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믿을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난 내가 태어난 지 1년이 되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난 아버지의 품에 안겨 보석 가게로 갔었다.  가게에 들어가던 순간이 특히 생생하다. 어머니가 차를 운전했다.  마침 에어컨이 고장난 차 안이 너무 덥고 답답해서  유난히 칭얼거렸던 것도 기억한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거의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부모님은 차에서 내렸으니 내가 좀 나아지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거리도 소란스러웠고, 너무 더웠기에  나의 짜증은 여전했다. 난 열심히 날 어르는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댔다.  어머니가 서둘러 가게 문을 열고 -아마 시원한 곳에 들어가면 내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신 듯 하다.- 아버지가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가게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선 순간 난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 곳은 빛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푸르고, 노랗고, 붉고, 투명한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벽, 천장, 진열대에 가득 널려 있었다.  난  넋을 잃고 그것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더 이상 칭얼거리지 않자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보석 가게 주인과 부모님이 몇 마디 말을 나눴다. 가게 주인은 날 위해 진열장을 열어 두고 있었다.  태어난 지 1년이 되면 아이들은 누구나 보석을 고르게 되어 있다.  무의식 속에서 고르는 보석이 그 아이와 가장 친밀한 보석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천천히 가게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섣불리 손을 뻗었다가 그걸 내가 원하는 줄 알고 냉큼  골라버리실까 두려워 만져보지도 못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할 것이다. 넌 그 때 고작 한 살이었고,  대부분은  그 일을 기억조차 못한다고.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사실인 것이다.

  작은 꽃 모양, 이름을 잘 모를 동물 모양, 다양한 모양의 나비  모양의 보석들이 널려 있었다. 벽을 한 바퀴 돈 다음에 아버지는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고 진열대안에 있는 보석도 보여주셨다. 진열대 안에 있는 보석은 대체로 반짝거리지 않는 종류였다. 진주라거나 비취, 터키석같은 것들 말이다. 그 때 그런 것까지 다 알아봤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다.

  "뭘 골라야할지 모르겠나봐요."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천천히 고르게 놔 두세요. 평생에 오직 한 번만 갖을 수 있는  보석인걸요."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가지고 있던 걸 잃어버린 후 커서 하나를 더 사는 사람도 있긴 있다던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드물어요. 어릴 때야 보석과 궁합을 맞추기가  쉽지만, 커서는 영 힘듭니다."

  가게 주인과 어머니가 대화하는 동안 아버지는 날 안고 처음부터  다시 벽을 돌았다. 이번에는 좀 더 찬찬히 볼 수 있었다. 내 흥미를  끄는 보석이 몇 개 생겼고, 그 중 뭘 고를까 고민했다.  진열대로 왔다. 진열대에 있는 보석은 반짝이지 않아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다.

  "저 보석은 곧 버려지겠군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네, 곧 치워야할 겁니다. 애들은 보통 반짝이는 걸 좋아해서요.  꽤 괜찮은 보석인데…."

  역시 자란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임자를 찾지 못한 보석은 결국 노화해서 죽게 된다. 난 어머니와 가게 주인이 말하고 있는  보석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스톤이었다. 적갈색이 아름다워야 했는데 약간 빛이 퇴색해 있었다. 그 보석과 시선이 마주친 이 후,  내 눈에는 이 자리에  있는 그 수많은 보석 중 그 보석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것보다 예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곧 사그러질 운명에 있는….

   난 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동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보석이 그렇게 버려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내가 진열대에 있는 보석에 관심을 두자 재빨리 유리 뚜껑을 열었다. 아버지는 내가 쉽게 보석을 고를 수 있도록 날 그  쪽으로 가까이 해 주셨다. 난 선스톤을 골랐다.

  "어머?"

  어머니가 당황한 소리를 냈다. 혹시라도 이 보석은 안된다고 할까 두려워 난 필사적으로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이 뒤부터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후에 부모님께 여러 번에 걸쳐  들은 이야기이다.

  "아주 좋은 보석입니다. 따님이 보석 보는 눈이 있네요. 안그래도 버려지기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걸요."

  가게 주인은 상술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부모님은 그 보석의 값을 치루고 난 집으로 돌아왔다.

  "잃어버리면 안되니까."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 손을 피려 하며 말했다.  난 내 보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보석이 아버지의 손으로 넘겨가자 난 큰 소리로 울어댔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자 아버지는 내게 다시 보석을 주셨다. 그제서야  내가 울음을 멈추었다고 하셨다. 그토록이나 그 보석을 좋아했노라고….

  집으로 돌아온 부모님은 준비된 화분에 보석을 심고 내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 화분을 올려 놓으셨다.

  "네 키가 저걸 잡을 만큼 커지면 그 땐 네가 보석을 가꾸는거야."

  어머니가 내 귀에 속삭이셨다고 했다. 보석을 뺏긴 후 내가 빽빽  울어댄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직은 내 힘으로 보석을 기를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 난 자기 전이면 항상 침대 위 보석이 있는 곳을 지켜보며 빨리 키가 자라길 바랬다. 어서어서 자라서 나의 보석을 직접 가꾸고  싶었다.

  드디어 발돋음을 해서 보석을 볼 수 있게 되자 난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셨다.

  "아직은 좀 더 자라야하지만…. 좋아, 정 네가 직접 키우고  싶다면. 대신 그만큼 조심하고 소중하게 다뤄야 해. 넌 아직 힘 조절을 잘  못 하니까 말이야."

  "잘 할 수 있어요!"

  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부터 하렴. 오늘 밤 자기 전에 네 보석이 묻힌 곳에  입맞추도록 해.  네가  보석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네 보석이 어떤 형태로 자라길 바라는지등을 떠올리면서 말야. 정성껏 해야한단다. 물은 하루에 두 번씩 주렴.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늘 같은 시간에  줘야 하고, 싹이 날 때 까지 절대로 하루도 빼먹어서는 안되.  이건 무척 힘든거야.  정말로 벌써 할 수 있겠니?"

  "네."

  난 최대한 진지하게, 어머니가 진심으로 느끼길 간절히 바라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나의 선스톤이 심어져 있는 화분을 꺼내 침대 옆 탁자에 놔 주셨다. 보일 듯 말 듯 흙이 조금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흙에서 싹이 나고, 그 싹이 점점 자라 커다란 보석이 열리는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한다면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다들 봤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난 그 때 느낀 나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  난 경이와 신비감에 쌓여 보석속에서 자그마한 생명이 탄생하는 걸  지켜보았다. 선스톤 안에서 무릎을 꼭 끌어안은채 웅크리고 있는 네므 -내가 붙인 이름이다.-는 처음에는 손바닥 만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선스톤이 자라면서 네므도 자랐고 자세도  올곧아졌다. 웅크리고 있던 걸 풀고 조금씩 조금씩 일어섰다. 눈을 감은 채로 양팔을 벌리고 다리를 꼭 붙이고 서 있는 자세가 되자  어머니는 네므가 곧 깨어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네므는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깨어났다. 그 때쯤 네므는 꽤 자라서 커다란 화분으로 옮겨져 있었다.  새벽 2시쯤으로 기억된다.  난 뭔가 이상한 기분에 잠에서 깼다. 주위는 온통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빛은 네므가 있는 보석에서  나오고 있었다.  보석이 소리도 없이 찢어졌다. 난 숨을 멈췄다. 아직 네므가 나오기에는 좁았다. 네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밖에서  찢는 걸 도와주면 살지 못한다고 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 힘으로 나와야만 했다. 내 팔보다도 훨씬 가느다란 네므의 팔이 힘들게  움직였다. 못나오면 어쩌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네므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온 힘을 다해 보석을 찢었다. 모든 영양분을 네므에게 주고 이제 껍질만 남은 선스톤은 아주 얇은 치즈가 찢어지는 느낌으로 완전히 벌어졌다. 네므는 잠시 기다렸다. 바깥 공기에 익숙해지려는 것 같았다.

  그 투명한 아름다움…. 네므의 눈동자는 부드러운 밤색이었지만 그것은 유리에 약간의 밤색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피부가 너무 투명해서 그 밑의 뼈와 혈관이 들여다 보였다.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눈 속의 뇌까지 비쳤다. 네므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네므가 걷고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후 나는 친구들에게 네므를  소개했다. 친구들이 자칫 네므를 잘못 만지면 다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했다. 아예 자신의 인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가족들에게도. 하지만 난 굳이 그럴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말만 하고 난 네므를  보여주었다. 처음엔 다른 보석들처럼 반짝이지 않는  나의 선스톤을  그다지 예쁘지 않게 느끼던 아이들도 질투를 할 만큼 나의 네므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짝반짝이는 눈과 머리카락을 가진 인형은 많았다. 하지만 나의 네므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빛을 발하는 인형은  흔치 않았다.

  네므는 말은 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네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었어도 다시 기운을 차리게 해준다.  많은 친구들이  아직까지 인형을 가지고 있느냐고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난 내가 소멸하는  그 날까지 나의 네므와 함께할 것이다.』


  장내는 왠지 모르게 썰렁했다.

  "흠흠."

  카튼 교수는 헛기침을 했다.

  "리아로양의 "나의 사랑스러운 인형 네므"에 대한 감동적인 글은  잘 들었습니다. 자, 제군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무살이 넘도록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가씨에 대해?"

  잠시 웃음이 번졌다.

  "뭐, 물론 개인 나름입니다만… 사실 전 인형을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느 날 보니 사라져 있더군요. 저처럼 언제 잃어버렸는지 모르시는 분?"

  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나머지는 갖다 버린 건가요? 어디 버린 분 손들어 보세요."

  이번에는 1/4 정도가 손을 들었다.

  "흠, 그럼 다른 분은요? 저기 앞에 있는 학생?"

  남학생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

  "인형이 태어나자 마자 불에 태웠죠. 그 날을 위해 미리 석유를 몰래 준비해놨었거든요. 인형이 막 찢고 나오려던 차에 그냥 석유를 부어버렸죠. 나중에 마당 다 태워버릴 뻔 했다고 아버지께 두들겨 맞았죠."

  폭소와 우쭐하는 태도의 남학생.

  "그럼 혹시, 아직도 인형을 가지고 계신 분이 또 있습니까?"

  난 당당하게 손을 들었다. 나밖에 없을 것이다.  교수는 지금 일부러 저러고 있는 거다.

  "아, 두 분이군요?"

  난 앞쪽에 앉아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구석 자리에 앉은 여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있었다. 거리가 멀었지만 우린 서로를 분명히  의식했다.



  "너무 화 나. 그러고도 교수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신경질을 부렸다.

  "고의로 날 갈군거라고. 내가 뭘 어쨌기에 뻑하면 날 갈구고 그래?"

  "널 질투하나 보지."

  "하나도 안 웃겨."

   카는 어깨만 으쓱했다.

  "난 대학에 오면… 뭔가 좀 더 자유로워질 줄 알았어.  쳇, 이건 뭐, 고등학교 때보다 더 폐쇄적이잖아. 고교때는 적어도 내가 아직도 네므와 지내고 있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비웃는 애들은 없었다고."

  "그나저나 그 인형은 언제 처분할거야?"

  "…어떻게 너마저 그런 식으로 말해?"

  "사실이잖아. 아직까지 인형을 가지고 있는 애들이 어딨어?"

  "한 명 있어."

  난 긴 퍼머머리의 그 애를 떠올렸다.

  "못 보던 앤데… 교수가 인형 가지고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니까 손 들더라."

  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자리가 멀었지만. 눈이 마주쳤어. 음, 확실해."

  "말이라도 걸어보지 그랬어?"

  "그러려고 했는데, 교수가 날 갈구느라 수업을 늦게 끝내서  너 만나는 거 늦을까봐 못 그랬어."

  "너 같은 애가 또 있긴 있구나."

  "너무 그러지마~ 아, 잔이 비었네. 우리 한 잔 더하자."

  "안돼. 나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쳇. 넌 너무 냉정해."

  "그만 가자."

  "적어도 이건 다 필 때까지 기다려 줘."

  "끊어."

  카는 그렇게 말하더니 정말 벌떡 일어나 버렸다. 냉정한 녀석 같으니. 난 장초를 비벼 끄고 카를 따라 일어섰다.



  내가 그 애와 말을 하게 된 건 "문학과 자기 발견"의 다음 주 수업 시간이 되어서였다. 난 수업 때 주로 앞자리에 앉는 편이지만 카튼 교수가 꼴보기 싫기도 하고, 그 애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기도 해서  일부러 뒷자리에 앉았다.

  그 애는 수업이 시작된 지 3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나는 상당히 실망한 채로 수업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렸다. 그 애가 움직일 때마다 그 애의 풍성한 검은머리에서 작은 파도가 일었다.

  그 앤 뒷자리로 온 날 보고 한 번 웃었다. 왠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쑥쓰러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당해지기로 했다. 난 교수의 눈치를 보며 쪽지를 써 보냈다.

  '이름이 뭐죠?'

  '다니쉬. 너는?'

  그 앤 너무나도 자연스레 반말을 썼다. 나도 그냥 말을 놓기로 했다.

  '리아로.'


  수업이 끝났을 때, 난 다니쉬가 학비를 벌기 위해  1년 동안  휴학을 했었다는 것 - 그래서 내가 그 애를 몰랐던 거다. -  다니쉬의 인형은 사파이어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토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형에 이름을 붙인 아이는 많지 않았다. 다니쉬는 나도 인형에 이름을 붙였을 줄 알았다고 했다.

  "저기… 내가 저녁을 사고 싶은데…."

  다니쉬는 빙긋 웃었다. 우린 저녁을 먹으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교수는 널 질투하는 거야."

  다니쉬가 말했다.

  "너도 그런 말을 하네. 내 친구 하나도 그렇게 말했거든."

  하지만 어감은 완전히 달랐지,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교수는 너무 어릴 때 인형을 잃어버렸어. 잃어버렸다는 것도 잃어버린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을 거야. 이제 와서 찾을 수도 없고.  다시 보석을  키운다는 건 체면이 걸리고…. 넌 아직도 인형을 가지고 있어. 그게 문제야."

   "너도 가지고 있잖아."

  "난 눈에 잘 안 띄잖아."

  "나도 별로 눈에 띄진 않아…. 그럼 넌 인형에 대해 글 써오라고  했을 때, 뭐 썼어?"

  "난 그냥 시를 하나 써서 냈어."

  "헤에?"

  "내 인형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  멋대로  비웃어대는 걸 듣고 싶지 않거든. 난 아무에게도 내 인형을 보여주지 않아.  어릴 때부터 그랬어."
  
  "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여줬었는데…. 너도 볼래?"



  그렇게 다니쉬와 친해졌다. 다니쉬와 친해지고 난 후 학교 생활이 훨씬 편해졌다. 드디어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누가 우릴  이상한 눈으로 보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우린 항상 손을 꼭 잡고  다녔고, 밤마다 통화를 했다. 그 애와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편했고, 나의 네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린  지치지도 않고 서로의 인형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니쉬는 주말이면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자고 가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잠을 자다 목이 말라 깼는데 옆자리에 있어야 할 다니쉬가 보이질 않았다. 그 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앤 창가에서 나의 네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단지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잠든 나의 네므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니쉬?"

  다니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인형, 달빛아래 보니 예쁘다."

  다니쉬는 내가 봤다는 걸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여상스럽게 말했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화분에 서서 고개를 떨구고 잠들고 있는 네므의 머리칼과 하얀 잠옷을 입은 다니쉬를 비취고 있었다. 다니쉬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고, 네므의 머리는 거의 보랏빛으로  보였다.

  "그만… 자."

  다니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내 옆에 눕더니 바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난 선뜻 잠들지 못했다. 다니쉬에게 네므를 언제든지 보여주고, 심지어 네므가 있는 내 방에서 같이 잔 적도 여러 번이지만, 그렇다고 만져도 좋다고 말한 적까지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인형을 맘대로 만지면 안된다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뭐, 다니쉬와 나의 관계는 특별하니까, 그만큼의 친밀감의 표현일지도….  하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날이 밝으면 한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허락없이 만지지는 말아달라고. 다니쉬가 기분 상하지 않게 표현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궁리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일어나보니 다니쉬가 그새 일어나 아침을 차려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식탁 앞에는 네므가 앉아 있었다.

  "왜 네므가 여기 있어?"

  "아, 일어났기에 심심할까봐 데리고 나온 거야. 넌 자고 있었잖아."

  "왜 네 맘대로 네므를 움직여?"

  "……."

  "네므는 나의 인형이야. 적어도 내게 미리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냐?"

  다니쉬는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가방을 열고 뭔가 꺼냈다. 그것은 인형을 위한 고급 비료였다.

  "네므는 너무 마른 것 같더라. 그래서 네므에게 주려고 사온 거야."

  "맙소사, 난 네므에게 화학 비료같은 건 주지 않아! 왜 내 인형을 네 인형인양 구는 거야? 함부로 만지고!"

  "내 인형인양 굴지 않았어! 자다가 잠깐 깼는데, 네므가 너무 예뻐서 그만…. …난, 난 그냥 네가 기뻐할 줄 알고…  네가 이렇게 화낼  줄 알았으면 사오지 않았을 거야."

  다니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 애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애의 눈물을 보자 죄책감이 밀려왔다.

  "…미안, 다니쉬. 내가 어떻게 되었었나봐.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우리 집은… 가족끼리 식사하고, 그런 적이 없었어. 독립을 한 후에는 더욱 다른 사람이랑 같이 밥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네므까지 셋이 앉으면, 그냥 가족이 식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해서…. 미안해, 나… 그만 갈게…."

  "다니쉬!"

  잡을 틈도 없이 다니쉬는 뛰쳐나갔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그날  밤도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니쉬에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그 애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어디서 혼자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이었다.  다니쉬가 수업에 들어오지 않을까  무척 걱정했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수업이 끝난 후 그냥 나가려는 다니쉬를 잡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 다니쉬. 내가 잘못했어."

  "…."

  "있지, 다니쉬. 오늘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내가 저녁 만들어줄게."

  "별로 저녁 생각 없어. 굶지, 뭐."

  "그러지 말고. 응? 다니쉬~"

  난 계속 졸라서 다니쉬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미리  준비해둔 재료로 다니쉬가 좋아하는 버섯 전골을 끓여주었다.  그리고  그 때쯤 우리는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다니쉬, 이리와 봐."

  난 계란 껍질을 모아놓은 것을 꺼냈다.

  "화학 비료는 인형에게 안 좋아. 난 늘 자연식을 써. 잘 봐."

  난 계란껍질과 음식 찌꺼기를 흙과 섞어 발효시키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걸 주는 거야. 네가 해봐. 그리고 너의 토우에게도 해줘 봐."

  "아, 그럴까…."

  다니쉬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료를 만드는 게 어려우면 내가 줄게. 좀 가져 가. 아, 그것 좀 들어줄래?"

  난 발효된 비료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자. 네므는 지금 밖에서 볕을 쐬고 있어. 며칠 흐리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말이야."

  난 베란다로 다니쉬를 데리고 갔다. 네므는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난 네므가 있는 화분의 흙을 파고, 거름을 주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낮에는 보통 화분에서 나와 돌아다니지만, 밤이면 화분에 다리를 묻고 자야했다.

  "이제 네가 해 봐."

  "정말? 그래도 되니?"

  "그럼. 나의 네므는 곧 너의 네므이기도 해."

  "난… 난 너무 속상했었어. 넌 늘 너의 네므를 내게 보여주긴 하지만, 만지는 건 싫어했지. 네가 금을 그어놓는 것 같았어. 이 이상은  들어오지 말라고…."

  "바보! 그럴 리가 없잖아!"

  "너무 고마워. 난 너뿐이야."

  다니쉬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애는 내가 가르쳐준 대로 거름을 줬다.  난 그 애에게  나의 네므에게 입맞추는 것도 허락했다. 다니쉬가 웃는 걸 보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넌 다니쉬의 인형을 보지 못했잖아."

  카는 글래스에 얼음을 넣었다.

  난 술을 따랐다. 나는 술병을 뜯고 첫잔을 따를 때 나는 맑은 소리를 좋아했다. 페이머스 그로우스. 만만하게 먹을 수 있는 술은 아니지만 카를 만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한 번쯤 무리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카의 머리가 거의 허리에 닿을 듯 찰랑거렸다.  저렇게 머리를 길게 기른 카를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정말 머리를 기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토우는 수줍음을 많이 탄대. 낯선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야.  성년이 되기 전 가족과 함께 지낼 때도 토우가  있는 방엔 가족들을 들여보내지 않았대. 다니쉬는 가족들이랑 있는 게 굉장히 불편했기 때문에 그 핑계로 늘 방에 혼자 있는 게 좋았대.

  "왜 가족들이랑 있는 것이 불편했대?"

  "가족들은 그 애를 잘 이해를 못해주나 봐."

  "어떤 면을?"

  "음…뭐랄까… 그 애는 좀… 섬세한 애잖아."

  "그래?"

  카의 "그래?" 라는 말은 마치 비웃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상했다.

  "다니쉬는 내게 토우의 그림을 보여줬어. 인형은 사진기의  플래쉬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잖아. 밝을 때 찍어도 좋겠지만,  그래도 토우가 조금이라도 스트레스 받을까 봐 그러지 못하고 그냥 그림을 그린대. 다니쉬는 정말 그림을 잘 그려. 내 초상화도 한 장 그려줬었어.  어쨌든, 인형은 주인을 닮는다잖아. 다니쉬의 인형도 다니쉬만큼 예민한가봐."

  "너네 꼭 연애하는 것 같다."

  "풋- 학교다닐 때도 둘이 늘 손잡고 돌아다니니까 동성연애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 둘이 한참 웃었었지. 다니쉬, 곧 결혼할텐데."

  "결혼을 해?"

  "아, 말 안했나?"

  카는 술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에 할거야. 그러고보니, 다니쉬를 알게 된지도 벌써 꽤 되었네."

  다니쉬를 처음 만난 건 대학 2학년 때였다. 그 때가 바로 며칠 전인 것 같은데 어느새 우린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더니, 결혼까지 한다. 뭔가 믿기질 않았다.

  다니쉬는 졸업 후 여행사에 들어가. 결혼 상대를 만났고, 곧 직장을 그만뒀다. 다니쉬 말이 남자가 자신이 일하는 걸 안좋아한다고, 자신이 다 해줄 테니 집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라고 했다는 거다.

  사과를 집는데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다니쉬구나? 나 지금 카하고 술 마셔.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거 같아. 내일 휴일인데다가 카를 워낙 오랜만에 본 거라서. ……아, 미안미안, 오늘만 그냥 자. …다니쉬?"

  조그맣게 한숨이 나왔다.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또 삐졌어."

  카는 잠자코 있었다. 난 담배를 물었다.

  "다니쉬가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내가 자기 전에 전화로 음악 들려 주거든. 좋은 노래 선곡해서. 근데 오늘 못할 거 같다니까 화를 내 버리네. 결혼준비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말이지. 사소한 걸로도 잘 삐져."

  난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문제라도 있어?"

  "돈 때문이지, 뭐. 다니쉬 부모님, 다니쉬가 결혼하는 데 거의  돈을 보태주지 않은 것 같아. 남자가 그렇게 좋은 걸 바라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다니쉬는 그럼 너무 미안하지 않냐는거야."

  "그래서? 돈 빌려 달래?"

  "아냐, 그런 이야기 안했어."

  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너 학비 빌려준 것도 못 받았지? 네가 무슨 갑부집 딸이냐? 걘 아르바이트도 안하는데. 네가 아르바이트해서 벌었던 돈도 걔 다 빌려주고. 그게 뭐하는 짓이야?"

  "그런 말 하지마! 다니쉬도 일자리 알아보려고 했어. 근데, 알다시피 걔가 좀 허약하잖아."

  "내 참, 누군 체력이 남아돌아서 일하나?"

  카는 직장에서 한창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난 좀 나은 편이었다. 중학교 국어 교사라는 건 고등학교처럼 자율학습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방학에 보충수업도 없으니 시험기간을 빼면 상당히 자유로웠다. 물론, 모두 나처럼 좋은 건 아니었다. 다른 학교에 배정 받아 간 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학교는 천국이었다. 특별히  간섭하거나 선생에게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착한 편이었다.

  "천천히 마셔, 취하겠다."

  카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한 번에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너도 좀 마셔. 왜 이렇게 몸을 사리냐."

  "그래그래, 마신다 마셔."

  처음 한 두잔은 조심했지만 어느 순간 경계심이 풀려버렸다. 나중엔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오랜만인데 좀 취하면 어떠랴, 내일은 마침 휴일이라 수업도 없는데.



  눈을 떠보니 방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프고, 속이 아렸다. 물을 마시려고 나가보니 거실엔 온통 술병이었고,  카는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우리 집에 와서 더 마셨던가? 필름이 끊겨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물을 마시고 주섬주섬 술병을 치우는 데 카가 일어났다.

  "아웅, 지금 몇 시야?"

  카가 부스스한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목도 잠겨 있었다.

  "10시 반인가 보다."

  "그래? 잘 잤어?"

  "아니, 머리 아파 죽겠다. 넌 머리 안 아파?"

  "난 별로…."

  카는 얼굴을 문지르더니 내게 물잔을 받으며 말했다.

  "정말?"

  "응."

  "왜 나만 아파?"

  카는 피식 웃더니 술병 치우는 걸 도왔다.

  "와, 이 많은 걸 다 우리 둘이서 해치운거야?"

  "오면서 사오고, 새벽에 한번 더 편의점 갔다오기도 했어."

  그제서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편의점 문을 열던 일이 생각났다. 넘어질 뻔한 걸 카가 잡아줬던 것도.

  "기억나, 다 기억난다구. 아, 속 아파."

  "이것 좀 치우고, 해장국 끓여줄게."

  카가 식탁위에 널려있는 접시들을 개수대에 넣으며 말했다. 카의 해장국 끓이는 솜씨는 기가 막혀서, 한그릇 해치우고 나자 머리도 속도 아주 개운해졌다. 우린 비디오를 빌려보고 집에서 뒹굴며  나른한 하루를 보냈다.



  카를 보낸 저녁에 다니쉬에게 전화가 왔다.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이 좀 있었지만, 집 근처라는데 그냥 가라고 할 수가 없어서 집으로 오라고 했다.

  "어제 많이 마셨어?"

  다니쉬가 집안을 살피며 말했다.

  "응. 엄청 많이 마셨어."

  "뭘 마셨는데?"

  "페이머스 그로우스랑 맥주. 너무 맛있었어."

  난 다니쉬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거 좀 비싸지 않아?"

  "응, 더구나 별로 파는 곳도 없지. 거기 안주도 무지 비싸더군. 양은 얼마 안되면서."

  "좋겠네, 난 요즘 돈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 먹는데."

  잠시 말문이 막혔다.

  "늘 그러는 건 아냐. 카를 만나는 게 거의 2년만이었고, 졸업한 뒤 처음이니까. 다음에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르는데. 그냥, 하루쯤 과용해 본거지, 뭐. 술값도 난 얼마 안 냈어. 카가 월급 받았다고 해서."

  다니쉬는 대답이 없었다.

  "밥 굶지 말고, 혼자 해먹기 싫음 우리 집에 와.  내가 요리해 줄테니까."

  "됐네요, 부르조아 친구둬서 좋겠어."

  다니쉬는 쌀쌀맞게 말하더니 네므를 살폈다.

  "나보다 피부가 더 좋아. 신부 화장 하려면 맛사지 받아야 한다는데."

  다니쉬가 네므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니쉬는 지금 네므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다기보단 단지 나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 뿐이었다. 최근 다니쉬는 내게 온갖 사소한 것들로 화를 내고 있었다.

  "얼마나 빌려주면 되?"

  다니쉬는 고개를 떨구더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통장으로 보내줄게. 너무 많은 건 바라지 말아 줘.  내가 되는 한에서만 이니까."

  "그럼 됐지, 뭐."

  다니쉬는 재빨리 말했다. 다니쉬는 그 뒤 한 시간 정도 기분이  좋아져 내게 아양을 부리더니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내가 자신을 재워줄 기분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차를 사고 싶어서 모으던 돈이었는데….  역시 다니쉬에 비하면  내가 좀 사치스러운 걸까? 친구 좋다는 게 뭔데. 결혼 자금이  필요하겠지. 다니쉬의 부모님은 다니쉬가 성년이 되기 전부터 물질적인 원조는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서 이번이 다니쉬에게 돈을 빌려주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큰 돈을 빌려준 건 아니었지만 다니쉬는 액수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물론 언제 갚을 거라는 말도 없었다.

  다니쉬는 결혼할 사람 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그 애는 결혼식전에 미리 쓸모 없는 물건을 어떻게 버려야 할 지 모르겠다고 몇 번이나 투덜거렸다. 그 때마다 물건 버리는 걸 도와준다고 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더니 결국 어제 도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그 덕에 처음으로 그 애 집으로 가게 되었다. 집 앞까지만 이었지만.

  "학교 쓰레기통에 버릴 거야. 그래야 돈이 안 들지."

  그 애가 말했고, 난 카에게 부탁해 차를 빌렸다.

  "거기서 기다려. 내가 짐 가지고 나올게."

  "안에 들어가서 같이 도와줄게."

  "아냐, 그냥 밖에 있어. 힘들잖아. 내가 다 할게."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니쉬 입에서 날 배려하는 말이 나온 것 때문이라기 보다는….

  "나 네 인형 보면 안되니?"

  "……."

  "한 번도 못 봤잖아. 그냥 잠깐만 볼게."

  다니쉬는 내 시선을 피했다.

  "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열린 문틈으로 살짝 볼게."

  다니쉬는 혼자 집에 들어가 짐을 계속 가져다 날랐다.

  "이게 마지막이야."

  "정말 보여주지 않을 거야?"

  "지금 짐 옮기느라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져 있단 말야."

  "그냥 잠깐이면 되.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쯤 보여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결혼하면 어떡할 거야?"

  결국 다니쉬는 끝까지 날 집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우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남편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거야?"

  "그이는 내가 인형을 가지고 오지 않길 바래."

  "그래서? 버릴 거야?"

  다니쉬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쓰레기장에 도착했다. 난 차 트렁크에서 하나씩 짐을 꺼냈다. 난 아주 화가 나 있었고, 다니쉬는 내가 뭐라고 해도 인형에 대해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도 물어보길 포기했다. 빨리 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생각 뿐이었다. 다니쉬에게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밑에 깔려있던 낡은 공책과 종이들이 꽤 묵직하게 묶여 있는 걸 꺼내는데 어디 걸렸는지 잘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서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찔러댔는데, 두 손으로  짐을 꺼내느라 당장 머리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에이씨."

  팍 잡아뜯다가 공책을 묶어놓은 끈들이 풀어졌다. 공책은 푸드득 소리를 내며 대부분은 차 안에 일부는 밖으로 휘날렸다.

  "아악!"

  난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고 대상 없는 화풀이를 하며 공책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내가 할…."

  다니쉬가 집으려 했지만, 그 애를 거칠게 밀쳐내고 내가 집어 들었다. 그건 그림들을 그려놓은 연습장이었다. 그림 풍을 보니 꽤 오래  전에 그린 거 같았는데, 대부분 어린 소년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었다.

  "줘! 내가…!"

  다니쉬가 뺏으려는 걸 뿌리치고 노트의 그림을 살폈다. 사람 얼굴을 그리는 걸 연습해 놓은 것 같았다. 긴 머리, 곱슬 머리, 동그란 얼굴, 갸름한 얼굴, 커다란 눈, 가늘고 쌍커풀이 없는 눈….  난 다른 노트들을 살폈다. 내게 보여줬던 그림들, 내게 보여주지 않았으나 내게 무척 익숙한 그림들….

  "이거… 뭐야?"

  "그냥 옛날에 낙서한 것들이야."

  다니쉬가 당황해서 허둥지둥 노트들을 치우며 말했다.

  "이거… 인형을 그리는 걸 연습한 거지? 그리고, 이건 네므를 그린 거네?"

  "아, 아니, 그, 그냥…."

  등에 소름이 돋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었지? 그 시간동안 왜 난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어째서?

  다니쉬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난 그 애의 등 뒤에서 말했다.

  "넌 인형이 없었어. 그렇지? 처음부터 넌 인형이 없었던 거야!"

  "아냐! 나도 인형이 있었어!"

  그 애가 몸을 확 돌리더니 맞받아 쳤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아직 집지 못한 공책들을 넘겼다. 그 공책에도 여러 형태의 인형이 그려져 있었다. 다니쉬가 소리 친 후 뭐라 말할 수 없는 정적이 감돌았다.

  "…있었어, 라고?"

  "그래, 나도 인형이 있었어."

  그 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난, 난, 내 인형을 정말 좋아했어. 진짜로, 진짜 그 인형을 아꼈어. 그런데…,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인형이 아프기 시작했어. 살리려고 했는데, 어떡해든 살리고 싶었는데…."

  다니쉬가 울음을 터트렸다.

  "독한 비료를 줬지? 아직 제대로 다 자라지도 못한 인형에게, 너무 독한 비료를 준 거야."

  다니쉬는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언제? 언제 인형이 죽었어?"

  "내가… 10살 때."

  "왜, 왜 지금까지…!"

  난 말을 멈췄다. 다니쉬가 지금까지 나의 네므에게 했던 온갖 종류의 애정 표현들이 떠올랐다.

  난 뒷 칸에서 마저 짐을 다 내리고 울고 있는 다니쉬를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집에 오는 동안 사고를 내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열쇠를 따고 들어오자 마자 거실에 있는 쇼파에 거의 쓰러지듯이 누웠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로 날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래 친구들이 인형을 잃어버리고,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고, 죽이기 시작할 때도 난 나의 인형을 소중히 간직했다.  점점 인형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지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가면서도,  난 나의 인형을 사랑했다. 어딘가에 나처럼 인형을 사랑하고, 내 이야기에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한 순간도 그걸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거라고….

  눈을 감으면 다니쉬와 나누었던  인형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앤 언제나 어떻게 해야 인형에게 잘 해줄지, 인형이 먼저 죽는 것이 아닌, 내가 죽은 후 인형의 생도 마감됨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다니쉬는 인형이야말로 유일하게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해왔었다. 나도 그랬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인형만이  유일하게 서로를 계산하며 만나지 않는 관계이며, 인형만이 유일하게 내가 모든 애정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존재라고.



  너무 피곤했지만,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만 했다. 난 집밖으로  나와 수퍼에서 가장 날이 좋은 식칼과 하얀색 목욕 타올을 하나 샀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공들여 몸을 씻고, 새로 산 목욕 타올로 몸을 감싸고 나왔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고 있었다. 해가 지는지 창밖으로 붉은 빛이 들어와 네므의 몸을 감싸안았다. 나의 네므는 달빛을 받을 때가 제일 예쁘지만, 굳이 기다리지는 않기로 했다. 난 네므를 들어 올려 침대에 누였다. 네므는 너무 가벼워서,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를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네므는 잠에서 깨어 다정한 갈색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나의 네므에게 입맞췄다. 네므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난 네므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는 네므의 결좋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 입맞췄다. 어느 순간 난 식칼을 네므의 가슴에 꽂았다. 네므의 눈이 공포와 고통으로 커다랗게 벌어졌다.  네므는 저항도 하지 않았다. 팔을 움직여본 적도 없는 양,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난 네므의 이마에, 눈에, 입술에, 뺨에, 목덜미에  입맞추며 계속 네므의 몸을 난도질했다.  팔이 아파질 무렵 네므의 차가워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절대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울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미 내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침대가 시뻘겋게 피로 물들고, 팔에 감각이 없어지도록 난 네므를 찌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차 고마웠어."

  카가 차를 몰고 집에 가야했기 때문에 우리는 커피점에서 만났다.

  "너, 옷차림이 그게 뭐야?"

  카가 멍청한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다.

  난 딱 달라붙는 검은 가죽 바지에 부츠를 신고, 어깨와 배꼽이  들어 나는 탱크탑에 배꼽 옆에는 작은 꽃잎을 그려놓고 있었다. 입술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붉은 색으로 칠했고, 머리는 무스와 헤어젤을 이용해 마치 분수처럼 솟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커피점에서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봤다.

  "아, 변화를 좀 주고 싶어서."

  "왜 그러는데?"

  "나, 인형을 죽였어."

  난 어깨를 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왜?"

  "이 세상 어디에도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할 만한 대상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

  난 빙긋 웃으며 담배를 꺼내고 최대한 쾌활하게 말했다.

  "마음이 아주 홀가분해. 그런 집착따위, 진작에 집어치웠어야 했는데. 침대가 아주 엉망이 되어버렸어. 침대 위에서 죽였거든. 새로 산 식칼로 말야. 정신을 차려보니, 아, 아니, 일을 마치고 보니, 형체도 알아볼 수 없더군."

  머리만 빼고 말이지. 그 머리도 난도질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난 네므의 잔영과 침대 커버와 내 몸을 싸고 있던  천을 모두 불에 태웠다.

  담배를 다 피우도록 카는 말이 없었다.

  "넌 안그러길 바랬는데."

  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뭐?"

  "모두들 인형을 죽여.  잃어버리는 것도 결국은 죽인 거야. 너만은 계속 인형을 간직하길 바랬는데."

  "인형을 아직 안죽이고 있다고 계속 구박한 건 너였잖아."

  "그래도 버티고 있는 널 보는 것이 좋았어."

  카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말했다.

  "어렸을 때, 아침에 학교에 가려는데 인형이 보석을 찢고 나오려  했지.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제대로 나오지를  못하는 거야. 다급해진 나는 어른들의 말씀도 무시하고 손으로 보석을 찢었어. 그 날 난 결국 학교에 가지 못했지. 내 인형은 한 시간도 살지 못했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힘들게 숨만 쉬고 있었지. 천천히 호흡이  느려지고 완전히 멎을 때까지 계속, 계속 인형을 지켜보고 있었어. 나의 인형이 그토록 허무하게 죽어버렸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어."

  10년이 넘도록 카를 봐왔지만, 그 애가 우는 건 처음 보았다.



  카와 헤어져 돌아온 집은 너무나도 휑했다. 침실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아니, 들어갈 수가 없었다. 빨리 새 집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고 아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소파에 누워서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참아 냈다. 이 빈 공간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겠지만, 그 대가로 난 다시는 울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아진
댓글 2
  • No Profile
    양소년 03.12.08 23:26 댓글 수정 삭제
    와... 잘 읽었습니다. 멋져요. 여러가지 의미에서 재미있었습니다.
  • No Profile
    아무 10.04.02 15:06 댓글 수정 삭제
    마지막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나의 인형. 하지만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못하다니. 완벽한 소유물인가요.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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