마이네르의 물음에 파르샤는 BEAM 기지의 구조도를 확인했다.

“평소라면 여기서 함교까지 30분은 걸리겠지만 가는 길에 감염자라도 있으면 훨씬 더 늘어날 겁니다.”

도킹이 안전하게 완료되고 세 명은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곧바로 진공 상태와 맞닿은 구역이라 그런지 LUNA 발현자는 보이지 않았다. 테사는 우주 유영용 뉴브라칩을 활성화하고 선두에 섰다. 뉴브라칩의 보조로 그녀는 뇌파만으로 우주복의 마이크로 분사를 조절하며 날아갔다. 우주 유영용 뉴브라칩을 이식 받지 않은 유진과 파르샤는 수동으로 분사를 조절하면서 가끔씩 벽을 짚어 가며 테사를 뒤따랐다.

얼마 안 가 테사는 유영을 멈추고 정지 지시를 내렸다. 선착장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LUNA 발현자 무리가 나타났다.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그저 공중에 둥둥 뜬 상태였지만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조용히 지나가려 해도 언제 갑자기 돌변해 인간을 뛰어넘는 완력으로 대원들을 붙잡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명은 복도 벽에 퍼져 자리를 잡았다. 반동 제어를 위해 다리 장갑의 고정쇠를 벽에 박아 몸을 고정했다. 테사의 신호에 맞춰 파르샤는 문을 열었다. 문틈이 벌어짐과 동시에 세 명은 사격을 시작했다. 반동을 완전히 상쇄할 수는 없었지만 우주복의 자세 제어 기능까지 더해 몸이 뒤로 밀리거나 쓰러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LUNA 발현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한 팔로는 머리를 보호하고 나머지 한 팔과 두 다리를 벽에 박아가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팔이 너덜너덜해져 총탄이 두개골을 박살 내면 멈추는 데는 차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사지나 몸통도 조준했지만 몸이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고도 버둥거리는 모습은 계속 보고 있기 힘들었다. 파르샤는 발현자들의 정리가 끝날 때마다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이 정도 속도라면 5분 내에 함교에 도착할 것 같아요.”

“이제는 뒤에서도 발현자가 나오고,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데 정말 5분 내에 도착할 수 있어요?”

유진은 뒤에서 다가오던 마지막 발현자를 쏘며 물었다. 그때였다.

“아, 아, 들립니까?”

마이네르였다. 세 명은 처음에 그가 탐사선에서 교신한 건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목소리는 BEAM 기지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BEAM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어요. 이 멍청한 것들이 초반에 우주선들을 다 날려 먹는 바람에 꼼짝없이 달에 갇혔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캐리? 방송 시스템을 해킹한 겁니까? 지금 탐사선에 있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런 조그마한 함선에 있기에는 너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신들보다 먼저 함교에 왔죠.”

이전과는 달리 마이네르의 목소리에서 일종의 자만이 느껴지는 듯했다. 테사는 안 좋은 예감을 애써 떨치며 물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갔습니까? 발현자들을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아, LUNA 발현자들이요? 그 녀석들은 저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움직이면 길을 내주죠.”

“설마….”

“하이퍼 감염자가 칼리스테 혼자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늘 그렇듯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파르샤는 입을 가리려는 행동을 했다. 물론 헬멧이 그녀의 손을 막았다. 마지막까지 이를 부정하고 싶어한 건 LUNA 발현자를 나름 자세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유진이었다.

“그렇지만 칼리스테 박사는 몸이 무너져 내렸다고…. 당신은 멀쩡하잖습니까?”

“칼리스테는 이것저것 실험하다가 그렇게 된 거죠. 그리고 머리의 뿔을 말하는 거라면, LUNA를 퍼뜨리는 건 아랫것들의 역할입니다. 칼리스테나 저 같은 상위 개체는 통솔하는 게 일이고요.”

“큭, 이 개자식!”

결국 유진은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에게 늘 친절하게 대하던 그였다. 랴오젠은 입이 거칠고, 파르샤가 간혹 욕을 하는 걸 본 사람은 많았지만, 유진이 그러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마이네르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코웃음치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정말로 감염되지 않은 일반인이 그런 곳에서 2년이나 생존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까?”

테사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칼리스테 박사랑 각을 세운 것도 그럼 다 연기였다는 겁니까?”

발음은 뭉개졌지만 화는 뭉개지지 않았다. 마이네르의 자신감은 뭉개질 연유가 없었다.

“뭐, 완전히 연기는 아닙니다. 그쪽의 곱슬머리 암컷은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지만, 전 ‘하이퍼’의 어감이 꽤나 마음에 들었거든요. 칼리스테도 나름 좋아했죠. 하지만 그녀와 전 목표가 약간 달라요. 도대체 그 트레게놈 사의 기밀 정보라는 게 뭔지 모르겠고, 또 그게 뭐라고 거기에 그렇게 집착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요. 어찌 됐든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같습니다. 인류는 진화할 겁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미친 새끼! 죽여버릴 거다!”

파르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을 내질렀다. 마이네르는 그것마저도 웃어넘겼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탄약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 기지의 발현자들을 전부 그쪽으로 보내고 있는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 한들 특수 잠금한 함교 문을 열 수나 있겠습니까? 저라면 쓸데없는 저항은 포기하고 순순히 전두엽을 내줄 겁니다.”

테사는 마이네르는 일단 무시하고 유진과 파르샤를 불렀다.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그 둘은 쉽사리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듯했다.

“여기서 고립되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BEAM을 전면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 칼리스테를 저지하는 게 더 가능성 있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나라면 그 선택은 하지 않을 거예요.”

“닥쳐!”

파르샤는 바로 사자후를 질렀다. 테사는 분명 두 명과만 교신을 연 것이었지만 마이네르가 끼어든 것을 보면 통신 코드를 해킹한 것이 분명했다.

“탐사선의 도킹은 진작에 해제했거든요.”

“뭐?”

테사가 당황해 멈춘 사이 파르샤는 재빨리 탐사선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탐사선에선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파르샤는 지체하지 않고 벽을 뜯어 선착장 시스템에 접속을 시도했다. 마이네르가 이것까지는 막지 않은 모양이었다.

“젠장! 도킹 해제 확인! 탐사선 반응 없음! 저 자식이 탐사선 시스템도 모두 끈 것 같아요!”

“테사, 일단 먼저 탐사선으로 가요! 우린 어떻게든 뒤따라갈 테니까!”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테사의 등을 떠밀었다.

“BEAM에 우주선이 남아 있다는 보장이 없어요! 여기 영원히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어서 가요!”

테사는 다리의 고정쇠를 풀고 분사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최대 속도로 유영할 경우 유진과 파르샤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동안 탐사선이 얼마만큼 멀어질지 알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유진과 파르샤도 그런대로 유영하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아 보였다. 두 명은 그 와중에도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발현자들을 향해 총을 쏠 때마다 반동으로 몸이 이리저리 움직였고, 뇌파 연계가 되지 않았으므로 실시간 자세 제어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벽 이곳저곳에 부딪혀 가면서 겨우겨우 전진하고 있었다.

테사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탐사선이 시야에 잡혔다. 아예 기능을 정지시킨 건지 로켓 분사도 없었고, 따라서 매우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테사는 이젠 보이지도 않는 유진과 파르샤를 걱정하며 탐사선으로 유영해 갔다. 탐사선을 작동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르세로! 문제가 있습니다! 탐사선 도킹 모듈이 뜯겨져 외벽이 파손됐습니다! 탐사선의 기능에는 문제가 없지만, 공기는 모두 유출됐습니다!”

“틈이 생긴 겁니까?”

“아니요, 도킹 모듈만큼 구멍이 생겼습니다!”

테사는 소형 로버쯤은 그냥 통과할 것 같은 구멍을 돌아보며 말했다.

“젠장! 그 정도 크기는 수리 키트로는 수리가 불가능해요! 탐사선 산소 탱크의 비축분은 어떻게 됩니까?”

테사는 스크린에 뜬 수치를 확인했다. 믿고 싶지 않은 숫자가 나타났고 테사는 직접 산소 탱크로 가서 잔량을 확인했다.

“0입니다! 캐리가 탱크를 열어놨어요!”

“망할 자식!”

우주복의 잔여 산소량은 대략 7시간 분량이었다. 탐사선으로 제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지구까지는 13시간이 걸렸다. 질식사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칼리스테 박사보다 늦게 지구에 도착하게 될 텐데 이미 시체가 되어서 도착한다면 지구로 가나 마나 한 일이었다. 테사는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르세로 씨, BEAM을 달로 날려보낼 겁니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마샬, 설마…. 위험합니다! 살아남지 못해요!”

“어차피 우린 살아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 지구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두 개의 위협 중 적어도 하나는 제거해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파르샤는 반박하지 못했다. 테사의 말이 맞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세 명이 지구로 생환할 길은 없었다. 칼리스테와 마이네르 둘 모두를 막을 방법도 없었다.

“5-9 사출 구역으로 가세요. 거의 반대쪽이라 시간은 좀 걸릴 테지만 각도를 맞추려면 그 구역이 제일입니다.”

스크린에 파르샤가 말한 구역이 표시됐고, 곧바로 경로도 그려졌다. 테사는 엔진을 다시 가동했다. 마이네르가 로켓 연료까지 비우지는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 정도만 해두면 사람들이 포기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테사는 인공지능이 계산한 경로를 따라갔다. 머리 위로 BEAM의 일부 구역에 조명이 켜지는 게 보였다. BEAM이 다시 가동하고 있었다.

“르세로! BEAM이 움직입니다!”

파르샤도 그 움직임을 느꼈고, 곧바로 항로 계산을 다시 했다.

“제길! 5-8로 항로를 변경하세요!”

“그럼 각도가 빗나가지 않습니까? 차라리 6-15 생활 구역으로 가는 게 낫지 않나요?”

“생활 구역들은 기본적으로 장갑이 강하고 두꺼워서 쉽게 파손되지 않아요. 무엇보다 사출 구역만큼 발전소와 직결되는 곳은 또 없어요.”

바로 앞에 5-8 사출 구역이 보였다. 백도면과는 어긋나 있었지만 조금만 있으면 평행을 이룰 것이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테사는 탐사선의 안전 프로토콜을 해제하고 엔진 출력을 최대로 높였다. 탐사선은 계산된 경로대로 날아 들어갔다.

“아, 드미트리가 엄마 표 검보를 해준다고 했었는데.”

 

 

[Langley Research Center, Virginia]

“무슨 소리인가? 놓쳤다니!”

아미싯은 휴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관제소의 다른 직원들이 일제히 아미싯과 휴를 쳐다봤다. 휴가 손짓을 하자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구조 1팀이 검부엉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이 끊겼습니다. 그래도 신호는 잡혀서 계속 교신을 시도했는데, BEAM 근처에서 신호마저 사라졌습니다.”

아미싯은 휠체어를 눕혔던 것을 후회했다. 쉰다고 들어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신경자극제라도 맞아가면 버텼을 것이었다. 애매하게 잠들다 마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정신이 맑을 것도 같았다. 물론 계속 깨어 있던 관제사들의 모습은 초췌했다.

“달의 전파탑도 모두 망가졌다더니, 달 뒤편으로 들어간 건가? 설마 BEAM이나 다른 우주 쓰레기랑 충돌을 한 건 아니겠지?”

검부엉이의 폭발은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칼리스테 박사와 LUNA 치료제를 확보한 상태로 폭발하는 것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우주선에 문제가 생겨 기능이 정지한 사소한 수준이라면 추가로 구조대를 보내든가 하여 해결할 수도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휴는 우주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시간을 생각하면 달 뒤로 이동해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전파 방해 시스템을 가동한 겁니다.”

아미싯은 들고 있던 탭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번에도 직원들이 돌아봤지만 휴는 아미싯의 행동에 놀라 얼어붙어 있었다.

“젠장! 진작에 그걸 떼어버렸어야 했는데! 벨랴코프인가? 그 자식이 인류의 명운을 걸고 협상이라도 요구하고 있는 건가!”

“아, 아뇨. 그게 실은… 빅터 비테르만 소위입니다.”

뜬금없이 등장한 이름에 아미싯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관제소 중앙의 홀로그램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것을 본 관제사 한 명이 끊기기 전의 안드례이와의 교신 영상을 재생시켰다. 구조팀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랭글리 기지와 공유하던 안드례이 뒤로 빅터가 천천히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안드례이가 빅터를 부르며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빅터는 안드례이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곧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박아넣었다. 잠시 후 빅터는 눈이 뒤집힌 안드례이를 옆으로 밀어냈고, 얼마 안 가 통신이 끊겼다.

“올드린 기지에서의 정보로는, 칼리스테 박사는 이미 오래전에 LUNA 발현자로 변해버린 것 같고, 치료제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카이는 LUNA가 발현하여 안드로이드가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비테르만은… 방금 보신대로 그도 LUNA가 발현한 것 같습니다.”

로지가 새 탭을 들고 와 휴에게 건넸다.

“구조 2팀은 FSM에서 생존자를 한 명 구했습니다. 이름은 마이네르 캐리….”

아미싯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당장 검부엉이를 찾아내서 막아야 해. 비테르만의 행동은 이전의 발현자들과는 달라. 만약 유진이 평소에 주장하던 대로 LUNA가 학습 능력이라 부를만한 게 있다면, 그리고 그걸 원거리 통신으로 공유할 수 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아미싯은 관제소 전체가 울리도록 목청을 높였다.

“지금 당장 전세계의 레이더 기지에 검부엉이의 재원을 보내 색적을 요청하고, 밖에서 들어오는 우주선은 뭐가 됐든 격추하라고 전해!”

“검부엉이가 전파 방해에 스텔스까지 가동했다면 레이더로는 잡아낼 수 없을 텐데요?”

휴의 반문은 정확했다. 대상이 인식 가능한 정보를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느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외는 존재했다. 블랙홀 발견 초기에 인류는 블랙홀로부터 어떤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블랙홀을 찾아내고 연구할 수 있었다. 블랙홀 때문에 발생한 정보의 공역 덕분이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번거롭더라도 전파 방해 권역을 특정할 수만 있으면 되었다.

“그렇게 해서 권역 잡히면 일단 방어 위성 돌려서 빔으로 먼저 조사해. 괜히 우주선만 쏘겠다고 중심에만 조사하지 말고, 그냥 권역 전체를 레이저로 덮어버려!”

“그럼 BEAM이 위험하지 않습니까? 외곽 쪽에서 쏘는 건 비껴가겠지만, 중심에서 쏘는 건 BEAM에 직격할 텐데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거기도 발현자들로 가득할 테니 버리는 셈 치고 쏴!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책임, 지난 수십 년간 아미싯을 짓눌러온 관념이었다.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들이 나비 효과처럼 퍼져서 그런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자책했다. 이번 작전에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노인으로서, 모든 과오를 떠안고 사라지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책임감을 덜기 위한 눈속임이라고 비난하더라도, 아미싯은 그런 것 없이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작전이 바로 눈앞에서 틀어지고 있었다. 아미싯은 몇 시간 전의 시아라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검부엉이의 예상 도착 시간까지 어느 정도 남았지?”

휴는 탭을 조작하여 검부엉이의, 조건에 따른 속도 차이를 확인했다.

“최대 속력으로는 30분도 안 돼서 도달하겠지만, 그러면 기체 운용이 어렵고 무엇보다 신체가 버티질 못할 겁니다. 쿠드랴프카의 권장 최대 속력으로는 2시간쯤 걸릴 텐데, 전파 방해와 스텔스를 유지하면서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4시간은 걸릴 겁니다.”

“30분 안에 도착할 가능성은?”

“가속도가 12G만 돼도 정신을 잃는 게 사람인데, 30분 안에 달에서 지구까지 주파하려면 최소 50G의 가속도는 내야 합니다. 그 정도면 그냥 온몸이 바스러진다고 봐야죠. LUNA가 발현됐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인 이상 힘들 겁니다. 12G로 아슬아슬하게 온다고 해도 1시간은 걸릴 거고요.”

아미싯은 이마를 어루만졌다. 이마가 전에 없이 뜨겁게 느껴졌다.

“1시간으로 잡아도 얼마 안 남았군. 지금 당장 전투기도 띄워서 하늘을 빈틈없이 포위해. 부족하면 드론도 전부 띄우고. 전투기들과 지속적으로 교신하면서 재밍에 걸리는 기체가 있으면, 바로 그 지역으로 전력을 집중한다.”

관제사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기지가 버려지고 특히 공군은 해체된 거나 다름없었지만, 쓸만한 전투기와 조종사가 모두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었다. 전처럼 훈련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름의 명목을 들어 일부의 병력이 연합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렇게 전세계에 퍼져 있는 레이더 기지, 군 기지, 미사일 기지와 연계하여 지구를 에워쌀 계획을 세우기 위해 관제사들은 물론 엔지니어들은 다시 커피와 간식을 챙겨왔다. 신경자극제도 잊지 않았다. 그들 눈 밑의 다크서클은 커피만큼이나 진했다.

 

 

[BEAM, Lagrange Point between Earth and Moon(1st Lagrange Point)]

유진은 함교 문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충격에 BEAM기지 전체가 진동하고 경보도 울렸다. 함교 문의 특수 잠금도 해제되어 있었다. 폭발로 인한 안전 프로토콜의 자동 시행 덕분이었다. 유진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마이네르는 데스크를 조작하고 있었다. 유진은 조용히 소총을 들어 그를 조준했다. 마이네르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건지, 아니면 예상이라도 한 것인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이미 다 끝났어! BEAM은 달에 추락할 거다. 너만큼은 절대로 지구로 보내지 않아!”

“정말이지 영양가 없는 협박이네요. 정말로 저를 막을 생각이라면 왜 진즉 저를 쏘지 않았습니까? 이미 탄약이 떨어졌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서 소총을 둔기처럼 휘둘러가며 온 거 아닙니까?”

마이네르는 감시 카메라까지 확인한 모양이었다. 스크린도 전부 켜져 있었고 척 보기에도 기지 구조도 전체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마이네르가 BEAM 시스템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보는 게 현명했다.

“너를 위해 한두 발 정도 남겨놨을 가능성은 생각 안 하나?”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군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마이네르는 뒤로 뻗고 있던 손을 이용해 버튼을 하나 눌렀다. 그러자 기지 전체에 육중한 충격이 퍼졌다. 소총의 반동에 저항하려고 바닥에 고정쇠를 박고 있던 유진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조준은 빗나갔고, 갑자기 튀어나온 발현자가 소총을 잡아끌었다. 탄환들은 천장에 박혔다. 개량한 우주복이라 해도 군용 전투복이 아닌 만큼 발현자의 완력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유진은 바닥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어차피 뉴브라칩을 이식한 이상 LUNA가 발현할 일은 없어!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뉴브라칩의 조직 복구 기능이 LUNA의 조직 변경을 방해하는 거죠. 그럼 뉴브라칩이 이식된 전두엽을 뜯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유진은 끔찍한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마이네르가 일부러 되지도 않는 도발을 걸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것도 지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이야기지. 이대로 달로 돌아가면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될 거다!”

마이네르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갑자기 바닥이 움직여서 놀라지 않았습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BEAM 기지는 각 구역을 해제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5-8 구역은 지금 사출돼서 달로 날아가고 있고요. 그리고 그 반동이 BEAM을 지구까지 이끌어줄 겁니다. 그리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말이죠.”

-탕-

마이네르의 왼쪽 흉부가 뚫렸다. 우심실과 우심방만 남은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척추 상부에서부터 6번 경추까지 사라져 머리를 받칠 것이 사라졌다. 마이네르의 머리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덜 진화한 인류의 총탄 맛은 어떠냐, 이 빌어 처먹을 자식아!”

어느새 들어온 파르샤가 소리쳤다. 그녀는 유진을 붙잡고 있던 발현자에게도 총을 쐈다. 발현자의 머리가 터지면서 튄 체액이 유진의 시야를 희고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유진은 헬멧을 대충 닦으며 일어났다.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그럴 뻔했죠. 회전 속도가 바뀐 덕분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뭐, 팔은 좀 아프지만.”

유진은 파르샤의 말을 듣고는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왼팔은 팔꿈치 아래부터 사라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치료해야 하니까 팔 내놔요!”

“아니, 더 급한 게 있어요. BEAM 전체가 지구로 향하고 있어요.”

함교 스크린에 나타난 BEAM의 예측 경로는 라그랑주 점에 고정도 아니었고 달로 향하고 있지도 않았다. 파르샤의 말대로 지구로 향하고 있었다. 예상 충돌 시간은 한참 후였지만 변경할 수 없는 미래였다. 사출된 구역은 하나뿐이었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아직 달 중력이 더 세서 느려지겠지만, 라그랑주 점만 통과하면 지구 중력이 더 세질 거고 가속도 붙을 거예요. 그러니 그 전에 멈춰 세워야죠.”

파르샤는 함교 중앙으로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바닥에 떨어진 마이네르의 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몸과 분리되고도 그의 머리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폐와 횡격막, 늑간근 없이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파르샤는 마이네르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한쪽 팔이 없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우주복은 그녀가 쓰러지는 것만큼은 막아주었다.

“하지만 어떻게 멈출 거죠?”

“저 자식이 썼던 걸 그대로 쓸 수밖에요. 라그랑주 점에서 기지가 정지하도록 일부 구역을 사출할 거예요. 사출된 구역은 아마 지구로 향하겠지만, 기지 전체가 지구로 추락하는 것보다야 낫죠.”

파르샤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며 팔 하나로 BEAM의 궤도 계산을 끝내고 사출 시퀀스를 가동했다. 유진은 출혈이 멈추지 않는 그녀의 팔을 불편한 눈으로 쳐다봤다.

“급한 건 다 끝난 거죠? 그럼 팔 좀 주겠어요, 파르샤? 다른 건 몰라도 지혈은 합시다.”

파르샤는 왼팔을 유진에게 뻗은 채로 시퀀스를 다시 한번 점검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의료 키트를 열어 환부를 소독하고 조직을 고정하여 지혈했다. 의료 키트 안에 투약형 iPS(유도만능줄기세포) 제제 종류가 하나도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있는 곳이 우주의 진공이 아니라 BEAM 기지였다는 점이다. 응급 의료 키트는 널려 있었고, 의무실도 구역에 차고 넘치는 곳이었다.

“지혈도 끝났으니 일단 물과 음식을 찾아보죠. iPS 제제로 신체를 재생시키는 것도 몸에 양분이 좀 있어야 빨리 되니까요. 출혈도 꽤 있었으니 어지럽기도 하실 테고.”

“신체 재생은 너무 오래 걸리는데, 그냥 프린터로 의수 좀 제작하면 안 돼요?”

“뉴브라칩을 따로 이식하지 않으면 사용하기 좀 복잡해질 거예요. 구식으로 근육 감응 밴드를 착용하거나 뇌파 전달기를 써야 하거든요. 그냥 깔끔하게 iPS로 가죠?”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자 파르샤는 그제야 어지럼증을 느꼈다. 뭐가 됐든 의무대원인 유진의 말을 듣는 것이 현명할 거라는 판단도 들었다. 그렇게 유진과 파르샤는 함교를 나와 가까운 의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의무실은 장비가 망가져 있거나 물품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유진은 안정적인 걸로 정평이 난 트레게놈 사의 iPS 제제 DP-Regen을 꺼내 파르샤의 왼팔에 찔러 넣었다.

“아, 그런데 우리, 빅터에 대해 지구에 경고했나요?”

 

 

[Langley Research Center, Virginia]

“BEAM의 신호가 잡힙니다! 유진과 파르샤에요!”

9군데 레이더 기지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던 로지가 소리쳤다. 그녀는 들어온 데이터를 중앙 홀로그램으로 보냈다. 스크린에 피범벅인 유진과 파르샤의 모습이 보였다.

“랭글리! 들립니까? 파르샤 르세로입니다. 지금 LUNA 발현자가 된 비테르만이 지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검부엉이의 전파 방해 장치를 가동해서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찾아서 그를 막아야 합니다. 그는 매우 위험합니다. 반복합니다. 비테르만은 매우 위험한 상태의 LUNA 발현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막아야 합니다!”

이미 지구에서도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항하는 조치도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살아 있는 인공위성들의 보조를 받으며 전투기와 드론들이 지구의 상공을 에워싸고 있었다. 파르샤는 나름 빠르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겠지만 너무 느렸다. 하지만 그것을 BEAM에 전할 수 없었다. 랭글리 기지와 검부엉이의 전파 방해 권역이 이루는 입체각 안에 BEAM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관제사들은 과거에 NSA 요원들이 남겨놓은 제원을 참고하여 검부엉이의 예상 위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검부엉이의 전파 방해 권역의 한계가 실제로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NSA의 자료를 검토할 시간 따위 없던 게 한이었다.

“나쁜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BEAM이 지구로 추락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BEAM의 구역 하나를 사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출된 구역은 현재 지구로 향하고 있고, 앞으로 28시간 정도 후에 지구와 충돌할 예정입니다. 이런 사태로까지 발전시켜서 죄송합니다. 부디 지구에 평화를…….”

관제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아미싯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깊게 쉬고는 작은 목소리로 휴에게 말했다.

“빔으로는 거대 질량체를 파괴하기 힘들고… 지구에 미사일은 충분한가?”

“새로 만들어진 건 없지만, 비축해 놓은 게 많으니 불량품이 좀 있더라도 아직 많습니다.”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사출 구역이 전파 방해 권역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미사일로 파괴한다.”

아미싯은 그렇게 말하고는 휠체어를 돌렸다. 상당한 피로감이 그의 온몸을 압박하고 있었다. 인류 전체를 구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은 그의 예상보다 엄청난 것이었다.

“아, 그리고 칼리스테 박사 및 달 생존자 구조 계획은 모두 취소하고, BEAM에서 르세로와 홉킨스를 구할 계획만 세우도록.”

아미싯은 복도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압감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휠체어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휠체어가 멈춰 서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의 개인실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 그래야 했다. 아미싯은 등골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샬?”

“너무 가까워요!”

로지가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에 다른 관제사들이 모두 그녀를 쳐다봤다. 휴가 물었다.

“뭐가 가깝다는 거야?”

“전파 방해 권역이요! 방금 정지 궤도 근처까지 당도했습니다!”

관제사들은 수군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 계산에 돌입하고, 각 기지에 연락을 취할 뿐이었다. 오로지 휴만이 큰 소리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직 1시간도 채 안 됐는데 그럴 리가 없… 설마!”

그때였다. 관제소 중앙의 홀로그램 지구 위를 돌아다니는 점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넓은 범위였다. 통신이 끊기는 지역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제일 처음 통신 두절된 전투기와 드론과의 통신이 다시 연결됐다. 드론에서는 아무런 유의미한 데이터도 얻을 수 없었다.

“…리나? 여기는 아퀼라 5, 방금 재밍 권역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다. 들리나?”

“들린다, 아퀼라 5. 여기는 랭글리 연구 기지다. 검부엉이를 발견했나?”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지만, 구름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포착했다. 광학위장으로 모습을 감춘 듯하지만,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그러짐 현상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수준의 광학위장으로 추측된다.”

아퀼라 5에서 촬영한 가시광선 데이터가 들어왔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형성됐다. 한동안 별반 변화가 없던 하얀 뭉치의 한구석이 조그맣게 찢어졌다. 광학센서가 없었다면 육안으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하지만 무엇이 그런 변화를 야기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휴는 미간을 찌푸렸다.

“광학위장이라고?”

스텔스 기능에 더해, 광학위장은 모습을 감추는 새로운 기능으로 각광받아 왔다. 메타물질 기술을 응용하여 다양한 위장 구조체가 개발되었다. 확실히 그 성능은 점점 향상되고 있었지만, 기체가 커질수록 효과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물체를 향하는 빛을 전부 제대로 왜곡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효율을 뒷전으로 미루고 첨단 기술로 무장을 하더라도 우주선 정도의 크기를 완전히 안 보이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체 표면에서의 일그러짐이나 각도에 따른 왜곡 실패는 해결되지 않았다. 부정형이기라도 할 경우에는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화면에 보이는 기체는 달랐다. 실제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관습적으로 보인다고 표현하고,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는 기체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유일한 증거는 흔적이었다.

“검부엉이에 광학위장 기능도 있었나?”

휴는 관제소 전체를 빙 둘러보며 외쳤다.

“확인된 바 없습니다.”

바로 앞에 있던 로지가 답했다.

“젠장! 괜히 러시아 특수기를 쓰는 바람에! 일단 모든 전투기와 드론에게 검부엉이의 예상 궤적을 추적하도록 지시해! 그 궤적에 맞춰서 EMP 터뜨릴 준비도 하고! 어딘가에 멈추긴 할 테니 지상도 주시하는 것도 잊지 마!”

휴의 지시에 따라 관제사들은 전투기와 드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지구 전역에 퍼져 있던 기체들이 북위 40도 근처로 모여들었다. 점들이 모여 띠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전파 방해 지역이 사라졌다.

“검부엉이의 신호를 놓쳤습니다! 아, 아니, 신호가 안 잡히는 구역이 사라진 거니까…. 어쨌든 놓쳤습니다!”

로지가 횡설수설했다. 그녀 말대로 방금 전까지 태평양 상공에 형성되어 있던 구형의 전파 방해 권역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 어느 기체로부터도 검부엉이를 발견했다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전파 방해 기능과 광학위장 기능을 따로따로 운용 가능한 듯했다. 그다지 반가운 추측은 아니었다.

“예상 도착지는? 빅터가 갈만한 곳이 있나?”

“그것도 정보가 너무 없어서….”

휴의 물음에 관제소 직원들은 전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실 지구에는 인류 모두가 터전을 잃었고, 돌아갈 고향이 따로 없었다. 무엇보다 LUNA 발현자가 된 빅터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제 그는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대체 우리가 아는 게 뭐야?”

이번에도 관제소 직원들은 침묵을 지켰다. 로지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방어 위성을 돌려 40도 부근을 전부 조사해보는 건 어떨까요?”

“해당 지역에는 일부 안전 구역도 있어. 아무리 국제 협약 같은 게 의미를 잃었어도, 방어 위성을 그렇게 써서는 안 되지. 그러니 멍청한 소리는 하지 마.”

휴는 그녀의 제안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로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짧았던 자기 생각을 반성했다. 대신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제안을 했다.

“그럼, 일단 국장님을 부르는 건 어때요?”

휴는 고개를 저으며 이번에도 그녀의 제안에 반대했다.

“안 돼. 지금 개인실에 들어가셨는데, 무슨 일인지 방해 금지 모드를 걸어두셨어.”

관제소는 일제히 고요에 잠겼고, 홀로그램 지구본의 점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near the Tre-Genome Research Center, New Jersey]

마른하늘에 돌풍이 일고 모래바람이 퍼져나갔다. 먼지구름이 차츰 걷힐 때쯤 공기가 일렁이면서 색이 덧입혀졌다. 검부엉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열리자 그 틈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잠시 후 피투성이가 된 빅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 아름다운 내 고향! 생명이 차고 넘치는 환경!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빅터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의 앞에 트레게놈 사의 연구 중심인 트레게놈 연구 기지가 있었다. 그를 향해 LUNA 발현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근방에 그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출입구의 인증 패드만이 그를 막아섰다. 하지만 빅터의 유전자는 이미 엘리자벳의 유전자와 완전히 융합한 후였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다른 발현자들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빅터는 미소를 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비상 시스템은 연구소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주고 있었다. 빅터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지하로 내려갔다. 최하층에 도달하자 DaPre 게놈 특수 연구팀의 로고가 반짝이는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빅터는 얇은 손가락으로 문틈을 문질렀다. 그 사이로 피가 스며들었다. 다른 발현자들이 문에 달라붙었고,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연구실 가운데 캡슐에 커다랗고 붉은 덩어리가 갇혀 있었다.

“우리의 창조자는 우리를 죽이려 했고, 구하려 했고, 결국은 내버려 두고 떠났지.”

빅터는 발현자 무리를 이끌고 연구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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