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Secret Garden

2004.10.03 00:2010.03

자, 지금 네 앞에 있는 카드는 네가 스스로 뽑은 너의 미래야. 네가 저것을 뒤집어서 앞면을 보이면 나는 그것을 읽게 되고 너와 나는 미래를 알게 돼. 하지만 이건 네가 가질 수 있는 미래의 한가지일 뿐 모두는 아니야. 그럼 물을게. 내가 알려주는 이 한 가지 미래에 끌려가지 않을 자신이 있니? 자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손을 내밀어. 그래, 그게 너의 미래야.

. . . . . . . . . . . . .

“차렷, 경례.”
“안녕히 계세요-.”
K 시 J고등학교의 3학년 교실. 실장의 경례 소리와 함께 인사를 마친 학생들은 단 몇 분 만에 모두 교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어떤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졌다는 표정으로, 어떤 아이는 세상이 오늘 망한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모두 빠져나가는 아이들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부동자세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손에 든 한 장의 종이를 쳐다보며 한없이 한숨만을 푹푹 내쉬는 소년이 말이다.
“에휴우-.”
아무도 없는 교실에 홀로 깔리는 한숨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손에 들린 성적표를 보면 한숨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모의고사 낙제, 반에서 바닥을 기는 등수, 형편없는 내신. 국내 최고의 일류대학 S대를 꿈꾸며 밤이나 낮이나 피가 쏟아지도록 공부했거늘 고작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일류대학 졸업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려던 꿈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돼 버린 거지…….”
남자만 아니라면 비명이라도 지르면서 펑펑 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아무리 세상이-시험이-자신을 버려도 소년은 대한의 남아라는 자존심 하나로 굳건히 남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들려온 소녀들의 대화는 그러한 마지막 자존심까지 깨버리기에 충분했으니…….
“하여간 그래서 이번 시험 망쳤다니까.”
“몇 등이나 했는데 그래? 많이 떨어졌어?”
“응, 전교 5등.”
성적표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이지 열이 팍 오르는 순간이었다. 전교 5등이 망쳐서 많이 떨어진 등수면 바닥 기는 하위권 얘들은 나가 죽으라는 거야 뭐야?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불만을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소년은 성적표를 가방에 구겨 넣어 버렸다. 교실에서 나가는 소년의 표정이 창 밖의 하늘만큼이나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햇빛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공기마저도 비 오기 전 특유의 끈적끈적한 느낌과 냄새를 풍긴다. 이제 곧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어딘지 모를 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참, 남들은 할 것 다 하고 연애네 취미네 하면서도 성적만 잘 나오던데 난 왜 이러지.’
소년과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진짜 연인인지 남매인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사춘기인 소년으로서는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다른 방향에서는 예쁘장한 소녀가 양손 가득 물감과 붓, 종이 등을 들고 어디론가 급하게 가버린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좋은 일일까…….
투둑… 투둑투둑……, 쏴아아-.
“우아앗-!”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소년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우산을 펴들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미술도구들을 가득 든 예쁜 소녀도, 남매인지 연인인지 구분 안 가는 소년과 소녀도 한 우산을 쓴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어간다. 우산도 없이 뛰어가는 것은 소년 하나 뿐. 소년은 뛰던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비에 젖은 발걸음이 꽤나 무거웠다.
“에취!”
벌써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 비로 감기라니. 몸이 어지간히도 약해졌나보다. 보통 청소년들 같았으면 그냥 독감이라도 걸려서 학교 안 가는 쪽을 택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듯이 소년은 수능이 내일 모레인 고3이었기 때문이다. 방학도 없는 고3이 아프다고 결석이 될 리가 없다. 설령 결석이 된다고 해도 후의 개근상에 차질이 있을 것은 두말 할 필요 없는 사실. 소년은 일단 몸을 좀 피하기로 했다. 마침 저 앞에 카페가 보인다.
‘Secret Garden.’
비밀의 화원이라도 꾸며내고 싶었던 걸까. 소녀틱 한 상호 명에 걸맞게 카페의 건물은 네모반듯한 도시형이 아닌, 아기자기한 화원의 형태였다. 창가의 레이스 커튼과 하얗고 작은 울타리, 깔끔하게 다듬어진 정원수. 카페 주인의 취향인건지, 아니면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들을 겨냥한 상술인건지. 하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앞 뒤 가리지 않고 급히 카페 안으로 뛰어들었다.
딸랑-.
카페의 출입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거린다. 역시 소녀취향이라는 생각에 소년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안을 둘러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백열전구의 환한 조명이 아닌 아로마 초의 어두운 불빛, 검은색과 붉은 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이질적인 커튼, 온통 새까만 색의 벽지. 흐르는 음악까지도 착 가라앉은 클래식이었다.
소년은 창가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딕풍의 나무 테이블과 의자까지도 카페 안의 분위기와 한 세트였다.
‘겉보기랑 영 딴판이네…….’
“주문하시겠습니까?”
별안간 종업원인 듯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왕이면 만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귀여운 원피스와 레이스 앞치마도 좋으련만, 아르바이트생일지도 모르는 소녀는 민무늬의 까만 원피스에 하얀 앞치마만을 두르고 있었다. 카페 안의 인테리어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소년이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메뉴판을 뒤적거린다. 지갑 사정으로 인해 순전히 가격 위주로 고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음, 에스프레소요.”
“에스프레소 하나, 더블, 싱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더블로 해주세요.”
싱글 보다는 당연히 더블이 더 양이 많겠지, 라는 생각에 소년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더블을 외쳤다. 그러나 순간 주문을 받은 소녀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 같았던 건 그의 착각이었을까. 어쩌면 싼 가격 때문일지도 모르지. 하긴 혼자서 무슨 청승이라고 비 쫄딱 맞고 와서는 의자시트까지 더럽히고 음료까지 싼 걸로 시키면 어느 카페에서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고 모른 척 카페 인테리어 구경에 전념했다.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지에 주문을 적은 소녀가 다시 말한다.
“상담은 누구한테 하시겠어요?”
“상담이요?”
“네, 저희 Secret Garden에서는 음료를 시키신 분들에 한하여 무료로 고민상담 및 미래를 봐드리고 있습니다. 종류는 타로카드, 별자리, 주역, 사주 등 동양에서 서양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으므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 주세요. 물론 그냥 고민 상담도 가능하며 손님의 상담 내용은 모두 비밀로 누설되지 않습니다.”
직업용 멘트 인 듯 사무적인 말투로 길게 설명을 늘어놓은 소녀는 메모지에 다시 뭔가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한 소년은 소녀의 설명을 곰곰이 입 안으로 되씹고 있었고 말이다. 소년의 결정이 늦어지자 소녀는 메모지를 집어넣으며 말을 덧붙였다.
“당장 결정하기 어려우시다면 차가 나올 때 말씀하셔도 됩니다만. 혹시 보지 않으실 건가요?”
“아뇨, 볼 거예요. 있다가 차가 나왔을 때 결정하도록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소녀의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멀어지고, 소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빗줄기가 더 굵어져 있었다.
‘그냥 맞고 갔으면 정말 학교 못 갈 뻔했군.’
카페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 올 때는 인테리어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각 테이블마다 소녀와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한 명씩 앉아있었다. 그들은 작은 책자를 뒤적거리며 뭔가를 적기도 하고, 손님들로부터 생일이나 혈액형을 묻는 등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타로카드, 별자리, 주역, 사주. 어떤 걸로 보지? 소녀의 설명을 떠올리며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자리는 너무 흔해빠졌고, 주역이나 사주는 너무 고리타분  할 것 같다. 타로카드는 만화책에서나 봤지 실제로 본 적은 한번도 없는데…….
“에스프레소 더블 한 잔 나왔습니다.”
아까와 같은 목소리로 용건을 말한 소녀는 들고 온 쟁반에서 커피 잔 하나와 과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뭔지 보지도 않고 가격만 보고 골랐더니 하필 걸린 것이 커피다. 다른 커피보다 유난히 색도 까맣고 쓴 냄새가 많이 나는 것이 흠이었지만.
“미래를 볼 도구는 고르셨나요?”
“아, 네.”
미래를 볼 도구라니. 역시 사물 이름은 붙이기 나름인가 보다. 단 것을 매우 좋아하는 그인지라 소년은 습관적으로 테이블 한쪽의 설탕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얀 가루가 새까만 커피 위로 쏟아진다.
“무엇으로 보시겠어요?”
“에, 타로카드요.”
“탁월하신 선택이네요.”
탁월하신 선택? 소녀의 말투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소년은 쏟아 붓던 설탕 통을 원상태로 돌려놓으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요새 타로카드는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거의 안 찾으시던데. 타로 점 본 적 있으신가 봐요?”
“아뇨, 한번도 본 적 없어요. 그냥 이름만 들어보았어요.”
“그래요?”
혹시나 하면 역시나라더니 소년의 예상이 적중한 것 같았다.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던 손에서 어른 손바닥만한 주머니 하나가 들려나온다. 앞치마를 풀어 의자에 걸친 소녀가 소년의 맞은  편에 앉아 자기소개를 한다.
“Secret Garden의 타로리더 ‘하유희’라고 합니다. 그냥 유희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나이는 올해 열아홉, 불편하시다면 말 놓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그러시려면 손님도 자기소개를 해주시는 것이 우선이시겠죠.”
또박또박한 소녀의 말에 소년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열아홉. 동갑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아르바이트생이겠지? 학교에 가지 않은 걸 보면 학교를 1년 더 일찍 들어갔거나, 실업계 생 둘 중 하나일 테고. 너무 하얘서 이국적인 느낌까지 나는 듯 한 피부색과 전혀 대조적인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온 듯한 까만 눈동자. 어쩌면 외국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성별이 ‘여’라는 것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소년이 호기심을 갖기에는 충분 했다. 게다가 보통보다 더 나으면 나았지 빠지지는 않는 외모였기에 더욱 호감이 갔다. 소녀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소개를 대충 정리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J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윤민재’라고 합니다. 나이가 동갑이니 말 놔도 상관없을 것 같네요.”
“그럼 그냥 놓기로 하죠. 상담 하는데 경어로 꼬박꼬박 답하기도 귀찮으니까요. 그냥 유희라고 불러.”
보기와는 다르게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유달리 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과 대조를 이루어서 상당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먼저 말을 해주니 다행이다. 긍정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젓는 소년. 그 모습을 보던 소녀가 묻는다.
“그런데 에스프레소 더블 마셔봤니?”
“아니, 오늘 처음인데 왜?”
“그거 먹는 사람 학생 중에는 거의 없거든. 너무 써서…….”
“괜찮아, 냄새가 쓴 거 같아서 설탕 많이 넣었어.”
말을 마친 소년은 설탕이 다 녹은 것을 확인한 뒤 당당하게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아니, 넘기려고 했다.
“우욱…….”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소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입 안에 있던 것부터 시작해서 아침에 먹은 것까지 모두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거의 한 통의 설탕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줄지 않은 에스프레소 더블의 쓴 맛. 처음 만난 같은 동갑 나이 소녀의 앞에서 추한 몰골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소년은 별 수 없이 입 안의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거의 독약을 먹는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저기, 괜찮아? 못 먹겠으면 그냥 뱉어내도 되는데…….”
“아니, 괜찮아 삼켰어. 괜찮아, 이 정도는.”
과장 될 정도로 손을 내저은 소년은 냅킨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앞에 놓인 냉수를 한 번에 들이켰다. 쓴 맛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다시는 마시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소년은 괜한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음음, 그런데 어떻게 보는 거야?”
“아,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했지? 타로카드는 다른 점하고는 다르게 쌍방의 의사소통이 있어야 해. 주역이나 사주 같은 건 그냥 한쪽 방향의 정보만을 받아서 풀면 되지만 이건 상담자의 정신 집중이 적중률을 좌우하거든. 섞는 건 네가 하고 난 그것을 받아서 그냥 풀어주기만 하는 거야. 질문은 정했어?”
질문이라.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요새 좀 보고 싶은 건 있지. 소년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말을 꺼냈다.
“학업 운 좀 봐줄 수 있을까? 요새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럼 하고 싶은 질문을 구체적으로 머리 속에 그리면서 카드를 섞어. 섞는 방식은 자유야. 앞면만 보이지 않도록 해.”
“응.”
안 좋은 것 같은 게 아니라 확실히 안 좋지. 소년은 쓰게 웃으며 소녀에게 카드들을 건네받았다. 모두 같은 모양의 뒷면. 앞장의 그림들이 궁금했지만 소년은 질문을 머리 속으로 생각 하며 카드들을 천천히 섞기 시작했다. 22장의 카드가 소년의 손 안에서 이리저리 춤을 춘다.
“자, 다 섞었어.”
“응, 그래. 그럼 이리 줘. 이제 배열 할 테니까 정신 집중한 거 풀지 말고 잘 봐.”
소녀는 건네받은 카드를 몇 번 더 섞더니 미리 깔아 놓은 테이블 위의 천에 몇 장의 카드를 골라 놓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테이블 위에는 10장의 카드가 십자가의 형태로 배열이 되었다. 신기한 듯 쳐다보던 소년은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며 소녀에게 물었다.
“이제 뒤집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응, 근데 그 전에 명심 할 것이 있어. 내가 여기서 보여주는 미래는 네가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미래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좋지 않게 나오더라도 거기에 매이지 말고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말아줬으면 해.”
“에이, 그런 건 걱정 하지 마. 그럼 뒤집는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카드 한 장 한 장을 뒤집었다. 화려한 앞면의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소녀는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나름대로 해석을 중얼거렸다. 그러한 소녀를 지켜보던 소년. 소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본 소년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기, 어때?”
“너, 공부 한 만큼 성적 안나오나 보구나?”
“어? 어어…….”
“음, 그리고 또…….”
말꼬리를 조금 흐린 소년은 한숨을 푹 쉬며 무심코 커피 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쓴 커피만큼은 마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드 하나하나를 뒤집으며 점괘를 말하던 소녀는 마지막 카드를 뒤집으며 꽤 괜찮은 이야기를 소년에게 들려주었다.
“많이 속상하겠네. 하지만 너무 걱정 마. 미래에는 노력의 결실이 다 나타나니까. 뭐 그것도 앞으로 네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대학 못 갈 수도 있으니까 이 점괘 믿고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해. 더 궁금한 거 있어?”
“아아니, 그 정도면 됐어. 나중에 결실이 나타난다면 됐지 뭐.”
“그래, 그럼 됐고.”
사실은 조금 놀라고 있었다. 겨우 저 정도 카드 몇 장으로 자신의 학업 생활을 다 맞춘 것에 대해서 말이다. 소녀는 그 몇 장의 카드를 봄으로서 소년의 현재 학업을 비롯, 과거의 학업과 주변 상황까지도 모두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 마지막으로 조언을 해준 소녀는 카드를 잘 정리하여 원래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싶었는 듯 소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음, 나름대로 잘 맞는 것 같니?”
“응? 으응, 엄청나게 잘 맞네. 어디서 배운 거야?”
“어려서 유럽에 살 때 집시들한테 배웠어. 지금은 거의 없는데 그때는 꽤 많았거든.”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이다 했는데 어렸을 적의 영향인 듯싶다.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다시 커피 잔으로 손을 뻗었다. 뻗기만 했다. 절대 마실 엄두는 못 내고 말이다. 아직 식지 않은 에스프레소의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왔다.
“그럼 자기 점도 볼 수 있는 거야? 남의 점을 봐서 조언해 줄 수 있다는 소리는 자기 점도 볼 수 있다는 뜻이잖아.”
“볼 수 있기는 한데……. 점보는 사람들은 원래 자기 점 잘 안 봐. 점보는 사람들은 점괘를 많이 신뢰하기 때문에 나쁘게 나오면 곧이곧대로 믿고 점괘에 끌려가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거든.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안 봐. 게다가 ‘미래를 아는 자에게 희망이란 없다’라는 껄끄러운 말까지 있어서.”
“미래를 아는 자에게 희망이란 없다?”
“응. 미래에 희망이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 어차피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에 불과한건데 말이야.”
소년은 테이블 위의 커피 잔으로 손을 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라. 어떻게 생각하면 조금 끔찍한 일이었다.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갖지 못하다니…….
“너무 안 좋게는 생각하지 마. 대신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나쁜 일들을 미리 알고 피할 수 있는걸. 원한다면 희망을 만들 수도 있고 말이야. 전혀 불공평할 것은 없어.”
“하지만 미래란 건 알 수 없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는 거잖아.”
“미래는 항상 바뀌는 거야. 고정돼있는 것이 아니잖아? 희망이 있는 미래라고 해서 꼭 그 상태로 고정돼 있는 다는 법은 없어. 무심코 어떤 길을 감으로 인해서 그 희망은 한번에 모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거라고.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잖아. 희망이 없으면 만들면 돼지 뭐.”
아직 식지 않은 커피의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몸으로 전해왔다. 비에 젖은 몸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아, 나 그만 일 하러 가야겠다. 에스프레소 못 먹겠으면 코코아라도 먹을래?”
“응? 하지만 돈이…….”
“괜찮아, 내 월급에서 깎아내는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가져올게.”
말을 마친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가버렸다. 마침 못 먹을 거 시켜서 돈 아깝다 생각 중이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카페까지 와서 제대로 된 차 한 잔도 못 마시고 가는 건 아무래도 좀 억울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복잡한 말을 들어서인지 머리가 뒤숭숭했다.
“코코아 한잔 나왔습니다.”
“아, 응, 고마워.”
“앞으로 자주 오라고 주는 거야. 내 또래는 거의 안 와서 심심하거든. 앞으로 자주 와.”
나야 바라던 바지. 소년은 애써 좋아하는 티를 안 내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긋 웃어 보인 소녀는 왔던 곳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구두소리는 멀어져가고 창밖의 비는 그쳤지만, 코코아는 정말 맛이 좋았다.



소년은 그 날도 홀로 교실에 앉아있었다. 양손으로 새하얀 종이 한 장을 잡은 채 말이다. 종이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11716 윤민재 S대학 합격.’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물 밀 듯 밀려왔다. 피까지 쏟아가며 미친 듯이 공부했던 고3. 그리고 합격했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일류대학 S대학에 말이다. 일류대학 졸업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어이구, 고생했다 우리 강아지.”
“민재야, 축하한다.”
“선배님, 축하드려요-.”
“자식, 너 열심히 할 때부터 알아봤다. 서울 가도 자주 연락해라.”
부모님과 친구들, 후배들, 선배들의 축하 인사말.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졸업식장에서의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학생이라는 이름의 시절은 이제 끝난 것이다.
“아, 엄마 아빠 먼저 들어가세요. 너희들도 먼저 가있어라. 나 만나고 갈 사람이 있어서.”
“뭐야,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냐?”
“조만간 그리 될 지도 모르겠다―.”
“뭐어-?”
누군지 소개 시켜달라는 친구들의 아우성을 뒤로 한 채 민재는 졸업식장을 빠져나왔다. 비가 올 듯 어두운 하늘. 하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이벤트가 있으니 말이다.
1년 동안 다니면서 항상  보았던 큰 꽃집에서 민재는 붉은 장미 한 다발을 샀다. 새하얀 안개꽃과 붉은 장미가 서로 대조되어 서로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카페로 가는 길. 민재는 다시 소년이 되어 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고3의 고민이 가득한 무거운 발걸음이 아니라, 입시지옥이라는 전쟁터에서 당당하게 승리한 승자의 걸음으로 말이다. 조금만 더, 이제 여기서 돌기만 하면 저 앞에 그녀가 있는 비밀의 화원이 보일 것이다. 가벼운 걸음으로 발을 떼는 순간…….
끼이익- 콰앙!
기분 나쁜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급정거하는 자동차의 날카로운 바퀴 소리와 이어지는 충격음.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사람이 차에 치였어!”
“119불러, 119! 뺑소니 차 번호는 적은거야?”
“피가 너무 많이 나는데 즉사한 거 아니에요?”
“재수 없는 소리 말고 119나 불러! 유희양, 이봐, 유희양 정신 좀 차려봐! 유희양! 오늘 민재군도 오기로 했잖아! 민재군 안 볼 거야?!”
눈앞이 캄캄해져버렸다. 손에 쥐고 있던 장미꽃다발이 떨어져서 바닥에 나뒹군다. 안개꽃은 장미꽃잎보다 더 붉은 피에 젖어 붉게 물들어버렸다.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카페 앞. 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검은 머리칼을 피로 물들인 소녀, 까만 머리칼만큼이나 검은 눈을 꼭 감아버린 소녀. 하얀 얼굴이 피로 물들어 간다. 미친 듯이 소녀의 이름을 부른다.
“유희야, 유희야? 야, 하유희! 장난 그만치고 일어나! 너 이런 장난치면 나 여기 다시는 안 올 거야! 너랑 한 약속도 안 지킬 거라고! 난 너랑 한 약속 지켰는데! 너 왜 이러고 있어!”
소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검은 민무늬 원피스와 하얀 앞치마 차림으로 손에는 편지 한 통을 꼭 쥔 채 영영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늘이 소년을 따라 울기 시작했다.



민재야, 안녕?
편지로 쓰려니까 뭔가 어색하다. 항상 만나서 이야기 하곤 했었는데 글로 쓰니까 느낌이 또 다르네.
넌 지금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겠지? 우리가 한 약속. 그래, 공부 열심히 해서 함께 S대에 합격하자는 약속. 합격하면 네가 장미꽃을 들고 날 데리러 오기로 했지? 그런데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사실은 나 몇 년 전에 내 점 본 적 있었어. 내 수명에 관한 거였는데, 그냥 단순히 재미로 본 거였는데, 너무 충격적인 결과가 나와 버렸었지. 나 20살 못 넘긴다. 그것도 병 같은 거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가버린데.
민재야, 나 사실 너무 무서워. 나 이제 19살인데 그럼 올해 못 넘기고 죽는다는 소리잖아. 불의의 사고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알 수 없잖아. 그냥 차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여 죽을지, 공사장이라도 지나가다가 위에서 떨어진 무언가에 맞아서 죽을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물을 뜨러 부엌에 가다가 미끄러져서 그대로 뇌진탕 같은 걸로 죽어버릴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너무 무서워.
그래서 그냥 자포자기하고 살기로 했다. 학교도 안 가버리고 그냥 이렇게 부모님 일이나 도와드리면서 살기로 했어. 그런데 나 몇 달 전부터 살고 싶어졌다. 너랑 한 약속 지키고 싶어서, 너랑 즐겁게 학교 다니면서 공부 하고 싶어서, 마음껏 뛰고 싶어서.
이 편지 둘이서 웃으면서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 점점 자신 없다. 요새 너무 무서워. 내가 봐 준 다른 사람들의 점괘가 하나 둘 맞을 때마다 내가 본 내 점도 맞아가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 네가 이 편지를 볼 때 난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까?
정말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야……. 약속도 못 지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가끔씩 나 보러 와주지 않을래? 그렇게 해주면 나 저 위에서도 편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항상 웃는 모습으로 네 옆에 있고 싶었는데. 정말 미안. 대학교 생활… 재미있겠지? 나보다 더 좋은 사람도 많을 테고. 하지만 잊혀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민재야, 내 소중한 친구. 너랑 함께한 몇 달 정말 즐거웠어. 저 위에 가서도 잊지 못 할 거야. 너무 슬퍼하지는 마. 그냥 내가 먼저 가는 것뿐이니까. 나중에 우리 만나면 꼭 인사하고 노는 거야. 알았지?
그럼 이만 줄일게. 공부 열심히 하고, 정말 고마워.
-유희-
새벽별
댓글 1
  • No Profile
    ㅡㅡ;; 04.11.13 04:29 댓글 수정 삭제
    감동부족입니다. 민재가 유희에게 끌릴만한 설득력 있는 요소가 있었음 했어요. 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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