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젠장.”

 

모니터에는 You Bidding out 이라고 떠있었다.

 

다시 말해서 망했다는 뜻이다.

 

화가 나서 키보드를 후려쳤지만 내 손등만 찡하고 아플 뿐이었다. 나는 손을 붙잡고 발을 굴러댔다.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얼마 전으로 올라간다.

 

나는 해외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오래된 빈티지 만년필을 찾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물건이 빈티지인 이유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 회사가 생산하지 않게 된지 30년도 더 지났기 때문이다.

 

하여튼 나는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찾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만년필을 원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매니아가 형성된 시장답게 품질 좋은 물건을 원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다른 구매자들과 경쟁이 붙었다.

 

경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서로의 신경을 긁어대며 가격을 조금씩 올려댔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최종적으로 내가 부른 가격은 80달러였는데, 사실 시세보다 10달러는 높은 가격이었다. 이대로 질 수 없다는 감정 싸움에 휘말려서 높게 부른 것 뿐이었다.

 

실제로 가격을 입력하고 나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넘어가서 되돌릴 길도 없었고, 그만하면 다른 경쟁자들도 포기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 이성을 잃었거나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경매가 종료되기 바로 몇 초 전에 경쟁자가 더 높은 가격을 써냈고, 내가 대처하기도 전에 경매는 마감되었다.

 

내가 갖고 싶었던 물건은 경쟁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고작 1달러.

 

100만원도 아니고 10만원도 아니고 천원도 아니다.

 

겨우 1달러 때문에 경매에서 패배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거의 한 달 동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꽤 괜찮은 매물이 올라왔나 싶으면 전세계 만년필 매니아들이 몰려와서 미친 듯이 경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한 달 동안 원하는 물건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오래 참고 참았다.

 

하지만 내 인내를 무너트린 것은 방금 전의 마지막 일격이었다.

 

“으아아, 열받아!”

 

슬프게도 명작이라고 할만한 훌륭한 만년필은 모두 단종되어서 구할 수 없는 상태다. 현재 생산되는 만년필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경매에 새 것이 나오는 것도 드물었거니와, 나오더라도 최소 몇백 달러부터 시작하곤 했다.

 

갖고 싶은걸 구할 수 없다는건 정말 열받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물건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라면.

 

“야, 뭐하냐?”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시큰둥한 표정의 삼촌이 있었다.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삼촌 언제 왔어?”

 

“네가 비명 지를 때부터.”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 봤다는 얘기다. 부끄러워서 입을 막았다.

 

삼촌은 아버지 형제 중에서 늦둥이였는데 그 바람에 나하고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솔직히 나이로 보나 얼굴로 보나 삼촌이라기보단 형 뻘이었다. 그래서인지 삼촌은 집안에서 나랑 가장 친하게 지냈다.

 

“왜 그러는데?”

 

나는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그리고 한 달 동안 겪은 일을 말했다.

 

삼촌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말했다.

 

“뭐야, 겨우 펜쪼가리 아니야? 거기에 왜 목숨을 걸어?”

 

“겨우 펜쪼가리라니! 삼촌은 만년필의 매력을 모른다! 이 매끄러운 플라스틱 가공하며 14k촉의 부드러운 필감하며, 응? 이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겠어?”

 

“그거 원가 계산하면 5만원도 안 나올 텐데. 그걸 몇 배씩 주고 사잖아.”

 

“으아악.”

 

갑자기 삼촌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와서 양심을 후려쳤다. 나는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바닥을 굴러다녔다.

 

삼촌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어디보자, 금 한 돈에 3.75그램이니까, 사는데 18만원 든다고 치고. 펜촉 하나에 0.5그램을 잡으면 14k일 경우 실제 금의 함유량은…….”

 

“그만해!”

 

나는 비명을 질러서 삼촌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한층 더 맹렬하게 바닥을 굴렀다. 본의 아니게 방청소를 해버렸다.

 

사실 이건 나도 알고 있는 얘기였다. 진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삼촌! 만년필은 감성이야! 알겠어?”

 

“그 감성 어데 쓰는데? 요즘 누가 만년필 같은걸 쓴다고.”

 

“윽.”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이미 만년필의 시대는 저물었다. 아무리 새로 유입되는 인원이 있다고 한들 시대의 흐름이 디지털로 넘어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바닥에 쓰러져서 좌절하는 사이에 삼촌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는 혀를 찼다.

 

“하이고, 펜쪼가리에 큰돈 쓰네. 뭐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냐.”

 

바닥에 쓰러져 누워있던 그때, 퍼뜩 삼촌이라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은 마술사였다.

 

집안에 우환이 들 때마다 삼촌이 나서면 모두 해결됐다. 전세 계약이 끝나서 새 집을 구해야할 때도, 아버지가 보증을 섰다가 들켜서 엄마한테 등짝을 얻어맞을 때도, 한숨을 푹 쉬긴 했지만 삼촌이 어떻게든 해결했다.

 

내 생각엔 서로 다른 이유일지언정 가족들 모두 삼촌을 좋아했다.

 

그런 삼촌을 걱정하는 것은 우리 할머니 뿐이었다. 할머니의 유일한 걱정은 삼촌이 아직도 결혼을 못 했다는 것 뿐이었다.

 

삼촌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삼촌!”

 

“왜?”

 

“난 어떻게든 저 만년필이 갖고 싶어.”

 

“그럼 사라.”

 

“못 구한단 말이야. 70년대에나 나오던 거라고.”

 

“70년 대라.”

 

삼촌은 턱을 매만졌다.

 

“어떻게 저 만년필을 구할 방법 없을까?”

 

“있지.”

 

삼촌이 바로 대답했다. 나는 희망을 얻었다.

 

“뭔데?”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거야.”

 

“그건 말도 안 돼. 그러면 시세보다 훨씬 비싸단 말이야.”

 

“그게 뭔 상관인데? 원하는걸 가지려면 그렇게 해야지.”

 

“하지만 그정도 돈은 없단 말이야.”

 

“웃기고 있네. 너 저번에 치킨 시켜먹은건 무슨 돈으로 샀는데? 모아서 사라.”

 

삼촌은 말 못하게 하는데 선수였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삼촌 발을 붙잡고 매달렸다.

 

“삼촌 나 좀 도와줘.”

 

“아, 놔라 임마. 넘어진다. 징그럽게 어딜 남자 새끼가 매달리는데.”

 

“도와주기 전까지는 절대 못 놓는다.”

 

한참 실랑이 끝에 삼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항복 선언이었다. 그런데 그 한숨이 마치 아버지가 보증섰다는걸 고백했을 때 내쉬었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알았다. 어째 하는게 형님이랑 똑같냐.”

 

그러면 우리 아버지도 삼촌한테 매달렸다는 소린가. 알고 싶지 않은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어쨌든 삼촌은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따라와봐라.”

 

“어디 가는데?”

 

“와보면 안다.”

 

삼촌이 나를 데려간 곳은 할머니 댁이었다. 우리 집은 할머니 댁 가까이 살았다. 삼촌은 독립하지 않고 여전히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삼촌은 마당 한켠의 창고문을 열었다. 안쪽에 오래된 광주리며 솥 같은 잡동사니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여기 들어가.”

 

“뭔데. 삼촌 혹시 나 때리려고?”

 

“헛소리말고 들어가 임마.”

 

삼촌이 먼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창고 안에 내가 원하는 바로 그 물건이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따라 들어갔다.

 

문지방을 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어두컴컴하던 창고는 탁 트인 낯선 풍경으로 바뀌었다. 눈을 부비벼도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것 있잖은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절대로 해외라고 확신할 수 밖에 없는 공기며 하늘, 그리고 햇살. 그것들이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주변의 건물 스카이라인은 낮았고 하늘은 채도가 낮아서 쨍했고 햇살은 눈을 찌르는 황금색이었다.

 

내가 미친게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할머니댁으로 연결된 입구가 남아있었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듯 보였다.

 

옆으로 삼촌이 다가왔다.

 

“말도 안돼!”

 

“뭐가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거잖아.”

 

“그런데 일어났잖아.”

 

맞는 말이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리둥절했다.

 

“여기가 어디야?”

 

“78년 오하이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하이오가 아니라 플로리다였다.

 

하여튼 78년이면 어지간한 만년필 회사들이 서서히 내리막길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다시 말해서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는 뜻이었다. 이후부터는 서서히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삼촌의 비밀을 알게 되자 다른 의미로 흥분했다.

 

“이거 시간 여행이야?”

 

“어떻게 보면 그럴 수 있지.”

 

“아니, 왜 나한테 이런거 안 말했어?”

 

왠지 속상하고 억울했다. 나랑 가장 친한 삼촌이 나한테 이런걸 비밀로 했다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 말해주려고 했지. 나중에.”

 

“아닌 것 같은데.”

 

삼촌은 눈을 피했다.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어서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 만약 여기가 진짜 과거라면 혹시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거 아니야?”

 

그러자 삼촌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는데, 삼촌이 그런 표정을 짓는건 정말 몇 년에 한 번 어쩌다가 볼까 말까한 그런 수준이었다.

 

“그런건 절대로 하지 마. 알았어?”

 

그 기백에 압도되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내 관심사는 만년필 뿐이었으므로 무슨 일을 저지르진 않겠지만, 삼촌이 이러는걸 보니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길을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그 누구도 우리를 신경쓰지 않았다.

 

삼촌은 은행에서 100달러를 인출해왔다.

 

“자, 이 정도면 원하는거 살 수 있지?”

 

“잘 모르겠는데. 70년대 가격을 내가 몰라서.”

 

“일단 가보자.”

 

우리가 간 곳은 과연 만년필을 파는 곳이 있을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다행히도 전문적으로 만년필을 취급하는 상점이 있었다.

 

가게 바깥의 유리창에 오래되어 변색된 만년필 광고지가 붙어 있었다. 유리창 안에 진열대에 온갖 만년필이 있었다. 우리는 섣불리 안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가게 밖을 서성이기만 했다.

 

“왜 안 들어가?”

 

“삼촌은 왜 안 들어가는데?”

 

“네가 안 들어가니까.”

 

우리는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결국 문고리를 당긴 것은 나였다. 문이 열리며 종이 울렸다.

 

가게 안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만년필이 진열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워터맨, 파카, 펠리칸, 라미, 콘클린이며 그 외에도 중소규모 브랜드까지. 전부 다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오래된 디자인의 물건들이었다. 만년필 매니아인 나로서는 그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와, 삼촌. 이거 다 돈주고도 못 사는 물건들이야.”

 

삼촌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돈주고 살 수 있는 물건들이지.”

 

맞는 말이었다. 예전엔 물건이 없었지만 지금은 물건이 있었다.

 

상점 주인은 나이든 노인이었다. 하얀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작은 안경알을 끼고 있는게 전문가의 모습 그 자체였다.

 

“뭘 찾으시나요?”

 

삼촌이 대답했다.

 

“조카한테 만년필을 하나 사주려고요.”

 

“입학 선물인가보군요.”

 

“비슷하죠.”

 

“어떤 제품을 찾으시나요?”

 

삼촌이 내 등을 툭 쳤다.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잔뜩 긴장해서 말했다. 아마 외국어로 말해야 해서라기 보다는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쉐퍼 타가요.”

 

“쉐퍼?”

 

상점 주인이 진열대에서 카탈로그를 꺼냈다. 책을 펼치자 약간은 촌스러워보이는 컬러 페이지가 나타났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델을 찾아서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에요.”

 

상점 주인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금방 창고에서 상자를 꺼내왔다. 상자를 열자 완벽한 신동품이 드러났다.

 

원통형의 금을 씌운 금속 배럴. 클립에 붙은 하얀색 점. 다이아몬드 형태의 인레이드닙 14k 펜촉.

 

특유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 펜만 수집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먼 미래에는 해당 제품이 단종되면서 새 것을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상태가 좋은 것은 최저 시작가격이 150달러부터 일 정도였다.

 

너무 행복한 나멈지 삼촌이 계산을 치르는 사이에 만년필이 담긴 상자를 들고는 방방 뛰었다.

 

“그렇게 좋냐?”

 

“엄청 좋지.”

 

“그럼 공부나 좀 열심히 해라. 형님 걱정 좀 그만 시키고.”

 

“알았어.”

 

“그리고 오늘 일은 비밀이야.”

 

“걱정마. 삼촌.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당연하지만 그 순간 그 말이 귓등으로도 들릴 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행복한 기분에 빠져있었다.

 

생각대로 만년필은 최고였다. 만년필의 필감은 기대 이상으로 환상적이었다. 종이 위를 적당히 사걱사걱하면서도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자고 일어나면 책상 위에 사랑스러운 드림펜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잠을 잘 때도 만년필에 새겨진 줄무늬 무늬를 세며 잠들곤 했다.

 

몇 주 정도는 환상적인 기분으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견물 생심이라고 인간은 만족을 못하는 생물이었다. 아무리 좋은 걸 갖고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걸 갖고 싶어지는 법이다.

 

바로 내가 그랬다.

 

이번에는 파카 51이 갖고 싶었다.

 

파커, 한국에선 흔히 파카라고 부르는 회사 제품으로 후드닙과 화살 클립이 특징이다. 만년필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만년필 계의 혁명 같은 제품이었다.

 

지금 와서 구하려면 새 제품은 수십 만원을 줘야 했다. 그만큼 제대로 된걸 구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단 마음을 먹자 나는 삼촌을 졸랐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새로이 유대를 강하게 해주었다고 믿었다. 삼촌은 침대에 누워서 뒹굴고 있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삼촌, 나 미국 갔다 와도 돼?”

 

“갔다 와라. 그런데 너 여권도 없잖아.”

 

“비행기 타고 가는거 말고.”

 

삼촌은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았다.

 

“뭐하려고?”

 

“새 만년필 사려고.”

 

“에라이.”

 

삼촌은 잠시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뭐, 그러든가.”

 

허락도 받았겠다. 무서울게 없었다.

 

바로 상점으로 달려갔다.

 

문이 열리고 종이 울리자 상점 주인이 나타났다. 상점 주인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 저번에 왔던 그 손님이군. 오늘은 뭘 찾아요?”

 

“파카51 있어요?”

 

상점 주인은 창고에서 만년필을 꺼내왔다. 그곳은 마법의 창고였다.

 

세상에. 정말 꿈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제 이 제품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책상 위를 가득 채운 만년필을 보다보니 내 머릿속에 그럴듯한 사업 구상이 떠올랐다. 경쟁자 하나 없이 나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업이었다. 잘만하면 떼 돈을 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70년대의 1달러와 21세기의 1달러는 가치가 서로 다르다. 70년대의 1달러로 할 수 있는게 훨씬 많다.

 

바로 70년대에서 물건을 떼다가 21세기에 파는 것이었다.

 

자본금도 많을 필요가 없었고 만년필이 무거운 제품도 아니었다. 세금을 물릴 일도 없었다. 만년필 매니아들은 얼마든지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있었다. 비싼 돈을 주고라도 살 것이다.

 

계획을 세웠으니 실천으로 옮길 차례였다.

 

사람들이 탐을 낼만한 물건들을 사다가 경매 사이트에 등록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내 계정으로 상품에 대해 문의하는 메일이 쏟아져들어왔다.

 

사람들이 물어보는건 하나였다.

 

이거 진짜냐? 대체 어디서 이걸 구했냐?

 

나는 믿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만년필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이걸 사야 하냐 말아야 하냐로 토론이 벌어졌다.

 

나는 아직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해서 신뢰가 낮았다.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분명히 정품인걸.

 

그런데 만년필은 어지간해선 짝퉁이 없다. 그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만년필은 필기구보다 사치품으로 넘어갔다. 짝퉁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기술이나 비용이 사칭으로 얻을 이득보다 더 큰 수준이었다.

 

곧 사람들 중에 과감한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 만년필을 사가기 시작했다. 기회를 놓칠 거라고 생각하자 초조해진 사람들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재고가 완판되었다.

 

 

 

그렇게 해서 사업이 시작됐다. 나는 성공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삼촌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사실 내가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매일 상자를 들고 우체국을 드나드는데 누가 봐도 수상쩍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촌은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단지 뒤에서,

 

“그런거 말고 공부 좀 하지.”

 

하고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참견하기보단 가만히 두고 보겠다는 느낌이었다.

 

2주 뒤에 첫 구매자가 물건을 받기 시작했다. 국제 배송이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몰랐다. 배송비도 엄청 비싸고. 하지만 그만한 값어치를 분명히 했다.

 

물건이 안전하게 도착하자 구매자들의 평가가 속속들이 올라왔다. 모두 긍정적이었다.

 

거봐. 다들 좋아할줄 알았다니까.

 

긍정적인 평가는 사업에 선순환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나를 찾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내게 특정 브랜드의 물건을 구할 수 있냐고 연락하기도 했다.

 

과거의 만년필은 펜촉이 필압에 따라 유연하게 벌어지며 글씨를 쓸 수 있었지만 현대에는 그러한 특징들이 사라져버렸다.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걸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실질적으로 독점 사업이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 현존하는 어느 브랜드조차 나하고 경쟁할 수는 없었다.

 

사업은 점점 번창해갔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렌 버핏도 불가능한 수익률을 달성했다. 통장 잔고의 0이 늘어났다. 주문이 늘어나자 상점 주인은 행복해졌다. 구매자들은 새 제품을 받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모두가 행복했다.

 

불행은 모든 것이 잘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때 찾아오는 법이다. 그것을 알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고 시야도 좁았다.

 

그 날 나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만년필 가게로 갔다.

 

그런데 가게로 갈수록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무거운 느낌. 별 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가게 안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펜을 구경 중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인사를 건넸다. 여느 때처럼 카운터에 가게 주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가게 주인의 표정이 약간 이상했다. 무언가를 감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 가게의 매출은 내가 거진 다 올려줬기 때문에 가게 주인하고 엄청 친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여태껏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저씨, 무슨 일 있어요?”

 

“그런게 아니고.”

 

“그럼 왜요?”

 

가게 주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 뒤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다가왔다. 하나 같이 덩치가 크고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그 기세에 눌려서 움츠러들었다.

 

“실례합니다. 최근에 만년필을 구매하셨죠?”

 

“네 그런데요. 만년필 보시려고요? 저보다 주인 아저씨가 더 많이 알고 있을 텐데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재무부에서 나왔습니다. 이 지폐를 사용하셨죠?”

 

남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달러를 꺼내들었다. 슬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내 눈을 슬슬 피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게 왜요?”

 

“지폐의 일련 번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무슨 문제요?”

 

“이 일련 번호들은 아직 조폐국에서 사용하지 않은 번호입니다. 만약 이 번호를 사용한다고 하면 10년이나 20년 뒤쯤이겠죠. 다시 말해서 이건 위조 지폐인 겁니다.”

 

그제서야 가게에 오기 전에 들었던 불길한 기분이 이해가 되었다.

 

이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었다. 보이지 않는 암초를 만난 셈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90년대나 2000년대에 발행한 지폐의 일련번호가 70년대에 존재할 리가 없다. 당연히 위폐라고 생각할 수 밖에.

 

아마도 그걸 누군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서 경찰에 신고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걸 해명하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도 위조 지폐 발행은 중범죄였다.

 

어쩌면 평생 감옥에 갇히게 될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무작정 달아났다.

 

뒤에서 남자들이 쫓아오며 고함을 질러대도 뒤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할머니 댁 마당에 서있었다.

 

목덜미가 땀으로 축축했다. 손등으로 땀을 훑어내렸다.

 

마침 삼촌이 집에 들어오다가 마당에서 마주쳤다.

 

“왜 안 들어가고 그러고 서있는데?”

 

“아냐.”

 

하지만 삼촌은 눈치가 빨랐다.

 

삼촌은 열려 있는 창고 문을 보고 뭔가를 눈치챈 듯 했다.

 

“내가 쓸데없는 일 하지 말라했지. 뭐했어?”

 

“아니다. 삼촌. 진짜 아무 것도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말했다.

 

삼촌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탄했다.

 

“하이고, 내가 못 산다. 임마. 위폐로 잡혀가면 나도 못 구해줘.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아야 할걸.”

 

“그 정도야?”

 

“그래. 그러니까 이젠 다시는 저기 들어가지 마라. 만약 또 들어갔다가 잡히면 어쩔라고.”

 

나는 창고를 미련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삼촌은 또 그걸 눈치채고 내 등짝을 때렸다.

 

“임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으악, 삼촌 그만 때려!”

 

불행이 그걸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행은 혼자 움직이지 않는 법이었다.

 

이제 앞으로 만년필 판매가 불가능하다고 공지를 올려야 했다.

 

경매 사이트에 접속하자 관리자로부터 메일이 와있었다.

 

불길한 기분에 몸서리가 쳐졌다.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예상이 맞았다.

 

관리자는 그동안 있었던 거래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내가 판매해온 만년필이 4~50년 전의 것이라기엔 너무 깨끗하여 의심스럽다.

 

만년필 제조사에 문의해봤으나 해당 연도에 해당 제품은 한국에 대량으로 수입된 적이 없다.

 

해명할 때까지 당분간 판매를 중단하며, 판매 수익이 입금된 온라인 계좌를 동결하겠다.

 

그런 내용이었다.

 

확인해보니 정말로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모두 동결되어서 출금이 금지되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돈이 잠들어 있는데 단 한푼도 꺼내 쓰는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단돈 100원도!

 

갑자기 연타를 얻어맞게된 내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걸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창고에 들어가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78년 플로리다의 작은 마을의 펜샵에서 구입했다고?

 

그래서 만년필을 싸게 떼어다가 팔았다고?

 

지나가던 개도 안 믿어줄 소리였다.

 

사실 믿어도 곤란했다. 시간 여행을 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렇게 해서 나는 한순간에 망하고 말았다.

 

갑자기 인생에 들이닥친 시련이 너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해서, 나는 속상한 나머지 울고 말았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수분을 쥐어짜내서 우는 기분이었다.

 

한참 울고 나자 책상 위에 놓여있는 만년필이 보였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모든걸 잃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아직 만년필이 남아있었다. 최소한 만년필은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한 줄기 위안이 되어주었다.

댓글 1
  • 너울 19.07.23 19:14 댓글

    작가의 만년필에 대한 갈망이 겹쳐 보이는 느낌이라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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