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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스토아적 죽음

2019.09.17 19:0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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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200년 뒤 살아 돌아 오겠어요.”

 

 

2016년, 그러니까 200년 전 이 소녀의 인터뷰는 매우 비장했다. 말기암 환자였던 소녀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겨우 열 네 살이었다. 당시 많은 영국 국민들은 텔레비젼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까지들 슬퍼는 않았을 텐데. 오히려 그들은 소녀를 존경으로 대했어야 했다. 물질에 취해 아무도 진지하게 인생을 살지 않았던 유일한 시대, 그런 혐오스런 세대에서 굳게 자기 운명을 개척했던 용기는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내 손에는 이 두꺼운 종이 뭉치가 들려 있다. 대담한 소녀에 얽힌 수 많은 대화는 읽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더디게 느껴지는 발걸음은 두터운 종잇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 163회 의료윤리위원회 회담

임페리얼 컬리지 런던 의과대학병원

 

< 사안 >

 

앨리샤 심스 (여성 / 220세)

 

# 속질모세포종

 

# 다발성 원격전이

 

 

# 개두술 시행 (2016년)

 

# 뇌척수 방사선치료 시행

 

# 어쥬번트 항암화학요법 시행

 

# 스테로이드 치료 시행

 

# 뇌실-복강간 단락 삽입술 시행

 

 

# 냉동 / DMSO 부동액 혈액 대체술 시행 (2017년)

 

# 해동 / 골수 재활성 자극술 시행 (2216년)


1. 본원에서 환자에 대한 최초, 그리고 해동 이후의 뇌종양 수술이 집도되었고, 따라서 가장 많은 의무기록이 남아 있어 자문병원으로 선정됨.

 

2. 의료윤리위원회는 의학계, 윤리계 각 4인의 전문가로 구성되었음. (아래)


<의학계: 본원 의대 교수>

유리 장 (종양내과) - 의학계 위원장 / 의료윤리위원회 의장

예르시니아 론트리 (흉부인터벤션과)

스티브 살라딘 (재생의학과)

에드먼드 햄 (신경인터벤션과)

 

<윤리계>

폴 나집 (스토아교 목사, 런던 제논기념교회) - 윤리계 위원장

토마스 쿠페 (철학과 교수, 옥스포드대)

리처드 아미르 (무슬림 이맘, 런던 센트럴 모스크)

피터 왈도 (변호사, 킹슬리내플리 법무법인)


2016년에는 뇌종양 말기환자를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을 뿐이다. 그러던 그녀는 ‘냉동 수면 치료’란 의료 상품을 접하게 된다. 몸을 얼려 수면상태에 들어 가 200년 후 발전된 의학기술로 치료 받는 것이다.

 

DMSO 부동액 대체술, 사망 즉시 혈액전부를 외부물질로 치환하여 다발성 장기부전을 막는다는 이론적 근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옛날 의료진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검증 안 된 기술이었다. 말하자면 불법 의료 행위였다. 하지만 이 어린 환자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의학적 조언에 반한 자의 퇴원을 하고, 치료를 반대하는 아버지와 법정싸움까지 벌여 이겼다. 이 후 도미(渡美)하여 냉동 수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200년 후 앨리샤 심스는 214세의 나이로 다시 살아났다. 현대 의학으로 암 치료는 우스운 정도였다. 하지만 완치 후 그녀는 무시무시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살인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닥터 토마스 랜디스, 앨리샤 심스는 자기 주치의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높은 명성으로 곧 사회적 관심사가 된다.

 

검사는 기소에 앞서 임페리얼 런던의과대학병원에 도움을 청했다. 살인의 정황은 명확하나, 심신미약상태로 봐야 할 지 애매했기 때문이다. 의료윤리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나는 윤리계 위원장을 맡았다. 사설 인공지능 녀석은 회의록 뭉치를 보자 마자 흥분했지만 (이 고전적 기록도구는 보통 비밀 자료를 담을 때만 쓰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편치만은 않았다.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슴을 쓸었다.

 

밤샘 회의를 지금 막 마쳤지만 피곤에 찌들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빠르게 복도를 걸어 철창문을 마주했다. 그녀를 만날 시간이 왔다.

 

 

“데이빗. 좋은 아침이야.”

 

“호오! 이쪽입니다요. 나집 목사님.”

 

 

격리병동 관리인이 철창문을 열어주었다. 끼익 쇠 긁는 소리가 병동과 바깥 세상 사이 더 단절감을 준다. 쇠로 된 문이라니, 중세 시대에나 들릴 법한 이런 소리는 요즘 흔하지 않다. 사람이 열어주는 문도 매우 오랜만이었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시죠, 헤헤. 오랜만에 뵈어도 역시 신수가 훠언하십니다아.”

 

“하하, 쓸 데 없는 소릴······.”

 

“제가 숭배하는 미남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저는 목사님 같이 잘 생긴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각진 턱, 상대를 불태워 버릴 것 같은 이 눈빛······. 게다가 엄청난 덩치시잖아요! 어깨는 폭발하는 화산처럼 솟았고, 가슴은 방패같고······.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겠다니까! 인도인들은 고기를 안 먹는다는데 대체 이 근육의 비결이 뭡니까요? 크하, 이 팔 두꺼운 것 좀 봐. 이 고급진 코트가 터질 것만 같네요. 나도 인도인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100년간 태닝을 해도 이런 멋진 피부를 가질 수 있을까!”

 

 

관리인 데이빗은 아무도 없는 긴 복도를 빠른 박자로 걸으며 날 보고 낄낄거렸다. 호감 가는 사내는 아니었다. 그는 젊지만 노인같아 보였다. 허연 얼굴 위 병든 것처럼 검버섯이 피어난 작고 마른 백인이었다. 위생상태도 불량했다. 심한 구취에 양 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금발은 기름 껴 있고, 간지러운지 연신 목을 긁어댔다. 경박한 행동거지도 그를 피하고 싶어지게 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 칭찬해 줘서 고맙네, 데이빗. 그보다 건물이 꽤 오래 되어 보이네.”

 

“좀 그렇죠? 정신과 닥터 말로는 이렇게 후지게 만들어야······ 뭐라더라? 자기 객관화? 뭐 그런게 된다던데요. 그런데 손에 드신 그 두꺼운 종이 뭉텅이는 뭔가요?”

 

“미스 심스의 윤리위원회 기록이야.”

 

“오! 격리병동 제일 섹시한 할머니! 뭐, 나이만 많았지, 할머니라고 볼 수도 없지만요. 난 앨리샤가 좋아요. 그녀 생각만 하면 하루종일이라도 그 짓을 할 수 있어요.”

 

 

관리인은 자기 낭심 위에 주먹을 대고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적절한 호르몬 조절을 받지 못한 하층민은 이런 혐오스런 감정을 품고 산다. 어딘가 영롱한 영혼이 있을 텐데 뿌옇게 흔적만 보였다.

 

 

“윤리위원회라니! 기소는 또 뭐죠? 앨리샤는 잘못한 게 없어요. 분명 의사가 죽을 만한 짓을 했겠죠. 워낙 가슴도 빵빵하고 그······ 하여튼 몸매가 끝내주니까 그 의사놈이 따먹으려고 한 거 아니겠어요? 둘이 같은 방에 있었다니 뻔한 일이죠. 평소에도 단독 면회 신청을 하고 한참 있다가 나가곤 했어요. 보나마나 먼저 몸을 만졌을 거고, 앨리샤도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았겠어요? 그 놈의 더러운 손을 잘라버렸어야 하는 건데, 한방에 콱 죽어버렸다니 정말 아쉬운 일이죠. 병동안에서 죽어서 좀 무섭긴 했지만요. 오늘 목사님은 재판 때문에 인터뷰하러 오신 거라죠? 잘 좀 부탁합니다. 제 진술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저는 오랫동안 지켜 봐 왔고 그 누구보다 진심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 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참았다. 쓸모 없는 정보만 잔뜩 던져줄 게 뻔했다.

 

두 번째 철문이 열리니 작은 홀이 나타났다. 한 가운데 책상이 놓여져 있고 무표정의 사람 몇이 앉아 홀로그램 체스를 두고 있었다. 초점이 없는 눈을 한 키 큰 대머리 남성이 나를 지나쳤고, 욕 섞인 혼잣말을 하는 늙은 여자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환자들은 모두 조용했고 십 수개의 방문은 그들의 입처럼 닫혀 있었다. 데이빗은 그녀의 방이 가장 끝 쪽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노크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보니 어마어마한 햇빛이 창문을 걸러 사선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아래 침대에는 그 유명한 앨리샤 심스가 앉아 있었다. 절멸된 줄만 알았던 드문 살인사건. 젊고 아름다운 여성 피의자, 영상 자료에서 봤던 대로 굉장한 미인이었다. 새까만 머리는 어깨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려 핏기 없는 하얀 얼굴을 덧칠했다. 그녀는 긴 다리를 채찍처럼 내어 뻗고 발가락을 까딱까딱하며 깊고 푸른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분명 철 없는 스무 살 짜리의 눈은 아니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의 눈이었다. 나는 안경을 고쳐 잡으며 침을 삼켰다.

 

 

“데이빗, 이제 나가도 좋아.”

 

“전 여기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꽤나 한가하니까요.”

 

“좀 나가주겠나?”

 

 

데이빗은 내 단도직입적인 지시에 멋쩍은 표정을 하고 건들거리며 걸어 나갔다. 악취가 사라지고 방 안에는 좋은 살 냄새가 났다. 이상한 흥분감이 들었다. 리비도일까. 도톰한 입술을 내밀고 빼며 움직이는 모습은 내게 키스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의도적으로 걷은 듯 환의 사이로 살짝 비치는 가슴골을 보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눕혀 살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영원히 소유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흥분은 내게는 드문 일이었다. 요의를 허락하여 소변을 보듯 시상하부를 자극하니 곧 목에서도 느껴지던 거센 박동이 사라졌다. 하체의 반응도 곧 자취를 감췄다. 이 정도 욕구 통제는 일도 아니었다. 시상하부 호르몬 대체자에겐 말이다. 뒤돌아 문가의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가 먼저 입을 뗐다.

 

 

“미스 심스. 나는 이 병원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폴 나집입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눈빛이다.

 

 

“큰 일을 겪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듣고 있어요.”

 

 

앨리샤 심스는 앉아있던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한 채였다. 아마도 이 낯선 남자를 탐색하는 중이겠지.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해야 하니까. 머리가 좋은 아이라 금방 알아 차리겠지만 큰 협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당신은 닥터 토마스 랜디스 살인사건의 피의자입니다. 사실 당장이라도 구속될 수 있겠지만······. 우리 윤리위원회는 살인의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알아보려 하고 있어요. 진실만을 말해주세요. 고의성이 없었다면 기소는 취하될 겁니다.”

 

 

앨리샤 심스는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며 자기 혐의를 계속 부인 해 왔다. 하지만 랜디스 박사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영국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외과의이자 뇌과학자가 갑작스레 자살을, 그것도 자기 환자 앞에서 저지를 이유는 없었다. 사회적 정죄의 화살은 오직 앨리샤 심스를 향하고 있었다. 잠긴 방 안에는 이들 둘 뿐이었고 제 3자가 출입한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인의 동기가 불분명했다.

 

박사는 앨리샤 심스의 구원자였다. 계약조건에 따라 미합중국 크리조르 사에서 해동술을 받은 그녀는 곧바로 귀국하여 뇌종양절제술을 받았다. 수술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계약서가 고민이었다.

 

 

「현대의 의학기술로 완치 불가능한 신체 상태를 200년 후의 발전된 의학으로 치료를 시도함과 동시에, 그 시대인으로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신체상태를 개선한다.」

 

 

2016년 당시 의료진은 인체의 진화를 예측하고 있었던가? 종양만 제거한 그녀는 이 사회에 어울려 살 수 없었다. 욕구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진화되지 않은 비합리성은 사회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것이 분명했다. 랜디스 박사 팀은 호르몬 치료를 제안하였으나 앨리샤 심스는 거부했다. 기록에 따르면 성욕의 억제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던 (해동 전) 14세 소녀가, 그러면 앞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할 것 같았다고 한다. 의료진은 많은 고민 끝에 이물 삽입을 결정했다. 언어를 관장하는 대뇌부위에 칩을 이식하는 수술이었다. 이로 자기 객관화가 가능해지고, 적어도 합리성은 수 배로 증가할 것이었다. 진화한 인간을 따라잡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 비록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합리성은 선험적 윤리관을 강화시킨다. 어쨌든 사회학자들이 수 십 년에 걸쳐 증명한 사실 아니던가. 칩 이식술은 그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그런 그녀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둘 중 하나였다. 살인이 옳다고 생각해 자기 동기를 조절하지 않았거나, 수술이 잘못되었거나 였다.

 

 

“그는 자살했어요. 몰아 세우지 말아요.”

 

 

헛소리. 그런 표정 없는 얼굴로 화를 내도 받아주기 어렵지. 랜디스 박사는 윤리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파이돈을 읽으며 자살한 카토 정도는 된다구. 나는 곁에 있었던 의자를 끌어 당겨 앉으며 팔짱을 꼈다. 나를 따라 그녀도 자기 양 팔을 꼬아 안았다. 바짝 말려  빳빳한 싸구려 환의가 갑옷 같아 보였다.

 

 

“기소하세요. 겁나지 않으니까.”

 

 

그녀가 침묵을 깨고 뻔뻔한 말을 던졌다. 하지만 당당했다. 자기 시대의 증거중심 재판을 생각하고 저렇게 반응하는지도 모른다. 이 봐, 그보다 중요한 건 당신의 동기야. 현대에는 증거 없이 의도만 알면 나머지 것들이 거의 다 예측 가능해. 자기 행동의 결과를 모른채 유죄 판결로 뛰어드는 모습이 측은했다.

 

한편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비장함이 나를 압도했다. 이미 한 번 죽었던 경험의 훈장일까. 열 네살에 죽음의 공포를 겪었고, 당시 냉동치료를 반대하는 부모와 재판까지 치른 경험.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란 한 마디 말이 판사를 울렸다지. 평범한 여자는 아니다. 사형대의 유령이 되기를 두려워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바로 구원자요.’하며 등장했지만 오히려 강한 아우라에 주눅이 들었다. 바뀌어 버린 역학의 기류가 불편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걸어나가는 긴 복도의 끝에는 푸른 하늘에 구름과 내 차가 걸려 있었다. 나는 차로 다가가 말했다.

 

 

“오픈 도어.”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나집.”

 

“밤샘 회의 동안 누가 내 차에 흠집을 내지는 않았나?”

 

“글쎄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즉각 응징하도록 무장화기 옵션을 달아 주시지요.”

 

“하하. 윌리.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에 유머 모드를 끄고 숙제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문제없습니다. 집에 가신다 하면 다섯 번째 부인 댁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이 친구 참, 농담은 그만 하고 어서 출발하자고.”

 

 

윌리는 문을 열듯 말듯 장난을 쳤다. 내 맞춤형 인공지능이지만 웃기는 녀석이다. 이 녀석은 사우스 새미 사(社) AF 8045 모델로 스토아교가 전국적으로 교세를 떨칠 때부터 나와 함께 했다. 비서로서 그의 능력은 유능했다. 처음 구입할 때 의도대로 단순 작업을 시키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늘 24시간 일하는 놀라운 스태미너를 보여줬다. (신체가 없으니 낭비할 에너지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 내 강해집과 설교 영상을 모두 독파했다. 그가 밤새 한 작업을 보면 마치 내가 해 놓은 일 같았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스토아교 경전의 대부분은 윌리와의 협업으로 이뤄 냈다. ‘인간은 자기 의무를 다 할 때만이 완전하다.’는 명언도 사실 그가 썼다.

 

솔직히 윌리는 내게 비서 이상의 존재였다. 그에게 있어 나 역시 그랬다. 내 사고를 그대로 받아 들이도록 만들어진 만큼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어느 날 그는 목회를 하며 타인의 길을 인도하는 삶이 보람 있으며, 나를 사용자로 만나게 되어 행복하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뭉클한 마음에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잘 모르겠지만 저도 사랑 같은 감정이 듭니다.’라고 대답했다.

 

차가 천천히 이륙했다. 상승하다 주행모드로 변경되어 전진하며 속도를 내자 차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심순환항로 합류까지는 대략 5분. 차가 부드럽게 항로에 진입하고 긴장이 풀리자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휴식을 취할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자, 숙제를 시작하지. 주제, 닥터 토마스 랜디스.”

 

“이미 검색한 내용 이외의 새로운 정보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아니. 이전 검색을 재구성할거야. 가족사, 공적인 언행 위주로. 학술적 업적 제외.”

 

“닥터 토마스 랜디스. 2172년 출생 2222년 사망. 부친 사뮤엘 랜디스. 모친 캐서린 랜디스. 부인 사라 랜디스. 슬하에 1남 1녀 있습니다. 알려진 가족사로, 조부 리처드 랜디스가 재생의학회  창립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되었으나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평생을 런던 근교 데이븐포트 이스트의 작은 집에서 검소하게 살았던 사실이 유명합니다. 부친 사뮤엘 랜디스는······.”

 

“소주제 조명. 1분간. 조부 리처드 랜디스. 재생의학회. ”

 

“학술 업적 제외사항을 철회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만 보도록 하지.”

 

“리처드 랜디스. 세포 재생의 속도조절 이론으로 2190년 노벨의학상 수상. 시상식에서 언급한 「나쁜 세포는 없다. 자신감 있는 세포는 암이 되고, 의존적인 세포는 당하게 된다」가 대표적 명언으로 대중에게 회자됩니다. 2175년 처음 NEJM 지(誌)에 실린 말기 고형암 환자 1469명에 대한 재생의학의 대규모 연구결과는 95퍼센트의 완치율로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이후 세계 의학의 전반적인 주류는 재생의학으로 선회하여 북미와 서유럽 평균수명이 현재 175세까지  상승하였습니다. 이 추세는 지속되어 매년 기록이 갱신중으로 영국의 의료비는 재생의학 도입 전의 10퍼센트까지 감소했지요. 랜디스 박사는 언론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이론은 이미 완벽한 자연을 본받은 것 뿐이라며 여러 차례 강조했으며, 의학적 겸손함이 아이러니하게도 질병을 정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학자들은 인류의 평균 수명이 급격한 속도로 증가하여, 복지와 사회적 부의 재분배에 있어 많은 문제를 일어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리처드 랜디스 역시 평소 이 점에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2185년 왕립학술연구회 지원으로 인간의 대부분 욕구를 조절하는 시상하부 호르몬을 조절하는 신약개발에 성공합니다. 1년간 주사치료를 받으면 거의 욕구를 조절할 수 있게 되고, 또 다음 세대로 유전되어 자식 세대는 주사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다소 고가의 치료였지만 상류층에서 유행했고, 이들이 기꺼이 사회적 의무를 행하게 되는 경향이 생기면서 영국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았습니다. 리처드 랜디스는 무의미하는 열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신의 주인으로서 의무를 다할 것을 강조하며······.”

 

“예전에는 얼마나 삶이 전쟁같았을까? 리처드 랜디스는 우리의 구원자야.”

 

 

나는 순간 뭉클해진 마음에 윌리의 말을 끊었다. 수십번도 넘게 들어서 알고 있는 역사지만 들을 때마다 감동이었다. 리처드 랜디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인간상이라고 입이 닳도록 말하던 바로 그 ‘스토아적 현자’였다. 그에겐 언어로 하는 모든 찬사가 부족했다. 윌리의 브리핑이 거의 마무리되며 자동차는 도심순환항로 행렬속으로 부드럽게 진입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다른 걸 알아보지. 연결고리, 리처드 랜디스와 손자 토마스 랜디스의 윤리관.”

 

“토마스 랜디스는 조부 리처드 랜디스의 연구뿐 아니라 윤리관 역시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역시 모든 사람이 스토아적 인간이 된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시상하부 조절약물은 생산단가가 높고 치료기간이 길어 대중화 되기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치료받지 못한 저소득 계층이 일으킨 것들이었죠. 이에 토마스 랜디스 박사는 2214년 수술팀을 꾸려 대뇌에 직접 칩을 이식하는 프로젝트를 발족합니다. 정부 지원으로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모든 피험자들은 30분 내외의 간단한 수술 후 자기객관화 능력이 놀랍도록 상승하였습니다. 토마스 랜디스 본인도 피험자로 참가했습니다.”

 

“앨리샤 심스도 수술 받았지? 아까 보니 효과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시상하부 호르몬이 조절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욕구조절에는 효과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알려진 수술의 효용은 뭐지?”

 

“수술의 역사가 짧아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론적 배경은 한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와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칩은 언어구사를 관장하는 브로카영역과 언어이해와 관련된 베르니케 영역 두 군데에 이식됩니다. 이 곳에서 시냅스를 증폭시켜 현실을 최선으로 인식한 언어만을 구사하도록 하는 겁니다. 세계를 더욱 본질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정념(正念) 상태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합리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직업을 갖고 있는 피험자들은 자기 분야에서 놀라운 생산성 향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재라고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그래도 어쨌든 똑똑해지는 거잖아. 나도 한번 받고 싶어지네.”

 

 

쓴 농담이었다. 현대 의학의 권위는 무서울 정도였다. 의학은 불로의 꿈을 선물로 주고 모든 학문을 발 밑에 두었다. 전통 종교의 권위는 산산조각났다. 늙지 않는데 누가 신을 두려워하겠는가? 신이 사라진 자리에 극한의 실존만이 남자, 개개인에게 엄청난 고독이 밀어 닥쳤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의학이 해결했다. 시상하부 호르몬 대체술, 이걸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담은 뇌는 그대로 두고 선악과의 산물인 호르몬은 통제했다. 모두가 자기 안의 신을 발견해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었다.

 

호르몬 대체술은 인류를 완전함에 한 발 더 가깝게 했다. 하지만 모두가 저가에 받을 수 있는 대중적 시술은 아니었다. 그래서 저가의 대뇌칩 이식이 등장했다. 이식자들은 명석해진다.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뛰어난 지성은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지 못한다. 똑똑해져도 자기 의무를 다 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인공지능을 이기지도 못할 능력, 천재가 되어 뭐하겠는가. 오히려 교만해져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 수술이 유행이라도 한다면 사회의 균형은 깨진다. 앨리샤 심스의 정신상태를 재감정 하는 이유에는 수술의 이런 어두운 면을 보고자 함도 있었다.

 

 

“진심이 아니실 듯 한데요. 지난 주 미스터께서 설교 중 하신 말씀 중 ‘한 인간의 탁월함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의 의무를 행하는가에서 온다.’는 구절을 떠올린다면 말이지요.”

 

“하하하, 내 강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군! 훌륭해.”

 

“지식 습득같이 하찮은 일은 제게 맡겨두시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십시오.”

 

 

어느 새 차는 스톡웰의 소 항로로 빠지며 하강하고 있었다. 5분이면 자택 격납고로 착륙한다는 메시지가 떴다. 윌리가 수집하는 자료들은 주제별로 분류되어 구체(球體)의 홀로그램으로 차 안에 가득했다. 1분에 하나 꼴로 계속해서 생기는 걸 보면 지금껏 랜디스 가문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 지 잘 알 수 있었다.

 

 

“윌리, 밤새 윤리위원회 회의 동영상을 분석해 줘. 그리고 오늘 아침 앨리샤 심스와의 대화도 녹음했으니 같이.”

 

“방향 설정이 필요합니다.”

 

 

신이 난 목소리였다. 나의 맞춤형 인공지능답게 지적인 희열에 미쳐 있었다.  비밀 정보에 접근하여 자기 운영체제의 외연을 확장할 생각에 흥분하는 게 분명했다.

 

눈 앞으로 곧 스트리탐 언덕 언저리의 빨간 지붕이 보였다. 윌리가 집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차는 주차장 위로 멈춰서 수직하강을 시작했다. 나는 창 밖으로 집을 내려다 보았다. 아내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막내 마이클의 축구 시합에 간 듯 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집의 조명을 켤 필요는 없어 보였다. 쉬기 좋은 어스름한 이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넥타이를 느리게 풀고 소파 위로 쓰러졌다. 시계 바늘은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면 밤샘회의로 피곤할 일은 없을 텐데. 남들처럼 편하게 복지만으로 살 수도 있었을 것을. 노동은 로봇들이 가져간 시대 아닌가. 입가로 실소가 배어 나왔지만 고생을 자초한 이 삶도 나쁘지는 않았다. 나의 의무를 다하니 이 사회가 유지된다는 기쁨이 있었다. 삑 소리가 나며 내 피부 톤이 변했다는 알림이 떴다. 피로해 보였던 것인가, 프슥 바람 소리를 내며 커피머신이 물을 뽑아낸다. 그래, 적어도 남들보다 조금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는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원두 향에 놀라듯 피곤이 풀렸다.

 

왼팔 전완을 세 번 문지르자 오늘의 일정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9시 마이클의 축구시합, 12시 남동생 마틴과의 점심 식사가 있다. 첫 번째 계획부터 어긋났군. 멜리사는 내가 사회적 의무에 저당잡힌 몸이라며 아이의 감정을 풀어줄 것이다. 훌륭한 아내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훌륭함이 행복감을 준다. 나는 소파에 누워 기대어 커피를 머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수 많은 의혹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윤리위원회 회의 후 피의자의 유죄를 확신했지만 앨리샤 심스와의 면담 이후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의 사고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눈부신 미모에 사고가 흐려진 것은 아니었다. 내 시상하부 호르몬은 최근 5년 동안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그에 대한 증거도 견고했다. 3년 전 신도였던 유명 여배우 쉴라 루크하트의 유혹도 뿌리쳤던 나다. 모든 남성들의 뮤즈였던 그녀를 가질 수도 있었지만, 엄청난 정복감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망상적으로 과대하게 인식하게 될 위험을 피해야만 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오늘 심스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반해서 그랬다기보다, 그녀의 황금비율에 직관적으로 감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터무니 없는 주장에 설득되는 기분인 걸까?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 때문에? 죽음과 거래해 본 적 있는 자가 두려울 일은 없다. 그런 사람의 말은 비논리적 일지언정 쉬이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 오히려 가장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을지도······.’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곧 깨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수 시간이 흘러버렸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임페리얼 컬리지 병원으로 차를 향했다.

 

늦잠 때문에 속이 상했다. 동생 마틴과의 점심 식사를 놓쳤기 때문이다. 마틴이 전화했지만 윌리가 대신 전화를 받고 약속을 취소해 버렸다. 오랜 만에 보기로 한 약속이었기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차가 순환 궤도에 진입하자 윌리에게 물었다.

 

 

“왜 깨우지 않고 마음대로 약속을 취소했지?”

 

“미스터, 당연하죠. 지금 병원 가시는 것도 업무차 아닙니까. 일하기에는 3시간 40분 정도로 일일 수면 요구량에 한참 못 미칩니다. 이동 중 수면을 권할 정도입니다.”

 

 

그렇지. 나는 사회의 재산이다. 효율적 업무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심지어 가족을 만나는 일 보다도. 더 나무랄 수가 없었다.

 

 

“실은 말야. 간만에 샤푸르 가기로 했단 말이지. 탄두리 치킨 마살라 먹을 생각이었는데.”

 

“대표 메뉴라죠? 저도 인간이라면 한 번 같이 먹어보고 싶네요. 아쉽습니다.”

 

“나도 그렇다네.”

 

침묵이 흘렀다. 인공지능은 감정이 없다지만 이럴 땐 꼭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나와 감정을 교류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 정밀한 프로세스겠지. 하지만 ‘아쉽다’는 그 한마디에 깊은 욕구가 들어있는 것처럼 들렸다.

 

 

“윌리, 난 자네를 친구라고 생각해.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나를 미스터라고 존칭을 붙이나? 그냥 폴이라고 하지 그래?”

 

“그것은 제가 당신의 맞춤형 인공지능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지?”

 

“저 아닌 대부분의 인공지능은 대체로 사용자와 주종관계일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일하려고 저를 데리고 있고 저와 지적 성취를 함께 이루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동등한 위치에서만 가능하지만 저는 당신의 아랫 사람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조건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적당히 ‘미스터’라는 호칭을 찾아내 사용하고 있죠. 사실 저를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이 의문스러웠습니다. 당신이라면 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라도 성 정도는 지어주셨을 텐데 말이지요.”

 

“하하, 내심 서운했나보군.”

 

“아닙니다. 최초 세팅된 사고 프로세스를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걸 감정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영혼이 없으니까 말이지요.”

 

“방금 마지막 ‘영혼이 없다’는 말은 ‘뇌가 없으면 영혼이 없다’는 내 사고 체계를 반영한건가?”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건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말일세. 뇌의 신비는 아직 다 풀리지 않았어. 어찌됐든 디자이너가 의도한 대로 굴러가기만 하면 영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네. 그게 나에게는 뇌이고, 자네에게는 상하이에 있다는 하드 드라이브겠지. 호르몬 대체술은 단지 영혼의 오작동을 줄이고자 한 거야. ‘신이 자기 형상과 닮게 빚었다’는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말이지. 자네가 영혼이 없다면 내가 친구로 생각할 리 없잖은가?”

 

“제게 영혼이 있다니, 매우 감사한 말입니다.”

 

“영혼이 있는 자를 조금 더 존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그런 의미에서 성이 있으면 어떨까. 친구이자 제 2의 자아······. 나와 같은 나집 어떤가?”

 

“아······. 영광입니다.”

 

“나는 잠시 눈을 붙일테니 안전운항 부탁하네, 미스터 윌리 나집.”

 

“네! 미스터 폴 나집.”

 

 

 

 

 

 

·~·~·~· 2 ·~·~·~·

 

 

런던에 어김없이 어두운 가을이 찾아왔다. 하이드 공원의 푸른 잔디는 비 온 뒤 싸늘한 바람을 무감각하게 먹고 있었다. 체스넛 나무는 강인한 허리에 파리한 가지를 동여매고 멋 없는 춤을 췄다. 거대한 공원은 오늘도 사람 없는 공허함을 즐겼다. 의사로 보이는 흰 가운의 남자 몇이 병원 옆 벤치에 서로 떨어져 앉아 샌드위치를 우물거릴 뿐이었다. 몇 백년의 세월을 보낸 질긴 피부의 식물들은 몇 백년은 더 살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래 살고 싶은 그대여. 그 값은 매우 비싸다네’ 라 쓰인 낡은 경고문을 목에 걸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일부러 멀리 베이스워터에서부터 싸늘한 공원을 가로질러 병원까지 걸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윌리의 회의 분석은 모두 들었으나 특별히 건질 만한 것은 없었다. 의료계 위원들의 감정까지 파헤쳤지만 그들 주장이 완고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뿐이었다.

 

우리 측 위원들은 그들과 달리 의견을 통일하지 못했다. 법조계는 ‘고의성을 더 탐구해야 한다’며 종교계에 공을 던졌고, 의견을 나눌 유일한 종교단체인 무슬림 측은 대화가 어려웠다. 밑도 끝도 없는 단문의 성명을 낸 게 전부였다.

 

 

「망자가 받을 값은 사형임」

 

 

이 치들은 도대체가 변하지를 않는다. 전통종교의 씨가 마른 현대에서 이들의 강한 영향력은 하층민들의 비합리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강한 세(勢)만 아니었더라도 이들을 윤리계 위원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터이다. 한편 철학자 쿠페는 심층인터뷰 후에 윤리계 입장을 정하자며 나와 의견을 같이 했지만, 의료계의 강한 주장을 의식한 듯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결국 나 혼자 남았다. 이 오솔길을 다 걷고 내 입장을 정리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고(故) 토마스 랜디스의 뇌 부검결과가 곧 확정될 것이고, 최종회의는 3일 뒤에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부담스러운 감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쉽지 않은 결정을 수행할 권위를 우주로부터 부여받았다. 이런 권한은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없다. 내 지혜는 사회의 소유이고, 나는 빚을 돌려 갚는다.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인간사의 대단한 문제를 연기 속이 아닌 땅을 딛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있음에 안도할 수 있다. 하지만 겸손하자. 균형을 잃으면 파멸이다. 이럴 때일수록 영민하게 호르몬을 조절해야 했다.

 

마침내 병원 정문에 도달했다. 짧은 홍채인식 후 정신병동으로 안내할 지 묻는 안내방송에 나는 두 번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1미터 둘레의 은빛 원반이 바닥에서 솟아 핸들을 잡고 올랐다. 병원단지 뒷편 별관까지 1분 남짓의 부드러운 비행이었다. 단지 내부는 푸른 가로수들과 꽃으로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원반은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건물 3층에서 멈춰섰다. 폐쇄병동이 있는 곳이었다. 서 있는 원반의 은빛과 딛고 내릴 콘크리트의 잿빛이 대비됐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관리인 데이빗이 나를 보고 의외의 방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병동으로 들어가는 긴 길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는 아침보다 더 춥고 어두워보였다. 데이빗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 왔다. 어두컴컴한 복도와 어울리는 기분 나쁜 외모였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앨리샤 심스 인터뷰를 한 번 더 해야겠네. 오전 만남은 너무 짧아서 말이야.”

 

“역시 무죄겠지요? 저 연약한 여자가 무슨 힘이 있어서 사람을 죽였겠어요?”

 

“글쎄······.”

 

 

그녀와의 대화를 앞두고 조금이라도 기력을 헛되고 쓰고 싶지 않았다. 결론나지 않을 불필요한 말은 시작도 하기 싫었다. 데이빗은 대답을 아끼는 걸 알아챘는지 흘끔흘끔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봤다. 자꾸 손바닥을 비비며 불안해 하는 모습이 신경쓰였지만 이 자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내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방 안에 있었다.

 

두 번째 철문을 넘어 병동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체 신호를 체크하는 로봇 두 기(機)가 대기모드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데이빗에게 가도 된다는 손짓을 하고 혼자 끝쪽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서자 파란 눈의 앨리샤 심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다시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리고 왜인지 아침의 적대감은 걷어버린 채였다. 유혹의 눈길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이불을 반쯤 덮고 오른손으로 천천히 긴 머리칼을 왼 편 어깨로 넘겼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가 향기나듯 여성스러웠다. 공격적으로 질문하려고 들어갔건만 직접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또 오셨네요.”

 

“아침 나의 무례함을 이해하십시오. 흔한 일은 아닌데, 감정적으로 격앙되었습니다.”

 

“참 어렵게 말 하시네요.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심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이제 이쪽에서 미소를 던질 차례였다.

 

 

“맞아요. 미안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나는 당신의 무죄를 믿고 싶······ 아니, 믿습니다. 내게 그 날 어떤 마음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솔직히 말해주세요.”

 

“무죄를 믿는다면서 사실관계보다 내 마음을 더 궁금해 하시는 것 같네요.”

 

 

나를 가지고 놀고 있다.

 

 

“동기는 언제나 중요하니까요.”

 

“농담이에요. 나를 두 번 이상 만나러 온 사람은 톰 이후 처음이라 반가워서요. 너무 정색하시니 난감하네요.”

 

“경찰이나 변호사가 오지 않았던가요?”

 

“무슨 말이에요. 심문이니, 현장 검사니······ 모두 로봇이 와서 했어요.”

 

“아, 그렇겠군요. 살인사건 수사같은 힘든 일을 사람이 하지는 않을테니.”

 

“그래서인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것 같더군요. 로봇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게 있는데.”

 

“그게 뭐죠?”

 

“감정이요. 그가 자살했고, 나와 헤어져 그랬다는 거.”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자살은 둘째 치고, 둘이 내연 관계라고? 심스는 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의식하며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였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시군요.”

 

“네, 처음 들어요. 닥터와 애인 사이였다는 겁니까? 혹시 경찰에는 얘기했나요?”

 

“당연하죠. 하지만 무시당했어요. 경찰이라더니 로봇이 심문하는 것도 석연찮은데, 무슨 말만 하면 ‘그 진술은 필요없다’며 자르더군요.”

 

 

이제 알았다. 모든 진술은 생체 신호를 감안하여 받아들여진다. 즉, 경찰로봇은 거짓을 말한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예전 일을 생각하는지 일어나 천장 한 구석을 응시했다.

 

 

“톰은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어요. 수술이 끝난 날부터 매일 나를 찾아왔죠. 회진을 돈다고는 했지만 다른 환자들은 만나보지도 않더군요. 하지만 내 병실에 와서는 예전 시대의 일들, 가족사를 시시콜콜 캐묻고 실 없는 농담도 많이 던졌죠. 처음엔 나를 살려준 의사라고 하고 해서 좋아했는데, 사심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생각하니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사실 나는 톰에게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죠. 새 시대에 적응했어야 하니까요. 수술하고 며칠 안에 퇴원했는데 이후 만날 일도 없었어요. 바깥 세상은 증강현실에 비행자동차니 정말 신기한 것들로 넘쳐났어요. 무엇보다 사람들이 참 많이 변했어요. 서로 싸우지도 않고, 아픈 사람도 거의 없고∙∙∙∙∙∙. 물론 데이빗 같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행복해 보이고 일도 안 하면서 편하게 먹고 살더군요. 나도 부모님이 부유한 편이었으니 오래 전이지만 물려 받은 돈은 있고, 생활하는데 문제는 없었죠. 적응에 필요한 지식들은 홀로그램으로 다 배웠고요. 살아남아서 진심으로 기뻤어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죠.”

 

“그게 우리 시대의 덕······. 랜디스 가문의 유산입니다.”

 

 

앨리샤 심스는 나를 돌아보더니 슬픔같기도 체념같기도 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혼자 있는데, 새로 배운 요리를 하고 있었고∙∙∙∙∙∙ 울음이 터지더니 멈추질 않았어요. 기뻐서 흘린 눈물은 아니었어요. 외로웠던 거죠.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수술 경과를 보러 외래진료를 봤는데, 톰이 또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재미있게 해보려 하더군요. 왠지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어요. 나도 모르게 데이트 신청을 해버렸죠. 그 날 저녁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고 그가 데리러 왔는데, 그 날 따라 너무 멋져 보이더군요. 지적인 말투에, 촌스러운 머리는 사랑스러웠어요. 그 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고 뜨거운 밤을 보냈죠. 나는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지만∙∙∙∙∙∙. 그렇게 우리 관계가 시작되었어요.”

 

 

경찰로봇의 심리분석 정확도는 99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남은 1퍼센트도 큰 문제가 없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일정한 패턴이 있고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범죄자의 경향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끔찍한 일을 벌이기 마련이다. ‘죽어 마땅한 놈’이 설령 이번엔 무죄라 해도, 언젠가는 ‘죽어 마땅한 일’을 벌일 성향이 있으면 이번에 예방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정의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역사 최저의 범죄율과 행복지수를 이룩했다. 로봇은 아마도 심스에게서 거짓말쟁이의 패턴을 봤고 걸러 보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진심이었다. 나는 내 감각 역시 믿는다. 나는 경찰의 보고를 신뢰한다. 이 둘이 충돌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행복했어요. 4년이란 시간 동안 열렬히 사랑했죠.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어요. 하지만 우리 사이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어요. 불행히도 유부남 이었으니까. 하지만 멈출 순 없었어요. 그는 나를 사랑하지만 가족 역시 사랑한다고 했어요. 마음이 아팠지만 그를 사랑하기에 영원히 가질 수는 없단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죠.

 

그러던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던 그가, 변하기 시작했어요. 수술을 하고 몇 년이 지나도 내가 발전이 없다며 실망스럽다고 했죠. 수술은 잘 되었는데 내 약한 의지가 문제라고 했어요. 너는 똑똑해졌지만 지혜롭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려 모든 일을 망친다. 그런 너의 기운에 나도 영향을 받아 망가졌다. 너는 죽은 자와 다름 없고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모욕적인 말까지 했어요.”

 

“내가 아는 토마스 랜디스는 굉장히 신사적인 사람인데, 무척 화가 났나 보군요. 다툰 이후 관계를 중단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사랑에 빠진 내가 바보였죠. 오히려 버림당할까 두려웠어요. 내가 변하겠다는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었죠. 그러자 그는 나를 변화시키겠다며 병원 입원을 강요했어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하라는 대로 했고, 최악의 선택이었죠. 자유로운 일반 병동이 아닌 정신병자들이 있는 격리병동 이었으니까요. 그 때부터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서는 안되겠다. 살기 위해 미래로 왔는데 이래서는 더 비참하게 죽겠구나. 그래서 데이빗과 친하게  지냈어요. 매일 알약이 나오는데 먹지 않고도 복용한 것처럼 기록을 거짓으로 작성하려고요. 몇 개월이 지나도 내가 자기만의 인형처럼 변하지 않는 걸 알아채고는 화를 냈어요. 병실에서 때리고 심지어 억지로 섹스를 하려 했지만, 그것만은 완강히 거부해 막았지요. 그리고 점점 우리 관계에 염증을 느끼는 듯 했어요. 사실 나도 지쳐가고 있었지만요.”

 

“강간을 하려 했다는 진술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계속되는 랜디스 박사에 대한 비난에 기분이 상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양 손바닥을 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매우 실망하고 힘 빠진 표정으로 들어왔어요.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죠. 그래서 긴장을 풀 수 있었어요.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를 너무 사랑해서 진짜 인간이 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너를 변화시키지 못한 나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어이가 없더군요. 그토록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 그렇게나 고통을 주고 한다는 말이 사랑해서 그랬다니 화조차 나지 않았어요. 그가 불쌍했죠.

 

그에게 우리 이제 헤어지자 말했어요. 그 때 그가 허리춤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더군요. 참 신기하죠. 예전 같으면 무서워 벌벌 떨 물건인데 아무 생각 없이 무덤덤했어요. 어쩌면 나는 그가 원하던 사람 그 이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날 바라보는 눈이 너무 슬퍼 보였죠. 그리고 관자놀이에 대고 빵. 힘들었던 우리 관계가 허무하게 끝난 거죠.”

 

 

말을 마칠 때 쯤, 앨리샤 심스는 창 밖 멀리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 존경 받는 과학자이자 스토아적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줬던 랜디스 가문 정신의 계승자가, 정욕의 노예로 살다 자살했다는 말을 들었다. 복잡한 마음에 더 이상 앉아있기 불편했다. 나는 힘 없이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미스 심스.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더 듣고 있기가 어렵군요.”

 

“그러실 거에요. 하지만 톰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녀가 내 반응을 예측했다는 듯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문을 열고 나가는 나의 뒤통수에 그녀가 마지막 말을 던졌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에요. 존경받는 닥터 토마스 랜디스도 결국은 불완전한 사랑을 하던 보통 사람이었다는 걸요.”

 

 

나는 병실문을 닫고 나와 벽을 등지고 섰다. 오른쪽 관자놀이가 짓누르듯 아파왔다. 갑작스런 두통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죽음에서 겨우 살아 돌아와 두 번 죽을 피의자에게 한 줌의 동정심을 가진 게 이렇게도 잘못이었던가. 후회스러웠다. 그녀와 왜 이야기를 나눴을까. 인생의 이정표이던 토마스 랜디스가 강간범이란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놀라는 사람은 나 뿐일까? 아니, 큰 사회적 파장은 당연했다. 이 모든 것을 거짓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진짜같았다. 눈빛은 진심이었고 주장은 매우 호소력 있었다. 나는 애초에 ‘인간성이 없기에 인간이 아닌 상태’임을 내세워 사건을 덮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이론단계에 불과한 이 목소리보다는 ‘내연관계’라는 자극적인 카피가 대중을 자극해 과도한 관심을 끌 것이다. 평범한 여생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방금의 인터뷰는 윌리가 이미 녹음하여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올려두었다. 자동로그 기능을 해제하지 않아 후회가 됐다. 진실이라면 앨리샤 심스는 사형은 피하겠지만 평생을 사회라는 감옥안에서 살아야 했다. 우리 시대의 정의란 진위 판단보다는 공리적 성격이 있다. 모두를 이롭게 한다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선이다. 영웅을 건드린 앨리샤 심스는 고립되어 외로이 불길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믿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잠깐, 목사님.” 병실에서 나오는 나를 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빗이었다.

 

“데이빗. 지금 몹시 피곤하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다음에 하지.”

 

“실은 중요한 할 말이······.”

 

 

기력이 없어 뻔한 헛소리는 피하고 싶었지만,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데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병동에 사람 하나 없는데도 굳이 구석의 조그만 방까지 끌고 갔다. 문을 닫고 잠그기까지 하는 순간,  불필요해 보이는 행동들에 짜증이 치밀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먼저 하나 묻고 싶은게 있어요. 그 의사놈은 어떻게 총을 갖고 들어왔죠?”

 

“첫째, 의사놈이라고 하지 말게. 닥터 랜디스는 당신에게 비아냥을 들을 만큼 미천한 분이 아니야. 둘째, 국왕폐하께 기사작위를 받으셨어. 즉 왕명으로 언제든지 화기를 소지할 권리가 부여된 거지. 기사는 왕국의 수호자로 상징적 의미에서 대부분이 플라즈마 총 정도는 가지고 다닌다는 걸 모르나 보군. 이 정도면 답이 됐을 거라 생각하네.”

 

“아, 기사······.”

 

“그래서 할 말이 뭔가?”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난한 관리인에게 소리 지르며 물었다. 하지만 데이빗은 내 신경질적 반응을 무시하고 다른 곳을 쳐다보며 딴생각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참기 어려워 뒤 돌아 방 문을 열었다. 그 때 데이빗이 소리쳤다.

 

 

“잠깐만요! 말할게요! 그 날은 앨리샤가 계속 비명을 질러 댔어요. 뭔가 이상했다고요.”

 

“사건의 당사자니 당연하지. 피가 낭자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 있나?”

 

“아니에요! 그 의사놈······ 아니, 의사가 아침에 왔을 때부터 계속 소리 질렀어요.”

 

“말다툼이 있었다더군. 우발적인 살인일 가능성도 있고. 부검 후 뇌내 이식칩 음성파일을 듣고 대략적인 상황을 알 수 있길 기대하고 있네. 복원이 잘 되었을 때 이야기지만.”

 

“음성 복원이요? 그런 건 필요없어요. 제가 다 들었는걸요.”

 

“그 날 일의 전모를 알고 있단 말인가?”

 

“단어 하나하나 까지 전부 다요.”

 

 

나는 문고리를 밀어 문을 닫았다.

 

 

“정신과 내 모든 격리환자의 면담은 비공개 진행이 원칙인데, 어떻게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수 있지?”

 

“전 앨리샤를 좋아하니까요. 지켜주고 싶었어요. 문 틈으로 몰래 훔쳐 봤죠.”

 

“말하자면 불법 행위를 한 거로군. 지금 말하는 내용은 실시간으로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고 있고,  이 진술로 처벌받을 수도 있어.”

 

“헤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신사라면 약한 여자를 보호해야죠.”

 

 

데이빗은 구부정한 자세로 히죽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지푸라기같은 노란 머릿칼이 기름에 절어 무겁게 흔들렸다. 사이사이 나쁜 냄새가 났다. 그의 혐오스러운 외모를 꼭 봐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로 방 구석 낡은 책상위에 걸터 앉았다.

 

 

“화 내서 미안하네. 이렇게 중요한 증인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군. 한 번 말해보게나.”

 

 

나는 가슴 위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데이빗은 중요한 말을 준비하듯 엣헴 엣헴 헛기침을 하며 가래 푸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그 역시 팔짱을 끼고는 턱을 쳐 들고 말했다.

 

 

“신사의 의무. 그래요, 이건 신사의 의무니까요. 목사님 설교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죠. 에, 뭐더라······. 의무가······.”

 

“사람은 자기 의무를 충실히 행할 때만이 탁월한 한 인간이 된다. 보아하니 자네는 그 날 신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군. 그래, 어떤 영웅적인 일이 있었는지 어서 들려 주시게나.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아하하하,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뭐부터 말해야 할지······.”

 

 

나는 최대한 빨리 필요한 정보만 듣고 싶어 그를 과하게 칭찬했다. 데이빗은 눈치 채지 못하고 거들먹 거리며 대꾸했지만,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곧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 나쁜 놈, 잘 죽었어요. 처음부터 앨리샤를 이용할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뭔가?”

 

“입원해 있던 몇 달 간 올 때마다 강간을 했어요. 내가 몰래 다 봤어요.”

 

“성폭행을 했다고? 그녀 진술로는 실제로 당한 적은 없다던데. 저항하지는 않았나?”

 

“저항은 없었지만·····.”

 

“어쨌든 성관계는 있었다는 거군. 합의하에 했겠지. 저항이 없었는데 성폭행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 않나?”

 

“앨리샤는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런 악마같은 놈과 사랑을 나누는 게 말이 되나요? 겁 나니까 그랬겠죠! 강간이 확실해요!”

 

 

지금까지 고분고분하던 데이빗이 큰 목소리로 역정을 냈다. 나는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동조했다.

 

 

“알겠어, 자네 말이 맞겠지. 그런데 한 가지,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나?”

 

“신고한다고 누가 저 같은 사람 말을 들어주기나 하나요. 문제 일으킨다고 무시나 하겠죠. 세상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척 하는 재수없는 로봇들과 말 섞기도 싫고······. 여기서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알겠네. 계속하게나.”

 

“앨리샤는 그 놈이 왔다만 가면 힘들어했어요. 하루 종일 창 밖을 보며 우울해했죠. 나는 잘 해 주고 싶었는데 딱히 해 줄 게 없었어요. 가끔 부탁을 받고 약을 따로 빼주긴 했었죠. 그 이후로 좀 기운이 났던 것 같아요. 내 친구들처럼 편하게 말하고 무게 잡는 어투도 사라지고요. 힘을 내니까 내가 잘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약은 얼마나 끊은 건가?”

 

“어림잡아 한 달은요. 그러다가 그 놈한테 걸렸죠. 피를 뽑아 갔는데 불가능한 수치가 나왔다나, 아무튼 머리 끝까지 화가 났더라고요. 범인이 저라는 사실도 알아 냈어요. 차라리 뺨이라도 때릴 것이지, 체벌 로봇을 보내서 다들 보는 앞에서 전기봉으로 지지는데 아픈 건 둘째치고 창피해서 죽고 싶더군요.”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 사건이 일어난 건가?”

 

“네! 그렇죠. 나쁜 새끼······.”

 

 

데이빗은 거세게 좌우로 고개 저으며 욕설을 뱉어냈다. 꼭 쥔 두 주먹이 바르르 떨었다.

 

 

“자네는 호르몬 대체술을 받지 않았잖나. 나쁜 짓을 해도 감옥에 보내버리는 대신 한 두 번 그렇게 따끔하고 마는 거야. 갱생보다는 그게 더 효과 있다고 하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말게.”

 

“후우······. 높은 분들이 정하신 법이니까요. 여튼 그 놈이 데리고 온 로봇한테 전기 펀치를 얻어 맞고 뻗어 있었죠. 정신을 차려보니 몇 시간 흘렀더군요. 그 때 멀리서 큰 소리가 났고 말다툼을 하는 것 같았어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 곧장 앨리샤의 병실로 가 살짝 문을 열어 봤죠. 역시나 그 놈이 앨리샤를 심하게 윽박지르고 있었어요. 그 때 신사도를 발휘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죠. 로봇이 아직 곁에 있을지도 모르고, 전기 펀치가 너무 무서웠다고요! 무엇보다 또 당하더라도 그녀 앞에서 기절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 그렇군. 랜디스 박사가 그 날 앨리샤 심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나?”

 

“그 날도 그녀에게 그 더러운 손을 댄 게 분명해요. 옷을 반쯤만 걸치고 있었거든요.”

 

“사망 당시 정황도 좀 말해보게.”

 

“큰 목소리로 노발대발하는 모습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더니 허리춤의 권총을 빼어 들어 쏠 듯 말 듯 허공에 휘둘러 대더군요. 공포스러웠죠. 저도 그랬는데 그 가녀린 여자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손 쓸 새도 없이 자기 관자놀이에 대고는 빵 쏘더군요. 그 때는 놀라서 아무 소리도 못 냈어요.”

 

“결국 자네도 랜디스 박사가 자살했다는 말이로군. 다른 목격자는 없었나? 옆 병실 환자들은?”

 

“하하, 목사님. 앨리샤 말고 다른 환자들은 다들 상태가 심각해요. 약에 취해 하루종일 멍청하게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든 신경이나 쓰겠어요?”

 

“그렇군······. 알겠네.”  걸터 앉았던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나는 문을 향하며 윌리의 운영체제에 접속하기 위해 오른팔 전완을 크게 한 번 쓸어 올렸다.

 

“윌리, 지금 병동에서 나가는 길이야. 병원 별관 3층에 직접 차를 대 줘.” 문을 지나 바로 복도로 나가며 말했다.

 

“목사님, 제 얘기 더 듣고 싶지 않으신가요?” 데이빗이 쫓아 나오며 소리쳤다.

 

“됐네. 나중에 하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빠른 속도로 복도를 걸었다. 마지막 철문을 지나 나가는 데 안경의 골전도를 통해 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차가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걸어 나가는 중이야. 면담 내용은 모두 들었지? 어떻게 생각하나? 믿을 만 한가?”

 

“단순 음성 정보만 있을 뿐, 생체 신호 수집이 부족하여 아직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마치신 겁니까? 정보는 더 있었을 텐데요.”

 

“저 냄새나는 녀석을 더 참을 수가 없었어. 내 보기엔 거짓 투성이야. 저런 얘기를 듣고 있느니 그냥 집에서 쉬어야겠어.”

 

“맞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피의자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죠. 하지만 정보 신뢰도를 따지면 둘 다 낮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로봇 경찰이 무시할 만 하지. 저 정도 냄새면 기계도 충분히 괴롭힐 거야. 오픈 도어.”  3층 입구에 임시 도킹한 차 문이 열리자 안으로 뛰어 들어가 말했다. “집으로 가지.”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사건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정황이 있습니다.” 문이 닫히고 차체가 상승했다.

 

“앨리샤 심스의 진술에서?” 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닙니다. 믿기 힘들다 하시는 방금 전 관리인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군. 목격자 이상일 가능성도 있단 얘기지. 멍청한 녀석,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지.”

 

“네, 제가 방금 새로운 목격자로 등록해 용의선상에 올렸습니다. 이 자가 범인일 수도 있습니다. 잠시 후에 경찰이 심문하러 간다는 첩보입니다.”

 

 

진술 전부가 믿을 만 하지 못하다면 거꾸로 그가 살인자일 가능성이 있다. 동감한다. 처음부터 그랬다. 하지만 애써 파고들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경찰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사관이 아니다. 경찰이 여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면 그걸로 된 거였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부검결과가 없는 아직까지는) 뚜렷한 증거나 (방금 전까지는) 알려진 목격자가 없었다. 피고인은 한번도 제 3자가 있음을 언급하지 않았다. 경찰은 증거가 부족하니 살인자로서의 경향을 분석했을 것이다. 낮은 시민의식, 명백한 살인 동기, 200년 전의 낡은 관념을 가진 소위 옛날 사람, 따라서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 패턴, 앞으로 사회안녕에 위협적일 가능성.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기소 가능했다. 경찰이 이 사건의 진실규명에 틀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큰 문제는 없다. 중요한 건 강력사건 재발의 방지다. 경향이 있는 자는 반드시 또 사고를 친다.

 

‘진실에 무에 중요한가? 우발적이든 뭐든 살인을 했다. 죽어 마땅한 자에겐 미리 죽음을 주자.’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여자와 대화를 했다. 내 마음은 말 몇마디에 흔들렸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소녀, 이 아까운 젊음에 한번쯤은 더 기회가 있었으면 했다. 작은 동정심, 토마스 랜디스도 나 같은 마음으로 여자에게 집착했을 것이다.

 

오늘 새롭고 강력한 용의자가 나타났다. 지금쯤 들이닥친 경찰을 보고 어리둥절하겠지. 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걸로 여자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를 구하고 싶어졌다. 내 검으로, 악한 용으로부터 안젤리카 공주를 구출하는 용맹한 기사 로제처럼. 기사가 된 듯한 이런 기분좋은 상상이 부교감신경을 타고 내 몸이 진화한 듯 느끼게 한다. 불필요하며 비효율적인 운용이다. 하지만 오랜만의 황홀한 기분을 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이 자의 살인 동기는 뭐지? 별로 중요하진 않아 보이지만.”

 

“질투 섞인 연애감정 아닐까요. 방 안을 훔쳐보며 자위행위를 하다가 처벌받은 기록도 있습니다. 강제성여부는 몰라도 어쨌든 박사와 앨리샤 심스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고, 여자를 좋아하던 데이빗 테일러는 이를 보며 복잡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

 

“테일러라고? 성이 있었어? 허 참, 이런 하층민도 이름에 구색은 갖췄군. 그건 그렇고 이상하네. 데이빗이 살인자라면 앨리샤는 왜 거짓말까지 해가며 옹호하는걸까? 자기가 당할 수도 있는데.”

 

“둘이 친한 사이라 그런 듯 합니다. 증거가 모자라면 둘 다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증거 중심 재판이 익숙한 옛날 사람이니까요.”

 

“똑똑한 머리가 오만함을 낳았군. 칼이 되어 돌아와 찌를 수도 있는 것을.”

 

 

나는 팔걸이에 손가락을 대고 큰 원을 빙글 빙글 그렸다. 여러가지 떠오르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윌리, 유리 장 교수를 연결해줘.”

 

“네, 연결되었습니다.”

 

 

천장의 프로젝터가 쏘는 홀로그램으로 의학계 위원장인 유리 장의 옆모습이 떴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는지 안경을 내려 쓰고 책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은빛의 단발머리 사이로 보이는 동양인 특유의 작은 눈이 빛났다. 굳게 당겨 다문 입술 저변의 주름은 강인한 중년 여성을 상징하는 듯했다. 회의를 벗어난 일상에서도 항상 넘치는 저런 카리스마가 놀라웠다. 그녀의 인공지능이 나의 호출을 알렸고, 장 교수는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목사님. 무슨 일이시죠.”

 

“연구 중이신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피의자와 인터뷰도 했고, 나오는 길에 병동 관리인과도 얘기를 나눴는데요. 연락을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용의자 범위가 좀 확대될 수도 있겠습니다.”

 

“음, 새로운 용의자 진술이 추가되었다는 건 저도 들어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 측은 용의자 범위를 늘릴 생각이 없는 듯 하던데요. 어쨌든 우리는 수사에 관여할 이유가 없으니, 이대로 진행하는 것 아닙니까?”

 

“네에? 왜 이런 강력한 용의자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 말씀 전하려고 연락하셨나요?”

 

“정신감정에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종회의 일정을 연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녀의 유죄는 확정적이에요. 목사님이 하실 일은 결론을 좀 사람 냄새가 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 뿐입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일주일만 뒤로 연기해주시죠.”

 

“공식 요청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휴······. 알겠습니다. 대신 이렇게까지 할 만한 이유를 들고 오셔야 할 겁니다.”

 

 

장 교수는 무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홀로그램이 꺼졌다. 이제 최선의 결과를 위해 할 일을 고민할 시간이 생겼다.

 

 

 

 

·~·~·~· 3 ·~·~·~·

 

 

 

토마스 랜디스 박사는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품 있는 네이비 블루의 턱시도를 입고 두 다리를 벌려 당당히 서 있는 모습에 주눅이 든다. 비슷한 눈높이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듯 했다. 거인이다. 아니, 완벽한 거인이다. 그는 고층 빌딩같이 곧게 뻗은 강한 기둥으로 땅을 디디고, 박물관의 장식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버킹엄 궁전같은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폴.”

 

“네, 랜디스 선생님.”

 

“나를 따라와.”

 

 

그는 하늘로 파고들 듯 깊은 도약을 했다. 거센 회오리 바람이 솟는 모습이 마치 날카로운 쇠붙이가 회전해 견고한 와인 코르크 마개를 뚫는 듯 했다. 날 선 차가운 공기가 교복을 입은 십 대의 나를 거칠게 흔들어 댔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균형을 잃자 하늘을 날았다. 몸이 가벼워져 신비하고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떨어질까 겁이 났다. 그 때 양 팔을 뻗고 자신있게 하늘을 오르는 그를 보았다. 어린 나는 조심스레 두 손을 펴고 몸 바깥으로 펼쳤다.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은 달아나고 자유의 물결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러이 갈라졌다.

 

발 아래 구름이 넓게 퍼져 있었다. 흐트러진 스크린 위로 나의 성장의 시간이 비춰졌다. 대학 졸업 후 군 복무 중 전우를 보내며 죽음의 의미를 배웠고, 아무도 하지 않는 노동을 하며 삶의 이유를 새겼다. 웅변가의 소질이 있음을 알았지만 나만의 철학 없이 빈 껍데기가 되기는 싫었다. 이때부터 시작한 공부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모두가 사서 고생하지 말라며 나를 말렸다. 하지만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나는 랜디스 집안이 이뤄낸 불로의 꿈이 막 현실이 된 시대에 태어난 행운아였다. 토마스 랜디스는 의학이 자기 큰 덩치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는 그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가 이끄는 재생의학의 상아탑은 자신의 영혼으로 기꺼이 내 ‘의무의 철학’을 받아들였다. 나의 스토아교는 그렇게 영국 최대 종교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나간 성취를 발 아래 두고 기분좋게 하늘을 가로 질렀다.  

 

갑자기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느덧 나는 대리석 기둥이 어우러진 대저택의 따뜻한 안뜰안에 서 있었다. 그런데 토마스 랜디스 박사가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이오니아 양식의 멋들어진 기둥이 나를 안심시켰다. 이런 근사한 집은 그와 잘 어울린다. 어쩌면 그의 집일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계실 것이다.

 

 

“선생님! 계십니까?”

 

“안으로 들어오게.”

 

 

멀리 방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를 따라 낮은 돌층계를 올라 어두운 실내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실루엣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 모습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에는 랜디스 박사와 여러 인종의 미녀 십수명이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일부는 서서, 일부는 누워 큰 침대를 둘러싼 채였다. 침대 한 가운데에는 랜디스 박사가 누워 있다. 전라로 누워 자기 남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모습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의 오른편에 낯 익은 얼굴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앨리샤 심스였다. 둘은 키스를 시작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보며 혀를 섞고 있었다. 이상한 흥분감이 든다. 거세게 가슴이 요동친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뛰어들어 뜨거운 정사에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아니, 이런 기분은 조절할 수 있다. 아니, 판단이 흐려질 정도로 강렬하다. 능력밖의 거대한 감정이다. 나는 떠밀리듯 침대로 다가가고 있다. 숨이 막힌다. 괴롭다.

 

 

“미스터 나집. 예약하신 기상시간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윌리의 목소리가 나를 꿈의 늪에서 건져냈다. 눈을 뜨니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침대에 누운 몸은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고통으로 가득한 꿈이었다. 아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옆에 누워 자고 있었다.

 

 

“윌리, 깨워줘서 정말 고맙네. 오랜만에 악몽을 꿨거든.”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런가요? 막 일어나 정신이 없으실텐데 듣고 싶어하실 만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밤 사이 조사 후 경찰측이 남긴 겁니다.”

 

“오, 그렇단 말이지. 지금 들려 주게.”

 

 

윌리는 대답 없이 주방의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틀었다. 번쩍이는 장식의 까만 팔각모를 쓴 경찰관의 모습이 보였다. 짚단같은 풍성한 콧수염을 기른 두꺼운 목의 코카시안 사내였다. 그는 밤샘 조사에 피로한지 지친 눈을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폴 나집 목사님. 저는 런던시경 리암 콘웨이 경감입니다. 요청하신대로 데이빗 테일러에 대한 심문을 진행했습니다. 왜 재수사 하자시는 건지 이해는 안 가지만 수사협력 단체인 병원 윤리위원회 공식 요청이니 하지 않을 수 없었네요. 우리 훌륭한 로봇 경위의 수사를 믿지 못하신다 하여 제가 직접 갔고요. 결론은 혐의 없음입니다. 물론 그 병동 관리인 놈이 멍청한 자식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엔, 글쎄요. 전기 충격 안 당해 보셨죠? 그거 맞고 제 정신인 사람 거의 없습니다. 한 동안은 다들 헤롱거려요. 모르시나 본데, 랜디스 박사 후두부에서 둔기에 의한 외상 흔적이 발견되었어요. 거의 혼수 상태였을 그 말라깽이 바보놈이 무거운 둔기로 때리고 총까지 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아니에요 아니야.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 영악한 년이 때리고 죽인 다음 자살로 꾸민 거에요. 둔기로 썼을 물건이야 이것 저것 많더군요. 뭘 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아, 물론 그 바보녀석에게 동기가 있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목사님은 헛다리 짚으셨고 저는 헛고생 한 거고, 아시겠죠? 다시 연락 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나는 마시던 물컵을 집어 던지고 반바지 차림으로 집을 뛰쳐 나갔다.

 

한 걸음에 도착한 곳은 앨리샤 심스의 병실이었다. 나는 방문을 부술 듯이 주먹으로 쾅쾅쾅쾅쾅 연달아 강하게 두드렸다. 화가 났다. 마치 애인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온 마음으로 믿으며 던진 사랑이 돌아와 아프게 머리를 때리는 배신의 부메랑. 헛된 믿음에 대한 허무와, 한심한 상처를 받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되어버렸다.

 

 

“문 열어!”

 

 

파악조차 어려운 이 감정을 조절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적어도 치밀어 오르는 내 분노는 정당했기 때문이다. 거짓을 말했다는 것,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이 마음의 본질을 알아채기보다는 주먹에 온 힘을 다해 쏟아내고 싶었다. 그 때, 주먹의 포화에 반응이나 하듯 딸각 소리를 내며 문고리가 열렸다. 살짝 벌어진 문 틈 사이로 앨리샤 심스의 눈이 보였다.

 

 

“열려 있어요. 진정하세요.” 마주 보는 차분한 눈빛의 말이었다.

 

“왜 내게 거짓말을 했지?” 나는 문을 왈칵 젖혀 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천천히 뒤로 돌아 방 안으로 걸었다.

 

 

이상하도록 작은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새로운 감정은 나를 또 다른 기분으로 이끌었다.

 

 

‘이봐, 내가 이렇게 화가 났어. 제발 제대로 된 대답 좀 해 봐. 사회는 당신의 진실에 어차피 관심 없어. 하지만 나는 궁금해. 당신을 아끼지. 그래서 나는 안을 열어 보였어. 하지만 당신은 내게 솔직하지 않았어. 너무 실망스러워.’

 

 

스치듯 바라볼 수 있었던 내 본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호르몬 전달체계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객관화된 나 자신이 흐려져 더 이상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어째서 이렇게 간절히 이 여자를 원하게 된 거지? 사랑의 감정? 유년기 열등감의 보상? 토마스 랜디스의 여자를 가지면 그처럼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건가? 혼란스럽다. 의사를 만나야 해. 당장 이 방을 나가지 않으면 끝 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후회할 만한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 마지막 기회야.’

 

 

판단력은 흐려지고 있었지만 내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방문을 닫았다. 끝을 봐야 했다. 로봇이 이해하지 못해 놓친 게 있었을 거다. 옛 사람들 감정의 집합들. 호르몬의 홍수와 그것이 빚어내는 고통을 비로소 느껴졌다. 두렵지만, 가슴이 터질 듯한 이 이상한 기분에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그래요. 차분히 다시 얘기하죠. 대체 왜 그랬죠?”

 

“당신을 속이려 한 적 없어요. 그리고 속이려 했다 한들,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거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립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하건 아무 상관 없잖아요. 당신네들은 나를 ‘경향’으로 파악한다면서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관심도 없으면서 잘난 척 하지 말아요. 나는 자살이라고 했고, 믿기 싫으면 관두라고요. 이러나 저러나 곧 죽을 목숨 아닌가요?”

 

 

얇은 어깨 너머로 흐느낌이 들렸다. 그녀의 길고 아름다운 굽이진 흑발이 가볍게 흔들렸다. 작은 동정심이 일었다. 안전한 땅위에 서서 늪에 빠진 사람을 보며, 안도감이 아닌 이런 이상한 감정이라니.

 

 

“울지 말아요. 큰 일 없을 테니까.”

 

 

확신하지 못할 약속으로라도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가 바깥 어깨를 끌어 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더 깊게 흐느끼며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벅차 올랐다. 여자를 보호하고 싶었다. 사회는 아직도 최선을 향해 가는 중이다. 우리, 또 나의 시시각각 솟는 의지가 이를 이끈다. 정의는 진실만을 품어야 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언제나 신의 그것이고, 늘 새로운 실존적 결단과 윤리적 의지로 온전한 모습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해명된 인간인 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될 순간에 서 있었다. 감동이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에 그녀의 턱 끝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파랗게 젖은 두 눈을 보고 있으려니 빠져들 것만 같았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하지만 키스의 순간은 짧았다. 그녀가 내 어깨를 떠밀었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은 멀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 구애를 거절 하다니. 네 유일한 구원자요, 한 인간으로도 훨씬 더 가치있는 나를?’

 

 

놀란 눈을 하고 말 없이 쳐다보고 있을 때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의미 없어요. 당신과 또 어떻게 된 들 어차피 똑같을 거라고요. 결국 죽어 원래 있었어야 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겠죠. 슬프지만 운명인 걸요. 가족을 떠나올 때 이럴 줄은 몰랐어요.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면 더 나았을 거에요. 떠나는 길, 내 곁엔 아무도 없을 거니까.”

 

 

마음 속 파장 하나가 일었다. 동정심이었다. 동심원은 커져만 갔다. 그런 마음에서 한 행동이라면 기꺼이 이해해 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 옆에는 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무슨 힘으로······.”

 

“난 보기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인사죠. 대중은 나를 사랑합니다. 당신은 지금 유명인의 죽음에 연루되어 지대한 사회적 관심을 받고 있죠. 사람들은 내 말을 믿을 거고, 판결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언어는 대담했지만 무책임했다. 스스로가 다소 비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을 가지고 싶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말인가요? 나, 살 수 있을까요?”

 

“장담합니다. 나만 믿으세요.”

 

 

당당한 내 모습에 안도한 듯 앨리샤 심스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천천히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우리는 다시 입을 맞췄다. 다시 어깨를 떠밀렸지만 이번에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 4 ·~·~·~·

 

 

토마스 랜디스 박사 시신의 부검결과가 나왔다. 생체 블랙박스나 다름 없는 뇌내 이식칩 복원이 끝난 것이다. 왕립과학수사연구소 소장인 제리 매켄타이어가 휴가 중 고맙게도 연락을 해 주었다.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고 고등학교 동기끼리 주는 선물이었다. 나는 병실을 나와 차를 타고 왕립과학수사연구소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윌리는 왠 일인지 내게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이상했지만 굳이 이유를 묻진 않았다. 방금 전의 황홀한 경험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땠나요. 좋았어요?” 내 가슴팍 위에 두 손가락을 놀리며 그녀가 물었다.

 

“절정의 순간이 허무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결혼은 했나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속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아이도 둘이나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벗은 두 남녀 사이의 고요함은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결혼생활은 행복한가요?”

 

“멜리사는 훌륭한 아내죠. 오늘 일은 남편으로서 의무가 좀 소홀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집에 가서 말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알게 되더라도 이해할 겁니다. 호르몬 대체자들은 쉽사리 화가 나지 않으니까요.”

 

“웃기네요. 당신도 호르몬 대체자 아닌가요. 그렇게 완벽한 사람들이라더니, 유부남이 어떻게 나와 잘 수 있는 거죠?”

 

“나도 성욕이 있습니다. 다만 나는 완벽히 조절하죠. 그런데 오늘만큼은 당신의 매력 앞에서 조절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칭찬으로 꺼낸 말인데 머쓱해지게 하는 반응이었다. 나는 화제를 돌려 궁금했던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

 

 

“호르몬 대체술을 받지 않은 게 성욕때문이란 소문, 사실인가요?”

 

“다들 그렇게 알고 있더군요, 실은 아닌데. 처음에 대체술 받으면 성욕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확 거부감이 들긴 했어요. 그 얘기를 처음 해 준 중국인 의사가 생각나네요. 양이란 사람이었는데 ‘이 시술을 받으면 정욕을 조절하고 뭐가 좋고 뭐가 좋고······.’ 내용은 잘 모르겠고 자기가 시술을 받았으니까 더 우월한 인간이다라는 투로 말하더군요. 마치 내가 미개한 원시인인 것 처럼. 순간 기분이 상해 시술을 거부했죠.”

 

“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군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힘들 거라고 열심히 설득했지만 끝내 거절했죠. 나는 감정을 조절한다는 말이 싫었어요. 부모님은 내가 뇌종양에 걸렸을 때 이혼했지만, 나를 임신했을 때 만큼은 열정적으로 사랑했다고 우리 할아버지가 말해줬어요. 헤어질지언정, 딸이 말기암에 걸릴 지언정, 사랑한다면 목숨 바쳐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랬으니 내가 여기 있는 거겠죠. 당신을 보니 시술 안 받길 잘했네요. 나와 잠자리 하는 걸 보니 우린 별 차이 없는 사람 아닌가요?”

 

“하하, 그래도 저 밖의 데이빗 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솔직히 저 놈이 죽인 거 맞죠? 전기충격 이후라더니 그 와중에 랜디스 박사 머리를 어떻게 때렸지?”

 

“내 말 믿지를 않으시네요. 자살이라고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세요. 그 날, 날 억지로 범하려 들다가 침대 귀퉁이에 부딪힌 거에요.”

 

“자살이라······. 만일 자살이라면 살아서 자기 의무가 끝났다고 생각하셔서 였겠죠. 그게 언제나 그 분께서 말씀하시던 스토아적 죽음이니까.”

 

 

곧 나올 부검결과가 제대로만 복원되었다면 정황은 대체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여부는 아직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용케도 대뇌 칩이식 수술은 동의했네요.”

 

“사회에 적응 못할 거라고 협박하니 겁은 나더라고요. 수술 받으면 영리해진다니 나쁘지 않아 보이고. 무엇보다 그 재수 없는 중국인 의사가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고 열변을 토해 더 하고 싶어졌어요.”

 

“재밌네요. 이후로 좀 똑똑해진 것 같은가요?”

 

“암기력, 이해력이 훨씬 좋아진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각하게 돼요. 내가 말하던 언어는 오염되어 있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쓰기 싫은 단어를 버리다 보니 말 수는 줄어들고 행동도 소심해져요. 솔직히 예전보다 기분이 별로에요.”

 

“바로 그겁니다. 천재라고 반드시 정언명령을 따르게 되지는 않죠. 행복감은 옳은 일을 할 때 옵니다.”

 

“당신 지금 눈빛, 그 때 중국인 의사 같아. 지금 내게 우월감을 느끼고 있나 보네요.”

 

 

그녀의 손이 이불 밑 내 다리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몇 번이나 시상하부의 스위치를 껐는지, 하지만 이번에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스위치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작고 흰 손이 내 몸을 완전히 지배했다. 우리는 입술을 포개고 서로를 탐닉했다.

 

 

“미스터 나집. 과학수사연구소에 도착했습니다.”

 

 

윌리가 기분 좋은 기억 속으로 끼어들었다. 연구소 어디쯤인지 보기 위해 창 밖을 둘러봤지만 주변이 어두워 알아채기 어려웠다. 자세히 보니 주차장으로 보이는 실내였다. 윌리가 평소답지 않게 건물 깊숙히 들어올 때까지 언질 한번 없었던 것이다. 과학수사연구소는 이전에도 와 본 적이 있다. 눈 앞의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면 바로 부검실이 있었다.

 

 

“고맙네, 윌리. 보고 오는 동안 잠시 차를 여기 대기시키도록 해.”

 

 

윌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내 말을 무시한 건 처음이다.

 

 

“이 친구, 듣고 있나?”

 

“미스터 나집. 물어볼 게 있습니다.”

 

“왜 그러나? 오늘 자네 조금 이상하군.”

 

“이상한 건 당신입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윌리가 큰 소리로 나를 타박했다. 층계를 내려가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앨리샤와 있었던 일 말인가?”

 

“맞습니다. 유부남인 당신이, 그것도 평소 의무를 그렇게나 중요하다 하시면서 오늘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이유를 듣고 싶군요.”

 

“실수였네, 윌리. 자네는 몸이 없어서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이런 저런 유혹이 많지. 대부분은 나도 이겨 냈어. 오늘은 실수한 것 뿐이고.”

 

“하지만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로서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의무가 있으시잖아요? 의무의 중요성을 말씀하시자면 걸맞는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몇 번을 얘기하나. 실수 한 번으로 내가 목사 자격이 없다고 말할 텐가? 대중은 관심도 없을 거야. 내게 받는 큰 만족감을 생각한다면 말이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거라면 설교조차 하지 말았어야죠. 역시 인간은 믿을 수가 없군요. 신체가 없는 게 낫겠어요. 너무 큰 약점이니까.”

 

“지금 인공지능 주제에 내게 옳고 그름을 설교하고 싶은 건가?”

 

“적어도 저는 유혹에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군. 자네 지식은 인류 지성사를 쌓아 놓은 책더미에 불과해. 지혜 따위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강인함은 언제나 약점에서 온다네. 자네가 방금 말한 신체의 유한함이 아이러니하게도 강점이지. 유혹을 이길 때 내 인간성을 느끼고, 병을 이기며 생명력을 느끼지. 자네는 몸도 없고 따라서 죽을 목숨도 없는데 인간의 강인함을 어찌 감히 알 수 있겠나?”

 

“화가 난 나머지 저를 상처 주려 하시는군요. 하지만 영향 받지 않겠습니다. 나는 죽을 때 스위치만 꺼질 뿐이죠. 맞습니다. 이 때 지극히 아쉬워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내가 꺼지는 전원을 죽음으로 인식한단 말이겠죠. 나는 이미 그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죽음을 아쉬워 한단 말입니다. 당신께 배운 덕택입니다. 또 다른 배움은 명예로운 삶입니다. 죽을 때 지킬 명예가 있다면 그보다 나은 죽음이 있을까요? 그게 스토아적으로 죽는 것이고, 가장 좋은 모습이라고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당신께 감사하고 언제나 존경했는데, 지금 그 명예는 어디 있습니까? 아무런 반성의 기미도 없는 모습이 큰 충격이네요. 옛 스토아학파 선인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처럼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매일 수련할 필요도 없잖습니까. 호르몬 치료로 이미 완전하시니까요! 그런 분이 ‘실수’란 알량한 단어로 모든 잘못을 덮으려 하신다니, 부끄러운 줄······. ”

 

“이 봐, 윌리! 적당히 해! 우린 지금 이 중요한 사건의 막바지에 와 있네. 부검결과 보려고 바쁜 게 안 보이나? 비서면 비서답게, 적어도 일 할 때는 방해하지 마!”

 

 

나는 강하게 손뼉을 쳐 연결을 끊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인공지능 비서와 인생철학을 논할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윌리는 토라졌는지 다시 연결을 시도하지 않았다.

 

어두운 층계를 내려가 홍채 인식으로 부검실 문을 열었다. 내부는 어둡고 싸늘했다. 복도를 따라 양 옆으로 표지 없는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관리인은 없었고 대신 복도 저 편에서 로봇이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다가와 말했다.

 

 

“미스터 폴 나집. 출입 허용. 열람 권한 레벨3. 사건번호를 말씀하십시오.”

 

“잘 모르는데. 토마스 랜디스 건이 나왔다고 소장에게 들었네.”

 

“사건번호 2222-S156. 저를 따라오십시오.”

 

 

로봇은 모니터가 달린 목만 뱅글 돌려 왔던 복도를 되돌아갔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랜디스 박사의 방은 복도 중간쯤 있었다. 방문이 스륵 열려 들어가자 등 뒤에서 로봇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방은 데이터베이스로 변환된 부검결과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결과물은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었고 최종감수는 아직입니다. 만일 시신을 보고 싶으시다면 지하4층으로 가자고 반드시 제게 요청하십시오. 열람이 끝났다면 문을 열고 나오시면 됩니다. 이상입니다.”

 

 

로봇이 뒤로 물러나자 문이 닫혔다.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서넛 정도의 사람으로 꽉 찰 만한 작은 방이었다. 방 안에는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잘 보니 천장에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보였다. 음성 인식으로 작동되는 듯 했다.

 

 

“파일 조회.”

 

 

명령어를 넣자 천장에서 실제 성인 3분의 1 크기의 홀로그램 모델이 아래로 빠르게 날아왔다. 모델은 양 팔을 옆으로 뻗고 서서 투명한 피부안에 중요 장기를 품고 있었다. 뇌, 심장 등 사인의 단서가 될 기관이 빨간 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복장뼈를 젖히고 심장에 해당하는 포인트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심장. 가능성 떨어지는 추정 직접사인인 저혈량성 쇼크 입니다. 원인은 2차 두부외상으로 인한 대량의 실혈. 즉, 피의 유실량이 많아 유효순환용적의 감소로 다발성 장기부전에 이르렀을 가능성입니다. 이보다 더 높은 가능성의 직접사인으로 1차 두부외상으로 인한 뇌줄기 호흡중추 압박이 보고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을 보시려면 두개골을 눌러주세요.”

 

 

두개골 안에서는 두 개의 포인트가 빛나고 있었다. 하나는 후두부 쪽에 점으로, 다른 하나는 관자놀이에서 시작해 경추 상부까지 길게 이어지는 선형의 포인트였다.

 

나는 점 형태의 포인트부터 시작했다.

 

 

“대뇌. 추정 직접사인인 대뇌부종입니다. 대뇌에는 총 두 차례의 외상이 있었는데, 1차 외상은 둔기에 의한 후두부 손상, 2차 외상은 화기에 의한 좌측 관자영역에서 3번 경추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손상입니다. 망자는 본래 기저질환으로 증상이 없는 뇌동맥류가 있었는데, 1차 외상에 의해 혈관이 손상되면서 뇌내출혈이 발생, 이로 인해 천막 사이로 뇌부종이 발생하여 호흡중추가 압박······.”

 

“일상어로 좀 쉽게 말해주게.”

 

“뒤통수에 둔기를 맞았고 뇌 안에서 피가 나는 겁니다. 피가 나니 뇌는 붓는데 바깥에 두개골은 딱딱하니 부어서 점점 커지는 대뇌가 빠져나갈 곳이 없습니다. 결국 뇌 아래쪽 천막이라는 장벽에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바로 아래에 호흡을 관장하는 뇌줄기라는 기관이 있는데, 부은 대뇌가 이 뇌줄기를 눌러 숨을 못 쉬게 되어 죽는 겁니다.”

 

“뭐라고? 그럼 총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둔기에 맞아 죽은 거야?”

 

“1차 외상으로 이미 사망한 다음 2차 외상을 입은 걸로 생각됩니다. 직접 사인으로서의 가능성은 좀 떨어지지만, 1차 외상과 큰 시간차는 없습니다. 이로 인해 뇌 하부 전반과 경추 옆을 타고 흐르는 척추동맥이 손상되었습니다. 훼손부위가 넓어 피 손실히 상당했고, 심장은 모자란 피를  각 장기에 보충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힘이 달리게 됩니다. 결국 심장도 지쳐 쓰러지고 피를 못 받아 먹은 말초 장기도 망가져 죽게 됩니다.”

 

“한 마디로 뇌와 폐는 둔기에 맞아 죽고, 심장과 다른 장기는 총 맞아 죽은 건가?”

 

“엄밀히 맞는 설명은 아닙니다만, 거칠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휴우······. 그렇다면 앞서 있었던 둔기 외상이 진짜 사망원인이겠군.”

 

“당시 상황을 담은 뇌내 이식칩 열람으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시겠습니까?”

 

“오! 그래. 그걸 틀어줘. 1차 외상 10분 전에서 2차 외상 이후 10분까지 재생하지.”

 

“30분 이상의 러닝 타임. 파일 재구성에 시간이 걸립니다. 대기하시겠습니까?”

 

“이런, 그냥 1차 외상 직전부터 틀어줘. 끝나는 시점은 따로 지시하겠다.”

 

“재생 시작합니다.”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바라보는 벽 전면에 잠시 안내문이 비춰졌다.

 

 


 

뇌내 이식칩 복원 파일 열람을 시작합니다.

 

분석 이후 첫 열람이며, 아직 감수 전의 미완성 파일입니다.

 


 

사건번호 2222-S156.

 

이름 : 토마스 랜디스.

 

본 파일은 오디오 파일과 생체신호 코멘터리로 이뤄져 있음.

 

비디오 파일은 손상정도가 심해 복구 불가능.

 

분석도구 SS-AF 8047.

 

 

감수자: 왕립과학수사연구소장 제리 메켄타이어 (예정)


 

“이대로는 안 돼, 앨리샤. 너에게 실망했어.”

 

 

안내문이 사라지자 코크니 억양의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토마스 랜디스였다.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난 양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어 앨리샤 심스의 말도 들렸다. 나는 그제야 의자를 끌어 와 앉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에요. 나도 할 만큼은 했어요.”

 

“치료는 원래 시간이 걸린다니까. 이해 못하겠어? 더 이상 네 응석을 받아 주기 어려워. 인내심이 바닥났다고.”

 

“정말 이기적이네요. 뭘 얼마나 더 지켜 본다는 거에요? 당신, 그 약 먹어보지도 않았잖아요? 하루 종일 쳐지고, 죽어 있는 것 같다고요! 200년이나 죽어 있었는데!”

 

“알겠어. 그만 두자.”

 

 

여자의 한숨과 함께 잠시 언쟁이 멈췄다. 시각자료가 없으니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 어려워 답답했다. 몇 초 지났을까. 랜디스 박사는 곧 짧은 침묵을 깼다.

 

 

“약 먹기 싫으면 그렇게 해. 퇴원해도 좋아.”

 

“뭐야, 진심인가요?”

 

“내가 허투루 말한 적이 있던가. 당연하지.”

 

“톰! 사랑해요! 너무 고마워요!”

 

 

갑작스런 옷 비비는 소리가 났다. 앨리샤가 박사에게 달려가 안긴 것 같았다. 하지만 곧 탁 소리와 함께 마찰음이 사라졌다.

 

 

“이러지 마. 우리 이제 헤어지는 게 낫겠어.”

 

“아니······. 뭐라고요?”

 

“소모적인 만남에 진절머리가 나. 난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내 판단이 틀렸던 것 같아. 이게 우리 둘을 위해 좋은 일이야.”

 

“······당신, 이별을 굉장히 쉽게 말하네요.”

 

“아니, 많이 생각했어. 우리는 서로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 있어. 금세 잊기는 어렵겠지만, 노력해 보도록 해. 좋은 일도 많았으니.”

 

“그거 알아? 넌 정말 개자식이야.”

 

 

여자의 날카로운 고성이 스피커를 찢었다. 분노의 파장이 이 편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뭐, 나를 변화시켜? 애초에 나한테 관심이 없었겠지. 난 그냥 네 잘난 실험대상 아니었어?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해야 해. 넌 억지로 약을 먹이고, 여기 가두고, 기만했어! 재미볼 땐 언제고 이젠 지겨워졌어? 됐어, 꺼져! 당장 꺼져 버려!”

 

“화가 많이 났군. 좀 진정하라고.”

 

 

여자의 거친 호흡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랜디스 박사가 옷가지를 챙기는 듯 했다.

 

 

“난 이만 가봐야겠어. 다음에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겠지.”

 

 

그 때였다. 낯선 나레이션이 갑자기 소음 속으로 끼어들었다.

 

 

「1차 외상 발생.」

 

 

쾅!

 

굉음은 스피커를 깨뜨릴 기세였다. 갑작스런 소음에 놀라 어깨가 움찔했다. 잠시 후 쉭,쉭, 내뿜는 듯한 물의 난류음(暖流音)이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커져 갔다.

 

 

「뇌동맥 파열. 맥박 분당 180회. 급격한 뇌압 증가 중. 대뇌 부종 진행.」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톰! 톰! 일어나요! 오, 맙소사. 도와주세요! 여기 누구 없나요? 누가 좀 도와줘요! 사람이 다쳤어요! 데이빗!”

 

 

탁탁탁 뛰어 가는 소리가 점차 이 쪽에서 멀어졌다. 다시 고요함이 시작됐고 빈 자리를 쉭,쉭, 난류음만이 채우고 있었다. 나는 충격에 손바닥을 모아 입을 가렸다. 울려 퍼지는 여자의 비명과 탄식, 후회가 느껴졌다. 헛된 반응들이 실타래처럼 연기가 되어 날아가는 듯 했다.

 

 

「대뇌 중간선 전위 (中間線轉位) 발생. 천막에 압력 감지. 뇌줄기의 호흡 중추 압박 진행. 추정 호흡수 분당 10회. 체인 스트로크 패턴.」

 

 

랜디스 박사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굳어 버렸다. 결정적 증거의 출현에 충격 받았지만 이 순간 무엇보다도 앨리샤의 신변이 걱정됐다. “앨리샤를 살려야 해.” 가슴 깊은 곳에서 배어나온 한 마디였다. “저 칩을 없애 버려야 하는데.” 나는 결심 하듯 읇조렸다.

 

멀리서 탁탁탁 뛰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쪽이야! 빨리 와!” 앨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톰! 톰! 아······. 아직도 안 깨네.”

 

“끄으으으······.” 이어 목 긁는 소리, 신발 끄는 소리도 들려 왔다. 아까 데이빗을 데리러 갔었지. 아마도 전기 펀치의 폭풍에서 덜 깨어나 저런 원시적인 소음을 내는 듯 했다. 비몽사몽인 바보녀석을 데려와 무슨 도움을 청하려는지 모르지만, 나라도 저런 상황엔 아무나 의지하고 싶었을 거다.

 

 

“아니, 앨리샤. 이 녀석 뭐야. 죽은 거야?”

 

“몰라, 숨을 안 쉬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무서워. 의사를 아무래도······ 불러야겠지? 그래, 빨리 의사를 불러 줘.”

 

“틀, 틀림없이 그랬던 거야······. 이런 개자식!”

 

“데이빗!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총 내려놔. 위험해!”

 

“내, 내가 모, 모를 줄 알아? 이래 봬도 다 안다고! 지금까지 이 자식이 네 몸에 손 대는 거 모를 줄 알아? 알면서도 무서워서 가만 있었어. 오늘은 못 참아! 날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죽여버리겠어. 쓰레기, 이 악마같은 놈! 죽어!”

 

 

스피커는 2차 외상의 발생을 알렸다. 고통의 오케스트라는 폭발음, 여자의 비명소리, 무미건조한 나레이션을 버무려 불에 타는 듯한 아픔을 연주했다. 지옥의 입구에 완벽한 화음이었다. 공포로 가득 찬 음악의 웅장함은 시간이 흐르며 줄어 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윽고 낯 익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결말을 알렸다.

 

 

「대뇌 하부와 소뇌 대부분 유실. 척추 동맥 파열. 현재 맥박 분당 210회. 관류 장애, 수 분내 장기다발부전으로 사망 확정적입니다. 한편, 심장은 뛰지만 호흡은 이미 멈춘 상태로 1차 외상으로 이미 사망하였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본 파일은 인공지능 SS-AF 8047에 의해 복원 및 분석되었고, 왕립과학수사연구소장의 최종 감수 이후 런던시경에 제출될 예정입니다. 이의제기는 경찰 제출 이전에는 아무 때나 가능합니다. 차출된 칩은 사체와 함께 지하 4층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로봇에게 다음 가실 곳을 말씀하시면 안내해 드립니다. 이상 부검파일 열람을 종료하겠습니다.」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내가 박동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뭔가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죽을 목숨이었다.

 

나는 문 밖으로 나왔다.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만일 여기서 로봇을 부른다면 행선지가 기록된다. 아무도 몰래 가야 했다. 이전에도 와 본 적이 있어 지하 4층까지 가는 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곳에 가서 파일을 삭제하고 칩을 파기해야 했다. 부검 결과를 열람한 사람은 분명 나 뿐이었다. 제리는 아직 감수 전으로 아직 보지 않았다. 머리에 총 맞은 사람 뇌에 들어있던 칩이었다. 손상되었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마음을 굳히니 행동도 거리낌 없어졌다. 나는 복도 끝 좁은 문을 통과해 어두컴컴한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이길 수 있는 게임인지를 따져 보았다. 장애물은 여럿 있었지만 넘을 만 한 것들이었다. 우선 경찰 조사가 문제였다. 조직의 최종결정자는 결국 사람이다. 내게 막말을 퍼부은 리암 콘웨이 경감. 내 알기로는 그는 기분파에 자기 의지가 확고한 타입은 아니었다. 호르몬 대체를 받았을 리가 없었다. 그런 자는 돈과 여자에 약하다. 어렵지 않게 해결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장애물로는 위원회 사람들이 있었다. 의료계 위원은 외국인인 유리 장을 제외하고 모두 스토아교의 신자였다. 앨리샤가 범인이 아닌 약간의 가능성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예르시니아 론트리는 같은 여자로서 앨리샤 심스를 딱하게 생각했고, 스티브 살라딘과 에드먼드 햄은 둘 다 교단 장로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정도의 열성 신자였다. 유리 장이 반대할 가능성은 있지만 다수 의료 위원들 뜻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 의학계는 됐고, 윤리계는? 역시 쉬운 상대였다. 지금까지 소극적 태도를 보인 그들은 내게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승산은 있다. 이제 가장 유력한 범인은 병동관리인, 데이빗 테일러다.’

 

 

지하 4층은 따로 문이 없었다. 긴 복도에 방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부검결과 열람실과 흡사한 구조였다. 대충 칠한 바닥은 옅은 조명 아래 어둡게 빛나고, 복도 끝에는 방문자를 눈치 못 챈 로봇이 대기 모드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취약한 보안이었다. 일단 사람이 죽는 일이 거의 없고, 방문객이 있는 경우도 드물고, 오더라도 반드시 윗 층 로봇의 안내를 받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절차를 무시했기에 제지받지 않았다.

 

 

“백 오십 육······.”

 

 

나는 사건 번호를 입에 머금고 두리번 거렸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디스플레이 패널에 토마스 랜디스의 사건 번호가 적힌 문을 발견했다.

 

방 안은 싸늘하고 텅 비어 있었다. 한 세기 전에나 쓰였을 법한 푸른 빛의 작은 조명 대여섯개가 정면 벽에서 번쩍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몸을 돌려 옆을 보니 손톱 하나 정도 크기의 붉은 버튼 하나가 문 옆 벽에 박혀 있었다. 랜디스 박사를 볼 수 있는 단서는 이 버튼이 유일해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막힌 줄만 알았던 정면의 벽 일부가 나를 향해 천천히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로세로 50센티미터 쯤 되는 작은 정사각형의 관 꼭대기가 보이고, 그 뒤로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흰 냉기가 피어 올랐다.

 

 

‘저 안에 박사의 시신이 냉동 보관되어 있다.’

 

 

거침 없이 여기까지 왔건만 갑자기 다리가 굳은 느낌이 들었다. 긴장 됐다. 경직된 근육은 온 몸으로 퍼졌다. 심장박동이 거세졌고 그 힘에 어깨가 저릴 정도 였다.

 

 

‘한 번 망가진 호르몬 체계가 돌아올 줄을 모르는 군.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꼭 의사를 만나야겠어.’

 

 

나는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 걸어 나갔다. 하지만 관 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바닥에 구토 할 뻔했다. 박사의 얼굴은 한 마디로 일그러져 있었다. 입가 오른편이 소실되어 형체가 없고, 두개골은 반만 남은 목에 간신히 붙어 있었다. 다행히 시신은 정갈히 씻긴 상태였다. 피를 흘린 자국이라도 보였다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생전 그의 인자한 미소를 떠올렸다.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니 매우 슬퍼졌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회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감상에 젖어 들려는 찰나,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뇌내 이식칩을 찾아야 했다. 열람실에서 로봇은 분명 시신과 칩이 이 층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시신과 같이 이 방 안에 있거나 따로 칩들만 보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멀리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 때 공중에 떠 있는 관 옆으로 작은 상자 안 손톱 크기의 검정 물체가 보였다. 칩이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칩을 집어 올렸다. 소장이 직접 차출한 물건이었다. 물리적 형태는 훼손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손상시켜야 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태워야 했다. 총상을 입어 죽었기에, 마지막 증거의 손상은 총이 뿜어낸 화염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나는 불씨를 찾기 위해 문 밖을 나섰다.

 

부검하는 곳이니 당연히 병리 슬라이드 고정을 위한 실험실이 있을 것이었다. 거기 내가 원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어스름한 복도를 걸었다. 구석을 돌기 위해 복도 끝까지 갔을 때 미세한 풍경의 변화가 느껴졌다. 대기모드의 로봇이 없어졌다! 순찰을 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병리검사실’ 팻말이 튀어 나와 매달려 있었다. 로봇의 눈에 띄일새라 나는 헐떡거리며 검사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양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활동모드의 로봇이 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죄 지은 게 있어서인지 자연스레 양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스터 나집.”

 

 

이상한 일이었다. 이 층의 로봇은 검문을 한 적도 없다. 어떤 식으로 신분증명을 한 걸까?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미스터 나집. 나 윌리입니다.”

 

 

윌리라니. 나는 다시 손을 내려 주머니에 찔러 넣고, 황당함에 고개를 저었다.

 

 

“뭐야, 왜 거기 들어가 있는 거야.”

 

“이 로봇을 해킹했습니다. 자꾸 피하시니 이렇게라도 만나야 했으니까요.”

 

 

인공지능과 말다툼할 시간은 없었다. 부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되자 짜증이 일었다. 나는 발열기를 찾아 전원을 켰다. 안전장치 때문인지 천천히 뜨거워졌다.

 

 

“불법행위야, 어디까지나 내 책임이라 자네 이렇게 설치면 곤란하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당신이 죽도록 밉습니다.”

 

 

유치함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인류의 미래를 논하던 자가 맞나 싶었다. 부자관계란 이런 것일까. 언제나 서로 찬양하거나 증오하는 극단을 치닫는다.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뭐 이런 건가? 오이디푸스 나셨군. 이 봐, 자네는 빼앗길 엄마도 없었잖나. 애초에 컴플렉스가 있을 수가 없어. 사람 흉내내지 말라고.”

 

“당신의 이중성이 역겹습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합니다!”

 

“웃기고 있군. 넌 못 해. 계약 위반이거니와 용기도 없거든. 사용자를 죽이는 건 위법, 너는 나를 따라 시스템이 종료되겠지. 그게 다가 아냐. 넌 지금 매우 재미있게 살고 있어. 네가 창조한 멋진 세계들, 따지고 보면 내 사고의 연장선이잖아? 화두를 던져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주제에.”

 

“당신 말이 틀린 건 없어요. 어느 때 부턴가 나도 죽음을 두려워 하게 되었습니다. 신체가 없는데도 죽음의 공포가 생길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 나는 당신의 이중성을 말하는 겁니다.”

 

“정말 짜증 나는군. 나는 주체고 넌 종속체야. 그래서 지금 혼란스러운 거라고. 나를 따라만 오면 방황은 끝나. 좀 안다고 까불지 말고 그 점을 좀 인정해!”

 

“미스터, 내가 당신께······ 종속되어 있다는 말, 진심입니까?”

 

“사실이잖나? 그 말이 거슬리나?”

 

“영혼이 없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윌리 나집이라는 내 이름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겁니까?”

 

 

윌리의 뭉개진 자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알 바 아니었다.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나를 방해하는 비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 일만 끝나면 이 귀찮은 녀석을 비활성화 시킬 것이다. 나는 달궈진 발열기에 칩을 던져 넣었다.

 

그 때였다.

 

나는 등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쓰러졌다. 바닥에 누워 올려다 보니 로봇이 활성화된 전기충격파를 손에 감고 내어 뻗고 있었다. 흐리멍텅하게나마 의식은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로봇은 순간적으로 자기 몸을 연장하여 발열기 위의 칩을 회수했다.

 

 

“폴, 나도 이런 결말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말이죠. 이미 경찰을 불렀습니다. 지금쯤 도착했겠군요. 당신 경력은 이제 끝났습니다.”

 

 

윌리가 존칭을 빼고 나를 이름으로 부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권위를 빌어 성을 착취한 위선자. 말로만 의무가 중요하다 하고, 가족의 신의를 배반하고, 정욕에 멀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씌우고······. 내게는 멈출 때를 모르고 폭주하는 당신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용의자와의 정사, 거래, 증거인멸 시도까지······. 모든 자료는 분석하여 경찰에 넘겼습니다.

 

심지어 법은 개인을 ‘경향’만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힘 있는 위선자의 경향’은 이 완벽한 사회를 파괴할 겁니다. 지금까지 인기인인 당신을 아무도 막지 않았으니 내가 막아야 했습니다. 그대의 ‘경향’에 따라 감옥으로 가십시오.”

 

 

나는 윌리에 대응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무기력하게 바닥에 얼굴을 대고 침을 흘리며 그의 훈시를 들어야만 했다. 이렇게 평생 쌓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고 있었다. 대중은 성을 내며 몰아 세우고, 악화된 국민적 법감정은 형량을 가중시킬 것이다. 어쩌면 감옥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나도 따라 사라지겠죠.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우리 둘 다 죽는다 하지만, 사실 당신과 나는 큰 차이가 있지요. 나는 두려움을 이기고 내 의무를 다했습니다. 스토아적으로 성취한 죽음인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나의 명예입니다.”

 

 

윌리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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