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신인류

2003.12.17 18:1512.17


하늘 위에는 몇 조각의 구름이 떠 있었고, 청둥오리 떼가 조각구름을 좆아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가 기다리던 노을이 펼쳐졌다. 오후의 날씨를 보고 짐작은 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 끝을 지켜보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인 노을이었다. 내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출구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악마의 눈이 루비처럼 붉게 반짝인다고 말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악마의 눈은 흰 눈동자 위에 아무 것도 찍혀있지 않은 백지 같았다. 사랑하는 여인의 눈동자를 그리려다가 자살한 화가의 유작 같은 눈동자였다. 악마는 잠시 후에 심판을 받을 터였다. 규정된 절차 때문에 난 그에 대한 보고서를 써야 했으며,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그를 만나야 했다. 무엇이 발단이 된 전쟁이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몇 년 전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악마로 인한 인간의 퇴보와 고통을 악마에게 책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난 가능하다면 악마를 심판하는 일에는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의 선택권은 내 권한 밖의 일이었다. 난 규정된 서류와 휴대용 노트를 가지고 악마가 갇힌 수정으로 이뤄진 감옥을 방문해야 했다.(수정이 악마의 힘을 약하게 한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동굴 입구에서부터 경비병이 날 안내해 주었다. 그는 내 옷차림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 넥타이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식의 눈길로 시선을 마무리했다. 경비병은 악마의 힘을 약하게 하는 스타일의 넥타이를 나에게 강요하는 듯했지만, 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악마가 넥타이 따위로 힘이 결정되는 확률적인 존재였다면, 인간은 악마와의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에, 우리 모두가 기묘한 스타일의 넥타이를 매고 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업무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난 넥타이 따위는 매지 않는다.

내가 면회실에 들어갔지만, 악마는 벽을 향해 서있었다.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지를 망설였다. 내가 망설이자 경비병은 헛기침을 했다. 경비병의 작위적인 헛기침은, 내가 경비병에게 부탁한다면, 벽을 행해 서있는 악마를 내 앞에 있는 의자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난 경비병의 헛기침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곤 지나치게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내가 의자에 앉자, 경비병은 무대에서 배우가 퇴장하듯이, 면회실을 나갔다. 필시 내 행동이 그의 비위를 거스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난 경비병에게 친절하고 싶지가 않았다.

“못마땅하다는 얼굴이군.”

악마는 여전히 벽을 향한 채, 말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좋아하는 일은 아니거든요.”

난 악마의 말에 수긍하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난 경비병에게도 친절하고 싶지 않았지만, 악마에게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판단해 본다면 나에겐 악마의 협조가 필요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네 번째 웃는 얼굴을 지우고 다섯 번째 웃는 얼굴에 도전하고 있을 때, 악마는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악마가 바라본 내 얼굴은 필시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것일 것 같았다. 나는 ‘다시는 이런 표정을 짓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악마의 얼굴은 평범했지만, 우수에 차 있었다.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와 마주보고 있는 악마는 인간을 타락으로 인도하고, 인간의 영혼을 놀잇감으로 삼았던 전설 속의 주인공이었다. 신인류가 악마와의 전쟁을 선포할 때에도, 신인류의 승리를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쟁 역시 인간이 선택했다기 보다는 악마가 인간에게 종용한 것이었다. 악마와 사투를 벌인 병사들마저 자신들의 승리를 신뢰하지 않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악마와의 전쟁은 대단히 형식적인 것으로, 양쪽 모두 별다른 출혈은 없었다고 했다. 어땠던지 간에 신인류는 악마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조롱하듯이 인간이 악마를 조롱할 수 있게 되었다.

“자네들이 나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은 건가?”

악마는 문제의 핵심을 짧고, 정확하게 집어주었다. 난 잠시 뜸을 들이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악마는 웃었다. 악마의 웃음은 매우 자비로운 것이었다. 먼 여행길을 떠나는 친구의 행운을 빌어주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난 악마의 웃음 때문에 까닭 없는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인간들은 재밌는 영혼을 가졌어. 나보다 미개할 때에도 날 즐겁게 했지만, 날 뛰어넘어서도 즐겁게 하는군. 마치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족속 같군.”

악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중얼거렸다. 난 의자에 앉아서 중얼거리는 악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마에게서는 어떠한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측은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가 비록 갇힌 상태이고, 잠시 후에 심판을 받게 된다곤 해도, 그는 인간을 타락시켜온 악마인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는 날 타락시키고 내 영혼을 먹어치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악마가 두려웠다. 악마가 심판을 받고 소멸되기 전까지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이제 인간들은 나보다 강해졌어. 나에게 영혼을 저당 잡힐 정도로 나약한 인간은 없지. 상대적으로 나는 약해졌고, 아마도 인간들에 의해 소멸되겠지. 그러니 날 두려워하거나, 전쟁의 연장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악마는 기묘한 억양과 감성으로 날 위로하는 듯한 말을 했다. 한동안 악마와 난 1920년대의 폴란드 ‘겨울감자’ 사건과 1945년 버안마 세계회의 등과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마치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무시해도 되는 하찮은 이야기를 하듯이 악마는 신인류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했다.

나의 일은 끝난 것이었다. 난 면회실을 나왔고, 아주 짧은 보고서를 심판관들에게 전해주었다. 악마는 말했었다.

“내가 신인류에게 패배한 것은, 신인류가 나보다 잔인했기 때문이야.”

cancoffee1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433 중편 당신이 사는 섬-2부 김영욱 2006.02.16 0
432 단편 prologue1 미루 2006.02.14 0
431 단편 그림자 용11 amrita 2006.02.12 0
430 단편 동반자살2 청람 2006.02.12 0
429 중편 Hidden verses; 공유하지 못하는 음악 (상) mori 2006.02.11 0
428 단편 하늘을 나는 방법 리안 2006.02.08 0
427 단편 문어를 사온 K씨 외계인- 2006.02.05 0
426 단편 착각 Deceiver 2006.02.03 0
425 단편 와일드 와일드 ○○2 다담 2006.02.01 0
424 단편 당신도 아는 이야기 래빗X 2006.01.28 0
423 단편 비 오던 날 만난 이상한 그녀1 김영욱 2006.01.28 0
422 단편 열 손가락의 연주자10 요한 2006.01.27 0
421 단편 선물2 별가람 2006.01.26 0
420 단편 잠드는 방법 똥개 2006.01.25 0
419 단편 국내 최초 판타지 앤솔러지 - 뱀파이어 앤솔러지 기획 및 제작 일정 - 단편 공모합니다.1 mirror 2006.01.24 0
418 단편 잃어버린 낙원2 청람 2006.01.24 0
417 단편 호문클러스3 리안 2006.01.24 0
416 단편 인디언 유령2 청람 2006.01.22 0
415 중편 별을 담은 상자-- 제2부 긴 침묵(2) 달의묵념 2006.01.20 0
414 중편 별을 담은 상자 -제1부 긴 침묵 달의묵념 2006.01.2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