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마리엔느 - 1

2003.12.14 06:3112.14

-목련-

그는 텅 빈 평야에 불상처럼 서 있었다.
외로웠으므로, 가능한 것이리라.
-캘커타. AM 3:00
타국에서, 목 연-


Dear….

나는 아직 살아 있소. 이곳은 당신과는 너무나 먼 이국의 땅이오. 그래서인지 모르오만,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소. 이곳은 인도이고 한국과는 4시간 정도의 시차가 있소. 사람이 많고 평온한 곳이오. 이 곳에서 한달 가량 지냈다오. 38일간의 긴 시간을 연민하며 이 편지를 보내오.

인도를 떠나기 전, 막연히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자전거를 타고 지나쳤던 시골의 평온이 벌써부터 어색하오. 떠나야 하기에 느껴지는 객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소. 이틀 전 마리화나를 했소. 두려워 마오, 정신병을 유발하거나 몸을 망치게 되는 종류의 마약은 아니라오. 마리화나는 내게 인식의 치졸함만을 남겨주었소. 시간이 지날수록 온 몸이 끊임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오. 이 무력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소. 유쾌히 웃었지만 전혀 유쾌할 수 없었다오. 이성은 분명히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성은 제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럽고 때론 두려웠으나 웃어야만 되는 이 무력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소. 중독 되지 않는 약물이 왜 마약으로 취급되는지 알 것 같소. 확신할 수 없는 것들에 사로잡힌 흥분이라는 것은 위험한 것이오. 판단이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틀을 바꾸어버리기 때문이오.

나는 당신에게 많은 호감을 베풀었다오. 당신이 만약 나를 기억해 낼 수 있다면, 학급의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나름대로 친절한, 때로는 다혈질이기도 한, 평범한 아이를 그려낼 수 있을 거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의 내가 당신에게 베푼 호감들이 나를 이토록 저리게 한 거라오.

어째서 서로에게 향한 갈망과 호의가 서로를 상처 입히고 마는지 알 도리가 없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에게 베풀었던 감정들에 대한 일종의 원망이리다. 매우 어려운 것이오.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설명한다 하더라도, 서로가 공유하지 못한 유년과 그 외의 여러 삶들이 갈라놓는 시간들이, 또 다시 우리로 하여금 분노에 가까운 안타까움과 슬픔을 불러일으킬 것이기에, 어느 것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생각해 보오.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오. 허나, 용납할 수 없소. 아무리 우리가 연민과 동정으로 애착하고 그리워한다 하여도, 당신과 나, 일곱 시간의 거리처럼 부딪치고 마는 공백이 우리의 한계, 인생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오. 참 어려운 것이오.

당신에게만 편지를 쓰오. 부디 이 유약한 고백에 놀라지 마오. 고백이라고 해 봐야 대단치 않은 것이오. 부디 놀라운 마음에 나를 동정하지 마오. 당신이 동정한 내 감정들이, 안 그래도 글로 써서 확연치 않은 이 감정이 더더욱 낯설어 질까 두렵소.

당신도 지금의 내가 얼마나 주저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거요. 사실 나는 이렇지 않다는 걸 당신은 잘 알고 있소. 애정과 호의를 빙자한 내 거친 행동들을, 당신은 수없이 겪어 왔소. 나는 누군가를 깊이 배려할만한 위인이 못 된다오……. 실은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소. 인도에서 만난, 타국의 소녀에 대한 이야기오. 사막에 핀 연꽃 같은 소녀였소. 당신은 아마도 앞으로 이야기 될 그녀란 사람을 믿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녀와 같을 때가 있다오.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믿겨지지 않을 때가 말이오.

나는 그녀를 뉴델리(New Delhi)의 꿉타 미나르(Kutab Minar)에서 만났소. 먼저 차라리 사막이었으면 좋았을 그 곳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소. 꿉타 미나르는 그녀와 나를 이어준 고마운 존재이니 말이오.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설명한다는 것이 쑥스럽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이야기인 데다가, 계속 변한 꿉타 미나르의 모습은 글로 쓰이면서 더 변할 것이오. 결국 지금의 내가 적어야만 하는 꿉타 미나르의 첫 모습이란 불가능 할거요. 이러한 불가능을 알면서도 굳이 설명하려 드는 무모함을 용서하시구려.

하지만 우리가 만날 때마다 나누었던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소. 가장 확실한 기억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온갖 상상력과 추리를 동원해야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큰 맥락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갈 뿐, 정확한 기억을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오. 우리는 이 욕망을 순수라 칭하며 그리워했소. 하지만 당신도 알거요, 우리가 이야기 한 것들은 이미 아무런 이유 없이 아름다워지기만 한 후였다오. 차마 경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을 뿐이었소.

마리엔느, 이러한 사실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야기하려 하는 이 치욕을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시오. 이 치욕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 밖에 이 글을 전할 사람이 없구려……. 화내지 마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의 이해력이 낮다거나 몰인정하다는 뜻이 아니오. 오히려 당신은 사람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아오. 다만 당신은 나와는 너무나 멀리 있고, 살아오면서 역시 멀었다오. 물론 당신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라오. 분명 있으나, 글로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방법이며, 이 글이 그들에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오. 마리엔느, 이해한다는 것과 오해하지 않는 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소.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다 이해 받기 위해서 상대방을 가늠해 보는 것이오. 오해하지 않는 다는 것이, 그 사람의 내면을 셈하는 데에 있어서 더 근접 하다고 생각하오. 이해하려는 행위는 언제나 오해를 불러일으켰기에, 마리엔느, 나는 당신에게 흔한 인사 한 번 못했던 것이오.

꿉타 미나르는 전체적으로 붉고 선명한 색체로 이루어져 있었소. 수백의 세월을 안고 늘름하게 남아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오. 하지만 위태로와 보였소. 예전의 영광을 상실한 성벽과 탑의 소실된 공간들은 세밀하고도 막막해 보였다오.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 저곳을 꽉 메우고 있었고 나는 사람이 없는 꿉타 미나르의 외각 쪽으로 걸음을 옮겼소. 아름다운 조각들이 빼곡히 새겨진 성벽과 작고 큰 탑들, 작은 방에 놓인 묘지와 공사중인 듯 번호가 매겨진 곳도 많았다오. 이곳에서 나는 당신과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억울해 하고 있었소. (왜인지는 차차 설명하리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 내 시선, 어느 막다른 외지에서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소. 외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벽에 새겨진 남녀의 조각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쯤 감고 있는 그녀가 있었던 것이오. (마지막까지 그녀의 이름은 듣지 못했소. 아니, 들었을지도 모르오. 다만 그녀를 미련未戀이라 칭하리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아무런 화장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소. 감히 접근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으나, 동시에 좀처럼 눈에 띄지도 않은 수수함을 가지고 있었소. 한참 감상에 젖어 있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를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 하지도 않았을 거라오.

그녀가 쓰다듬고 있던 그 조각은, 내가 연민을 느꼈던 바로 그 조각이었소. 연인이 애처롭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오. 그들의 얼굴은 비록 풍화되고 마모되어 확연치 않았으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만은 간절했소. 신녀들이 꽃신을 신고 거닐었을 법한 통로에 새겨진 조각이었소. 모습은 확실치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들었던 것 같소. 우리는 서로 사랑했었노라고. 우리가 비록 풍화되고 마모되어 사라진다 한들, 우리가 사랑했던 모습들이 거짓이겠느냐고, 그들은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소. 그들의 사랑이 전설이 된다 한들, 현실이 될 수 없는 그 사실 속에서 나는 억울해하며 울음을 참았다오.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 당신이 비록 내 음성과 말투, 빈약했던 실루엣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애착하고 그리워 한다는 것이 내 생에 진실 밖으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은 나라는 사람을 모르고 살아가고 말 것이오. 내가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다 하여도, 시간에 쓸려가야만 하는 이 나약함을, 당신과 관계되는 그 순간에서 조차 아파해야만 했던 것이오. 당신에게 너무나 낯선 나는, 이쯤에서 말을 아껴야 하리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소. 그녀가 목련 같았다는 것은, 그녀의 볼에 홍조가 피어오를 때, 마치 아름다운 목련이 볼에 스미는 것 같았기 때문이오. 제 아름다움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하나 떨어져 오그라드는 꽃잎의 모습이 그녀를 떠오르게 했소. 그녀는 사물과 교감을 나눌 때마다 목련이 되곤 했다오. 사실, 교감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신과 자신의 대화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소. 허나 그녀가 교감을 나눌 때면, 정지해 있던 시간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유적들의 표면에서 가느다란 입김이 새어나오는 듯 했소. 꿉타 미나르의 그 조각은, 내가 감상하던 때와는 뭔가 달랐소. 그녀의 손끝에서 울리는 듯한 미세한 진동과, 원피스를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바람. 바닥 사이로 고개를 내민 잡초들의 바스락거림 들이 주위 사람들의 음성을 꿰뚫고 하나하나 교감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오. 그녀, 미련은 사물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지금 이렇게 떠올려 보오.

그녀를 바라보며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소. 그녀가 마침내 일어서려다 풀썩 쓰러진 것을 보면 앉아있기엔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으리라 짐작할 뿐이오. 그녀가 쓰러진 것을 보고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오. 놀라서가 아니오. 왜인지는 모르나, 말했지 않소. 그녀에게는 감히 범접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고 말이오.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당황했소. 단 하나의 감정으로만 둥글게 빚어진 듯한 눈이 위험하게 느껴졌다오. 나는 눈이 진실 되다 생각하나 믿지는 않소. 진실 된 것은 모두가 위험하고 실제로도 진리가 아니라오. 사람이 만든 진리란 것은, 언제나 진실에서 모방되고 있으나 진리에서 나올 수 있는 진실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오. 마리엔느, 나는 진리를 믿을 뿐 사랑하지는 않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진실뿐이라오. 허나 진실은 언제나 아름다웠을 뿐,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오. 그렇지 않소?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내 옆에 앉아있기만 했소. 나 역시 연신 담배만 피워댔소. 그녀는 이따금 담배연기에 콜록거리기는 했으나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멍하니 꿉타 미나르만을 바라보고 있었소. 그 선명한 홍 빛의 자태는 없어도 좋을 것 같았소. 망령처럼, 수백 년의 기억을 고집하는 노파의 말을 들어줄 이가 어디에 있겠소. 제 아무리 웅장하고 장엄한 역사와 시간들을 새겨놓는다 한들, 그것이 겨우 전설과 역사 사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말이오. 한참을 지나 그녀는 입을 열고 이야기를 해 주었소. 꿉타 미나르에서 살았던 여인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주듯이 말했다오. 마치 유화를 그리듯, 먹구름 가득 낀 하늘과 잔디와 붉은 흙이 가득한 정원이 나타나고, 빈 터 위에 하나하나 쌓아올려지는 붉은 돌과 신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석공들이며, 건물을 지어 올릴 때 기둥에 문양을 새겨 넣던 늙은 장인의 마지막 망치질까지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고대 동굴에 역사를 새겨 넣던 고대인이 생각났다오. 멸망한 어느 소국(小國)의 화가가 마지막 생을 다해 후미진 동굴 벽에 새겨 넣은 한 나라의 역사가 말이오.

그녀는 한껏 그리운 목소리로 이야기 해주었다오. 마치 자신이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왔던 것처럼 나직하게, 허나 즐거웠던 부분에서는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신나했다오. 기둥에 새겨진 한 쌍의 연인과 그들의 친구들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소. 그들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된 건 내 생애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이라는 듯이 말했소. 만난 적도 없을 텐데 말이오. 허나, 그녀가 그토록 즐겁고 그리운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싶었다오. 그녀의 소외된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리가 멍해지기도 했다오. 그러니까, 이런 식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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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번 글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반년 이상이 흘렀군요.

약 8개월 정도...?

그런데도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누어서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달 안에 결판을 내기 위해!

게시판을 어지럽히게 되었습니다. -_-;;;;

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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