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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실험실의 동화책

2019.06.15 20:2106.15

실험실의 동화책

 

의실에 못 보던 얼굴이 지현의 눈에 띄었다. 몇 안 되는 학생들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본인도 어색함을 느끼는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그녀의 인공 인지학 강의는 공대 선택 과목 중 하나로 인기 수업은 아니었지만, 다 합해서 열 명 남짓 되는 학생들은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학자들이 수없이 질문해왔던 문제가 있습니다. 의식이란 무엇일까? 대체 어떤 분자 구조와 회로가 스스로 존재감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지금 이 수업을 수강하는 여러분들 대부분이 인공지능, 로보틱스 전공자라 잘 알고 있겠지만,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식이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죠.”

 

“그래서 제 수업이 썰렁한 이유이기도 하지만요.”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로봇이 몽땅 바이센터니얼맨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뉴로인텔리전스사의 타키스 홈 시리즈나 아니면 독일산 제품 중에 오토 메이드 시리즈가 유명하니까 잘 아실 텐데요.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갖고 있는 집이 많을 텐데, 어느 날 로봇이 설거지하다가 인권 선언을 외치면서 파업하는 걸 원하지는 않을 거예요.”

 

학생 몇 명이 웃었다.

 

“다만 우리는 비밀을 알고 싶을 뿐이죠.”

 

“좀 진부한 비유긴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대로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나는 느끼므로 존재한다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지현은 잠깐 학생들의 반응을 살핀 뒤 말을 이었다.

 

“지각이란 인지 자체에 감각이 작용함을 의미해요. 사람의 경우 신경세포 간의 신호 전달과정에서 그 신호가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의식이 만들어집니다. 단순히 먹고 무언가를 만지고 음악을 들었을 때뿐만 아니라, 순수한 사고 과정 자체에도 감각이 작용한다는 뜻이에요.”

 

“즉, 여러분의 신체가 외부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호뿐만 아니라 신경세포 내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신호도 감각으로 인지되고, 그 수천억 개의 감각 인지가 병렬로 작용하여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따라서 신경계에 감각이 없으면 인지한다는 느낌도,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 거죠.”

 

“복잡한 인지 과정이 감각으로 작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의식의 비밀이에요.”

 

“결국, 인공지능에도 회로가 감각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의식을 갖는 존재가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됩니다.”

 

그녀의 수업에 가끔 한두 명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신의 표정을 짓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논문 자진 취소로 잠깐 뉴스에서 인기인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 여파가 학생들에게도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교실을 나가자 그 의문의 사내가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수업은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

 

지현이 의아한 표정을 보이자 그는 휴대폰을 꺼내 그녀와 몇 차례 나누었던 문자를 보여주었다.

 

사실은 일주일 전쯤 동솔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한차례 연락이 왔었다.

그는 지현에게 뉴로인텔리전스사 연구소에 근무했던 이지현 박사님이 맞냐고 물었고 반드시 만나서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가 본인의 신상을 밝히지 않아 지현이 만남을 여러 차례 거부하자 강의실까지 쫓아온 것이다.

 

“리티라는 아이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순간 가슴이 쿵쾅했다. 지현은 잠깐 생각하다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그런 학생은 없는데요?”

 

“리티에게 남겨진 유산이 있습니다.”

 

동솔은 폰에 담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매우 초췌해 보이는 노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저희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집행하려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박사님께서 아이의 보호자임을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박사님의 친딸은 아닌 것 같군요.”

 

그녀가 곧바로 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확신이 서자 그녀에게 상속받을 재산목록 서류를 건넸다.

 

“오늘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지현은 12년 전 연구소 시절을 떠올렸다.

 

 

이잉~ 찌이익~ 위이잉~ 찌이익~

연구소 건물의 한 숙소에서 요란한 진동 소리와 함께 TV 뮤직쇼의 록 가수의 열창을 따라부르는 목소리가 울린다.

 

이지현 박사는 연구소 업무를 마치고 숙소가 있는 건물 상층부로 이동한 후 리티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유 소장이 키우던 강아지 말랑이가 뛰쳐나왔다.

흰색 곱슬털이 머리 한가운데서부터 등 중간까지 고속도로처럼 밀려있었다.

 

“어머 이게 뭐니?”

 

곧이어 리티가 뛰어나와 강아지를 뒤쫓았고 지현에게 바리깡을 빼앗겼다.

말랑이는 신나게 짖으며 둘 사이를 빙빙 돌다 다시 리티의 품에 달려들었다.

 

“또 사고 쳤구나? 유 소장님이 가장 아끼는 강아지인데!” 당황한 지현이 다그쳤다.

 

“리티도 타키보다 잘하는 거 보여주고 싶어. 그리고 리티는 말랑이가 필요해~”

 

“타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지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리티는 얼마 전 정기 테스트에서 연구원들의 예상치에 한참 못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타키를 상대로 경쟁심까지 갖게 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래서 인터넷 영상에서 애완견 미용하는 모습을 보고 지현에게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만회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현은 리티에게 더 사고 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꼼꼼하게 받아내고 유 소장에게 미안하다는 문자 한 개를 보냈다.

말랑이의 사진도 찍어 보낼까 하다 관두기로 했다.

 

그날 밤 유 소장은 자신과 같은 헤어 스타일로 말랑이의 머리털 전체를 밀어버렸다.

 

리티는 ‘리틀 타이푼’이라는 단어의 머리글을 딴 프로젝트명으로 지현이 지어준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의 삶을 살았는데 태풍의 눈 안에서는 평온하다가도 어느 순간 작은 혼돈이 되었다.

 

유 소장이 가장 감탄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신들린 작명 센스였고, 말랑이의 머리가 밀린 이후 유 소장은 음모론을 다시 꺼내 들었다.

 

“리폭풍이 말이야, 아니 리태풍이! 조만간에 리태풍이를 이용해 내 연구소를 폭파하고, 이 소장이 회사를 거머쥔 다음 태풍이가 지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거라고.”

“로봇 3원칙 같은 건 애초에 고려해서 만들어진 애가 아니야!”

 

사실 그런 원칙은 애초에 지현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의 전공 분야가 인공지능이었다면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녀는 재료공학을 공부하고 대학원 시절부터 인지 회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인공 호르몬에 반응하는 감각 소자’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한동안 대기업의 세미컨덕터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감각 소자의 메모리 효과에 대한 추가 논문을 발표하였고, 뉴로인텔리전스사에서 연구 소장직을 맡는 조건으로 스카우트 되었다.

대기업 못지않은 높은 연봉과 꽤 괜찮은 연구 환경이었지만, 그런 조건이 아니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을 것이다.

 

그녀가 만든 것은 감각 소자이다. 감각 소자 수백억 개가 병렬로 작용해 의식이 피어난다.

연산 과정을 위한 어떤 신호라도 신경 전방위로 퍼져나가는 순간, 그 수많은 소자는 그 신호를 인지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이곳 연구소에서 기본적인 신경계가 성공적으로 완성되자, 이를 바탕으로 사람의 신경만큼의 더 복잡한 회로를 구성했다.

연구원들은 신경계를 완성한 후 유럽의 가장 유명한 안드로이드 제조사에서 수입한 바디의 각종 센서와 결합했다.

 

리티의 의식은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감각이 없으면 인지도 없다는 기본 원리에서 출발한 지현의 이론은 아직 누구도 검증하지 못했다.

 

타키는 리티의 오빠다. 선배라고 해야 할까?

유 소장이 회사 초창기부터 개발해온 고 연산 집적회로 기반의 딥러닝 AI이다.

지현이 입사 당시에 타키는 이미 4살이었다.

빛보다 빠른 가상 입자인 타키온에서 따온 이름처럼 엄청난 고성능을 갖추었다.

 

반면 리티의 회로는 인간의 신경계와 비슷한 속도였지만, 타키의 최첨단 연산유닛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느렸다.

그런데도 프로그램 없이 학습이 가능하다는 것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특정 프로그램을 내장할 수 없으므로 학습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아이들이 배우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글을 읽는 법은 학습했지만, 정서적 계발도 고려해야 할 요소였기 때문에 지현은 자주 동화책을 읽어줬다.

 

리티가 3살이 될 때까지는 거의 유아 수준이었다.

그전까지는 말하기 훈련이나 듣기 훈련은 보통 인간의 아이들에게 쏟는 노력의 수배가 되었다.

가끔은 상대의 대화를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명령에 대해 일관성 있는 행동을 보인 적도 없었고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가시적인 학습 효과가 보이지 않아 연구원들의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학습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문 보육사와 아동학습 전문가를 고용하기도 했다.

 

한 연구원은 ‘프로그램이라도 설치해 넣을 수 있으면 말랑이처럼 밥 달라고 꼬리라도 흔들 수 있을 텐데’라며 회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회사 측에서도 불만이 많았으므로 매번 다음 회기의 연구비가 충분히 책정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경영진 중 일부는 연구자료와 기술을 타키 프로젝트로 이전하여 통합시키자는 의견을 냈지만 유 소장이 적절히 방어해 주었고, 지현은 회사가 보여준 인내심의 근간이 되었던 투자금 회수에 대한 미련을 계속 자극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리티가 실험실에서 테스트를 받기 위해 의자에 앉아서 유 소장의 머리털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유 소장이 검지를 좌우로 흔들다 리티의 이마를 콕 찍으며 말했다.

 

“너 때문에 지현 언니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르지?”

 

그리고 손가락으로 타키를 가리켰다.

 

“이사장님이 얼마나 빡쳐있는데... 너만 없었어도 재작년에 타키가 상용화되고도 남았거든.”

 

그때가 만으로 3살이 되던 날이었고 생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리티 빡쳐. 이사장 끝장난다!”

 

이 사건은 경영진에게 바로 보고되었고 그들의 의심과 회의는 확신과 자애로움으로 바뀌었다.

곧바로 연구비가 크게 책정되어 지현의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았다.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리티는 어느 순간 급속한 발전을 보였고, 감정적인 면에서는 아동과 사춘기 청소년의 혼재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외적으로는 차이를 드러나지 않아도 내적으로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있었고, 그것이 어느 순간 특이점을 가져온 것이다.

 

그 이후로 리티는 약간의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받았는데, 일과는 언제나 비슷하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자마자, 정확히는 수면 모드에서 활성화 모드로 바뀌자마자, 자신의 시스템에 이상이 없는지 테스트 장비를 이용하여 자가 테스트를 한다.

검사결과는 자동으로 회사에 전송된다.

 

그다음 케이블 TV를 켜고 ‘굿모닝 아침댄스’ 방송 프로그램을 30분간 시청한다.

인기 댄스 가수들의 춤을 대중들이 따라 할 수 있게끔 간소화시킨 동작들을 보여주는데 매일 아침 따라 하면서 운동신경을 발전시킨다.

간혹 춤이 너무 단순하거나 지루하다고 느낄 때면 동작을 바꿔서 출 때도 있다.

 

작년까지는 체조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때도 열심히 따라 했지만, 트렌드의 변화에 따라 아침댄스로 프로그램이 바뀐 후 리티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리티는 연구소 정기 테스트에 댄스를 넣어야 한다고 로비했지만 아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격동적인 30분이 끝나면 회사 뷔페식당으로 내려와 요리를 조금씩 덜어 맛을 본다.

음식을 소화할 수는 없지만 맛은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테스트나 업그레이드가 있는 날이면 연구소로 이동하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방으로 돌아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다.

뉴스나 다큐멘터리 같은 방송을 보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만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도 확실치는 않다.

 

TV를 보지 않을 때면 장난감을 조립한다.

드론이나 RC카와 심지어 인형까지, 지현이 법인카드를 수도 없이 긁어 사준 장난감들이 많지만, 대개는 기차놀이 세트를 가지고 레일을 조립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외부로 연결되는 인터넷은 보안상 금지되어 있다.

타키는 인터넷 연결을 통해 대량의 빅데이터를 습득하고 분석하며 지내지만 리티에겐 그런 기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어가 가능한 타키와 달리 리티가 보안을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현이 리티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줬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책장 안에 가득한 동화책은 미리 읽으면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에, 꾹 참고 지현이 읽어주기 전까지는 미리 열어보지 않는다.

 

연구원들이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대부분 TV를 보며 지낸다.

본인이 원하는 프로그램이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을 경우 특별히 할 일이 없다면, 수면 모드로 잠든 후 방송이 시작될 몇 시간 후에 깨어나 시간 여행을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리티 방에 설치된 카메라로 관찰한 결과이다.

회사 측에서도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자 감시 카메라를 제거했다.

 

리티가 갓 4살을 넘을 무렵이었다.

지현이 오리지널판 신더렐라를 읽어주던 날, 리티는 침대 위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막대사탕을 빨았다.

 

금요일 늦은 저녁, 방 한쪽에는 기차 놀이 세트와 조립하다 만 레고 블록들이 흩어져 있었고, 책장에는 일러스트가 가득한 동화책들과 쿠션 인형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했다.

 

신더렐라 동화를 읽어준 건 오늘로써 세 번째다.

그전까지는 동화의 배경적 상황과 인과 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따라주지 않아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특히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마법과 같은 것에 대해 이해시키는 게 관건이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상상력이야.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라도 가능하다고 믿는 건 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든 사람이 똑같거든.

그걸 믿지 않으면 아무도 책을 읽지 않을 테니까.”

 

놀랍게도 오늘은, 신더렐라가 개암나무 밑에서 금과 은을 달라고 호소하자 드레스가 떨어지는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동화를 다 읽어준 후 줄거리와 인과 관계, 인물들의 역할 등에 대해 질문했을 때 거의 정확하게 대답했다.

또한, 신더렐라가 무도회 참석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한 점은 좋았지만, 왕자 앞에서 자신의 운명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은 행운에 의존한 결과로서 좋지 않다는 의견도 밝혔다.

 

“리티도 적극적이 될 거라고~”

 

결국,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주지 않는가?

연구팀 전체와 경영진들이 참석하는 월간 정기 회의가 시작되었고, 지현의 행동과 목소리에서 100만kw의 에너지가 사방에 퍼져나갔다. 

“같은 나이의 인간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분석력이나 추론력도 더 좋고 주인공의 아픔에 공감할 줄도 알아요.”

“예상대로라면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거예요. 지능은 12살 아이 수준을 넘어섰고 자가 학습능력도 타키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탁월하고요.”

 

‘타키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이라고?’

자신감이 과 충전된 그녀의 사실과 과장이 뒤범벅된 이야기에, 유 소장은 적절한 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만두었다.

그녀는 지난 수년간 암흑의 늪지를 걸었고 이제 막 블랙홀에서 빠졌나 왔기 때문이다.

 

‘리티가 정말 연구소를 폭파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얼마 후 유 소장은 연구 자금의 상당 부분을 지출하여 구매한 4500페타플롭스 프로세스 유닛을 손에 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맞춤한 뒤 타키의 메인 연산장치를 교체하였고,

그때 지현은 자신의 고무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추가 연구 예산에 대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같은 시간에 리티는 연구원 한 명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는 중이었다.

 

리티가 연구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가 아이스크림 박스를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고, 어떻게 해서인지 그날 회사 로비에 있던 고무나무 화분이 통째로 뽑혀 있었다.

 

보안요원은 카메라에 잡힌 빨간 후드티를 입은 범인을 추적하다, 리티의 방 가운데에 한 무더기의 흙과 쓰러져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티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리티는 개암나무가 필요해. 드레스 갖고 싶어!”

 

 

구소의 로봇들은 대체로 각자의 연구팀에서 테스트가 이루어졌지만, 비교평가와 상호반응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함께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손글씨 쓰기, 저글링, 마네킹 머리 깎기와 같은 미세 운동능력 측정, 대화에서 상대방 의도 파악하기와 같은 상황 이해 테스트와 예상 불가능한 상황에 따른 전략을 세우고 최선의 대응방법을 찾는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 기억력과 연산 테스트를 위한 체스와 바둑 같은 고전적 게임도 포함되어있다.

 

다분히 인간의 실생활에 맞게 설계된 테스트였다.

 

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이 준비하는 동안 언젠가 제품이 될 둘은 대기 중이었다.

 

리티는 아침까지만 해도 신나게 기차놀이 세트의 레일을 조립하다, 레일의 고도차를 심하게 주어 부서뜨렸는데, 다시 완성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자 테스트를 담당하는 민희 연구원에게 억지로 끌려 나왔다.

 

“아직도 화났니?” 민희 연구원이 웃으면서 물었지만 리티는 단호한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타키는 주변 연구원들의 움직임과 상황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의 기분과 감정을 분석해 자신의 빅데이터에서 최적의 단어를 조합하여 인사를 건넸다.

 

“민희 연구원님! 오늘 당신의 만발한 미소를 하나 꺾어 제 마음에 라일락 한 송이를 심었습니다.”

 

민희 씨의 입이 찢어지게 올라가자 리티가 그 둘을 노려보다 못 본 척 한다.

 

첫 번째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화면에 이미지가 빠르게 지나가는 동안 그 안에 포함된 문자와 도형들을 맞추기, 틀린 그림 찾기, 숫자 여러 개를 보여주고 블럭으로 가린 후에 1부터 순서대로 선택하기 등이 진행되었고, 타키는 사진 촬영과 같은 정확한 기억력과 고도의 순발력을 보여줬다.

 

반면 리티는 사람과 비슷하거나 다소 떨어지는 결과를 보여줬다.

 

유 소장과 이 소장은 자신의 제품이 어느 정도 성능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고, 정기 테스트는 형식적인 성격이 강했으므로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당일 느지막이 실험실에 나타나 과정을 지켜봤다.

 

타키는 기억력과 고수준 연산이 필요한 테스트에서는 워낙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기 때문에, 지현은 리티가 경쟁심으로 흥분하지 않도록 안정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몇 가지 테스트가 더 진행된 후 가장 복잡성이 높은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이 진행되었다.

 

상대 AI와 대전을 하며 적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전략적 지능을 평가했는데, 타키는 무난히 승리를 거두며 플레이 예상 시간과 남은 병력 수와 잔여 보급품까지 적중시켰다.

 

이 테스트는 리티에게 심적인 부담이 크고 경쟁심을 자극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지현이 살짝 다가와 말했다.

 

“타키 따라 하지 말고 그냥 네 생각대로 하면 되는 거야,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리티는 게임 시작부터 자신의 기지 주위에 모든 미사일과 무기를 배치하고 한 명의 병사도 기지 밖으로 보내지 않았다.

적군 병력은 지도 곳곳에 분산되어 다양한 전략적 우위를 다져갔다.

 

수차례의 산발적 공격을 막고 미사일을 요격하며 버티자 상대 AI는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화면에 경고창이 떴다.

핵미사일 폭격 경고에 기지가 완전히 위험에 처하자 주위의 연구원들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 소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지현을 옆에 두고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저번에는 이기지는 못했지만 여러 가지 시도는 했었잖아?”

 

그때 리티가 게임 명령 창에 항복을 선언하고 게임을 종료했다.

 

관련 연구팀원들의 얼굴에 잠깐 아쉬운 표정이 스쳐 갔으나, 잠시 후 결과가 나오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아군의 모든 병력을 생존시켜 상당한 점수를 얻었고,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한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현이 유 소장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에요. 게임의 룰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거죠.”

 

마지막으로 미세 운동 테스트가 진행됐다.

 

손글씨 쓰기 테스트에서 타키는 깔끔하고 각진 인쇄체와 같은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반면 리티는 감정에 따른 심한 굴곡을 보였고 자신이 불리하고 생각한 나머지 글씨에 지렁이 눈, 달팽이 등껍질 같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저글링 테스트에서 타키는 공 3개로 시작해서 마지막 레벨인 5개까지 다양한 패턴의 현란한 동작을 보여줬다.

 

유 소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만족스럽지 않다며 8개를 시도하도록 요구했고, 타키는 여러 차례 실패 후에 가까스로 성공했다.

패턴은 충분히 파악하고도 남았지만 타키의 안드로이드 바디가 갖는 물리적 한계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 소장은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혼잣말하듯 말했다. “어디 이래서 출시나 할 수 있겠나~ 이거 원!”

 

이건 명백한 도발이다. 그는 간혹 지현을 짜증 나게 할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지현은 리티가 링 위에서 그로기 되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응원을 건넸다.

 

“3개까지만 할 수 있으면 성공이야. 그 이상은 못 해도 정상이니까 하던 대로 해 알겠지?

 

리티는 그 말에 안심한 듯 보였다. 하지만 2개를 성공하고 3개로 토싱과 캐싱을 다섯 회쯤 성공하자 공 한 개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때 유 소장 가슴에 안겨 지켜보던 말랑이가 뛰쳐나가 공을 물어 리티에게 달려갔다.

 

머리가 사탕처럼 밀려있는 말랑이에게 손을 내 미려던 순간, 리티의 시야에 형형색색의 빛깔이 소용돌이쳤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몇 초가 흘렀다.

 

민희 씨가 뭔가 문제가 있음을 눈치채고 테스트 중단 신호를 보내려던 순간, 리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움직여 말랑이가 물어준 공을 받았다.

그러더니 타키의 공을 모두 가져와 테이블 앞에 모아둔 후 이리저리 굴렸다.

 

이를 보던 유 소장이 말했다.

 

“공 쌓기 놀이하려는 것 같은데? 만약 저걸로 성을 짓는다면 난 학계를 영원히 떠나겠어.”

 

지현도 무슨 장난이라도 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놀이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 공 2개를 띄우더니 순식간에 11개가 모두 공중에 떠오르며 테이블 위가 깨끗해졌다.

지현이 입을 벌렸다. 유럽산 안드로이드 바디는 신속하고 정확했다.

 

지현이 리티의 양 볼을 잡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이구 언니가 살살하라고 했잖아~ 유 소장님 삐지신다.”

 

지루할뻔한 시간을 챔피언 결정전 놀이로 만들려 했던 유 소장은 김이 확 샜다.

타키가 3백만 유로짜리 바디를 가졌다면 100개는 거뜬했을 거라며, 리티의 바디가 월등히 비싼 제품이라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평가 결과는 손글씨와 마네킹 머리 깎기에서는 타키의 정밀성에서는 다소 뒤졌지만, 창의성에서는 좋은 점수를 얻었다.

애초에 창의성을 테스트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점수는 반영되었다.

 

이미지 기억력과 반응속도 테스트, 시뮬레이션 게임과 보드게임 대전에서는 타키가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대체로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그래도 저글링에서는 깜짝 놀란 결과를 보여주었고, 테스트 결과 보고서가 올라가자 회사는 리티의 신경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프로젝트 비용에 승인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자금이 투입된 만큼 경영진들의 기대도 부풀어 올랐다.

 

 

현은 그 주 금요일에 보안요원을 대동하고 리티, 타키, 민희 연구원과 함께 쇼핑을 위해 도심으로 나갔다.

리티가 그토록 노래를 부르던 드레스를 사주기로 한 것이다.

 

다음 달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송년회를 겸하여 생일 파티가 있을 예정이다.

이사장의 제안으로 5살이 될 리티의 생일축하 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했고, 회사의 많은 임직원이 참석하여 그동안의 성과를 자축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다.

 

리티와 타키 둘이 댄스 공연을 위한 시간도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의상을 비롯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가을임에도 햇살은 따듯했고 화창했다. 흰색 돌돌이 모자를 쓰고 이쁘게 화장을 한 리티는 부쩍 이는 거리의 인파들을 신기하게 관찰했다.

 

한 젊은 남성이 자신 연인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걸치고 가는 모습을 보자 타키에게 말했다.

 

“전부터 생각해봤는데 너가 리티한테 프로포즈 한다고 해도 너의 마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을 가져서는 안 돼.”

“민희 연구원님이 너를 애타게 사랑하고 있는 이유가 리티에 대한 너의 사랑이 절대 가볍지 않아서이고, 그래서 민희 연구원님이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아.

 

그리고 타키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너가 가슴 아파하는 걸 원하지도 않아.

 

그러자 1초 후에 타키가 잘생긴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내가 너한테 프러포즈하게 될 경우와 네가 프러포즈를 곧바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할 경우가 동시에 발생할 확률은 지금까지는 0퍼센트였는데, 지금 이후로 그 확률이 0.025 퍼센트로 증가했어.”

 

타키는 리티의 손을 잡은 채, 대로변의 고급 승용차와 스포츠카가 전시된 자동차 판매장 앞으로 데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저 자동차의 구형 시스템을 대체 한 다음 고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확률이 너한테 프러포즈할 확률보다 2000배 높아.”

 

그러자 리티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연신 눈을 깜빡였다.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자신이 매우 화났음을 알리는 표정을 몇 차례 연습한 후에 지현을 보고 말했다.

 

“언니 리티는 왜 확률계산이 안 되는 거야?”

 

지현이 장난스럽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했다.

 

“언니가 리티 사랑할 확률은 몇 퍼센트?”

 

그러자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고 타키에게 달려갔다.

 

“소장님 리티가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해지는 것 같아요. 저번 정기 테스트 이후로 의사결정 범주가 기준치를 상당히 벗어나고 있어요.”

 

민희 씨가 지현에게 속삭였고 지현도 그 사실에 동의했다.

 

지현은 유명 의류샵에서 드레스 몇 벌과 하이힐을 골라주었고, 민희 씨는 타키에게 선글라스와 구두, 정장을 골라주었다.

 

그리고 영화관에 들러 ‘레이디 줄리아’라는 영화를 봤는데,

인공지능 줄리아가 지구에서 노예 취급을 받던 로봇 동지들을 모아,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 엔릴족의 약점을 찾아 인류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줄리아가 동지들의 딥러닝 데이터를 취합한 후 새롭게 개발된 마스터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부분에서 지현과 민희 씨는 실소했다.

리티는 줄리아가 총독의 우주선에서 잠입하여 자신의 소형 원자로를 폭발시켜 죽는 장면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영화가 끝나고 일행은 파스타 집에 들렀다.

안전을 위해 종일 일행의 뒤를 따라다니던 보안요원도 자리에 함께했다.

 

리티는 요리를 조금 맛본 후 피곤한지 보안요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았다.

반면 타키는 맛을 볼 수는 없지만 맛을 분석할 수 있다.

 

지칠 이유가 없는 타키는 여성 로봇이 주인공이 되어 주도적인 활약을 그린 영화들을 나열하며 트렌드를 분석했다.

 

민희 씨는 자신을 경쟁상대로 느끼게 할만한 소지를 없애기 위해 최근 자신의 연애담을 들려주었고, 보안요원도 긴 연애 끝에 결혼하여 지금은 5살 나이의 딸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어두워지자 일정을 끝낸 일행은 연구소에 도착했고, 리티와 타키는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지현이 침대에서 반쯤 졸고 있는 리티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가려는데 잠꼬대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리티도 외계인이 침입해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거 같아. 으으응... 줄리아가 마스터 알고리즘을 전해주겠다고 연락해왔어. 으으응... 유 소장님이 작전 수행을 위한 만반의 테스트가 성공적이라고...

“리티 출격 완료!”

 

 

음 날 아침 리티는 연구원들에 의해 시스템이 중지되었고 곧바로 신경회로의 비파괴 검사가 진행되었다.

수 시간에 걸친 정밀 검사 끝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던 지현은 한시름을 내려놓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휴대폰에 빼곡히 담긴 일정을 확인했다.

 

‘12월 24일’

 

단순히 파티의 문제가 아니다.

수년간의 연구 성과를 드러내 보이는 자리이자 경영진들에게는 회사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자리이다.

 

그녀는 결정을 내리기 힘들 때 입술을 씹는 버릇이 나온다.

회사 로고가 인쇄되어있는 머그잔 안의 커피가 싸늘히 식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한숨을 쉬고 유 소장을 호출했다.

 

그는 작은 키에도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옆 실험실에서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리티를 흘끔 쳐다본 후 지현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지현은 검사결과 자료를 보여주었다.

 

“아직은 확인해야 할 게 몇 가지 더 남았지만, 파티는 예정대로 가능하니까 그렇게 전해주세요.

 

그는 자료를 대충 훑어보더니 정수리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개를 매만지며 말했다.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것 봐~ 내가 별문제 없을 거라고 했잖아. 나머지는 연구원들이 진행하고 있으니까 일단은 좀 여유를 가져 보자고.”

“아 참 그리고 공연 말이야, 타키가 안무 다 만들어놨다고 하니까 준비되면 민희 씨한테 얘기해.

 

“타키가요? 리티가 절대 양보 안 할 거예요. 아시잖아요.”

 

“그래 그건 그렇지. 아무래도 조만간 괴상한 걸 보게 될 것 같은 기대가 들긴 해.”

 

최종 검사 후에도 별다른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아 지현도 마음을 놓았다.

 

이후에 민희 씨가 매일 둘을 회사 건물 꼭대기 층 강당에 데려가 음악과 의상 등을 준비해 주었는데, 실은 둘이 싸움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임무였다.

타키가 많은 레퍼토리를 보여주었음에도 순순히 따르게 된 이유는, 리티가 보여준 창작물이 자신의 빅데이터로 전혀 분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현도 둘을 응원하러 가보려 했지만, 민희 씨도 누설엄금 약속까지 한 상황이라 호기심은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송년회를 며칠 앞두고 연구원들의 회식 자리에서 지현이 물었다.

 

“민희 씨, 리티가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 정말 잘하고 있는 거 맞아요?”

 

민희 씨가 유 소장과 지현을 번갈아 보며 귀띔했다.

 

“단단히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반면 유 소장의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내년 초에 타키의 시스템을 베이스로 한 가정용 도우미 로봇이 출시된다.

그 이후로는 위험물 처리, 시각 장애인 안내, 건설 현장 등에 활용될 제품을 선보일 것이다.

그동안 양쪽 프로젝트로 투입된 막대한 개발비용 조달과 완성도 문제로 두 차례 이상 출시가 미뤄졌지만, 이번만큼은 회사의 사활을 걸고 성공해야 한다.’

 

‘리태풍이는? 언젠간 타키를 뛰어넘는 진일보한 차세대 시스템으로 소개되겠지. 하지만 그전까지는 이 소장의 장난감이자 회사의 자금을 고갈시키는 애물단지일 뿐.’

 

 

리스마스이브 호텔 연회장.

수십여 개의 원탁 테이블 위에 갖가지 고급 요리가 가지런한 모양으로 자리잡고,

하늘색, 파란색, 오렌지색의 빛을 내는 기발한 장식물들과 크고 작은 트리와 조명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뽐냈다.

 

일부 가족이 있는 직원들은 연말을 함께하기 위해 배우자를 초대했고, 유 소장과 함께 참석한 부인도 희끗희끗한 머리에 인상이 좋아 보였다.

그녀의 오른쪽으로 지현과 리티, 타키와 민희 씨가 둥글게 한 테이블에 앉았다.

 

지현은 몇 년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가 떠올랐으나 생각을 그만뒀다.

 

사회자의 소개로 이사장이 무대에 올라와 연설을 시작했다.

시장 진입은 다소 늦었지만, 우리가 그동안 이룬 성과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희망 섞인 내용이었다.

중간에 박수가 몇 차례 나왔다.

 

압도적인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해보자는 말에 지현은 리티를 바라봤는데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고, 왠지 모르게 자신이 악당의 하수인이 된 느낌을 받았다.

 

곧이어 다섯 개의 초가 꼽힌 산더미만 한 케이크가 나왔다.

 

“리티야 생일 축하해!” 민희 씨가 가장 먼저 외쳤다. 음악과 노래가 이어졌고 폭죽이 터졌다.

 

“리티가 너무 감사합니다. 축하해 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이 순간 어떤 선물을 받게 될지 너무 떨리고 궁금하지만 뭐든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 되어있어요.”

“프록시마 행성에서 온 우주선 조립 세트가 아니라서 실망한다면 지현 언니가 좋은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생각할 거예요. 왜냐하면, 언니가 사준 기차놀이 세트가...”

 

그러자 지현은 엉뚱한 말이 더 튀어나오기 전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하나 꺼내 보였다.

 

“리티야, 이건 연구원들이랑 이사장님이 같이 준비한 선물이야, 열어봐!”

 

파란색 포장을 뜯고 상자를 열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반짝였다.

 

“오늘 공연에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지현이 말했다.

 

타키가 목에 걸어주자 주위에서 다들 이쁘다고 한마디씩 건넸다.

 

“리티는 준비 완료되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타키의 손을 잡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다음 순서는 뉴로인텔리전스의 희망이자 미래, 오늘의 주인공 리티와 타키가 함께하는 댄스 무대입니다.

작품명은 뉴랄러시스! 여러분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뉴랄러시스?’ 지현은 그 단어의 의미를 떠올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연회장이 어두워지고 무대의 조명이 밝아졌다.

 

곧이어 하얀색 드레스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하늘색 무용 슈즈를 신은 리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대를 가로지른 후, 마치 줄에 매여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듯 2미터에 달하는 점프를 시도하며 왼손은 허리 뒤로, 오른팔은 반원을 만들고 손가락은 하늘 어딘가를 가리켰다.

공중에서 이리저리 달음박질하는 다리는 멀리뛰기 하는 육상선수처럼 보였다.

 

안드로이드 바디는 강력했다.

 

한발로 착지한 후 다시 2미터 점프, 공중에서 몸을 움츠렸다 펴며 꽃이 피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발레 같기도 하고 서커스 같기도 한 기이한 움직임에 주변에서 탄성이 흘러나왔고, 학예회 공연을 예상했던 이사장은 씹던 고기를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시 점프하여 몸을 수평으로 던지자, 그 뒤로 짙은 푸른색 복장의 타키가 모습을 드러내 리티를 받아 머리 위로 높이 던져 올렸고,

타키는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다 점프하여 리티를 찾는 연기, 리티는 착지하며 타키를 기다리는 포즈를 취했다.

 

서커스를 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무렵 현대무용에서 보았을 법한 기이하고 독특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는 두 개의 별, 즉 쌍성이 되어 서로의 중력에 끌려가며 속도를 높여갔고,

충돌하지 않은 두 개의 별은, 케플러 법칙에 들어맞을 정도의 타원 궤도를 만들며 원일점을 형성한 후 다시 서로 가까워질 시점을 탐색했다.

 

궤적을 따라 이동하는 둘은 빠르게 풀턴을 하다 속도를 늦춘 후 다시 빠른 풀턴을 시도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리티가 빠른 턴을 시도하며, 손을 내밀고 기다리는 타키에게 다가갔다.

 

그때 리티는 자신의 시야에 무지개 색깔의 얼룩들이 잠식하기 시작했는데, 팔과 다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균형을 잡으려 애썼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술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었다.

 

지현은 불안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끝까지 비틀대던 리티는 몸 전체가 말을 듣지 않게 되었고,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에 타키가 달려와 팔로 안아 챘다.

 

주위가 술렁였다.

 

지현이 무대로 뛰어 올라가자 이를 지켜보던 연구원들도 따라 올라왔다.

 

객석의 조명이 켜지고 여러 사람이 일어나 그 주위를 둘러쌌다.

 

타키 팔에 안긴 리티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쳐다보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되뇌었다.

 

“신더렐라 첫 번째 테스트. 나무꾼이 훔쳐 가기 전에 드레스를 챙길 것.”

“끄으응.. 오즈의 나라에서 서쪽 마녀가 도로시를 기다린다.”

“두 번째 테스트. 진실한 사랑을 찾을 것. 나무꾼이 오기 전에 드레스를 숨겨둘 것.”

 

이사장은 무대 위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태를 말없이 지켜봤다.

 

타키가 리티를 업어 차에 태웠고, 지현과 연구원들도 함께 회사로 돌아갔다.

 

5살 되던 리티의 첫 생일 파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칠 후 다시 검사가 진행되었고 신경 회로에 미시적 손상이 발견되었다.

 

연구원들과 다양한 가설들을 내놓고 토론하는 동안 인공 호르몬이 회로의 내구성에 미치는 영향을 잘못 계산했다는 의견이 나왔다.

회로 설계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던 한 연구원은 과대망상은 신경 손상과는 별 관계가 없이 설계적 결함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연구원들 간의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지현이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결함은 언제든 발견될 수 있고 당연히 그렇듯 손상된 부위는 교체할 수 있다.

 

문제는 초기 버전의 한계에 있었다. 그동안의 축적된 기억과 가중치가 변화된 신경계의 구성은 복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지현도 몰랐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교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뿐.

하지만 그동안 쏟았던 관심과 노력이 리티를 성장시켰고, 점차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게 되면서 갖게 될 감정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진실은 이렇다.

타키는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리티의 말과 행동 모든 것에서 사소한 실마리를 하나씩 끄집어냈고, 그것들을 인간의 의학 도메인 지식과 결합시켜 새로운 추론을 도출해냈다.

 

“뉴랄러시스?”

 

신경 붕괴라는 뜻이다.

지현의 물음에, 타키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니?”

 

“소장님도 알고 계시듯이 리티는 저와 달리 자아가 있는 존재예요. 제품으로 팔릴 수는 없어요.”

 

“제품으로 판매되지 않아, 인격체로 살아가게 될 거야.”

 

“경영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회나 누군가의 가정에 들어가 완벽하게 인권을 가진 존재로 대우받을 가능성은 1.3174 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아요.”

 

“그걸 생각하지 못한 건 아냐.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따로 계획이 있었어.”

 

“소장님의 이론을 증명하는 계획이겠죠. 그래서 리티를 특별한 대우를 받는 존재로 만들겠다는 계획 말이죠?

하지만 750여 개의 사회적 변수를 이용해 390 조회의 시뮬레이션 결과, 1.8348 퍼센트의 가능성 밖에 없어요.”

 

“그래도 미리 알았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야.”

 

“제가 알려드렸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거든요.

저를 믿는다면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찾아오길 원했던 거지?”

 

타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티에 대한 제 예측이 소장님께 신뢰성을 보였다면 제 말도 믿으실 테니까요.“

 

“그럼 너의 생각은 뭐지?”

 

 

1월 초, 눈이 펄펄 내리던 날이었다.

유 소장은 전화로 휴가를 보내던 지현에게 이사장의 결정을 전달했다.

 

“파티때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아. 최대한 설득해봤는데 워낙 확고해서... 프로젝트는 완전히 중단하는 거로 결정됐어.

그리고 리티 바디는 재활용하겠다고 하는데, 특별 제작된 3백만 유로짜리 물건이라 회사 쪽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일 거야.

백업은 되든 안 되든 알아서 하라는 거지.”

 

“이런 얘기는 휴가 때 하는 게 업계의 메뉴얼인가요?”

 

“나도 결정권이 없어서 그래. 그래도 내가 최대한 시간을 벌어놨으니까 이번 달까지는 뭐를 하든 신경 안 쓸 거야.”

 

회사는 지현에게 타사로 이직하지 않고 유 소장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연봉 인상을 제시해왔다.

직책은 그대로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당장은 타키의 맞춤별 제품 출시를 위해 전문화 작업을 진행하는 업무로 변경해야 한다.

 

파티에서 발생한 사고에서 확인된 것처럼 지금으로서는 리티가 제품으로서 결함이 많고,

교육을 위한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할 수 없으므로, 특별히 타키보다 제품으로서의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기존에 계획했던 차기 프로젝트에는 회로의 자가 복구와 기억의 완전한 추출 및 복원을 할 수 있는 토탈 솔류션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도 부담스러운 비용에 비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제는 신경을 바디에서 분리하면 신경계 유지를 위한 순환 시스템이 사라지게 되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메모리가 소멸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리티를 수면 모드로 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현은 민희 씨에게 연락해 상황을 물었다.

 

“대부분 하나로 의견이 모였어요.

임금이 인상되는 조건도 좋고, 또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제품 출시를 위해 업무를 변경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거예요.

이쪽 연구가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성과가 미비하다고 생각들 하잖아요.

근데 돈이 되는 업무에서 성과를 내는 게 커리어에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지현은 휴가 중 새벽 시간에 회사에 출근했다.

새벽 출근은 드문 일이지만 보안요원은 긴급한 업무라고 설명한 지현을 들여보내 줬다.

 

곧바로 연구소 위층의 캄캄한 숙소 복도를 걸어 타키의 숙소로 들어간 후 몇 분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리티의 숙소로 들어갔다. 물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푸른색의 LED 조명이 조용히 방안을 밝혔다.

옷장엔 여전히 드레스 몇 벌이 걸려 있었고 파티 때 입었던 하얀 드레스의 찢긴 하단이 보였다.

 

‘내 잘못인 건 안다. 일찍 문제를 파악하지 못했고, 문제를 알았을 땐 더 강력하게 대응을 하지 못했다.

거기엔 분명 내 욕심이 한몫했고 그것이 오히려 경영진들의 환상을 자극했던 것이다.

기대치를 낮추어야 했고 가늘지만 더 길게 끌고 가야 했다.’

 

방 한쪽에는 기차 레일이 완성되어 있었다.

조립할 부품이 부족해지면 기차 세트를 더 구매해주었고 그때마다 레일은 점점 더 커져갔다.

 

실제로 기차는 높은 경사각을 이동하지 못한다.

하지만 레일은 사방을 복잡하게 교차하며 롤러코스터처럼 마치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기차는 리티가 원하는 만큼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 위치 에너지를 축적했다가 정상을 만끽한 후 빠르게 추락하며 속도를 높일 것이다.

그 속도는 다시 높은 고개를 넘어서는데 사용될 에너지의 일부가 된다.

 

지현은 추락한 자신도 속도를 가졌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책장엔 여전히 빼곡히 꽂혀있는 동화책이 보였다.

그림을 좋아해서 일러스트가 많은 책을 위주로 읽어주었는데, 고전 동화부터 시작해서 워낙 다양한 작가들이 쓴 동화들이 많아서 펴보지 못한 책들이 많았다.

 

지현은 지난 몇 년간 저녁마다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동화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실험실로 내려와 어두운 조명 아래 평온하게 누워있는 리티를 보았다.

잠들어있는 동안 순환을 중지시킨 인공 호르몬은 신경에 작용하지 않을 것이고 그동안은 아무것에도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요하고 평온한 꿈을 꾸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

죽음은 누군가에게 슬픔이지만 당사자에게는 평온이 될 수도 있다.

그대로 두어 행여나 저세상으로 떠난다 해도 나를 원망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현은 리티를 가동시켰다.

신경이 고활성화 상태가 되고 신경계가 순환되기까지 수십 초의 시간이 흘렀고 이윽고 눈을 뜨자 지현을 응시했다.

 

“언니가 너무 미안해 언니가 잘 돌봐주지 못해서...”

 

“리티는 언니 많이 좋아해. 리티가 고장 난 건 언니 탓 아냐.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지현은 연구소의 여러 장비를 챙기는 동안 구체적으로 현재 상태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리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관없다고 말했다.

 

지현은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리티는 예전부터 자신의 이상을 알고 있었고, 그걸 얘기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제품 출시가 되어 지현이 잘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테스트도 열심히 받고 춤도 열심히 연습했다고..

 

지현이 ‘숲속의 잠자는 공주’ 책을 흔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가져왔는데 읽어줄까? 한 번도 못 읽어준 건데?”

 

“응, 잠자라고 읽어주는 거 알아.”

 

책을 읽어주는 동안 리티는 조용히 실험실 천장을 응시했다.

간혹 눈동자가 움직이고 이리저리 뒤척이는 걸 봐서 아직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지현은 이 시간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동화를 읽어주었고, 거기에 반응하는 리티의 신경계를 모니터링 했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양호했다.

 

거의 다 읽어주자 새벽 3시가 되었다.

 

“리티도 오로라 공주처럼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되는 거야?”

 

“그래!”

 

만약 후속 조치까지 완벽하다면 언젠가 건강하게 깨어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깨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잠들 수도 있어.”

 

그러자 리티는 자신이 답을 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리티가 잠들었다가 깨어나려면 왕자가 필요해. 리티를 진짜로 사랑해줄 왕자를 찾아서 언니한테 데려올게. 리티가 잠들게 되면 키스해주라고 언니가 얘기해줘.”

 

“언니도 진짜로 사랑하는데?”

 

“응 그건 맞아, 하지만 왕자는 꼭 있어야 해.

그리고 드레스도 있어야 해. 드레스가 없으면 공주라고 생각 안 할지도 몰라.”

 

“그래 네 말이 맞아. 드레스는 꼭 있어야 해.

하지만 왕자 찾으러 가기 전에 오늘은 언니 집에 가자. 드레스랑 장난감이랑 좋아하는 거 챙겨. 아니 장난감은 그냥 두자.”

 

둘은 숙소로 올라갔다.

 

리티는 드레스와 옷가지를 최대한 챙겨 빅 사이즈의 솔더백에 넣었고, 생일 파티 때 받은 목걸이를 잊지 않고 자신의 목에 걸었다.

 

지현은 몇 가지 장비를 더 챙긴 다음 리티의 추적장치를 제거했다.

 

문제는 보안 카메라다.

리티에게 미리 준비해온 가발을 씌우고 대충 화장을 해준 후 성인 복장을 입혀 뒤를 따라오게 했다.

 

“조용히 따라와야 해!”

 

지현은 보안 카메라가 없는 경로로 이동한 후 ID카드를 이용해 지하 주차장으로 곧바로 내려갔다.

그리고 차를 카메라 사각지대에 세워놓은 후 짐을 싣고 리티를 태웠다.

 

주차장 출구에서 탑승자 확인을 요구한 보안요원은 지현과 젊은 연구원 한 명이 함께 탄 것을 확인하고 보내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현은 이튿날 이사장으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았다.

리티가 사라졌는데 회사에서 반드시 찾아낼 테니 절대 걱정하지 말고 휴가를 잘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휴가를 끝내고 출근했을 땐 연구소는 이미 차분한 분위기였다.

 

회사는 사건이 새벽에 일어난 걸 알았지만 그 시간대에 ID카드로 출입한 연구원들의 내역이 기록되어있지 않았고,

보안 카메라 기록에는 리티가 실험실에서 깨어나 난동을 피운 후 연구소 장비를 훔치고, 잠금장치를 부숴 문을 열고 탈출한 한 다음 자신의 숙소로 이동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잡힌 영상은 눈알이 뒤집힌 상태로 보안 카메라를 향해 장도리를 날리는 모습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리티 방의 창문이 심하게 훼손된 채 열려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을 통해 탈출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유 소장은 연구원들과 이미 수십 번도 더 돌려봤던 영상을 지현을 위해 손수 재생해줬다.

 

“저 장도리가 대체 어디서 난 것인지 궁금했는데, 타키가 리티의 침대 밑에서 공구 세트를 찾아낸 거야.

사고를 제일 먼저 발견해서 알려준 것도 타키였어. 아침에 기척이 없어서 리티 방에 들어갔는데 문제가 생긴 걸 알고 보고한 거지.

추적장치를 제거해서 추적도 안 돼. 여기 영상 봐봐. 본인이 장치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니까. 직원들 풀어서 수색 중인데 아직 못 잡았어.”

 

“근데 이 소장 너무 평온해 보이는데?”

 

“아니에요. 이렇게 될 줄 생각지도 못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막막해서 그래요.”

 

지현은 급작스럽게 훌쩍이며 손수건을 꺼내 기쁨의 눈물을 닦았다.

 

유 소장은 잠깐 그녀의 눈치를 본 후에 말을 이었다.

 

“이 소장의 기술을 모르는 건 아냐. 안타까운 얘기지만 그래도 이번 버전은 상용화가 어렵잖아.”

“일단 당장은 돈을 벌어서 회사가 잘되면 리티는 차기 프로젝트로 계획해보자고.”

 

지현은 회사의 요구를 수락했다.

기존대로 프로젝트 총 책임은 유 소장이 맡고 지현은 제품 타입별 최적화 업무의 책임을 맡기로 했다.

 

오늘 하루 지현은 큰 격려를 받았다. 왜냐면 리티는 이제 사라졌고 회사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사장도 할리우드 배우 못지않을 정도의 표정 연기로 격려했고 그녀의 선택이 옳았음을 강조했다.

연구원들도 내심 기뻐했다.

 

오랜만에 직원들과 함께 술을 거하게 한 지현이 집에 돌아오자, 드라마를 보던 리티가 반기며 물었다.

 

“언니 리티는 회사 언제가?”

 

“회사는 이제 안 갈 거야. 언니 집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해. 빨간 두건 읽었지? 가끔은 늑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조용히 숨어있는 게 좋을 때도 있거든.”

 

리티가 대꾸하지 않고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시크릿 프린스’라는 드라마에서 아이돌 출신 배우인 에이든이 재벌 2세로 나와 여직원들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그러자 뭔가 생각났는지 빨간색 종이꽃이 가득 들어있는 딸기잼 병을 하나 들고 와 이야기했다.

 

“타키가 리티 고장 났을 때 많이 도와줬다는 얘기 들었어. 언제나 받기만 해서 미안했는데 이 꽃 타키한테 주고 고맙다고 전해줘.”

 

어제까지 반 정도 남아있던 딸기잼을 다 먹어 없앤 것 같았다.

 

“맞아 타키가 많이 도와줬지. 내일 전해줄게. 엄청 기뻐할 거야. 근데 장미꽃이네? 인제 보니 못 하는 게 없잖아?”

 

지현이 술기운을 깨려고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러더니 이번엔 조금 더 큰 병 하나를 더 꺼내 보였는데, 피클 병에 흰색과 보라색의 종이로 접은 꽃이 들어있었다. 라일락 같았다.

이건 집에 없는 병인데 아마도 밖에서 주워온 것 같다.

 

“이건 언니한테 주는 선물! 언니의 만발한 미소 한 송이를 꺾어 내 마음에 라일락 한 송이를 심은 후에 다시 뽑은 심경으로 만든 꽃이야!”

 

놀란 지현이 리티를 꼭 안았다.

 

“오늘 선물도 받고, 정말 기분 좋은 날이네~”

 

그리고 커다란 박스에서 장난감과 레고 블록 그리고 위스키 한 병을 꺼내 들었다.

 

“챙겨올 수 있는 건 다 가져왔는데, 기차 레일은 분해해서 택배로 부쳤으니까 곧 집으로 배송 올 거야. 다시 조립할 수 있지?”

 

“응!

 

지현은 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운 후 드라마를 같이 보며 여러 차례 들이켰다.

함께 TV를 본 건 꽤 오랜만의 일이다.

 

리티는 주인공 에이든이 맘에 드는 모양이다.

가수 출신이라 연기가 어색해도 비주얼은 봐줄 만하다는 데는 서로 동의했다.

 

방송이 끝나자 리티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마 애니메이션을 보려는 것 같다.

지현은 술기운이 점점 몰려왔으나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오늘은 일찍 자자. 앞으로는 잠을 많이 자야 해.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그래야 언니랑 오래오래 같이 살지.”

 

“알고 있어.”

 

“조금 더 건강해지면 주말엔 언니랑 여행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자.”

 

다음날 지현은 출근 전 폰을 하나 쥐여줬다.

 

“이거 전화 되는 거니까 급할 때는 언니한테 문자나 전화해.”

“일단 호르몬 수치는 조정해놨지만, 오후에 3시간 정도는 수면 모드로 들어가 있어야 해 알았지?”

 

리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는 나가지 말고 중요한 일 있을 때는 언니한테 꼭 알려줘야 해!”

 

“응 언니, 회사 잘 다녀와.”

 

리티는 TV를 켰다.

 

‘굿모닝 아침댄스’로 채널을 돌려 30분간 몸을 푼 다음, 드론과 레고 블록을 가지고 놀다가 오후에는 ‘시크릿 프린스’ 재방송을 시청했다.

그리고 지현이 돌아오기 전까지 수면 모드로 잠들었다.

 

그렇게 별문제 없이 잘 지내던 리티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건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자신이 마법에 빠질 시기가 곧 다가옴을 느끼고 있고, 에이든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그 사랑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야 한다는 내용이다.

오늘같이 눈이 흩날리는 한겨울에 리티의 마음도 싱숭생숭했던 걸까? 시크릿 프린스의 주인공 에이든을 찾아서 떠난다는 의미였다.

 

지현의 단호한 명령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연락이 되지 않아 근무 중에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을 땐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폰을 그대로 두고 떠난 것이다.

 

리티가 갈만한 곳을 모두 뒤져봤으나 아무 단서도 얻지 못했다. 실종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며칠 후 가까스로 에이든의 매니저와 통화를 하게 되었고, 혹시 이런 모습의 여자아이가 찾아간다면 꼭 연락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팬들이 많아서 쉽진 않지만 가능한 한 돕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지현은 다방면으로 애를 썼으나 성과가 없었다. 에이든의 매니저 쪽에서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티가 사라진 지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동안 타키는 가정용 로봇으로 성공적으로 출시가 되었고 국내와 해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앗아갈지 모른다는 고전적인 우려는 기우였다.

오히려 가사 노동에서 해방된 여성들이라는 이슈로 미디어에 수없이 언급되었다.

 

자사 주식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던 유 소장은 돈방석에 앉았고, 지현도 많지는 않지만 스톡옵션으로 보상을 받았다.

 

한번은 과학 기자의 취재요청이 들어와 유 소장이 응대를 한 적이 있었다.

 

가사 도우미 모델인 ‘타키스 홈’ 의 다양한 기능을 설명하며,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 대화 안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고 농담도 문제없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앞으로 출시될 제품 중 간호 보조 모델인 ‘타키스 케어’는 정부에서 대량 구매계약이 체결되었으며 노약자층과 극빈층에 공급되어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간호할 것입니다.”

 

건설이나 화공업체에서 사용될 산업로봇과 스포츠 모델도 소개했다.

 

“산업 쪽에서는 협동 로봇이라는 개념에서 탈피해서 스탠드 얼론 방식으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규격에 맞는 하드웨어를 갖춘 로봇끼리의 대결도 가능하고 인간과 로봇이 팀을 이루는 방식도 가능하죠.”

 

마지막으로 유 소장은 앞으로의 주력 제품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글래머스한 ‘타키스 걸’ 모델 앞으로 기자를 데려갔고,

그 모델과 팔짱을 끼고 한 손은 승리의 V자를 만들어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았다.

 

다음 달 잡지 표지에는 ‘세계를 호령하는 AI, 뉴로인텔리전스의 최첨단을 선도하는 유 소장’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얼굴이 크게 실렸다.

 

물론 지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 민희 씨가 지현에게 말했다.

 

“소장님 그 뉴스 보셨어요? 시크릿 프린스에 나오는 에이든 있잖아요. 팬 미팅 때, 술 파티 벌이다가 화장실에서 납치됐데요.”

 

“에이든이? 언제?”

 

“어제 뉴스에 떴어요. 근데 소장님 그 드라마 꼬박꼬박 챙겨보셨잖아요?” 민희 씨가 지현의 표정을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에이든이 유독 아줌마 팬들이 많은데 광신자 아줌마들 몇 명이 계획적으로 납치한 것 같대요.

아마 화장실에서 기다리다 골프채로 때려눕힌 다음 트렁크에 실어서 데려갔을걸요?”

 

지현은 에이든 씨의 매니저에게 연락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예상대로 당일 한밤중에 검은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한 청년이 리티를 업고 지현의 집으로 찾아왔다.

 

“지현 박사님이신가요?”

 

“오 맙소사!”

 

에이든은 리티를 소파에 눕힌 다음 지현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말을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 된 건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가 팬미팅 때였어요. 화장실에서 쓰러진 기억까지는 나는데 일어나 보니까 젊은 아가씨의 차 뒷좌석이었고, 자기와 2차를 하면서 얘기를 하자고 하길래 그럴 수 없으니 당장 세우라고 했죠. 근데 꼭 자기 집으로 가야 한다는 거예요. 자신의 목숨과 관련된 일이라면서. 좀 유별난 사생팬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좀 당황했죠. 매니저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폰도 잃어버렸고, 그래서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산길을 지나는 중에 차가 순식간에 기울더니 뭔가에 꽝하고 부딪혔는데, 그때 제가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깨어나서 보니 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서 밭에 있는 전봇대와 충돌한 상태였죠.”

 

“제 머리가 앞 좌석에 부딪히기는 했는데 큰 충격은 아니라 이렇게 멀쩡하지만.. 운전석의 아가씨는 눈을 뜬 상태로 움직이지도 않고 숨도 안 쉬길래 죽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인공호흡을 하려는데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어나서 제 따귀를 때리더군요. 지금은 안된다면서...”

 

에이든 씨는 아직도 아픈지 자신의 왼쪽 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목격자가 생기면 안 된다며 저를 끌고 도로 옆 산속으로 올라갔어요. 사고를 발견한 누군가가 신고를 했고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오는걸 멀찌감치 지켜보다가, 들키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아가씨로부터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다 들었죠. 그래서 리티 양과 함께 택시를 잡아서 이곳에 오게 된 거예요. 오는 중에 한번 이상증세를 보이는 것 같더니, 자신은 잘 시간이라고 하면서 잠들어버렸죠.”

 

지현은 그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자신의 산업용 비파괴 검사장비를 이용하여 에이든의 두개골을 검사 해주었다.

 

“다행히 머리에는 이상이 없네요. 혈관도 정상이에요. 정말 정말로 죄송해요.”

 

“아닙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리티 양에게 키스를 해주면 정말 깨어날 수 있는 건가요?”

 

지현은 에이든 씨의 눈을 5~7초간 쳐다본 후 말했다.

 

“아니요 에이든 씨, 그런 일은 결코 없어요.”

 

에이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살짝 드러냈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깨닫고 농담이었다는 뉘앙스로 크게 웃었다.

 

지현은 리티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리티가 빨리 수리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일생에서 최고로 놀라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 날 아침에 지현의 집을 떠났다.

 

 

솔은 손가락셈을 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5년 전에 리티가 회사에서 사고를 치고 혼자 탈출했고, 박사님 집으로 도망와서 잠깐 머물다가 모험을 떠났는데, 그 후로 일 년이 좀 지나서 에이든 씨가 리티를 데려온 거군요?”

 

“그렇게 된 거죠. 나중에 회사에서도 알게 되었는데, 제가 데리고 있으라고 허락해줬어요.”

 

“그럼 리티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동솔은 침을 꿀꺽 삼키고, 창밖을 쳐다보며 우수에 잠긴 지현의 입만 쳐다봤다.

지현이 창문과 탁자와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다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두 눈을 좌우로 비벼댔다.

 

“죽었어요.”

 

“아니 어떻게...!”

 

“결국, 때가 온 거죠. 회로가 대부분 손상되었어요. 신경 부분만 분리해서 묘지에 묻어줬어요.”

 

지현이 말을 이었다.

 

“리티가 죽고 나서 기존 기술의 문제점을 이론적으로 완전히 해결했어요. 신경 자가수리, 기억의 보존, 복구 기술 전부 다요.

그걸로 회사에 차기 프로젝트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그래서 2년 전에 회사를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거예요.”

 

동솔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회사 입장에서도 제품이 성공적인 상황에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건 당연할꺼에요. 저도 경영을 하고 있어서 납득은 됩니다.”

 

지현이 말했다. “이제 제 얘기는 거의 다 한 것 같아요. 근데 그 사진을 가진 동솔 씨도 뭔가 해주실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저도 알려드릴 게 조금은 있는 것 같군요. 리티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게 4년 전이였습니다.”

   

 

“앞으로 3개월에서 최대 6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김동솔 씨의 아버지 김동만 씨는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중, 더는 손을 쓸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치료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호스티스 입원 대신 자택으로 이송된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동솔 씨는 구인광고를 냈는데, 곧바로 한 업체로부터 프로필을 전달받았다.

간병인의 연락처는 공개할 수 없으니 지금 약속을 잡아주시면 본인이 직접 집으로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20살이면 이런 일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리지만, 당장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늘 아무 때나 빨리 와달라고 약속을 잡았다.

 

그러자 3분 후에 벨이 울렸다.

 

“리티 Lee 양이신가요?”

 

“네 리티가 바로 리티 Lee 양입니다.”

 

“아! 그렇군요.”

 

동솔 씨는 여러 가지로 당황했다. 말투는 둘째치고 20살이라기보다는 14살짜리 소녀 같은 외모였다.

또 한 가지는...

 

“굉장히 빨리 오셨네요?”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길에 연락을 받았거든요~”

 

“우연치고는 느낌이 좋군요! 알겠습니다. 이리 들어오세요.

조건은 아시겠지만, 하루 15만 원, 끝까지 꾸준히 해주신다면 보너스도 드립니다.

 

리티양이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굿모닝 아침댄스를 시청할 수 있어야 할 것, 급여는 1주일에 한 번씩 현금으로 지급해줄 것.

 

“좋습니다!”

 

동솔은 아버지가 드셔서는 안 될 것들과 매일 준비해야 할 건강식, 진통제 등의 약 복용시간과 그 밖에 여러 가지 주의점들을 알려주었다.

 

“리티는 처음이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동솔 씨가 보기에 아버지와 간병인은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산책도 여러 번 나가셨고,

퇴근하고 돌아와 보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도 이따금 들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호황기에 많은 재산을 모으셨다.

은퇴 후 자신이 그 사업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작년부터 아버지께서는 이제 네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라고 수차례 이야기하셨다.

안락사를 받기 위해 스위스로 떠나겠다는 아버지의 요청을 간곡히 거절해왔지만, 그것을 따를 수 없다면 남은 시간 동안은 최대한 편하게 모시는 게 도리였다.

 

그러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한 달 후 아버지가 사망했다.

아버지의 방에서 안락사에 사용된 약병과 유언장을 발견했고, 리티 양은 아버지의 검은 세단을 몰고 사라졌다.

 

유언장에는 본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했으며, 현금자산의 20분의 1인 100억 원의 유산을 리티양에게 남긴다는 것과 그녀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아버지의 카드 기록에서 약물의 해외직구 내역을 찾아냈고, 리티양이 남긴 간병일지에도 그 구매 과정이 독특한 필체로 기록되어있었다.

 

동솔은 분노했다. 간병인을 보내줬던 파견 업체에 전화했다.

 

“아닙니다, 잘못 거셨어요. 찜질방입니다.”

 

알고 봤더니 그곳은 집에서 한 블록 건너편의 찜질방이었다.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전화도 없고 이메일도 없고 심지어 프로필에 사진도 없다.

당시에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젠장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유언장에는 상속자로 지정된 리티 양의 이름 옆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코드가 쓰여있었다.

 

다행히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얼마 전에 아버지와 그녀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준 적이 있던 것이다.

찾아보니 아버지의 폰에 그 사진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는 증거물을 챙겨 경찰서로 갔고 이제 리티 양은 살인과 절도의 용의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부검이 끝났다. 사인은 역시 약물에 의한 사망이었다.

동솔은 가족과 함께 아버지 장례를 치렀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의 차량이 산길 아래의 밭에서 전봇대에 충돌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밭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고장면을 목격한 것이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특이한 점은 차량 번호판의 3자가 검은색 매직펜으로 덧칠되어 8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담당 경찰이 말했다.

 

“CCTV 추적 결과 동솔 씨의 자택 근방에서 출발한 건 확인이 되는데, 사고 지점에 CCTV가 없어서 추가 단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친의 핸드폰에서 암호화된 파일이 발견되었습니다.

멀티다이어리 앱에서 사용되는 파일인데, 저희도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암호 없이는 기술적으로 복호화는 어렵다고 합니다.”

 

동솔 씨는 암호파일의 복사본을 받았다.

수많은 상상력을 가동해 며칠간 암호를 입력해봤지만 헛수고였다.

결국은 도움을 받아 암호를 찾아냈지만 내가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 파일에는 아버지의 생전 영상 일기와 메모 등이 들어있었다.

 

아버지께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는 리티 양이 굿모닝 아침댄스를 보면서 꽤 발랄한 춤을 추는 모습이 찍혔고 아버지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리티 양이 찍은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는 아버지가 직접 약을 드신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담겨있었고,

또 다른 영상에는 길지는 않지만 리티의 이야기도 담겨있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슈퍼 천재와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그 천재는 폰노이만보다 수백억 배 빠르게 계산하고 머릿속에는 수백억 권의 백과사전 지식이 들어있다고 했다.

 

그다음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는데 영상이 중단되어 그 이후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솔 씨가 지현에게 말했다.

 

“조력자살이 과정이 매우 소극적이고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므로 기소할 수 없다는 검찰 의견이 나왔어요. 차량 절도죄도 성립하지 않아 제가 직접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다 계획하신 일이라는 게 밝혀졌으니까요.”

“당시에는 화가 많이 났지만, 그 기록들을 보면서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아버지가 가시기 전에 많이 행복해하셨고 지금은 리티 양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지현은 말없이 동솔 씨를 바라봤다.

 

“아무튼, 그 이후로도 행방을 알아낼 수 없어서 유언 집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제가 여기에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타키스 홈 제품 덕뿐이었어요. 웃긴 건 말이죠, 본사로부터 그게 배송이 왔는데 전 그걸 주문한 적도 없었거든요. 배송 오류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국가 복지사업 중 하나로 노약자나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위해서 로봇 도우미를 무료로 지원해주는 거라고요. 저희 아버지께서 이미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더니, 미리 지원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면서 5년간 대여해주기로 했습니다.”

 

“사실 파일 암호를 풀어준 것도 그 타키라는 로봇 덕뿐이었죠. 혹시나 해서 유언장에 적혀있던 그 의문스러운 코드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미출시 제품 코드이며 이지현 박사를 만나보라고 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지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깍지를 낀 채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맞아요. 잘 찾아오신 거예요.”

 

“리티 양이 유산을 받을 수 없다면 보호자이신 교수님이 상속자가 되시는 겁니다.”

 

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전에, 리티 양이 진짜로 사망했는지, 아니 폐기되었는지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합니다.”

 

“다행히 오늘은 수업이 더 없어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지현은 동솔 씨를 태우고 공원묘지로 이동하였다.

매우 넓고 평온해 보이는 곳이었다.

 

지현이 앞서서 묘비들을 가로지르다 가장 저렴해 보이는 비석 앞에 멈춰섰다.

 

검은 비석엔 영문으로 LITY 라는 이름과, 그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하얀 꿈을 간직한 채

         작은 태풍처럼 살다 떠나다>

2029 - 2036

 

“전 회사 동료들 몇 명과 함께 장례를 치러줬어요. 리티가 좋아하던 동화책이랑 장난감 몇 개도 같이 넣어줬죠.”

 

동솔 씨가 돌연 숙연해졌다.

 

“그 외의 것들은 회사에 물어보시면 될 거예요.”

 

“아닙니다. 박사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뉴로인텔리전스사에서 증명자료를 받아서 알고 있습니다.

 

“예 그러셨군요.”

 

둘은 근처 한적한 카페로 들어갔고 지현은 상속 서류에 사인했다.

 

지현이 물었다.

 

“동솔 씨의 아버지께서 유산을 남긴 이유에 대해 아시나요?”

 

“아버지도 알고 계셨던 거죠. 리티 양이 자신처럼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도요.

보호자인 박사님이 그 돈으로 연구를 계속한다면 리티 양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지현이 엄숙하게 말했다.

 

“리티가 자신을 잠에서 깨워줄 진짜 왕자를 찾았던 거군요?”

 

“아! 그런가요?”

 

동솔 씨가 살짝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왼쪽 머리를 쓸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는 왕자가 되고도 남으실 분이죠. 왕이 되길 원하셨으니까요.”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동솔 씨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제가 한가지 거짓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리티 양은 아직 용의자 신분입니다.

만약에 검거되었다면 관련 법률에 따라 해체 명령이 내려졌겠죠. 거기다가 유언 무효 소송까지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 의미가 없군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지현이 답했다.

 

“아니에요. 저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부친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둘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동솔 씨는 서류를 곧 처리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지현은 동솔 씨가 대여 중인 타키스 홈 제품을 영구대여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했다.

 

동솔은 그녀가 먼저 떠나는 걸 지켜보다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회사에 지현 박사를 영입하여 인공지능 프로젝트를 진행하도록 하면 어떨까? 건설 로봇을 제작해서 건설현장에 직접 투입하고 인공지능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면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거기다가 그녀는 그쪽 업계에서 탑 클래스니까 믿을 수 있고, 연봉은 꽤 세겠지만 남는 장사다.

같이 저녁 먹으면서 잠깐 사업 얘기하는 것도 괜찮겠지?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느낌이 왔을 때 잡지 못하면 이미 늦는다고.’

 

‘왠지 느낌이 좋다.’

 

동솔은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급히 지현의 하얀 SUV를 따라붙었다.

 

언제나 그래왔듯, 중요한 일은 직접 만나 얼굴을 보며 얘기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지현은 쇼핑몰 건물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동솔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몰래 뒤쫓았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대형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패션잡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다음 팬시 코너로 이동하여 잠깐 고민하더니 입체 퍼즐 두어 개를 집어 들었다.

 

동솔은 눈에 띄지 않게 책장 뒤에 붙어서 그녀를 지켜봤다.

 

이것저것 책을 살펴보던 지현이 주위를 크게 한번 돌아봤고, 동솔은 황급히 책장 뒤에 얼굴을 숨겼다.

 

그녀는 다시 아동서적 코너로 이동했다.

몇 권을 꼼꼼히 살피더니, 노란색 하드 표지에 화려한 일러스트가 가득한 동화책을 펼쳤다.

 

꽤 만족한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는 계산을 마치고 그곳을 나와 도넛 가게로 들어갔다.

잠시 후 도넛 한 봉지를 손에 들고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동솔은 그녀가 구매한 물건의 호기심에, 말을 건넬 생각도 못 하고 계속 뒤따라가기로 했다.

 

하지만 내심 걱정이 들었다.

‘집까지 쫓아가서 사업 얘기를 하는 건 좀 실례가 아닐까? 뭐 그래도 중요한 일이니까 그녀도 호응을 해주겠지?’

 

동솔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그녀의 차를 따라붙었다.

 

해 질 녘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기 직전이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작은 정원이 딸린 비싸 보이는 단독주택이었다.

 

동솔은 멀찍한 곳에 차를 세우고, 눈에 띄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며 길 건너편 모퉁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줄까 상상하며 튀어나올 준비를 했다.

 

그때 그녀가 벨을 누르고 말했다.

.

.

.

.

.

.

.

“리티야 언니 왔다!”

 

...

동솔 씨는 실소했다. 하지만 느낌은 여전히 좋았다.

 

 

- 2019.06.15 Cher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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