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선풍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물 위에서 펌프를 밟아야 했기에 열기와 습기를 막아주는 보호복을 입고 있었다. 보호복이라고 해봤자 누더기 같은 비닐로 만들어진 사람 모양의 풍선 같은 것이었다. 그 안엔 공기를 순환해주고 시원하게 해준다고 달아 놓은 조그만 선풍기가 있었다. 이미 선풍기의 모터는 타는 듯한 냄새를 풍기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몇 시간째 배 위에서 펌프질을 하고 있는 몸에서 나오는 열기를 식히기에는 무리였다. 

"주희야, 할아버지 잘 보고 있어야지!" 

내가 조금이라도 멍하게 있으면 할머니는 정신 차리고 할아버지의 생명선을 보라고 주의를 줬다. 할아버지는 ‘머구리’였다. 배 위의 공기공급장치까지 긴 생명선이 연결된 다이빙 헬멧을 쓰고 깊은 물속에 들어가 이것저것 쓸 만한 것을 주워오는 일이었다. 아파트 같은 집들을 뒤지려면 층수도 많고 방들도 많아 가끔은 몇 시간씩 걸리곤 했다. 잠깐 숨을 참고 내려가서 조금씩 주워 와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배 위에서 아래에 있는 할아버지의 헬멧까지 공기를 보내 주려면 발로 공기공급장치의 펌프를 계속 밟아야 했다. 내가 펌프질을 할 땐, 할머니는 조종실에서 할아버지와 연락을 하면서 물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레이더를 보거나 물 밖의 상황들을 살폈다. 할머니의 펌프질 차례에는 내가 조종실에 들어갔다. 배 위에서 펌프질을 할 땐 보호복을 입고 있어야 했기에 보호복을 열고 에어컨을 쐴 수 있는 조종실 담당 시간이 너무 기다려졌다. 분명 배 위에서 펌프질하는 시간이랑 조종실에 있는 시간은 똑같을 텐데 조종실의 시간은 너무 금방 끝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호스 하나로 공기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선이 꼬이거나 잘리는 일이라도 생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생명선에서 두 눈을 떼지 않고 집중해서 살펴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펌프질을 계속하면서 줄에도 신경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할머니는 내가 집중이 흐트러질 기미를 보일 때마다 채근하곤 했다. 

"주희야, 할아버지 올라온다." 

"네, 할머니."

한참이 지나서 할아버지는 등에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올라온다. 할머니는 건져온 물건을 받아들고, 나는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할아버지는 자리를 잡고 무거운 헬멧을 벗는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물속에서 떠오르지 않기 위해 신었던 무거운 쇠 신발, 납으로 된 벨트를 또 풀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다. 할아버지가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있으면 나는 요깃거리를 가져다준다. 할아버지가 식사를 하며 쉬고 있을 때 할머니는 옆에서 건져온 것들을 살펴봤다. 물건들이 쓸 만하면 바로 돌아갈 때도 있고, 영 아니면 더 오래 잠수를 할 때도 있었다.

"오늘은 뭐 좋은 것 좀 있었어요?"

하고 할머니가 물었다.

"뭐, 별로 특별한 건 없었어요."

할아버지의 대답이 신통치 못하다. 나는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라 할머니 눈치를 봤다. 보통 대부분의 결정은 할머니가 했다. 오늘도 네모난 판때기들이 잔뜩 이었다. 가장 쓸모 있는 것은 배터리들이었다. ‘SAMSUNG’, ‘iPhone’ 뭐 그렇게 영어로 쓰여 있는 조그만 판때기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열어보면 그 안에서 더 조그맣고 납작한 판때기가 나왔다. 그게 배터리다. 대부분 물속에 오래 있어서 고장이 난 것도 많지만 가끔은 쓸 수 있는 것들도 나온다. 그건 언제나 좋은 값에 팔수가 있다. 우리도 많이 쓰곤 한다. 불을 켜고, 선풍기를 돌리고, 냉장고를 돌리고. 배터리는 조그만 납작한 판때기 말고도 더 큰 납작한 판때기, 조그맣고 네모난 기둥, 큰 네모난 기둥. 사격형 모양은 다양한 크기가 있었다. 그리고 둥그런 기둥, 커다랗고 납작한 동그라미 모양에 또 바퀴가 달린 것. 둥그런 모양들도 꽤 종류가 있었고, 가끔은 주먹만 한 뭉치에 막대기가 달리고 동그랗고 네모난 조그만 단추들이 달린 특이한 모양도 있었다. 배터리가 아니면 녹여서 쓸 만한 플라스틱이라든지, 쇠들. 또 특이하고 예쁜 모양의 물건들도 돈이 되고는 했다. 몇 번인가 물속이 깨끗하게 보일 때 물안경을 쓰고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물속에는 다양한 모양의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뭘 그렇게 많이 쓰면서 살았는지 모르겠다. 커다란 네모 상자에 사람이 앉아있을 수 있는 의자가 있고, 양옆으로는 둥그런 바퀴들이 달린 자동차라는 것들도 많았는데 보통은 배터리가 다 빠지고 없었다. 자동차 배터리야말로 정말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다. 저 큰 자동차에 사람을 싣고 전기로 움직였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걸 돌릴 수 있는 배터리니까 무겁고 크고, 가격이 비싸겠지. 자동차의 배터리는 눈에 띄기 쉽고 이미 사람들이 많이 건져갔기 때문에 가끔 작동되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부자들은 다들 좋은 배터리를 쓴다는데 더 많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할머니는 자동차는 아니고 자전거라는 데에 들어간 배터리는 몇 번 발견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돈이 꽤 돼서 맛있는 걸 사 먹었다고 했다. 그땐 나도 있어서 같이 먹었다는데 어렸을 때라 기억이 나질 않아 참 안타깝다. 

"에이, 뭐 팔 것도 없네. 오늘은 쉬고 내일 또 봐요."

"그래요, 내일은 뭐가 또 있겠지요." 

다시 한번 잠수를 하기엔 시간이 애매한지 할머니가 오늘 머구리는 그만하기로 정했다. 나는 속으로 ‘야호!’하고 기분 좋게 외쳤다. 좋은 물건들이 나오면 남산의 시장에 팔러 갈 때도 있었는데 이번엔 별로 쓸 만한 게 없는 듯했다. 그러면 할아버지와 나는 쉬고 할머니는 조종실에서 오늘 묵을 곳을 향해 출발한다.

"할머니, 수락산 쪽으로 가요?" 

"아니, 도봉산 쪽."

"왜요? 수락산이 가까운데."

그럴 때면 가만히 있던 할아버지도. 

"할머니 말이 다 맞어."

하고 한마디씩 거들곤 했다.

"치, 알았어요."

서울 대부분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멀리까지 바라보면 커다란 산과 산 사이에 드문드문 조그만 섬처럼 아파트나 높은 건물들이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어디에는 아파트들이 엄청 많기도 하고, 어떤 산에는 집들이 많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있었다. 상계동에 있는 아파트를 뒤졌으니 수락산 근처에서 머물러도 되는데 할머니는 굳이 반대쪽으로 가자고 했다. 물속에는 보통 조그만 물고기들이 많았지만 깊은 곳에는 가끔 커다란 물고기가 들어와 사람들을 끌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물이 얕은 곳으로 이동해서 머물곤 했다. 가끔은 물 위에 튀어나와 있는 건물 위에서 머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물에 오래 잠겨 있던 건물들은 무너질 때도 있어서 보통은 땅에 머물렀다. 땅도 안전하기만 하지는 않아서 사람을 공격하는 동물들이 많았다. 그래서 위험한 상황에는 땅에서 도망칠 수 있을 만큼 물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어디에나 위험이 있었다. 사람은 정말 살기가 힘들다. 사람들이 거의 안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가 별로 없다. 만난다고 해도 좋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다들 힘들어서 서로 가진 것을 탐내느라 눈치를 보며 멀어지기가 일쑤였다. 시내에 있는 남산은 땅이 꽤 넓고 섬 같이 되어있어서 사람들이 다른 위험한 동물들을 몰아내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있고 큰 시장도 있다. 그래서 남산에 갈 때나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은 남산에 갈 일도 없고, 딱히 좋은 물건도 없어서 평범한 하루였다. 그렇게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서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으면 가끔 별생각이 다 들 때가 있다. 기억할 수 있는 옛날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나. 셋이 함께였다. 한번은 할머니에게 엄마, 아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할머니. 내 엄마,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할머니는 다른 일을 하느라 고개는 돌리지 않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같기도 하고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다 죽었어."

"다른 사람들 다 죽을 때 같이 죽었어요?"

할머니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냐?"

"보면 집도 많고, 아파트도 많은데 사람들은 하나도 없잖아요. 그 사람들 죽을 때 같이 죽었어요?"

"아. 그 사람들은 훨씬 오래전에 죽고 너희 엄마, 아빠는 더 한참 있다가 죽었어."

제일 물어보고 싶은 건 엄마, 아빠였는데 왜인지 그 질문을 계속 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한 번에 죽었어요?"

"아니, 크게는 두 번쯤에 나눠 죽었지. 한 번은 큰 전쟁이 나서 사람들이 서로 죽였어. 그리고 또 한 번은 날씨가 변해서 죽고. 그전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덥지는 않았거든. 물도 많지 않았고. 그 두 번이 몇 십 년쯤 걸리긴 했는데 그냥 한 번에 죽었다고 해도 되고." 

하지만 엄마, 아빠에 대한 질문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엄마, 아빠는 같이 죽었어요?"

그 질문이 나오자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마주 보았다. 내 얼굴 표정이 어땠을지는 모르겠는데 할머니는 슬픈 걸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 엄마, 아빠는 같이 갔어. 혼자 가는 것보다는 덜 외로웠을 거야. 주희야, 너무 지나간 것들만 생각하지는 말아." 

할머니의 얼굴이 좀 더 슬퍼진 것 같았다.

"앞으로…… 더 좋은 날이 있을 거야."

마지막 말을 하는 할머니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그 뒤로는 엄마, 아빠에 대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정작 나는 언제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였어서 딱히 엄마, 아빠가 없다는 게 슬프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아는 게 많아서 더 슬픈 건지도 모르겠다. 

한참 노를 젓다 보면 쌍문동에 도착한다. 우리 배 이름은 ‘선선’호였다. 할머니는 누가 쓰던 걸 받았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선선해졌으면 해서 지었다나 뭐라나. 나는 선선이라고 부른다. 도봉산과 북한산의 사이쯤 되는 거기는 길쭉하게 땅이 나와 있어서 산에서 뭐가 내려와도 잘 볼 수가 있었다. 배가 땅에 닿을 만큼 가까워지면 정박준비를 한다. 할머니가 조종실에서 선선이를 잘 묶어 놓을 수 있을 만한 나무 옆의 자리로 방향을 틀면 나는 굵은 밧줄을 들고 있다가 땅이 가까워졌을 때 톡 하고 뛰어 내려가 선선이가 떠내려가지 않게 잘 묶어 놓는다. 가끔 정박할 곳이 위험해 보일 때는 할아버지가 먼저 내려갈 때도 있지만 별일 없으면 그 작업은 보통 내 몫이었다. 배가 잘 고정이 된 다음엔 배 위의 물건들을 내린다. 밀물, 썰물도 있었고 위험한 사람들이나 동물들도 항상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물건을 한곳에 두고 같은 곳에서 오래 머무는 게 아니라 매번 새로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래서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은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머무는 자리도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었다. 먼저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그늘막을 펼치고, 선풍기를 설치하고, 태양전기판을 펼쳐서 충전할 배터리들을 연결한다. 그나마 그늘막에 들어가면 햇볕에 있을 때보다 버티기가 수월했다. 태양전기판은 해가 있을 땐 항상 펴놓는다고 보면 된다. 배터리들은 항상 충전하고 항상 사용해야 했다. 배에서도, 땅에서도. 가끔 구름이 많이 끼고 비가 오래도록 오는 날이면 배터리를 아껴 써야 했다. 햇빛이 없으면 배의 장비들을 돌릴 전기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머구리 일도 쉬어야만 했다. 비오는 날이 조금은 시원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햇볕이 쨍쨍한 맑은 날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늘막과 선풍기의 힘을 빌려서 배에서 이것저것 내리고 정리를 하고 있으면 할머니는 건져온 것들을 죽 펴놓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팔 것들은 따로 모아 놓고, 우리가 쓸 것들을 챙기고, 뭔가 새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은 만들고. 할머니는 뭐든지 아는 것 같았다. 건져온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연결해서 전등을 만들고, 새로운 선풍기를 만들고, 가끔은 뭐에 쓰는지 알 수 없는 것들도 만들었다. 내 보물은 할머니가 언젠가 준 음악이 나오는 판때기였다. ‘SONY’ 라는 영어가 적혀있는 조그맣고 길쭉한 모양이었는데 세모 모양이 그려져 있는 단추를 꾹 누르면 소리가 나왔다. 사람 목소리와 다른 많은 소리가 섞여 나왔다. 할머니는 그게 음악이라고 했다. 한국말이 나오는 것도 있었고 알 수 없는 말이 나오는 것도 있었다. 여자 목소리, 남자 목소리, 노래 하나하나마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어서 평생 들어 본 사람들 목소리보다 더 많은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것들은 내가 비슷하게 따라서 소리를 낼 수도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전선 뭉치 하나를 주었다. 그 전선 한쪽에는 새끼손가락 한마디만 한 막대기가 있었고, 반대쪽에는 전선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서 엄지손톱만 한 동그란 것들이 달려있었다. SONY에는 구멍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할머니가 준 전선의 막대기에 딱 맞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걸 꽂자 동그란 것에서 소리가 나서 그것을 귀에 넣으면 소리를 혼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건 그냥 겉으로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훨씬 잘 들리고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에게 그 글자를 어떻게 읽는 것인지 물어보니까 ‘쏘니’라고 읽으면 된다고 말해줬다. 그 이후로 내 태양전기판에는 꼭 쏘니를 연결할 자리 하나를 마련했다. 할머니는 정말 많은 걸 알았다. 나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할머니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반항할 때도 있었지만 할머니를 이길 생각은 없고 그냥 장난처럼 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이것저것 만지고 있을 때, 옆에서 구경하거나 물건 정리 같은 것을 하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옆에서 밥을 차리곤 했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일을 다 해놔야 해서 쉴 틈은 많이 없었다.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불을 켜놓으면 새들이 공격할지도 모르고, 나쁜 사람들이나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랐다. 밤에는 주위에 소리가 나는 깡통 같은 것들을 걸어놓고 무슨 일이 생기면 도망갈 준비를 해놓고 자야 한다. 아침이 오면 또 비슷한 날이 시작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렇게 셋이서 있던 시간이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다. 얼마 뒤에 할아버지가 죽고, 할머니와 둘만 남았을 때는 더 막막했으니까. 

할머니와 둘이 있을 때는 내가 머구리를 했다.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도 배 위에서 혼자 할 일이 많이 늘었다. 맑고 얕은 물에만 들어가 봤던 내게 어둡고 깊은 물은 다른 세상이었다. 물속은 깊고 깊은 밤 같았다. 물 위의 아파트에는 며칠 머물렀던 적도 있어서 내부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두운 아파트 안을 머리에 달린 불빛 몇 개로 돌아다닐 땐 그저 눈앞, 발 앞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생명선이 꼬이지 않게 유지하면서 건물 안을 뒤지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그냥 둘러보는 게 아니라 조그만 물건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살펴봐야 하니까 말이다. 보통 물 밖의 어두운 밤도 무서울 때가 있는데 여기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보여서 꼭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가끔 집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의 뼈 같은 것을 볼 때면 머리끝의 털까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바로 헤엄쳐 올라오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할머니 너무 무서워요. 나 진짜 싫어." 

두려움에 울음이 터질 때도 있었다. 헬멧을 쓰고 있을 땐 얼굴을 손으로 닦을 수가 없어서 울기 시작하면 금세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면서 뒤돌아가려고 하면 할머니는 무전으로 차분하게 나를 타일렀다. 

"괜찮아 주희야. 할머니가 위에서 너 잘 보고 있으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할머니가 다 알잖아. 나만 믿어." 

최선을 다해 타이르는 할머니의 목소리로 마음이 가라앉을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무서움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다. 겁에 질려 급하게 올라올 때마다 할머니는 잠수병으로 큰일이 난다며 절대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올라와야 한다고 혼을 냈다. 급하게 올라왔을 때 한두 번 몸이 아팠던 경험을 하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어쩔 수 없이 무서운 생각이 들어도 꼭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뜸을 들이며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 수많은 시간들을 견뎌냈던 것이었다. 그 뒤로는 쏘니를 가지고 들어가서 한쪽 귀로는 음악을 듣곤 했다. 그러면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견딜 수 있었다. 서울 중심으로 들어가면 더 좋은 물건들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사람들이 많아서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수락산이나 도봉산 근처에서 물건들을 꺼내 오곤 했다. 더 어렸을 때는 의정부 쪽에 있었는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더 먼 북쪽에서 왔다고 했다. 나쁜 사람들의 무리를 만나면 조용히 끝나기가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싸우고 있을 때 휘말리지 않도록 옆으로 몰래 지나쳐갈 때도 많았다. 아직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을 때, 한번 큰일이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나쁜 사람들이 무기로 위협을 하며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침착하게 설득하면서 그때 건져왔던 물건들 중에서 돈이 될 것들을 넘겨주면서 다행히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너무 무섭고 너무 싫었다. 할아버지가 있었을 때도 그 정도였는데 이제 할머니와 나, 둘만 남은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떨지 겁이 났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잃어서 슬퍼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도 할아버지가 없는 게 슬펐다. 거기다 할아버지만큼 머구리를 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물속에 내려갈 때마다 지쳐가고, 건져 올리는 물건도 점점 적어져서 먹고 살기도 힘들어지고 있었다. 답답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며칠 동안 비가 계속 내려서 머구리를 쉬게 되었다. 비가 와서 일을 못하면 앞으로의 생활이 더 막막해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머구리를 하지 않아서 편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비가 와도 얼마나 오래 오겠는가. 결국엔 비가 그치고 맑은 날이 왔다. 배터리도 충전할 수 있고 조금 넉넉하게 전기를 쓸 수 있지만 또다시 머구리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 편치만은 않았다. 

"주희야, 그동안 고생했는데 오늘은 남산에 가서 모아놓은 것도 팔고 맛있는 것 좀 먹고 올까?" 

"좋아요, 할머니." 

무슨 일인지 할머니가 오늘은 머구리를 쉬자고 했다. 물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했다. 캄캄한 물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살던 집들을 뒤지는 것과 맑은 하늘 아래서 바다를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남산으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있었을 땐 노를 저을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손도 모자라고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 모터를 많이 쓰곤 했다. 모터를 사용해서 깊은 물을 이동할 때는 소리를 듣고 큰 물고기가 공격을 해 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돌아가기는 했지만 임시방편으로 되도록 깊은 곳을 피해 땅에서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남산을 향했다. 나중에 할머니한테 물어보니 미아사거리라는 곳을 지나고 있을 때라고 했다. 할머니는 무언가를 느끼곤 배의 모터를 끄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무슨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난 무슨 동물 소리겠거니 하고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허투루 넘기질 않았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니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그 단지는 물에 잠기지 않은 아파트들도 많았다. 아파트가 물 아래에 있을 땐 감이 잘 안 왔었는데 건물 전체가 물 밖에 있으니까 정말로 크고 높았다. 저런 게 물속에는 셀 수도 없이 있다니, 물속이 더 무서워지는 것 같았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물속에 잠겨서 꼭대기 일부만 나와 있는 건물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120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 건물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보통 태양전기판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위치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태양전기판 말고도 커다란 접시 같은 것도 붙어 있었다. 할머니와 나는 선선이를 아파트 근처에 묶어 놓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갔다. 대문을 두드려 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어 창문을 통해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가 보니 탁자 위의 투명한 통에 아기가 있었고, 그 앞에 사람이 한 명 쓰러져 있었다. 할머니는 당황해서 급히 아기 쪽으로 갔다. 아기는 천으로 싸여 있었고 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선지 누워있던 투명한 통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기에게 무슨 이상이 없나 알아보려고 천을 풀었다. 아기는 정말 작았다. 그런데 여기저기 두드러기 같은 게 나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조금 심각한 얼굴로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아기를 안고서 살짝 흔들면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뭐라고 이야기를 계속해 주자 울음을 점점 그쳐갔다. 할머니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쓰러져있는 사람에게 갔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척 보기에도 굉장히 힘들어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주희야, 혹시 물 같은 게 있나 한번 찾아볼래?" 

아파트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니 지금까지 봤던 집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책상에는 배에서 본 레이더와 비슷하게 빛이 나오는 기계들이 있었는데 글씨들이 엄청 많이 쓰여 있었다. 그것 말고도 조그만 불빛들이 반짝거리는 기계들이 많았다. 특히 커다란 냉장고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보트 위의 냉장고는 조그만 상자 같은 것이었고, 커다란 냉장고들은 물속에서 물고기나 조개 같은 게 붙어있나 확인할 때 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의 냉장고는 제대로 동작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시원한 물과 다른 먹을 것들도 있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부자기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 

"주희야, 얼른 가져오지 않고 뭐하니!"

"아, 네 알겠어요."

잠시 새로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있었다. 할머니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냉장고 안에서 물을 한 통 들고서 얼른 돌아갔다. 할머니는 쓰러져있던 사람을 부축해서 푹신한 의자 같은 것에 앉히고 물을 조금씩 먹이면서 정신 차리길 기다렸다. 

"아, 선아야!"

그 사람이 눈을 뜨자마자 튀어나온 말은 아이의 이름인 듯했다.

"선아는 괜찮아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계속 혼자 있었던 거예요?"

할머니는 진정시키려고 차분하게 말을 걸었는데 아기 엄마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겁을 먹고선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기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할머니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후에는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사실 남편이 같이 있었는데. 밖으로 나가서 소식이 끊긴 지 며칠이 됐어요." 

아기 엄마는 아무 표정 없이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했다. 시선 끝에는 아기가 있었다. 

"선아가 태어난 지는 2개월쯤 됐어요. 저랑 남편은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둘의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얼마나 기쁠지, 얼마나 힘들지. 아기를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잘 알기 때문에 미리 잘 알아보려고 했어요.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죠." 

할머니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끄덕거리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아기 엄마는 금방 주저함이 없어지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우리를 믿었다기 보다는 그냥 누구에게든 답답함을 풀고 싶었던 것 같았다. 

"아는 사람들한테서 조언들을 구하고, 찾아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은 다 읽고 공부하고, 아기를 키우는데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책들은 다 자원이 풍족하고 사람들이 많았을 때 써진 것들이었어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가 지금 할 수 없는 일들만 가득했죠. 이미 그때는 아기를 가진 상태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저 더욱 마음을 다잡고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서 도움이 된다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모아왔어요. 지금 저것들은 최근에 구해온 것들이에요. 아무리 준비를 해도 불안했지만 아이가 태어날 시간은 점점 다가왔죠. 아이를 낳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정말 죽을 것 같은 고통이었어요. 아이를 안았을 때는 저와 남편의 사랑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정말 기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의 몸은 계속 아팠고, 아이는 계속 울었고, 저도 남편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어요. 아이를 돌본다고 돌봤는데 계속 날씨가 덥다 보니 아무리 시원하게 해도 여기저기 두드러기가 올라왔어요. 집에만 있다 보니 저희들이 먹을 음식들도 점점 떨어지고요. 남편이 뭐라도 구해온다고 밖으로 나갔는데 벌써 며칠째 소식이 없어요. 별일 아닐 거라고 저 자신에게 계속 타일렀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그나마 남편이 있을 때는 번갈아 가면서 아이를 볼 수 있어서 조금이라도 쉴 수가 있었는데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몸은 몸대로 힘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불안함에 미쳐버릴 것 같고, 저 혼자서는 너무 벅찼어요. 저는 온 힘을 다한다고 했지만 아직 몸은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고, 인공위성에 접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아기 엄마는 말실수를 한 것처럼 갑자기 말을 멈추고 할머니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인공위성이라는 말이 뭔가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고생했어요. 아기 기르는 일은 아무리 준비해도 어려운 일이에요. 그리고 두 사람이 해내려고 해도 어려운 일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니. 난 위로의 말을 해줄 수밖에 없네요. 음…… 그리고 인공위성 말인데. 아직 접속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다니 좋은 일이네요. 다른 사람들도 잘 지내고 있나요?" 

아기 엄마는 놀라는 얼굴로 할머니와 나를 번갈아 살펴보더니 마음을 먹은 듯 말을 이어갔다. 

"네, 사실은 배 한 척과 연락이 됐어요. 그 배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 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대요. ‘크루즈’라고 한다는데 사람 수백 명이 같이 타고 있다나 봐요. 믿기가 어려웠지만 저희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어요. 남편은 아기와 제가 같이 배를 타고 갈 때 필요한 물건들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나갔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아기 엄마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람의 아기를 처음 본 것도 놀라운데 차가운 바람이 나오는 냉장고도 있고, 인공위성은 뭐고, 크루즈라는 배의 수백 명의 사람들이라니. 커다란 것들이 머릿속을 차지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꽉 막혀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아기 엄마를 달래면서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름도 모르고 이야기를 했네요. 나는 오경순이라고 해요. 저 아이는 한주희. 선아 엄마는 이름이 뭐예요?"

"저는 윤수빈이에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갑작스럽게 친해지려는 것 같아서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수빈이라고 하는 사람은 울음을 멈추려고 하면서 대답을 했다. 할머니는 말을 이어갔다. 

"수빈씨, 선아 아빠는 나간 지 얼마나 됐어요?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4일인가? 5일인가? 정신없이 선아를 보느라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보통 이틀 정도 나가 있을 때는 있었는데 이번에는 돌아올지 모르겠어요. 정말 돌아오면 좋겠지만요." 

수빈씨는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할머니는 수빈씨를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더니 말을 이었다. 

"수빈씨,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 말 한번 들어봐요. 주희랑 나는 계속 바깥에서 머구리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보트도 잘 몰고 물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요. 한번 우리를 믿어 보지 않겠어요? 선아는 되도록 빨리 좋은 환경에서 관리를 받아야 해요. 우리가 아마 선아를 크루즈에 데려다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수빈씨 옆에 있을 테니까 같이 크루즈로 떠나요. 선아 아빠는…… 안타깝지만 선아를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어요. 메시지를 남겨 놓고 연락을 기다려요." 

할머니의 말을 듣는 수빈씨도 황당했겠지만 나도 황당했다. 아기를 데리고 크루즈로 떠나자니? 수빈씨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니, 할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기를 데리고 떠나자구요? 저는 크루즈가 뭔지도 모르고 또 거기로 간다고 해도 가서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할머니는 내가 화낼 것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눈짓을 한 번 하고는 오히려 수빈씨를 달랬다. 

"수빈씨, 지금 우리도 이야기가 안 된 상황이라는 걸 알아줘요. 하지만 주희도 결국에는 내 의도가 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주희야, 너도 지금 여기서 가장 힘든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오히려 할머니는 나를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화가 났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수빈씨 앞에서 더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수빈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기계들이 많은 쪽으로 왔다. 할머니는 글씨가 쓰여 있는 반짝이는 화면들을 조금 쳐다보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려 말하기 시작했다. 

"주희야, 지금 우리의 세상은 인간들이 살기가 쉽지 않아. 사람들이 많았을 땐 이 자연을 우리한테 살기 편하게 변화시켰었지. 그래서 인간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이것이 인간의 욕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살아가야 해. 나랑 할아버지랑 지냈던 시간이 어땠니? 행복했니? 그렇게 셋이서 살기도 쉽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결국에 어떻게 됐는지 알잖니. 이 험한 세상에서 겨우겨우 버티며 살았지만 결말은 그런 거였어. 우리는 너에게 최대한 좋은 것들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게 편하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아. 이제 할아버지 없이 우리 둘이서만 지낸다면 점점 더 힘들어질 거야. 하지만 저 아기와 같이 배에 타게 된다면 적어도 여기보다는 좋은 생활을 할 수가 있어. 너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더 일찍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더 좋은 상황에서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올지 알 수가 없어. 여기 있는 장비라면 그 배의 위치도 알 수 있고, 배는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지 않는단다. 난 네가 이번에 꼭 그 배에 탔으면 좋겠어." 

할머니의 말이 진심이란 것도 알고, 정말 간절하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난 셋이서 지냈던 시간이 좋았었고, 그 이외의 생활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 다른 커다란 배라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서 어떤 생활이 펼쳐질지 감도 오지가 않았다. 할아버지 생각도 났다. 할아버지는 결국 할머니 말이 다 맞다고 했겠지. 나도 그게 맞다는 건 안다. 그래도 말이다. 

"주희야, 할머니가 다 알잖아. 할머니 말 믿지?"

할머니는 다 알고 있다.

"알겠어요. 할머니."

아직 수빈씨는 확신을 하지 못한 눈치였다. 할머니는 수빈씨에게 크루즈라는 배와 연락했던 것을 자세하게 물었다. 수빈씨는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인터넷이란 곳에 접속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있었다고 했다. 책이라는 글씨가 잔뜩 쓰여 있는 것은 보통 구하기 힘들었는데 인터넷에는 수백, 수천 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기를 기르기 위한 공부로 책들을 찾고 있었는데 우연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크루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여기저기를 찾아보다가 크루즈의 사람들과 연락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이 한국 쪽으로 올 때가 있다고 해서 접촉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던 중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대강 알았다고 하며 수빈씨의 장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빛나는 판때기를 컴퓨터라고 했다. 그 컴퓨터 앞의 바닥에는 단추가 잔뜩 달린 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들을 누르면 화면에 글씨들이 떠올랐다. 수빈씨와 할머니는 그 앞에서 서로 한참을 이야기하며 앉아 있었다. 지나가면서 쓱 봐보니 물속에서 주워오던 판때기들에 많이 쓰여 있던 영어들이 화면 위로 왔다 갔다 했다. 둘은 그 글씨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 글씨를 더 쓰고 있었다. 수빈씨는 불안해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한참 있더니 할머니는 크루즈와 이야기가 잘 됐다고, 다행히 한국어를 쓰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둘이 그냥 앉아만 있었는데 무슨 크루즈와 연락을 했다는 건지 의아해하는 내게 할머니는 영어로, 그리고 글씨로 배의 무전기처럼 이야기를 나눈 것이라고 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너무 많았다. 그 뒤로는 준비의 시간이었다. 선선이에도 새로 정비해야 할 게 많았다. 대부분은 아기를 위한 것이었다. 아기는 조그만데 아기를 관리하는데 필요한 짐은 한가득 이었다. 기저귀도 잔뜩, 먹을 것도 잔뜩, 아기가 더운 밖에 견딜 수 있도록 어른 보호복을 자르고 붙여서 조그맣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선풍기가 아니라 에어컨도 달았다. 준비하는 동안에도 아기는 울기만 했다. 그럴 때면 수빈씨는 자신의 가슴에서 나오는 젖을 먹였다. 먹으면 또 안고서 한참을 두드려 줬다. 잠깐 잠잠해졌다 싶으면 또 울어서 다시 안아서 다독여 주고, 또 잠잠해졌다 싶으면 똥을 싸서 기저귀라는 걸 갈아 주고. 이만저만 손이 가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며칠 동안 길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동안 아기가 먹을 수 있도록 조그만 병들에 젖을 모았다. 내가 저것을 먹고 자랐고, 또 나중에 내가 아기를 낳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에서 저게 나오고 저것을 먹여야 한다니. 정신도 몸도 너무 바빴다. 할머니와 내가 이런저런 일들을 해서 그렇지 수빈씨 한 사람만 있다면 아기를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저런 고생을 해서 키워지는 것이라니.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고생을 시켰을까 궁금했다. 나를 보살펴준 건 엄마, 아빠였을까? 할머니, 할아버지였을까? 물건 준비를 하고 나서는 할머니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의 설명을 잔뜩 들었다. 가야 할 곳, 안전한 길, 아기를 다루는 법, 다 생전 처음 해야 할 것들이라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너무 불안했다. 계획은 인천이라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 앞에 크루즈가 온다고 했다. 계속 서쪽으로 가면 된다고는 하지만 그 거리가 너무 길었다. 하루 안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선선이에 식량하고 장비까지 싣는다고 생각하니 무게도 점점 늘어날 것이고 말이다. 수빈씨는 그때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크루즈로 떠나지 않고 수빈씨 혼자 남는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일들을 처리하면서도 계속 설득을 했다. 할머니의 마음과 일솜씨에 믿음이 갔는지 나중에 둘은 같이 짐을 싸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나도 할머니의 행동을 보면 믿음이 갔다. 할아버지랑 셋이 있을 때의 할머니도 항상 대단해 보였지만 지금은 그 때보다 100배는 더 대단해 보였다. 준비가 다 끝나가자 할머니가 나와 수빈씨를 불렀다. 

"수빈씨, 이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우리에게 뾰족한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에요. 지금의 수빈씨 혼자서는 선아를 돌보기가 쉽지 않아요. 선아에게는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해요. 우리를 믿어줘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한 번 시도 해봐요." 

수빈씨는 아직도 조금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선아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 듯했다. 

"알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수빈씨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준비가 끝나니 날이 어두워져서 출발은 아침에 하기로 했다. 내일은 하루 종일 고생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푹 자둬야 하는데 잠이 잘 오지가 않았다. 머릿속에는 새롭게 안 사실들과 더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것들로 복잡했다. 과거의 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모습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떠올랐다. 과연 크루즈라는 배를 타면 모든 게 해결될까? 할머니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있을까? 그것들을 숨긴 것일까?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셋이서 지내던 생활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좀 더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이 멈추질 않아서 쏘니를 켰다. 음악을 들을 때만큼 편안하고 좋은 기분이 계속되면 좋을 텐데.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할머니와 수빈씨는 이미 이것저것들을 옮기고 있었다. 나도 얼른 잠자리를 정리하고 돕기 시작했다. 준비를 끝마치고 선아와 우리 셋은 선선이에 올라탔다. 수빈씨는 아직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종실 안에서 선아를 보거나 쉬게 했다. 곤히 자고 있는 선아가 깨지 않도록 할머니와 나는 선선이를 조심히 조종했다. 할머니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주변에 계속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 수빈씨와 선아에도 신경을 쓰느라 바빠 보였다.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아닌 듯했다. 도착하면 다 물어볼 거라고 마음먹었다. 배터리를 잔뜩 가져오고, 선선이의 지붕에도 태양전기판을 펴놓았다. 아기의 보호복 에어컨은 꺼져선 안됐다. 그리고 이번에는 먼 길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선선이의 모터도 오랫동안 사용해야 했다. 전기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할머니와 나는 선풍기로 버텨야 했다. 수빈씨는 조종실에서 쉰다고 하지만 쉬는 게 아니었다. 아기는 끊임없이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아기가 먹는 모유는 너무 차가우면 안됐기 때문에 상하지 않게 보관했던 냉장고에서 꺼내와 한참을 따뜻하게 만들어 먹여야 했다. 가끔 너무 울면 품에 안고 달래줘야 했다. 수빈씨가 너무 힘들어 보일 때 내가 도와주려고 잠깐 안아봤는데 엄마가 아닌 걸 알았는지 더 크게 울기만 해서 도움이 되질 못했다. 하지만 또 선아가 웃고 좋아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참 어려운 일이었다. 수빈씨 혼자서 보냈을 시간들도 그렇게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했겠지. 만약 자신의 아기라면 그 기쁨도 훨씬 더 하기에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어제부터 몇 시간밖에 같이 있지 않았지만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을 때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으면 할머니는 아기들은 다 그런 거라고 그냥 참고 있으라고 했다. 예전에는 이런 아이들도 엄청 많았겠지. 그럼 그 많은 아기들이 다 울고, 그럼 더 많은 사람들이 참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하긴 저런 아기들 탓을 할 수는 없으니까. 수빈씨가 참 안쓰러워서 뭐라도 더 해주고 싶었다. 가끔 선아의 기저귀를 갈아야 할 때는 할머니가 도와주러 갔다.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똥이 묻은 기저귀도 잘 갈아주었다. 난 누가 내 기저귀를 갈아 주었을지 궁금할 뿐이고. 뭐가 어쨌든 할머니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땀은 계속 흐르고, 선아는 울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주희야." 

할머니는 잠깐 멍하니 있던 나를 불러 앞쪽 하늘을 보여 주었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선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먹구름이었다. 보통 때였으면 비바람을 피하려고 아무 데라도 자리 잡을 곳을 찾아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할머니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당연히 도망가는 쪽을 택했겠지만 결국엔 할머니의 말을 들어야 했다. 

"주희야, 최대한 앞쪽으로 가면서 자리를 찾아보자."

"네, 알겠어요."

할머니는 조종실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선아를 안고 있는 수빈씨를 한번 보고서는 어렵게 대답을 했다. 모든 것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뒷걸음치기는 쉽지 않다. 나도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그 뒤로 얼마나 더 전진했을까. 바람이 제법 강해지면서 파도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나는 근처에 자리 잡을 곳을 찾아보는데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근데 그때 레이더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물고기가 우리 배를 향해 온다는 신호였다. 가끔 서울 안쪽에서도 커다란 물고기를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더 깊은 바다 쪽으로 왔으니 그런 물고기를 만날 확률은 더 높아졌을 거다. 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모터를 멈추고 할머니가 만들어 놓은 라이트를 켰다. 물속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배의 그림자가 보일 텐데 라이트로 아래를 향해 빛을 쏘아 그림자를 없애서 배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끔 잡히는 물고기들 중에 배 아래쪽에서 빛을 내는 것들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런 물고기들을 보고선 선선이에도 비슷한 기능을 하는 장치를 만들어 놓았었다. 예전에 거대한 물고기를 만났을 때 그 불빛으로 무사히 지나갈 수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선아가 울기 시작했다. 수빈씨는 온갖 방법으로 선아를 달래 보는데 울음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세지는 비바람과 거기에 흔들리는 배가 선아의 울음을 부추기는지도 몰랐다. 얼른 땅에 자리를 잡아야 했지만 모터를 켜거나 노를 젓게 되면 물고기를 자극할지도 몰라 당분간은 이동하기도 어려웠다. 레이더는 불안하게 깜빡이며 물고기가 다가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선아의 울음소리는 더 커져가고, 물고기는 그것을 느낀 건지 어떤 건지 방향을 바꾸지 않고 선선이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나 침착하던 할머니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이 계획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냥 할머니와 나의 매일은 그런대로 살 만했는데. 그걸 다 버리고 와서 이런 위기를 겪고 있다니. 수빈씨를 보고 선아를 보고. 당황스러운 할머니의 얼굴. 난 할머니의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할아버지와의 일이 생각났다.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갑자기 비상용 고무보트를 물 위로 던졌다. 보트는 물 위에서 부풀어 오르고, 난 그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할머니를 한번 보고는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면서 선선이에게서 멀어졌다. 거리가 멀어져선지 선아의 울음소리는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보트는 등 뒤쪽으로 전진해갔기 때문에 할머니의 얼굴을 계속 보면서 멀어져갔다. 처음 보는 표정이라 할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속에선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파도는 거세지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물속에서 뭔가 솟구쳐 올랐다. 보트는 뒤집히고 나는 물속에 떨어졌다가 튀어나왔다가를 몇 번 하고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어딘지 모를 땅 위에 떠밀려 온 상태였다. 아직 비는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보호복은 찢겨져서 여기저기로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물가를 피해 좀 더 땅 쪽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다 보니 땅이 푹 파여 있는 곳이 보였다. 거기에는 이상한 뚜껑 같은 것이 있었고, 쇠로 된 무거운 뚜껑이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은 듯 말라 있는 공간이 있었다. 열었던 뚜껑을 닫으니 암흑이었다. 소용이 없어진 보호복을 벗어 버리고 더듬더듬 구석을 찾아가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푹신한 자리에서 천을 몸에 덮고 있었다. 옷은 아직 축축했지만 몸을 살펴보니 딱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다행히 쏘니도 주머니에 있었다. 아직 몸이 무거웠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수빈씨의 아파트 같은 공간이 보였다. 하지만 더 깨끗하고 물건들이 더 많았다. 벽에는 책 같은 것들이 촘촘하게 꽂혀 있었고, 다른 벽에는 컴퓨터 같은 빛나는 판때기가 있었는데 훨씬 컸다. 그 아래쪽에도 반짝이는 게 많았다. 뒤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구나?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더라구. 따뜻한 것 좀 줄까?" 

내 또래쯤 되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표정은 나빠 보이지 않았지만 실제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기에 나는 경계를 풀 수가 없었다. 

"여기는 어디야? 너는 누구고?" 

"아아, 미안. 나는 안수용이라고 해. 여기는 부천 어디쯤이야. 나도 며 칠 전에 들어와서 잘은 모르겠어. 누가 예전에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집 같은 건가 봐. 배를 타고 가다가 지쳐서 조그만 땅 위에 올라왔는데 풀들이 벗겨져 있는 곳이 있었어. 거기에 무슨 철판 같은 게 있어서 혹시 팔 수 있는 건가 한번 뒤집어 봤는데 더 커다란 뚜껑 같은 게 있지 뭐야. 그 걸 열었더니. 와! 정말 놀랄 노 자였어." 

수용이라고 하는 애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속에서 주워오던 물건들은 하나 같이 색이 빠져서 흐리멍덩했었는데 여기의 물건들은 다들 여러 가지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는데 수용이가 양손에 컵을 들고 왔다. 따뜻한 컵에는 알 수 없는 냄새의 시커먼 물이 들어있었다. 그걸 받아 들고 먹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자 그것을 본 수용이는 자신의 컵에 있는 것을 한 모금 마셨다. 

"난 3일쯤 전에 이 집에 우연히 들어왔어. 처음 보는 신기한 게 너무 많더라고. 먹을 것도 뭔가 많은데 그건 초코라떼라는 건가 봐. 조그만 봉투에 들어있었는데 뜨거운 물에 풀어서 먹으라고 쓰여 있더라구. 한 번 먹어 봐. 달고 맛있어." 

그렇게 말하고 수용이는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의심이 가시지는 않지만 컵의 내용물을 조금 맛보았다. 처음 느껴보는 자극이 혀를 타고 올라왔다. 단것들은 가끔 먹어봤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다양한 향이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 모금씩 홀짝홀짝 계속 맛을 보게 됐다. 피곤했던 몸에 따뜻하고 단 게 들어가니 잠깐 멍해졌다. 그러다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수용이는 미소를 살짝 지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퍼뜩 비바람에 휩쓸려 이곳에 오기 전에 있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밖에 비는 그쳤어?" 

"너는 오후 늦게 왔어. 밖에서 덜컹하고 소리가 들렸을 땐 진짜 놀랐다니까. 지금은 밤이야. 아직 밖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고. 그칠 때까지 조금 더 쉬어야할 거야. 이런 비에는 아무도 다닐 수 없을걸." 

내가 갑자기 당황하며 소리치자 수용이는 조금 놀란 얼굴로 대답을 했다. 그 정도 비라면 할머니도 많이는 못 가겠지. 어딘가 자리를 잘 잡고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생각이 가시자 수용이의 감정도 조금 신경이 쓰이게 됐다. 수용이는 계속 친절하게 대해 줬는데 나는 너무 매정하고 놀라게 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미안함이 느껴졌다. 

"나는 한주희라고 해. 미안해. 내가 지금 좀 놀라서 말이야. 챙겨준 거는 고마워."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서로 도와야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용이는 다시 친절한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이 되긴 했다. 별수가 없긴 했지만. 

"할머니와 같이 인천으로 배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비바람과 큰 물고기를 한꺼번에 만나서 말이야. 할머니의 배를 구하려면 혼자 고무보트를 타고 떠날 수밖에 없었어. 큰 물고기의 주위를 끌어 보려고 했거든. 어떻게 나는 살게 됐네. 할머니도 무사하면 좋겠는데." 

"넌 대단하구나. 할머니를 위해서 너를 희생할 생각까지 하다니. 할머니는 아마 무사하실 거야. 비가 그치면 주위를 한번 둘러봐 봐. 너를 찾고 계실지도 몰라. 아니면 목적지로 가 보거나.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자세한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말도 거짓말은 아니고, 내 표정이 정말로 낙담한 것처럼 보였는지 수용이는 더이상 묻지 않고 위로를 했다. 과하다면 과하게 긍정적인 말들을 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며 살았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용이는 이 집의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깨끗한 화장실도 있었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도 있었다. 비누도 있었고 전기도 풍족한 것 같았는데 태양전기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커다란 가스레인지도 있고, 통조림도 무척 많았다. 할머니와 수빈씨가 이곳을 발견했다면 많은 것이 해결됐을 텐데, 지금 바로 데려올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먹을 것이 많았지만 할머니 생각을 하니 배부르게 먹는 게 너무 사치 같았다. 길을 떠날 때 수용이 몰래 통조림들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맑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몇 번이나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나 있는 구멍에 올라가 확인하곤 했지만 비는 계속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수용이는 집들을 계속 둘러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책도 엄청 많고 책 이외의 물건들도 많았다. 희한한 그림들이 잔뜩 붙어져 있는 방이 있었다. 한글 같은 글씨가 크게 쓰여 있는 것도 있었는데 글씨를 잘 못 쓰는 사람이 썼는지 이상해서 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 괴물'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위쪽에는 실제 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정작 조그만 글씨는 잘 썼는데 '가족의 사투가 시작된다.' 라고 쓰여 있었고, 조그맣게 사람들 이름도 쓰여 있었다. 그림 대부분에는 영어로 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 방엔 책처럼 얇고 납작한데 책보다 크기가 훨씬 작은 것들이 잔뜩 꽂혀있는 벽이 있었다. 희한하게 파란색의 투명한 상자 같은 것의 속 안에 동그랗고 납작한 것이 꽂혀 있었는데 거기도 한글과 영어로 된 것들이 잔뜩 있었다. 알 수 없는 것들만 잔뜩 있고 지루해져서 밖의 큰 방으로 나왔다. 수용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잘 피해있는 건지. 수빈씨랑 같이 크루즈로 간 건지. 갔다면 거기서 잘 지내고 있는 건지. 나도 갈 수 있는 건지. 어떤 것도 대답은 없었고, 어떤 선택지도 완벽하게 행복한 길은 없을 터였다. 답답했다. 내가 앉아서 가만히 있자 수용이도 혼자 돌아다니기가 어색했는지 근처의 푹신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나는 수용이의 낙천적인 면이 참 신기했다. 매일 살아남기 위해 경계하고 눈치를 보는 세상이었는데 수용이는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수용이라고 했지? 너는 어쩌다 여기로 온 거야?" 

수용이는 갑자기 생각에 빠진 얼굴이 되면서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수용이는 거리낌 없고 친절했기에 어떤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별생각 없이 말을 해버렸는데 만약 어려운 상황을 겪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할 수 없을 만한 질문이기도 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면 대답 안 해도 돼. 나는 별말도 없으면서 너무 큰 걸 물어봤지 미안해." 

수용이는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요새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생각 좀 하느라고. 사실 얼마 전까지도 가족들하고 같이 다녔었거든. 하지만 새들한테 습격을 당해서 결국엔 혼자가 됐어. 난 더 남쪽의 섬에서 살았었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점점 위로 올라오다가 우연히 여기 집 구멍을 발견하고 들어오게 된 거야." 

수용이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이 많이 변하지 않았다. 다 잊은 것인지, 아니면 생각을 안 하는 것인지. 난 할아버지 생각을 하면 표정부터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미안해.  너무 생각 없이 가볍게 물어봐서. 힘들었겠구나."
"응, 그때는 힘들었는데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내가 슬퍼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엄마, 아빠가 더 슬퍼할 것 같아서. 가끔은 슬픈데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하는 게 맞을 거야." 

수용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쉽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기가 어려운데 수용이는 어떻게 그러는지, 그런 마음가짐은 조금 배우고 싶었다. 수용이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도 할아버지가…… 새들에게 공격을 당해서…… 근데 나는 아직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는 못하겠어." 

말을 하면서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아마 수용이도 나의 얼굴에서 다 알아볼 수 있었을 거다. 수용이는 그냥 특별한 위로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잠시 나와 수용이는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러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수용이였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보기에는 안 좋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이런 걸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한 번 봐 볼래?" 

수용이는 얼굴에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띠며.

"새에 대한 것 같아."

하고 말했다. 나는 가슴이 덜컹거렸지만, 수용이와 같은 태연함을 가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수용이는 벽에 있는 커다란 판때기 앞으로 갔다. 그 아래쪽에 반짝이는 것들 중에서 무언가를 건드리니 화면이 켜졌다. 파란색 바탕에 하얀 네모 칸들도 있고 하얀 글씨들이 있었다. 화면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어두워졌다가 다른 그림으로 바뀌었다. 수용이는 물속에서 가끔 보던 주먹만 한 뭉치에 막대기랑 누르는 단추들이 달린 것을 만지면서 화면의 그림들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화면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마치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사람들도 나왔는데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화면이 커서 그런지 속 안에 진짜로 사람이 있는 것만 같았다. 무슨 커다란 도마뱀 같은 것도 나오고, 물속에서 많이 보았던 자동차가 실제로 움직이기도 했다. 나는 수용이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잘 봐 봐." 

빠르게 지나가던 시간이 갑자기 정상적인 속도로 바뀌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 안에는 사람들 몇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앞에는 수용이와 내가 지금 보는 것처럼 커다란 화면이 있었는데 더 컸다. 그 화면 안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 화면 옆으로 어떤 할아버지가 다가오는데 입고 있는 옷만 달랐지 화면의 사람이랑 똑같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무슨 말들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말이 아닌 것 같았다. 화면을 자세히 보니 아래쪽에 한글이 나왔는데 마치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한글로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두 명이 피가 필요하다느니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더니 화면 속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한 명, 두 명 늘어나서 같은 사람이 다섯 명이 되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복제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앉아 있는 사람들 앞의 화면에서는 모기의 그림이 나왔다. 그 모기는 ‘공룡’이라는 것의 피를 빨아먹었다. 그 모기는 갑자기 투명한 돌 같은 것에 갇히고 어떤 사람이 기다란 바늘로 그 모기에서 무언가를 뽑아냈다. 다음엔 뭔지 알 수 없는 말만 나오다가 갑자기 화면 안의 방이 움직였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있는 방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각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쪽으로 몰려갔다. 거기에는 한국 사람 같아 보이는 사람도 있었는데 외국말을 되게 잘했다. 그러더니 아까 나왔던 할아버지가 어떤 동물이 알 속에서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는 모습이었다.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 동물을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 같았다. 나는 왜 수용이가 이걸 보여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상관이람? 

"수용아 이게 뭐야? 왜 이걸 보여주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확실히 알 수 있는 장면은 더 뒤에 있거든."

수용이가 그 주먹만 한 뭉치를 조종하자 화면의 그림들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는데 남자 어린애가 한 명 나오고,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지, 비슷할지 모를 외국 여자애도 한 명 나왔다. 갑자기 화면은 비가 많이 내리는 어두운 밤이 됐다. 거기서 사람들이 아주 커다란 동물에게 쫓기는 모습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난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 동물은 약간 익숙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화면이 밝아지고 남자 어른이 아이들 둘을 의자가 많은 곳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거기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 아이의 뒤쪽에 새가 있었다. 완전히 새랑 똑같지는 않았다. 새는 깃털이 더 있었고, 입에는 커다란 부리가 있었다. 하지만 눈이나 몸의 모양이 너무 새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수용이를 쳐다봤다. 수용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번쩍이는 어떤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새들이 아이들을 잡아먹으려고 쫓아가는 장면이었다. 새들의 움직임, 그 불길한 소리들. 나는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만! 그만!" 

수용이는 말없이 화면을 껐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앞의 이야기들과 뒤의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것인가? 사람들이 새를 만들어 낸 것이란 말인가? 

"수용아. 넌 이걸 처음부터 다 봤어?"

"응."

"이게 무슨 내용이야? 사람들이 새를 만들었다는 거야?"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어. 근데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새를 만들고, 더 커다란 다른 동물들도 만들었어. 그걸 공룡이라 부르는 것 같아. 우리가 아는 새랑 비슷한 저 공룡의 이름은 '벨로시랩터'래. 저기는 ‘이슬라 누블라’ 라는 섬의 ‘쥬라기 공원’이라고 하는 곳 같은데 나오는 공룡 중에서 벨로시랩터만 한국에 온 건지, 아니면 다른 공룡들도 다 한국에 살고 있는데 본 적이 없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어. 어쨌든 저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 저 사람들은 만들었다고 하니까." 

나에게 있어 사람이라는 것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이었기 때문에 딱히 사람 자체가 좋은지 싫은지 별로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공룡, 그러니까 새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할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났다. 물론 이미 세상은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싸워서 서로를 죽인 전쟁이란 게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건 예전에 끝난 거니까. 하지만 할아버지는 얼마 전에 죽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도봉산 쪽이 좋다고 했다. 난 이유를 몰랐지만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고, 단지 도봉산까지 가는 게 너무 귀찮을 뿐이었다. 그날도 상계동에 있는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소보다 좋은 물건이 없어서 조금 늦은 시간까지 머구리를 하게 됐다. 그럼에도 영 진전이 없어서 그만두고 머물 자리를 찾는데 하루 종일 배 위에서 힘들었던 나는 수락산 쪽으로 가자고 떼를 썼다. 도봉산까지는 한참 걸리기에 도착하면 날이 어두워질 것이었다. 어두워지면 배의 모터를 사용할 수 없고 노를 저어야 했다. 펌프질을 오래도록 하느라 이미 다리는 힘들어 죽겠는데 노를 저으려면 팔도 아플 테고 아픈 다리도 더 아플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래도 도봉산 쪽으로 가자고 했지만 내가 하도 성화를 해서 난처해했다. 나와 할머니는 서로 말없이 할아버지에게 압력을 주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날따라 할아버지는 내 편을 들어서 수락산에 머물자고 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까지 그렇게 말하자 의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되게 노를 젓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할머니는 약간 불안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안심시키고 나에게 오늘 한 번만 쉬고 내일부터는 꼭 도봉산으로 간다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말했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니까. 오늘만 잘 쉬면 된다고 바보처럼 신이 났었다. 평상시처럼 물건을 나르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쏘니를 들으면서 편히 잠을 잘 준비를 했다. 그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밤새 새들의 습격을 대비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깊이 잠이 들었던 나는 누가 격하게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가 깨자마자 입을 틀어막더니 조용히 하라고 했다. 아직 한밤중이었는데 할머니는 등에 짐을 가득 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새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 매달아 놓은 종들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크게 외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언제 들어도 등골이 서늘하게 기분 나쁜 새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얼른 뛰어 가!" 

할머니는 나를 꽉 잡고 선선이를 향해 뛰었다. 나도 너무 무서워서 있는 힘껏 뛰었다. 새들의 발소리가 들려오는데 뒤돌아 봐도 할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할머니와 나는 배에 타자마자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얼마나 노를 저었을까. 땅에서 한참 멀어지고 날이 밝아 왔지만 할머니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냥 멍하니 먼 곳만을 봤고 나는 울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주희야, 할아버지 일은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 

"내가 가자고 그러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내 잘못이지 왜 아니에요?" 

모든 건 내 잘못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하고. 이제 돌아가 봤자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울 터였다. 

"주희야, 도봉산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어. 그냥 운이 안 좋았던 거야.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그냥 공평할 뿐이야. 대신 자비롭지 않지." 

"그러면 왜 맨날 수락산에 가는 게 싫다고 한 거예요?" 

할머니도 할아버지 생각에 슬펐을 텐데 그 질문이야말로 제일 아픈 곳을 건드렸는지 지금까지 봤던 할머니의 표정 중에서 제일 슬픈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차마 나를 계속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로 말을 이어갔다. 

"그건 말이지. 사실 주희 너희 엄마, 아빠 옆에서 너를 발견한 곳이 수락산 근처였단다. 너를 엄마, 아빠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한 근처에 두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의정부로 갔었지만 그곳의 자원들도 한계가 있었고. 아무리 아래로 내려왔어도 다시 수락산 근처로 가고 싶지는 않았거든. 상계동까지 가 놓고는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어. 내가 더 제대로 장소를 골랐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할머니는 항상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몰랐다. 이런 이야기는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섞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의 진실도 너무 아팠다. 울고 있던 나는 더 크게 울음이 터졌다. 할머니는 내게로 다가와 꼭 안아주었다. 나도 할머니를 안았다. 할머니도 우는 것인지 가슴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고개를 들고 확인할 수는 없었다. 

수용이가 보여준 이야기는 할아버지를 잃은 날을 떠오르게 했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퍼뜩 잠에서 깼을 때, 서둘러 사다리를 올라 밖을 살펴봤다. 해가 떠오르고 있는 하늘은 다행히 비가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 보였다. 얼른 떠날 준비를 마치고 출발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다시 실내로 내려오니 내 소리에 깬 수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떠나는 거니?"

"응, 할머니를 만나야 해."

난 단호했다. 아직 크루즈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장소는 현실로 존재하고, 그런데도 마치 꿈만 같은 곳이었다. 만약 할머니와 수빈씨만 있었다면 한참은 더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문제고 내게 더 중요한 건 할머니였다. 

"수용아 너는 어떻게 할 거니?" 

"나는 아직 여기 더 있어 보려구. 딱히 갈 곳도 없고. 여긴 식량도 많고 살펴볼 것도 많은 것 같아서. 필요한 게 있으면 다 가져가. 고무보트도 있고, 식량들도 나 혼자 먹기엔 너무 많으니까 얼마든지 가져가. 꼭 할머니를 만났으면 좋겠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로 돌아와도 돼. 뭐 내가 주인도 아니고, 또 나중에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고마워." 

수용이는 끝까지 친절했다. 나는 고무보트를 확인하고, 새것 같은 보호복도 챙겼다. 그리고 쌍안경과 식량들 등등. 다행히 밖은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맑았다. 수용이는 구멍 위까지 마중을 나왔다. 나는 수용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보트를 타고 노를 저었다. 우선 쌍안경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할머니는 절대 맡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서 분명 수빈씨와 선아를 먼저 생각했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이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역시 할머니와 선선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다른 수는 없었다. 부천이면 이미 인천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을 터였다. 나침반으로 인천의 방향을 확인하고 쌍안경으로 그쪽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물 위로 아파트들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중에서 유독 이상한 모양의 커다란 아파트가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저게 크루즈인가? 저렇게 큰 것이 배일 수가 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일단은 가까이 가보는 수밖에. 

보트에서 노를 저으며 보는 세상은 항상 아름다웠다. 하늘은 예쁘고, 물은 맑았다. 땅이 보이는 곳들은 초록이 우거져 있고, 물 위에 나와 있는 아파트들도 어느새 식물이 덮여있는 곳들도 많았다. 물속에는 작은 물고기들도 지나다니고, 하늘에는 작은 새들도 날아다니고. 땅 위에는 조그만 동물도 많고, 이제는 새인지 공룡인지 헷갈리지만 땅 위의 동물들도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 터였다. 자연은 그 자체로 완전했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일 텐데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든 것일까? 너무 약하디약했다. 물에 맨몸으로 오래 들어가 있으면 몸이 퉁퉁 붓고 추워진다. 물 밖은 열기로 가득해 낮의 햇볕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현기증이 날 듯하고. 피부는 약해서 금방 찢어지고, 날카로운 손톱이나 발톱, 이빨도 없다. 그래서 저런 아파트들을 짓고, 그 안에 수많은 물건들을 채워 넣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게 어려운 세상이 됐고. 사람은 이제 사라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시기에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목숨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거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야겠지. 나는 할머니와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영영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수빈씨, 아기 선아도 생각나고. 할머니는 나를 주워서 키워준 것처럼, 선아도 외면할 수 없었을 거다. 선아의 귀여웠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품에 안았을 때의 포근함, 부드러움. 나라도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런 마음도 내가 했던 무모한 행동에 영향을 주었을 거다. 다들 각자의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그게 뭐가 됐든.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머구리를 하며 다니던 시간. 그런 걸 생각하면 조금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슬프기도 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까. 할머니는 잘 계실까. 그렇게 생각에 빠져 이상한 아파트 쪽으로 계속 노를 저었다. 그건 점점 커졌다. 지금까지 봤던 어떤 아파트보다도 더 거대했다. 물 밖에서 봤던 아파트가 열 개도 넘게 붙어있는 것 같았다. 너무 엄청난 거대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커다란 덩어리가 물 위를 떠다니며 움직일 수 있다니 눈앞에 두고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쌍안경으로 보니 아파트만큼 많은 창문이 있었는데 여기저기 사람들이 보였다. 나보다 더 어린아이들도 많고 다른 나라의 사람인지 처음 보는 생김새의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벌써 나를 알아봤는지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살펴보다가 크루즈 앞의 물 위로 쌍안경의 시선을 옮기니 조그맣게 선선이가 보였다. 선선이는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쌍안경을 접고 노를 저었다. 아마 태어나서 노를 저었던 속도 중에 가장 빠른 속도였을 것이다. 할머니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져 올수록 내 눈에서 나오는 눈물로 흐리게 보였다. 보트가 선선이에 살짝 닿고, 나는 선선이 위로 뛰어 올라가 할머니를 힘껏 껴안았다.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할머니 미안해요." 

눈물이 터져 나오고 무슨 말인지도 모를 감정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할머니도 나를 꽉 껴안아 주었다. 

"주희야.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할머니도 미안하다. 네 덕분에 다행히 수빈씨랑 선아는 무사히 크루즈에 탈 수 있었어. 고맙다.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할머니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할머니, 나 할머니랑 헤어지기 싫어요. 이제 잘할게요, 할머니. 우리 같이 잘 살아요." 

"그래, 할머니가 지금까지 너무 얘기하지 않은 게 많았다는 거 잘 안다. 나도 겁을 먹고 있었어. 하지만 이제 너도 다 컸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 알려줄게. 우리 같이 잘 정해보자." 

할머니와 나는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바라는 세상은 우리 둘이 전부였고 모든 걸 다 가진 듯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어떻게 살아남아서 찾아올 수 있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할머니는 그런 장소를 발견했다는 것에 운이 좋다며 신기하다고 했다. 아직은 차마 새에 대해서 보았던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나는 크루즈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아직 두려운 느낌도 있었다. 할머니는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 듯했다. 

"주희야, 내가 이번에는 조금 무모하게 계획을 밀어붙였다는 걸 잘 알아. 나는 그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거든. 수빈씨랑 선아는 크루즈가 필요해. 거기에는 사람들도 많고, 장비들도 있어. 하지만 너와 헤어지고서 많은 생각이 들었단다. 그것들이 너한테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어. 밖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많으면 또 그 안에서의 문제도 있거든. 나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 사이의 일들 때문에 밖에서의 생활을 택하기로 했던 거였어. 예전에는 그게 옳다고 생각이 됐어. 나의 이기심으로 너를 한곳에 머무르게 한 거지. 이제는 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너에게도 다양한 세상을 알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해. 크루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다 알려줄게. 그리고 너는 선택하면 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크루즈를 타고 떠나느냐. 아니면 예전처럼 나랑 둘이서 밖에서 살아남아 보느냐. 아니면 또 새로운 길을 찾아보느냐. 이제부터는 너의 뜻대로 정하고 나는 최대한 도와주도록 할게." 

할머니의 말은 내게 너무 큰 선택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진짜 살아가는 것은 그런 거겠지. 지금까지는 할머니가 그걸 대신해 준 거고. 

"알겠어요. 할머니. 그동안 참 고마웠어요. 할머니가 나를 지켜주려고 그런 거 다 알아요. 나도 이제 잘 배울게요. 많이 물어볼 테니까 다 말해줘야 해요." 

"그래, 알았다." 

할머니의 얼굴에 조그만 미소가 떠올랐다. 어떤 선택을 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할머니가 그동안 나를 지키려고 했던 마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런 할머니가 있기에 나는 더 큰 세상을 만날 수 있었고, 앞으로 더 준비를 잘 할 수 있을 거다. 크루즈든, 바깥세상이든, 수용이가 있던 비밀 장소든. 우리의 행복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장소에 있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겠지만, 오늘만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편히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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