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비취

2018.10.17 06:5110.17

노크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누구십니까?”

 

“접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른처럼 큰 울림통에서 나오는 깊은 목소리, 그 사람이었다.

 

문 밖에는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험악한 떡대에 정장과 중절모를 입혀놓은 그림은 뭔가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몸을 푹 숙이며 인사를 한 떡대는 내게 짐짓 들어가도 되겠느냐는 눈빛을 보였다. 나는 유일한 손님을 집 안의 소파로 안내했다. 다 뜯어지고 왼쪽 팔걸이는 거의 스펀지가 보일 지경이었지만, 이마저도 없는 사람도 많았고 나도 손님을 위한 하나밖에 없는 소파였다.

 

“박사님이 앉으셔야 하는데, 매번 감사합니다. 그보다 잘 뽑혔답니까?”

 

떡대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긴 일이 바쁘겠지, 불티나게 팔린다니까.

 

“여기 있습니다. 저번 주에 말했던 두 팩.”

 

“비취색이 아주 잘 도네요."

 

능글맞게 웃어 보이고는 총알이 가득 찬 주머니를 내게 건넸다. 위아래로 몇 번 던져보니 총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생신이라고 사장님이 꼭 축하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사님.”

 

험악한 떡대는 팔걸이를 '탁' 치며 일어났다. 그리고 끼익 거리는 경칩 소리를 남기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나는 이 조용해진 아파트에 홀로 남았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무가 시야를 가리는 와중에도 내게는 판자촌의 골목들이 눈에 뚜렷하게 보였다. 물로 목을 축이자, 그 복마전의 형상은 더욱 선명해졌다.

 

나도 이런 마약 빌어먹는 재주가 없었다면, 예전처럼 저 판자촌 어느 깊숙한 골목에서 톱밥 섞인 빵을 쥐와 함께 먹으며 살고 있겠지. 그래,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숨이 막히는 열기, 고성방가.

 

 

그 검은 지옥의 깊숙한 곳. 말라 비틀어진 가로수가 있는 삼거리에서 명도가 점차 낮아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벽 한켠이 담쟁이넝쿨에 가리워진 노인의 집이 있다. 담 안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을 파는 그 노인의 별명은 담쟁이넝쿨이었다. 내가 아직 판자촌에 있던 시절, 매년 가을이 되면 그에게 보리 한 줌을 사러 가곤 했다.

 

“내가 말 하지 않았는가? 담 안쪽에선 보리가 자라질 않네.”

 

나는 총알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나중에 거두면 한 줌 정도는 드릴게요.”

 

“나야 매년 총알이 하나라도 꾸준히 들어올 데가 있으니 좋지만, 솔직히 달갑진 않네. 차라리 마약을 하나 사가는 건 어떤가? 저번에 큰 조직에 때준 궤짝에서 하나 흘려서 남았네.”

 

“마약은 나중에도 살 수 있어요. 하지만 보리는 지금 안 심으면 너무 늦을 거에요.”

 

보리가 담긴 주머니를 챙기고 나가려는 무렵, 흙이 담긴 화분 옆에서 홉처럼 생긴 이파리가 내 눈에 띄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비취 빛깔이 선명했다.

 

“아 그거? 비취 이파리일세. 환각 성분은 높다던데, 먹으면 죽어.”

 

“다른 마약은 안 그렇던가요?”

 

“좀 더 빠르고 확실하게 죽는다는 말일세.”

 

“독성분만 빼면 되겠네요.”

 

“자네라도 그건 좀 힘들텐데? 어차피 반품 들어온 거니, 죽고 싶으면 가져가라고.”

 

 

그 해 겨울, 바람이 지는 동안 나는 비취의 연구를 계속했다. 어차피 겨울에는 땅이 얼어서 일거리도 없었으니, 왕년에 이 짓거리에 취미를 두었던 내게는 좋은 장난감이었다.

 

이 모든 연구는 나의 조수, 쥐 없이는 할 수 없었다. 덫 안에 빵 한 조가리 던져 넣으면 하룻 밤 사이에 채용할 수 있었다.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었나 보다.

 

시제품이 가진 독성의 유무는 쥐에게 먹여 판단할 수 있었지만, 환각성을 가늠할 수는 없어서, 어느 정도 독성이 빠진 것 같은 시제품은 결국 내가 먹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독성 제거가 덜 되었던 건지, 내 심장이 느려지는 일도 있었다. 분명 쥐가 멀쩡한 걸 확인하고 시제품을 먹었지만, 먹고 나서 보니 쥐가 죽어있는 사태에서 어느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전같으면 에피네프린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치사량만 아니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누워 이틀 밤은 꼬박 지새웠었다. 잠이 들면 죽을 것만 같았다.

 

다음 해 봄. 보리를 심어두었던 땅의 눈이 녹았지만, 보리 싹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애꿎은 총알 하나를 맨땅에 쏜 샘이었다. 보리 주머니에 담겨온 보리 알들은 그 해 겨울을 나지 못 했지만, 같은 주머니에 실려 왔던 비취 이파리는 열매를 맺었다.

 

내가 처음 본 비취의 환각은 세상이 이 모양이 되기 전, 드넓은 보리밭에 내가 홀로 서 있는 환각이었다. 상쾌한 바람이 보리밭을 휩쓸자, 보리가 서로 부딪히며 사르르 거리는 소리가 보였다. 석양이 지며 붉은 향기가 대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림처럼 우리 엄마도 있었다.

 

싱그러운 보리 이파리를 만져보려는 순간 습하고 까끌거리는 감촉을 받았다. 그렇게 환각이 끝났다. 나는 절망에 휩싸였다. 환각에서 깨어나 바라본 내 판자쪼가리들은 너무나도 더러웠기 때문이다. 하나 남은 성공작을 마저 먹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용케 참아내고, 암시장에 넘겨 꽤 많은 총알을 남겼다.

 

 

“겨울동안은 잘 지냈나? 보리 싹은 잘 틔었고?”

 

“아뇨, 비취 잎을 좀 더 사러 왔는데요.”

 

담쟁이넝쿨은 소리없이 웃어 보였다.

 

“어떤 떨쟁이놈이 저번에 와서는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어찌나 난리를 피우던지, 그게 자네 작품이었구만.”

 

“비취의 독은 몸을 망친다기보다는 심박 수를 느리게할 뿐이었어요. 중화는 간단했죠, 그냥······.”

 

“잠깐, 거기까지. 내가 알고 싶은건 없네.”

 

문뜩 장수의 세 가지 비결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지옥 같은 판에서 이 노인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이유도 그게 아니었을까?

 

“아무튼, 비취를 조금 더 때려고요. 도매가는 좀 싸겠죠?”

 

“아무렴, 싸게 드려야지. 그런데 다시 때 오려면 좀 걸리네. 아무도 그런 걸 기르려고 하지 않았거든. 두 달은 걸려야 하네.”

 

그 두 달 동안은 입에 풀칠이나 하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겨울에 돈을 모조리 써버린 나는 비취 값이고 나발이고 굶어죽기가 싫어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큰돈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나에게 두 달은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판자촌에 슬슬 열기가 차오르던 어느 초여름, 드디어 비취가 도착했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그 날로 현장소장 앞에서 장갑을 내던지고 담쟁이넝쿨에게 달려갔다. 그는 언제나처럼 흔들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궤짝이 왔네. 총알은 모아왔나?”

 

“정말 개처럼 일한 두 달이었어요. 이 지랄 다신 안 할 겁니다.”

 

“이제 다신 할 필요 없을 거야. 다 만들고 나서 팔기 귀찮으면 내게 가지고 오게, 비싸게 쳐서 팔아줌세.”

 

담쟁이넝쿨은 흘낏 우리 사이에 있던 나무 궤짝을 바라보았다. 가서 그 궤짝을 열어보니 낯익은 이파리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던 어느 빵빵해 보이는 주머니는 비취와는 거리가 조금 있어보였다.

 

“보리 한 줌이네, 그건 앞으로 거래를 위해 주는 선물이야.”

 

“이렇게 꼼꼼하게 배려를 해주실줄은 몰랐는데요, 어르신.”

 

“우리 악수나 하지, 잘 해보게.”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긴, 관절 아프다고 일어나지도 않던 양반이니.

 

"우린 부자가 될 거에요."

 

 

그 날도 비취에서 환각 성분을 추출하고 있었다. 그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내 신경을 거슬리며 들려왔다. 분명 쥐는 아니었다. 나는 박차고 일어나 문 쪽 벽에 바짝 붙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총을 꺼내 겨누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박사님 계십니까?”

 

목소리에서 큰 울림이 느껴졌다. 나는 그 목소리 주인의 몸집이 큰 덩치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첫인사는 의외였다. 습격자라면 조용히 들어와서 날 제압하던지 했을 텐데, 이 바닥에 이토록 예의 바른 습격자가 있었나? 난 그대로 벽에 붙어 대답했다.

 

“누구십니까?”

 

“박사님께서 비취를 만들고 계신다던데, 사장님이 거래를 트자 하십니다.”

 

“사장이요?”

 

“네, 우리 사장님이 관심이 좀 있으십니다.”

 

나는 조용히 총을 겨누며 문을 살짝 열어 그를 바라보았다. 산만한 떡대에 정장까지 빼입은, 엄청난 위압감을 가진 사내였다. 그는 살짝 묵례를 하더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걱정하실까 봐 총은 두고 왔습니다.”

 

나는 양손에 총이 없으면 뒤 허릿춤에 들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저 정도 사람이 적의를 품었다면 나는 진작에 죽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들어오시죠.”

 

본디 그 집은 두 사람을 위해 설계된 집은 아니었다. 엄밀히는 집이라기보다는 방에 가까웠으며, 그마저도 나와 쥐 대 여섯 마리만을 위해 설계된 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큰 떡대와 내가 방 안에서 엉거주춤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내 인생을 통틀어 몇 없는 배꼽 빠지게 웃긴 장면이었는데, 나는 그때 총 맞을 걱정에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여기 모이는 게 비취입니까?”

 

“네, 이 정도 비취를 추출하는데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그리고 가방을 뒤적거려 서류와 팬을 꺼냈다. 솔직히 이때는 총을 꺼내는 줄 알았기에 괜히 문을 열었나 싶었지. 굳이 문을 안 열었어도 발로 밀어 차면 열렸겠지만.

 

“배합비율이나 추출법은 박사님만 아셔도 됩니다. 매 주 재료를 드리겠습니다. 계약서는 여기 있습니다.”

 

“흠, 매 주요?”

 

“네, 매 주. 시설이 개선되고 분말 형태로 만들면 추출 기간은 한 오 일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분말형태가 보관과 유통 모두 좋거든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몫으로 떨어지는 총알을 물어보았다. 아무리 계약서까지 들고 왔다지만, 수가 틀리면 죽는 건 아닐까?

 

그러자 그는 계약서와 팬을 꺼낸 가방에서 총알이 가득 찬 주머니를 내게 건네주었다.

 

“매 주 재료와 함께 드리겠습니다. 이번엔 계약금에 선금까지 넣어서 좀 많습니다.”

 

나는 그 짤랑거리는 소리에 매혹되었다. 이제 나는 그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가을만 되면 보리 살 총알 때문에 밤새 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 나에게는 이게 희망이야.

 

“제가 손해 볼 수 가 없는 장사네요. 사인하죠.”

 

“사인은 여기에, 댁은 안전한 아파트로 옮겨드리겠습니다. 내일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가 몸통을 수그리고 문밖으로 나간 후에야 뭔가 대단한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나게 강렬한 돈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대박이다, 대박이야! 몇 년만 일 해도 늙어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나는 다음 날 아침 담쟁이넝쿨을 찾아갔다. 그도 밝은 얼굴을 하고 흔들의자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어, 자네 덕분에 나도 재미좀 봤지. 원료 공급은 나랑 계약했거든.”

 

“축하드립니다, 저도 얼떨떨하네요.”

 

“내일 모래 즈음엔 담 너머에 다녀올 거 같은데, 그 친구들에게도 희소식이지.”

 

“그 친구들도 총알로 돈을 받는답니까?”

 

“비슷은 하지, 주로 쇠때기를 돈으로 받는다네. 거긴 쇠가 부족하거든.”

 

나는 문뜩 그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에게 없는 것들이 많으면서도, 여기에는 발에 채는 쇠가 부족하다니, 그 사람들은 뭘 하는 사람들일까?

 

“이곳의 삶이 싫어 떠난 야만인들이지. 그래도 먹고는 살더군, 담 너머는 농사가 되거든.”

 

“그 사람들 덕분에 여러 사람이 재미 좀 보는군요.”

 

“그런 셈이지.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보겠네, 보리는 앞으로도 심을 작정인가?”

 

보리, 나의 기억은 더욱더 깊고 흐릿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릴 적, 땅을 일구어 보리를 심어 기르던 기억. 그 넓은 보리밭에서 뛰어놀았지. 여름이 되기 전, 수확한 보리로 나는 빵을 만들고 엄마는 맥주를 빚었었지. 그때 몰래 먹어본 맥주는 맛이 없었었어. 지금도 그토록 맛이 없을까?

 

“당연하죠.”

 

담쟁이넝쿨은 이해할 법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취미 버리진 말게.”

 

 

그 날 오후, 떡대의 안내를 받고 따라간 아파트는 내가 살던 판자촌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비록 벗겨진 도배나,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내가 살던 그 구덩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곳 이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약제실은 저기에 있고 이번 주에 쓰실 재료도 같이 놨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전 집에 비교할 수가 없네요.”

 

“다음 주 이맘때, 다시 뵙겠습니다.”

 

떡대가 자리를 비우자, 나는 기쁜 감정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나는 폴짝 뛰며 집 안을 날아다녔다. 이제는 안 그래도 부족한 빵 쪼가리를 쥐 때와 같이 나누어 먹지 않아도 되고, 천장이 날아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불상사도 없으리라.

 

나는 짧은 비행을 마치고 창가에 앉았다. 그날따라 따스한 햇볕이 대지를 비추었다. 비바람 안 새는 집, 꾸준히 들어오는 수입. 이 얼마나 행복한가? 이 행복을 이 마지막 비취 추출액과 함께 즐겨야겠다. 이제 비취는 분말 형태로 나오겠지. 몸은 나른해졌고, 또다시 내 눈 앞에는 보리밭이 보였다. 그래, 보리.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나는 그것이 환각의 연장인 줄 알았다. 세계가 망가지기 전, 엄마와 살던 오두막. 봄이면 파릇파릇한 보리밭이 도처에 흔들리고, 생명이 태동하던, 그 보리밭, 엄마.

 

 

그리고 얼마 전 까지는, 그렇게 비취와 재료들을 건네어 받고, 추출해 넘기고 하는 평안한 일주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나에게 선택을 강요한 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은 담쟁이넝쿨과 담소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직 해는 밝았지만, 마약굴은 떨쟁이들로 가득했다.

 

“선생님, 비취 한 번 꽁짜로 해보세요!”

 

저 어리석은 문지기는 지금 비취를 만든 사람에게 비취를 호객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물 한 잔에 비취가루 조금을 타서 건내주었다. 투명한 물에 보랏빛 장막이 드리웠다.

 

“요즘도 이런데다 뭐 타서팔진 않죠?”

 

그는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저었다.

 

“비취 파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다른 마약엔 몰라도 비취엔 못 탑니다.”

 

어짜피 해가 지려면 시간도 남았겠다, 나는 받아들고 마약굴로 들어갔다.

 

마약굴의 긴 복도는 보랏빛 연기로 가득했다. 방은 내가 만든 쓰레기에 취한 폐기물들로 가득했다. 이 방도, 저 방도. 마치 쓰래기 매립장같았다. 몇 번을 찾아 해맨 끝에 나는 한 자리가 빈 자리가 있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뿌연 구름 아래에서 사람들은 멍 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눈에 익은 얼굴도 있었다. 내가 때려치고 온 공사판의 현장소장이었다. 이렇게 해도 밝은데 이런곳에 있는걸 보면, 공사가 늦추어졌거나 짤렸겠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방의 절반은 나와 같이 일 한 노동자들이고, 나머지 절반도 역시 얼굴은 모르지만 노동자들일 것 이다. 그들의 다부진 몸과, 비취향기로도 가릴 수 없는 땀냄새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빈 자리에 앉았다. 그들의 흐리멍덩한 표정이 더 잘 보였다. 일급도 얼마 안 되는 것들이 값비싼 유흥이나 즐기는 꼴이라니. 그들의 막막한 인생에 건배를 올리며 비취가 타진 물을 입에 살짝 머금고는 삼켜버렸다. 몇 달 만이지? 보리밭을 보는 건.

 

시야가 조금씩 일그러지고, 적막에 잠겨있던 방이 내 맥박 소리로 가득 차자 나는 보랏빛 운무의 맛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불길이 치솟았다. 방안에는 온통 화염뿐이었다. 벽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본능적으로 일어나 문고리를 돌렸다. 작열통, 문고리는 녹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그리고 화상을 입히기 충분할 정도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나는 어깨로 문을 밀쳤다. 깨질 것 같아. 두 번째 충격에서 부순 문 바깥쪽에서 버틸 수 없는 강한 기류가 터져 나왔다. 백 드래프트, 나는 쓰러졌지만, 살고 싶었다. 그 화염과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쪽에서 밝은 빛이 보였다. 나는 온 몸이 불타는 걸 느꼈지만, 박차고 나아가 단숨에 계단을 올라가 그놈의 멱살을 잡았다.

 

“이 씨발 불이야, 불이라고!"

 

문지기는 내 손과 멱살을 잡더니 나를 하늘 높이 날려버렸다. 몇 초 동안 떠 있었을까? 나는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흙바닥에 떨어질 수 있었다. 자갈에 깊게 찍힌 것인지 골반에서 상상도 못 할 현실의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야! 이 선생님 휴개실로 모셔라!”

 

그러자 양 쪽에서 누군가 오더니, 내 어깻죽지를 잡고 나를 다시 불구덩이로 끌고 내려갔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아직 깨지 못한 마약과 자갈로 받은 통증으로 나는 제대로 허우적거릴 수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어딘가에 처박아버렸다. 둘러보니 그곳은 내가 처음에 있던 그 방이었다. 문은 고장 난 듯 보였지만, 내 손바닥은 멀쩡했다. 모두 환각이었다. 그게 그저 환각이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 나는 내가 처음 접한 환각보다 몇 배인지 알 수조차 없는 행복과 안도에 온몸을 맡기고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취해있었다.

 

그 행복이 끝나갈 때에 즈음, 나는 컵에 남아있는 비취 탄 물을 집어 올렸다. 입술에 닿으려는 찰나,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컵을 바닥에 깨쳐버렸다.

 

염병!

 

이건 내가 만든 약이 아니다. 이 미친놈들이 뭔가 더 탄 게 틀림없어.

 

그때 나는 옆에 누워있던 현장소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처럼 거의 깨어있는 상태겠지. 그는 나를 보더니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흐느끼는 듯한 웃음으로 허벅지를 치면서, 미친 건가.

 

나는 문을 다시 박차고 나가면서 외쳤다.

 

“아니 이거 비취에 뭘 탄 거야!”

 

그 문지기는 뒤돌아서 날 바라보더니 피식하면서 웃었다.

 

“선생님, 그거 아까는 집어던져서 미안했수다. 그런데 진짜 뭐 탄 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장이 무언가 탔단 이야기인가? 대체 그놈들은 뭘 탔길래 이런걸 만든 거지?

 

“처음 하는 거 같으니까 싶어서 하는 말인데, 첫 구매 보너스로 조금 더 얹어드릴게. 이 정도면 솔깃하죠?”

 

“아, 아니. 됬습니다. 많이 파쇼.”

 

뱀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걷는 내 몸은 무겁고 피로했다. 이 거리를 벗어나려는데 골목에서 조금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풀려버린 눈으로 칼을 사방에 휘두르고 있었다.

 

“으악 씨발! 이게 뭐야! 꺼져, 꺼지라고!”

 

그러다가 갑자기 지나가던 아이를 보더니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안 좋은 상황을 직감하고 총을 빼 들었지만, 그 미친놈은 죄 없는 아이의 목을 그대로 그어버렸고, 나는 너무 늦게 쏘고 말았다.

 

칼을 든 미친놈은 복부에 맞은 듯, 몸을 푹 숙이고 쓰려졌고, 어린아이는 그대로 힘을 잃은 듯 지저분한 흙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총성에 놀란 사람들은 달려왔고, 나도 그 아이를 향해 달려갔지만, 이미 지나치게 벌어진 목에서는 죽기 충분한 양의 피가 일정한 박동으로 새어 나오더니 결국 멎어버렸다. 총을 맞은 미친놈은 손발 끝을 조금씩 까딱거리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몇 사람들은 나를 힐난했다.

 

“젊은 사람이 총알 아까운 줄을 모르고 저런데에 쓰나?”

 

그때, 아이의 어머니인 것 같은 여성이 군중을 해치고 나타나, 이미 죽어버린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아’ 나 ‘으’ 같은 중저음의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아이의 창백해지는 볼을 어루만지고, 양팔을 잡고 흔들었지만, 이미 눈은 아무런 초점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후, 그 떡대가 오자 나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비취에 뭘 또 타서 팝니까?”

 

팩을 주워 넣던 떡대는 소리 없이 웃으며 반문했다.

 

“박사님도 한 번 맛보셨습니까? 어땠습니까?”

 

“거의 심장마비로 죽을 뻔 했으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따각 하고 상자가 닫히자 그는 말을 이었다.

 

“장사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맞추어야 팔리는 거죠.”

 

문이 닫히자 나는 홀로 이 검은 방 안에 남았다. 침대로 걸어가 쓰러지듯 누운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그 날의 상황이 또 다시 그려졌다. 귀를 막아도 실성한 여인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현장소장의 눈. 파멸한 사람들, 미쳐버린 사람들, 죽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아이. 그 모든 게 내 책임인 거야?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난 그냥 돈이나 좀 더 벌어서, 보리싹도 피우고 편안히 살고 싶었는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아이는 내가 죽인 건가?

 

머리를 쥐어뜯다가 우연히 바라본 화분에는 보리싹이 자라지 않았다. 달려가서 그 흙을 다시 파보았지만 말라 비틀어진 보리 알만 싹도 없이 죽어있었다. 나는 화분을 발로 차 엎어버렸다.

 

화분은 쓰러지고 흙을 흘리자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죽은 아이가 보였다.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총을 꺼냈다.

 

조준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아이는 다시 일어났다.

 

아이는 다시 일어나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묵직한 반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아이의 머리에 총을 던져버렸다. 푹 하고 흙더미에 박힌 총은 미동도 없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완전히 미쳐버린 것을 알았다.

 

그 앞에 무릎 꿇은 나는 흙더미를 들추어보았다. 총알은 보이지 않았다. 손끝이 마루판자까지 닿았지만, 총알구멍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피지 않은 보리 여섯 알만이 썩어버린 체 내 손끝에 걸려 나왔다.

 

총을 들었다. 총이 무거웠다. 방아쇠를 당기자 격발음과 함께 내 앞의 벽에 깊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호흡이 가빠졌다.

 

나는 이제 다음 총알이 향할 곳을 알고 있다. 총구를 입안에 넣었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검지가 방아쇠 위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죽고 싶어도 다른 한 편에서 내 머리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한 가지씩 말하고 있었다.

 

지리멸렬한 스무고개가 끝나고,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총을 마루에 떨어뜨렸다. 차라리 그때 세상과 함께 불타 죽었어야했어.

 

 

“그래서 또 안 됐다고?”

 

담쟁이넝쿨은 다 안 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혓바닥을 차며 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담 너머에서는 자란답니까? 거기 이야기나 좀 해줘요.”

 

그는 두 눈을 감았다. 입맛을 두 세 번 다시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제법 풍족하게 살더군, 먹을거리가 잘 자라니 말이야. 그래서 나도 가서 좀 얻어먹고 오곤 하지.”

 

담쟁이넝쿨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거기서만 자라는지는 알 수가 없어. 난 처음에는 흙 때문인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문제는 아니더군. 최대한 기후 차이를 줄여보려고 담에 가깝게도 심어봤지만, 이상하게도 담 안쪽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자라지 않았어. 이게 다네.”

 

허탈함이 나를 적시었다.

 

“그래, 이게 진짜 다일세, 나도 다 해봤어.”

 

단순한 짜증은 아니었다. 그때의 기분은 분노? 자괴감? 내가 그 사람들을 모두 나락으로 몰아 부쳤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 그 모든 게 짜증이 났다.

 

“거 실망한 표정인데?”

 

“다음엔 좀 빨리 말해 주세요.”

 

“난 이미 처음에 말했잖아, 다 해봤는데 안 됐다고. 우리 친구가 가진 희망의 크기를 좀 보고 싶어서 더 말리진 않았네.”

 

"부추기기도 했잖아요."

 

"자네는 할 수 있을줄 알았지."

 

그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의자에 몸을 맡겼다. 한참을 그 흔들거림을 즐기던 그 노인은 대뜸 나에게 말을 꺼냈다.

 

“정 보리밭을 거닐고 싶거든 아예 담 너머로 가버리는 건 어떤가?”

 

나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담 너머로 갈 수는 있겠지만, 돌아오지는 못하겠지. 그래서 저 노인이 보따리상으로 돈을 벌고 있는 거고.

 

“왜? 아주 이주하는 건 솔깃지 않아?”

 

“지금은 아니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쟁이덩쿨, 몇 개 좀 소문 안 나게 구하고 싶은데.”

 

“자네라면 추가비용 없이 비밀리에 구해주지. 어떤 게 필요한가, 어린 여자애?”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우, 나는 그런데 취향 없다니까요. 시중에 도는 비취랑 여기 적힌 재료들이에요.”

 

그는 안경을 꺼내 주문서를 읽더니 흥미로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 죽음의 길을 걷겠다고? 자네 옆구리에 아가미 달리고 싶나?.”

 

“뭐 어떻습니까? 뿌린건 거두고 가야죠.”

 

“해독제 만드는데 가산을 탕진할 수도 있어.”

 

“돈은 많아요. 다 저 죽어가는 사람들이 보탠 거죠.”

 

“그래? 그럼 현실과 잘 싸워보게.”

 

나는 잔금을 치르고 담쟁이넝쿨의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지난 일 이후로 가슴속에 짓눌려있던 무거운 바위가 빠져나간 것 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한 번 해보자.

 

 

나는 거의 미친놈처럼 틀어박혀서 약을 섞어보았다. 또, 예전의 나처럼 빵조각을 덫에 꽂아놓고 생동성 지원자를 모집했다. 합성된 비취가 투여된 쥐들은 예전에 나처럼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갑작스래 울어대면서 철창 안을 뛰어다녔다. 혐오스러웠다.

 

한참 동안을 열리지 않을 쇠창살을 이빨로 긁어대다가 이내 지쳐서 쓰러졌다. 반면에 내가 만든 비취를 투여한 쥐는 죽은듯이 자고 있었다. 조금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피를 빼내었지만, 다행히도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제 시작이다.

 

겨울이 두 번 지나갔다. 평범한 겨울 같았으면, 집을 수리하고 더 따듯한 옷가지와 더 풍족한 음식료를 살 수 있었지만, 내 가산은 약제를 위해 거의 탕진되고 있었다. 어찌나 궁상맞았는지, 하루는 떡대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박사님, 집안 수리는 안 하십니까?”

 

그렇다고 내가 약을 중화시키는 연구비로 모두 탕진했노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대충 둘러대는 수밖에.

 

“더 좋은 집으로 옮길까 해서 돈을 모으고 있어요.”

 

그는 끄덕이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찌나 다행인가?

 

"고순도 한 팩이 안 보이네요, 총 열 팩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에게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질했고, 그는 크게 웃으며 자기 머리를 탁 때렸다. 가방에 가리어진 팩을 마저 챙기고는,

 

"좋은 주말 되십쇼!"

 

그래도 뜻밖의 소득은 생각보다 많았다. 지천에 널린 담쟁이넝쿨을 주원료로 값싼 항생제를 만들어냈다. 마약이 아닌 이유로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제조법이었다. 그 외에도 위장약이나, 제산제, 해열제 같은 약들은 철을 걸러 나왔다.

 

처음에는 이것들을 팔면 어느 정도 보탬이 되겠구나 했지만, 원료비가 워낙 낮아서 이윤을 붙이기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조금 팔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 인건비도 안 나오는 수준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비취를 처음 만들었을 때처럼, 수 많은 쥐를 죽인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쥐를 묻을 만한 공간도 없어서 불에 태워야 하나 걱정하던 무렵, 처음으로 발광을 하지 않는 쥐가 나타났다. 쥐 다섯 마리를 다시 뽑아 시험해봤지만, 그 다섯 마리 모두 별다른 이상 반응이 없었다.

 

그 쥐들을 모두 풀어주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두려움 앞에 섰다. 이제 다음은 임상시험의 차례였다. 나는 유리잔에 물을 채우고 나서 두 가지 분말을 양손에 들었다. 하나는 저놈들이 무언가 첨가한 오염된 비취, 하나는 내가 만든 중화제. 수가 틀리면 골치 아플 게 분명했다.

 

먼저 오염된 비취를 넣자, 그 물은 회오리치는 듯하더니 보랏빛으로 물들어서는 매혹적인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중화제가 들어가자 그 보랏빛 물결은 점차 느려지더니 다시 투명한 물로 변했다. 들키지 않으려면 중화제에는 보랏빛 염료를 넣어야겠어.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만약, 바뀐 게 색깔뿐이라면? 그 무서운 공포를 마주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저번처럼 자제하지 못한다면, 나도 그 사람들처럼 될까? 나는 수 번을 입술에 붙였다 땠다 하기를 반복했다.

 

‘죽기야 하겠어?’

 

눈 딱 감고 그 물을 마셨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나는 팔짱을 꽉 끼고 두려움에 맞설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일초 이초. 나는 왼쪽 눈을 떠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지저분한 쓰레기장이 보였다. 언제나 볼 수 있던 내 방의 모습이었다.

 

일순간 나는 그 환각보다도 무서운 내 현실의 모습에 질려버렸지만, 지난 모든 고생이 보상받았다는 생각에 나는 거의 울어버릴 뻔 했다. 이제 끝났다. 보리싹조차 피지 못 하는 이 땅을 떠나야지. 나는 내 몫을 다 했어. 이제 도망칠 거야.

 

 

“담쟁이넝쿨, 보라색 식용염료도 팝니까?”

 

총알을 계산하던 노인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한 3초간을 머리를 굴리던 그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답했다.

 

“아, 보라색 염료? 아무런 약 성분도 없는 보라색 염료를 말씀하시오이까?”

 

“아무렴요, 그냥 물을 보라색으로 물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담쟁이넝쿨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양팔을 펼쳐보았다. 나는 그와 처음으로 포옹을 나누었다. 그는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래, 그래. 언제 떠날 탠가?”

 

“다음 물건을 건네 주고 그다음 날 밤이면 떠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다듬었다.

 

“그 날은, 보름일 텐데? 야반도주에는 달빛이 없는 게 좋아.”

 

“이미 희생자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이 이상은 만들고 싶지 않아요.”

 

담쟁이 넝쿨은 내 양팔을 잡았다. 그 두 눈은 약간 붉은 듯했다.

 

“그러면 내 잘 파진 개구멍이 적힌 지도를 하나 주지, 보랏빛 염료는 저기 깊은 안쪽에 있을 터인데 그동안의 거래에 감사하는 기념선물이네. 알아서 가져가게.”

 

나는 깊게 고개를 숙여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바지가 해져서 곧 찢어질 것 같았기에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보랏빛 염료가 든 양철통이 세 개 보였다. 마지막 퍼즐이 이렇게 맞추어졌다.

 

나는 방안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보름에서 딱 하루가 모자란 달이 판자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달빛은 내 꿈의 지도와 빈 종이를 비추고 있었다. 펜을 들어 나는 마지막 보험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가진 총알 열 개는 가져가셔도 좋습니다만, 아래의 편지를 꼭 부쳐주세요. 주소는 적혀져 있습니다.

 

 

담쟁이넝쿨, 이곳은 보리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사르르 거리는 소리 들리는 곳이에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올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에요. 비취에는 내가 장난질을 쳤어요. 미안해요. 매주 담을 넘으시는 분이니, 절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저는 조금 더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요. 아마 채비를 마치는 대로 더 바깥으로 모험을 떠날 겁니다. 여생 즐겁게 지내세요.

 

기쁨을 담아, 율리시스가.

 

만약 살아서 떠난다면, 더 좋은 말을 덧붙일 여지가 있겠지. 마침표를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네, 곧 갑니다.”

 

문밖에는 그 떡대가 서 있었다. 우리도 참 오래 봤지, 몇 년을 넘게 보았으니. 이 친구도 내가 떠나면 고생을 좀 할 텐데.

 

“박사님, 좋은 일 있으세요?”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나보다, 그럴 만도 하지. 그 고생을 다 하고, 바보같이 싸지른 똥도 다 치우고 내가 원하는 땅으로 떠나는 거니까.

 

“이사할 곳을 정했어요. 다다음주에는 이사할겁니다. 주소는 다음 주에 알려드릴게요.”

 

그는 다시는 쓰이지 않을 비취 재료를 내려놓고, 내가 특별히 준비한 비취를 챙기며 말했다.

 

“정이 든 곳을 떠나시려니, 개운치는 않으실 텐데요.”

 

“선 사람은 앉고 싶고, 앉은 사람은 눕고 싶다고. 조금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그는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얼마나 좋은 곳일지 기대되네요.”

 

나는 그의 손을 꽉 쥐고 흔들었다. 얼굴에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기대할 만합니다.”

 

매주 그랬던 것처럼, 문이 굳게 닫히고 나는 이 방에 홀로 남았다. 하 참, 이런 날이 오긴 왔네. 죽어도 이 똥은 못 치울 줄 알았는데. 회상에 잠겨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충분한 중화제도 만들어야 되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창밖에 보름달이 가득했다. 아직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비취를 버릴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충분할 양이다. 마지막으로 추출기와 함께 비취의 제조법까지 불태워버렸다. 모두 불타라. 내가 아끼는걸 모두 앗아간 불길이, 이제는 가장 혐오하는 것 까지 태우는구나.

 

그때 현관문 앞의 미세한 시끄러움이 들렸다. 쇠끼리 부딛히는 불쾌한 소리 사이로 열쇠가 맞추어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 사람들이다.

 

배란다로 뛰어가 엮어서 만든 밧줄을 창밖으로 던졌다. 중간 즈음 내려왔을 때, 내 집에서 목소리가 올려 퍼졌다.

 

“여긴 없어!”

 

“여기엔 불을 질렀어, 멀리 있진 않을 꺼야.”

 

이거 염병, 담 너머는 가지도 못 하고 죽게 생겼네.

 

땅에 닿자마자 나는 담쟁이넝쿨이 알려준 개구멍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약 1km 남짓한 거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탕!

 

뒤에서 총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이어 몇 발의 총성이 더 울렸다. 아파트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그곳에서 번쩍이는 불빛도 보였다. 내가 이렇게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나? 굳이 이 귀한 총알을 허비하다니.

 

한참이나 달려 지쳐주저 앉은 지금 내가 뛰어온 골목에서 또다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턱까지 차 죽어버릴 것 같았지만, 지금 저들에게 걸리면 곱게 죽지는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달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뒤에서 몇 발의 총알이 더 날아오자, 나 또한 그를 향해 두 어 발의 총알을 쏘았다. 마치 의례적으로 쏘는 예포처럼 아무런 사상자도 나진 않았지만, 쏘아야 한다는 의무감은 방아쇠를 당겼다.

 

담에 도착하자, 나는 개구멍을 찾아 헤맸다 뒤에서 쏘는 총알이 담에 맞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내 가슴은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망할 총소리는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찾았다! 개구멍. 이 노인네는 여기다가 담쟁이넝쿨을 덮어놨네. 겨우 몸을 비틀어 넣자 손에서는 갑자기 느껴본 적이 있는 촉감이 느껴졌다. 염병, 지렁이네. 당장이라도 이 비좁고 습한 구멍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뒤로 나가면 곱게는 못 죽을 테고, 앞으로 나가기엔 너무 좁잖아.

 

허리가 개구멍에 낀 것인지, 내 엉덩이는 아직도 담 안에 있다. 내 엉덩이에 바람구멍이 생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체 무슨 개구멍을 이렇게 좁게 뚫어놓은 것인지, 미치겠네! 겨우 허리를 비틀어가며 몸을 이끌자, 어느덧 내 손에서는 싱그러운 바람과 함께 잡초의 감촉이 느껴졌다.

 

희망이 생겼다. 엄마에게서 나오려는 아이처럼 필사의 몸부림을 이어나가자, 내 몸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완전히 그곳에서 벗어나자, 나는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손으로 애타게 만지던 그 잡초를 밟으며 나는 달렸다. 달렸다.

 

저 멀리에 드넓은 초록 물결이 보였다. 그것은 보리밭이었다. 푸른 바다와도 같은 그곳에 이르자, 그들이 사르르 고개를 숙이며 나를 환영했다. 그 행복한 뜀박질, 전혀 숨이 막히지 않았다. 나는 양손을 펼쳤다. 열 손가락 사이로 보리꺼럭의 꺼끌거리는, 삶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행복한 감촉이

 

탕!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추적자는 겨우 얼굴과 총을 든 손을 내밀고 나를 겨누고 있었다. 뒤이어지는 총소리와 함깨 섬광이 담벼락을 비추었다. 여긴 내 무덤이 아니야. 나는 마지막 달리기라는 생각으로 지친 다리를 이끌고 다시 달렸다.

 

그 순간 무언가 허벅지에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악!

 

눈 먼 총알이 내 허벅지를 뚫은 것 같다. 통증으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깊게 뚫린 것 같다. 나는 보리밭에 쓰러져버렸다. 지금도 내 위로는 총알이 날아오고 있다. 담 너머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멀리 사는건가? 총소리를 들었으면 나를 구하러와줬으면.

 

나는 엎드려 쓰러진 상태로 한 손으로 피어난 보리를 만지어 보았다. 그래 그 꺼끌거림. 이거야, 내가 잊을 뻔 했던 그 감촉. 그래 네가 달빛을 받으니 이쁘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는 태양이 널 비추었는데, 아쉬워.

 

그래, 최소한 네 곁에서 죽겠구나.

 

 

어느 새벽, 무거운 강철 셔터앞에 어느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벽돌을 가리고 있던 담쟁이넝쿨은 이제 없다. 노인은 셔터에 끼어있던 봉투를 발견했다. 그 봉투에는 노인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 그는 알만 하다는 표정으로 봉투를 찢어보았고, 그 안에는 편지가 한 통 들어있었다.

 

 

담쟁이넝쿨, 이곳은 보리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사르르 거리는 소리 들리는 곳이에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올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에요. 비취에는 내가 장난질을 쳤어요. 미안해요. 매주 담을 넘으시는 분이니, 절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저는 조금 더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요. 아마 채비를 마치는 대로 더 바깥으로 모험을 떠날 겁니다. 여생 즐겁게 지내세요.

 

기쁨을 담아, 율리시스가.

 

추신. 정말이지,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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