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리멤버 미

2019.07.23 17:4207.23

눈을 떴다. 망막 위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수없이 많은 환한 빛줄기가 나타나서 눈을 찔러댔다. 잠시 강한 광량에 적응하느라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이어서 거대한 홀로그래픽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은수는 그곳에 빼곡히 그래픽으로 표현되는 데이터 덩어리들을 인식했다. 이해했다. 잠들어있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니터에 떠오른 이미지들은 은수가 단독으로 이끄는 연합군 독립 함대의 현재 상태창이었다. 구축함 서른 척, 순양함 열두 척, 전함 일곱 척, 그외에 보급과 정찰, 함대 보호를 위한 배 수십 척이 그 구성원이었다.

 

이 독립 함대는 연합군 우주군 사령부로부터 비밀 코드를 부여받고 단독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 임무를 위해서 연합군 함대 사령부는 있는 자원, 없는 자원을 모두 끌어모아서 은수의 함대를 편성했다.

 

예를 들면 은수가 타고 있는 전함, 네버리스 원(neverless one)은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크기도 작았고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열두 발의 핵미사일 발사대와 낡은 방어 장갑, 여덟 정의 광선포로 무장했다. 최대한 개량했지만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서류상 폐기되지는 않았을 뿐이지, 보관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물건을 꺼내온 것이다. 그 정도로 전쟁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새 전함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줄을 지어 서 있는데 조병창에서 만들어내는 전함의 숫자는 적었다.

 

어쨌거나 함대의 비밀 코드는 함대에서 은수만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프로그램이 발동하여 은수의 머리 속에 박혀있는 저장 매체에서 비밀 코드를 꺼내어 알려줄 것이었다.

 

보좌관 AI가 은수에게 접촉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령관. 좋은 아침입니다.]

 

우주 시간으로 아침이란 의미가 없었지만 보좌관은 은수가 잠에서 깨어나면 의례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은수도 그렇게 말하는게 마음에 들었다.

 

[아침 음료로 커피가 어떠십니까?]

 

“좋아.”

 

은수가 대답했다.

 

기계팔 여러 개가 움직여서 커피 포트에서 머그잔에 커피를 따랐다. 잠시 후에 은수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나는 커피 한 잔이 배달되었다. 은수는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커피 콩은 귀한 것이었지만 군인에게 우선 배급 될 만큼은 존재했다. 사치와 향락을 누릴 시간이었다. 독립 함대에 살아있는 인간은 은수 혼자 뿐이었다.

 

은수는 보좌관 AI에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함대는 조금도 손상된 것 없이 항해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대형 운석층이 진로를 빗겨 갔다. 수도 없이 많은 암석 조각들이 우주를 떠다니고 있었다. 함대 센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판별할 능력이 있었다. 바깥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노래를 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적 함대에게 습격당하거나 공격받지 않는 중이라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세상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은수는 그 평화를 만끽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함대가 목적지에 근접했다.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을 때, 모니터 한 구석에서 빨간 불이 점멸했다. 그 순간 은수는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시각 정보에만 모든 것을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된지도 오래 되었다. 사실상 신체는 낡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사물의 기계적 디자인은 여전히 시각 정보를 강조했다.

 

보좌관 AI가 말했다.

 

[알레프-17입니다.]

 

은수도 알았다.

 

“드디어.”

 

항해가 끝났다. 하지만 모든 목표를 달성한 것은 아니었다. 우주의 망망대해 저멀리에 작은 행성 하나가 있었다. 수십, 수백만 킬로미터 밖이었다. 하지만 함대 센서는 그 행성이 인류가 거주 가능한 행성이며 알레프-17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또한 최종 목적지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령부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중간 목적지에 도착했고 비밀 코드를 열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 코드를 개방하겠다.”

 

[비밀 코드 개방.]

 

머리 속에서 보안 프로그램이 작동했다. 좌표를 측정하고 체내 시간과 우주 시간을 동일시했다. 눈꺼풀이 닫힌 듯이 눈 앞에 어둠이 들어찼다. 잠시 수면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잠드는 것이 아니었고 연합군의 보안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망막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보안 프로그램의 작동은 은수의 뇌와 연결되어 함대 전체를 총괄하는 중앙 처리 장치에 잠깐이나마 부하를 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함대의 전진 속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함대는 계속 항로를 따라 전진했다. 은수는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아무 의미 없는 동작이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뇌의 이식물이 일으키는 부작용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두통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없었다.

 

이식물에서 뇌 속으로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알레프-17은 반란군이 점거한 항성계로 최신식 무기와 함대, 행성 방어 체계로 무장한 상태였다. 행성 성층권에는 우주정거장과 방어 시설이, 행성 지표면에는 대함 무기가 자리잡았고 그 외에 방어용 인공 위성이 띠처럼 행성 성층권 주변을 둘렀다. 작전 목표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부수는 것이었다.

 

그곳을 독립 함대로 공략하는 것이 은수가 맡은 임무였다. 은수는 미쳤군, 이라고 생각했다. 사령부에서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겨우 독립 함대 한 개에 맡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명확했다. 그것을 따라야 한다. 은수는 손가락을 튕겨서 함대에 전투 명령을 내렸다.

 

명령은 내려졌다. 함대는 전투 태세를 갖췄다. 잠들어있던 수십 개의 주포와 부포가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미사일 발사관에 강철과 불로 주조한 미사일이 장전되었다. 에너지 충전 장치가 가동하며 그물형의 방패로 전투함을 둘러쌌다. 그러나 그조차도 함대의 중앙 처리 장치에 조금도 과부하를 주지 못했다.

 

은수는 모니터에 집중했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는 함대의 배치 상황을 점검하고 재배치했다. 모든 것이 생각하는대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함선들이 타원형으로 포진을 만들었다. 광속으로 달리는 함선과 행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좌관 AI가 모니터에 카메라로 행성을 비췄다. 작은 방어구조물들이 돌출된 형태로 행성 대기권 주변을 떠다니는게 보였다.

 

은수는 작전 성공 가능성을 계산했다. 시뮬레이션은 함대 절반 이상이 파괴될 거라고 예측했다. 그 다음 계산에선 1/4로 줄었고 그 다음에는 그보다 더 낮은 성공률이 나왔다. 어쩌면 은수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계산도 나왔다. 은수가 죽으면 함대는 기능을 정지할 것이다. 작전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7억 7800만km...

 

5억 4600만km...

 

2억 6000만km…

 

1억 km…

 

알레프-17과 독립 함대와의 거리를 1억 2000만 킬로미터까지 줄였을 때였다. 홀로그래픽 모니터에 통신 신호가 잡혔다. 누군가 은수의 독립 함대와 통신을 하고 싶어했다. 이 먼 행성계에서 연합군 사령부의 암호를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이곳에서 연합군에 소속된 사람은 은수 한 사람 뿐이었다.

 

상대는 간절하게 통신을 하고 싶어하는 듯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왔다. 은수는 결코 신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은수는 명령어를 외웠다.

 

“신호 전송.”

 

잠시 신호 대기 신호가 나타났다.

 

모니터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은수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남자는 은수를 보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레프-17 행성 주둔군 사령관 아크다. 귀관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통신을 요청했다.]

 

“나는 연합군 독립 함대의 은수 사령관입니다. 당신이 아크로군요.”

 

의례적으로 상투적인 대화가 오갔다. 은수는 아크를 쳐다보았다. 아크는 연합군에도 이름이 알려진 소수의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반란군은 비조직적인 활동 탓에 그 구성원들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크의 지휘는 몇몇 작전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몇 번인가 연합군 함대를 격파했다. 내부 분열과 화력의 부족 때문에 그로서도 반란군이 알레프-17까지 밀려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모니터 너머로도 아크가 경멸적인 태도로 이식물이 달린 이마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극단적인 신체 개조 반대주의자인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반란군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에 속했다.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반란군에 들어가질 않았다.

 

하지만 아크가 진짜 당황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로서는 눈 앞의 적군 지휘관의 연령이 너무 어려보였기 때문이다. 은수는 고작해야 나이가 많아봐야 10살에서 12살 정도로 보였다. 실제 신체 나이는 그보다도 낮았다. 은수는 성장 촉진 약물에 의해 자랐다. 하지만 아크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적이 어린 아이인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아마 그 자신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양심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누르는 누름돌의 문제를 신경쓰는 사람도 있었다. 아크는 보기 드물게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래픽인가? 그걸로 나를 농락하는 건가?]

 

“아닙니다. 화면에 나와있는 모습은 제 모습 그대로입니다. 나는 현장을 송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리전을 위해서 일부러 신체 나이를 위장한 건가? 외모를 어려보이게 만든 건가?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들었다. 귀하의 나이는 대체 몇이란 말인가?]

 

아크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은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내 나이는 보이는 것보다 더욱 어립니다.”

 

[뭐라고? 그럼 귀하는 대체 몇 살이라는 건가?]

 

“내 나이는 최소한 당신이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어릴 겁니다.”

 

[여섯, 일곱?]

 

“더 어립니다.”

 

[완전히 어린애가 아닌가!]

 

“어린애입니다.”

 

아크가 분노를 터뜨렸다.

 

[대체 연합군은 어디까지 타락한 건가? 어린애를 전장에 내보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한 건가?]

 

“상황이 급한건 당신들 쪽이겠지요. 아크 반란군 지휘관 귀하. 하지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개념적 어린애가 아닙니다. 우리 종족이 동년배에 머리에 저장하고 있는 지식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응용할 능력도 있습니다. 또한 전략과 전투 지휘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걸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런 것 같군. 그렇다면 귀하의 함대에 인간은 귀하 하나 뿐이겠군.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어린애들하고 전쟁을 하게 될 줄 몰랐어.]

 

“당황스럽습니까?”

 

[당황스러워.]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크는 서둘러 당혹감을 털어내보였다. 그러나 표정에서 완전히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에겐 어린애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은수는 커피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는, 보좌관 AI에게 커피를 한 잔 더 타달라고 부탁했다. 커피가 뇌에 미치는 영향은 지난 세기에 이미 진작에 낱낱이 해부되었지만, 은수의 개인적 집착과 취향은 카페인을 요구했다.

 

보좌관 AI가 작업에 돌입했다. 커피메이커는 아니었지만 기계답게 사람이 타는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한 솜씨로 정확한 타이밍에 완벽한 커피를 만들 수 있었다.

 

커피 내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싸우기 전에 우선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를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내가 귀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고 행동해도 되겠나?]

 

“당신들의 수법은 알고 있습니다.”

 

은수는 입꼬리를 올려 비웃음을 지었다.

 

“당신들이 우리 함대 몇 개를 말로 ‘설득’시켜서 배신하게 만든 사실은 이미 사령부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이간질시키고 분열시켜서 이득을 얻어내려고 하지요. 통찰력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행동이에요. 하는 짓이 마치 바이러스 같지요. 하지만 상관 없습니다. 대화하겠습니다.”

 

[그거 고맙군.]

 

아크가 헛기침했다.

 

은수는 보좌관 AI가 건넨 커피를 받아들었다.

 

[우선 묻겠는데, 너희는 정말로 인간인가?]

 

은수는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입니다. 그런데 왜 복수형이죠? 나는 단수입니다.”

 

[너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야. 너와 비슷한 존재들에 대해서 말하는 거다.]

 

“인류는 모두 형제지요.”

 

[그거 참 휴머니즘적이군. NGO들이 감탄하겠어.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네. 어린 아이야. 아니면, 너희는 이제 정말로 우리와 다른 새로운 진화를 이룩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크의 얼굴에 우려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또한 그것을 막아야만 한다는 강력하고 완고한 의지가 엿보였다. 은수는 그의 성향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퇴물이 되어버린 옛 세대였다.

 

그들 세대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서 믿음을 잃은 세대였다. 전체적으로 회의주의와 비관주의에 물들었으며 어떤 순수성에 집착했다. 그것은 그들의 세대적인 경험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 세대는 끔찍한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낫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인 사람은 아예 기술 발전에 반대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전쟁 세대와 그 사이를 잇는 중간 세대는 비관적인 사상에 지배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많이 흘렀고 더 나아지고 있었다. 전쟁으로 잃은 것을 복구했고 매일 새로운 것이 만들어졌으며 모든게 앞 시대를 앞지르고 있었다.

 

은수는 부정했다.

 

“아닙니다.”

 

아크는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은수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는 아직 완벽한 진화를 이룰만큼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을 초월하지는 못했습니다. 더 나은 것을 찾고 있지만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간 더 나은 개선안을 찾을 수 있겠지요.”

 

아크가 이를 갈아댔다. 분노로 치가 떨린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이길 포기한 악마 같은 놈들. 여기서 대체 무슨 짓을 더 하겠다는 거야?]

 

“인간이길 포기했냐고요? 아니오. 우리는 인간입니다.”

 

[무엇이 인간인데? 너희가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너희 머리에 달린 이식물을 봐. 회로를 통해서 전함 전체의 중앙 처리 장치와 연결되어 있겠지. 사람 하나가 함대 하나를 통솔하지.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야. 그게 평범하다고 생각해? 그게 인간인가? 아니지. 너희는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거야. 이젠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종족일 뿐이야.]

 

은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입니다. 대체 뭐가 불만입니까? 더 나아지려고 하는 것이 나쁩니까? 동물도 항상 자신에게 더 나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그러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너희가 그렇게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모르겠어. 기술사적으로 과학 기술은 결코 만능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

 

“고전적인 도구의 쓰임새에 대한 논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살인자의 손에 들린 칼과 의사의 손에 들린 칼은 사용법이 다른 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누군가 기술을 악용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 있지? 인간의 정신은 나약해. 쉽게 굴복하지.]

 

“인간의 육신도 나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희생을 딛고 그 대처법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질병에 시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 장애? 약 한 알이면 될 겁니다. 유전병? 아무도 그런 것 때문에 고통받지 않을 겁니다.”

 

[지나치게 낙관적이야.]

 

“그래도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진 못하지요?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믿습니까?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과학과 기술을 진보시켰단 말입니까?”

 

[어린 아이야, 인류를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옳은 일을 하려는 거군요. 그렇다면 주저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크는 분노를 참으려는 듯이 잠시 참았다가 말했다.

 

[너희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지. 우리는 너희에게 수 차례 경험을 전수하고자 노력했지만 너희 세대는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무시했지.]

 

“경험이 우리를 갈라놓았습니다.”

 

은수는 비관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사실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크에 대한 명확한 기만 행위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아크는 비분강개했다. 모니터 너머로도 당장이라도 그 악당에게 마이크로웨이브 광선을 날려보내서 바싹 구워버리고 싶다는 감정이 전해져왔다.

 

[함대 몇 개를 잃은 뒤로 연합군 사령부가 결국 강하게 세뇌된 인간을 만들어낸 것 같군. 좋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싸움 뿐이야.]

 

“그렇게 할 겁니다.”

 

바로 그 순간 광선이 전함 한 대의 측면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물형 방어막이 공격을 막아냈지만 연달아서 공격이 계속 되었다. 광선과 미사일이 함대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독립 함대는 정면에서부터 공격 받기 시작했다. 은수는 상황을 이해했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나팔 소리도 없이.

 

핵미사일들이 수도 없이 날아와서 전함을 타격했다. 전함에 닿은 미사일은 종이장처럼 끝에서 끝까지 우그러졌다. 그리고는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핵폭풍이 전함을 손상시켰다. 불타는 강철 조각과 파편들이 긴 꼬리를 그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붉은 화염은 더 이상 연소시킬 물체가 없을 때까지 넘실거렸다.

 

은수가 이끄는 독립 함대도 반격하기 시작했다. 주포에서 광선과 미사일을 연속으로 발사했다. 함대와 행성 사이는 곧 어마어마한 빛줄기로 가득 찼다. 일격이 오갈 때마다 행성에서 방어구조물 하나, 이쪽에서는 함선 하나가 불타며 중력에 붙잡혀 끌려갔다.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은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고 애썼고 함선들을 통솔해서 앞으로 전진시켰다. 전함의 무기들을 모두 사용하려면 충분한 사거리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물형 방어막들이 불타서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면 전함 표면에 광선이나 미사일이 직격했다. 강철판이 우그러지며 선내에서 공기가 빨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은수는 모든 것을 느꼈다.

 

30분 후에 전함과 행성은 100만 킬로미터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은수의 독립 함대는 수십 척을 잃었다. 그러나 행성 방어망도 상당히 붕괴되어 있었다.

 

전함이 파괴될 때마다 은수는 살이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함선 하나가 격추되면 통제 장치에서 경보가 울렸고 머리 속으로 새로 갱신된 정보가 전달되었다. 은수는 함대의 위치를 재배치했다. 하지만 뇌의 반응 속도로도 함대가 파괴되는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함대는 빠른 속도로 삭제당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은수도 알레프-17의 방어물에 같은 행위를 가하는 중이었다.

 

전함 한 척이 전력 가동 장치를 직격당했다. 전함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추진력을 잃은 전함은 곧바로 행성 지표 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만약 예전처럼, 구시대의 일처럼 함선 하나에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태워야 했다면 물적 손실 뿐만 아니라 인적 손실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그것을 만회하고 능가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육중한 전함을 하나 띄우는데 수만 명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다. 무기를 장전하는 것도, 발사하는 것도, 공격에 맞춰 방어막을 작동시키는 것도 전부 보좌관 AI가 처리해준다.

 

심지어는 기대 이상의 일도 해낼 수 있었다. 독립 함대에 소속된 모든 전함들은 은수 하나만의 지휘를 받았다. 은수의 머리에 가득 탑재한 이식물들과 연결된 중앙 처리 장치만 있으면 전함들이 명령을 받도록 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는데 전력 공급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전력 공급 회로만 무사하다면 한 명이 전함을 무한히 통제할 수 있었다.

 

아크는 한동안의 파괴 행위에 질린 듯 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아크가 말했다. 붉어진 이마가 격한 분노를 쏟아내려는 것을 참는 듯 했다. 은수가 웃었다.

 

“맞아요. 우리는 미친 짓을 하고 있죠.”

 

고도로 발전한 지성체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선두에 전함들이 불타며 떨어졌다. 머지않아서 공격은 은수가 타고 있는 기함에게마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수는 함선에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모든 센서와 레이더와 카메라가 은수의 눈처럼 작동하는 중이었다. 몇몇 부위가 파손되었지만 그뿐이었다. 은수는 99개의 눈을 가진 거인이었다.

 

은수는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옳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심리적 안정을 위한 행동이었다. 전투를 시작하고 나서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아 잔꼭대기까지 검은 액체가 거의 차있었다.

 

전투가 중반에 이르면서 반란군이 형성하는 탄막도 상당히 얇아진 상태였다. 상당수의 방어 구조물이 부서져서 행성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중심부의 방어는 강력했다. 지상에서 성층권까지 연결하는 궤도 엘리베이터 탓이었다. 이 구조물 덕분에 반란군은 알레프-17에서 화물과 물자를 빠른 속도로 보강할 수 있었고, 바로 그 탓에 가장 방어구조물을 집중해놓았던 것이다.

 

연합군 사령부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파괴하는 것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고 작전을 설계했다. 궤도 엘리베이터를 파괴한다면 반란군은 알레프-17에 고립될 테고, 오도가도 못하게 될테니 결국 연합군에 항복하게 될 거라는 결말이었다.

 

사령부는 그 결말을 원했다.

 

독립 함대는 이곳의 방어를 뚫기 위해 포문을 집중시켰다.

 

은수는 네버리스 원을 전진시켰다. 전함의 거대한 선체가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초속 수만km의 속도로 전진하면서 전함은 계속해서 미사일과 광선을 발사했다. 그외에도 수십 개의 대공포가 탄막을 형성하며 전함을 향해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했다.

 

기함이 최종 전선의 전투에 가담하자 함대의 화력이 증강되었다. 방어구조물들이 날파리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전선에서 적함 하나가 네버리스 원을 노리고 다가왔다. 집중된 광선이 네버리스 원을 향해 쏟아졌다. 그러나 광선은 채 장갑을 뚫지도 못하고 그물형 방어막에 막혀서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네버리스 원이 반격했다. 은수는 생각만으로 지시를 내렸고, 주포 하나가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적함을 겨냥했다. 적함은 반격을 회피하기 위해 고개를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회피 기동조차 포화 앞에 무력했다.

 

몇 초의 충전 후에 광선이 발사됐다. 광선은 적함의 중간을 관통했다. 얇은 장갑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부서진 옆구리에서 산소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은수의 귓가에도 들려오는 듯 했다.

 

잠시 후에 적함의 탄약고가 유폭하며 함선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불길은 우주로 흩어졌다. 적함은 방향을 잃고 우주를 둥둥 떠다니는 고철 쓰레기가 되었다.

 

은수는 그 안에 타고 있었을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죽었다는 사실에 몹시 유감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죽음에 위안을 느꼈다.

 

네버리스 원은 계속 전진했고 선두에 나섰다. 보좌관 AI의 빠른 사고는 은수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전진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실제로 기함이 선두에 선다는 것은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기함 네버리스 원이 파괴된다면, 다른 함선들 모두 일제히 작동을 중단할 테고 작전 수행에 차질이 빚어질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은수는 다른 함선의 피해를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작전 시뮬레이션 결과 기함이 선두에 나서지 않을 경우 나머지 잔존 함대가 더 빠른 속도로 전멸할 우려가 있었다. 대신에 기함이 선두에 나섬으로서, 네버리스 원이 집중 포화를 얻어맞는 대신 함대의 다른 소속원들이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은 또한 함대의 생존과 작전 지속 시간이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보통이라면 그 사실에 긴장하며 진땀을 흘리게 될 테지만 다수의 신체 개조를 거친 은수는 그 모습을 평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인류의 특정 인구는 더 이상 죽음과 삶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로 초월적인 모습을 갖춰갔다. 은수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더 이상 정신은 육신에 얽매이지 않으며, 영혼은 궁극의 해탈 상태에 이르렀다. 피로와 불안, 우울과 긴장을 유발하는 물질들은 신체에서 만들어지는 즉시 나노 로봇에 의해 소각된다. 이제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도 관조하며 대처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를 불멸의 영혼을 획득한 것이라고 불렀다.

 

네버리스 원에 탑재된 은수(Model number:隱修 05)는 그런 심리 모델의 초기형으로서 훌륭히 작동하고 있었다.

 

갑자기 네버리스 원의 선체가 흔들렸다. 적함으로부터 포격당했다. 은수는 곧바로 선체에서 그물형 방어막이 더 이상 가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충전된 에너지가 전부 전투에서 사용되어 소진되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선체를 둘러싼 리벳 공접된 얇은 강철 장갑판 뿐이었다.

 

다시 한번 광선과 미사일이 날아와서 네버리스 원을 타격했다.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은수의 전술 모니터에 함선의 어느 부위가 파손됐는지 개략도가 떠올랐다.

 

선체 선두 부분이 타격을 받고 파손되었다. 보좌관 AI가 수리 로봇을 보내어 수리하려고 했으나 곧 통로 자체가 불길에 휩싸여 통제 불가능하게 변했다.

 

함내 소화장치가 작동해서 불길을 껐다. 간신히 수리 로봇이 사고 현장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경고. 함수 파손. 화력이 감소함.]

 

그렇다. 광선은 대각선 모양으로 함수를 관통했고 미사일 발사관 두 개를 못 쓰게 만들었다. 이제 네버리스 원이 쏟아낼 수 있는 최대 화력은 70프로 정도로 감소했다.

 

만일 구시대처럼 네버리스 원에 승무원들을 수천 명씩 태워야 했다면 이미 지금까지 겪은 포화만으로도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함선에 탑승해야만 하는 승무원의 숫자를 줄였을 뿐 아니라 무의미하게 발생하는 사상자의 숫자마저 획기적으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사망하는 것은 은수 혼자 뿐이었다. 예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네버리스 원이 궤도 엘리베이터로 접근하는 것을 눈치챈 아크의 반란군 함대가 점점 포화를 좁혀갔다.

 

집중 사격이 네버리스 원을 향해 쏟아졌다. 한 번은 대형 미사일 열두 발이 동시에 네버리스 원에 직격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버리스 원은 계속해서 궤도 엘리베이터를 향해 전진했다. 그리고 함수에서 속사로 미사일을 계속해서 발사했다.

 

실질적으로 미사일 탄창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미사일과 디코이는 무겁고 많이 탑재가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우주전이 오래 가지 않아서 끝나는 이유이다. 이것은 전투가 후반에 이르렀다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네버리스 원이 포화망을 돌파하자 아크의 반란군은 초조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함대 전체의 움직임이 불규칙해지고 공세가 약해졌다.

 

균열의 조짐이 나타났다는 것은 파고들 것이 많아졌다는 의미와 동일했다. 네버리스 원은 적함의 무리에 근접하면서 중력 어뢰를 발사해서 동시에 두 척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잠시 번쩍이는 섬광 이후에 함선 두 척이 산산조각나서 분해됐다.

 

은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크에게 항복 권유를 하려고 모니터를 조작했다.

 

그때였다. 센서가 네버리스 원 상공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는 우주 정거장을 감지했다. 그 대형 구조물은 숫제 궤도를 이탈해서 네버리스 원을 향해 근접하고 있었다. 초속 100만km는 될 듯 했다.

 

은수는 아크의 속마음을 간파했다. 공격 사거리에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아예 육탄 공격까지 강행하는 것이다. 아크는 연합군 함대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중앙 연산 처리 장치를 잃으면 함대는 무용지물이 된다.

 

은수는 네버리스 원을 회피 기동시켰다. 그러나 이 대형 전함은 함수를 옆으로 트는 것만으로도 추진력을 상당히 잃었고 회피 기동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잃어버렸다.

 

만약 네버리스 원이 우주 정거장과 충돌하게 된다면 전함은 원래 방향을 잃고 밀려날 테고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우주의 먼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함대는 전멸이다.

 

네버리스 원은 다가오는 우주 정거장을 피하기 위해 비상 기동에서 규정 이상의 최고 속력으로 움직였다. 비록 상당한 속도를 잃은 상태였지만 사고 회로와 연산 장치는 최선을 다했다.

 

우주 정거장은 아슬아슬하게 네버리스 원을 빗겨나갔다. 비록 함수를 부수긴 했지만, 그 육중한 덩치를 피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는 감안할만한 손실이었다.

 

우주 정거장은 궤도를 이탈해서 저만치 날아가더니 자기 속도를 못 이겨서 구획 별로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조그만 파편들이 우주 상공에 흩뿌려졌다.

 

“썅.”

 

처음으로 은수는 욕을 했다. 하지만 그것엔 기쁨이 담겨 있었다. 위험이 스쳐지나갔다.

 

은수는 통신 회선을 연결했다. 아크의 얼굴엔 침통함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 나를 막을 방법은 다 쓴 겁니까, 아크?”

 

[아직, 아직 너를 막을 방법이 남아있을 거야.]

 

“기대하도록 하지요.”

 

빈정거림 없이 은수가 말했다. 하지만 아크는 그 말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 분노로 얼굴이 시뻘개졌으니 말이다.

 

은수는 함대를 계속해서 전진시켰다. 반란군의 궤도 엘리베이터 방어막은 점점 약해져만 갔다. 몇몇 함선들은 제자리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아마 탈주하는 듯 보였다.

 

궤도 엘리베이터가 코앞이었다. 지상에서 매스 드라이버와 리니어로 계속해서 물자와 새 방어 시설이 올라왔지만 방어군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은수는 함대의 속도를 감속시키고 모든 무기를 궤도 엘리베이터를 향해 조준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일제 사격을 명령했다.

 

함대가 화망을 형성했다. 일제히 미사일과 광선을 발사했다. 미사일 발사대에서 쉼없이 대형 미사일이 쏟아져나왔다. 주포에서 에너지가 충전될 때마다 광선이 계속해서 발사됐다.

 

반란군도 필사적으로 방어 시스템을 가동했다. 반란군은 미사일을 요격하고 광선을 막아냈다. 공격을 막지 못할 것 같을 때는 아예 함선으로 틀어 막아냈다. 그 때마다 이 검은 심해에서 수천 명씩 죽어나갔다.

 

어떤 반란군 함선은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다. 충각 전술을 시도한 것이다. 고대부터 해전에서 사용되어온 그 전술은 섬세하기 짝이 없는 우주함으로 벌이기에는 자폭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지만, 궤도 엘리베이터에 쏟아지는 공격을 감소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궤도 엘리베이터에 계속해서 명중탄, 명중탄, 명중탄이 꽂혔다. 공격의 대상이 된 이 거대한 탄소섬유 구조물 위로 불꽃이 연속으로 피어났다. 궤도 엘리베이터가 붕괴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산화되어 우주 쓰레기로 바뀌는 그 모습은 솔직히 처절할 지경이었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은수는 적으로서 그들의 결단에 경의를 표할 뿐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희생을 늘리지 않기 위해 아크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로 결정했다.

 

“아크 지휘관, 이제 됐습니다. 항복하십시오. 곧 궤도 엘리베이터는 무너질 겁니다. 지금까지 흘린 피만 해도 너무 많습니다. 사령부에서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줄 겁니다.”

 

아크는 은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신념을 위해 싸우는 거야.]

 

“신념이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때로는.]

 

고집불통 노인네 같으니라고.

 

“아크, 우리는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다만 물리적으로 당신들이 졌을 뿐입니다. 살아남으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집을 부립니까? 그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남을 설득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길 바라네, 어린 친구. 우리가 여기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졌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둬야 하네.]

 

“제가 보기에는 허튼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도 이해하지.]

 

아크의 모니터로 보이는 함교 내부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부사관들은 피를 토하고 죽어있었고 어떤 시신은 무중력 상태에서 둥실 떠있었다. 전선과 계기판에서는 스파크가 튀었고 플라스틱이 녹으면서 유해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런데도 아크는 그 모습을 꿋꿋이 견뎌내고 있었다.

 

은수는 더 설득해야하는지 망설였다. 이 완고한 노인네인 아크가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은수의 함교에서 경보가 울렸다. 탄창에서 마지막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신호였다. 그 신호는 은수와 아크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미사일은 네버리스 원에서 발사되어 궤도 엘리베이터에 직격했다. 잠시 폭발이 일어나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은수는 엘리베이터가 무너지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폭발 이후에도 궤도 엘리베이터는 그 자리에서 꿋꿋이 서있었다.

 

은수는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아크마저도 방금 일어난 일에 당황한 것 같았다. 탄소 섬유 끈이 누더기가 되고 프레임이 떨어져 나갔지만 궤도 엘리베이터는 자리를 지켰다. 실질적으로, 궤도 엘리베이터는 아직 가동하고 있었다!

 

은수는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동안 전장에 침묵이 흘렀다.

 

은수는 다시 한 번 에너지를 끌어모아서 공격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미사일은 바닥났고 대부분의 전함들은 엔진에서부터 퍼져버려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공격을 하려면 180초를 기다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는데, 그 시간 안에 함대가 전멸할 수도 있었다.

 

아크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기민하게 움직였다. 반란군 함대가 공격해들어왔고 연합군 함대는 무기력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반전된 것 같군. 그렇지 않나?]

 

아크가 희미한 미소를 띄고 물었다.

 

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이미 개인이 통제하기엔 초월적이었다. 사방에서 포화를 뒤집어쓴 함선들끼리 뒤엉켜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작전 목표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부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뤄져야 했다.

 

네버리스 원은 이미 상당한 추진 에너지를 잃고 감속 중이었다. 그러나 적절한 조치만 취한다면 순식간에 최고 속도까지 기체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대형 전함은 그 자체 질량만으로도 위험한 병기가 된다.

 

은수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결정했다.

 

네버리스 원은 궤도 엘리베이터를 향해 함수를 틀었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속도를 상승시켜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보좌관 AI가 속도를 경고했다. 멀리서부터 어둠에 휩싸인 통로에서 엔진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크가 당황했다.

 

[무슨 짓이야?]

 

“내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

 

[설마 지금 그게 내가 생각하는 거라면 그건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 맞을 겁니다.”

 

[돌았군. 작전 수행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거냐?]

 

“그러는 당신들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아크는 입을 닫았다.

 

결국 아크가 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

 

“죽음이 두렵냐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요.”

 

은수는 맨질맨질한 턱을 매만졌다. 생각에 잠겼을 때 사람이 으레 하는 행동이었는데 실제로도 은수의 머리 속에서 정보 처리 과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그것을 본다면 빛이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연산 과정을 마치고 나서 은수가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나로 말하자면 종 전체를 두고 봤을 때 나는 겨우 일개 개인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죠. 수백 억 인간들 중에서 고작 하나. 인류 역사 전체를 두고 봤을 때는 훨씬 더 작은 존재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 동전 하나 값일 뿐이야. 게다가 나는 불멸을 획득했으니 아까울 것이 없죠.”

 

반란군 함대가 네버리스 원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순간 십자포화가 선미에 꽂혔다. 함선 일부가 파손되면서 떨어져나갔다. 외곽부 일부가 우그러졌다.

 

[불멸은 환상일 뿐이야.]

 

“그건 그때까지는 모르는 일일 뿐이죠.”

 

[제발 그만둬.]

 

“통신 종료.”

 

은수가 말했다. 홀로그래픽 모니터가 꺼졌다.

 

네버리스 원은 궤도 엘리베이터에 충돌했다. 순간 지표면에서 연결된 탄소 섬유 로프 전체가 출렁였고 뜬금없는 침략자를 향해 날을 세웠다. 네버리스 원은 중간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해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전투 기능을 상실한지는 이미 오래였다. 대부분의 함선들이 은수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중앙 장치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행성 지표로 추락하는 것 뿐이었다. 이 부분만큼은 보좌관 AI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질량을 가진 거대한 구조물들이 행성에 떨어졌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분명했다. 추락 지점 일대는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파괴될 것이다. 초토화된 그곳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은수가 탑승한 전함도 불타는 채로 알레프-17의 대기권으로 떨어졌다. 유선형의 날렵하게 생긴 함선은 곳곳에서 연기를 뿜어냈다. 대기권을 돌파하면서 외장재 표면에 새겨진 균열에서 파편들이 떨어져나가며 녹아내렸다. 외피가 벗겨지며 드러난 내피가 불타올랐다.

 

알레프 행성 지표에 설치된 대공포가 추락하는 함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추락하는 함대가 땅에 떨어졌을 때 벌어질 충격과 피해를 줄여보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거의 무의미한 행동이기도 했다. 우선 가용 가능한 대공포의 숫자가 너무 적었고 함대의 추락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공격은 명중하지도 못해서 함대에 거의 피해를 입히지도 못했다. 마치 맨손으로 해일을 막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은수는 행성 표면을 덮은 두터운 구름층을 돌파했다. 솜사탕 같은 연기들이 흩어지며 반짝 빛났다. 황금빛 빛이 눈 앞에서 수십 갈래로 산란했다. 은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깨지지 않았거나 불타지 않은 카메라 렌즈들은 알레프의 정경을 눈에 담는 중이었다. 은수는 눈을 감은 채로 보고 느꼈다.

 

알레프-17은 대부분의 불모지인 행성들과는 다르게 녹지로 가득한 행성이었다. 언덕이며 산등성이에 나무가 웃자란 것은 드문 풍경이었다. 인류가 거주 가능했고 위험 생물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차후에 휴양지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행성도 이제는 격변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그 위로 불타는 전함들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몇몇 부분들은 앞으로도 수백 수천년 동안 썩지 않고 그 자리에 존재할 것이었다.

 

대공포에서 발사한 탄환들이 푸른 화염으로 빛을 뿜으며 전함을 강타했다. 계기판들이 스파크를 뿜었다. 홀로그래픽 모니터에서 빛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모니터 표면에 금이 쫙 가더니 수십 조각으로 깨졌다. 파편들이 은수의 얼굴을 스쳤다. 돌풍이 불어와서 모니터를 뜯어버렸다.

 

빈 자리로 푸른색 하늘 풍경이 보였다. 강한 바람이 은수를 덮쳤다. 은수는 다시 눈꺼풀을 감았다.

 

함교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은수를 지켜줄 마지막 보호막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세상이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그 순간 대전함용 대구경 탄환이 은수를 명중시켰다. 붉은색 물감을 뿌린 것처럼 함교 사방으로 붉은 액체가 번졌다. 은수의 신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정신은 함대의 중앙 연산 처리 장치 안에 살아있었다. 은수는 자신의 육신이 죽었음을 깨달았지만 그 사실에 큰 유감 외엔 느끼지 못했다.

 

탄환이 함교를 계속해서 관통했고 큰 상처를 입혔다. 많은 것들이 부서져나갔다. 그러나 은수는 그 속에서도 살아있었다.

 

전함은 천천히 그러나 행성 시간으로는 빠른 속도로 여러 갈래 분해되었다. 그리고 그 각자의 파편에 담긴 은수의 영혼들은 묵시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전함의 전력에 연결되어 있던 회로들이 절단되었다. 연산 장치들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연산 장치가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신된 신호를 붙잡았다. 신호는 불확실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명확했다.

 

전쟁은 끝났다. 알레프-17에 숨어있던 반란군은 연합군에 항복했다. 오랜 동안 지속되었던 전쟁이 종결되었다.

 

은수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보조 회로가 절단되며 거대한 암흑이 은수를 덮쳤다. 그러나 그 전에 은수는 환상을 보았다. 넓은 녹지에 황금빛 햇살이 내리쬐고 바람이 불어와 잔디가 흔들거리는, 넓은 챙 모자를 쓴 뺨이 장미빛인 소녀가 산책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서 은수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곧 사방으로 흩어진 파편들은 지표면으로 떨어졌고 화염에 휩싸여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내었다. 충격파가 지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거대한 먼지 폭풍이 만들어졌고 천둥 벼락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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