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부활의 서

2019.09.30 03:5309.30

머릿속에서, 나는 전능하다. 미쳐버린 발효 인형들을 손짓 한번으로 불살라 버리고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내 무사히 귀가하는 정도는 일도 아니다. 난장판이 된 영지를 정상화하는 일은 뭐, 아버지나 헨킬한테 맡기면 된다. ...헨킬은 무사할까. 아버지는?

 

현실에서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병약한 계집애다. 나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고 그때마다 아리스타벨라가 내 팔을 끌어 일으킨다. 업히는 게 낫지 않겠냐고 아리스는 말한다. 자기도 숨을 헐떡이는 주제에. 부러질 듯 가녀린 허리를 하고서.

 

입술을 사리문다. 이 무력한 몸뚱이에 갇혀 있다는 답답함을 오히려 연료로 삼아, 나는 뛴다. 운동능력의 한계에 달했다며 현기증을 피워올리는 몸의 신호 따윈 무시한다. 우리의 발소리는 우리 뒤쪽으로 무너져내리는 통로가 내지르는 어마어마한 고함에 묻혀버린다. 누군가가 먼저 통과하면 그 즉시 천정이 무너져 통로를 막아버리도록 설계되어 있는 듯하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무너져내릴 셈이야. 너무 과하잖아. 아버지의 편집광적인 성격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통로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장엄한 도미노처럼 붕괴의 행렬을 그을지도 모르겠다.

 

시야를 이끄는 발광이끼의 어슴푸레한 색이 마치 오로라 같다.

 

모든 건 그 빌어먹을 오로라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극북에서나 볼 수 있어야 할, 눈물 나게 화려한 천상의 옷자락. 그 정도쯤 되어야 신의 수의(壽衣)라 할 수 있겠지.

 

신은 죽었다. 부패하여 흩어진 신의 몸이 이제 이 세계를 덮치고 있다.

 

헐떡이다 혀를 깨문다. 입안에 퍼지는 피를 맛보며,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나는 비로소 실감한다.

 

 

 

1.

 

나의 사랑하는 칼리

 

여기서의 일은 거의 끝났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무덤의 마모가 심해서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발효 인형 몇 기를 이용한 네크로맨스로 보강해뒀으니 앞으로 20년은 멀쩡할 거라 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몸 건강한 네 모습을 보고 싶다. 나 없는 동안 무리하게 밖을 돌아다니거나 해서 안나를 곤란하게 만들진 않았겠지? 벌써 열다섯 살이나 된 네가 어린 망아지처럼 굴진 않으리라 믿는다. 누차 말하지만 네 어머니가 가고 난 후 너는 이 아비의 하나뿐인 심장이다. 부디 몸조리 잘하렴. ......

 

 

 

편지는 마침 점심을 마치고 방에서 쉬고 있을 때 전달받았다. 아버지의 필체가 구체적인 ‘몸조리’ 방법에 관해 끝도 없이 나열하며 이어져 갔지만 나는 쓱 훑기만 했다. 극북과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몇 개월 전에 부친 편지일 테고, 편지를 부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짐을 꾸렸다면 며칠 안에 노엄 비앙세 자작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이다.

 

나는 안나에게 일렀다. “아버지가 곧 돌아오신대. 헨킬에게 알려줘.”

 

네, 아가씨. 칼 같은 대답과 함께 방문 밖으로 나간 안나는, 그런데 돌아올 때는 헨킬을 대동하고 있었다. 노집사는 온화하게 아버지의 귀환에 관해 잘 전달받았음을 밝히고 본론을 꺼냈다.

 

“주인어른을 꼭 뵙고 싶다는 분이 찾아왔습니다만... 방금 전 치안대장으로부터 신원을 인계받았습니다.”

 

“치안대장한테서?” 나는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에클레스턴 수도회의 수도사라고 합니다. 인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에클레스턴의 수도사?”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의 혼란을 헨킬이 부드럽게 정리했다.

 

“어쨌거나 아가씨께서 직접 만나보시는 게 빠를 듯합니다. 안나를 데려가시지요.”

 

말할 것도 없이, 그럴 생각이었다. 헨킬이 내 앞길을 이끌었다. 안나는 내 뒤에서 발소리도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안누스카 페르델은 내가 어릴 적엔 내 유모였고 지금은 시녀이며, 그리고 항상 경호원이었다.

 

이방인이 정말로 에클레스턴 수도회 인장의 소유자고 비앙세 자작에게 중대한 용건이 있다고 했다면 치안대장이 처치곤란해했을 것도 이해가 간다. 인장은 움직이는 신성문자로 쓰여 있었을 테니 진품인 걸 알아봤겠지. 하지만 두문불출하는 수도사, 그것도 15년 전 대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적국’이라 부르길 서슴지 않는 에클레시아인이라면...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을 테다. 일단 위로 올려보낼 수밖에.

 

헨킬은 응접실 문을 열어 우리를 들여보내고 예의 바르게 퇴장했다. 묘한 이방인이 우리의 등장에 화들짝 뒤돌아보았다. 나는 자작 영애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그게 노아르크가 자랑하는 네크로맨스 시스템의 정점이랍니다.”

 

흐음, 에클레시아인 수도사에게 발효 인형을 그런 식으로 소개하는 건 오히려 놀리는 것처럼 들리려나? 에클레시아 법국(法國)은 네크로맨스 시스템에, 특히 발효 인형에 치를 떨었다. 죽은 몸뚱아리로부터 마력을 뽑아내어 에너지원으로 쓴다는 발상부터 끔찍한데 하물며 인간의 시체를 시종으로 ‘재활용’한다니. 더욱이, 네크로맨스는 근간부터 신성모독적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노아르크는 절박했다.

 

수도사는 여자였다. 피폐한 얼굴, 땟국이 흐르는 누더기. 그러나 아이스블루로 빛나는 눈망울은 쨍하도록 맑았다. 생각났다는 듯이 여태껏 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물빛 머리채가 인어 여왕의 꼬리처럼 우아하게 흘러내렸다. 나를 보고 수도사는 웃음 지었다. 민트향이 풍겨오는 듯 청량한 미소였다.

 

“듣던 대로 훌륭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서 이들... 발효 인형을 자주 보았어요.” 수도사는 우리가 들어오기 전까지 뜯어보고 있었을 발효 인형 ‘에이’를 힐끗했다. “방부처리도 잘되어 있고 움직임이 자연스럽네요. 혹시 말을 할 수는 있나요?” 유창한 노아르크어였다.

 

“단음절로 신음 같은 소리를 내는 경우는 있어도 의미가 통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저런, 그럼 의사 표시는 어떻게...?”

 

“빈 시체에 수행능력만 불어넣은 인형입니다. 그 자신의 의사 같은 게 있을 리 없죠.” 나는 자리에 앉았다. “비앙세 자작의 적장녀 칼레아 비앙세입니다.”

 

수도사는 허둥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아, 죄송합니다. 제 소개조차 하지 않고... 저는 에클레스턴 수도회의 보잘것없는 종 아리스타벨라입니다. 부디 아리스라 불러주십시오.”

 

매너에 관해서는 익숙지 않은 듯하나 거창하고 긴 이름 하며 몸가짐에 밴 기품이 귀족 출신임을 감지하게 했다. 속세를 버린 수도사니 가문명은 밝히지 않았겠지만 어쩌면 대귀족 출신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에이, 아가씨께 차를 내와라.” 내 등 뒤에 선 안나가 발효 인형에게 명령했다. 에이는 무표정하게 움직여 응접실에서 나갔다. 아리스타벨라 앞 테이블에는 마시다 만 차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안나의 눈치를 살폈다. 인상적인 흉터로 무뚝뚝한 얼굴을 장식한 거구의 여자가 시녀복을 입고 우뚝 서 있으니 신경 쓰이긴 할 거다.

 

“이쪽은 내 시녀 안나예요.” 시녀까지 소개할 필욘 없지만 노골적인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안누스카 페르델입니다.” 안나가 이어서 성명을 밝혔다. 아리스타벨라는 어색하게 까닥 인사했다.

 

“들으셨겠지만 비앙세 자작은 출타 중이십니다. 하여 제가 대신 용건을 들으려 합니다.”

 

아이스블루빛 눈빛이 침울해졌다. 그녀의 지친 얼굴이 절박함을 띠었다. 심상찮은 변화였다. 가느다란 손이 지저분한 로브 안쪽을 뒤져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몸수색을 충분히 했을 테니 위험물은 아닐 테고, 만의 하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안나가 뒤에 있다. 나는 평정한 채로 아리스가 가죽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미 아시리라 생각하오나 저희 에클레스턴 교단은 <구원의 서>를 제일 경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그 책의 단편만을 해석한 단장들로 이루어진 사본이라 해야겠으나.”

 

“천사 베시나가 집필한 예언서 말씀이군요. 하지만 신대(神代)의 천사어를 해독할 수 없어 극히 일부 내용만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리스가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탁자 위로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것이 <구원의 서> 원본입니다.”

 

무심코 앗 소리를 낼 뻔했다. 등 뒤에서도 동요한 기색이 느껴졌다. 테이블에 놓인 것은 주먹만 한 흑요석 덩어리처럼 보였다. 미간을 좁히고 자세히 살피자 검은 유리질 안으로 새겨진 빼곡한 무늬가 얼핏 보였다. 이것이 정말 대천사가 인간에게 내린 ‘책’이란 건가. 그렇다면 성유물, 그것도 에클레시아 법국의 국교를 지탱하는 상징이 내 눈앞에 있는 셈이다. 너무나도 거창한 가정이었다.

 

이 협잡꾼을 적당히 내쫓을 방법을 떠올리려는 찰나였다.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럼 진짜임을 아실 겁니다.”

 

천사어는 위조 불가능한 문자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그것이 신과 관계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뜻을 해독할 수 없어도 거기 담긴 신의 의지에 닿기 때문이다.

 

“아가씨.” 안나는 나를 저지하고 싶어 했다. 나는 팔을 뻗어 ‘책’을 잡았다. 촉감은 보통 돌덩이와 비슷했다. 그리고 들여다보는 순간, 우라 파스키야... 우라 파사나... 에 스베르테타 스키나...

 

“아가씨!”

 

힘이 빠진 손에서 ‘책’이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테이블 위에 떨어져 둔중한 소리를 냈다. 안나가 내 어깨를 부축했다. 현기증이 가시고 난 후에 그녀를 물리치고 아리스에게 말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좀 매섭게 들리길 원했지만 목소리에도 영 힘이 안 들어갔다. 책은 진짜였다. 진짜 성유물, 진짜 에클레시아 국보. 지금 무슨 폭탄을 우리 집에 내던진 거야, 이 여자는! 현기증이 가신 이후에도 싸늘한 오한이 몸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책이 노아르크에, 하필이면 비앙세 자작령에 있다는 게 들키면. 혈혈단신으로 찾아온 수도사가 상부의 허락을 받았을 리가 없다. 그랬다면 언질을 했을 테고. 틀림없이 ‘비인가된’ 단독행동이겠지. 이건 상식 밖의 사태다. 외교 분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대륙을 휩쓴 대전쟁이 15년 만에 다시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 여자는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겼을까? 에클레시아에서 보냈을 추적자들은 어디까지 냄새를 맡았을까?

 

아리스타벨라는, 대전쟁 재개라는 사상 초유의 폭탄에 불을 댕긴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담담하면서도 필사적이라는 모순된 상태를 띠고 나를 똑바로 향했다.

 

“제가 이 ‘책’을 자작님께 보여드리려 한 것은, 그분이라면 어쩌면 신대 천사어를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아버지가 천재인 건 맞는데.” 고상한 레이디인 척하던 가면이 떨어졌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신대 천사어를 해독하라고? 게다가 댁들 비장의 보물을?”

 

“에클레스턴으로서는 무리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아리스는 더욱 침울한 목소리로 자기 수도회의 염원을 딱 잘라 부정했다. 어느 수도회나 그렇겠지만 에클레스턴 수도회는 매우 폐쇄적인 집단이고, 그들은 읽히지 않는 제일 경전의 해독을 숙원사업으로 삼고 있다. 그걸 집단 밖의 인사에게, 그것도 노아르크의 귀족 노엄 비앙세에게 읽히겠다? 대단히 참신한 발상이긴 하다. “이젠 시간이 없습니다.”

 

“무슨 시간?”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 이건 식상하기 짝이 없는 레퍼토리로군. 그래도 에클레스턴 수도사가 한 말치곤 파격이다.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한 15년 전부터.”

 

“자작께서는 지금 극북에 가 계시지요, 아닙니까?”

 

정확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일 년쯤 전부터 노아르크를 비롯한 대륙 북부에서 ‘검은 세례’에 의한 사건 사고가 크게 늘었다. 이는 극북에 설치한 ‘무덤’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대륙 최고의 마학자가 나서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공표한 일은 아니지만 약간의 정보력과 눈치만 있다면 파악할 수 있는 스토리다.

 

“어쩌면 자택에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계시지 않는다면 극북밖에 없겠지요. 무덤이 기능하지 않을 테니까요. 앞으로도 결코.”

 

“앞으로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아리스의 어투가 딱딱해졌다. “당장 오늘 온 세상에 ‘검은 세례’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에클레스턴은 종말을 부정하는 입장입니다. 최근 발굴한 <구원의 서>의 사본 파편에는 종말의 양상과 대략적인 일시가 분명히 적혀 있었지만, 교단은 이를 감췄죠. 이 사실은 에클레시아 왕가도 모릅니다. 사본에 의하면 이 세상은 다음 계절을 맞이하지 못할 겁니다.”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시점이었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절기가 바뀐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이로군. 고생하며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습니까?” 속마음과 반대로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나는 얼떨떨했다.

 

“<구원의 서>엔 다가올 종말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이 적혀 있습니다. 사본에 명시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비앙세 자작님의 능력을 구하는 겁니다, 칼레아 비앙세 영애.”

 

불편한 분위기 속으로 똑똑, 건조한 노크소리가 끼어들어 왔다. 에이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리 없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다기를 내려놓았다. 쪼르륵 긴장감 없는 소리와 함께 풍부한 향기가 피어올라 코를 간질였다.

 

“모두 죽습니다, 영애.”

 

움직이는 시체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들이 시야 끄트머리에서 미끄러지는 가운데 아이스블루빛 눈망울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있는 것 모두 죽습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한때 살아있었던 발효 인형은 무념무상한 얼굴인 채 차를 대접하고 물러났다. 내가 좋아하는 허니밀크티였다. 하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침묵이 응접실 공기를 내리눌렀다.

 

정말 뜬금없게도, 나는 아이스블루빛 눈을 가진 이 에클레시아 수도사가 매우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

 

“속셈을 불게 만들까요?” 안나는 특정 단어를 강하게 발음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관둬. 안나가 족치다간 뼛조각도 안 남게 생겼던걸. 어차피 곧 아버지가 돌아오실 거야. 판단은 천재 마학자님께 맡기면 돼.”

 

“<구원의 서>인지 뭔지가 진품이라 하더라도 저 여자가 정말로 에클레스턴 수도사일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 이름을 밝혔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불필요하게 성씨까지 말했었지. 안누스카 페르델은 전쟁 영웅이다. 기사였던 그녀는 남부연합의 장수들을 베었고 전략 거점들을 유린했다. 그녀가 올린 전과에는 에클레스턴 수도사들이 참전했던 전투에서 얻은 것도 있었다. 안나의 말은, 수도회의 체면을 박살 낸 특별한 여기사에 대한 전승을 그 수도사가 들어본 적 없다는 게 이상하다는 소리였다.

 

“스스로의 명성에 지나치게 자신을 갖는 거 아냐? 전쟁사에 딱히 관심이 없는 걸 수도 있지. 아니면 수도회가 자기들 수치라고 쉬쉬했거나. 어쨌든 벌써 15년 전의 일이잖아.”

 

눈앞이 가물거렸다. 비틀거리던 나는 안나의 단단한 몸에 부딪혔다. 안나가 내 어깨를 감싸고 천천히 걸었다. 오늘은 밖에도 나가지 않았고, 딱히 한 일도 없는데 약해빠진 몸에 과부하가 걸렸다. 물론 에클레시아에서 온 손님 때문이다. 거창하고 극단적인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 심신을 두들겨 팼으니까. 미열을 자각한 나는 짜증이 솟았다. 또 밤새도록 끙끙 앓고 싶지 않았다.

 

“데운 우유를 가져오겠습니다.”

 

나를 내 방 침대에 눕히고 커튼을 친 후 안나가 자리를 비웠다.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시각이었다. 뭐라도 읽을까. 그러고 보면 에클레시아 분파에 관한 책이 몇 권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책장을 채우다 못해 바닥까지 난잡하게 점령한 책탑들을 흐릿하게 훑어보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신을 믿는다. 대륙과 섬에 사는 모든 인류는, 심지어 이단이라 불리는 미치광이들조차 신의 유일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대천사들이 전해준 경전 중 무엇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분파가 갈리는데, 에클레시아 분파와 노아르크 분파의 결정적인 차이는 마력에 대한 입장이었다. 마력은 대기에 남은 신대 천사들의 힘이라 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륙 북부의 대국 노아르크는 마력이 풍부했고 이를 아낌없이 이용해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에클레시아 분파에서는 천사의 힘을 인간이 남용하는 일을 경계했다. 애초에 대륙 남부에선 마력도 잘 돌지 않았다. 에클레시아 법국을 추축국으로 하는 남부연합 구성국들은 인간과 사물의 힘으로 문명을 쌓아 올렸고 이를 인리학이라 불렀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만 해도 노아르크의 대기엔 마력이 충만했다. 남부연합이 나무를 태우고 수차를 돌리고 전기를 만들어내는 등 온갖 에너지원을 시험하며 발버둥쳐 왔다면 노아르크는 천년만년 마력을 퍼마시며 잔치를 하고 있었다. 남부연합이 싸움을 걸어왔을 때 국왕은 헛웃음을 쳤다고 한다. 노아르크인은 자신들이 대승리를 할 것으로 믿었다. 하늘에 뜬금없이 오로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왕도의 밤하늘에 극채색 오로라가 일렁거렸다. 극북에만 나타난다던 신성한 현상이었다. 오로라는 전장에서, 고지에서, 계곡에서, 시장에서, 시골 마을에서,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력이 사라졌다.

 

공기에 충만하던 마력이 말끔히 사라지고 오로라로부터 신의 부해(腐骸)가 떨어져 내렸다. 무시무시한 악취가 나는 검은 입자가 바람결을 타고 사람들의 폐로 흡입되었고 일정량 이상 받아들인 사람은 끔찍한 계시를 보았다. 신의 죽음과 부패의 참상을 강제로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중 많은 이가 발광했고, 다시 그중 많은 이가 서로 죽였다.

 

환란은 노아르크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마력이 희박한 대륙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오로라가 나타났고, 검은 세례를 맞았다. 전쟁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각국은 급히 종전협정을 체결했고 사태 파악과 해결책 모색에 매달렸다. 필연적인 종말론이 전 대륙을 휩쓸었다.

 

신이 죽었다... 살아계시던 신이 죽어 부패했다... 죽음의 승리, 악의 승리다. 신대 이후 그분이 지상에 관여하는 일은 딱히 일어나지 않았다. 신은 인류의 역사를 고스란히 인류에게 맡기고 자신은 천상에서 기나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휴식이 아니라 쇠락을 의미한 거라면? 그때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세계의 종말을 부르짖는 이단 분파의 설이 저잣거리에서 속삭여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근원인 신이 죽었으니 이제 이 세상도 죽을 것이다. 모두 죽어 썩어빠질 것이다. 내세도 구원도 없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흔드는 새 안나가 돌아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우유를 홀짝이자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으슬으슬 오한이 돋았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라면 자는 동안 나을지도 모르겠다. 안나가 내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제 자라는 뜻이었지만 나는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종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는 푹신한 베개에 등을 묻고 앉아 물었다. 안나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딱히 어떻게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생각이 전혀 없어?”

 

“15년 전에도 종말, 종말 시끄러웠지만 결국 어떻게든 넘겼지요. 극북에 ‘신의 무덤’을 설치했고 검은 세례의 피해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마력을 대체할 네크로맨스 시스템도 개발됐고요. 설령 저 에클레시아인의 헛소리가 진실이라 한들 이번에도 어떻게든 될 겁니다. 주인어른 같은 분이 건재하니까요.”

 

“낙천적이네.”

 

“신이 죽었다고 세상이 죽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부모가 죽었다고 그로부터 삶을 받은 아이까지 따라 죽는다? 그건 아니지요.”

 

사람은 신의 아이인 셈인가... 아이... 어머니. 내 어머니는 나를 낳고 죽었다. 자칫하면 나는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 자작부인이 정원을 산책하는 사이 영지에 오로라가 나타났다. 그녀도 수행하던 시녀들도 모두 광란에 빠졌다. 유일하게 일찍 정신을 차린 게 안나였다. 안나는 의식을 잃은 자작부인을 저택으로 데려왔다. 어머니는 신의 죽음에 휩싸인 채 몸부림쳤다. 그사이 양수가 터졌다. 몇 시간 후 내가 태어났고 어머니는 죽었다.

 

“검은 세례를 맞았을 때 어땠어?”

 

철든 이후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긴 흉터가 비스듬히 지른 안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목석같은 미간에 주름이 서 있었다.

 

“끔찍했지요.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도 검은 세례를 받았겠지.”

 

“오로라 아래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경험했을 겁니다.”

 

“나한테도 검은 세례가 내렸을까? 나 그때 태어났잖아.”

 

“글쎄요. 하지만 아가씨는 저택 안에 계셨고,” 안나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살풋 미소 같은 걸 띠는 듯했다. “태어나시느라 바쁘셨으니까요. 죽음을 경험하실 여유는 없으셨을걸요.”

 

안나식 농담이었다. 뭔가 석연찮은 여운을 남기는 서툰 농담. 안나의 말대로라면 검은 세례를 맞은 어른들은 모두들 그때 이미 한번 죽음을 경험한 거겠지. 어머니는 거기서 영영 깨어나지 못한 거고...

 

“내 몸이 이런 건? 검은 세례와 관계없을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두꺼운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서늘하고 상냥한 감촉. 안나는 내 볼품없는 갈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인어른께서도 모르는 일을 제가 알 수 없지요. 이제 주무십시오.”

 

내 이마에 입 맞추는 안나를 붙잡고 싶었다. 흐릿하고 혼란스러운 꿈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탈이 나는 이 같잖은 몸뚱아리를 벗어던지고 전능감에 취해 날아오르는 감각이 잠에서 깬 나를 얼마나 서글프게 만드는지 고백하고 싶었다. 기억나지 않는 꿈의 영역에서 나는 왕보다 존귀하고 아버지보다 똑똑하며 안나보다 강인했다. 그리고 아마도 아리스타벨라보다 아름다운 존재...

 

그녀는 지금쯤 손님 방에서-말이 ‘손님 방’이지, 창 하나 없는 데다 문은 밖에서만 잠기지만- 한창 목욕 중이겠지. 네크로맨스로 밝힌 등불 아래 네크로맨스로 데운 물에 잠겨서. 스스로 작동하는 변기를 보고 비명을 지르지나 않을까... 밤엔 자작부인의 잠옷을 입고 잠들 것이다. ‘손님’에게 하녀들의 옷을 내밀 수 없었다. 옷방에 처박혀 있던 안주인의 옷가지가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맞았다. 헨킬은 아리스가 돌아가신 안주인과 체형이 비슷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키가 크고 늘씬했다.

 

안나는 내 방에서 불침번을 선다. 이국의 손님이 암살자로 돌변할 것을 우려해서. 안나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아리스가 내게 찾아올 거란 어렴풋한 예감이 들었다. 책 먼지 냄새나는 방이 아니라, 내 꿈속으로.

 

 

 

3.

 

비앙세 자작은 노아르크에서 손꼽히는 자산가다. 공작가의 까마득한 방계인 가문은 바로 전 세대까지 빈약한 영지에서 가난에 허덕이던 시골 귀족가였다. 영민들은 평범하게 임업이나 농업으로 먹고살았고 가끔 신대 유적으로 순례 오는 신심 깊은 노인들을 등쳐먹는 재미 정도를 볼 뿐이었다. 지금도 귀족 사회에서 비앙세 자작가의 입지는 높지 않다. 노엄 비앙세라는 한 명의 천재가 특별 취급을 받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전쟁 중엔 마도구 팔이로, 전후엔 네크로맨스 시스템 개발로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았다. 지금 비앙세 영지의 주력상품은 발효 인형이다. 아버지는 영지 안의 황무지에 발효 인형 공장을 세웠다. 공장 주변으로 환락가가 생겨났다. 늙은이들이 매일같이 술집에 모여 노엄 자작이 젊은이들 버릇을 망쳤다고 욕할 수 있는 것도 발효 인형이 벌어다준 풍요 덕분이다.

 

아리스의 눈에서 커다란 아이스블루색 구슬이 톡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제보다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그녀는 발효 인형들의 몸짓에 몰두하고 있었다. 에이와 사이, 테이는 작년 공장에서 출시한 최고급품들이다. 최고급 모델에는 하인으로서의 기본 기능은 물론 고객의 교양적인 욕구를 충족할 만한 부가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 춤과 악기 연주가 그중 하나다.

 

내구연한이나 떨어뜨리는 쓸데없는 기능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리스를 보고 있으면 뭐 나쁘진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아리스타벨라를 손님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업적에 관해서 궁금해했고, 나는 최고 걸작품의 최고급 기능을 선보였다.

 

시체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매끄러웠다. 한계를 느끼게 하지 않는 우아한 동작들은 인체 각부를 극도로 효율적으로 제어한 결과였다. 아버지는 발효 인형의 춤이 왕도 최고의 무용수보다 기술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시체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는 우월함을 넘어 완벽했다. 아버지의 표현으론 신성한 정확함을 따르기 때문이었다. 의지와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현의 마지막 음이 신성한 정확함으로 공기를 울리고 여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두 기의 발효 인형도 얼음 위를 미끄러진 칼날이 멈추듯이 동작을 마무리했다. 한 박자 침묵을 사이에 두고 열렬한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리스는 눈에서 별빛을 튀기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아아, 신의 영광이여! 제가 경험해온 그 어떤 공연보다 아름답습니다! 마치... 신대 천사들의 춤과 음악이 이러했을까요!”

 

에클레시아인은 다들 네크로맨스에 질색한다고 알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실제를 경험하지 않으면 편견을 극복할 수 없다. 이 자칭 에클레스턴 수도사는 발효 인형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저희 수도회 본성은 국경지대에 있습니다. 노아르크식 마학에 관해 접할 기회가 많았죠.” 내 마음을 읽은 듯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에클레시아에선 마력에 의한 사용을 제한했지만 아예 못 쓰는 건 아니었다. 대기에 마력이 떠돌 시절 수도사는 마학자나 마찬가지였다. 노아르크와 접한 국경지대는 마력 농도가 비교적 높았으니 수도회 안에선 나름대로 마학이 발달했을 것이다. 15년 전까지는. 모래성이 무너지기는 한순간이라지만 큰 것이 작은 것보다는 오래 버틴다 했다. 어느 나라에서든 종교기관이란 아직 다 무너지지는 않은 모래성일 뿐이다. 경전과 신대 연구의 권위를 쥔 전문가 집단이라고 면피하는 정도.

 

“네크로맨스를 연구하는 게 들키면 교리 위반이라고 엄중 처벌받지만요.”

 

“안 들키면 되는 일이로군요.”

 

“그렇게 들렸나요?”

 

아리스가 살짝 혀를 내밀었다. 우유를 핥는 새끼 고양이가 떠올랐다. 약간의 화장을 하고 자작부인의 로브를 걸친 아리스는 동화 속 요정 공주처럼 보였다. 어제는 그야말로 종말의 사도처럼 피폐했지만, 충분한 휴식 덕분인지 오늘 그녀는 생기가 돌았다.

 

시선을 찻잔으로 내려. 이성이 명령했지만 내 눈은 듣지 않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요. 다만.” 그제야 찻잔을 보았다. “수도사처럼 생기지 않았군요.” 제기랄,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나는 웃으며 다시 얼굴을 들었다.

 

“실례했어요. 당신의 얼굴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답니다. 수도사로 평생을 지내기엔 아까울 정도로.”

 

“아...” 그녀는 눈빛을 이리저리 굴리며 허둥거렸다.

 

“게다가 이렇게 젊으신데 수도회에선 꽤 높은 자리에 계셨던 게 아니신가요? <구원의 서> 원본을 손에 넣었을 정도라면.”

 

그냥 너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한 셈이었다. 일개 수도사가 엄중히 다뤄질 교단의 성물을 어떻게 빼돌릴 수 있었던 걸까? 언외언을 눈치챘는지 아리스의 얼굴이 단숨에 흐려졌다. 이번에 고개를 돌린 건 그녀였다.

 

“저는 일개 중급 수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원장님의 호의로 ‘책’의 번역 연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발굴된 사본의 내용에 관해서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입니다. 저는 원장님을 독대해서 딱 하룻밤만 책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드렸고,”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켜고 빠르게 말을 몰아냈다. “원장님께서 원하신 것도 제 하룻밤이었습니다. 값싼 대가였죠.”

 

형식상의 사교계 데뷔는 마쳤지만 아픈 몸을 핑계로 방구석에서 책이나 읽고 앉아있는 게 생활의 전부인 나였다. 여기서 사교적으로 적절한 말을 떠올려내는 건 내 역량 밖의 일이었다. 젠장, 정말 폭탄 던지기에 일가견이 있는 여자네.

 

“죄송합니다. 고결한 영애의 귀를 더럽히는 소리를...”

 

“아니에요. 당신의 아픔을 건드린 제 경솔함을 사과하겠습니다, 아리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했다. 아리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발효 인형들의 공연에 열중하고 있었던 때도 이런 얼굴이 아니었던가? 스멀스멀 낯이 뜨거워지려 했다. 뒤통수도 간지러웠다.

 

“영애께서는... 훌륭하시군요.”

 

“엥?”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영애답지 않은 감탄사를 내뿜어버렸다. “흐, 흠흠.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제 참람한 고백을 들으시고도 오히려 제게 고개를 숙이시다니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적은 연치가 무색할 만큼 현명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럴 땐 정말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 뭐 딱히, 하고 얼버무리며 머리라도 긁적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로 뒤통수 간지럽기도 하고. 내 뒤에 선 안나가 거길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기라도 한 걸까.

 

“이리 과찬을 해주시다니...” 간지러워 죽겠네. “후우. 잠시만요, 잠깐 머리 좀 긁을게요.”

 

“네?”

 

나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슬슬 결리려던 참이었다. 뒤통수를 마음껏 긁자 좀 살 것 같았다. 안나가 흡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건지 웃으려다 참은 건지. 아리스는 고귀한 자작영애의 칠칠치 못한 행실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얼어붙었다.

 

얌전 빼고 앉아있기도 지쳤다. 나는 손톱을 후후 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이나 좀 할까요? 소박한 정원이지만 장미만은 향기롭답니다.”

 

안나는 내가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게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무시했다. 아리스는 아마 정원이 아니라 발효 인형 공장을 견학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봐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 계절에 무르익는 장미 정원을 함께 거니는 정도는 괜찮겠지.

 

이 계절 낮에 비앙세 영지의 햇살은 북부에서도 살벌한 편이지만 오늘은 새하얀 구름떼가 볕을 누그러뜨리고 바람이 열을 식혀주었다. 찔레덩굴의 애무로 장식된 아치가 방문객에게 미소를 건넸다. 아치를 넘으면 선명한 녹색과 붉은색을 아낌없이 쓴 살아있는 그림이 펼쳐졌다. 고혹적인 향이 가슴을 채우고 귓가에서 취한 날벌레가 붕붕거렸다.

 

왕도에 있는 귀족들의 취미생활에 비하면 그야말로 소박하다고 할 만한 규모였다. 그러나 완벽하게 다듬어진 미적 완성도만은 왕비의 정원에 필적할 것이다. 발효 인형 정원사의 솜씨다.

 

“아아, 북부의 장미는 정말 고상한 모양새로군요.” 아리스는 눈을 빛내며 길가의 장미에 얼굴을 들이댔다. “크기는 약간 작지만 형태가 단정하고 향이 훨씬 짙어요. 어머, 잎사귀의 모양도 다른 것 같군요.”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스가 손차양을 하고 문득 남쪽 저편을 바라보았다. 탁 트인 벌판 한가운데 거대한 돌기가 불거져 있었다. 자연물이라기엔 너무 정연한 모양새인 그것은 모래를 흘려 만들어진 완만한 원뿔과 비슷했다.

 

“‘비앙세’는 옛말로 거대한 모래탑이라는 뜻이에요. 저 유적의 이름이 그대로 지명이 된 거죠.”

 

“비앙세 대유적. 실제로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앙세 유적은, 대부분의 신대 유적이 그렇듯이 무슨 목적에서 어떻게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건축물이었다. 영민들은 성지순례자의 겸허한 호주머니를 터는 데 유용한 상징 정도의 의미를 두었다. 가끔 이단 찌끄러기들을 불러모으기도 했지만.

 

“전 대륙에 일곱 개밖에 없는 대유적...”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종말이 가까워지면 일곱 대천사가 강림하여 땅에 떨어진 영광을 다시 세우리라.”

 

“이단의 예언에도 조예가 있으셨군요. 그 종말의 대천사 설을 숭배하는 미치광이들이 가끔 유적지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합니다. 대유적은 천상의 대천사가 내려올 곳을 표시한 지표라면서요.”

 

“과연 저 정도 규모라면 하늘 위에서도 잘 보일 것 같네요.”

 

그리고 아리스는 말없이 걸었다. 뭔가 마땅찮은 점이라도 있는 걸까? 훔쳐본 옆모습은 난해한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태양이 한층 더 두꺼운 구름을 덮었는지 주변이 훅 어두워졌다.

 

“에클레스턴에선 공식적으로 네크로맨스 시스템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수도사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다시금 혼잣말하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신의 시체에서 마력을 뽑아내는 시스템. 영애의 아버님께선 검은 세례로 죽은 동식물들의 사체에서 검은 마소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하셨고 이는 기존의 마력체계와도 거의 완벽히 맞았했습니다. 심지어는 더 뛰어난 점이 있었지요. 시체를 되살릴 수 있었으니...”

 

“되살린다기보다는 움직이게 만드는 거죠.”

 

네크로맨스 시스템에 관해선 나도 잘 모르는 점이 많다.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은, 특히 ‘왜’ 검은 마소를 주입한 시체가 다시 움직이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버지도 모른다. 해보니 됐다는 정도의 이해가 있을 뿐이었다. 몇 가지 가설은 세우고 있지만... ‘발효’ 인형이라는 명칭은 아버지의 극히 뒤틀린 유머감각에서 기인했다. 죽어서 변질됐지만 못 써먹게 부패한 게 아니라 유용하게 발효된 거라고.

 

“검은 세례와 함께 출현하는 오로라에서 힌트를 얻어 자작님은 극북에 신의 유해 본체가 있다고 추측했고 그곳에 무덤을 세움으로써 유해가 흩어지는 현상을 억제했습니다. 그리고 발효 인형들로 하여금 검은 마소를 정제하는 작업을 맡겼지요.”

 

뻔한 소리를 굳이 하는 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일까.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 악마의 행위라는 반발이 상당히 크긴 했다죠.” 하지만 네크로맨스 시스템을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생활을 좀 편리하게 할 것인가 불편을 참을 것인가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국가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 인리학이 발달한 에클레시아와 마력 의존도가 높은 노아르크는 사정이 달랐다. 신의 죽음마저 착취하는 무도함에 대한 죄의식과 공포는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불식되었다. 네크로맨스가 이단이라면 노아르크 전국민이 이단의 사도다.

 

“감히 노아르크 분들을 비난하자는 게 아닙니다. 극북의 무덤이 세워짐으로써 다른 나라들 또한 검은 세례의 재앙에서 벗어났으니까요. 다만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구원의 서>에 예언되었으므로 종말은 진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크로맨스는 어쩌면 종말로 이르는 섭리의 일환이 아닐까.”

 

“그게 무슨 뜻이지요?”

 

“‘신의 죽음’이 더욱 널리 퍼지게 만들기 위한, 그리하여 종말을 초래하기 위한 한 단계가 아닐까 하고요.”

 

“...일단 섭리의 주체인 신이 죽은 이상 그것이 ‘무엇’의 의지인지의 문제가 있겠고.” 나는 반사적으로 주절거렸다. “네크로맨스 시스템이 아니더라도, 검은 세례만으로 산 것을 말살하기 충분하지 않나요? 오로라만 펄럭이면 될 일이죠. 오히려 번거로워요.”

 

“잘, 모르겠습니다. 영애의 말마따나 섭리의 주체는 이제 없으니까요... 제 알량한 생각을, 제 감정을, 제 존재조차 무엇에 근거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장미나무들이 파스스 수런거렸다. 주변이 아까보다 어두운 걸 눈치챘다. 비라도 오려나. 내 옆에는 어김없이 안나가 있었다. 나보다 한발 먼저 고개를 든 안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가씨, 코와 입을 막으세요!”

 

뒤늦게 하늘을 확인한 나는 안나의 다급한 외침을 배반하고 숨을 헉 들이쉬었다. 저녁처럼 어두운 중에 초록색과 붉은색, 마치 하늘의 장미 정원과도 같은 색채가 음악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장미향에 섞여 희미한 썩은 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강철이 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비명을 지를 틈도 주지 않고 안나는 나를 옆구리에 낀 채 저택을 향해 돌진했다. 반대편 옆구리에는 아리스가 마찬가지로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도 안나는 거치적거리는 장미나무를 휙휙 넘어 최단거리를 달렸다.

 

“오로라다! 창문을 닫고 틈을 막아!”

 

저택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도 지지 않을 사자후였다. 안나에게서 풀려난 우리는 그녀의 팔에 눌린 배를 문지르며 한참 켁켁거렸다. 현관 근처에 있던 인간 시종들은 허둥거리며, 발효 인형은 매끄럽게 창문과 틈새를 찾아 흩어졌다.

 

헨킬도 상황을 파악하고 일사불란하게 지휘했다. “다들 공기주머니부터 써! 지하실에서 흙을 퍼와라. 물에 개어서 창틀에 발라. 굴뚝은 겨울 이불을 뭉쳐 틀어막아!”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로라... 말로만 듣던 재앙의 징조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꿈결같은 기분이 밀려왔다. 분명 처음 보는 것인데도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 어머니가 보았기 때문일까.

 

왼손이 따스하고 축축한 감촉에 감싸였다. 고개를 돌리자 사색이 된 아리스의 옆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제가 내 손을 꼬옥 잡은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헨킬, 나도 도울게.”

 

노집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주인어른을 뵐 낯이 없습니다. 아가씨와 아리스타벨라 님께선 창을 다 막을 때까지 지하에 계십시오.”

 

 

 

4.

 

저택에 창문이 몇 개나 되더라? 기후가 온화한 편인 비앙세 영지의 주택은 여닫이창을 많이 내는 편이었다. 우리 집은 자작부인이 검은 세례의 피해를 당한 이후 상당수를 붙박이창으로 바꿨다가 무덤이 설치되자 모조리 되돌렸다. 오늘은 날씨가 선선해서 대다수가 열려 있었다.

 

“별일 없을 거야.”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지만 내 귀에는 불안감의 표현으로 들렸다. 공기주머니를 쓰면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집 안에 검은 마소를 공급하는 발전기가 웅웅거렸다. 본체로부터 천장을 향해 뻗은 파이프에서 작게 통통통 소리가 났다. 지하실 안은 습기 차고 답답했지만 마력 전등 덕분에 대낮처럼 밝았다. 검은 마소로 온갖 혜택을 누리는 주제에 검은 세례를 피하려고 필사적인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술 저장고에 등을 대고 하인들이 깔아준 모포 위에 앉아 있었다. 한동안 하인들이 흙을 푸러 들락거렸지만 어느새 발길이 멎었다. 안나는 여기 없었다. 정신이 없어서 내가 손님과 단둘이 있다는 것도 까먹은 것 같았다. 곧 허겁지겁 내려오겠지.

 

“영애, 몸이 너무 뜨거워요. 괜찮으세요?”

 

나는 모르는 사이 아리스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긋나긋한 팔이 내 어깨를 감쌌다. 안나와는 전혀 달랐다.

 

“괜찮아요.” 내 입김이 뜨거웠다. 예의 바르게 뿌리쳐야 하는데, 아리스의 감촉이 너무 기분 좋았다.

 

“힘들어 보이셔요. 좀 더 제게 기대세요.”

 

나는 잠자코 아리스의 말에 따랐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물빛 머리칼이 오로라처럼 넘실거렸다.

 

“어째서 오로라가... 아버지는 무덤을 거의 고쳤다고 했는데.”

 

나의 중얼거림에 아리스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무덤이 더이상 기능하지 않으리라고 했었다. 우리 머리 위에 도사리고 있을 오로라가 그 증거가 되는 셈이었다. 그럼 아버지는? 극북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극북 베이스캠프엔 공기 파이프를 매장해 놓아 외부의 공기를 끊임없이 공급받는다고 했다. 예상치 못하게 귀환이 늦어진다 하더라도, 파이프만 이상 없다면 무사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다. 이번에는 스스로 고개를 흔들었다. 극북과의 거리를 잊으면 안 된다. 편지를 보낸 아버지는 이미 출발했을 테고 지금쯤 영지 근처까지 왔을 것이다. 아버지가 무덤에 손대고 있을 때만 해도 상황은 순조로워 보였으리라. 문제가 발생한 건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이다. 이게 내가 믿어야 할 시나리오였다.

 

“자작님께선 곧 돌아오실 거예요.”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듯한 위로였다. 내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쨍하게 맑은 아이스블루빛 눈이 오묘하게 빛났다. 아리스가 내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 같은 건 미열에 녹아 흩어져버렸다. 내가 보는 건 자애와 다정함뿐이었다.

 

“칼레아 영애...?”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리스가 나를 불렀다.

 

“칼리라고 불러요.”

 

아리스의 볼에 홍조가 물들었다. “칼리 영애.”

 

“‘영애’는 빼도 돼요. 그렇게 불리면 정말 고상한 영애인 척해야 할 것 같다고요. 성질에 안 맞거든요.”

 

“어머나. 그럼 칼리 님...”

 

“‘님’도 됐어요.”

 

나는 오물거리는 그녀의 입술에 집중했다.

 

“칼...”

 

그 순간이었다. 콰당! 머리 위에서 큰 소음이 들렸다. 우리 둘의 어깨가 동시에 튀어올랐다.

 

“무슨 일이죠?”

 

나는 아리스의 품에서 벗어나 위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쿠당탕, 뒤이어 뭔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계단으로 달려갔다.

 

“아무 일 아닙니다! 거기 계세요!”

 

내가 올라오는 기척을 들었는지, 문고리를 잡기 전에 헨킬의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멈칫하고 망설였다. 소음엔 하인들의 외침도 섞여 있었다.

 

“테이, 멈춰!”

 

“발효 인형이...!”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지하실에도 여분의 공기주머니가 있었다. 가죽부대와 마스크에 앉은 더께를 털고 펌프를 뒤져내 부대에 공기를 넣었다. 부대는 겨울잠 자기 직전의 곰처럼 부풀어 올랐다. 옆을 보니 아리스도 나를 따라 열심히 펌프를 밟고 있었다. 우리는 부대를 등에 메고 마스크를 썼다.

 

나는 지하실 문을 열고 중앙 홀로 뛰쳐나왔다.

 

“아가씨!”

 

들린 건 안나의 목소리였지만 보인 건 테이의 창백한 얼굴이었다. 아니, 창백하지 않았다. ‘용모단정한’ 최고급 발효 인형의 입가가 새빨갛게 더러워져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그 눈이 나를 인식하는 것 같다고 느낀 순간, 테이가 슥 다가왔다. 대응할 수 없이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얼어붙은 내 뒤에서 아리스의 비명이 들렸다. 가죽 마스크에 뭉개진 음성이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고, 쇳소리가 바람을 갈랐다. 그것이 테이의 목까지 갈랐음을 깨달은 건 다음 순간이었다. 테이의 자세가 덜컹거렸고 조막만 한 머리가 흔들리며 툭 떨어졌다. 그리고 몸체가 큰일을 사죄하듯 무너져 내렸다.

 

안나가 검을 내던지고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풍성한 시녀복 치마 아래 패검하고 있었다. “아아, 아가씨! 무사하신가요?”

 

“어, 어어.” 나는 무사한데. 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안나의 어깨너머로 가죽 마스크로도 숨길 수 없는 경악과 피폐를 띤 하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호를 받는 하인의 모습도.

 

“왜 나오신 겁니까! 안전해질 때까지 지하실에 계... 앗!”

 

안나가 나를 다시 떼어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얼어붙은 채 턱을 조금 기울여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테이의 잘린 머리가 안나의 발목을 물고 있었다.

 

“이게!”

 

안나가 다른 발로 테이의 머리를 밟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 계세요!”

 

안나가 나를 밀었다. 아리스까지 떠밀려서 우리는 다시 지하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공기주머니를 벗고 망연자실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건 도대체...”

 

“발효 인형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아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분석했다. “영애께 다가온 발효 인형의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사람을 공격한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불가능해요. 발효 인형에겐 의지와 욕망이 없어요. 특정한 사람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지. 누가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리도 없고, 스스로 사람을 다치게 한다니... 말도 안 돼요.”

 

나도 알았다. 그렇게 부정해 봐야 현실은 엄연하다는 것을. 방금 내가 경험한 강렬한 해프닝이 아리스의 추측이 맞음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빌어먹을 현기증이 덮쳐왔다.

 

“영애!”

 

“칼리라고... 부르라니까.”

 

“칼리, 정신 차려요.”

 

“이제야 정신이 드네요.” 허세였다. 아리스에게 부축받은 내 몸은 금방이라도 끈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무너질 것 같았다. 무거운 머리가 달랑거렸다. 테이의 목이 떨어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아리스가 내 등을 두드렸다. 그만해요, 괜찮아, 괜찮아. 나는 기다시피 해서 모포 위에 올라가 누웠다.

 

기분은 최악이었지만 이 각도에서 올려다보는 아리스의 얼굴이 아주 멋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애. 다정함. 우려. 그리고... 발효 인형에게 없는 것. 의지와 욕망. 생명. 아리스는 발효 인형의 공연에 매료되었다. 훨씬 아름다운 것을 이미 갖고 있는데도. 그녀 자신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예술작품인데도.

 

기분이 자꾸만 이상해졌다. 아리스타벨라를 바라보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열기로 일그러진 시야에서 그녀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괜찮아요. 다 괜찮을 거예요.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언가 속삭였다. 아니. 내 귓가에서 맴도는 이 목소리가 정말로 아리스의 것인가? 뭐라고 하는 거지? 우라 파스키야, 우라 파사나... 에 스베르테타 스키나 드라사타 콤 마텔라...

 

덜컹. 지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를 깨웠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안나와 헨킬이 내려왔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창문과 굴뚝을 전부 막았습니다. 오로라도 아까보다 희미해졌습니다. 머지않아 소멸할 것 같습니다.”

 

헨킬이 보고했다. 안나는 붕대를 감은 발목으로 뚜벅뚜벅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러지 마, 안나!” 어쩐지 아리스의 눈이 신경 쓰였다. “다쳤잖아. 상처 벌어지겠어!” 그러나 안나는 내 말 따윈 한 귀로 흘렸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말해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한창 창문과 굴뚝을 막으려 분주할 때였습니다. 저는 1층의 중앙 계단 근처 복도에 있었는데, 2층에서 비명이 들렸습니다. 가보니 엘리가...” 엘리는 하녀의 이름이었다. “사이가 엘리의 뺨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사이를 제압하자마자 다시 1층에서 소란이 들려왔고, 내려가 보니 이번엔 테이가 문제를 일으켰더군요. 그때 아가씨가 지하실에서 올라오셨고요.”

 

저택 본관에 있는 하인은 안나와 헨킬을 제외하고 스물세 명, 발효 인형은 모두 세 기였다. 정원 관리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두 기는 다른 외거 하인과 함께 별관에 있었다. 안나와 헨킬은 사이와 테이에 이어, 역시 사람을 공격한 에이까지 제압하고 창문 막기를 마무리한 후 우리에게 온 것이었다.

 

“창문을 막는 걸 돕게 하는데 갑자기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검은 세례에 당한 다른 사람은 없어?”

 

“네. 발효 인형들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은 하인들 셋을 제외하면 모두 무사합니다.”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발효 인형들이 변해버린 게 검은 세례와 관련되어 있으리라고. 아리스의 말이 떠올랐다. 네크로맨스는 어쩌면 종말로 이르는 섭리의 일환이 아닐까. 종말을 초래하기 위한 한 단계가 아닐까요.

 

“별관은 괜찮을까?”

 

“잘 대처하고 있기를 믿을 뿐입니다.”

 

중앙 홀에 굴러다니던 테이의 몸은 없었다. 핏자국도 깔끔히 치워져 있었다. 안나는 나를 응접실 안락의자에 앉혔다. 맞은편에 아리스가 앉았다. 물빛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지만 표정은 차분했다.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 들어온 하녀 둘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발효 인형들이... 어째서 이런 일이... 분명 검은 세례 때문이야... 너무 무서워, 어떡해... 주인어르신의 일이 잘 끝나서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왜... 공장은 어떻게 됐지? 맙소사, 우리 오빠가 공장에서 일하는데... 우리 집은? 엄마는? 항상 온화하던 헨킬이 노성을 터트렸다. 헨킬은 두 사람을 내보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안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하늘의 색채는 많이 흐려졌지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비앙세 영지 밖까지 이어질지도 몰랐다. 장미 정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건 새까맣게 죽은 거름더미였다. 정원수들은 화형당한 죄수처럼 말라비틀어졌다.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헨킬의 추측과는 반대로 오로라는 언제까지고 소멸하지 않았다.

 

 

 

5.

 

안나는 발효 인형들이 머리가 잘리고 팔다리가 부러진 채로도 바둥거렸다고 말했다. 안나가 제압한 사이와 에이는 양 눈알이 각각 제멋대로 움직이며 입에서는 방부액을 흘리면서도 사람에게 이를 들이댔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으로 자작가의 귀중한 재산을 완전히 파손했음을 고백하며 양해를 구했다. 두개골 안을 완전히 뭉개버리면 멈추는 모양이었다.

 

나는 영지의 상황이 신경 쓰여 안절부절못했다. 얼마나 많은 영민이 검은 세례에 당했을까. 그리고 공장의 상황은? 공장에는 백 기 단위의 발효 인형이 쌓여 있을 터였다. 그것들이 폭주했다면? 공장을 벗어나 영지를 돌아다니며 그나마 무사한 사람조차 해친다면? 아, 훌륭한 나의 아버지. 왜 당신이 꼭 필요한 때에 여기 없는 거야.

 

발효 인형들에게 목과 뺨을 뜯어먹힌 하인 셋은 당장 의원을 불러야 할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우리는 지혈과 소독 처치만 하고 발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발효 인형에게 물린 다른 시종과 경비 인원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빨 자국에 피가 살짝 밸 정도의 상처였지만 상처가 너무 가렵고 욱신거린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안나. 발목을 물린 상처도 얕지는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쉴 것을 권하는 충성스런 노집사와 시녀를 거부하며 나는 응접실에서 버텼다. 신경이 곤두서서 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좀이 쑤셨다. 저 오로라만 사라지면 영지로 달려나가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물론 나 대신 사람을 보내야겠지만.

 

안나가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지하실에 아리스와 단둘만 놔둔 일에 관해서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자와 함께 계실 때 별일은 없으셨나요?”

 

아리스는 창가에서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

 

“별일 없었어. 내 생각엔, 안나. 아리스는 의심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저자가 오고 오로라가 나타났습니다.”

 

“안나! 검은 세례는 아리스가 일으킨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길합니다.”

 

“그만해. 안나답지 않아.”

 

안나는 한숨을 쉬었다. “계속하는 저를 부디 용서해주세요. 오래전의 일이지만 저는 전장에서 수많은 사선을 넘었습니다. 제 목숨을 보전해준 건 하잘것없는 실력보다 후각이었고요. 저 여자에게선 나쁜 냄새가 납니다.”

 

아리스타벨라가 성물을 훔쳐 도망쳤다면 수도회는 사활을 걸고 그녀를 쫓았을 것이다. 생존술에 전혀 조예가 없어 보이는 젊은 수도사 하나가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부터 미심쩍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수도원장과의 하룻밤 거래로 성물을 손에 넣었다고? 다른 것도 아닌 제일 경전, 천사의 책인 <구원의 서> 원본을? 그렇게 허술하게 말인가.

 

“그리고 그녀는.” 안나는 잠시 말허리를 끊었다. “지나치게 아름답습니다.”

 

“뭐?”

 

“저는 국왕 일가를 알현한 적이 있습니다. 대륙 제일 미모로 소문난 제2왕녀님을 비롯하여 사교계의 이름난 꽃들과 춤도 춰봤습니다. 왕도에서 가장 비싼 창부도 본 적 있죠. 하지만 그 누구도... 저렇지는 않습니다.”

 

나는 허를 찔렸다. 아리스가 예쁘긴 한데... “남쪽 사람이잖아. 생김새가 좀 다른 건 당연한 거 아냐?”

 

“아뇨, 아닙니다. 조금 이국적인 생김새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녀가 과연 인간이기나 할지...”

 

안나의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주름을 세운 미간에 땀이 배고 있었다.

 

“안나?”

 

안나가 컥 숨을 토했다. 듬직한 허리가 뒤로 홱 꺾였다. 팔다리의 관절이 제멋대로 굽어지더니 경련하기 시작했다.

 

“아, 안나!”

 

다가가던 나는 그녀의 바둥거리는 팔에 얻어맞아 넘어졌다.

 

“아가씨, 안나! 무슨 일입니까!”

 

헨킬이 달려왔다. 아리스도. 헨킬이 하인들을 소리쳐 부르려는 찰나 마침 응접실로 뛰어들어온 하녀가 울부짖었다. 하인 몇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녀는 안나의 발작을 보고 입을 막은 채 악 비명을 질렀다.

 

“피해요!”

 

아리스가 다급히 외쳤다. 소란을 듣고 온 다른 하인들이 안나를 억누르기 위해 다가갔다. 아리스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당장!”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난 건지 아리스는 나를 이끌고 뛰었다. 헨킬이 우리를 쫓았다. “아가씨께 무슨 짓입니까!” 그가 우리를 갈라놓으려 했다.

 

“아아악!”

 

하인의 비명에 헨킬은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안나가 가여운 소년의 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입을 막고 있던 하녀는 양뺨을 긁으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어서, 빨리! 아리스는 막무가내로 나를 재촉했다. 어지러웠다.

 

우리는 응접실 밖 중앙 홀로 나왔다. 아리스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복도 어딘가에서 새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하는 섬뜩한 소리였다.

 

“헉, 헉.”

 

숨이 가빴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단숨에 열이 오른 몸이 으슬거리고 손발이 저릿저릿했다. 긴장에 목이 죄어든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등이 오싹했다. 부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내 목에서 삐걱거리는 소음이 날 것 같았다.

 

하녀였다. 낯익은 얼굴이 낯설었다. 각각 제멋대로 돌아간 눈과 게게 벌어진 입, 어설픈 움직임. 그녀는 우리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우우, 우우우. 단음절의 신음이 공허하게 벌린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게 뭐지? 저건, 분명... 죽었다. 나는 직감했다. 발효 인형을 볼 때와 같은 강렬한 위화감이 덮쳐왔다. 죽었는데도 살아 움직이는 것. 죽었는데도 살아서... 하지만 발효 인형과는 다르다. 유용하게 발효된 시체가 아니다. 무언가... 사악한 것.

 

“제 뒤에 있으세요.”

 

아리스가 얼른 내 앞을 막아섰다.

 

“발효 인형한테 물렸던 애야. 생채기만 날 정도라 놔뒀는데...” 나는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검은 세례의 영향으로 발효 인형이 변질된 것 같습니다.” 아리스는 그런 내 말을 차분히 받아주었다. “사람을 물도록, 그리고 물린 사람으로 하여금 똑같이 사람을 무는 괴물이 되도록.”

 

“어째서...”

 

“지금은 그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아리스가 슬금슬금 움직였다. 홀 벽 근처에 검과 방패를 든 기사상이 있었다. 그녀는 기사의 손에서 검을 뽑아내려 끙끙댔다. 내가 합세하여 겨우 뽑은 칼을 그녀는 양손으로 감싸 들었다. 가녀린 팔이 대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변해버린 하녀는 자신을 향해 겨눈 대검의 위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장식용이라 날도 서지 않은 칼이었지만. 아니, 온몸으로 달달 떨며 칼을 들이대 봐야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어설퍼 보이던 움직임이 딱 멈춘 순간. 하녀는 도약했다.

 

“앗!”

 

아리스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검끝을 내밀었다. 목을 쭉 빼고 날아든 하녀의 가슴에 둔중한 검신이 박혀 들어갔다. 빠지직, 치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는 검 손잡이를 놓쳤다.

 

딱. 하녀는 가슴에 대검이 박힌 채 공중에 입질을 했다. 신 나무딸기 즙액 같은 냄새가 공중을 채웠다. 그녀는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뒷걸음치는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내밀어진 검 손잡이가 이번엔 아리스의 가슴을 쿡 찔렀고, 아리스는 넘어졌다. 하녀가 휘저은 손이 내 팔뚝을 잡았다.

 

아, 마도구라도 있으면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마도구는 경비실에 있고 거기로 가려면 현관 밖으로 나가야 한다. 어찌 됐든 이미 늦었고.

 

하녀는 아귀힘만으로 내 팔뚝을 으스러뜨릴 것 같았다. 그녀는 춤을 추듯, 거치적거리는 가슴의 말뚝을 피해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침투성이 이빨을 내 얼굴로 가져다댔다. 키스라도 하듯이.

 

물빛 머리칼이 흐드러졌다. 은색 덩어리가 하녀의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하녀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하녀의 눈알이 핑글 위로 돌아가고, 곧 온몸으로 무너졌다.

 

“헉, 헉...”

 

아리스는 비앙세 자작가의 금빛 문장이 새겨진 오각 방패 끄트머리를 나무바닥에 쿵 찍고 헐떡였다. 끄트머리는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장식용 기사의 소지품이었다.

 

“어... 아...”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는 하녀의 함몰된 정수리에서 핏물이 콸콸 쏟아져나왔다.

 

아리스가 다가왔다. 떨리는 손끝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이상 숨 돌릴 틈은 없었다.

 

“아가씨, 살려주세요!”

 

응접실 방향으로부터 하녀가 튀어나왔다. 아까 안나를 보고 비명을 질러댔던 하녀였다. 그녀는 살아있었다. 이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뒤쪽에서 날아온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사냥감을 덮치는 표범 같았다. 무참히 쓰러지는 하녀를 짓누른 것은 나의 충성스런...

 

“안나!”

 

신을 부르짖으며 발버둥치는 하녀의 등에 올라탄 안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하녀의 기도는 도살당하는 짐승의 단말마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리고. 저것이 정말로 안나인가. 안나일 리가 없다. 분별없는 생피의 만찬.

 

안나는 내 유모였다. 시녀다. 언제나 경호원이었다. 아니다. 그녀는 나의 가장 소중한.

 

“움직여요!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도망쳐야 합니다!” 아리스가 나를 잡아끈다. “2층으로 올라가요!” 하지만 내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질질 끌려가고, 아리스는 지쳐간다.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그녀는 멈췄다. 중앙 홀의 계단으로부터 변해버린 하인들이 비치적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편 오락실 쪽에서도 단말마가 들려왔다. 문밖엔 오로라.

 

안나가 나를 보았다. 초점이 전혀 맞지 않는 눈이 나를 향했다. 나를 인식했다. 빙그레 웃은 것처럼 보인 건 입가에서 피가 흐르며 만든 무늬 때문일까. 내가 눈앞이 아닌 과거의 안나를 보고 있기 때문일까.

 

소리가 멀어져간다. 색이 번져간다. 내 이마에 입 맞춰주던 안나가 내 목줄기를 물어뜯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일어나던 안나의 옆얼굴에 은빛 티포트가 부딪혔다.

 

“지하실로 가십시오, 아가씨!”

 

헨킬의 목소리였다.

 

“지하, 술 저장고 뒤! 통로가 있습니다! 주인어른이 만드신 비상 통로입니다, 거기로 도망치십시오!”

 

찻잔, 꽃병, 접시, 조각상. 하인들이 언제나 반들반들 윤나도록 닦고 헨킬이 먼지 한 톨 앉지는 않았나 손끝을 미끄러뜨리며 확인하던, 언제나 내 지루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함께하던 가재도구가 안나의 몸에 부딪쳐 깨져 갔다. 미동도 없이 나만을 주시하던 안나가 조금씩 헨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요.”

 

아리스는 한 손에 방패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걸음을 떼었다. 지하실 문은 계단 뒤에 있었다.

 

“어, 나는, 안나, 헨킬...” 단어가 조각조각나서 거품처럼 떠올라 흩어졌다.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가세요.”

 

그는 부지깽이를 쥐고 있었다. 노집사는 이제 완전히 자기 쪽으로 방향을 튼 안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아가씨 앞에서 그 칠칠맞은 꼴이 뭔가, 안나. 오랜만에 몸소 자네 교육 좀 해야겠군.”

 

“칼리!”

 

아리스가 내 귓가에 대고 고함쳤다. 내 안에서 한껏 늘어나던 무언가가 툭 끊겼다.

 

나는 뛰었다. 헨킬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계단에서 내려와 우리 앞을 가로막는 괴물을 아리스와 함께 방패로 부딪혀 날려버리고 계단 뒤의 문을 열었다.

 

굴러떨어지듯 계단을 내려와 술 저장고로 갔다. 술 저장고는 작은 창고 만했다. 선반에 올려놓은 술병들을 깨부수며 숨겨진 문을 찾았다. 작은 틈을 찾아냈다. 둘이 합세하여 녹슨 듯이 완강하게 버티는 미닫이를 열었다.

 

우리는 뛰었다. 우리 뒤편에서 통로가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실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꿈속에서 나는 전능했다. 눈짓으로 바람을 부르고 손짓으로 화염을 일으켰다. 신대의 천사들처럼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았다. 눈앞에서 일렁거리는 음침한 색채는 오로라인가, 발광이끼의 조명인가.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헨킬을 생각했다. 그리고 안나를.

 

한계에 달한 몸을 무시했다. 다리에서 점점 감각이 없어져 갔다.

 

헐떡거리며 뛰던 나는 혀를 씹었다. 날카로운 아픔과 함께 피 맛이 번졌다. 덜 익은 나무딸기 같은 비릿함. 아, 종말이구나. 나는 실감했다.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나는 의아했다. 넘어져서 돌바닥에 얼굴을 뭉갰음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뛰쳐 달아나던 아리스가 되돌아왔다. 뭐라고 외치면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우르릉 우르릉, 이명인지 통로가 붕괴하는 소린지 모를 울림과 함께 정신이 멀어져 갔다.

 

 

 

6.

 

우리 주의 말씀처럼 이와 같이 말하노니

주께서 땅에 흩어지는 날이 올 것이며

큰 종들은 저마다 좇으리라

지상의 피조물은 만들어질 때와 같이

아침에 주의 영광을 칭송했듯이

저녁에 주의 쇠락을 노래하리라

생명이 있으라 하여 생명이 있었듯이

죽음이 있으라 하여 죽음이 있을 것이나

큰 종들은 듣지 아니하리라

이는 큰 종의 서(書)이므로...

 

 

우라 파스키야, 우라 파사나. 에 스베르테타 스키나 드라사타 콤 마텔라. 아리스타벨라가 속삭였다. 그 말소리는 바람이 귓가에서 펄럭이는 소리와 같았다. 오로라는 녹색에서 주황색, 붉은색으로 변해가며 반주를 연주했다. 지상에서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신을 찾듯이 어머니를 찾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목소리. 연인이 연인을, 친구가 친구를, 부모가 자식을, 이웃이 이웃을 포옹했다. 새빨간 갈채가 넘쳐 흘렀다. 발효 인형의 춤과 음악과는 달리 거기에는 생명이 있었다. 생니에 찢기는 생명이.

 

눈부시게 빛나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얼음처럼 쨍한 푸른빛. 오로라가 물빛 춤을 추었다. 나는 흡족하게 날아올랐다.

 

칼리.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계속, 나아갔다. 눈앞에 말라죽은 포도덩굴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헤치고 들어갔다.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밖이었다. 검게 죽은 들판 위로 펼쳐진 오로라가 나를 맞이했다. 썩은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들이쉬고 내쉬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비앙세 유적 옆의 목장이었다. 아버지는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 말을 확보하기 위해 출구를 이곳에 낸 것이다. 그런 계산도 말들이 모두 죽어 자빠져 버렸으니 아무 소용없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구역질나는 썩은 내 이외에는, 죽음도. 공포도. 광기도.

 

아리스는 어디에 있지?

 

퍽. 나무꾼이 장작을 패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휘날리는 물빛 머리칼이 보였다. 그녀의 몸이 휘청일 때마다 자작부인의 로브자락이 가녀린 다리를 움켜잡았다. 나무꾼을 연상한 건 얼마쯤 올발랐다. 아리스는 목동의 옷을 입은 무언가의 머리로부터 제 얼굴보다 커다란 도끼날을 뽑아냈다.

 

아리스, 라고 입안에서 불렀다. 그녀가 홱 고개를 들었다. 나를 알아보고 활짝 웃었다.

 

“칼리, 정신이 드셨군요!”

 

피투성이 도끼를 질질 끌고 그녀는 내게로 달려왔다. 그녀를 놓친 목동들이 그르륵 그르륵 으르렁거리며 따라왔다.

 

“가요, 칼리, 어서요.”

 

물빛 머리칼에 튄 핏방울이 루비 장신구 같았다. 그녀는 축제를 맞이한 처녀처럼 명랑하게 내 팔을 당겼다. 그녀의 빛나는 두 눈은 비앙세 유적을 향하고 있었다.

 

섬세한 하늘의 무늬가 장엄한 모래색 사면 주변으로 꿈틀거렸다. 가까이서 보면 원뿔형 비앙세 유적의 비탈은 계단식으로 한 단 한 단 쌓여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굶주린 목동들은 계단 앞에서 한 발짝도 더 내디디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죽은 눈으로 우리를 좇았다. 우우. 아아. 죽은 자들의 신음은 찬송가의 파편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상승했다. 거센 바람이 등을 밀었다. 추웠다. 나의 갈색 머리와 아리스의 물빛 머리가 춤추며 서로 얽혀들었다. 도끼날이 계단에 부딪쳐 딱딱거리는 소리가 우리를 따라왔다. 오로라가 음악 같다고 느꼈다. 정말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잘 들어보니 아리스가 부르는 콧노래였다.

 

우리는 계속 올랐다.

 

내 책상 만한 너비의 평평한 공간이 나왔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비앙세 영지 전역이 내려다보였다. 멀리 세워진 공장, 환락가, 농장들, 밭, 마을. 죽어 쓰러진 것들이 구더기 꼬인 고기처럼 경련했다. 그것들이 다시 일어나는 모습은 흙을 밀어 틔는 새싹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떡잎이 태양을 경배하듯이 비앙세 유적을 향해 몸을 틀었다.

 

사방에서 움직이는 죽은 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보세요, 칼리. 모두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타벨라가 내 양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려놓고 속삭였다. 나는 의아했다. 아무도 딱히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의식도 감정도 이 땅엔 없었다. 그저 손발을 흔들며 유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미친 것 같다.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모든 건 발광하며 죽어가는 내가 보는 환상이다. 그런데 아리스의 머리칼이 닿은 뺨이 간지러웠다. 이런 하찮은 감촉이 왜 생생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치우려고 손을 들었다. 들려 했다. 내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리스타벨라,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신께서는 죽어 흩어졌습니다.” 그녀는 머리채를 갈무리하여 등 뒤로 넘겼다. 이제는 달콤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하지만 천사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천사?

 

“신의 피조물은 신을 사랑합니다. 인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갈구가 가장 큰 존재들이란 항상 천사일 것입니다.”

 

아리스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내 머리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린다. 내 이마에서 뒤통수로, 다시 이마로 보이지 않는 티아라를 그리듯이. 그녀가 살며시 내 옆머리를 밀었다. 나는 풀썩 쓰러졌다. 지평선이 수직으로 기울고 잿빛 연기가 구정물처럼 퍼져나갔다. 어디선가 큰불이 난 것 같았다.

 

“천사들의 슬픔과 도탄을 인간이 헤아릴 수는 없겠지요. 신을 잃고도 인간은 저들이 먹고사는 일을 더욱 걱정했으니까요. 인간에게 신이란 자신들을 낳아주었다는, 이젠 기억나지 않는 부모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겁니다.”

 

아리스의 작은 발이 내 목을 지그시 밟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아리스, 뭘 하는 거야?

 

“아아, 조금만 참으셔요.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그보다 들어주세요. 신을 잃은 천사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되찾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이익. 도끼날이 바닥에 끌렸다.

 

“한번 죽은 것을 부활케 하는 것도 신의 권능입니다. 그분 자신이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죠?”

 

노아르크에 충만하던 마력은 천사의 힘이라 한다. 그것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그만큼 갑자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의 힘을 모두 합해도 신 한 분에게 미칠 정도는 아닙니다. 천사는 실패했습니다. 천사가 어떤 식으로 실패하는지 아시나요? 천사적인 방식으로 실패합니다. 실패로부터 가장 먼 방식으로...”

 

내 목을 밟은 아리스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목을 부러뜨리려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약했다. 나는 천사에 대한 건 궁금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칼리. 당신에게 거짓말했습니다. 보여드린 건 <구원의 서>가 아니랍니다. 천사의 책인 건 맞아요. 다만 그건 인간에게 맡긴 예언서가 아니라 천사들의 사랑과 원망을 기록한 사적인 편지지요...”

 

신대 천사어가 머릿속에서 맴을 돌았다. 나는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천사들의 힘이 신의 시체와 만나서 어떤 결과를 냈는지. 신이 부활하는 대신 신의 시체 조각에 부활시키는 힘이 깃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공 전의 그것엔 신의 절대적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천사의 염원이 공존하며 ‘죽음’이 더 우세한 상태였다. 노엄 비앙세 자작은 신의 시체에서 천사의 의지를 분리함으로써 ‘부활’을 더욱 순수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발효 인형들이 탄생했다. 검은 세례를 받은 발효 인형들은 상반된 명령에 노출되었을 뿐이다. ‘죽어 있어라. 그리고 살아라.’ 그래서 그들은 죽은 채로 살았다. 살아있는 것들이 받은 가장 최초의 명령을 수행했다. 먹고, 늘어나는 것.

 

“하지만 칼리, 인간은 일어나는 게 불가능하도록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걸 기적이라 부르지요. 천사에게 기적은 무척 일상적인 사태랍니다. 천사는 실패했지만, 알았어요. 기적이 일어난다는 걸요. 신의 의지는 사라졌지만 유지(遺志)는 남았다는 걸요...”

 

하늘을 곁눈질했다. 제 머리처럼 푸른 광채를 배경으로 아리스타벨라는 양손으로 도끼를 치켜들고 있었다. 밝게 웃는 얼굴에서 애정과 기쁨이 넘쳐흘렀다.

 

나는 아리스가 보이지 않는 티아라를 그렸던 대로 내 머리에 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느꼈다.

 

도끼날이 그 선 위로 내리쳐졌다.

 

콰직.

 

발로 나를 굴려 가며 아리스는 선을 절단했다.

 

“아아, 사랑스러운 분. 이제 끝났습니다. 더이상 그런 데 갇혀 있을 필요가 없어요. 제가 드디어 당신께 도달했습니다.”

 

새하얗게 빛나는 아리스의 두 손이 내게로 뻗는다. 나는 미지근하고 끈적이는 액체에 잠겨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나를 답답한 껍질에서 꺼내 안아 든다. 내려다보는 내 눈에 수박처럼 머리가 갈라진 내가 보였다.

 

칼레아 비앙세의 몸이 거기 있었다. 나를 속박해 온 거추장스럽고 무력한 몸이.

 

내가 전능했던 꿈들을 떠올렸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어머니처럼, 아리스는 나를 가슴에 품어 들고 토닥거렸다.

 

“당신의 큰 종이 다시 당신을 뵙니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갓 태어난 어린아기처럼.

 

모든 죽은 이들이 경배하는 가운데, 하늘의 옥좌에서 나는 부활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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