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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무엇을 먹을 것인가.

2003.07.22 00:5307.22

                            무엇을 먹을 것인가.




  "내 허리에서 손떼요!"

  매몰찬 여자의 눈. 지금 분명히 회상하면ㅡ그렇게 보였다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만
이해하는 내게 : 그녀는 매몰차게, 또 자신도 깜짝 놀라서! 그 소리에? 제 스스로의 목
소리에? 또는, 갑자기 찾아온 특별한 소식에ㅡ놀라서. 눈을 치켜뜨고, 놀람, 소스라
침, 미숙함으로 치사량의 소금물을 들이키듯 소리친다. 몸을 뒤틀며 내 가슴을 밀어냈
다……분홍 꽃밤이 허옇게, 멈춰 선 채로 굳어 버린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여자의 등 뒤를 덮쳐 목을 누르고, 깊이 숨을 들이 삼키운 다음
발목을 꽉 움키고 처음부터 다시, 하던 일을 다시 한 번 시작하는 것이다. 침대 속으로
싱싱한 물고기를 푹 밀어 넣는 일이다……골반으로 흘러내리는 선에 손을 대면 기분
좋은 물컹임이 가슴을 흔든다, 허리의 뒤틀림이 가슴을 흔든다, 이 달콤한 냄새ㅡ이런
저런 조합 물로 살내음을 장식하고 새초롬히 눈 치켜뜨는 여자, 가슴이 흔들린다, 이
기쁜 밤이라니. 서울의 밤이라니.
  이런 식으로 다정한 친구를 사귀게 되는 것이다.

  새로 얻은 병을 구실 삼아 내팽개친 직장의 옛 상사가 열아홉 살 된 어린 여자를 한
번 건드린 일이 있는데, 아마도 그 여자가 상사를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에게 소개했던
모양이다. 그 후 상사는 그니들을 다시 내 옛 동기 同期 들에게 소개하고, 내 건강한
동기들은 이 시대의 기묘한 병에 전염 되고ㅡ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현대의 도시에서
는 이런 식으로 우정이 전파 된다, 느긋하게ㅡ전염 되어 간다. 반짝이는 밤거리에서,
반짝이는 술집에서, 반짝거리는 락 바 Rock bar 에서. 빛방울을 매어단 이이들 모두
가 아름답다, 일렁이는 가슴 모두가 아름답다. 이거 바요, 하고 여자가 어찔한 목소리
로 소리친다. 이거 바요, 이거 좀 바요, 문제가 있는 화장실처럼 들큼한 냄새가 퍼지
고, 술 탓인지 번쩍이며 조각나는 공간 때문인지, 소리가 깨어져ㅡ귓가에서 흩어져 어
깨 위에 나린다 : 이걸 좀 봐, 여기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천국이라구!

  그녀는 시꺼멓게 조각나는 천국의 요정이다. 이 여자를 보기만 해도 흥분이 된다, 그
녀의 혓바닥을 봐! 가장 예민한 속눈썹 사이로 파고들며 헤엄치는 버들치 같다, 길고
납작하고, 지저분한 암갈색의, 사랑스런 버들치. 입맛을 가리지 않는 잡식 인어. 갑각
류를 씹고 곤충류를 삼킬 테다. 이미 똑바로 설 수도 없는 걸음걸이로 휘청, 아무 가슴
이나 어루만지는 천국의 요정. 그녀를 따라 날카로운 계단을 오르고, 그녀를 보석 거
리로 이끌며 지껄대는 입술에 매혹 된다. 안타까운 병고 病苦 여ㅡ나는 고민스럽게 몸
을 추스르며 거리에 늘어선 가게들 중 하나를 골라낸다. 가장 아름다운 입구를 찾고,
가장 간단한 예식을 끝낸 우리는 기쁜 신혼부부처럼 서로를 매만진다. 이제 그녀의 치
골을 쓰다듬고픈 유혹에 저항할 필요가 없다, 간지럽다는 듯 엉덩이를 비틀어 보이는
그녀의 즐거운 미소, 모두가 기쁜 하룻밤이다. 모두가 다 행복해 보였다.
  나로 말하자면, 오랜만의 식사를 마주한 대식가, 행복한 미식가, 새로운 도시병에 시
달리는ㅡ즐거운 환자다.

  놀이에는 나름의 창조와 노력이 필요하다. 입 벌리는 상처에 다정스레 키스하는 일
로 요정을 개구리로 만들거나 또는 반대로, 거북이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연
기는 종막의 한 장면, 최후의 연출을 위해 이루어진다……모든 감정이 정점에 달하는
최후의 일 초에 집약 되도록 신중하게, 또는 추잡스럽게, 또는 유쾌하게ㅡ촉촉한 애두
름을 걷듯이. 폴리에스테르 polyester 같이 매끈거리는 몸뚱이, 소리와 땀과 기쁨의
화관 花冠 을 뒤집어쓰고 버둥대는 요정, 흔들리는 감정은 공중에 나려진 빛방울에 젖
고, 우리들은 붉은 등빛에 휩싸인 구름 속에서 뒹군다……어떤 식으로 나체가 되는가,
어떤 방법으로 나체를 마주하는가 따위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픈 사람도 있을
테다. 이 역시 도시병, 무척 오래된 도시병일 테지. 석탄처럼 타오르는 여자들이나 노
랗게 반짝이는 허벅지, 발작적인 격정과 암사슴의 비명 같은 것에 흥미를 느끼는 이도
있을 테다. 그러나 내 동료들이라면, 나와 같은 서울의 밤 사냥꾼들이라면. 좀 더 실용
적인, 도움이 될 만한 세부적인 이야기에 더 관심을 보일 것이다……멋들어진 송곳니
를 내세우는 영화 속의 백작님, 우리들의 우상 드라큘라가 선사한 기막힌 흡혈의 재주
를 익힐 수 없는 내가 어떤 식으로 그녀의 목을 탐닉했는가.
  평범한 성인 남성만큼만 송곳니가 자란 나는 여자의 목을 핥고, 그 내음에 취하고,
키스하고ㅡ그뿐이다, 어쩌겠는가. 의치라도 심어야 할까? 날카롭게 갈아서?
  나는 좀 더 다양한 기술들을 익혀야만 했다. 정맥과 동맥을 구분해 내고ㅡ아니 이런
건 상관없지만. 어느 부위에 키스를 하는가, 이건 중요하다. 손목, 맥박을 느끼며 입
맞출 자리. 가슴, 심장이 펄럭이는 걸 느껴 봐! 그리고 역시, 목덜미. 멋지잖아? 가느
다란 허리부터 발목으로, 다시 등줄기를 따라 목에 이르는ㅡ젖과 꿀이 흐르는 길, 내
혓바닥은 행복에 취한 여행자, 기아에 허덕이는 탐색자, 마침내 잔칫상을 내어 받은
거렁뱅이처럼 헐떡이며 포식한다.
  "이거 좀 바여ㅡ" 그리고?
  "내 허리에서 손떼요!" 아니 아니, 난 목을 핥고 있는데.

  "큰일 났어요! 피가ㅡ" 아니 분명, 나는 피도 핥고 싶지만.

  내 핸드백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침대 밑을 찾아 봤어? 도와주세요, 다시 피가
나와요! : 사랑, 증오, 절망과 연민과 분노? 황홀한 냄새를 풍겨 내는 고깃덩이를 앞에
두고 환희의 의미를 아는 영원한 청년이 거듭 방귀를 뀌어 대는 소란? 한참을 부산하
게 지낸 다음에야,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밤의 침대 위에 놓여진 이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그녀가 진정 되고,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ㅡ진정이 된 다음에. 이봐 너, 다리 사이에 뭘 끼우곤 거드름 피우지 마!
  ……어떤 얼굴을 했느냐고?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개를 상상하면 좋다, 검둥개라면
더욱, 어울릴 테다. 컹 컹.
  "내 인생은 언제나 이 모양이라니까요. 아니, 어쩌면ㅡ아저씨들이 사 준 싸구려 술
때문일지도 몰라, 아직 시작할 때가 아닌데. 난 항상 이 모양이라니까."
  나 역시, 항상 이 모양이어서 배고프다. 병을 앓기 시작한 후론 항상, 계속해서 배가
고파.  "……그렇다구. 한심하지? 그러니까 그런 건, 별 게 아니야."
  "아저씨, 병 있어요? 아ㅡ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화내지 마, 네가 생각하
는 그런 거 아니야, 성병도 아니고 전염 되는 것도 아니라구."
  타오르는 태양을 들이키는 황홀감이 사라지고, 전쟁과 질병, 잔혹한 공포가 나타나
고 : 다시 어리둥절, 서로 간의 의사소통, 기타 등등 etc, 이거 봐, 난 병에 걸렸지만
조심하면 전염 되지는 않아ㅡ라고 설명하는 새에 두 사람 다 눈이 또롱해졌다.
  여하간의 배고픈 밤이 연장 될 모양이라 한심하지? 내가 익힌 새로운 재주에 관한
이야기를 고대하던 친구들은 한층 더, 한심해질 테다. 뭐 어쨌거나, 나는 포르노 소설
의 주인공이 되고픈 마음은 없으니까 잘된 거야. 이건 말하자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에 관한 평범한 성인 남자의 고민 상담이지 외설적 타성과 공포에 잠입해 다독이며 어
떻게 뒹굴어야 하는가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구.

  창조적 정신과 어여쁜 물고기와 서울의 사타구니에서 길어 올리는 한 줌 포만의 밥
상이 물려지고, 필사적인 굶주림의 정신이 되돌아오고ㅡ비명 지르는 장면에 딱 어울
릴 두 사람의 배우, 처음 십오 분 동안 사랑에 빠지고 나머지 사십오 분 동안 줄창 싸
움만 하는 주인공들을 달래는 데는 역시 맥주, 맥주, 벌거숭이 두 사람이 들이키는 맥
주. 어설프게 취한 머리를 앗찔하게 만드는, 차가운 맥주. 그리고? 이런저런 넋두리.
  균열이나 구멍 같은 건 완전히, 잊어버리자.
  "나는 말이에요, 연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대단한 인기 배우. 김희선 말고, 있잖아
요? 나는 그러니까, 이영애 같이. 잘 아는 영화감독도 있구, 잡지 모델을 한 적도 있
다구요. 나를 칭찬하는 기사도 있었어요, 사진 아래 조그맣게 두 줄, 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연예인이라구요. 그런데 아저씨는 뭐 한다구요? 에, 백수예요? 병 때문에 퇴직?
그렇게 심한 병이에요?"
  "배고픈 병이지 뭐. 나는 아직 멀쩡해서, 식이요법 중인 거야."
  "당뇨병 같은 건가 보네?"
  "먹을 걸 마음대로 고르지 못한다는 거, 꽤 괴롭다구. 항상 배가 고파."
  "특히 밤에."
  "특히 밤에."
  두 사람이 서로의 경험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순간, 특별한 우정이 태어난다.
  이제야말로 친구가 되는 것 같은 기묘한 감상, 이제 처음으로 손을 맞잡는 것만 같은
신기함. 과연 서울의 우정이란 한 걸음 늦게야, 네 다리 밑의 안타까운 비명이 터져난
후에야, 암담한 낭떠러지에서 기어오르듯ㅡ가슴에 도착한다.
  "……키스하고, 벌거숭이로 한참을 뒹군 다음에야 말이야."
  "그렇네 정말. 있잖아요, 내가 연예인이라는 거 거짓말인 줄 알아요? 나중에 잡지를
보여 줄 게요, 내 사진이 실린 잡지."
  "그럼 다음에 또 만나 줄 건가?"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새 옷이 필요해요, 이런 누추한 옷으로는 힘들다구요.
그리고 아직 카드 빚이 좀 있구……너무 웃기는 얘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전에 만난 사람 중에 빚 갚아 주겠다던 사람이 있었는데……"
  인생담 사이사이ㅡ사해 死海 에 뜬 시체처럼 가볍게ㅡ각자의 고민거리가 떠오르고
우정이 깊어 간다, 도시의 우정이란 언제나 중요한 기회를 동반한다. 주의 깊게 잘 듣
다 보면 멋진 제안이 숨겨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거꾸로 나는 비둘기가 땅으로
들이치듯, 손바닥 위로 낙하하는 이야기들이다ㅡ이걸 봐! 그녀는 마치 이십 세기의 프
랑스 여배우처럼 이야기를 하잖아? 자신이 미인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어, 눈
길을 끄는 재주도 있고! 내 심장은 그녀의 혓바닥에 두들겨 맞는 종이다, 소리는 심장
속에서 춤을 추며 울린다.
  "아주 재미있었어요, 나는 그때 매일 같이 학원엘 다녔는데……"
  눈을 감은 채 듣고 있으려니 한낮의 파란 하늘처럼 여러 겹으로 가슴에 스미운다.
  가끔 말이 막히면 결국, 저기……따위로 말을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봐요ㅡ
듣고 있어요? 라며 신경질도 좀 부리고, 이런 식으로 그녀의 인격이 천천히 가슴에 스
며드는 것이다. 그녀의 살음은 바람 때문에 출혈하고, 그 피는 이불을 물어 찢는 소리
를 내며 일상에 젖어들고, 흠뻑 젖은 일상은 부어올라 서울 밤거리를 부유하다 마침내
는 대학로나 종로 구석의 여관방에서 스러진다.
  어쩐지 그녀의 살음을 전부 알 것만 같은 기묘한 환상에 시달렸다……피 흘리며 부
어오른 그녀의 일상이 끊임없이 나의 신경을 두들기고, 기묘한 악의가 함께 부풀어 오
르고, 신경이 점차 날카로워지고,  "피 냄새가 나."  "……징그러워."
  이 미묘한 내음, 가슴이 다시 뛰고ㅡ완전히 진정된 줄 알았던 식욕이 다시, 땅바닥에
내쳐진 가물치처럼 펄떡대며 허리를 깨운다. 허기가 가슴을 에워 낸다, 작열하는 불꽃
이 코앞에 놓여 있는데, 연민으로 산란 散亂 해진 배고픔이라니.
  "징그러워, 나이 든 사람 같아. 몇 살이에요?"
  "아니, 이젠 영원한 청춘이야."
  "웃겨, 진짜 웃겨요 아저씨."
  "진짜로 즐거운 일을 하자구."
  "나 빈혈 있어서, 힘들다구요."
  이 또한 괴로운 병일 테다. 빈혈 환자를 붙잡고 식욕을 채울 수는 없다. 나로 말하자
면, 온건하고 평범한 남자다……달리 방법이 없어 얌전히, 사이좋은 자매처럼 부드럽
게 끌어안고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나는 식탁 위에서 길을 잃은 망령처럼 밝게
빛난다ㅡ동시에 나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남자다, 한 순간 재로 변해 버리는 심장을
상상의 철벽으로 감싸 둔 서울의 밤 사냥꾼이다……곧 다시, 빈곤한 배를 잊고, 시작
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처음부터 다시,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한다.
  천천히, 휘어지는 허리나 꿈틀거리는 목줄기를 탐닉하며 서늘한 한강의 노래를 불렀
다. 가뭇한 그녀의 가랑이를 노래하고 시야에서 멀어지는 환희의 순간을 몇 번이고,
노래했다. 서로의 배꼽을 찾으며 아침이 찾아 들 때까지 몇 시간이고, 곰틀곰틀거리
며 부둥켜안고 뒹굴었다……

  나름대로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병이 든 뒤에서야, 서른이 되어서야 밤의 사냥에 눈
을 뜨고, 백수의 넘쳐나는 시간 대부분,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 거의 모두를 사냥감
찾는 일에 쏟아 부으면서도 나는. 정말이지 아직까지도, 마땅한 사냥감을 고르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 이런 일에도 그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익숙함이, 실
패에 익숙해지는 뻔뻔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료들과의 논의에서도 이렇다
할 기술을 배울 수 없었고, 이건 또 당연하다 싶은데ㅡ누구인들 제 먹잇감을 멀쩡한
남에게 넘겨주고 싶을까. 게다가 이 바닥 동료들이라는 게 죄 라이벌인 셈이어서 또
괴롭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견고한 벽과 두터운 빗장과 철문 뒤에 숨겨 두고, 독
설을 문지기 삼아 방비하는데 : 이와 똑같이 통렬한 풍토의 도시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 치고는 무척 졸렬하지 않은가. 비밀 엄수야말로 그들의 표어이다. 가끔, 동료들
이 모이곤 하는 카페에 가도 마땅한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제 마당에 남 들이는 걸 무
척이나 싫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나처럼 딱 알맞은 사냥터를 결정하지 못한 초보
사냥꾼들을 지독하게 놀리거나 아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이들도 있어 슬프다.
  한동안 허기를 다스리지 못해 벌게진 눈으로 안달하며 길바닥을 헤매이기도 했는데,
이 꼴을 안쓰러워 한 아버지가ㅡ나를 이 길로 끌어들인 고참이 특별한 방법을 알려 주
어 겨우 겨우 이 일로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무척 한심하고 안
타깝다. 내 나름으론 이런저런 책을 뒤지며 공부했는데.

  "우리들은 말하자면 바람둥이인 거지만, 처음에는 역시 한 사람을 꽉 잡는 게 좋아.
한 번에 다 삼키지 말고, 두고두고 만나면서 공부하는 거야. 좀 익숙해지고 이것저것
잘 알게 되고, 기술도 늘고 하면, 그 다음에 이 사람 저 사람 건드리면서 지내는 거지.
그 즈음이면 나름의 사냥터도 생길 테고 말이야."
  "아, 그렇네요! 왜 그런……아니, 그렇지만 그건 역시, 처음 말 붙이는 일부터 시작하
는 건 다를 게 없잖아요? 그걸 힘들어하는 건데……."
  "어쩌겠어? 천천히 기술을 익히라구, 그러다 보면 아주ㅡ쉬워져."
  그 가을 끝물이 다 빠질 때까지 고생하다가, 겨울 첫 물이 들 즈음에는 자주 연락을
하는 여자가 생겼고, 핸드폰에 세 개 정도 되는 번호를 항상 저장해 둘 수도 있었다.
  사냥꾼으로써 나름의 모양새가 잡혀 갔는데, 이 모든 일들이 초보 밤 사냥꾼의 일률
적인 시간표에 따라 행해지고 있는 듯도 하다. 이 시간표란 틀림없이 미치광이, 혹은
기묘한 취미의 마니아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냥꾼들이 밤거리를 뛰어다니고
있다, 핸드폰 벨이 울리고ㅡ사냥감을 향해 돌격!
  ……이런 일들이 서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모의전을 겪으며 초보
밤 사냥꾼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라든가 좀 더 예술적으로 목을 핥는 일, 등골을 쓰
다듬으며 혈맥을 찾는 기술에 대해 능숙해져 간다. 도시적이고, 계획된 일정의 일부이
다. 조금만 더 진지하게 일정표를 연구한다면 나 역시, 나만의 사냥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달 없는 밤에도 눈에는 희망의 빛을 띄우고, 씩씩한 걸음걸이로 사냥감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다가간다……가끔, 아무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는 밤이면
허기에 못 이겨 허리를 움켜쥐고, 거리를 배회하는 일상이 연이어질 때도 있다.
  작은 난로 하나만으론 추운 날들을 버텨 낼 수가 없다. 적은 수의 난로에 기름이 항
상 차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신중히 관리를 해야 하고, 상태가 좋지 않은 난로가 여럿 겹
치면 아예 몇 날이고 꽁꽁 언 가슴으로 밤을 버텨야 하는 것이다……버들치를 만난 건
그 즈음이었다. 그 건강하게 들뛰는 혀에 장난스레 붙인 별명을 그녀는 모른다. 이건
말하자면, 나만의 비밀스런 농담일 테다. 버들치, 곤들메기, 두만모재, 감돌고리. 네
명으론 역시 훌륭한 사냥꾼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서울 사냥꾼 특유의 수다를 터뜨리며, 사냥감을 물색하고 태양이 새로 태어나기 전
에 배를 채우기 위해, 언제나 포만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역시 확고한 나만의
사냥터가 필요하다. 기술 연마에 힘써야 할 텐데, 나라는 사람은 딱 내키지 않는 일에
노력을 퍼붓는 성격이 아니라 진보가 느리다. 결국 실제로 침대가 따뜻해지는 밤이 연
이어 찾아오지 않는다. 배가 고프다. 그뿐이다.

  버들치의 얘기로 돌아가자.

  나는 버들치가 굉장히, 마음에 든다. 열정에 찬 키스 끝에 살짝 갈라진 입술, 이 입술
에 슬그머니 맺힌 핏방울이 사랑스럽다. 위 아래로 피내음 흘려 내는 그녀는 그날 밤,
기름이 잔뜩 채워진 난로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나는 더더욱 배가 고팠지만, 어쨌거나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 겨울 한 철을 넘겨 낼 먹이를 획득한 짐승의 충족감일 테
다. 소소한 카드 빚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버들치는 기꺼이, 나만의 조상 彫像 이 될
것에 합의한다. 밤새도록 키스만 하는 조각가와 기름이 덜 채워진 난로는 한 잠도 자
지 않고 밤을 보낸다……

  그날 아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자.

  햇빛이 나면 우리들의 모습은 돌변한다. 어쩌면 좀 더 인간답게, 서울 시민답게 보인
다고 할 수도 있다. 사냥꾼 특유의, 노예와도 같은 중독 상태가 사라지고 자신의 모든
것이 순수한 환상, 하룻밤의 꿈ㅡ그리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사병처럼, 혐오스러운
발톱을 감춘 채 끈적거리는 침대에서 헤엄치듯 잠들거나 서울 일상의 가장 번화한 거
리로, 강남역이나 롯데 백화점으로, 바쁜 사람들의 물결 위로 떠오르는 상상을 한다
……아침이라는 게 우리 밤 사냥꾼들에게는 솔직히, 반갑지 못한 때이지만. 이 기묘한
도시병을 앓는 우리들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시간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어떻게든, 쾌
활하게 넘기려 하지만. 그러나 그 아침에는 미묘한 풍요가 가슴 우물을 채우고 있었
다. 이 기묘한 만족감ㅡ배는 여전히 고프지만, 겨울을 넘겨 낼 식량이 생겼다는 충족
감이 그 아침의 나를 행복하게 했다.
  "너무 졸려서……저기, 안 나가고 자면 안 돼요?"
  "밤이 우리에게 되돌아올 때까지, 내 사랑. 죽는 것처럼 잠에 빠져 들자……."
  "진짜 웃겨, 아저씨."
  우리들은 나란히 누워서, 손을 꼭 잡고 한참 키득거렸다. 서로가 질리도록 부둥켜안
고, 온몸 구석구석을 맛 본 후에 손을 잡고 두근거리다니 웃겨, 두근거림이니 설레임
이니 어딘가 웃겨, 괜히 애달파서 진짜, 웃겨. 유행가 가사 같다.
  "응, 이상해. 그치만 아저씨 좋으니까."
  "행복의 요소는 많이 있어. 예를 들면, 열이 가해진, 기름이 꽉 찬 난로 같은 거. 꼭
끌어안곤 살아있는 몸뚱이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거야. 당연해."
  여하간이랄까, 이 기괴한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아침이란 무척 괴로운 시간이다.
흐리멍덩하게 방치해 두었던 머리가 말끔히 개이고, 각자의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나
며 한심한 병고에 시달리는 제 자신을 동정하게 된다……온몸에 넘쳐흐르는 꼴사나
움, 사람답지 못한 일상의 슬픔이 피부에서 바삭바삭 일어선다. 턱 밑의 솜털이 가시
로 돋치는 걸 매만지며 위안을 얻을 때도 있고, 살아남은 여자와 키득거리며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천장에서 부슬부슬 떨어져 내리는 빛줄기며 어설픈 자학,
그런 것들이 곁에 잠든 버들치까지 물들여 버린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조각조각 눌어
붙은 햇빛거울에 비춰지는, 전신이 기묘하게 연결 된 자신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고기 거울에 제 모습이 비춰
지면 자학할 수밖에 없다. 지난밤에 각자가 흩뿌려 놓은 바람이 새겨진 거울 조각이
다. 이 또한 한심한 병고일 테다, 거울 조각에 베인 가슴이 서걱대며 아물 때까지, 느
긋하게 잠이라도 자며 기다려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어도, 화 내지 말고
함께 있어 줘, 다정하게 대해 줘, 나도 반드시ㅡ그렇게 할 테니까, 라면서.

  그 겨울이 시작될 무렵을 기억한다. 내 밤의 일상이 무척 바뀔 즈음이었다.
  동료들이 모이는 카페를 기웃거리거나 길거리에서 헌팅을 하는, 쓸쓸한 시절이었다.
가끔 마음 맞는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 언제나, 영화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영화, 또
는 유행하는 옷차림, 아니면 여자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
냥꾼들은 듬뿍 배를 불린 채 히죽거렸고, 나는 대게 퀭한 눈으로 번들거리는 동료들의
입술을 부럽게 쳐다보곤 했다. 가끔은 나도, 포만해진 배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들의 어투는, 두 번 다시 사람다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듯 당당하고 느긋했다.
  우리들이 모이곤 하던 카페의 벽에는 언제나, 막스 쉐릭이나 벨라 르고시의 포스터
가 붙어 있었다. 우리들은 밤새도록 서울의 죄악론을 떠들었다, 이 도시가 우리를 미
치게 만드는 거야, 이 영화들이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거야. 두서없는 이야기들은 도
시와 뱀파이어 영화, 그리고 여자들로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이어졌다. 버피 더 뱀파
이어? 웃기지 마, 그건 컬트 유행이야. 진정한 뱀파이어라면 역시 게리 올드먼이지.
오, 이런ㅡ크리스토퍼 리를 잊지 마! 음흉한 사기꾼 뱀파이어야말로 우리들의 본 모습
이라구, 서울 밤거리의 사냥꾼이란 결국……
  "아니, 그렇지만 나는 피터 쿠싱 같은 건 만나고 싶지 않거든. 사기꾼의 종말이란 대
체 언제나 비슷한 거잖아? 슬그머니 다가가 뒷덜미를 물어뜯는 사냥꾼이어야 해, 대
결 구도는 지긋지긋하다구."
  "그렇다면 역시 게리 올드먼이지, 당신을 만나러 시간의 대양을 건너 왔소……"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거대하고 미끄러운 그 무엇, 육중하게 문을 밀어
붙이는 듯한 소리, 결코 나를 찾지 못하리라, 신이시여 그 손이 창문을ㅡ"
  "웃기지 마, 크툴루 Cthulhu 가 아니라 드라큘라 Dracula 라구."
  "이니, 미니, 마이니, 모, 입력, 출력, 나가ㅡ꺼져라!"
  "안타깝군, 여기에는 작은 스위치도 위대한 창조자도 없다구, 흡혈귀뿐이야."
  우리들의 대화에서 유일하게 고립된 인물이 바로 막스 쉐릭이다. 언제나 카페의 벽
을 장식하는 포스터의 주인공, 그의 연기 속에 모든 사냥꾼의 모습이, 과거와 미래, 현
재가 새겨져 있다. 그는 우리들의 서울에 존재하는 모든 사냥꾼을 그 연기 속에 모두,
모두 다, 표현하고 있다……노스페라투야말로 우리들 영혼의 본 모습이리라! 영상으
로 드러난 최초의 사냥꾼이다ㅡ서울에서 완전히 해독된 소박한, 사냥꾼의 형상이다
……발가벗기면 기발한 외양, 경직된 몸짓으로 으쓱거리며 미치광이처럼 키득대는,
촌스럽고 기괴한ㅡ정말이지 아주 조금이라도, 동정할 수 없는 악당. 우리들의 경외하
는 노스페라투.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서글프다, 우리들은 누구나, 제 모습이
어디까지 비뚤어지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들 사냥꾼을 불멸의 짐승으로 만드는 것, 이 멋진 정신이 사랑이
라는 말로야 나타난다는 것에 동의하고, 노스페라투 따위 완전히 잊어버리면서, 서울
이 사랑으로 포화 상태가 되어 있고 이 도시가 풍만한 살과 피로 충만해 있으며 거리
는 사냥감으로 가득 찬 복된 땅이라는 것에 환호한다……
  서울이 간직한 자유롭고도 건강한 사람들ㅡ바로 그것이다! 우리들이 누리는 모든 사
랑, 여기에 다시 지루한 일상과 보편의 성실을 서울의 상표처럼 매달은 존경할 만한
직장인들, 무엇보다 특별한 직업여성들의 맑고 부드러우며 단조로운 태도는 우리들
의 기갈을 일깨우는 행복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이런 대화에 지치면 나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느긋한, 산책을 하는 듯한 걸음걸이
로, 쇼윈도나 버스 정류장 앞에서 서성이는 여자들을 탐색했다. 그런 겨울이었다.
불쾌하고 음습한 추위가 몸을 달구고, 시시한 일상, 시시한 배고픔에 저항하며 눈을
번뜩이다 과연 지금까지 만나 본 적 없는 기록적인 추위에 시달리곤 했다. 서울의 겨
울, 사냥꾼의 겨울, 아ㅡ사냥꾼의 겨울이라니. 성실한 직장인들은 알 수 없는 추위다.
좀 더 감상적인 것이다. 좀 더, 직접적인 것이다……몸과ㅡ마음이 동시에 느끼는, 기
괴한 겨울이다. 도시 일상의 견고한 방어, 통렬한 생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기술
을 터득한 여자들이 쌓아 올린 벽을 허물고 창문을 열고, 악의와 독설과 포학으로 채
색된 일과에 사랑을 덧칠하는 것, 엉겁한 감정들로 방어 되는 가슴 우물에서 내가 퍼
올리는 것을 봐라! 여전한 일상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상처에서 꽃피가 뿜어져 나는
것을 봐라! 우물의 위치를 찾기 위해 옷깃을 풀어헤칠 필요도 없다, 익숙해져 가는 손
짓에 따라ㅡ손가락 닿는 그 자리, 가슴이 뛰는 그 자리, 갈비뼈로 보호 되는 바로 그
자리……사냥감을 꿈꾸는 고독한 거렁뱅이가 내미는 손끝에 힘차게 펄떡이는 심장이
놓여지고, 한파 한가운데 뜨겁게, 타오르는 난로가 나타나리라.
  여자들, 여자들, 여자들이 나를 살찌워 갔다.

  배가 고프지 않을 때, 또 동료들과의 허황한 논의로 지치는 것도 지겨울 때면 책을
뒤졌다.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ㅡ기갈을 피하기 위해서도ㅡ나는 여러 가지 자
료를 그러모았다.
  예를 들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뱀파이어 레스타, 저주 받은 자들의 여왕. 새로운
유행의 흡혈귀들. 흥. 느긋한 귀족들의 세계일뿐이다. 아ㅡ레스타, 레스타, 레스타.
  유럽의 슈퍼맨 연대기를 통해 내가 야성의 들판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졌다는 것을 깨
닫게 되었을까? 북위 37. 33' 어딘가에 놓여져 있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휘황한 간판 아래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을 표류해야 할 테다, 끝없는 소란과 협
소한 일과 日課 , 막막한 거리 속에서, 완벽한 정적이 찾아올 때까지ㅡ역겨운 공포에
숨 막혀 하며 외롭게, 불쌍하게, 영원한 청춘을 누리며.
  영원한 청춘? : 슈퍼맨 레스타가 보여 준 환상일 뿐이다.

  만약 내가 정말 레스타의 대사처럼 슈퍼맨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면, 영원히 변하
지 않는 감성을 지니고 있다면, 위대하고 놀라운 흡혈귀라면……이 노예에게 베푸는
것과 같은 교육은 무엇을 일깨워 줄까? 아버지가 내게 권했던 최초의 식사는ㅡ그건
정말 예쁜, 너무 예쁜 양진이였다. 손아귀에 잡혀 파들대는 양진이, 내 작은 새야 노래
하렴……웃기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는 얘기다. 손아귀에 딱 들어오는 새의 어디를 물
어뜯으라는 거람? 뭐라 해도 나는 평범한 성취향의 남자다. 느닷없이 디밀어지는 작
은 새를 물어뜯는 기술은 배우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해서, 느닷없이 양진이
의 머리를 덥석 베어 물 수가 있을까?
  담배를 한 갑 한꺼번에 피우고, 연기로 배를 치우는 것이 낫겠지.
  그래서 다시 손에 들어온 식사가 고양이……고양이, 고양이. 내 아버지로 말하자면
대단한 잡식가인 듯하다. 도무지 가리는 음식이 없는 모양이다. 양진이 다음에는 얼룩
고양이, 그 다음에는 뭘 권할 지가 대략ㅡ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말하자면, 괴물이 아니잖아요. 좀 더 사람다운 게 먹고 싶은데요."
  "……백 년 사이에 최고로 웃기는 농담이었어! 내가 정말 사람 잘 봤다니까."
  사람다운 식사, 오ㅡ그래, 있어. 첫 사냥 치곤 제법 괜찮은 거물이 있다구……어쩌고
저쩌고, 기타 등등의 아들 다독이는 이야기는 지독하게 더러운 농담이었다.
  마로니에 공원 화장실에서 자 보라구, 거기에 가면 친구도 생기지. 가을이니까 비 내
리는 날이 좋아, 연인들처럼 꼭 부둥켜안고 자는 사람들이 있어. 그 사이에 섞여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는 거지……그래요 아버지, 내가 들은 농담 중 최고였어! 빌어먹
을, 이란 농담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거리에 나서 보라ㅡ청결하고 향긋한 과일들이, 갓 내온 따뜻한, 혀가 녹아날 듯한 국
물이 담뿍한, 기가 막힌 사냥감이 흘러넘치지 않나? 텔레비전을 좀 봐, 쇼 프로그램을
좀 보라구, 거기에 비하면 내 새로운 아버지가 권하는 사냥감이란 정육점 갈고리에 걸
려 있는 고깃덩이, 도살된 소나 돼지의 잔해처럼 보인다!
  거리를 걷는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 보자, 갈고리에 걸린 날고기 한 입 어때?
  ……정말이지 어떻게 된 도시일까. 이 빌어먹는 일을 정말로 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
께 나선 첫 사냥에서, 정말로 나는, 이런 농담을 했었는데. 이봐, 돌아온 대답이 뭐였
을 것 같아? 이런, 당신 첫 사냥을 나왔군! 갈고리에 걸린 고깃덩이, 멋진 비유야ㅡ정
말로 거저먹는 사냥감이라고! 잘해 봐!
  그 곁에 서서 기꺼워하는 아버지의 얼굴이며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동료며
……이런 어이없는 우연을 아버지는 행운의 조짐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또 한 밤을 굶
은 채 넘겨야 했다. 이봐요 아버지, 서른이 될 때까지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내가,
이제 와서 공원 화장실에 쪼그린ㅡ더러운ㅡ남자들과 키스해야 한다구요?
  나는 이십 세기의 서울에 통용 되는 가장 평범한 성 취향을 가진, 평범한 성인 남성
일 뿐이다. 당연히 여자를, 가능하면 예쁜 여자를, 건강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여
자를 골라잡아야 한다 : 나는 동성애 취향을 가질 수도 없었다……아아, 언젠가는 빗
속에서 쪼그린 채 잠든 불결한 남자에게 키스할 날이 있을런지 모르지. 퍼석거리는 머
리카락을 헤집으며 푸석거리는 뺨에 입 맞추고, 그이의 건강하지 못한 내장 상태를 한
탄하며 목줄기를 물어뜯을런지 몰라. 그리곤 오 분 정도, 애도하며ㅡ동시에 나를, 동
정하며, 슬퍼하게 되리라……지독한 상상이다.
  이건 나름의 좋은 계기였고, 내 속의 무엇이 자극 받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으나
여자들에게, 길거리의 모든 여자들에게 열심히 말을 걸게 되었다.
  여자들은 한층 아름다워 보였고, 너무나 우아하고 총명하게ㅡ사냥꾼을 피해 달아났
다……나는 마로니에 공원이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 이미 시간이 없다고 여겨질 때는……"

  이십 세기가 끝나 갈 무렵의 일이다. 지금도 비 나리는 밤에 사냥을 나서면 그날 밤
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도 여전히, 되새과의 작은 노래새나 고양이, 개 따위를 보면 소
름이 돋는다. 여자를 찾아야지, 가능하면 예쁜 여자를. 이것이야말로 이십 일 세기에
태어난 밤의 사상이다. 이 세상의 새들을 모두 목 졸라 죽이고 고양이를 비틀어 죽인
다 해도, 그를 식사 삼아 배를 채우는 일은 없을 테다. 아ㅡ부디, 도시의 갈고리에 걸
린 불쌍한, 또 불결한 걸식자들을 사냥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나 또한 이 도시의 거렁
뱅이에 불과할 뿐이다 : 운 좋게, 사냥꾼 노릇을 하는 거렁뱅이.
  도대체 다를 게 뭐람? 여자들을 쫓아다니며, 사랑을 구걸하고 식사를 한다……

  아직도 여전히, 내가 붙들고 사정하는 사냥감, 특히 예쁜 사냥감이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을 내게 던질 때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양진이를ㅡ또는 모든 얼룩 고양이들을
비틀어 죽이는 상상을 한다. 그건 또 하나의, 미칠 듯한 욕망이다.
  도대체 내 가슴은 어디까지 비틀어질 건가? 마침내는 노스페라투처럼, 기괴한 익살
꾼이 되려는 걸까? 이 흉포함이 삼십 년 인생의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여자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운 얼음덩이로 심장에 박혀 들 때마다 그 위에 맺히는 한두 방울의
자비에 매달렸다, 하다못해 고양이에게 빵 조각을 던져 주는 자상함이라도 바랐다.
  나를 사랑해 줘ㅡ얼마나, 기도하듯 속삭였는지.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뿐이다. 사랑이야 말로 나를 살찌우는 식량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과 일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실히 밝혀지는 날도 있으리
라. 나는 사랑을 구걸하고, 여자들은 내게 사랑을 베풀고ㅡ나는 그녀들을 사냥하고,
목줄기를 물어뜯고, 마침내는 기름이 다할 때까지 지펴 올리는 난로 앞에 쪼그린 거렁
뱅이며 차가워진 자리에서 도망치는 괴물일 테다.

  다행히도, 그런ㅡ섬뜩한ㅡ현실과 마주친 적은 없다. 살인을 겁내는 평범한 남자로
살고 있다……동료들이 웃을 이야기이고, 아버지가 듣는다면 가슴을 쥐어뜯으며 후회
를 하려나? 굶주림과 따분한 도시 일상을 동시에 해치우는 방법을 횡포와 폭력에서야
찾는 우리 일족들에게 나는 지금, 새롭고 특별한 치유제를 선사하려 한다, 우리를 살
찌우고 살게 하는 완벽한 치유제일 테다! 한심한 내 형제들에게, 우리 미도리 迷導唎
들에게, 이제 새로운 약품이 나타났음을 선언한다!
  누군가 내세운 결심과 도시 일상이 서로 잘 들어맞는 함지처럼 소리 한 가닥 없이 다
물리는 일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 아무리 해도 잘되지 않는다. 생각과 행동은 나란히
짚어지는 젓가락처럼 한 쌍으로 붙어 다녀야 하는데, 이 서울 밤거리에서 사냥꾼 노릇
이란, 자신만의 사냥터가 없는 사냥꾼이란, 관념과 행동을 결부시키기 힘든 거렁뱅이
일상과ㅡ말하자면 배고픔과!ㅡ싸워야 한다……이건 어쩌면 길가에 피어오른 코스모
스 같은 것이다. 해가 들지 않고, 비 나리지 않으면.
  코스모스는 시들어 버린다. 나 역시, 시들어 갈 테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와 타협하고 있는 도시 일상은 그야말로 서울다운 것이다.
  요컨대 내가 마주하는 일상이란 서울의 혼란 기저에서 솟구쳐 올라 성층권까지 거침
없이 내닿은, 하나의 기다랗고 색다른 기둥처럼 불안하게 서 있다. 이 안타까운 흡혈
귀가 고도 경제 사회에서 어떻게 탈피 했는가?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가부장제
에서는 벗어났는가? 천만에! 아버지가 둘로 늘었다. 새로 맞아들인, 우글거리는 형제
들은 죄 라이벌이다. 어머니가 없으니 그야말로 진정한 가부장제이려나?
  그런데 누구, 누이를 본 일이 있던가?
  여자 흡혈귀들은 좀 더 비밀스럽게 움직인다. 남자는 남자를 만들고, 여자는 여자를
낳는다고? 이건 또 하나의, 유토피아에 관한 블랙 코미디일까? 그런데 묘하게도 납득
이 된다. 도시의 새로운 슈퍼맨ㅡ또는 슈퍼우먼을 만든다고 하면, 나 역시 동성을 생
각하게 된다. 여자라고 다를 게 또 뭐람. 모든 게 망상의 일렁임일 뿐이려나.
  닳아빠진 수건으로 꽃피 뿜어 나는 상처를 막는 놀이 같은 것이다……이런 실수를
얼마나 자주 했던지. 얼마나 자주, 오해 받은 채 헤어져야 했던지.
  생각할 필요 없이, 익숙해지면 그 뿐인 일상이다. 여자, 남자.

  이십 일 세기의 서울, 이 도시를 기반으로 우리 흡혈귀의 비밀스러운 세계가 허깨비
처럼 떠올라 있다. 주민들 역시 사람다운 정서 그대로, 사람의 행위 그대로 묘사 되는
허깨비들이다……여기저기에 장치된 함정들을 조작하면서, 우리들만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이며. 보다 높은 계위에 올라서거나 또 다른 라이벌들을, 우리와는 다른 사
촌들을 타도하려 드는 오컬트 영화 마니아들이다. 우리들은 말하자면, 돈키호테가 마
주친 풍차 같은 것이리라. 놀랐지ㅡ! 깜짝 상자를 열면, 시시한 우스개가 흔들릴 뿐이
다. 수수께끼가 풀리면 헛웃음만 남겨진다, 이 거짓말들을 모아 황금의 일상을 자아내
려는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자아내는 황금은 도시의 전설로 맺혀 가고, 이
위에 엉터리 예지를 쌓아 올려 허공에 맴도는 허깨비 전설의 주인공에 도달한다. 엄지
손가락 첫 마디만 한 금덩이와, 그 옆에 나란히 놓이는 캔 맥주, 핸드폰의 세계다.
  도대체 나는, 이 셋 중 무엇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다시 한 번, 버들치의 얘기로 돌아가자.

  우리 두 사람의 관계 지속을 위해서, 나는 금덩이와 캔 맥주, 그리고 핸드폰 모두를
사용했다. 돈으로 그녀의 일상을 사들이고, 함께 캔 맥주를 마시며 난로에 기름이 차
오르는 것을 기다린다, 사랑과ㅡ그녀의 전화번호가 핸드폰 안에 저장 된다. 서울답다.
난로를 정비하듯 피를 채울 수 있다면 더 멋질 텐데. 전화 한 통으로 피가 가득 담긴
깡통이 배달되고, 천천히, 따뜻해지는 걸 기다리는 상상, 멋지다.
  나는 다른ㅡ평범한ㅡ사람과 같은 정도로 먹을 수만 있어도 행복하다.

  버들치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는 좀 더 사랑스러웠고 좀 더 건강해져 있었다.
  그녀가 코트를 벗는 모습, 구두를 벗어던지는 몸짓, 머리칼을 풀어헤치며 살폿 치켜
뜨는 눈을 사랑했다……다양한 변화 하나 하나를 모두 기억한다. 죽어 가는 얼굴, 계
속 새로 태어나는 표정, 흥분할 때면 빛나던 볼ㅡ핏기로 발그스름하고 탄력 있는, 아
름다운 얼굴. 두 사람이 함께 하나의 흐름으로, 서로를 느끼는 일.
  버들치의 일거일동에 숨이 막히고 다시 트이고, 살아있는 듯한 자신을 느끼고ㅡ아,
이런 착각들로 행복해 하며ㅡ겨울내 가득한 키스를 나눈다……입 안 가득 서울의 냄
새가 고여 들곤 했다, 첫 순간은 은근히, 곧 찌르는 듯 강렬하게.
  견디기 힘든 기갈에 시달린다. 나는 완벽하게ㅡ사랑에 빠진다.

  차차 버들치의 신뢰를 얻게 됨에 따라, 나는 그녀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천천히 익어
가는 사과처럼 때가 되면 붉어지는 사과처럼, 그녀가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가 좀 더
지상적인 영양분을 내게 넘겨줄 것을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섹스 흉내를 내면서.
  겨울이 끝날 때까지 우리들은 서로 사랑했다……내 착각이었나? 아니, 그건ㅡ닳고
닳은 남자가 소녀 앞에서 깜짝 상자를 여는 낭만적인 부분이 분명히, 분명히 있었어!
  ……그렇지? ㅡ아니야? 맙소사. 두어 달 동안 계속 사귀면서, 그래, 연인들처럼 : 데
이트를 하고 섹스 흉내로 놀며. 흡혈을 하며. 내가 정체를 숨길 수 있었을까?
  내가 무엇인지, 정말로 몰랐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흡혈귀란 얼마나 에로틱한 존재인지. 분명히 나
는, 단언하건대 우리들의 흡혈은. 섹스의 안타까운 종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유보 기간을 확보한 헌혈은 건강에도 좋다구, 내 사랑. ㅡ그리고, 침묵.

  오랜 침묵이었다.

  버들치가 흡혈귀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멀쩡한 서울 한복판에서 빈번하게 일어나
는, 아주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평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비
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이봐, 이번 주 복권 결과가 어땠더라? 버들치는 평범한
전리품이었고 나는 정중하고 사려 깊게 그녀를 다루었다. 정말이지 나는 그녀를 너무
나 사랑한다, 충분한 시간을 배려하며 배고픔을 견디며, 그건 정말이지 최소한의 물과
식량을 실은 작은 보트 한 척으로 대양을 떠도는 듯한 일상이었다.
  다른 여자들? 아ㅡ나는 이제 버들치만을 사랑한다, 그녀만이 내 핸드폰에 저장된 유
일한 사랑, 내게 피를 주는 연인이다……드라큘라, 당신은 미나만을 먹었어야 했어.
밤마다 헤매이지 말았어야 했어, 할렘 따위 만들지 말았어야 했어.
  버들치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때로는 울거나ㅡ한참을 웃거나, 여러
가지 감정들을 공유했고, 술에 취해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
거나 :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변해 왔다. 그 세세한 내용들이 주는 기쁨을 형제들이
여, 결코 알 수 없을 걸? 내가ㅡ당신들이 끔찍이도 싫어하는ㅡ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우리들이 어떤 행복과, 소름끼치는 절망을 겪었는지도.
  환상으로 이루어진 초기의 생활이 끝나고, 최초의ㅡ격렬한 욕구 : 배고픔으로 흉포
해지는 감정, 폭력을 갈구하는 일족의 피 따위가 스러지고, 이런 변화를 견디어 내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지만, 그러나 창문으로 쏟아 드는 햇빛 앞에서 내가
얼마나 한심한 여행을 하고 있었는가를 깨달은 순간. 정말로 완전히, 사냥을 포기하고
새로운 일상을, 방목과 경작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즈음 버들치에게는 영원한 밤이, 한 뼘 만큼의 두려움으로, 가슴 우물로부터 기어
올랐다……그것은 모호한 공포이며, 측량할 수 없는 일상을 넘겨다볼 때보다 더욱 큰
공포이기도 하다. 하나의 분명한 형태를 획득한, 두 사람의 손으로 빚어내는 일상이
이루는 공포였다. 오랜 침묵이, 나타났다.

  우리들의 관계란 결국, 여기까지인지 몰라. 이제 끝인가 봐……그런 생각을 했다.
  무언가 새롭게 더해질 일이 없다. 저녁 즈음에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가끔은 영화를
보고, 가끔은 술을 마시고, 밤이 되면 섹스 흉내를 내다 피를 마신다. 그뿐이다.
  한참을 뒹굴다 내 욕구가 충족 되면 버들치가 허기를 호소한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버들치는 피자를 먹는다. 메뉴가 바뀌어도 결과는 언제나, 같다.

  그 밤에도 버들치는 햄버거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우물우물거리다 문득, 지친 듯
이 햄버거 찌꺼기를 내팽개쳤다. 나는 텔레비전을, 월드 뉴스를 보고 있었다.
  흡혈귀의 식사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건들이 차례로 점멸했다. 채널을 돌리면 기기
묘묘한 선전들이, 목을 조르면 정말 기분 좋을 여자들이 나를 향해 모양 좋은 엉덩이
를 흔들고……그리고, 오늘로 끝날지 몰라, 하고 생각했다.
  나는 버들치가 웃는 얼굴을, 완전히ㅡ지쳐 버린 얼굴을 봤다.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
기에 당황했다, 버들치는 정말로, 힘들어하고 있어 : 그러니 이젠, 끝을 내야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첫 키스부터 생채기를 내는 흡혈귀랑, 처음부터 상처투성이인
여자애는 서로에게 기대어도 무엇으로부터도, 해방 될 수 없어. 밤 내내 끌어안고, 핥
으며 다독여도 더 이상 새로운 변화의 싹은 터 오르지 않아ㅡ아무 것도 다시, 나타나
지 않아. 정말이지 우리들은, 서로 끌어안아도 두 사람이 모두 따뜻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겨울 내내 나만의 난로가 되어 주었지만,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는 일은
없을 테다. 버들치가 흘린 피가 다시 차오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엉성한 사랑이다.
  아니, 이런 걸 대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서로의 상처를 핥아 치유한다
는 도시의 연인 전설 쪽이 더 현실적이지 않나?
  이제 끝ㅡ그리고 다시 끝.
  그런 생각이 내 심장을 천천히, 천천히 짓눌러 갔다. 이제 우리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어, 영원한 밤, 단 하나의 왕국에서 자유롭게 사랑할 거란 희망도, 그 안에서 뜻대로
행복할 거란 바람도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이제 버들치가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ㅡ나는 새로운 난로를 찾아 다시, 서울을 떠돌아야 한다……이제 버들치가 내게로 고
개를 돌리면,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
  그렇게 각오를 하고, 한 번 더 채널을 돌렸다. 화면이 점멸하고, 나는 용기가 사그라
지기 전에 리모트를 내팽개쳤다. 그건 새벽 세 시 즈음이었다 : 새벽의 왕국, 흡혈귀와
버들치의 관계는 뚜렷한 궤적을 그리며 누구나처럼, 평범하게ㅡ평범한 연인들처럼
추락하고 말없이 시들어, 사멸하는 것이다.
  그때 버들치가 갑자기 말했다. 벌거벗은 채, 엉덩이를 살금살금 움직여 내 가슴에 기
대이면서ㅡ낭만적이잖나?ㅡ옷걸이에 셔츠를 걸듯 여상한 목소리로.
  살아있는 사람의, 살아있는 얼굴, 생명이 천천히ㅡ변하는 모습으로.
  "저기, 이제 어쩔까? 나 아직 배고픈데."
  "……피자?"
  "물렸어, 그건. 아저씨는 정말이지……"
  "그럼 나가서, 야식집이라도 찾아볼까?"
  "바람도 쐴 겸. 그리고……"
  "그리고?"
  "그냥. 아저씨가 참 좋아서. 저기, 다음엔 또 언제?"
  "말하자면 너는, 기름이 닳은 난로야."
  "아저씨는 난로가 없으면 얼어 죽는 사람이구."
  "만나는 건 언제라도 좋아, 하지만……"
  "난 그걸로 좋아. 그러니까 언제?"
  "뭐……일단 내일 밤까지 계속해서, 같이 있을까."
  "응."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야식 집을 찾아 종로 거리를 걷는 이
야기다. 덕수궁 돌담길의 노래를 부르며, 산책을 하는 이야기다. 이 기쁜 밤이라니. 서  
울의 밤이라니. 이런 식으로 다정한 연인을 붙잡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해서 당연  
한 일처럼 손을 잡고 걸어도 역시 기쁘다. 굉장히ㅡ행복하다, 이렇게 사랑하는 동안에  
같은 길을 걷는 동안에, 말없이 걷기도 하면서. 우리 둘의 마음도 찐득찐득 엉겨 간다.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여전히 가냘프고 예쁜 어깨, 여전히 보드랍고 나긋나긋한
팔, 한결같은 사랑이 뒤엉키는 가슴. 영원히 잊지 못할 밤에 내가 안은 가슴.
  이봐요, 미도리 일족은 천하무적의 로맨티스트다. 필사적인 굶주림의 겨울에도, 현
재의 도시, 그 안에 간직된 사랑을 열망하며 균열이나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수수께끼
의 해독자로 살아가고 싶다. 포르노 소설의 주인공도 좋고 오래된 도시병에 시달리는
행복한 환자여도 좋다, 이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져 어둠 속의 모든 신비가 드러나고,
깜짝 상자가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ㅡ나는 버들치와 함께 손을 잡고 길을 걸을 테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그건 초보 밤 사냥꾼의 애달픈 고민이었다……결론은 명확하
다. 사람답게, 평범한 사람답게, 도시의 일상과ㅡ사랑, 그뿐이다.
  나로 말하자면 천하무적의 로맨티스트다. 미도리 일족의 전부가 덤벼들어도, 나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 버들치가 내 손을 잡아 주는 동안, 언제나 거짓말만 하는 도시의
언어 모두를 억누르며 이 서울이 발명해 내는 시시한 일상을 헤쳐 나가 우리 둘의 천
국으로, 로맨티스트의 해변으로 걸어갈 테다. 필사적인 기갈의 욕구가 나를 발광하게
한다면, 버들치가 내 심장을 덥혀 주겠지. 그녀가 허기져 할 때면 내가 먹여 주면 되
지. 이 순환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면, 우리들을 영원의 밤 속에 가만 내버려 둔다
면, 미도리들이 희라기 羲拏錤 일족에게 전멸 당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을 테다.
  길을 잃고 납치당한 평범한 인어, 요정, 굶주린 사냥꾼이 도착한 낙원이다.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려, 이 세계를 구성해 온 근원만이 남겨진다면, 그 중심에 틀림
없이 우리 둘이 있을 거야. 평범한 흡혈귀가 꿈꾸는, 평범한 버들치가 꿈꾸는 천국의
해변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배가 그득해질 때까지, 사랑을 먹는 곳.




                            終 .




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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