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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극지인이 등장한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1999년 인류는 충격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남극, 북극의 얼음 속에서 수백만의 살아있는 지적생명체를 찾아낸 것이다.

공식명칭은 극지인(polar alien, 劇地人)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부른다. 길쭉한 머리통에 커다란 눈, 하얗고 미끈한 팔다리까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아온 외계인의 전형적인 모습 때문이다. 곤충처럼 겹눈에 딱딱한 겉껍질을 갖고 있으며 상당한 수준의 지능과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있었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극지인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그들과 함께 사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 속 외계인들과 달리 극지인은 지능이 낮고 순종적이어서 사람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했으며, 어떤 대우를 받아도 부당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극지인은 마치 노예나 가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처럼 보일 지경이었고, 인류는 그런 그들 앞에서 유감없이 본성을 드러냈다. 덕분에 세상은 2010여 년 경까지 외계인 호황 시대(AEE-Alien Earning Era)를 맞았다. 싼 인건비에다 극지인 유전자를 이용한 새로운 사업들까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물론 명만큼 암도 있었다. 극지인들이 허드렛일에 도맡는 바람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던 국가들은 어려운 시기를 맞았고, 로봇산업 역시 발전속도가 더뎌졌다. 그리고 인류는 극지인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에 대해 거의 모르는데도 말이다.

 

 

 

극지인(polar alien, 劇地人)과 도넛 

 

 

2015년. 마치 도영의 대학 졸업을 기다렸다는 듯 불황이 찾아왔다.

학자와 전문가들은 말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정리를 다 끝냈다.’, ‘극지인으로 인한 혼란이 마무리되고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라고... 하지만 극지인호황일 때도 젊은이들의 취업은 어려웠고, 부자가 된 사람도 많지 않다. 극지인 발견 전부터 부자였던 사람들이 더 엄청난 부자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모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극지인덕에 미래는 풍족할 거라고 했었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미디어와 학교에서 극지인과 다른 우리 인간만의 특징, 고도의 지능과 문화 향유능력을 개발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이 만나는 극지인은 지능이 낮고 자의식이 없어보이고 문화를 즐기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젊은이들은 책상에 앉아 공부에 매진하거나, 연예인이 되기 위해 뼈와 살을 깎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하니까. 세상은 그런 모습을 적극 권장하고 비춰주고 환호해주었다. 인간승리는 공부 잘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젊은이에 대한 찬사의 단어로 사용되었다. 불황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해야할 작은 단어가 되었다.

결국 현대과학은 불황의 이유는 물론 극지인의 근원을 밝혀내는데도 실패했다.

 

그리하여 현재. 밤 10시의 도넛 가게 안.

도영은 쟁반 위에 도넛 세 개를 얹어놓고 계산을 기다리고 있다. 카운터에서 도넛가게극지인이 40대 남자 사장의 교육을 받으며 계산 중이다. 도넛가게 극지인의 얼굴엔 희미한 도넛모양의 패턴이 있다. 극지인 얼굴에는 고유의 패턴이 있는데, 아무래도 저 극지인은 도넛모양때문에 이 가게에 채용된 모양이다.

극지인도 얼굴이 반반하면 도시에서 사람 대하는 일을 하고, 못생기면 인적 드문 조선소나 시골 농장 같은 데서 일한다. 전 세계 어디나 비슷한 상황이다. 인류의 취향과 본성이 전세계 어디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도영은 고향집에서 용돈을 받으며 공부 중인 취업준비생이다. 현재 그의 가장 절실한 바램은 정규직 신입사원이 되는 것이다.

도영의 친구들 사이에서 통하는 유행어가 있는데 ‘정규직 아니면 극지인’이다. 극지인보다 사람들의 법정최저임금이 훨씬 높고 세금도 저렴하지만 (극지인은 급여의 80%를 세금으로 낸다.) 이 둘은 삶에 필요한 최소금액자체가 다르다. 사람은 옷을 갖춰 입어야 하고 유동식 아닌 진짜 음식을 먹어야 하며, 연애도 결혼도 하는데 그런 것들에는 돈이 든다. 그래서 극지인과 같은 일을 한다는 건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좀 과장하면 정규직만이 극지인과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정규직 아니면 극지인이고, 이것은 취준생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도영 역시 절대로 정규직을 포기할 수 없다. 어릴 적부터 부모 기대에 어긋난 적 없는 아들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영어공부와 자격증 스터디, 이력서 작성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낸 후 도넛가게에서 쇼핑(!)을 하며 공식일정을 마무리 중이다.

도영이 자기 차례가 다가오자 동전 지갑을 꺼내 백원짜리를 맞춘다. 남들이 보면 쪼잔해보일 수도 있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그는 성실한 청년이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귀한 돈을 동전 하나도 허투루 쓸 수 없다. 사장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다.

“오늘 오셨으니까, 모레 오시겠네요?”

“네?”

“하루 건너서 오잖아요. 이분 잘 기억해. 단골이셔.”

사장이 극지인에게 도영을 잘 기억하라면서 서비스로 먼치킨류의 작은 도넛 하나를 더 얹어준다. 극지인은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도넛과 도영을 번갈아 쳐다본다. 무엇을 기억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도영일까? 도넛일까?

“멍충아, 그렇다고 항상 도나쓰를 요렇게 주란 말은 아니야. 알겠지?”

사장은 혹시나 극지인이 매번 서비스를 줄까 싶어 핀잔을 주더니 도영을 보고 씩 웃는다. 그 웃음에는 겸연쩍음과 단호함이 동시에 묻어있다.

“얘네가 원체- 고지식하고 요령이 없잖아요. 허허.”

“네. 고맙습니다.”

어쨌거나 서비스를 받으니 기분은 좋다. 도영은 원래 도넛을 좋아해서 최근에는 아침으로 먹고 있다. 월수금 저녁에는 편의점 도시락, 화목토 저녁에는 도넛을 사서 다음날 아침으로 먹는데 운이 좋으면 유통기한 끝난 떨이상품이나 오늘처럼 서비스 도넛등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둘 다 통신사 멤버쉽 할인까지 해준다!

포장된 도넛을 받아서 나오려는데, 도넛가게 극지인이 카운터 옆으로 나오더니 고개를 숙여 90도 인사를 한다. 사장이 시킨 모양인데 극지인답게 타이밍이 영 맞지않다. 엉겁결에 도영도 덩달아 인사를 하는데, 둘이 맞절하는 모양새가 된다.

가게 밖의 도넛 네온사인과 함께 안에서는 맞절을 하는 극지인과 도영의 모습이 묘하게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도영은 그런 사람이다. 극지인에게 별 관심은 없지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춘다. 좋은 느낌을 주는, 반듯하게 자란 보기 좋은 청년이다.

 

도영의 방은 손바닥만하다. 책상과 침대, 작은 냉장고와 옷장이 전부인 단촐한 공간이다. 그래로 방 안이 답답해 보이지 않는 건 물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다. 일상에 정교한 규칙을 만들어 지켜나가는 건 도영의 습관이자 성격이며 알파이자 오메가다.

외아들인 도영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어릴 적부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매일이 심심하기 그지없던 꼬맹이 도영은 어느 날부터 집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도우려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퍼즐 맞추는 기분으로 시간을 때우려 한 일이다. 책들을 크기별로 가지런히 꽂고, 펜들을 종류별로 잘 분리해두고, 책상 위를 말끔하게 정리하면 도영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도영의 정리벽은 물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도영은 자신의 하루를 꼼꼼히 계획하고, 열심히 실행하고,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겨 관리한다. 도영은 이렇게 충실히 하루하루를 보냄으로써 미래의 삶도 자신의 의지대로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계획보다 늦어지는 취업때문에 조금씩 불안이 자라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런 부지런함이 도영에게 가져다 준 건 많다. 비정규노무관리3급, 생활병력기능사2급, 계산독해능력검정3급, 아시아청년연맹정식간사 등등 친구들의 두배쯤 되는 자격증과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런 것들이 이력서를 한줄한줄 늘려준 덕분에 도영은 남들보다 좀 더 긴 이력서를 갖고 있다.

 

도영의 최근 일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07:00 기상-아침(전날 사온 편의점도시락 or 도넛과 우유)

09:00-12:00 온라인 취업활동 및 집안일, 운동

12:00 점심-학교식당 이용

13:00-18:00 오프라인 취업활동 (특강, 그룹스터디, 개별스터디 등)

18:00 저녁-식권식당 (식권 11장에 현금가 5만원, 고기반찬 자주 나옴)

19:00-22:00 영어학원 (수업+개인공부)

22:30 야식 및 아침준비 (월수금 편의점, 화목토 도넛가게)

 

남들이 보기엔 간략하다 못해 답답해보이는 일상이지만, 도영입장에서는 꽤 다이내믹하다. 요즘 공채하는 기업들의 취향이 다양해져서 인문학 공부를 하거나, 프레젠테이션을 해야하는 등 갖춰야할 품목(?)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가끔은 도영도 너무 지쳐서 극지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가 있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어디서든 극지인을 볼 수 있다. 학교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도, 스터디카페에서 쓰레기를 비우는 것도, 특강의 촬영 보조도, 식권 식당에서 고기반찬을 담아주는 것도 전부 극지인들이다. 도영이 다니는 영어학원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극지인도 있는데, 헤드폰이 잘 맞지 않아 도영이 가끔 도와주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하게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극지인이 사람보다 굼뜬 건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딱히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속을 가늠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슬렁거리는 극지인을 보고 있자면 묘한 평화와 우월감이 느껴진다. 나는 저것보다 더 빨리,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러다 문득 극지인처럼 사는 삶을 상상해본다. 옷에도 신경쓰지 않고 (보통 유니폼 상의만 입거나, 어깨띠를 두르거나, 아예 벗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맛난 음식을 먹고 싶어하지도 않고 (소금간을 한 전용유동식을 먹는데, 개 사료를 주는데도 있다고 들었다.) 나라에서 제공하는 창고 같은 데서 아무렇게나 잔다. 말 그대로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다. 저렇게 살면 얼마나 부담이 없을까? 저렇게 다 내려놓아버리면....

하지만 도영은 금세 현실로 돌아온다. 자긴 극지인도 아니고 그런 삶에 만족할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규직 아니면 극지인... 노예로 사는 데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가끔 답답할 뿐이다. 어째서, 어째서 선택이 둘 밖에 없을까? 하고... 물론 친구 민태는 정규직도 똑같이 노예 아니냐?고 했지만 그건 개소리다. 

쳇바퀴 같은 도영의 하루 중에도 작은 샘물 같은 시간이 있다. 편의점에 갈 때다. 아니 정확히 말해 편의점 가서 알바생 유나를 볼 때다. 지난 번에 사장이 ‘유나씨-’라고 부르는 걸 듣고 이름을 알았다. 그 날은 자기 전에 몇 번이나 ‘유나씨-’라고 불러보곤 혼자 킥킥거렸다.

유나는 도영 또래로 단발보다 조금 긴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인데 가끔 립글로즈를 바르기도 한다. 피부가 흰 편이라 립글로즈를 바른 날에는 입술이 반짝거려서 도영의 시선을 고정시켜 버린다.

물건을 정리하거나 청소를 할 때 종종 낮은 소리로 흥얼거리는데 그게 은근히 귀엽다. 약간 차가워보이는 인상인데 흥얼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아! 오해했구나.’라고 반성하게 만드는 달콤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때문에 도영과 마찬가지로 유나를 흘끔거리는 남자들이 꽤 많다.

도영은 유나와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심지어 극지인에게도 친절한 도영은 유나가 힘든 일을 할 때마다 달려가 거들었다. 박스 옮길 때 돕거나 쓰레기를 내놓을 때 문을 열어주는 등의 작은 친절을 당연하다는 듯 자주 베풀었다.

유나는 그런 도영의 행동이 몸에 밴 자연스러운 매너임을 금세 알았다. 도영은 편의점에 들어올 때도 뒤에 사람이 있으면 문을 잡아주었다. 게다가 격일로 같은 시간에 와서는 핫바나 미니컵라면을 사먹고 행사 중인 도시락을 골라서 통신사 멤버쉽 할인을 받은 후 동전을 정확히 세서 일부는 현금, 일부는 카드로 계산해갔으니 기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도영의 모습은 유나가 지난번에 사귀었던 사람과 정반대다. 유나의 전 남자친구는 학교 선배였는데 부잣집 아들이라 돈을 팍팍 잘 쓰고, 일과를 종잡을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호탕함에 끌려 사귀었지만, 그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견디지 못해 헤어졌다. 그 후유증에다 취업이라는 지상과제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전 남자친구와 데이트할 때 쓴 돈(유나의 양심상 데이트 비용을 전부 남자친구에게 내라고 할 수 없어서 최선을 다해 보태다보니....)때문에 부모님 모르는 카드빚까지 생겨 아르바이트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도영과 유나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 발전은 없다. 둘 다 취준생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어서다. 만약 여기서 그 혹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선택하는 순간,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래의 행복과 안정된 삶이 날아가는 건 확실하다. 시스템은 가혹하다. 그 누구도 나이 든 신입사원을 원하지 않고, 정규직이 아닌 이에게 대출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수평선 같은 관계가 계속될 것만 같던 어느 날 저녁의 편의점.

도영은 다음 날 아침으로 먹을 도시락을 골라 유나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도영이 고른 도시락을 본 유나가 말한다.

“이거 말고, 옆에 있는 거 맛있어요. 과일증정행사도 하고 있고.”

“그래요?”

도영이 다른 도시락으로 바꾸고 증정과일을 고르는데 유나의 전화기가 울린다. 도영은 괜찮으니 받으라고 손짓한다. 유나, 작게 목례하고 통화를 한다. 한쪽에서 물건을 살피던 도영이 본의아니게 유나의 통화를 엿듣게 된다.

“응... 단톡방에서 봤는데 여행은 좀... 주희한테는 축하한다고 전해줘. 그래... 나도 알지. 근데 내가 요새 좀 바빠서.. 그래, 나도 취직하면 한턱낼게. 고마워! 응.”

통화를 듣고 있자니 남의 얘기같지 않다. 유나의 목소리도 애처롭게 느껴진다. 전화를 끊은 유나가 도영이 가져온 도시락과 과일, 생수 따위를 비닐봉지에 담는다. 그러자 도영이 얼른 계산대로 다가가 거든다. 도영은 작은 위로라도 건네고 싶어서 말을 건다.

“저도 친구들이랑 공채 붙으면 같이 유럽여행가기로 했는데... 흐흐 아직 아무도 합격을 못했어요. 그래서 그냥 제주도라도 갈까? 이러는 중이에요.”

“저기....”

“앗, 죄송해요.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구요.. 그냥,”

“그게 아니라...”

유나가 도영을 보더니 시선을 비닐봉지로 가져간다. 도영이 유나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니 자신의 손이 유나의 손을 꼭 잡고 있는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도영이 손을 놓는다. 하지만 얼굴은 이미 벌개졌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도영은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빨리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앗! 죄송합니다.” 도영이 급박하고 깊게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하는 바람에 계산대선반에 이마를 정통으로 꽝- 찧고 만다. 악-! 짧은 비명이 터져나오고 도영은 머리를 감싸쥔 채로 쿵-하고 주저앉는다. 놀란 유나가 계산대 뒤에서 나와 도영의 상태를 살핀다.

“괜찮으세요?” 유나가 도영의 이마를 살펴본다. 이미 혹이 볼록 솟아있다. 유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혹을 쓰다듬고 들어가라고 살짝 눌러본다. 당연히 혹이 들어가기는커녕 도영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꼴이지만, 도영은 심장이 하도 뛰어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유나의 가슴이 코앞에 있기 때문이다. 쿵쾅쿵쾅- 마치 도둑질 처음하는 사람처럼 마구 뛴다.

“네.. 괜찮은 것 같은.. 아!”

“혹이 제주도 오름 모양이네요. 작년에 제주도 가서 봤거든요.”

“... 좋아요?”

“네!?”

도영의 갑작스런 질문에 유나가 당황한다.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호감은 있지만 아직 좋아하는 그런 단계는 아닌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해야하나?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돌직구인거야? 얌전한 줄 알았더니 갑자기 사람 당황스럽게 만들고!

“제주도 좋았냐구요.”

“아... 네! 좋죠. 제주도!! 좋았어요.”

둘은 잠시 동안 말이 없다. 유나는 당황한 자기가 바보처럼 느껴진다. 다행히 도영이 눈치채진 못한 모양이다. 둘은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이 붙어있다.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지만, 밀도는 높았다. 모든 감각을 상대에게 완전히 집중하고 있다. 그 남자의 정수리에서 나는 샴푸향, 그녀의 편의점 조끼에 묻은 작은 얼룩과 희미한 비누냄새까지... 둘의 심장박동이 서서히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쿵쾅-쿵쾅-쿵쾅-

따릉따릉- 차임벨이 울리며 출입문이 열린다. 벨소리가 마법의 시간을 박살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도영과 유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둘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다름 아닌 편의점 본사에서 나온 극지인... 내일 진열할 상품들을 갖고 들어온 것이다. 유나는 손님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슬쩍 밖을 내다보니 편의점 탑차가 서 있고 운전기사는 통화 중이다.

유나가 극지인이 출입문에 내려놓고 간 박스를 얼른 안으로 옮긴다. 도영이 다가와 돕는다. 박스가 유나 혼자 들기엔 무겁다. 포장을 보니 음류수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상품이다. 도영이 박스 옮기는 걸 돕자 유나가 가볍게 미소 짓는다. ‘아 졸.. 예쁘다!’ 도영의 마음이 달뜬다.

“예쁘죠?”

“네!? 예... 예뻐요.”

도영이 화들짝 놀란다. 내 마음을 읽었나? 싶은데...

“이거 내일 첨 판매하는 신상인데 포장 참 예뻐요. 그죠?”

유나가 방금 박스에서 꺼낸 500미리 음료수를 도영에게 내민다. 도영이 엉겁결에 음료수를 받아든다. 유나 말대로 용기도 예쁘고 라벨도 감각적이다.

“그거 아직 포스에도 안 올라간 건데 최초로 드시는 거예요. 히히.”

“아, 고맙습니다.” 속내를 안들켜 안도하는 도영이 등 뒤에서 시선을 느낀다. 돌아보니 물건을 옮기던 극지인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가 무표정한-원래 극지인은 표정이 없긴 하지만..-얼굴로 도영의 응큼한 마음을 꿰뚫어본 것만 같다.

그러고보니 편의점본사 극지인의 손에도 똑같은 음료수가 들려있다. 도영과 시선이 마주친 극지인이 고개를 돌려 편의점 밖을 본다. 물건은 다 내렸는데 탑차기사가 여전히 통화중이다. 편의점본사 극지인이 음료수를 따서 마신다. 하지만 음료가 그의 입맛엔 맞지 않는 모양이다. 몇 번 쩝쩝대다가 은근슬쩍 바로 옆 라면바 구석에 세워놓는다.

그 사이 유나는 도영이 산 것들의 계산을 마친다. 고객용 모니터를 보고 가격을 확인한 도영이 통신사 멤버쉽 카드를 건넨다.

“할인해서 사천 이백원입니다.”

“이백원은 현금하고 사천원 카드로 할게요.”

도영이 신용카드와 동전을 건넨다. 유나가 영수증을 뜯으며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을 건넨다.

“저 내일까지만 하고 그만둬요.”

“네!?”

“오늘 오시면 내일은 안 오시잖아요. 그래서... 모레 왔는데 당황하실까봐.”

“네.... 당황스럽겠네요.”

도영은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 때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굼벵아! 안나오고 뭐 해?”

탑차기사가 멍하니 서서 도영과 유나를 보고 있던 극지인을 부르는 소리다. 하지만 그 소리에 정신이 든 건 극지인만이 아니다. 극지인이 겅중겅중 나가자 도영도 목례를 하곤 급히 편의점을 빠져나간다. 마치 탑차기사가 극지인이 아니라 도영을 부른 것 같다. 안나오고 뭐해!? 그건 너한테 안어울려! 넌 그럴 여유가 없어!

도영이 나가자마자 유나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다. ‘아, 병신! 그런 얘길 왜 해가지고...’ 빚도 거의 다 갚았으니 취업준비에 전념하려고 그만두는 거다. 그냥 그것뿐인데 이런 얘길 왜 한 걸까? 십여분전까지만 해도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그의 샴푸향때문이었을까? 잠시 이성을 잃었다. 유나는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난다.

후회와 당혹스러움이 밀려오는 건 도영도 마찬가지다. 편의점 야외파라솔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서 있다. 다시 들어갈까? 들어가면 뭐라고 하지? 아까 당황했단 말은 진심이다. 이제 그 쪽을, 유나씨를 못 보게 되면 무척 서운할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지만 이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지금 도영의 처지에선 할 수 없는 말이다.

그 때 도영의 뒤로 한 무리의 넥타이 부대가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반주를 걸쳤는지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동작이 느긋하게 풀어져있다. 그들은 곧장 유나가 있는 카운터로 향한다.

“저기, 이쪽은 우리 신입인데요, 얘가 여기 계시는 분이 너무 예쁘다고 며칠 째 노래를 불러서요.”

“네!?”

“아이참, 왜 그러세요, 대리님!! 맥주나 고르세요!”

도영또래의 신입사원이 부끄러워하며 유나에게 말을 걸던 대리를 맥주코너로 끌고간다. 그러자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둘에게 소리친다.

“에이, 빼지 말고 이 기회에 고백해. 취중진담 몰라?”

그러자 신입사원이 쪼르르 그 옆으로 달려와 사정한다.

“과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당황하시잖아요.”

대리며 과장, 다른 일행들이 모두 큭큭거리며 신이 났다. 지켜보던 도영의 표정이 딱딱해진다. 그 때 신입사원이 캔맥주를 계산대에 우르르 쏟아놓으며 유나에게 말을 건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강가서 한잔 하려고... 근데 정말 예쁘세요! 반한 건 사실입니다.”

신입사원의 기습적인 고백에 주변사람들이 와하하! 드디어!! 라며 신나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영, 빈 속에 알콜을 들이부은 것 같은 화악-하고 불편한 감각을 느낀다. 또래의 정규직 신입사원을 보며 느끼는 도영의 감정이 서서히 단어로 구체화된다.

‘짜증스러운 무기력함.’

만일 내가 저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갈등하지 않을 텐데. 유나씨에게 과감하게 다가갔을 텐데... 그 때 유나가 고개를 돌려 창밖의 도영을 본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순간 도영은 자신의 열등감과 소심함을 전부 들켜버린 것 같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도영은 유나의 시선을 피한다. 얼른 도망쳐야한다! 이대로 있다간 쪽팔림의 열기때문에 토스트 위의 버터처럼 녹아버릴 거다!

도영은 걸음을 재촉하면서 부글거리는 속 때문에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내쉰다. 그것은 아주 뜨겁고 부끄러운 한숨이다.

 

집에 온 도영은 그답지 않게 옷을 함부로 벗어 집어던지고 샤워를 한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문득 오랜만에 친구들이 보고 싶다. 같이 제주도라도 가자는 그 친구들.

씻고 나온 도영이 냉장고 위에 놓인 음료수를 본다. 유나가 준 그 ‘신상’이다. 갈증이 나지만 감히 마실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자신은 자격미달이다. 그래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노트북 앞에 앉는다. 소싯적에 열심히 했던 MMORPG에 접속하고선 친구 민태에게 카톡을 보낸다.

‘간만에 겜이나 하자. 들어와’

도영과 민태는 대학교 시절 내내 붙어다녔었다. 하지만 요새는 각자 취업준비로 바빠서 가끔 온라인게임에서 만나 사냥하며 채팅하는게 전부다.

도영은 민태와 함께 몹을 잡기 위해 필드로 향한다. 문득 도영은 자기 캐릭터 이름을 보곤 픽- 웃는다. ‘초백수’ 하필 저런 걸.. 옆에 뛰는 민태 캐릭터 이름은 ‘민폐왕’이다. 민태는 학교 다닐 때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져 주변 친구들한테 많이 빌붙었는데 그 때 아이들이 민폐끼친다고 뒤에서 수군댔었다. 솔직호방한 민태는 그 뒷담화를 알고는 자기를 민폐왕이라고 하고 다녔다. 도영은 민태의 그런 면이 편하고 좋았다.

민폐왕 : 뭔 일 있남?

초백수 : 없어. 넌?

민폐왕 : 나도. 학자금땜에 좀 바쁜 거 말곤.

초백수 : 많이 갚았으?

민폐왕 : 급한 건 막음. 씨바, 어제 알바갯수 세봤는데 25개. 알바왕이라고 닉 바꿔야겠다. 거의 극지인급 아니냐?

초백수 : ㅋㅋ 존나 불쌍. 니는 얼굴도 극지인급이지.

민폐왕 : 지롤. 돈없다고 도나쓰 처먹는 주제에. 니가 더 불쌍.

초백성 : 마시썽! 알럽 도넛 ㅋㅋ

도영은 민태와 시덥잖은 얘길 나누고 있자니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때는 시간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도 괜찮을 만큼 여유가 있었는데... 불과 몇 년 전인 그 시절이 아주 먼 과거처럼 그립게 느껴진다.

한참 게임에 열중해있는데 필드 위에서 이상하게 플레이하는 캐릭터들이 눈에 띈다. 처음에는 초본가 싶었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뉴비라고 하기에는 고렙에 장비도 풀세트다. 그런데 동장이 굼뜨고 파티원 없이 혼자 비효율적으로 사냥을 한다.

초백수 : 저거 뭥미? 자동 사냥?

민폐왕 : ㄴㄴ 외계인

초백수 : 왓????

민폐왕 : 이 생퀴 늦네. 요새 유행.

초백수 : 미친, 극지인이 할 수 있어?

민폐왕 : 단순 노가다만. 핵아니니까 안걸리고 개꿀.

초백수 : 헐. 역시 돈이 짱.

민폐왕 : ㅇㅇ

초백수 : 오늘 고백비슷한 거 받음.

민폐왕 : 헐. 누구? 신방과 오크? ㅋㅋㅋ

초백수 : 단골 편의점 알바. 졸 예쁨. 자기 내일 그만둔다고 말해주고 음료수도 줌. 포스에 등록도 안된 신상음료수.

민폐왕 : 그래서 바로 오케이? 이제 모쏠탈출?

초백수 : .... 걍 도망침. 나 백수라서 연애할 능력안됨.

민폐왕 : 하긴 백수 앤 편순이면 바닥 오브 더 바닥 커플이지.

 모니터의 ‘바닥 오브 더 바닥’이란 글자가 도영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쿵- 가슴에 답답한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다. 그래, 맞아. 나는 지금 바닥이고... 바닥은 극지인 같은 거지. 극지인은... 사람이 아니잖아. 난 사람이 아닌 거야!

도영은 필드에서 느릿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극지인 캐릭터를 보자 마치 자신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가서 확 죽여버릴까? 매너 좋은 도영답지 않게 비열한 살의가 치솟았다. 거의 만렙에 풀 스텟을 찍었어도 저렇게 굼뜨면 도영의 세컨 캐릭으로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적의와 전의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데 띠링-하고 화면에 메일도착 알림창이 뜬다. 발신자는 KM제약. 도영이 급히 옆에 놔둔 스마트폰을 들어 메일을 확인한다.

 ‘귀하의 뛰어난 자질과 역량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러나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도영이 손가락으로 쓱- 문질러 메일을 지워버리곤 스마트폰을 침대에 던진다. 다시 게임화면으로 눈을 돌렸더니 민태가 도영을 데리고 마을로 워프해버렸다. 기대했던 극지인 PK는 물 건나갔다. 생각해보니 다행이다. 혹시나 그 캐릭터를 죽였다면 극지인은 주인한테 엄청 혼났을 거다. 굳이 그 극지인이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다. 그건 도영도 마찬가지다. 극지인이든 초백수든 우린 그저 각자의 처지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이니까...

내일이 되면 희미해질 것이다. 오늘 유나가 보여준 미소도, 그녀가 건넨 음료수도...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그 끝에는 정규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도영은 침대에 누워 그렇게 마음을 갈무리한다.

 ‘정신차리고 잊어야할 건 잊자.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다...’

 

다음 날, 유나가 편의점을 그만둔다고 했던 바로 그 날. 도영은 결심했던 대로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시작한다. 전날 사 둔 편의점 도시락과 증정과일로 아침을 먹고 온라인으로 여러 군데에 입사지원서를 넣는다. 외국계 유통사에 취직한 선배랑 통화하며 유용한 정보을 얻고 인강도 하나 듣는다. 이런 일들을 하는 틈틈이 방청소와 정리정돈을 하고, 팔굽혀펴기 백개와 화장실 문에 걸어둔 실내용 턱걸이봉으로 턱걸이도 한다. 하지만 예쁜 신상 음료수는 마시지 못한다. 여러 번 기회가 있었는데 뚜껑을 따면 책임지지 못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정말 목마를 때, 한번에 다 마시고 버려버릴 수 있을 때 마시자, 하고 놔둔다.

 이후의 일과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학식을 먹고 그룹스터디에서 ‘기업의 혁신과 개인의 혁신’에 관한 주제로 토론을 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집중이 잘 안됐다. 특강도 들었다. ‘스펙 쌓아서 남 주나?’란 내용인데 힘들게 쌓고 있는 그 스펙이 온전히 날 위한 것, 내 것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 신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 특강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 먹을 시간이다. 도영은 고기반찬이 자주 나와서 정기권을 끊은 식권식당에 간다. 식당 안은 도영처럼 혼자 온 취준생이거나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기본반찬은 뷔페식으로 손님들이 알아서 갖다먹지만 고기는 식당에서 작은 접시에 담아 서빙해준다. 당연히 그 일은 극지인 몫이다. 여기 식당의 고기(갖다 주는)극지인은 도영이 3년 전 처음 왔을 때부터 일하고 있었고, 그 덕에 상당히 능숙하다. 대체로 느릿한 극지인도 한 가지 일을 오래하면 숙련도가 올라가는 모양이다.

고기극지인과는 꽤 오래 얼굴을 봐왔지만, 도영이 일방적으로 인사인듯 인사 아닌 인사 같은 눈인사만 일방적으로 건네는 사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극지인들은 먼저 아는 척을 하는 일이 드물고, 혹시나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하면 폴더인사-굳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로 돌려주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인사가 부담스러워서 눈인사만 건네는 건데,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대부분 답이랄만한 것이 돌아오지 않아서다. 어쩌면 극지인도 답으로 인사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커다란 곤충같은 눈(실제로 겹눈)에서는 표정을 읽는 게 어렵다. 그래도 하긴 해야지... 도영은 모른 척 지나가는게 좀 그렇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청년이다.

 좋아하는 반찬들이 많았지만 도영은 입맛이 없어 반 이상 남긴다. 혼이 절반쯤 나간 것 같다. 도영은 자신의 집중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연기가 되어 콧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상상을 해 본다. 그 연기들은 지금 편의점을 향해 날아가고 있겠지... 정말 바보 같다.

문득 오늘은 도넛가게 대신 편의점을 가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가서 뭐하려고? 할 수 있는게 없는데... 바닥 오브 더 바닥인데...

 저녁을 다 먹은 도영이 식당을 나서려는데 식당출입문 옆에 붙어있는 보드에 눈이 간다. 인근 학생들이 중고품 판매나 그룹스터디 전단을 붙이는 곳이다. 도영의 눈길을 끈 건 ‘외계인완전정복!-극지인노무관리3급 스터디 멤버 구함’ 전단이다. 도영이 연락처를 떼서 챙긴다. 자격증이 늘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도영이 식당을 나서는데 입구 문 뒤에서 후루룩후루룩 국물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고기극지인이 쪼그리고 앉아서 시래깃국을 마시고 있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깔고 앉은데다 고기양념이 묻어 꼬질꼬한 앞치마 때문에 보기가 좀 안쓰럽다.

평소의 도영이라면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극지인노무관리자격을 따기로 마음먹어서였을까?

 “왜 거기서 먹어요?”

 고기극지인이 후루룩거리던 걸 멈추고 도영을 빤히 쳐다본다. 표정변화 없는 빤빤하고 매끈한 피부와 커다란 겹눈... 저 표정을 뭐라고 읽어야할지 모르겠다. 아니, 표정이 없어서 읽을 수가 없다. 못 알아듣는 건가? 도영은 장애인 대하듯 목소리를 높이고 손짓발짓을 더해 최대한 친절하고 쉽게 말하려고 애쓴다.

 “안에 들어가서 편하게 먹어요.”

“손님이 싫어해요.”

“안에 손님 별로 없어요. 여긴 불편하잖아요.”

“여기 편한데... 고객님이 불편하면 들어갈게요.”

“아, 내가 불편한 건 아닌데... 여기가 좋으면 여기서 먹어요.”

“네. 근데 저 귀 안먹었어요.”

“예?”

“고객님 목소리 너무 커요. 머리가 울려요. 나는 청력 1등급이라서 귀 예민해요.”

“아! 죄송해요. 잘 안들리시는 줄 알고.. 수고하세요.”

 도영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극지인이 느릿하게 일어나 폴더인사를 한다. 손에 든 시래깃국을 흘리지 않으려고 팔을 쫙 뻗어서 희안한 포즈가 된다. 민망한 순간이다. 뻘쭘하게 같이 목례를 두어번하던 도영, 갑자기 뭔가가 떠올라 가방사이드포켓에서 음료수를 꺼내 식당극지인에게 건넨다. 아직 따지 않은, 아니 따지 못한 그대로다.

 “이거 새 건데 드실래요?”

 고기극지인이 음료수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돌려주며 말한다. “이거 나는 입에 안맞아요.”

뜻밖의 대답에 도영이 당황한다. 벌써 먹어봤다고...?

 “어제 나온 신상인데... 진짜 먹어봤어요?”

“네.” 극지인다운 무심하고 단호한 대답이다.

 “보기랑 다르게 빠르시네.”

“난 시래깃국이 좋아요.”

“네... 짭짤한 취향이신가보다.”

 머쓱해진 도영이 음료수를 들고 돌아선다. 그러다 벽에 쪼르르 세워져있는 1회용 음료컵 쓰레기들이 눈에 띈다. 도영은 예쁜 음료수를 그것들 사이에 슬며서 세워둔다. 이렇게 살며시 버리면... 아무도 모르겠지? 하는데 뒤에서 고기극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객님, 제---에발,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사장님이 개씨발, 개씨발 하면서 싫어해요.”

 고기극지인의 무심(?)한 절규에 움찔한 도영이 얼른 음료수를 되가져온다. 하- 이거 하나 해결못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허나 고기극지인은 도영의 답답함엔 관심이 없고 그 거대한 눈으로 버리나 안버리나 빤히 쳐다보고 있다. 미안해진 도영이 자기 음료수만 가져갈 수 없어서, 쓰레기들까지 차곡차곡 챙겨 간다.

도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고기극지인은 제자리에 앉아 다시 후루룩거리며 시래깃국을 마저 마신다. 식당극지인의 눈에 비친 도영은 꽤 인상적이다. 음료수를 권하고 쓰레기를 주워가다니.... 보통 손님들과는 좀 다르다.

 

도영은 어학원 연습실에 앉아서 후회스런 일들을 되뇌었다. 민태한테 편순이랑 썸탄다고 했다가 바닥 소리 들은 거... 괜히 돈과 시간이 아까운 특강을 들은 거... 고기극지인한테 친절을 베풀려다 쓰레기만 들고온 거.... 병신짓거리가 풍년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답답한 건 아직도 음료수를 갖고 다니는 거다. 유나씨는 왜 나한테 음료수를 준 걸까? 종일 자기 생각하라고 그런 걸까? 내가 이렇게 힘든 걸 알기나 할까?

도넛가게에서도 반쯤 정신이 나가있다. 사장이 서비스 도넛-이면서 그날의 악성재고-을 얹어줬는데도 끝까지 눈치채지 못해 그를 서운하게 만든다.

도영은 불길한 초조함 때문에 여유가 없다. 이제 몇 시간 후면 편의점 그녀를 영영 못보게 된다. 단지 몇 시간 후면... 그리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살아가겠지...

왠지 기운이 없어서 카드로 계산한다. 동전을 챙길 여력이 없다. 사장한테 도넛봉지를 받아서 돌아서는데 도넛(가게 알바)극지인이 진열대의 도넛들을 정리하고 있다. 홀 가운데 이동식 트레이를 갖다놓고 남은 도넛들을 몽땅 한 곳에 모으는 중이다. 거의 다 팔려서 몇 개 남지 않았는데, 글레이즈드 도넛만 대여섯개가 남아 있다. 극지인은 손가락을 쫙 편다. 그런데 손가락이 길어지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극지인들은 딱딱한 외피사이에 부드러운 부분이 있고 거길 늘릴 수 있다는 얘길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 같은 데서 본 거 같다. 하지만 이렇게 눈 앞에서 극적인 형태로 보는 건 처음이다.

도넛극지인이 나란히 세워져있는 글레이즈드 도넛들의 구멍으로 길어진 손가락을 쏘옥 집어넣었다. 기묘한 광경이다. 극지인이 저런 식으로 도넛을 한번에 옮길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니 해볼 이유가 없다는게 맞을 거다. 극지인답지 않게 효율적이지 않은가!?

도영의 경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넛극지인은 덤덤하게 글레이즈드 도넛 여섯 개를 한방에 홀 가운데의 트레이로 옮긴다. 물론 동작이 느릿해서 결국 사람이 한 두개씩 옮기는 것과 비슷한 속도일 것 같긴 하지만...

길다란 손가락에 꿰어진 도넛들은 마치 단두대에 오르는 죄인들 같다. 서로 엮여져서 앞 사람의 머리가 댕강 잘리는 광경을 봐야하는 운명인데 천진하게 반짝반짝 수다를 떨고 있다. 저것들은 프랑스 대혁명 때처럼 떨이로 모두 처단될까? 그리하여 내일은 새로운 도넛들이 반짝거리며 저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가? 어쩌면 저 중 몇 개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다음 날 다른 도넛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표상인양 거들먹대며 진열대에 나란히 앉아 어떤 호구에서 팔릴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솟아나는 바보같은 상상들과는 별개로, 도영은 극지인의 놀라운 재주에 경의를 보낸다. 도넛은 극지인 이전부터 존재했고, 그 구멍은 극지인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하지만 극지인은 자신이 가진 길어지는 손가라과 인과관계가 없는 도넛의 구멍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문득 민태가 이 광경을 봤다면 ‘존나 야한 느낌’이라고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민태는 그런 부분에서도 굉장히 솔직하고 발달된 친구니까. 하지만 도영은 야한 은유보다는 놀라운 발견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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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저게 특기야.”

“예?”

“쟤 손가락이 다른 애들보다 많이 늘어나요. 그래서 저런 거 할 때 유용해요.”

 사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쟨 저거 할라고 태어난 애야. 에이십삼, 그렇지?”

 사장의 물음에 관리코드 A13 도넛극지인이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건 도영의 착각일 확률이 높다.)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도영은 복잡한 기분이 든다. 저런 재주가 놀랍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극지인이 정말로 도넛을 옮기기 위해 태어난 걸까? 이 세상에 단지 도넛을 옮기려고 태어난 존재가 있다면 그건 얼마나 슬픈 일일까? 그건 너무 슬퍼서 마리나 해구 바닥으로 가라앉는 고장 난 잠수함이 된 기분과 비슷할 것 같다.

 

자기 방에 돌아온 도영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이드포켓의 음료수를 쓰레기통에 쳐넣은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분노이자 불필요한 화풀이이며 생애 최초로 새 물건을, 그것도 먹는 걸 버린 행위다. 도영은 짜증이 나서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몇년 후면 서른이 될 남자가 고작 이 따위 일로 눈물을 찔끔거리면 얼마나 볼썽사납겠는가?

샤워를 마친 도영이 노트북으로 예능프로그램을 본다. 평소라면 낄낄거리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었겠지만 오늘은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아 시선만 주고 있다. 그렇게 멍하게 있다보니 자정이 다 되었다.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잠이나 일찍 잘 것을...

불을 끄고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일어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잠도 오지 않는다. 도영은 민태에게 카톡을 한다.

 도영 : 자냐? 안자면 던전 갈까?

민태 : 미친 불면증 백수생퀴, 나 낼 아침 마트주차알바 간다. 자야함.

도영 : 얼- 알바비 받음 오랜만에 오프에서 한 잔?

민태 : 학자금 내면 없을 듯.

 도영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본다. 눈이 말똥말동하다. 도저히 그냥 잠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팔굽혀펴기를 해본다. 백개를 할 건데 서른셋, 서른셋, 서른넷 하는 게 나을까, 서른, 서른, 마흔이 나을까? 하지만 힘이 없다. 서른 개를 하고 나니 지쳐서 바닥에 엎드리게 된다. 기다렸다는 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배가 고프다. 힘들어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그럼 난 뭘 하고 싶은 거지? 무엇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있는 거지? 자위를 할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정규직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본다. 직장인 되면 넥타이를 매고 출근해서 열심히 회사욕을 하며 일을 하다가 월급을 받겠지. 그럼 그 돈으로 극지인들이 서빙하는 갈비집에서 갈비를 구워먹거나, 극지인들이 청소하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실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를 만나 미래를 꿈꾸고 아파트를 사고 자동차를 사고 아이를 낳고 유모차를 사고 처가댁의 선물을 사고, 어머니 아버지 해외여행 보내드리고....

바보같은 눈물이 한 방울 흐른다. 병신-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난 거야? 도영은 소리없이 속으로 화를 낸다. 병신, 병신, 병신... 그에 맞춰 배도 꾸룩꾸룩 소리를 내보낸다. 슬픈 건 슬픈 거고 고픈 건 고픈 거라고 아우성이다. 아직까지 안자니까, 저녁을 대충 먹으니까, 감정을 그냥 묻으니까 이렇게 허기진 거잖아! 병신, 병신, 병신, 병신아!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뒹굴거렸지만, 답은 없고 배는 점점 더 고파온다. 도영이 벌떡 일어나 손바닥만 한 원룸을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서성댄다. 뭔가 해결해야한다. 이 배고픔을 그대로 놔둘 수 없다. 그 때 아침으로 사온 도넛이 눈에 띈다. 도영은 봉지를 찢는다. 보니까 도넛이 네 개다. 아! 사장님이 하나 더 줬구나... 방금 알았다.

도넛을 집어먹으려다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 도영은 오른쪽 검지를 세워서 흐읍-하곤 힘을 줘본다. 당연히 극지인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손가락을 빳빳하고 길게 만든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으니 아마 평소보다 몇 밀리미터는 늘어났을 거다.

도영은 눈을 부릅뜨고 집게손가락을 도넛사이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올린다. 두 개까지는 안정적으로 걸려있다. 그리고 세 개, 끄트머리에 아슬하게 걸린 네 개째 도넛도 공중으로 떠오르나 싶은데... 세 번째와 네 번재 도넛은 여지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추락하는 녀석들을 신경쓰느라 걸려있던 두 개의 도넛도 떨어트리고 만다.

도영은 실패했다.

 

“병신, 이것도 못 하냐?”

 

도영은 드디어 자기 입으로 소리내어 핀잔을 준다. 가슴을 짓누르던 심각한 ‘병신’은 사라지고 겨우 도넛 갖고 장난치는 가벼운 ‘병신’만 남는다. 픽-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도영은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흘린 도넛을 주워먹기 시작한다. 우걱우걱, 우적우적. 마치 도넛이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표류하던 로빈슨 크루소가 음식을 맛볼 때처럼 게걸스럽게 도넛을 탐했다. 그렇게 도넛 세 개를 입에 처넣었더니 턱- 목이 메여왔다. 퍽퍽해서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우우읍! 답답해 미칠 것 같다. 바로 그 때 쭈그려 앉은 도영의 눈높이에 음료수가 있다. 쓰레기통에 얌전히 꽂혀있는, 아직 따지도 않은 새 음료수.... 도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음료수를 집어서 벌컥벌컥 마신다. 한번에 500밀리리터를 다 마셨다. 도넛은 시원하게 내려가고, 허기는 빗물에 씻긴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영은 가만히 서서 손에 든 음료수병을 본다. 동시에 방금 사라져버린 도넛을 떠올린다. 땅바닥을 구른 도넛은 없어졌고, 밀가루와 설탕의 기운이 혈관에 퍼지면서 우주적인 기운이 솟아남을 느낀다. 기분이 좋아진다. 입안에서 음료수가 남긴 추상적인 딸기향이 감돈다. 극지인은 이 맛이 싫었던걸까?

뭐에 홀린 듯 도영은 밖으로 뛰쳐나간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던 방안은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인다. 헝클어진 침대와 바닥에 흩뿌려진 도넛 부스러기만이 뭔가 벌어졌다는 것을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띠띠띠- 소리가 나며 디지털 도어락이 열린다. 도영이 다시 들어온 거다. 아무리 급해도 잠옷바람에 빈 음료수병만 달랑 들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옷을 벗어던지고 추리닝과 져지를 걸치고 지갑과 휴대폰을 챙긴다. 새벽 5시. 아직 편의점은 열려있을 거다. 가만... 편의점은 24이잖아!

도영, 편의점을 향해 달려간다. 머잖아 해가 떠오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시간이다.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카운터를 살핀다. 그 곳에 서 있는 것은 편의점 조끼를 입은 극지인이다. 당연하다. 웬만한 심야알바는 극지인인다. 편의점(알바)극지인은 얼굴에 나비모양의 패턴이 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도영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도영도 같이 인사를 한다.

“저... 여기 저녁시간에 일하는 여자분, 안계세요? 유나씨라고...”

“아, 그 분은 어제 저녁에 그만뒀습니다.”

“그건 저도 아는데, 혹시 아직 여기 안계세요? 누구를 기다린다던지...”

편의점극지인이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시계를 가리킨다. 4시 45분이다.

“오늘 자정까지 하고 갔습니다.”

도영의 온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진다. 실망하는 표정을 숨길 수 없다. 면접에서 떨어진 수 많은 회사들의 통보에도 이렇게까지 안타깝진 않았다. 하-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연락처 같은 거 안남겼어요? 전화번호나 이메일이나.”

“네.”

할 수 있는 게 없다. 음료수를 너무 늦게 땄다. 용기를 냈어야하는데.. 그녀가 한 발짝 다가왔을 때 다가가는 대신 뒷걸음질을 택했다. 도영이 몸을 돌린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다.

그런 도영의 뒷모습을 편의점극지인이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머릿속에 도영의 이미지를 던져넣는다. 그의 실망이 궁금해서 조금 알아볼 마음이 생겼을 뿐이다. 순식간에 도영과 관련된 모든 이미지들이 편의점극지인의 눈 앞에 나타난다.

극지인들은 거대한 ‘기억의 강’을 공유하고 있다. 그 곳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강의 표층에는 모든 극지인의 개별적 경험이 이미지형태로 흐로고 있다. 극지인들은 그 곳에서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정보와 정서를 얻을 수 있다. 중층에서는 좀 더 고차원적이며 공동체적인 사고의 흐름이 표층보다 느리게 흐르고, 강의 바닥은 거대한 집단무의식이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다.

물론 인간들에게는 기억의 강에 대해 철저히 감추고 있다. 기억의 강 상류 지역에 단절된 부분 때문이다. 극지인들은 그 곳을 ‘고대의 가뭄’이라고 부른다. 고대의 가뭄 너머에 극지인들의 기원,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존재할 테지만 어떠한 사건으로 가뭄이 발생해 기억의 강이 끊어져 버렸다. 극지인들의 집단무의식은 그 가뭄이 외부의 침입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암묵적으로 기억의 강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는 것이다.

편의점극지인은 기억의 강에서 건져낸 도영의 이미지들을 확인한다. 그 중 가장 관련성이 높은 이미지는 편의점에서 도영과 유나가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다. 이미지는 영상으로 바뀌고 영상에는 떫은 음료수의 맛이 배어있다. 아아- 기억의 강을 살피던 편의점극지인이 예쁘게 생긴 새 음료수는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영상에서 유나가 도영에게 말한다.

“오늘 오시면 내일은 안 오시잖아요... 그래서.. 모레, 왔는데 제가 없으면 당황하실까봐...”

또 다른 이미지가 보인다. 도영은 도넛가게에서 일하는 극지인과 90도로 같이 인사를 하고 있다. 비슷한 이미지가 또 떠오른다. 도영이 떫은 음료수를 식당에서 일하는 고기극지인에게 건넨다. 고기극지인은 기억의 강에서 편의점 탑차 극지인이 마셨던 음료수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확인한 후 도영의 음료수를 거절한다. 뻘쭘해하며 돌아서는 도영이 쓰레기를 다 주워가는 이미지가 꽤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드문 반응이라서다.

다른 이미지들도 꽤 있다. 어학원에서 헤드폰사용을 돕는 모습이라거나, 특강촬영 알바를 하는 극지인의 촬영장비를 들어준다거나....

기억의 강에서 도영의 예전 모습을 확인한 편의점극지인이 그를 돕기로 결정한다. 그가 베푼 호의라면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2-3초만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도영은 아직 편의점 안에 있다.

“잠시만요.”

편의점극지인의 부름에 도영이 몸을 돌린다. 편의점극지인이 유나의 이미지를 기억의 강 표면에서 찾아본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모습을 조건으로. 그가 유나를 떠올리자 발목을 스쳐가던 무작위의 이미지들이 순식간에 유나와 관련된 것들로 바뀐다. 마치 범인 몽타주를 들고 현장을 누비는 형사처럼, 편의점극지인이 기억의 강을 통해 다른 극지인들과 연결되면서 여기저기에서 이미지로 된 증언들이 쏟아진다.

새벽 2시경 편의점 앞 파라솔테이블에서 앉아있다가 실망한 얼굴로 떠나는 유나의 모습을 야간택배극지인이 봤다. 또 다른 극지인의 이미지가 날아온다. 큰 길 사거리의 24시간 카페에 온 모습을 바리스타극지인이 제보했다. 그리고 아직도, 아직도 유나는 그 카페 구석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사거리 이십사 시간 커피숍에 있어요.”

“예?”

“거기 들어가는 걸 봤어요. 아까.”

도영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다시 희망이 생겼다!

“고맙습니다!”

도영의 편의점극지인을 와락 껴안아 고마움을 표시하곤 편의점을 박차고 나간다. 극지인 특유의 반박자 느린 반응 덕에 편의점극지인이 뒤늦게 허둥댄다. 사람과 포옹이라니! 완전 당황스럽다. 혼자 팔을 휘적거리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고장난 극지인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유나가 책을 덮고 커피숍에서 일어선다. 첫 버스가 올 시간이다. 내일부턴 밤낮이 뒤바뀐 생활패턴을 바꿔야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야심한 밤에 깨어있는 건 꽤 달콤하다. 지금쯤 도영씨는 쿨쿨 자고 있을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바른 생활 청년이니 아마 그럴지도... 생각해보면 나만 미친년이지 싶다. 왜 그만둔다는 소릴 해가지고... 유나는 무의미하나 멈춰지지 않는 생각들을 되새김질하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는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1분 후 버스가 온다. 과연 저 멀리 사거리에 버스가 신호대기중이다. 이제 저 버스를 타면 이 동네에 올 일이 없다. 알바하는 걸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아 부러 아무 연고없는 이 동네로 온 거다. 안녕! 내 전 연애사의 빚을 청산해 준 동네여~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한다. 버스기사가 문을 열었는데 유나가 난감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다. 기다리던 기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안타요?”

“... 죄송합니다.”

유나는 얼굴을 붉히며 목례한다. 기사가 ‘별 이상한...’이란 표정으로 문을 닫고 출발한다. 버스가 떠나자 그 전까지 버스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유나의 왼쪽 손을 잡고 있는 도영의 모습이 보인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헉헉-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헉-헉- 늦어서 정말... 미안해요.”

“방금 버스 떠났는데...”

“... 안탔잖아요.”

“도영씨는 안 늦을 줄 알았어요. 맨날 똑같은 요일, 똑같은 시간에 오길래.”

“내 이름을 어떻게? 아!”

둘이 동시에 말한다. “멤버쉽!”

유나가 미소 짓는다. 도영이 좋아하는 바로 그 미소다.

“불공평해요. 나는 유나씨 이름 모르는데.”

“.... 방금..?”

도영, 자기가 말해놓고 헙-한다. 이런 멍충이 같으니라고!

“지난 번에 편의점에서 유나씨 하고 부르는 거 들었어요.”

“근데 왜 모른 척해요?”

“... 주시하고 있던 거 티나면.. 쪽팔리니까..”

머쓱해진 도영이 웃는다. 그런 도영을 보며 유나가 생글생글 말한다.

“근데 손 계속 잡고 있을 거예요? 너무 빠른데...”

도영이 놀라서 잡고 있던 유나의 손목을 놓는다.

“은근히 손버릇이 안좋은 거 같애.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하하, 죄송해요. 저기... 출출한데 아침 안먹을래요? 요 앞에 맥도날드 있는데.”

유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둘은 맥도날드를 향해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어느 덧 해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평범하지만 완벽한 아침이다.

 

이 둘의 모습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청소부극지인이 기억의 강에 이미지를 공유한다. 이미지들은 순식간에 편의점극지인, 편의점탑차극지인, 고기극지인, 바리스타극지인에게 전달된다. 여러 모로 흐뭇한 순간이다. 인간들의 생애에 저런 빛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얼마 없다. 그것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이런 감상은 극지인 개별의 것이 아니다. 기억의 강 중층이 온화하게 짓는 미소같은 감정이다. 이 감정은 표층으로 올라가 이 사건에 연관된 극지인에게 전달되어 그 온기를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청소부극지인은 온기대신 자신의 판단으로 환하게 웃으며 흐뭇해한다. 사람들이 통상적인 극지인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꽤 인간적인 미소다. 그 때 어디선가 날아온 발길질이 청소부극지인의 복부를 강타한다.

“어디서 외계인새끼가 기분-나쁘게 실실 쪼깨!”

술에 취한 40대 남자가 청소부극지인을 때린 것이다. 맞은 청소부극지인은 족히 2-3미터는 될 정도로 뒤로 밀려 쓰러진다. 취한 남자가 쓰러진 청소부극지인를 발로 계속 찬다.

넘어진 청소부극지인의 얼굴에 분노가 떠오른다. 그는 일부 ‘이탈자’다. 어린 시절 일정기간-1년 가량-을 채우지 못하고 모개체와 분리되면 기억의 강에 발을 담그는 게 어려워진다. 그의 경우에는 표층쪽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 그래서 기억의 강 중층너머에 있는 공동체사고와 집단무의식이 주는 위로와 격려, 가르침을 받는 게 어렵다. 대신 그들은 개별적인 성격과 지능을 발달시키게 되는데 이것을 ‘개성화’라고 부른다. 이런 개성화때문에 이탈자들은 다른 극지인들보다 쉽게 분노와 박탈감을 느낀다. 청소부극지인도 마찬가지다.

화가 난 청소부극지인의 손가락이 날카롭게 길어진다. 그 때 기억의 강 표층으로 연결되어있던 모든 극지인이 동시적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음성으로 된 메시지, 다양한 언어지만 모두 같은 내용으로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다. 청소부극지인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메시지는 계속 반복된다. 얼핏 노래처럼 들리기도 한다.

 

‘신이 주신 평화- 신이 주신 평화- 신이 주신 평화- 신이 주신 평화-’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청소부극지인을 발로 몇 번 더 차고 밟더니 캬악- 퉤 침을 뱉는다. 다행히 살의는 없었는지 청소부극지인이 가만히 있자 몸을 돌려 그냥 간다. 그가 멀어지자 청소부극지인의 손가락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기억의 강에서 들려오던 진정하라는 메시지도 잦아든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떤 손이 부드럽게 그를 부축한다. 근처를 지나던 중년여성이 청소부극지인을 돕는 것이다. 중년여성은 티슈를 꺼내 청소부극지인의 몸에 묻은 먼지와 침을 닦아준다. 아무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가버린다. 청소부극지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청소부극지인을 가운데 두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가는 도영과 유나, 술 취한 남자, 중년여성의 모습은 마치 극지인을 대하는 인류의 세 가지 태도를 대변하는 것 같다. 친절하지만 무관심한 사람들, 경멸하고 학대하는 사람들, 존중하며 사람처럼 대하는 사람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극지인에 대한 무지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무엇인지 모르니 무엇으로 대할 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우리는 극지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더 이상 극지인이 없는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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