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연희

2018.10.24 16:4410.24

  규찬은 딸이 미적거리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재촉했다. 딸은 엄마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면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고 지내왔지만 그 찰나의 순간 이후로 더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아빠로서 규찬이 결심한 것은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이었다. 딸도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였고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30분 내로 집을 나서야 했다.

  “연희야. 아빤 우리 딸 믿는다.”

  “응. 걱정 마. 그리고 미안해.”

  공항에서 짧은 대화로 배웅을 마친 규찬은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딸의 일을 모두 수습했고 그녀가 다시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가게끔 해준 것 같아서 커다란 짐을 던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최근 발표한 앨범의 활동도 마친 터라 이제 좀 쉬어야겠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장까지 본 뒤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규찬은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곡을 써서 앨범을 내고 공연까지 소화하는 기간에는 늘 예민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느낌은 금방 가라앉을 거라 여겼다. 규찬은 마트에서 사 온 물건들을 냉장고에 대충 집어넣으면서 티브이를 켰다.

  24시간 뉴스 채널에서는 어젯밤 강원정신요양원에서 여남은 명이 집단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으며 그중 여자 한 명의 소재가 여전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강원 지역에는 오로지 하나의 정신요양원이 있었고 탈출에 실패해 검거된 사람의 명단에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규찬은 도망친 그녀가 전처임을 확신했다. 알 수 없는 증오와 집착으로 규찬을 옭아맸던 그의 옛 아내였다.

  규찬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소파에 앉아 마이클 프랭스의 <잠자는 집시> 음반을 틀었다. 마침 흘러나오기 시작한 곡은 안토니오의 노래였다. 곡이 중반부를 넘어섰을 때 서서히 코로 스며드는 향수 냄새가 음악 소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향은 그녀에게서 항상 나던 것이었다. 불안감에 두려움까지 더해지자 그는 볼륨을 끝까지 올렸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향수 냄새가 이미 1층 주방과 거실을 뒤덮은 뒤였다.

  그녀였다.

  “잘 지냈어?”

  그녀는 아무리 봐도 정신요양원에서 탈출한 매무새가 아니었다. 2층 다락방에서 내려오는 그녀는 늘 하던 진한 화장과 숏커트 머리 스타일에 몸에 달라붙는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왜 당신이 여기에⋯⋯.”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난 여전히 당신의 아내니까.”

  그녀는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왜 나를 거기에 집어넣었어? 난 아프지 않아. 정상이라고. 아, 맞다. 자기가 그런 건 아니지. 의사가 말해줬어. 하지만 결국, 당신이 한 말 탓이겠지.”

  규찬은 온몸이 굳어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놀랍도록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규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자 규찬은 바로 뿌리쳤다.

  “왜? 싫어? 이제 당신은 나를 원하지 않네. 난 인정할 수 없어. 거기에 갇혀 있으면서 생각 많이 했어.”

  “⋯⋯.”

  순간, 그녀는 소매에 숨겨뒀던 주사기를 꺼내 규찬의 허벅지를 찔렀다. 규찬은 그제야 움직여보려 했지만 눈앞이 뿌예지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졌다.

  잠시 뒤 규찬은 손발이 묶인 채로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2층 다락방부터 휘발유를 뿌리면서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이따금 소리를 지르거나 낮은 목소리로 타일러도 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방에서 거실까지 그 행위를 지속했다. 그리고는 초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이제 끝내고 싶어. 전부 다.”

  규찬은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매니저가 규찬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타 죽었을 것이었다. 매니저는 고향에 내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딸도 유학 보내고 헛헛함을 느끼고 있을 규찬에게 잠시 들렀을 뿐이었다.

  “형님. 정신이 드세요? 이제 괜찮아요.”

  “그, 그 여자. 여자는 어딨어.”

  “여자라니 누굴 말하는 거예요?”

  매니저는 규찬에게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했으며 얼굴과 팔에 화상을 입긴 했지만 의사가 큰 문제는 없을 거라 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와서 자신에게 현장에 관해 몇 가지를 물었고 다시 온다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매니저는 규찬이 자꾸 여자를 찾는 걸 충격으로 인한 착각이라고 여겼다.

  다음 날 규찬에게 담당 형사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고양경찰서 형사과 이동민이라고 밝혔다. 젊고 의욕에 찬 그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은 규찬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안 그래도 245밀리미터 정도의 족적까지 발견해서 외부인 침입으로 확정 짓는 상황이었는데. 혹시 전처 분이 갈만한 장소 모르십니까?”

  “딸애는 미국에 갔고⋯⋯. 글쎄요. 이혼하고도 몇 년이 지나서⋯⋯.”

  “알겠습니다. 좀 쉬십시오. 피의자 검거할 때까지 자주 찾아뵙게 될 것 같습니다.”

  형사는 매니저와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눈 뒤 돌아갔다. 하지만 형사가 간 뒤에도 규찬의 머릿속에서는 ‘피의자'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아내와 남편으로 만났지만 그 둘의 관계는 한순간 피의자와 피해자로 바뀌어 버렸다.

  규찬은 20여 년 전 첫 번째 정규 앨범을 냈다. 그때 공연을 준비하면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공연기획자였던 그녀는 규찬의 집요한 구애를 끝내 받아들였다. 아내가 규찬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건 결혼 후 반년 정도가 지난 뒤였다. 규찬의 소속사는 1집 앨범의 반응이 지속되고 지방 공연 요청까지 이어지자 전담 매니저를 붙여 주었다. 그러나 매니저마다 3개월 이상을 못 버티고 그만두는 상황이 반복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매니저들은 규찬보다 그의 아내와 더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는 그녀의 요구를 그들은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아내가 비공식적으로 매니저의 역할을 맡아 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들이 행복했던 순간은 있었다. 아내는 자신을 이상하리만치 쏙 빼닮은 딸을 낳았다. 규찬은 딸의 이름을 아내의 것과 같이 짓되 다른 한자를 쓰자고 제안했고 그녀는 흔쾌히 승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딸은 엄마 연희(演戲)를 따라 연희(輭熙)가 되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엄마 연희로부터 부드럽게 빛나는 딸 연희가 태어난 것이었다. 새 생명을 통해서 아내는 안정을 찾았고 그런 그녀와 딸을 지켜보는 규찬의 색소폰 선율은 더 부드러워졌다.

  딸이 커가면서 아내는 다시 불안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규찬을 포함해 그녀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이 연희야, 연희야, 라고 말할 때마다 아내는 다시 규찬을 옥죄어갔다. 어린 딸은 가족의 배면을 봤는지 못 봤는지 이따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웃는 얼굴도 우는 얼굴도 아니었다.

  규찬은 먼저 딸을 위해서라도 이 사람에게서 벗어나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딸이 고성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날 저녁 규찬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그만하자. 나도 이제 지쳤어.”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간단히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다음 날 그녀가 돌아왔을 때 규찬은 어디를 다녀왔는지 따로 묻지 않았다. 그녀가 규찬에게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이게 진정한 끝은 아닐 거야.”

  규찬은 섬뜩했지만 그는 그녀와 함께 양육권과 그 외 여러 가지를 포함한 이혼 절차를 잘 마무리하는 듯했다. 그녀가 쉽게 헤어짐과 양육권 포기에 동의하는 것에 대해 규찬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야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유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법원에서 이혼 의사를 밝히는 날이었다. 갑자기 돌변한 그녀는 난동을 부리며 손에 쥔 펜을 규찬의 목에 꽂으려 했다. 그 일로 규찬은 결혼 초기부터 지속됐던 그녀의 집착 증세에 관한 추가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녀는 규찬과 딸을 차에 태우고 자유로를 달려 파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규찬이 자신의 앨범에 참여한 한 가수에 대해 충분히 답하지 않자 질문을 했던 그녀는 제한 속도가 시속 90킬로미터인 그 도로에서 허용치의 두 배 이상으로 속도를 높였다. 속도에 비해 서툰 운전 실력 탓에 차는 전복될 뻔했다. 규찬은 당시 자기 자신은 둘째치고 딸이 감기약을 먹고 잠들어있다 깬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딸은 과정만은 못 본 것이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이혼 조정관의 경직된 표정이 더 굳어졌다.

  그 뒤 그녀는 조현병 판정을 받아 정신요양원으로 가게 됐다.

 

  매니저는 고향에 더 머물러도 됐었지만 규찬의 퇴원일에 맞춰 돌아왔다. 그는 해외에 사는 규찬의 아버지를 대신해 많은 개인적인 일들까지 처리하곤 했다. 그럼에도 크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규찬은 아버지와 왕래가 없었고 그가 처음으로 담당한 아티스트였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온 그는 곧바로 규찬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현수야. 고맙다. 니가 고생이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당연한 거지. 언론은 회사에서 맡고, 형님은 제가 맡고. 당분간 곡 작업도 안 하실 테니 그냥 편히 쉬세요. 형수⋯⋯. 아니, 그 여자는 찾았대요?”

  “아직.”

  규찬과 매니저는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규찬은 불안한 표정을, 매니저는 자신의 실수 때문인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담당 형사는 매니저에게 규찬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규찬은 소속사에서 준비해준 레지던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잠깐만 방심해도 커지는 불안감을 잠재우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묘책은 있었다. 그는 딸이 얼마 전 보내온 장문의 이메일을 다시 읽었다. 그녀가 아버지인 자신에게 이 정도로 마음을 털어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에 관한 내용도 있었지만 규찬은 여전히 그 부분을 빼고 읽었다. 그는 가서 바로 답장을 해줘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참. 형님, 제가 말씀드리는 걸 깜박했는데 연희한테 전화 왔었어요. 아빠가 연락이 안 된다고. 공연 중이라고 했어요. 잘 있대요.”

  “말 안 했지?”

  매니저는 규찬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놀란 규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딸은 어떤 방식으로든 더 이상의 상처는 받지 말아야 하는 아이였다. 자신을 낳아준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분노가 또 그녀를 괴롭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딸을 조종했던 첫 번째 화는 그녀가 중학교 3학년으로 갓 올라갔을 때 치솟았었다.

  동네에서 알고 지냈던 딸의 그 친구는 친구라고 말하기에는 맞지 않는 구석이 많았다.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그 친구는 딸이 선생님과 면담한 내용을 엿듣고 그녀의 엄마가 정신요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놀림은 시작되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친구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더욱 심하게 굴었다.

  그해 3월 마지막 날 밤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딸은 앞을 걸어가던 그 친구를 보았다. 그녀는 뒤에서 버스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친구의 대각선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는 넘어지는 척하며 친구 아닌 친구를 도로를 향해 밀쳐버렸다. 그 친구는 살았지만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규찬은 소속사로부터 받은 재계약금을 온전히 변호사 선임에 쏟아부었다. 비가 왔던 밤과 딸의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와 버스 기사의 좁았던 시야가 고의를 실수로 만들었다. 합의도 쉽지 않았다. 큰돈이 다가 아니었다. 규찬은 그 친구를 볼 낯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딸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온 그는 짐을 풀기도 전에 방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딸에게 예정에 없던 공연을 치르느라 답장이 늦었다, 라고 시작하는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규찬은 자신도 평소에 하지 않았던 말을 써보려 노력했지만 그 날의 오후가 생각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휴대폰의 벨소리가 몇 번이고 울려댔다. 이동민 형사였다.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잠깐 뵀으면 하는데요.’

  ‘그 여자 찾았어요?’

  형사는 난감해하면서 레지던스의 주소를 물었다. 불안감이 다시 규찬을 뒤덮기 시작했다. 규찬은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그녀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모든 것을 끝내겠다고 말하는 그 표정 속에 본인의 삶도 포기하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딸이라도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금시에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 괴물은 다시 나를 삼키러 올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울린 현관 벨소리에 규찬은 손을 떨었다. 형사는 문을 열어주는 규찬의 경직된 얼굴을 보면서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인사 대신 전했다. 둘은 거실 탁자에 마주 앉았다. 형사는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일단은⋯⋯. 아니, 현재 소재 파악이 전혀 안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 보여 드린 이 사진 기억나시죠? 사건 직후 자택 근처 CCTV에 찍힌 거.”

  “네. 기억나요.”

  “문제는 그 시간대 이후 근방에서 찍힌 게 없어요. 웬만한 영상은 다 뒤져봤는데. 아예 안 찍히기는 불가능하고 변장을 하면서 이동하는 것으로 저희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요양원에서 탈출한 뒤에 그런 옷차림을 한 것도 그렇고⋯⋯. 조력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생각나는 거 있으세요?”

  조력자. 규찬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그는 이미 그녀의 많은 부분을 지워버린 후였다.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형사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규찬은 시간이 지나도 별달리 떠오르는 게 없자 뭐라도 하려는 듯 커피 두 잔을 내왔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형사가 말했다.

  “CCTV 설치는 생각해 보셨어요? 신변 보호 프로그램으로 지원된다고 말씀드렸던 것 말입니다.”

  “아, 그건 소속사에서 해주기로 했어요. 예전부터 공연 경호 맡아온 사설 업체가 있거든요. 본의 아니게 피해자 임시 숙소도 그렇고 자꾸 거절만 하는 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대신 이건 놓고 가겠습니다. 이 버튼만 누르면 위치 추적과 신고가 바로 됩니다.”

  형사가 탁자에 내려놓은 것은 신변 보호용 스마트워치였다. 규찬은 차마 그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레지던스의 시설은 최고급 수준이었다. 피트니스 센터와 수영장은 물론 크지는 않지만 영화관까지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규찬은 방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순간순간 드는 긴장을 녹이려 애를 쓰기에 급급했다.

  규찬은 딸이 답장은 잘 받았는지 물으려고 전화하려다가 이 불안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친동생 같은 매니저는 이미 다른 매니저에 비해 개인적인 일까지 너무도 많은 것들을 감당하고 있어 최대한 쉬게끔 해주고 싶었다. 그는 도수가 높은 맥주를 한 병 마시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음악은 이미 형사의 전화를 받기 전부터 온 방 안에 계속 흐르고 있었다. 재즈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장르의 곡들까지 규찬 주위의 빈 공간을 메우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부족으로 보였다. 규찬의 표정은 잠에서 깬 순간부터 줄곧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짐 더미에서 연습용 색소폰을 꺼냈다. 쉬는 기간에는 연습실로 가지 않는 이상 집에서까지 악기를 쥐는 일은 드물었다.

  규찬은 새 앨범에 수록하려고 써 놓았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상의 상처가 연주를 방해했고 무엇보다 호흡이 잘 되지 않았다. 사고로 인해 제 컨디션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긴 호흡과 애드리브는 그의 장기이자 팬들이 가장 좋아하고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그 곡을 끝내 완주하지 못하고 악기를 내려놓았다.

  당장 지금을 버틸 방법은 잠에서 깨지 않는 방법뿐인 걸까, 라고 규찬은 생각했다. 문을 열 용기는 여전히 없었지만 대충 옷과 스마트워치를 챙겨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에 필요한 장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금방 방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따라오는 경호원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규찬은 혼자서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면 마침내 잠에 취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늦지 않은 오후라 텅 빈 수영장을 상상했지만 이미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곧 속옷만 입은 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파란색 물이 눈앞을 가득 채웠을 때 그를 의식할 여유는 없었다. 그 안에서 규찬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잠시 잊었다.

  그는 잠깐의 치유 뒤에 온 노곤함을 유지하려고 사물함에서 천천히 옷을 꺼내 입었다. 바지를 입을 때 휴대폰의 짧은 진동이 느껴져 전원 버튼을 눌렀다. 몇십 건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매니저였다. 평소와 같다면 네다섯 번의 전화 이후에는 메시지를 남겨 놓았을 그였다.

  레지던스는 매니저가 사는 오피스텔 근처에 있었다. 소속사는 규찬이 살던 곳에 다시 머무는 것보다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는 매니저 옆에 있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해 이 레지던스를 마련했다. 규찬은 방으로 가지 않고 곧장 건물을 나왔다.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주위에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매니저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규찬은 애써 부정하면서 그가 새빨간 카펫 위에 누워있다고 여기려 했다. 아니었다. 그것은 매니저의 목에서부터 흘러나온 새빨간 피였다.

  ‘이 버튼만 누르면 위치 추적과 신고가 바로 됩니다.’

  형사의 말이 생각나 스마트워치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죽어버린 매니저 옆 탁자에 놓인 쪽지가 보였다.

  ‘스마트워치 잘 받았어? 그거 누르지 마. 누르면 다음은 이동민이야.’

  규찬은 쓰러지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예전부터 그녀가 악을 드러낼 때마다 규찬은 그 ‘이유’에 관해 생각했다.

  ‘너는 왜, 도대체 왜.’

  그러나 아무리 깊게 파고들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죽은 매니저 옆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배가 된 고통을 견디는 것뿐이었다. 이제 규찬은 매니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맡은 아티스트가 되었다.

  규찬은 자신이 직접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면 매니저는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하려 할수록 더 철저히 자신을 파괴하리란 걸 알았다. 그는 그 방식을 조금 전 확인한 것이었다. 규찬에게는 지금 이곳에는 없지만 딸이 있었다. 원래 살던 집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그녀와 직접 마주해야 했다.

  스마트워치를 벗어 던져 버리고 서둘러 매니저 집에서 나왔지만 어떻게든 경찰에게 알릴 필요도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고 설령 그녀를 직접 대면한다 해도 무슨 말과 행동을 할 것인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순간순간 바뀌는 결심이 그에게 혼란을 주었다.

  규찬이 매니저의 죽음을 발견하고 좌절하는 동안 그의 경호팀은 휴대폰 위치 추적으로 규찬을 찾았다. 이내 그들은 오피스텔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 규찬을 발견했다. 달려오는 경호팀을 본 규찬은 순간 떨었다. 그의 눈에 그들은 마치 자신을 해하려는 검은 표범 무리인 것 같았다.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경계를 풀었다.

  “⋯⋯전, 전 괜찮아요.”

  경호팀의 리더로 보이는 한 사람이 인상을 찌푸린 채 규찬에게 말했다.

  “앞으로 절대 이러지 마십시오. 선생님은 현재 안전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규찬은 자신 앞의 그와 다른 경호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도 보호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규찬에게 두려움을 뿌리고 있었다. 경호팀과 레지던스로 돌아가는 길에 규찬은 소속사 대표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경호팀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경찰 신변 보호 프로그램인가 그걸로도 충분하겠어요. 그리고 여기 처박혀 있을 바에 곡이나 좀 써야겠어요. 연락 금지.’

  규찬은 데뷔 전부터 소속사 대표를 존경해왔다. 그는 연주 음악 시장이 없다시피 한 한국에서 뚝심 있게 한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 규찬은 그런 그와 20년 넘게 같이 하면서 형제 이상의 관계가 되었다. 그렇기에 경호팀뿐만 아니라 관련 조치를 총괄하는 대표와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레지던스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면서 규찬은 수영장에 놔둔 짐을 찾아 간다고 말하고 도중에 내렸다. 그는 따라나서려는 경호원에게 곧장 올라간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규찬은 옆 엘리베이터로 다시 내려가려다가 구석의 비상계단을 발견했다. 그는 그 계단을 타고 그대로 건물을 빠져 나왔다. 수영장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규찬은 그녀를 만나기 전에 형사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리기로 결심하고는 무작정 고양경찰서로 향했다.

 

  “저기요, 아저씨. 다 왔어요.”

  택시 기사가 규찬을 흔들어 깨웠다. 택시에 타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던 규찬은 낯선 누군가의 손길이 닿자 경기했다. 그 기사는 놀라는 규찬을 안정시키면서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까지 상기시켜주고 떠났다. 규찬은 떨어진 기온에 옷을 여미며 경찰서로 시선을 고정했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거의 없었다.

  규찬은 불빛이 더 사라지기 전에 형사를 만나고 싶었다. 그에게 아무 일이 없었기를 바랐다. 전화 같은 연락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안전하리라는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멍하니 경찰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입구에서 보초 근무 중이던 한 경찰이 규찬에게 다가와 도와줄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규찬은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엮이는 사람들 모두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경찰서 입구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형사의 전화였다. 받지 않았다. 전화가 오고 받지 않는 것을 반복하다가 순간 매니저 생각이 났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세요? 지금 어디세요?’

  형사는 규찬이 경찰서 근처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경찰서 담벼락 모퉁이 앞에서 만났다. 형사는 다짜고짜 말했다.

  “여기 왜 오셨어요? 혼자에요? 무슨 일 있어요?”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규찬에게 내밀었다.

  “일단. 의사가 죽었어요. 이 의사. 처음에 선생님 담당했던 사람, 맞죠?”

  규찬은 사진의 의사 얼굴을 확인하고 한기를 느꼈다. 긴 생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 사람이었다. 아래턱이 떨림을 느꼈다. 형사는 급한 대로 자신의 차로 규찬을 데려가 의사 사건에 관해 말해주었다.

  “병원에서는 이 분이 며칠 전에 휴가를 냈답니다. 오늘이 복귀 날인데 무단으로 출근을 안 했다고 하더군요.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돼서 집에 가 본 후배 레지던트가 이미 부패가 진행된 선배의 시신을 발견하고 조금 전 신고했습니다. 정황상 전처 분, 아니 피의자 소행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 신변 확인차 연락드린 겁니다.”

  “제 매니저도⋯⋯.”

  “네?”

  “제 매니저도 죽었습니다.”

  규찬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으로 말해 주었다. 형사를 위협했다는 사실과 직접 만나러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렸다. 그는 욕을 마구 내뱉으며 흥분했다. 그러다 곧 여기저기 전화 통화를 했다. 매니저가 살던 오피스텔 주소를 규찬에게 물었다. 몇 대의 승용차와 승합차가 빠르게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저기⋯⋯. 그 의사는 어떻게 죽었나요.”

  “복부에 칼을⋯⋯. 선생님. 선생님 안전 확보가 우선입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세요.”

  형사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현장으로 가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규찬을 데리고 갔다. 규찬은 도착해서도 괴로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물 한 잔 들이켜기도 버거웠다. 딸, 연희가 보고 싶었다.

 

  새벽이 밝아오자 형사는 집을 나설 채비를 했다. 규찬은 형사도 자신처럼 거의 잠을 못 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보다 더 염려하는 게 있었다. 형사는 실질적인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한 얼굴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말했다.

  “일단은 여기에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앞에 경찰이 와 있습니다. 다른 인원이 수시로 집 근처 순찰도 할 겁니다. 어렵겠지만 마음을 좀 놓고 쉬고 계세요. 연락드리겠습니다.”

  규찬은 형사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절대 생기지 않기를, 이렇게 그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면서 순간만이라도 지금의 상황을 내려놓고자 티브이를 켜고 천천히 샤워를 했다. 형사가 내준 음식도 조금 있었으나 입맛이 없어 그만두었다. 약간 진정됨을 느낀 규찬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휴대폰으로 미국과의 시차도 확인했다. 티브이 소리를 낮추고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우리 도대체 얼마 만에 통화하는 거지? 나도 바빴지만 말이야. 공연은 잘 끝났어요?’

  ‘그, 그럼. 근데 웬일이야, 아빠 일하는 것도 궁금해하고. 생활은 괜찮아? 별일 없는 거지?’

  ‘응. 여기 에이전시에서 잘 챙겨줘. 걱정 마. 아빠, 잠깐만.’

  그녀 주위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규찬은 그저 딸 목소리를 들어서, 그녀가 안전하게 있는 것을 확인해서 좋았다.

  ‘여보세요? 아빠 미안. 이따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래 연희야. 또 통화하자.’

  전화는 평소처럼 짧게 끝났지만 그것으로 됐다고 그는 생각했다. 딸과의 통화는 규찬이 며칠 만에 잠시나마 단잠을 잘 수 있게 해주었다.

  뒤척이며 잠에서 깬 그가 급하게 티브이 소리를 다시 올렸다.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시 소재 하이랜드 공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 공원에서는 페스티벌로 대규모 인원이 모여 있었으며 사상자는 1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로체스터 시경은 동양인의 총격이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규찬은 곧바로 티브이를 껐다. 로체스터는 딸이 유학 간 도시였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답장을 기다리는 순간에 전화를 다시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이윽고 휴대폰의 알람이 울렸다.

  ‘아이고 전화한다는 걸 깜빡했어. 미안해 아빠. 너무 피곤해서 이제 잘려고. 내일 전화할게요.’

  규찬은 안심했으나 그와 동시에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가슴이 조여왔으며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양쪽 관자놀이는 마치 심장 뛰듯이 울려댔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그 두려움이 다시 그를 휘감았다. 그는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형사는 집에 돌아오기로 한 약속 시각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규찬은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서 연락하는 것을 참았는데 시간은 계속 흐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형사는 생각과 달리 밝게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메시지라도 보내드렸어야 했는데. 오늘 많이 늦을 거 같아요. 식사는 하신 거죠? 전 이제 먹으려고요. 잠깐만요, 선생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서 근처 단골집이라 따로 말 안 해도 소주 한 병 딱 갖다 주는데 오늘은 사장님이 안 계시네요. 항상 계셨는데⋯⋯.’

  ‘아, 그렇군요. 사실 저도 속이 안 좋아서 아직 안 먹었어요. 얼른 드세요. 그럼.’

  규찬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형사가 그를 붙잡았다.

  ‘이건 집에 가서 직접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파주경찰서 동기가 알려준 정보에요.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해부터 파주 아동 실종 사건이 두 차례 있었거든요. 근데 그 아동 시체가 어디 산속 집 뒷마당에서 같이 발견됐나 봐요. 어떤 화가 작업실인데 그 새끼, 강원정신요양원에서 자원봉사한 이력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현장에 없어서 추적 중이랍니다.’

  ‘그렇다면⋯⋯.’

  ‘섣불리 판단할 순 없지만 합동 수사 들어가면 뭔가 나올 거 같습니다. 그냥 빨리,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들어가서 다시 말씀듭⋯⋯ 흡⋯⋯.’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사님?’

 

  규찬은 형사의 집에서 피해자 임시 숙소로 옮겨가면서 그의 동료로부터 어젯밤 사건에 관해 들었다. 이동민 형사는 어제 22시경 경찰서 인근에 있는 자신의 단골 식당에 방문해 식사하던 중 갑자기 사망했으며 사망 원인은 사이안화칼륨, 즉 청산가리가 희석된 소주를 마셨기 때문인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났다고 했다. 그때 내가 집으로 가지 않아서,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거야, 라고 그래서 형사는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어, 라고 규찬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는 옮긴 숙소와 또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게다가 수사 중인 담당 형사의 죽음 때문인지 주위는 어수선했다. 규찬은 누군가에 의한 보호는 이제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오로지 자신만이 해결할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형사의 집 앞에서부터 규찬을 경호하던 경찰이 다른 현장으로 지원을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위 순찰조는 그대로 운용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규찬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규찬은 그녀를 만나서 반드시 그 ‘이유’에 관한 답을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만약에 그것이 성공한다면 더 이상의 죽음을 막고 무엇보다 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임시 숙소를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날씨는 약간 추웠지만 하늘은 높고 맑았다.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본 규찬이 차분해지는 자신의 마음에 놀랐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딸을 공항에 바래다주고 돌아왔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안토니오의 노래가 들리고 그 향수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저 앞에 집 대문에는 노란 줄이 처져 있었다. 규찬은 더 다가가지 못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할 사람은 딱히 없었다. 그가 확인한 번호는 딸이 한국에서 쓰는 휴대폰 번호였다.

  ‘아빠, 나야. 내 비자에 무슨 문제가 있대서 잠깐 들어왔어. 급하게 진행돼서 연락 못 했어요. 한국 에이전시 아저씨가 마중 나와서 지금 같이 미국 대사관 가고 있어. 이따 나 데리러 와.’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천천히 다시 말해 봐. 연희야? 여보세요?’

  전화가 끊어져 다시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조금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재차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규찬은 곧장 광화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무작정 대사관을 찾아가 딸을 찾았다. 대사관 측은 딸의 이름이 방문 예약자 명단에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규찬은 그곳 주위를 몇 번이나 돌았다. 연희야, 연희야, 라고 쉬지 않고 외치는 동안 그의 목소리는 점점 쉬어 갔다.

  규찬은 시야가 트인 곳이라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바로 광화문 광장으로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더구나 목은 이미 쉬었고 그럼에도 억지로 딸의 이름을 내뱉어 보았지만 인파 속에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그는 계속해서 광장 주위를 돌고 또 돌면서,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면서 딸을 찾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규찬은 순간순간 나타나는 익숙한 실루엣이 자신에게 점점 다가옴을 느꼈다. 옛 아내였다. 그녀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이야.”

  규찬이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근처에 있는 사람은 인상만을 찌푸린 채 자리를 피했다. 규찬은 뒷걸음질 치면서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고 오히려 멀어져갔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등 뒤를 건드렸다. 그녀는 저곳에 있었기에 규찬이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그의 목에 주사기가 꽂혔다. 규찬이 자신의 목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으나 눈앞이 흐려질 뿐이었다. 곧 그 누군가는 무릎을 꿇은 규찬의 앞에 섰다.

  규찬은 뿌연 시야 속에서 그녀를 찾았다. 금방 본 실루엣이 조금은 작아진 듯했다.

  “넌 왜⋯⋯. 도대체 왜⋯⋯.”

  그는 자신이 제대로 묻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 그냥 이렇게 태어난 것뿐일지도.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그녀는 왼손으로 규찬의 머리를 잡고 오른손에 쥔 큰 칼로 그의 목을 그었다. 규찬의 목에서 피가 솟아 나왔다. 그녀는 고꾸라지려는 그의 왼쪽 어깨를 잡고 흉부와 복부를 여러 차례 찔렀다. 규찬은 비틀거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땅은 피로 흥건히 젖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자신의 발로 규찬의 오른쪽 종아리를 누르고 조금 아래 있는 아킬레스건마저 끊었다. 그리고는 유유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연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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