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20.05.16 00:3105.16

출혈부터, 출혈부터!
바이털 사인 계속 떨어집니다.
혈관 잡았어.
좋아 석션! 야, 어시스트, 정신 차려!


[섬]

나는 섬에 있다. 나는 해변을 걷는다. 하늘은 맑다. 하얗게 부서지며 모래 속으로 빨려가는 물거품의 왈츠를 본다.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길쭉한 막대처럼 생긴 초소가 있다. 쥐색 전투복을 입은 사내의 시선이 내 눈동자와 마주친다. 총을 들고 있다. 나는 먼저 눈길을 피했다.

허리를 굽혀 모래 한 줌을 손으로 떠올린다. 태양의 따스함을 품고 있을 가는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다. 나의 촉각은 그 온기, 미세한 움직임을 완전히 느낄 만큼 정교하지 않다. 그러나 좋아지고 있다. 코쿤(cocoon)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주었다.

빅터는 내가 사고로 감정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감정에 의존하는 기억도 함께 잃어버린 거라고 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왜 이 섬으로 오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여러 번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가위질한 필름 조각들 같은 기억이다. 붉은 털 원숭이가 보인다. 나는 흰 가운 같은 것을 입었다. 원숭이가 격렬하게 사지를 버둥거린다. 내 왼쪽 눈에서 붉은 피가 쏟아진다.


[ 여자 ]

해변에서 경비 외에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 너무 놀랐다. 나는 나의 시각과 청각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환각을 겪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이 섬 어디에서도 나는 거울을 본 적이 없다. 비가 온 뒤 물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은 내 기억 속의 나와 다르다.

여자는 항상 같은 차림으로 해변에 나온다. 희고 헐렁한 셔츠에 푸른색 짧은 반바지 차림이다. 갈색과 금발의 중간쯤 되는 긴 머리가 흩날린다. 여자를 관찰하면서 나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 한 여자를 몹시 사랑했었다는 내 안의 흔적을 발견했다. 아쉽게도 기쁘다기보다 고통스러운 종류였다.

처음으로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였다. 나는 놀라서 바로 고개를 내렸다. 그러나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자의 눈길은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았다. 등대의 불빛이 회전하며 바다를 비추듯, 그렇게 나를 지나쳤다. 여자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내 계산이 맞는다면 그런 상태가 석 달 넘게 유지되었다. 정확하지는 않다. 이 섬의 어떤 물체도 시간이나 날짜를 표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조개껍데기를 뒤집어 날을 헤아린다.

어느 날 여자는 내 근처로 다가왔다.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특이하고 예외적인 신체반응이다. 나는 여자의 흰 셔츠 아래로 붉고 굵은 선을 발견했던 것 같다. 여자의 흉부를 좌우로 나누듯 빗장뼈 바로 아래에서 명치까지 내려가는 선. 나는 그것이 문신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나의 옆에 앉았다. 처음 시선을 마주쳤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여자는 표정이 없었다.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여자가 나를 몸통을 잘라낸 나무 그루터기 정도로 여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언어를 쓰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 섬의 경비들은 피부색이 제각각이었다.


[ 이름 ]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낮이었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 때문에 해질녘처럼 어두웠다. 바람이 건물들을 지나며 쌩 하는 고음을 냈다. 해변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일어서려고 할 때 여자가 달려왔다. 사방으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모자 쓰듯 손으로 꼭 누른 채 나에게 뛰어왔다. 뭐라고 말을 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것도 세찬 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갑자기 바보가 된 것처럼 멍해졌다. 여자는 나를 보고 와락 웃었다. 뜨거운 냄비에서 툭툭 옥수수 알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꽃이 막 피어나는 순간을 보는 듯 했다.

여자는 나의 귀에 자기 입을 가까이 가져왔다. 이름을 물은 거라고 했다. 발화하는 여자의 기운이 귓불에 느껴져야 하지만, 내게는 다만 소리만 들렸다. 여자의 언어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한참 말없이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솔직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닦으려고 오른손 검지를 눈가로 가져갔다. 눈물은 그 자리에 없었다. 흐른다고 느꼈지만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에이오네(Eione)라고 소개했다. 나는 토마스(Thomas)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 꿈 ]

햇살이 강하게 내리쪼이는 날이었다. 바다의 푸른색은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모래 해변은 조리개를 너무 연 필름 사진처럼 희게 눈부셨다. 내 오른편에 앉았던 에이오네가 내 눈을 들여다봤다. 시선이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내 안의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일까? 에이오네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그 손가락이 에이오네의 상체를 감싸고 있는 흰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진지하고 망설임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딴청 하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 행동을 지켜봤다. 에이오네는 셔츠를 열었다. 자신의 맨 가슴을 나에게 보여줬다.

문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흉터였다. 심장이나 폐를 수술한 것으로 보이는 짙고 굵은 수술자국이었다. 에이오네는 기억이 불완전하다고 했다. 가끔 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생생한 꿈을 꾼다고 했다. 그렇지만 생생했다는 느낌만 남을 뿐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럴 때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나는 모래에 손가락을 움직여 ‘꿈’이라는 글씨를 썼다. 그리고 그 옆에 물음표를 붙였다.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꿈을 꾸는지. 그렇지 않았다. 꿈의 기억은 없다. 다만 깨었다가 순간적으로 의식이 소거되는 경험이 있었다. 잠드는 게 아니라 매번 정신을 빼앗겼다가 되돌려 받는 느낌이었다. 에이오네를 만난 뒤, 그 느낌이 더 강해졌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에이오네의 몸이 뒤틀리며 발작하는 모습을 내가 본 것 같다. 사지가 각각 다른 주체에 의해 조정되는 것처럼 따로 놀았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어떻게 수습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두려웠다. 물론 뇌 활동이 만들어낸 엉터리 기억일 수도 있다. 붉은 털 원숭이, 쏟아지는 피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 표정 ]

에이오네는 표정을 갖게 됐다. 웃을 때 양쪽 볼에 살짝 보조개가 들어간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지만, 동시에 더 힘들어졌다. 그 대화가 내 안에 닫아걸고 유보해둔 궁금증들을 쿵쿵 두드려 꺼내려하기 때문이다. 빅터가 말하는 나의 문제는 전두엽 소실로 인한 감정의 상실인데 에이오네를 만날 때마다 나의 신체가 감정이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마냥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파란색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만약 그 색깔이 정 반대로 보인다면 바다를 하늘이라 말하고 하늘을 바다라고 부를 거냐고 질문했다. 그러면서 나의 손을 들어 자신의 손과 깍지를 꼈다. 나는 갑자기 갈비뼈 하나가 툭 부러지는 것 같았다. 에이오네와 나, 우리는 겨우 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표정을 읽고 느끼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여기기 시작했다.


[ 시간 ]

에이오네의 깊고 푸른 눈이 나를 들여다본다. 내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거라면, 지금 나는 에이오네를 사랑하고 있다. 에이오네는 어두워졌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나를 바라볼 때 더 슬픈 표정을 짓는다는 점이다. 물론 단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착각, 표정에 대한 나의 과잉학습 탓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이오네가 어두워지는 속도에 비례해 나 스스로에 대한 질문도 많아진다.

나에게, 기억은 선형적이지 않다. 시간이 소거된 기억이다. 심지어 내가 매번 어떤 길로 코쿤에 돌아가는 지 기억하지 못한다. 빅터는 내가 사고를 당한지 얼마 안 되었고 회복 중이라고 말하지만 내 안에는 늙어버린 자화상 같은 이미지가 옹이처럼 들어있다. 너무 강하게 달라붙어있어서 절대로 지우거나 떨쳐낼 수가 없다.

에이오네는 주머니에서 붉은 사과를 꺼냈다.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달콤한 냄새가 났다. 에이오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그리고 바다 쪽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에이오네가 갑자기 돌아섰다. 바다쪽에서 불어온 빛과 바람이 에이오네의 머리카락을 황금색으로 물들였다.

에이오네가 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나는 그걸 받아 들었다. 과즙이 손에 묻었다. 그 사과를 보면서 원자폭탄이 터지듯 순간적으로 내 안에 수많은 질문들의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나는 무엇을 먹어본 기억조차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폭발의 후폭풍을 내 안에 가뒀다. 내색하지 않았다. 태연한 모습으로 사과를 모래 위에 내려놓았다.

야생동물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던 사냥꾼처럼 다가오던 경비원들이 전진을 멈췄다. 왜 그랬을까 묻지 않았다. 에이오네는 내 반응을 궁금해 했던 것 같았다. 동시에 경비원들 움직임도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기억이 끊기는 것이 내가 특정 행동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에이오네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 머리를 내 어깨 위에 얹었다. 내가 고개를 크게 돌리지 않아도 볼 수 있도록, 자신의 팔을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뒤 살짝 소매를 걷었다. 에이오네의 손목 위에 짙은 푸른 멍 자욱이 있었다. 누군가 매우 강한 악력으로 쥐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내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무슨 비밀이야기를 하려나 했지만 아니었다. 잠깐 자신의 입술을 댔다가 떼어냈다. 현기증이 났다.


[ 발작 ]

나는 앉아있다. 나의 발목과 허벅지, 팔뚝과 손목은 가죽벨트로 단단하게 철제 의자에 결박되어 있다. 빅터의 목소리는 내가 발작이 왔을 때 보이는 증상을 설명한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5도 정도 기울인 채 침을 흘리고, 왼손 중지가 1초에 두어 번씩 까닥거린다고 한다.

나는 조금 전 일어난 것은 발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부의 뉴런들이 서로 주고받는 전기 자극으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분명 외부에서 기인한 충격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 흐린 시야에 빅터가 들어온다. 빅터는 나를 마주보고 있다. 이 방에 그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끊임없이, 빅터는 누군가에게 지시를 한다. 동시에 머리속에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내 손이 결박되어 있어 만져볼 수가 없다.

빅터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질문한다. 에이오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 답했다. 빅터는 은회색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과도하게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물었다. 한 차례 연기를 내뿜은 뒤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그의 말은 ‘기억에서 곧 지워지겠지만’으로 시작됐다. 나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이었다. 내가 손상을 입은 곳은 왼쪽 전두엽뿐만이 아니라고 했다. 현재의 기억을 정리해 저장장치로 보내는 편도체의 일부도 손상됐다고 했다.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을 가질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에이오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 때, 어떤 기억이 뿔처럼 쑥 솟아났다. 촛불이 꺼지는 영상을 거꾸로 돌리듯 갑자기 밝아지는 생경한 느낌이었다.

살아있는 붉은 털 원숭이의 머리를 수술대에 고정시킨다. 원숭이는 스스로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안다. 가죽 벨트로 묶인 팔과 다리가 꿈틀거리며 버둥거린다. 마취가 시작되고 원숭이의 몸에 푸릇푸릇 솟아올랐던 힘줄들이 긴장도를 잃는다. 흰자위를 드러내며 희번덕거렸던 눈도 감긴다. 메스를 들어 털이 가득한 원숭이의 두피를 벗겨낸다. 누릿한 피 냄새. 지퍼를 연 가죽점퍼처럼 두피를 젖혀둔 뒤 전기톱으로 두개골에 홈을 판다. 칼슘이 타는 냄새. 두개골 상부를 뚜껑처럼 열었다. 뇌수막과 혈관, 그 아래 어른거리는 회백질이 나타났다.

끔찍하고 불쾌한 기억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구역질을 하고 싶었다. 내 밖에서는 빅터의 질문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에이오네의 이름을 기억한다고 답한 것은 끔찍한 실수였다. 남아있는 먼지만큼 작은 기억의 조각이라도 꼭 찾아내고 말겠다는 무서운 기세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내 입 주변에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전조현상(前兆現象)이었다.

. . .

나는 앉아있다. 나의 발목과 허벅지, 팔뚝과 손목은 가죽벨트로 단단하게 철제 의자에 결박되어 있다. 빅터의 목소리는 내가 발작이 왔을 때 보이는 증상을 설명한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5도 정도 기울인 채 침을 흘리고, 왼손 중지가 1초에 두어 번씩 까닥거린다고 한다.

나는 언제 어떻게 이 의자에 앉게 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빅터가 나를 보며 웃는다.


[ 작별 ]

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분다. 갈매기가 바람 속에 날개를 펴고 양력을 얻는다. 나는 에이오네를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애착하는 것이다.

에이오네가 보였다. 파도치는 바다와 땅의 경계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손을 흔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이오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정해진 좌표라도 있는 것처럼,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에이오네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내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 정확히 겨냥이라도 했다는 듯 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에이오네의 얼굴이 젖어있었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서 있었다. 사실 떨고 있었다. 에이오네가 두 팔과 손을 내 등에 대고 나를 안았다. 내 가슴에는 에이오네의 눈물이 떨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땅을 향해 직선으로 뻗은 내 팔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에이오네의 등을 감았다.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 채로, 나는 에이오네를 토닥이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던 에이오네가 조금 차분해졌다. 에이오네의 행동은 놀랍고, 느닷없는 것이었다. 경비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에이오네가 내 등에 둘렀던 팔을 빼내 나를 살짝 밀쳐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을 잡아끌었다.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은 뒤 에이오네는 앉았다. 나도 옆에 앉았다. 에이오네는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대고 나의 눈을 보았다. 충혈 된 그 눈은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라고 말했다. 에이오네는 나의 다리와 그녀의 다리 사이, 경비들의 시선이 미칠 수 없는 모래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나를 기억하지 마.'

충분한 시간을 준 뒤, 에이오네는 글씨를 지웠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이었다. 그것이 작별인사인 것처럼, 에이오네는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바다로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에이오네는 작은 점이 되고, 이내 사라졌다.

나는 입을 열고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가빴다. 손을 뻗어 내 가슴을 눌렀다. 조금전 무언가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커다랗고 검은 구멍, 명치 부근에 구멍이 생겨난 것 같았다. 내 몸이 기울어 모래바닥으로 꺼졌다. 내가 나에게서 분리되고 있었다.

환청처럼 웅웅거리며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미아(Arrhythmia). 어레스트(arrest). 분주하게 뭔가를 지시하는 목소리들.

나는 분명히 에이오네를 본 적이 있다. 이름이 ‘에이오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해변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안경 위에서 찰랑거리는 앞머리를 흘러내리지 않게 서류용 클립으로 고정시키는 걸 좋아했다. 장난기 많은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웃을 때와 화를 낼 때 모두 양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키스를 할 때마다 눈을 감았다. 나는 눈꺼풀 위로 얇고 서툴게 그린 화장을 보며 웃었다.

나의 손끝과 발끝이 저릿해졌다. 내 기억의 공간이 페인트 한 통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통 흰색으로 바래졌다.


[ 심문 ]

나는 방에 앉아있다. 코쿤 내부 어디쯤일 것이다. 팔과 다리가 묶여있지 않다. 바다로 향하는 창은 좁다. 열리지 않는다. 의자 하나와 침대 하나. 벽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노크를 할 때처럼 방 안의 모든 벽면을 두드려봤다. 공명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손가락 관절에 둔탁한 충격이 전해진다. 부수거나 뚫을 수 없는 두꺼운 벽이라는 뜻이다. 복도를 향한 벽은 투명하다. 나는 철제 침대 모서리에 앉아 어떤 통로로 이 방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궁금해 했다.

빅터는 전문적인 용어를 즐긴다. 기억상실은 과거가 잊혀져가는 역행성, 현재 이후의 일이 기억되지 않는 선행성으로 구분된다고 나에게 알려줬다. 나는 양쪽 모두에 해당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에이오네는 선행으로도 역행으로도 내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냈다. 에이오네가 뛰어 멀어지던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기억이다. 내가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면. 다만, 그 이후 무슨 일이 나에게 벌어졌는지 생각 나지 않는다. 덩어리 하나를 강제로 뜯어낸 것처럼 비어있다. 나는 지금 해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에이오네를 만난 일이 있음을 안다.

주먹을 쥐어 투명한 벽을 힘껏 내리쳤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났다. 알람이 울리고 분주하게 사람들이 뛰어왔다. 빅터의 얼굴도 보였다. 그는 팔로 커다란 X자를 그려 일종의 사인을 보냈다. 흥분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스피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내 의식에 전달되지는 않았다. 나는 이번엔 오른쪽 팔꿈치로 더 큰 힘을 가해 벽을 찍었다.

내가 붉은 털 원숭이보다 먼저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동물은 미니어처피그(Miniature pig)였다. 지능이 높고 다루기 쉽다는 이유였다. 복제된 커넥톰을 원래 뇌의 자리에 삽입하는 수술을 마친 뒤, 그 온순한 동물이 마취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옥자’라고 이름 붙인 그 녀석은 실험실 유리벽을 20차례 넘게 들이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흰 벽에 붉은 피가 물감을 뿌린 것처럼 흩어졌다.

나는 이번에 발로 유리벽을 차려고 했다. 빅터의 안광(眼光)이 소름끼치도록 번쩍였다. 나는 그 직후 정신을 잃었다. 나의 뇌와 나의 육체의 신호다발이 한꺼번에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무너지듯 쓰러졌다.

에이오네가 뛰어 멀어진다. 꿈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생생하다. 해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에이오네를 만난 일이 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 마치 심장을 손으로 잡아 조이는 것처럼 강한 통증이 느껴진다. 마취도 없이 신체의 한 부분을 통째로 뽑아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 . .

나는 앉아있다. 나의 발목과 허벅지, 팔뚝과 손목은 가죽벨트로 단단하게 철제 의자에 결박되어 있다. 빅터의 목소리는 내가 발작이 왔을 때 보이는 증상을 설명한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5도 정도 기울인 채 침을 흘리고, 왼손 중지가 1초에 두어 번씩 까닥거린다고 한다.

내 시야에 빅터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웃지도 않고 심각하고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빅터는 내가 발작이 왔을 때 나타나는 증상을 퉁명스럽게 설명한다.

에이오네는 떠났다. 오늘인지 어제인지 일주일 전인지 알지 못한다. 떠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진처럼 선명하다. 에이오네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모래 바닥에 쓴 글씨가. 그 울음의 의미는, 그 포옹이 의미는, 기억하지 말라는 글씨의 의미는? 나는 알지 못한다.

빅터는 질문을 던진다.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문진’이라기보다 피의자를 향한 ‘심문’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래 바닥에 쓴 글씨는 무엇인지 캐내려 하고 있다. 빅터의 입가에 항상 자리 잡던 비웃는 미소조차 온데 간 데 없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을 반복했다. 에이오네의 붉은 입술, 그 위에 놓인 희고 긴 검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해변에 밀려와 돌아가지 못한 고래처럼 헐떡거렸다.


[ 밤 ] 

나는 섬에서의 밤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시간은 언제나 낮이다. 그런데 내가 눈을 떴을 때, 작은 창밖은 어두웠다. 깊은 밤이었다. 에이오네가 나의 곁에 있었다. 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오네는 나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댔다. 따뜻했다.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에이오네의 손이 이번엔 나의 가슴에 닿았다. 나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오네는 어떤 남자에 대해 말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는 울컥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갇혀있다고 했다. 구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완강하게, 에이오네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에이오네의 손이 닿았던 나의 가슴이 시큰거렸다.

에이오네가 작은 휴대장치의 버튼을 누르자 한쪽 벽면이 열렸다. 육중한 철제 문이 보였다. 입구는 그렇게 감춰져 있었다. 에이오네는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이오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해도, 지금처럼 손을 잡고 함께하는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철문을 지나자 복도로 통하는 길이 나왔다. CCTV는 평소와 달리 불이 꺼져있었다.

코쿤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밤 공기가 코끝으로 느껴졌다. 에이오네는 나를 재촉했다. 멀리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100미터쯤 지나자 낮은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에이오네는 나에게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단단한 검정색 물체를 주었다. 건물의 입구 양쪽에는 그 물건을 받아들일 홈이 있었다. 에이오네는 그 홈에 검정색 물체를 먼저 밀어넣은 뒤 나에게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을 요구했다. 신호에 따라 홈에 박혀있는 검정색 물체를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열쇠 기능을 하는 것 같았다. 두께가 6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육중한 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에이오네는 손전등을 들고 앞장섰다. 거대한 물고기 뱃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바닥에 도착했을 때 긴 복도가 나왔다. 장애물을 피하려고 좌우로 움직이는 에이오네의 손전등 불빛이 벽면을 가끔씩 비췄다. 원통형 유리관에는 뭔가 담겨 있었다. 에이오네는 그 안에 담긴 것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에이오네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깐 멈춰달라고 했다. 손가락으로 벽면을 가리켜 비춰보라고 했다. 에이오네는 시간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봐야겠다면서 손전등을 빼앗았다.

푸른 불빛이 유리관의 밑동을 비췄다. ‘지카 감염 실험체(Zika Infected Case)’라는 레이블이 보였다. 불빛을 더 위로 올리려고 할 때 에이오네는 나의 손목을 잡았다. 나는 뿌리쳤다. 발과 다리, 몸통이 보였다. 그것은 인간, 여자의 몸이었다. 여자의 머리는 눈썹 위로 절개되어 있었다. 에탄올에 담겨 본래의 모습을 잃었지만 왠지 기시감이 있었다.

에이오네가 다시 재촉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구해야 할 사람은 아마도 붉은 털 원숭이처럼 실험체로 붙잡혀 있을지 모른다. 곧 잔인하게 목숨을 잃어야 할 운명일 수도 있었다.

복도의 끝에 다시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발자국 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 어둠속 반대편 계단을 응시했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세 계단을 더 올라가다가 돌아보았다. 내 귀에는 내가 계단을 밟을 때 소리가 들리고, 시차를 둔 메아리처럼 다시 소리가 들렸다. 내 몸 밖 어디에 귀가 하나 더 달려있는 느낌이었다.


[ 질투 ]

에이오네는 먼저 계단 위에 올라가 있었다. 철문 오른쪽에 달려있는 숫자패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잠금장치가 열렸다. 푸른 조명이 켜졌다. 눈이 부셨다. 2m 정도 간격을 두고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이 문은 두 개의 검정색 물체를 양쪽 리더(reader)에 동시에 대는 방식으로 열렸다. 나는 궁금했다. 그 많던 경비들은 왜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일까? 두 번째 문이 열렸을 때, 상하좌우에서 증기가 뿜어졌다. 독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이중 유리문 안으로 뭔가 보였다. 아이오네가 구하겠다고 했던 대상일 것이다.

중환자실 같은 풍경이었다. 바퀴가 달린 침상위에 사람으로 보이는 몸이 누워있었다. 유리문은 버튼을 누르면 열리게 되어있다. 에이오네는 마지막 순간에 망설였다. 옷차림으로 보자면 에이오네는 이중문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흰 셔츠에 반바지 차림, 신발도 신지 않았다. 소독 약 세례를 받긴 했지만 멸균 처리된 가운과 신발, 장갑을 착용한 상태가 아니었다.

망설임을 끝낸 것은 나였다. 내가 버튼을 눌렀다. 기압 차이가 있었는지 ‘쉭’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나의 행동에 놀랐다. 그러나 에이오네가 비난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에이오네의 선택이었다.

에이오네는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의 시선은 에이오네가 아니라 침상 위에 누워있는 존재를 향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랐다. 나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에이오네가 사랑한다 말한 대상은 흉측한 존재였다.

남자의 머리는 두개골이 절반 이상 제거됐다. 투명 아크릴 캡이 두개골 대신 씌워져 있었다. 구불거리는 회백질의 계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수백 개인지 수천 개인지 알 수 없는 전극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특히 양쪽 정수리 부근, 편도체가 자리 잡은 부분에 여러 가닥이 연결되어 있었다. 족히 50세는 되어 보였다. 볼이 쑥 들어갈 정도로 야위었다.

입 안으로 두 개의 관이 삽입되어 있었다. 기도와 식도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아크릴 캡의 무게로 고개는 비뚤어져있고 오랫동안 침이 흘러나와 증발한 듯 입가에 흰 자국이 남아있었다. 몸은 더 형편없었다. 여러 날 곡기를 입에 대지 못한 몸처럼 앙상한 뼈 위에 겨우 거죽이 붙어있었다. 사후경직(死後硬直)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의심 될 정도였다.

나는 에이오네를 보았다. 에이오네는 나와 침상 위의 남자를 계속 번갈아 바라봤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 남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가시 돋친 질문도 잊지 않았다. 뜻밖에 내가, 에이오네를 다그치고 있었다.

남자와 연결된 복잡한 기계장치에서 ‘삐빅’ 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그런데 아주 익숙한 소리였다. 하루에도 여러 번, 수 천 수 만 번 들었던 소리였다.


[ 고백 ] 

에이오네는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스럽게도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의 질문에 아직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에이오네를 위해 뭔가 해야 했다. 나는 내 몸을 웅크리고 에이오네 앞에 앉았다. 두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를 재촉했던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에이오네는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했다.

서운했다. 나는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에이오네는 이별을 예고 없이 던지고 나를 떠났었다.

에이오네에게 쏟아내듯 질문했다. 누워있는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냐고. 나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도대체 무엇인 거냐고. 그 눈빛과 눈물, 나에게 닿았던 따뜻한 손길은 도대체 무엇이었냐고.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에이오네가 고개를 들었다. 결심이 선 듯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른 손으로 나의 왼손을 잡아 그녀의 팔뚝과 나의 팔뚝이 평행을 이루게 만들었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반짝이는 것. 깨어진 거울이었다. 에이오네는 망설임 없이 팔뚝의 중간부분을 날카로운 단면으로 그었다. 붉은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 선홍색 피가 새어나왔다. 이어 평행해 있는 내 팔에도 같은 행동을 했다.

아무 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의 피부는 양쪽에서 잡아당긴 고무장갑처럼 칼이 지나간 자리가 그대로 벌어졌다. 그 안에는, '피부'라고 생각했던 것 안에는 아이들의 장난감 상자를 들여다보듯 복잡한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겁에 질린 나를 바라보며 에이오네가 말했다.

침상 위에 있는 존재가 나라고. 나라고 생각한 건 기계의 몸이라고. 또 말했다. 에이오네는 로봇이라고. 피가 흐르는 몸을 가졌지만 로봇이라고.

에이오네는 뚜벅 뚜벅 침상쪽으로 걸어갔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내 마음이 깃든 몸을 사랑한다고.

에이오네는 침상 옆 복잡한 기계장치의 레버를 내렸다.

내가 쓰던 연구실에 어항이 있었다. 조명을 꺼도 그 어항은 은은한 초록색 빛을 냈다. 그런데 사라졌다.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일생과 같은 꿈을 꾸듯, 코앞을 고속열차가 와르르 지나가듯 태평양 깊은 해구 속으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듯 갑자기,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졌다.


[ 사랑 ] 

시간이 공간이 용해되었다. 애초에 한 점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나는 완전한 어둠속에 가라앉았다. 작은 점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그것은 바닥에 던져져 있는 몸, 침대 위에 놓인 몸 두 개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사지로 뻗은 신경 다발에서, 수 천 수 만 그 하나나의 말초에서, 생살을 뜯어내는 것 같은 격한 고통이 순간적으로 폭발했다. 수백 발의 총탄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내장과 사지를 삶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 하나 움직이기 어려웠다.

. . .

반쯤 뜬 눈으로 감금된 육체에서 외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의 시야에는 에이오네가 있었다. 내 몸이 누운 침상을 굴려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에이오네가 독백처럼 말했다. 곧 죽게 된다고. 가동을 멈추게 된다고.

혀와 턱의 근육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나는 에이오네에게 묻지 못했다.

에이오네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상냥한 유언같았다.

기계의 영혼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고 했다. 메인서버에 본체를 두고, 에이오네 몸에 심겨진 부분은 하드디스크 헤더처럼 메타정보만 갖고 있다고 했다. 에이오네의 기계 영혼은 심장 옆에 삽입되어 있다고 했다. 무선 네트워크에서 벗어나면 줄이 끊겨버린 연처럼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된다고 했다. 피와 림프액, 호르몬 등이 조절되지 않아 곧바로 거꾸러진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말 나를 사랑한 것임을. 인공의 마음이지만 영혼을 가진 존재였음을.

“사랑해요. 그리고 미안해요.”

바다는 고요했다. 하늘엔 두 번째 달, 블루문이 걸리고 바닷물은 푸르게 반짝였다.

겨우 숨이 붙은 나의 육체, 진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나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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